E,AHRSS

이정훈

last modified: 2017-01-01 23:42:45 Contributors

Contents

1. 대한민국야구 선수
1.1. 이정훈(1963년생) -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1.1.1. 선수 시절
1.1.1.1. 연도별 성적
1.1.2. 지도자 시절
1.1.2.1. 2014 시즌
1.1.2.2. 평가
1.2. 이정훈(1977년생) - 전 넥센 히어로즈 소속의 야구선수
1.3. 이정훈(1975년생) - 현재 은퇴한 전 야구선수
1.4. 이정훈(1978년생 투수)
1.5. 이정훈(1978년생 내야수)
1.6. 이정훈(1991년생) - 현 기아 타이거즈 소속의 야구선수.
2.스타크래프트2 프로게이머 이정훈

1. 대한민국야구 선수

KBO 리그에는 이정훈이라는 이름의 선수가 모두 6명 있었다. 이 중 가장 성적이 빼어났고, 현재 은퇴한 이정훈 감독을 대표로 두고, 현역인 이정훈은 독립 항목으로 분리한다.

1.1. 이정훈(1963년생) -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1987년에 데뷔하여 빙그레 이글스 - 삼성 라이온즈 - OB 베어스에서 활동했던 전 프로야구 선수. 2013년부터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을 맡고 있다.

한화 이글스 No.70
이정훈(李正勳)
생년월일 1963년 8월 28일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대구상고-동아대학교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7년 빙그레 이글스 2차 1순위 지명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1987~1993)
한화 이글스(1994)
삼성 라이온즈(1995~1996)
OB 베어스(1997)
등번호 44번,10번(이상 빙그레~한화),7번,0번(이상 삼성),55번(OB)
지도자 경력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1999~2003)
한화 이글스 1군 주루코치(2004~2005)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2006)
LG 트윈스 2군 1루·외야코치(2007~2008)
북일고등학교 감독(2009~2012)
한화 이글스 2군 감독(2013~현재)

1987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신인
김건우(MBC 청룡)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이용철(MBC 청룡)[1]

1988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이광은(MBC 청룡)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김일권(태평양 돌핀스)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고원부(빙그레 이글스)

1990, 1991, 1992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김일권(태평양 돌핀스)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고원부(빙그레 이글스)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이호성(해태 타이거즈)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이호성(해태 타이거즈)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김응국(롯데 자이언츠)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김광림(쌍방울 레이더스)
전준호(롯데 자이언츠)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 등번호 10번(1989~1994)
김정태(1986~1987) 이정훈(1989~1994) 승권(1996~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0번(1996)
이정훈(1996) 황성관(1997~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1995)
김용국(1985~1993) 이정훈(1995) 김재걸(1996~2004)
OB 베어스 등번호 55번(1997)
장건희(1996) 이정훈(1997) 이혜천(1998)

1.1.1. 선수 시절

대구 출신이긴 했으나 당시에는 삼성이 1차 지명으로 강기웅, 류중일과 왼손투수인 장태수를 연달아 지명하는 바람에 2차 지명으로 밀리면서 빙그레 이글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2] 이때 나를 뽑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여 같은 대구 출신인 이강돈, 정길[3]과 함께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사실 당시 삼성 전력으로서는 타자보다 투수가 더 아쉬운 상황이었다. 특히 외야요원은 장효조-허규옥-장태수로 이어지는 날고 긴다는 쟁쟁한 멤버들로 포화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이정훈이 삼성에 입단했다면 신인왕은 고사하고 주전자리나 제대로 챙겼을지가 미지수. 실제로 이정훈이 신인이던 1987년은 삼성이 한국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한 팀 타율 3할을 기록하며 개나소나타자 전원이 거의 3할을 치던 막강한 타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투수쪽은 김일융이 트레이드로 일본에 복귀하는 통에 왼손투수의 공백을 메워야 할 상황. 게다가 그 전해 해태 타이거즈와의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투수력의 격차를 실감하면서 패했기 때문에, 좌완 장태수를 지명한 것은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단지 결과가 기대했던 대로 안 나온 것 뿐. 결과적으로는 이정훈의 근성을 과소평가한 삼성의 오판으로 귀결되었다.

1987년 22게임 연속 안타 기록을 수립하고 타율 0.335(3위), 안타 124개(1위)를 기록하면서 신인왕을 수상하였으며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그리고 근성 있는 플레이 스타일로 악바리란 별명과 더불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87년 데뷔부터 1992년까지 3할을 넘지 못한건 1990년(.291) 단 한 해 뿐일 정도로 꾸준했으며, 1991(.348) 1992(.360) 2년 연속으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다만 1991년은 김영덕 감독의 밀어주기[4]장효조(.347)와 같은 팀 장종훈(.345)을 근소한 차이로 제치고 얻은 타이틀이라 본의 아니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5] 1992 시즌에 자력으로 타율 .360을 찍으며 마음고생을 덜었다. 이정훈 이후로 2010~2011년에 이대호가 타격왕 2연패를 달성하기 까지 20년동안 타격왕을 2연패한 타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시절에 우승 경력은 없는데 빙그레에서 4번 준우승으로 1999년까지 콩라인이 되었던 선수. 1999년 한화 코치로 있으면서 우승하면서 탈퇴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1989년을 제외하고 5시즌 동안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1991년 개최된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6경기 모두 선발 출장하며 맹타를 휘둘러 한국 타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타율(.391)을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6] 이처럼 한때 국내 야구계를 대표하는 타자였으나, 1993년부터는 체력적 한계가 오면서 그럭저럭 2할대를 찍어야 했다.

커리어 전반 6시즌과 이후 5시즌의 기록이 같은 선수라고는 믿을수 없을 정도로 딴판인데, 이는 온갖 잔부상에도 특유의 근성으로 출전을 강행한 여파 때문. 속칭 대포주사로 불리는 데포메드롤을 진통을 위해 맞고 나섰으나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그의 선수생명을 갉아먹었다. '야구가 좋아' 라는 사이트에서 연재한 최훈의 레전드 카툰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로는 후배를 데리고 무리하게 연습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는데, 그 상황에서도 계속 타격 연습을 할 정도로 몸을 무리하다가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한국의 낙후된 스포츠 의료도 한몫했다. 당시 일본이나 미국의 의료 수준으로는 충분히 수술 이후에 재활을 하면 완치가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오로지 근성만으로 극복하려는 풍토로 수술 시기도 놓쳤고 본인도 이런 수술 방법이 있는지 은퇴 이후에 알았다고 한다. 한시대를 대표하는 교타자가 이렇게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170cm의 작은 체격에 비해서 단단한 체형과 파워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체격의 한계 탓에 부상이 많이 온 게 아닌가도 추정된다. 사실 170cm도 반올림으로 올린거고 실제 키는 168cm라는 얘기도 있다. 삼성에서 지명하지 않은 건 물론 타선이 충분히 좋았던 덕도 있지만 이정훈의 작은 체격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빙그레 시절 1990년 7월 31일 광주구장에서 한 관중이 난입을 해서 외야 수비를 보던 이정훈에게 시비를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MBC 재연프로 타임머신 에도 나온 내용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운동선수 상대로 맞시비를 건다는게 쉬운 일은 아닌데 취기도 있었고 키도 워낙 작았던 이정훈이 만만해보였는지도 모른다. 뭐 그냥 웃고 넘어간 해프닝 수준이지만.

1993년 시즌부터 성적이 급락했으며 1994년 부임한 강병철 감독은 이정훈을 비롯한 늙은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1994년 시즌 후 장정순과 묶여 정영규+정경훈과 2:2 트레이드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는데 1995년 시즌 후 부임한 백인천 감독은 강병철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정훈 강기웅 이종두 등의 늙은 선수들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1996년 시즌 후 영수+현영과 1:2 트레이드로 OB 베어스로 가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은퇴하였다. 고향팀인 삼성에서 활동하면서는 7번을 달은 적이 있으며(1995년 한 시즌만), 나중에 0번으로 바꿨을 때에는 최저 타율인 0.213를 기록했다. 1997년 마지막으로 OB에서 뛸 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친정 팀 한화 정민철노히트노런 경기에 출장하여 대기록의 희생양 중 한 명이 된 적도 있다.[7]

선동열 상대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특히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시리즈를 통틀어 선동열 상대로 9타수 5안타라는 흠좀무한 기록을 찍기도 했다. 선동열 역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는 타자로 이정훈을 꼽았었다. 아무리 유인구를 던져도 자신감있게 제 스윙을 가져간다나.

1.1.1.1.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7빙그레 이글스 100 370 .335
(3위)
124
(1위)
13 7
(2위)
4 34 56 20 45 .441 .405
(5위)
1988 96 366 .309 113 20
(5위)
3 4 34 69
(3위)
18 41 .413 .377
1989 51 198 .323 64 20 2 1 23 30 14 17 .460 .372
1990 114 402 .291 117 20 3 7 52 71
(4위)
22
(5위)
47 .408 .360
1991 111 379 .348
(1위)
132
(4위)
21 12
(1위)
17 55 81
(4위)
18 47 .602
(2위)
.417
(3위)
1992 111 369 .360
(1위)
133 17 2 25
(4위)
68 89 21 56 .621
(3위)
.435
(4위)
1993 41 111 .225 25 5 1 2 12 10 3 15 .342 .313
1994 한화 이글스 67 239 .247 59 7 2 2 22 35 13 27 .318 .32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5삼성 라이온즈 74 236 .250 59 9 0 1 10 33 12 18 .301 .302
1996 61 136 .213 29 4 2 1 10 16 3 20 .294 .31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OB 베어스 92 266 .237 63 16 3 2 33 24 7 23 .342 .296
통산 918 3072 .299 918 152 37 66 353 515 151 356 .437 .368

1.1.2. 지도자 시절

은퇴 이후에는 한화 이글스LG 트윈스의 코치로 일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한화 이글스에서 타격코치를 맡았으며, 2004년부터 2005년까지는 작전주루코치를 맡았다. 2006년에는 다시 타격코치로 활동하려는 본인의 요망에 따라 LG로 자리를 옮겼으나 자신을 영입한 이순철 감독이 시즌 개막 이후 두 달 만에 중도 경질되면서 입지가 애매해졌고 덩달아 쌍으로 까였다. 이듬해 김재박 감독이 영입되면서 2군에서 1루 및 외야 담당코치로 임명되었고, 2008년 2군 작전코치를 맡은 것을 마지막으로 LG와의 3시즌에 걸친 인연이 정리되었다.

LG 트윈스를 떠난 후 2009년부터는 북일고 감독을 맡게 되었다. 고교 감독으로 재임하며 선수들에게 근성을 강조하며 강훈련을 지시했으며, 한화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2009년 제 63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2009년 제39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대회 때는 아마추어 지도자 자격증 신청 기한을 놓쳐 관중석에서 작전을 지시했지만(...) 두 번 다 준우승까지 나아갔고, 벤치에서 제대로 지도한 봉황대기에선 우승했다.

2011년에는 내야수 길민세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8]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었던 북일고를 강팀의 반열에 다시금 올려놓으며 고교야구의 정점에 선 지도자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한화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덕이지 이정훈 감독의 순수한 능력이 아니라며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9] 하지만 이정훈 본인의 악바리 근성에 힘입은 강훈련 등도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절대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좋은 자원을 보유하고도 그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 못하는 팀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2012년 8월 한대화 감독이 중도 퇴진하면서 김성근과 함께 한화의 차기 감독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특히 한화와 연줄이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더 높게 점쳐졌으며, 29일 김성근 감독이 고양 원더스와의 2년 재계약을 하면서 최유력 후보가 되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의 감독으로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고 여러 국가의 대표팀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8월 31일의 첫 상대팀은 베네수엘라. 특히 한화의 차기 사령탑으로 자주 거론된 인물이기 때문에 한화 팬들을 비롯하여 여러 야구팬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 결과만 놓고 본다면 2-1로 이기긴 했다. 다만 서로가 팽팽한 투수전을 벌인 것이 아니라 12안타에 4사구 9개를 얻어냈음에도 2점밖에 얻어내지 못할 정도로 견제사, 주루사, 작전미스가 많이 발생했다. 윤형배가 3과 2/3이닝동안 무실점으로 막아내지 않았다면 질 수도 있었던 상황. 작전 미스뿐만 아니라 덕아웃에서의 표정변화와 리액션 또한 심했기 때문에 뭇 한화팬들은 한대화+이만수=이정훈이 아닌가 걱정하였다.

9월 6일 한일전이 있기 전 일본 팀이 압축 배트를 사용한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사실무근으로 밝혀졌고, 이후 2:4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야구팬들에게 입만 살았다는 비난을 당해야 했다.

9월 14일 언론에 "한화 감독을 맡고 싶다"라고 의사표명을 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는데 이 기사에서 그가 한 "선수들이 감독 눈치를 보면서 경기를 하면 안 된다. 감독도 삼진 당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선수를 노려봐서도 안 된다. 그런 팀은 좋은 경기를 할 수 없다"는 발언은 청소년야구선수권에서 보여준 행동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에 반대 여론이 한층 커지게 되었다.

결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을 5위로 마감함으로써 한화 감독 선임에서 멀어졌다는 풍문이 돌았고, 실제 한화의 새 감독은 김응용으로 결정되었으며, 이정훈은 2군 감독으로 내정되어 북일고등학교 감독직을 이강돈에게 넘겼다. 선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는 만큼 한화 이글스 2군에서 지도자 경험을 쌓은 뒤, 김응용이 물러날 때가 되면 차기 감독을 맡기려는 의사가 있는 듯하다. 2군 선수들도 다 죽었다 본격 한화지옥

2013 시즌 팀은 비록 3할대의 승률을 기록하며 1군과 마찬가지로 퓨처스 11개 구단 중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조정원, 박상규, 장운호, 엄태용 등 2군에서 육성되던 선수들이 1군에서 좋은 모습을 종종 보여주었고, 은퇴 기로에 있던 추승우, 이양기 등이 1군의 활력소 역할을 한 것으로 볼 때, 2군 감독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1.1.2.1. 2014 시즌

2014년에 들어 한화 이글스 2군이 파죽의 10연승을 기록하는 등 퓨처스의 절대 강자 상무에 이어 남부리그 2위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성장속도가 더디었던 이학준을 비롯한 조정원, 강경학, 김기현, 조영우 등 신진급 선수들이 1군에 올라와서 짧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고 있어 한화 이글스 갤러리 등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한용덕과 함께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들도 생겨나고 있다. 악동니뮤ㅠㅠ[10]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대활약 후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2군에서 너무 힘들어서 1군에서 죽어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2군에서 신인들을 잘 조련해 보내는 것만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네티즌이 만든 서산 2군 훈련의 실체



2014 시즌이 끝난 후 한화 프런트에 의해 한용덕과 함께 차기 감독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전부터 '칰무원' 문제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고 있고[11], 반대로 이정훈이나 한용덕을 지지하는 의견도 만만찮아서 한화 팬덤이 두쪽날 것 같을 정도로 반응이 엇갈리고 있었으나,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면서 모조리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U-21 대회 이후에야 신의 한 수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에는 1군 김성근, 2군 이정훈이라는 피할 곳 없는 지옥훈련 헬게이트가 열렸다. 어딜가나 공포의 외인구단급 훈련 미필자는 군대부터 가자

시즌 후 U-21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팀에서는 강경학, 엄태용, 장운호와 함께 참가한다.

1.1.2.2. 평가

타격코치로서의 평가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1군 타격코치로 시작하여 하위팀의 단골 레퍼토리 분위기 쇄신 명목으로 자행되는 코칭스태프 보직 변경 조치에 따라 2군에서 시즌을 마치는 경우가 잦았다. 한화가 2002, 2003 연속으로 팀타율 7위를 기록한 후 2004년부터는 작전주루코치로 아예 보직이 변경되었다. 2005년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면서 '이정훈 코치를 원래 보직으로 되돌리겠다'는 발언을 한 후 타격코치와 주루코치를 겸하게 하였으나, 새로 영입한 우경하 코치가 1군 타격코치로 임명되면서 이름뿐인 겸직이 되자 타격코치로 복귀를 희망한 그는 결국 다음해 LG행을 택한다.

선수 시절의 불같은 성격은 코치가 된 후에도 여전하여 몇 가지 에피소드를 남긴 바 있다. 2000년 4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경기에서 아웃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에게 폭언을 퍼부어 시즌 1호 퇴장을 기록하여 벌금 50만원을 물었다. 2003년 3월 26일 광주에서 열린 시범경기에서는 프로야구 창설 이래 역대 시범경기 최초 코칭스태프 퇴장을 기록하였는데, 판정을 두고 어필하는 과정에서 심판에게 욕설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 며칠 전 안병원이 선수, 코칭스태프 통틀어 역대 시범경기 최초로 퇴장을 당한 덕에 코칭스태프 퇴장 1호로 기록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2004년 7월 1일 대전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롯데 포수 최기문과 언쟁을 벌였고 최기문에게 이를 전해 들은 양상문 감독과 김응국 코치가 흥분하여 선수들끼리가 아니라 코칭스태프 간에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질 뻔 한 사건이 있었다. 5점 차로 앞선 롯데가 9회초에 희생번트를 댄 것을 두고 이정훈 코치가 공수교대 때 최기문을 갈군 것이 원인.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서의 팬들의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이것은 한화의 암울한 현실 때문에 선수들에 대한 질타가 큰 여론에 기반한 것이고, 남부리그 2위의 성적만으로는 아직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다만, 김성근 감독은 이정훈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U-21 대표팀을 이끌면서 쌍팔년도식 감독으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만전에서 임기준에게 6⅔이닝동안 무려 133구를 던지게 해놓고 낼 투수가 없다고 핑계를 댄적도 있으며, 경기중에 작전 실패를 하자 덕아웃에서 성질을 부리며 실패한 선수를 선수들 보는 앞에서 다그치는 등 유망주들을 이끌고 출전한 대표팀감독으로써의 모습이 아닌 시대에 뒤쳐진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1군 감독 안된게 천만 다행인듯. 1군 감독하시면 전임 코감독처럼 경기중에 포수를 불러다가 발로 까는걸 볼지도 감독님 팀 재건하기도 바쁜데, 내부승진 1순위라는 양반이 저 지경이니, 어찌 계도해야 할지...

1.2. 이정훈(1977년생) - 전 넥센 히어로즈 소속의 야구선수

1.3. 이정훈(1975년생) - 현재 은퇴한 전 야구선수

이름 이정훈
생년월일 1975년 11월 23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학력 장충고-홍익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8년 현대 유니콘스 2차 12라운드 지명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1998~2000)

장충고 - 홍익대를 나온 선수. 1999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에서 대타 요원으로만 뛰었다.

1.4. 이정훈(1978년생 투수)

이름 이정훈
생년월일 1978년 11월 8일
출신지 전라북도 전주시
학력 전주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7년 쌍방울 고졸우선지명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1997)

전주고 출신의 투수로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고졸우선지명으로 입단했으나 1년만에 은퇴했다.

1.5. 이정훈(1978년생 내야수)

이름 이정훈
생년월일 1978년 5월 3일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경북고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7년 해태 타이거즈 2차 10라운드 지명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1997~1998)

경북고 출신의 내야수로 1997년 해태에 2차 10라운드로 지명되어 입단했으나 2년만에 은퇴했다.

1.6. 이정훈(1991년생) - 현 기아 타이거즈 소속의 야구선수.

KIA 타이거즈 No.60
이정훈(李政勳)
생년월일 1991년 4월 27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학력 언북초-언북중-충암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10년 KIA 타이거즈 1차 8순위 지명
소속팀 KIA 타이거즈(2010~ )

KIA 타이거즈 등번호 35번(2010~2011)
임준혁(~2009) 이정훈(2010~2011) 임준혁(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60번(2012~2013,2014.7~12,2015~)
류재원(2011) 이정훈(2012~2013,2014,2015~)
KIA 타이거즈 등번호 103번(2014)
서용주(2013) 이정훈(2014)
KIA 타이거즈 등번호 03번(2015.1)
이정훈(2015.1.)

1991년 4월 27일생. 2010년 기아 타이거즈 1차 8라운드 62순위로 지명받아 선수생활을 하게 된다.

2012년 9월 15일 1군 첫 등판을 가졌다. ⅓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였다. 허나 이날 팀은 5:12로 대패.(...)

등번호 60번을 여러번이나 뺏겼지만 어찌어찌 금새 찾아온다

2. 스타크래프트2 프로게이머 이정훈


----
  • [1] KBS N 해설위원 맞다. 그런데 가끔 야구팬들이 중앙일보에 있었던 동명이인인 이용철 기자와 헛갈려 하는 경우가 있다. 조심하자.
  • [2] 그 해 2차지명 때 지난 시즌 최하위와 6위를 기록한 빙그레와 청보 핀토스가 번갈아 가며 1~4순위를 지명하게 되었는데 투수난으로 속을 끓이던 빙그레는 1순위로 군산상고 출신의 투수 동석을 지명했고 청보가 2순위로 이상훈(야생마 이상훈과는 동명이인)을 뽑자 그 다음으로 이정훈을 지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배성서 감독의 허허실실 작전으로 이룬 쾌거였다. 2차지명 직전에 청보의 박정삼 단장이 배성서와 노진호 빙그레 단장에게 "누굴 뽑을 거냐" 라고 묻자 배성서는 대번에 이동석이라고 얘기했고 그 다음에 노단장이 외야수 정상진이라고 하자 배성서는 "투수가 부족한 판에 투수를 더 뽑아야지 외야수는 필요없다" 라고 펄펄 뛰며 이정훈에겐 관심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낚인 박단장은 '그럼 우리도 2순위는 투수를 뽑은 뒤에 이정훈을 4번으로 찍어야지' 라고 안심했는데, 빙그레가 전체 3순위로 이정훈을 낼롬 낚아채자 청보는 완전 닭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청보 강태정 감독은 책상을 발로 차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다.
  • [3] 정길이강돈은 본래 삼성의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권을 양도하여 빙그레에 입단한 케이스다. 한편, 빙그레 초창기 시절에는 유독 대구 출신 선수들이 많았다. 삼성에 잉여 전력이 다른 팀에 비해 월등히 많았던데다가 빙그레가 창단될 때 인심 쓰듯이 삼성에서 자유계약선수로 많이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진호 빙그레 단장이 직전까지 삼성 구단 이사였던 것도 컸다. 유이 아버지 김성갑도 이러한 케이스. 다만 김성갑의 경우는 프로야구 선수 시절 처음에는 잠깐 삼성 유니폼을 입은 적이 있다. 첫 시즌을 보내고 전력보강 선수로 이적.
  • [4] 장효조는 볼넷으로 거르고 이정훈은 출전시키지 않았다. 장종훈은 홈런과 타점 신기록이 걸려있었던 관계로 계속 출전시켰다. 장종훈으로서는 평생에 유일하게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할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 [5] 하지만 장종훈의 경우에는 단일시즌 홈런과 타점 신기록이 걸려있던 터라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할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타율이 떨어지는 리크스를 감수하고 꾸준히 출장한 점은 있다.
  • [6] 이 대회에서는 국내에서 내로라는 타자들이 일본 투수들 공에 전혀 적응을 못하면서 빈타에 시달렸고, 특히 한대화는 13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 [7] 정민철은 이정훈이 빙그레 시절에 팀 고참으로서 유독 신경을 썼던 선수기도 했다. 하루는 정민철이 훈련 중 요령을 피우는 것 같자 이정훈이 자기 휴식시간을 포기하면서 "민철아 너 나랑 한 번 뛰자" 하고는 둘이 단내날때까지 런닝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미래에 악동님으로 불릴 분 답다.
  • [8]길민세는 넥센에 지명되어 입단했지만 또 문제를 일으켜서 방출되고 말았다.
  • [9] 일부에서는 전국의 유망주들을 싹쓸이하는 북일고를 한국 고교야구팀의 뉴욕 양키스라고도 한다.
  • [10] 선수 시절 별명 '악바리' + 감동님. 물론 찬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 [11] 사실 이정훈 감독이 2군에서 보여준게 많지만 다른 레전드급 코치인 이상군,강석천,송진우 등의 삽질이 이 무렵 악명이 높았고 과거 타격 코치 시절 실적이 좋지 못했던게 한 몫했다. 그 외에도 외야수출신 감독들의 실적도 백인천 정도를 빼면 모두 나쁜편이었으니 반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