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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last modified: 2018-06-05 17:27:24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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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성주군 성주 이씨 봉산재에 있는 이인임 초상화. 봉산재에는 성주 이씨가 배출한 명신들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어 이 중 일부는 '성주 이씨 영정'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스물 두 명의 초상화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중 초상화들을 분실해 버렸고 오늘날 남아 있는 초상화는 총 10명의 초상화이다. 물론 현대에 그려진 이인임의 이 초상화는 문화재에서 제외된 그림이지만, 분실된 초상화 중에 이인임의 초상화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李仁任 EE
(1312?[1]~1388)
고려 공민왕우왕 시대의 권문세족.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종계변무 사건
4. 창작물
4.1. 정도전(KBS)

1. 개요

본관은 성주, 충렬왕 때 명성을 떨치면서 가문을 세웠던 청백리 이조년[2]의 손자이다. 그때부터 개경의 지배층으로 자리잡았으며, 형 이인복의 경우 원나라과거에서 급제한 수재이자 공민왕 정권에서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는데 조력했던 명신이었다.[3]

2. 생애

권문세족 출신이라 벼슬생활도 과거가 아닌 음서로 시작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정치 감각이 뛰어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처음 맡은 벼슬인 전객시승은 대대로 고려의 유력한 호족 가문이었던 성주 이씨의 입장과 조부 이조년의 명성에 비해 그다지 높은 벼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인임은 금방 스스로의 힘으로 좌부승선으로 승진한다.

이후 홍건적의 1차 침입 때 공을 세우고, 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우면서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때 파견된 이인임의 직책은 서경존무사였고 당시 총책임자는 수문하시중 이암이었는데, 이암이 서경 앞까지 가서 군대의 지휘를 잘 하지 못하던 상황에[4] 이인임의 숙부인 이승경이 대신 파견되어 오면서 이인임도 함께 그 이름이 높아졌다.

이때 숙부인 이승경은 몽고에서 감찰어사를 하며 거듭 승진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고려에 귀국한 거물로 원나라에 가지 않고 두 해간 머물러 있던 참이었다. 홍건적 침입을 맞고도 인재가 없어 탈탈 털리던 공민왕은, 군무에 익숙한 그에게 부탁해 급히 고려 벼슬을 주고 군대를 지휘해달라고 부탁했다.[5] 이인임은 이때 숙부 이승경의 전공을 곁에서 도우면서 공신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과정중에 고려에서는 김용의 난이 일어나 공민왕이 암살당할 뻔 하기도 했으며[6] 공민왕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조년의 손자이며, 잠시 돌아왔음에도 고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충신 이승경의 조카였고, 무엇보다도 공민왕의 일이라면 어디든지 참여하여 공을 세우던 이인임은 젊어서는 분명 신임받을 수밖에 없는 신하였다. 상황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이인임보다 일찌기 더 돋보였던 것은 실은 형인 이인복이었다. 형인 이인복은 백이정에게 배워 주자학에 밝았으며, 음서로 등용된 동생 이인임과는 달리 문과 급제, 원나라 제과급제 등 문신으로서는 누구도 태클 걸 수 없는 번듯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7] 당연히 벼슬로도 승승장구 했으며 조일신의 난을 진압 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 성산군에까지 봉해지고 공민왕 대에도 간관을 거쳐 찬성사 겸 공신에 책록되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된다. 그는 이력부터 사상까지 이인임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행보가 비교되었다. 이인복은 공민왕에게 신돈을 멀리하도록 간하다가 파직되는 등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엄격한 성품이었다. 결국 공민왕의 모든 행보에 찬동하는 동생과는 갈등하게 된다.

이인임은 공신이 된 이후 원나라의 침공을 막는 데 참모격 역할을 하며 공을 세우기도 했으며, 공민왕이 신돈을 가까이했을 때는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신돈의 개혁정책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다.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세우고 토지개혁, 노비개혁을 혁신할 때 이인임은 문신 이춘부와 함께 최일선에서 소송을 담당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이인임은 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일에 나서고 있었으니 훗날 우왕 대에 온 고려의 땅을 긁어모은 행보와는 사뭇 대조되는 일이다. 이때 이인임이 도왔던 신돈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고 당연히 권문세족의 장남이자 명신인 이인복은 동생과 반목하게 되었다. 이인복이 이인임을 두고 집안을 망치리라 근심한 것은 사실 이인임이 젊은 마인드로 개혁정치에 참여했을 무렵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총사령관의 직위에 있으면서 이성계 같은 무장을 통솔하기도 했으며, 결국 좌시중을 거쳐 수문하시중에까지 오른다. 공민왕 생전 그는 공민왕이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하려하는 순간에는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 동녕부를 토벌했고, 신돈의 개혁정치 시절에는 백성들에게 땅을 돌려주는데 앞장서는 등 공민왕의 위험한 결단에도 늘 목숨을 내놓고 함께하였는데, 심지어 영전 건축 등 공민왕의 독선적이고 다소 그릇된 결단에도 반대하기보다는 찬성하였다. 이 행보는 나라의 충신보다는 한 사람의 심복다운 것이었고, 국가의 신하라기보다는 단지 왕의 사람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던 그였으므로 당연히 공민왕이 없어진 후, 이인임의 행보는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민왕 사후 이인임은 권신으로 변모한다. 공민왕에게서 우왕을 부탁받았음을 내세우며[8], 공민왕 사후 시해사건을 밝혀내고 공민왕의 어머니 공원왕후경복흥의 반대를 물리치고 우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 과정이 석연찮다는 견해도 있다. 이인임이 홍륜과 같은 명문세가 출신 자제위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설이다. 익비가 홍륜이 아니라 정말 공민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면 신돈과 연관된 모니노와 후견인인 이인임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으므로, 이인임이 시해의 배후였다는 주장이다.[9] 물론 철저히 야사로서 이인임이 혼자 일을 도모하고도 그때까지의 지위를 누리기엔 당시 고려 조정엔 쟁쟁한 명사가 많았고, 익비의 아이가 홍륜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공민왕이 황급히 홍륜을 살해하려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지점은 명사 조선열전에서 이인인(李仁人, 이인임의 오기로 보임)이 공민왕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정도전(드라마)는 이인임이 자제위를 충동질 해 공민왕을 차도살인했다는 과감한 각색을 보이고 있다.

즉위할 당시 우왕은 10세였기 때문에 공원왕후가 섭정을 맡았지만 공원왕후와 이성계 일파로서는 공민왕의 유지라는 강력한 명분을 가진 이인임을 물리치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었고, 공원왕후가 1380년에 사망한 후로는 우왕이 1386년에 이인임이 사직하기 전까지 거의 이인임에게 정권을 맡기다시피 했기 때문에 우왕은 거의 10년 가까이 이인임의 섭정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10]

우왕 시기에 명, 원과의 외교문제에서 이인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 정책을 추진하자 정몽주는 박상용, 김구용 등 10여 명과 상소하고 대간들은 이인임을 탄핵했다. 이때 신진사대부는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재개하려는 정책을 문제삼아 종국에는 그 정책을 추진한 이인임을 죽이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인임과 정면충돌한 정몽주의 정치적 행동은 철저한 좌절로 끝나고 만다. 박상충[11] 등이 옥고를 겪은 뒤 귀양 도중 장독이 올라 죽고 그 외 정몽주, 정도전을 비롯한 21명의 사대부들이 죽거나 유배당하였다.

몇년 후 성장해 친정할 준비를 시작한 우왕은 이인임의 독단과 부패에 지쳐 이인임을 몰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인임은 도리어 우왕과 우왕의 유모 장씨, 장씨와 통정하던 지윤 등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것을 사전에 알아채고 최영을 비롯 경복흥과 조정 중신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우왕을 좌절시켰다. 지윤과 그 일족은 물론 유모 장씨까지 처형되었고 이후 우왕은 정서적으로 의존할 곳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전까지는 우왕도 공원왕후의 말을 듣고 경연을 여는 등 친정할 때 바른 치세를 하려고 노력할 기미를 보였으나, 이후로는 완전히 포기해버려서 공원왕후 사후엔 오직 이인임에게만 의지하게 된다. 우왕은 이인임의 친척과 혼인한 뒤 그녀(1비 근비 이씨)와의 사이에서 창왕을 낳았고 종종 이인임의 사저에 들려 연회를 즐겼으며 이인임을 아버지라, 이인임의 처를 어머니라 부르며 절(...)을 했다. 결국 우왕은 신하인 이인임을 양아버지처럼 여겨 사실상 통치를 맡긴 걸 넘어 사적인 부분으로도 의지하는 등 왕으로서 위태로운 행보를 보이게 된다.

권력을 쥔 이인임은 최영을 비롯한 군부를 능란하게 조종하고, 왕실 인사들과 경복흥 등의 외척들을 견제, 약화시켜면서 독재적 정치를 펼쳤다. 이인임 집권 기간 동안 이성계는 이인임 일파인 지윤의 딸과 장남(훗날의 진안대군 이방우)의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지위와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후 이인임과 그 수하인 임견미 등은 전국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수탈하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봉건영주 수준의 토지노비를 보유했고, 이로 인해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특히 임견미는 짐승에 비견될 정도로 잔혹하고 악랄했으며, 이인임은 직접 '그는 질투가 심하고 음흉한 성품이다' 하면서도 끝까지 말재주를 아껴 가까운 심복으로 두었다.

또한 이인임은 명나라에 불안감을 느끼고 친원정책을 펴면서 외교문제를 일으키고 북원과 통교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내부에서 친명사대를 외치는 신진사대부들에게 탄핵을 받았으나, 정도전, 정몽주 등을 유배보내고, 염흥방은 자기 파로 회유하였다.[12]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고는 비었으나 수탈은 멈추지 않았다. 왜구 침탈에도 군대는 제대로 통솔되지 않은 채 원의 제도와 재정부족에서 비롯된 장군들의 사병화가 지속, 심화되고 있었다. 왜구는 최영과 이성계 등 장수들의 활약으로 물리칠 수 있었으나 나라는 이미 병들어 있었다.

우왕이 즉위한 후 십수 년간 권력을 누렸으나 1386년에 몸이 병들어 사직하였고, 이후 이인임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일파들의 수탈만이 기승을 부렸다. 염흥방 일파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관리 조반의 옥사사건이 일어나면서 예전부터 이인임 일당의 부패를 싫어하면서도 참던 최영이 폭발하여 이성계와 연합해 이인임의 잔당을 숙청하게 된다. 다만 최영의 서릿발 같은 처벌 하에서 임견미, 염흥방은 극형에 처해졌으나 와중에도 이인임은 목숨을 건져 경산부[13]로 유배가는 선에서 그쳤는데, 이때 최영이 사사로운 정에 못 이겨 이인임을 살려준 것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 이때 최영이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라고 건의해 결국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를 받아서 별 처벌도 없었다.[14] [15]

훗날 위화도 회군 후 갓 즉위한 창왕에게 조민수가 이인임을 복권시켜 이성계와 맞서도록 건의했으나 이미 이인임은 수명을 다해 6월 병으로 사망한 후였다. 조민수가 이인임을 불러들이려고 하는 이야기가 퍼지자 사람들은 국정이 문란해질 것을 우려했지만, 이미 이인임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이 죽이지 못하니 하늘이 대신해서 죽였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창왕은 이인임의 부고를 듣고 "평생 영예 속에 살았으니 그대는 유감이 없겠지만 난 이제 누굴 의지하면 좋은가?"라는 한심한 내용의 교지를 내렸고 사람들은 그 교지를 비웃었다.

이인임은 살아 생전 최영숙청하자는 자파의 주장을 무시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보았을 땐 사실상 보수파이며 여러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던 최영의 무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영과 이인임은 정치면에서는 제법 의견이 맞았으며 정무를 처리하면서는 충돌하는 일이 있었으나 사적으로는 악감정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임견미염흥방은 독자적으로 최영을 죽이고자 했었는데 이인임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고, 나중에 최영을 미리 죽지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결국 최영이 변심하고서야 이인임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족까지 주륙하는 가운데서도 최영은 끝내 이인임을 죽이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 셈이다.

친척으로 유명한 문장가였던 도은 이숭인이 있었으며, 조카로 조선 개국 후 성산군에 봉해지고 대제학, 영의정에 이른 이직, 조카사위로는 하륜[16]의 경우처럼 친척들을 통해 신흥 사대부 집안이나 이성계 집안과도 통혼하는 등 신진 세력과 연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7]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 흥안군 이제도 성주 이씨로 이인임의 친척이었다. 성주 이씨는 원래는 지방의 대형 호족으로 중앙정계에는 고려말 이장경 대에 떠오른 집안이었으나 고려가 길게 가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명성은 이어가지 못한다. 후손들이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인임의 후손은 조선에서 벼슬하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기 때문에 성주 이씨는 다시 지방의 토착세력으로 돌아갔으며 한참 동안 조선에서는 일부러 벼슬을 하지 않거나 조선에서 벼슬을 할 경우 성산 이씨로 성씨를 갈아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인임의 조카인 이직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하여 2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돕고 영의정까지 올랐으니 형제간 가족간에도 각각 의견이 맞지 않은 모양이다.

이인임은 이성계를 경계하기도 했다. 평소에 최영에게도 "이성계는 왕이 되려는 사람이다"라고 끊임없이 말했을 정도. 물론 이성계를 아꼈던 최영은 이인임이 자신과 이성계를 이간질시키려는 것으로 알고 한 귀로 흘러버렸지만 뒷날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야심을 드러내자 이 때 이르러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라고 탄식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노회한 정객답게 사람 보는 눈이 꽤 뛰어났던 모양이다. 아예 고려사 열전에 '자기 일당을 요직에 심기 위해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니 문객들이 그 밑에 가득 몰려들어 각자 자신이 가장 후대받는다고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인임은 일반적인 권문 세족들과는 달리 문무 모두에 식견이 있고 정치적 능력도 우수한 인물이었다. 공민왕 시해 직후의 정국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한편, 고려 말의 혼란기에 장기간 실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능력을 나라를 위해 쓴 게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고려는 계속 쇠퇴하게 된다. 이는 무능한 데다 인격에 결함까지 있었던 우왕과 결합하여 고려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3. 종계변무 사건

위화도 회군 이후, 공양왕이 즉위하자 이성계와는 정적관계이던 윤이, 이초는 명나라에 건너가 이성계를 무고한다.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이며, 공양왕과 이성계가 장차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이를 반대하던 이색, 조민수, 이림, 변안열 등 고려의 재상 19인이 살해 또는 유배될 것이라면서 이를 토벌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8] 이 사건은 당시에는 오히려 이성계 일파가 조선 개국에 반대할 만한 사람을 모조리 역모죄로 몰아 가두고 죽이는 것에 이용되었다. [19]

이때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이라고도 말을 해버린 것이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태조 3년이 되어서였다.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오기는 표면적으로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계오기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후 양국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측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변명의 글을 지어 사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보냈다. 그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 22대를 간략하게 기록했고, 태조 즉위의 정당한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이인임의 불법적인 행위를 상세히 알리는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태종 때 다시 한 번 주청문을 보내는데 또 한 번 태조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이인임과 같은 이씨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인임의 가계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추가로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는 명태조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만력회전 중수본에서 변명 사실을 부기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20]

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년간이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문제가 되었고 이 문제 때문에 조선에서는 근 200년 가까이 끊임없이 이를 고쳐달라고 명에 요구하고, 명은 안 된다고 거절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는데 이를 종계변무 사건이라고 한다. 이게 완전히 해결을 보게 된 건 선조대인 1584년에 이르러서였다. 그것도 명 태조실록은 태조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라 함부로 못 고치니 끝내는 대명회전만 고친 것. 200년간이나 골머리를 썩여 온 문제라 선조는 개정판을 명에서 가져오라고 명했고, 마침내 1588년 개정된 대명회전이 조선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한 사신단은 전원 공신이 되었다. 청나라 때 다른 기록이 발견되어 이를 수정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그마치 철종때 일.

4. 창작물

4.1. 정도전(KBS)

배우는 박영규.

대중적으로 듣보잡이였던 이인임을 일약 슈퍼 스타(?)로 만든 계기

박영규가 개그 캐릭터를 많이 연기하긴 했지만, 사극에선 상당히 진지한 역을 많이 맡는 편인데, 이번 역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인임은 국사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등 대중적인 역사 관련 서적에서 등장이 적어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은 편이었으나 본 드라마로 단숨에 인지도가 올라갔다.

대단히 카리스마 있고 수완이 훌륭한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역사 속의 이인임에 비해서는 단순하고 잔인무도하다(...)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인임의 공적 또한 있지만 그것은 공민왕 시절에 달성한 것이고, 우왕 시절에는 확실히 국정을 농단한 권신이자 간신이다. 때문에 공민왕 말기부터 시작되는 드라마 스토리 상 이인임이 악역으로 나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이인임(정도전) 항목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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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고려사 등의 정사에는 이인임의 연령이나 생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인임의 가문인 성주 이씨 가문 기록에서는 원나라 황경 원년(1312년)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문 기록이라 신뢰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지만, 형 이인복이 1308년생인 것을 감안하면 완전히 틀렸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 [2] 유명한 시조 다정가(이화에 월백하고~)를 짓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조년의 형제들의 이름은 괴악한 네이밍 센스를 보여주는데, 형제들 이름이 순서대로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다. (1)조년이면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우리 우주의 나이(약 138억년)보다도 훨씬 많다. 하지만 당시에는 십만을 억이라 했고, 백만을 조라 했다. 그래도 백 살은커녕 쉰을 넘기는 것도 오래 산 셈이었던 당시에는… 여담으로 이조년의 형인 이억년도 유학자이다.
  • [3] 이인복은 동생 이인임이 총명하나 부덕함을 보고 집안을 망치리라 근심했었다고 한다. 장남인 이인복은 무공이 혁혁하며 대쪽 같은 성미의 소유자로서 신돈을 멀리하라 간하다 파직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신돈의 개혁에 동참한 아우 이인임, 이인민과는 당연히 일찍부터 관계가 좋지 못했다.
  • [4] 문신 출신으로 도무지 출격을 하려 들지 않는데다 군기도 엉망이었다.
  • [5] 나중에 이승경은 고려 장수들이 전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울분이 일어 식음을 전폐했고, 이 일로 병이 나서 죽는다. 공민왕이 재상들을 만날 때마다 충신이라 칭찬하고 슬퍼하며 무려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이라는 호를 하사한다.
  • [6] 노국대장공주가 칼을 맞을 뻔 한 것도 이때다.
  • [7] 이장경이 중앙정계에 손을 뻗기 무섭게 그 아들 이조년 대에 아들 다섯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신기록을 가지고 있는 집안이었으므로 장남의 엘리트적 행보는 경외시 되는 것이었다.
  • [8] 그야말로 공민왕의 측근에서 산전수전 다 함께 헤쳐온 넘버원 신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득력을 가졌다.
  • [9] 다만 익비는 딸을 낳았다.
  • [10] 이인임이 정식으로 섭정을 한 걸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래도 한 명의 신하가 10년 이상 섭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한국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일이다.
  • [11] 조선 태종의 측근 박은의 아버지
  • [12] 한때 개혁적인 사대부였던 염흥방은 변절 후 임견미와 더불어 가장 악독하게 땅을 긁어모으고 국유지까지 강점하기에 이른다.
  • [13] 경산부는 성주, 즉 이인임의 본관이다.
  • [14] 최영은 그의 자식들을 살려준 것은 사실 이인임과 최영의 관계가 돈독하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윤의 제거, 우왕의 유모 장씨 축출, 천도 반대 등의 문제에 대부분 같은 입장을 가져왔고, 이인임과는 대립하면서도 같은 시대를 보낸 처지로서 목숨을 건지도록 사정해줄 만큼의 정이 있었다.
  • [15] 이인임이 물러나기 약 육 개월 전에 판삼사 자리를 놓고 이인임과 최영이 이성계를 두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최영이 판삼사 자리에 이성계를 앉히겠다고 말하니까 이인임은 이성계는 사람이 틀려먹었다고 했으며, 떠나면서도 이성계를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 [16]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이 하륜의 스승이었고, 이인복이 이인임 바로 아랫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하륜을 부부로 맺어주었다.
  • [17] 그러나 이인임과 이인복, 이인미는 제각각 생각이 달라 그다지 의견이 일치되는 가족관계였다고 할 수 없다.
  • [18] 단순히 윤이와 이초의 개인적인 책동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라, 공양왕 즉위 이후 정권에서 소외당한 이색 등 이성계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무고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 [19] 명나라 조정에서는 한바탕 논란이 일었으나, 이성계가 오히려 요동을 정벌하려던 왕에게 반기를 들고 회군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오히려 윤이와 이초를 의심하였고 무고임을 밝혀 귀양보냈다.
  • [20] 그러나 명의 입장에서도 태조의 유훈이 기록된 대명회전을 고작 소국의 요청 때문에 뜯어 고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