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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용

last modified: 2015-02-20 21:12:39 Contributors



이름 이을용 (李乙容 / Lee Eul-yong)
생년월일 1975년 9월 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강원도 태백시
포지션 미드필더/윙백
신체조건 176cm / 69kg
프로입단 1998년 부천 SK
소속팀 철도청(1995~1997)
부천 SK(1998~2002)
트라브존스포르(터키)(2002~2003)
FC 서울(2003~2004)
트라브존스포르(2004~2006)
FC 서울(2006~2008)
강원 FC(2008~2011)
스태프 커리어 강원 FC(2012~2014 / 코치)
청주대학교(2015~ / 코치)
국가대표 51경기 / 3골

을용타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현재 강원 FC 코치. 전성기 시절에는 괜찮은 지구력과 볼 키핑 능력, 그리고 정확한 킥을 주무기로 삼은 선수로, 국가대표팀에서는 프리킥을 대부분 떠맡다시피했다. 다만 축구 선수 생활 도중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서 고생을 꽤나 했던 선수다.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와 왼쪽 미드필더를 자주 맡는다. 왼쪽 풀백, 중앙 미드필더도 볼 수 있었고 국대에서도 이 포지션을 소화하곤 했다. 기본적으로 활동량과 킥이 한국 선수 기준으로 매우 뛰어났다. 여러 포지션을 소화가능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축구두뇌도 뛰어났으며 기술도 마찬가지로 뛰어난 편. 거기에 투쟁심을 겸비했으나 젊었을 적에는 이따금 묘한 반칙을 하기도 했고, 제법 빠른 편이었으나 신체적으로 강인한 편은 또 아니었다.

강릉의 축구 명문 강릉상고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가정 사정 등으로 결국 그만두고, 노가다판과 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다,[1] 1995년 철도청 축구단에 입단한다. [2] 이을용은 철도청 축구단에서 1년 8개월여를 뛰고서 상무로 입대한다.

상무 제대 후 1998년 부천 SK에 입단하면서[3] K리그 생활을 시작했다. 부천 SK의 윤정환-김기동-윤정춘-이을용이라는 황금 미드필더라인의 한 축을 맏으며, 좋은 활약을 펼치며 이름을 알리자 1999년에 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1999년 3월 28일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데뷔하였다. 당시 대표팀 감독은 허카우터 허정무 이후에도 꾸준히 대표팀에 발탁되어 활약하게 된다.

그가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해진 계기는 뭐니뭐니해도 2002 한/일 월드컵이었는데, 당시 미드필더로써 활약하던 이을용은 폴란드와의 조별 예선 경기에서 황선홍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했다[4]. 다만 당시 축구를 지켜보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다음 경기인 미국전에서 패널티킥을 실축했다는 것이 더 기억에 남아있다(...)[5]. 그러나 그 경기에서 후반 프리킥으로 안정환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패널티킥 실축 이후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6]. 터키와의 3, 4위전에서는 전반 11분 그림같은 프리킥 골로 홍명보의 실수로 인한 실점을 만회했다.[7][8]

Lee_Trabzonspor.jpg
[JPG image (Unknown)]


월드컵에서의 대활약으로 인해 단숨에 유럽 구단들의 주목을 받은 이을용은 당시 유럽 진출이 확실시 된 박지성, 송종국, 김남일, 이영표보다 먼저 터키트라브존스포르와 계약하여 유럽 리그에 진출하게 된다. 초기에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현지 적응 실패에다 부상까지 겹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부천 SK와 트라브존스포르 사이에 이적 분쟁으로 잡음이 끌어올랐으며, 결국 트라브존스포르로의 완전 이적이 무산되고, 이을용은 안양 LG 치타스로 이적한다.

2003년 동아시아컵에서 이을용은 을룡타라는 신조어를 만드는 사건을 일으킨다. 때는 12월 7일, 중국과의 경기에서 리이라는 선수가 이을용 선수가 이전에 부상당했던 부위를 집중적으로 태클하려 들러붙자 분노하여 오른손으로 머리를 가격했고 두 선수단이 부딛히는 사이에 퇴장당했다.

안양 LG 치타스가 연고지를 서울로 옮겨 FC 서울로 이름을 바꿨을 때에도 남아서 활약했다. 이후 2004년 트라브존스포르로 재이적하여 이번에는 지난 번 보다 좀더 괜찮은 활약을 펼쳤다. 허나 대표팀에서는 조봉래조 본프레레 감독의 전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탁되지 못하다가[9] 2005년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취임한 후 다시 발탁되며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골을 기록하고 독일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6년 FC 서울로 재이적하여 2008년까지 활약하며 팀의 2008년 준우승에 공헌하였으며, 터키 시절 인연을 맺었던 세뇰 귀네슈가 감독으로 취임하자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2009년 자신의 고향을 연고지로 하여 새롭게 창단된 강원 FC로 이적 후 베테랑이자 팀의 기둥으로 활약하였다.

2011년 강원의 부진 속에 주장을 맡고 있던 동현이 2군으로 내려가며 주장 자리를 승계했다. 창단 시즌인 2009년 이후 2번째 주장직 선임. 현재 유소년 축구 교실을 여는 등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듯 하다. 그리고 2011 시즌 잔여 경기 3경기를 남겨놓은 10월 4일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강원에서는 첫 시즌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두 번째 시즌에서는 후보로 밀리기도 하는 등 굴곡이 있었다. 세 번째 시즌인 마지막 시즌에서도 중앙 미드필더를 두 명이나 용병으로 영입하는 등 팀의 플랜에 없어 보였으나 처참한 경기력이란 현실에 직면하자 결국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지막 시즌의 모습을 보면 노련함, 수비력, 패스, 키핑, 드리블에선 군계일학이었으나, 활동량과 순발력, 스피드 등이 현저히 줄었고 그에 따라 빠른 역습에 대한 대처는 근본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좋은 킥이 있다고는 하지만 활동량과 스피드가 받쳐주지 않는 탓에 답답한 경기양상을 중거리슛으로 타개하기도 어려웠다. 은퇴가 임박한 선수가 다 그랬지만 양날의 검.

특히 팀을 리드해 줘야 될 고참이지만,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리 호전적인 스타일이 아니고 소리 치는 스타일도 아닌데다 활동량까지 떨어져 팀원들의 전투의욕을 고취시키기 어려웠다. 기왕에 물러나는 만큼 강원 FC로서는 스타일 변화의 기회로 삼았으면... 어쨌든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수고 많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 경기 보다 보면 중원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이을용이었다.

현재는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한 강원 FC에서 코치를 빙자한 코치 수업을 받고 있다.

2015년 1월 12일 청주대학교 축구부 코치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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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을용의 이런 경력 때문에 2002년 이후로는 강릉상고와 강릉농고에서 축구부로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이상향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2] 당시 철도청 감독이었던 이현창 현 이천 시민축구단 현 감독은 이을용의 축구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실업축구단에서 회의에 빠졌을 때 힘을 준 인물이 김승희 현 인천 코레일 감독이다. 특히 이현창 감독은 이을용이 울산대에서 적응을 못하고 뛰쳐나왔을 때 직접 찾아다니며 축구를 계속하게 했고, 혼자 살면서 고생하는 이을용에게 김치와 이불, 전기장판을 챙기기까지 했다. 또한 입대하기 전까지 이을용의 월급을 직접 관리한 뒤에 이을용이 입대할 때에 천만원 가까이 들어있는 통장을 주면서 군대에 보냈을 정도로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이을용은 이현창 감독이 아니었으면 축구선수 이을용은 없다고 본인이 말할 정도이고, 감독님이 아닌 아버지라고 말할 정도이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380&aid=0000000100
  • [3] 부천SK 드래프트 2순위로 입단하였다. 본인은 자신이 1순위가 아닌 2순위인게 자존심이 상했다고... 당시 부천 SK의 1순위 지명은 경근.
  • [4] 뿐만 아니라 기계인간(...)과 충돌로 회복중이던 이영표의 왼쪽 사이드도 잘 지켰다. 폴란드의 크로스를 수차례 무산시켰고, 한번은 고간(...)으로 상대의 슛을 방어해 내기도 했다. 당시 송재익의 '이을용 선수 큰일이예요, 아직 자식이 없어요.'...라던 해설이 압권이었다.(...) 다행히 심영화(...)는 피했지만, 미국전의 부진은 이날의 타격 때문일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 [5] 원래 페널티킥 담당키커 1순위는 박지성이였으나 박지성이 부상으로 전반 초반에 교체아웃당하자 2순위였던 이을용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였다. 여담으로 이때 이천수는 본인이 차려고 했는데 히딩크가 예정대로 이을용에게 차게 했다.
  • [6] 다만 스페인전에서는 아킨에게 경기 내내 뚫리며 수비적으로 고전했다.
  • [7] 당초 이을용은 이영표의 백업 선수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으나 이영표가 부상으로 1,2차전을 나오지 못하게 되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 [8] 참고로 이을용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1골 2도움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 대표팀 최다 공격 포인트이자, 역대 월드컵 중 단일 대회 최대 공격 포인트이다.
  • [9] 을룡타 사건이 원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을룡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