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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last modified: 2018-10-27 20:11:4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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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의 모습 늙은 후의 모습(1916년)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 1926년 동아일보 전면 기사, 이완용의 사망 2일 후

Contents

1. 개요
2. 오욕으로 가득 찬 생애
2.1. 을사늑약 이전까지의 삶
2.1.1. 독립협회 참여
2.2. 을사5적의 선봉
2.3. 고종 폐위
2.4. 정미7적의 필두
2.5. 이재명 의사의 암살미수
2.6. 다시 살아난 후 경술국치 전야까지
2.7. 경술국적 매국노의 말년
3. 이완용의 성품
4. 이완용에 대한 떡밥
5. 관련 어록
6. 기타

1. 개요

성명 이완용(李完用)
생일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부[1] 낙생면 백현리 (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2]
사망일 1926년 2월 12일, 일제강점기 조선(67세 7개월 5일)
분야 정치
주요 활동 외세에 빌붙어 이권을 누리다가 일제대한제국 국권 침탈에 적극 기여함
평가 매국노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이 새끼는 절대 사람이 아니다
한국사에 영원히 남을 매국노계의 최종 보스
날고 기는 간신들을 모두 버로우태우는 희대의 간신
총명한 사람이 욕심에 취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조선의 문신이자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젊어서는 촉망받는 인재였지만... 친미, 친러, 친일 코스를 차례로 밟다가 결국 친일파로 진로를 결정해 을사늑약, 고종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한 매국노계의 끝판왕이자 기회주의자의 전형적 인물[3]로서, 이제까지의 모든 간신들은 다 뛰어넘는 희대의 간신. 차라리 김자점, 위충현도 이완용 앞에서는 천사다. 똑똑한 놈이 사리사욕으로 나쁜 짓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예시이자 지금까지도 쭈욱 송병준과 함께 제일 유명한 친일파의 일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이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매국노로 대한제국을 일본앞장서서 팔아넘긴 최악, 최고, 최흉의 매국노이다. 심지어 죽기 전까지도 귀신같이 대세를 읽고 아들에게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4]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악명이 너무나 자자하여 매국노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이완용이라는 이름 하나만은 확실히 기억해낸다. 심지어 근현대사, 국사를 배울 때 을사오적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이완용 빼고 나머지를 잊는다. 게다가 을사오적 명단을 모두 암기했다가 까먹더라도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것 정도는 안 외워도 웬만한 국민들은 다 알기 때문에 이완용만 욕먹는 것에는 큰 차이는 없다. 학생들은 다만 이 사실을 배우면서 이완용이 얼마나 악랄한 친일파였나를 배울 뿐이다. 덕분에 송병준과 더불어서 주야장천 까이느라, 이 둘이 다른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가루가 되도록 까도 시원찮은 매국노들프렌드 실드가 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된 우봉 이씨 족보를 보면 족보에 이완용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삭제한 듯 빈 칸으로 남아있고 연필로 간단히 적혀있을 뿐 사실상 족보에 이름이 파였다. 결국 집안에서도 파문영구제명을 당한 셈이다. 이자의 행적을 보면 자업자득, 그래도 한참 싸다.

2. 오욕으로 가득 찬 생애

2.1. 을사늑약 이전까지의 삶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부(현 성남시)[5]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애비는 우봉 이씨 이석준(李奭俊,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애미는 신씨였다.[6] 원래 잔반이었지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양자여서 출세욕이 강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놈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잠성부원군 이공정의 후손이었다. 공정의 아들 이자의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조로 와서도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완용의 생가 15대조인 이길배가 태종 때 도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이다.[7] 16대조 이교(李喬)는 판서, 15대조 이방년(李芳年)은 밀직이며 14대조 (李淳)은 과거에 급제해 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성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였다. 생가의 11대조 이세명(李世銘)은 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간(李僴)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李義元)이 동지중추부사였고 8대조 이우(李寓)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관직을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으로 가난하였다. 이완용의 생가 직계 가문은 9대조 이래로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 우봉 이씨 가문 중에서도 가세가 가장 빈한한 편에 속했다. 따라서 놈의 애비 이호석은 겨우 선비의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188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고종이 축하연주를 하라고 하였다. (고종실록 1882년 11월 2일.) 세자를 가르치면서 순종과는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탄탄대로를 달리던 놈은 또다시 변신할 기회를 맞이하는데 국제업무를 담당할 신진관료를 교육하기 위해 고종이 영공원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헐버트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 영어를 배웠다. 놈은 조선인 중에서는 당시 몇 명 되지도 않는 영어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놈은 미국은 조선과 거리를 멀어 침입할 우려가 적고, 부국이니 덕을 볼 것이고, 종교지상주의 국가이니 야심이 적을거라 판단, 미국은 부강함이 천하제일이라는 당시 조선 분위기 속에 미국주재 공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는 청나라의 극심한 반대에도 무릅쓴 고종의 결단이었다.[8] 미국에서 2년 5개월간 주미 외교관으로 근무한 기간은, 놈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의 현실과 근대화된 서구열강의 모습을 보면서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을 피해 미국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한다. 이 사건을 생문 사건이라고 하는데 1895년 11월에 있었던 고종의 경복궁 탈출 미수 사건이다. 이범진이 주도하였고, 이완용, 이윤용, 윤치호, 민상호 등이 참여하였다. 목표는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 동원을 위해서 참여시킨 훈련대 대대장 이범래, 이진호가 이를 일본에 밀고해서 실패하였다. 이 사건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후 고종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데, 이는 이완용도 예외가 아니었다.[9] 결국 이 전략은 다음 시도인 아관파천에서 기어이 성공을 거둔다.

2.1.1. 독립협회 참여

이후 이완용은 참찬관으로 미국으로 다시 건너 갔다가 재차 트러블을 일으켜 미국 정권에 달라붙어 있기 어려워지자(출처필요) 미국의 반대세력인 친러파로 변신, 국내의 친미파 세력을 견제했다...는데, 이는 아관파천 탓이 더 크다. (국내의 친미파라는 것이 결국 서재필과 독립협회 위주이기 때문.) 쉽게 말해 이완용은 이때까지는 줏대보다 고종의 의중을 빨리 파악하여 세력확보를 노리는 근왕파였으며, 뒤의 독립협회 제명도 그런 행보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금의 정당처럼 대신들 간에 파벌이 있어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존속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이끌었다.[10]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으며, 기관지 독립신문에서도 매번 이완용을 칭송했다. 하지만 서구열강에 친숙하고 반러, 민권 행보를 보이는 독립협회의 수장이었던 만큼, 독립협회에 부정적인 주류 근왕파 대신들에게 밀려 권력을 누리지 못한다. 이완용에게 친러는 사실 몸에 맞는 옷이 아니었다.

결국 친러와 반러세력의 대립 사이에서 결국 1898년 3월 11일, 이완용은 전북찰사로 발령을 받고 좌천되었다. 고종이 끌어들인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강화에 대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반러여론이 커지자 독립협회에 속해있던 이완용도 정치적으로 힘을 잃은 것이다.[11] 그리고 관찰사로 부임한지 닷새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 공금횡령으로 파직위기를 맞고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되었다.

사실 독립협회에서의 제명과 좌천 근거는 이완용 자체가 무언가를 저지르기엔 너무 빠른 시간에 벌어졌다. 그러므로 이완용 자체가 양쪽의 세력다툼에서 실세를 했다고 봐야하는 것. 그러나 얼마 못가 윤치호 회장 하의 독립협회는 고종 황제와 정면 충돌하며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그 진공에서 이완용은 복귀하게 된다. 결국 이런 행보는 친고종 노선을 유지하면서 빚어진 일로, 미리 발을 뺀 걸지도 모른다(...)

여하간 독립협회의 엘리트 말고도, 학부대신 시절 조선에 무교육을 처음 제도화 하여 정착시킨 사람이기도 했으니… 나름대로는 친일 이전의 경력을 보자면 전형적인 (근왕파) 엘리트의 삶을 살았고는 할 수 있는데 이후의 행적으로 말짱 부질없는 약력이 되고 말았다(…).

2.2. 을사5적의 선봉

1890년대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친러 근왕파로 활동하던 이완용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새로운 실세를 찾아 다시 친일파로 변신한다.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 천성적으로 권력과 돈에 민감한 이 새끼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나라 팔아먹기에 나선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의 그의 행보는 을사조약 체결, 헤이그 밀사에 따른 고종 황제 퇴위, 군대 해산, 정미 칠조약 등으로 나눠진다.

자세한 사항은 각 조약 항목 등을 참고하자.

  • 1905년,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군 무력시위를 등에 업고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을 핑계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의 수뇌로 불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완용이 고종을 직접 협박한 것은 아니다. 당시 고종을 협박, 농락한 것은 궁내부 대신 재극이고, 이완용은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으니 첨삭 정도로 협상하자"라는 현실 논리로 고종[12]과 을사 오적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이었다.

    을사조약 과정을 설명한 이완용의 글을 보면 (조약 항목 참조)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 모조리 '학부대신과 같은 의견'이라며 물타기를 하는 장면이 잘 드러나있다. 이후에도 자신들은 오적이 아니며 어쩔 수 없이 총대를 맨 충신이며, 남들이 위선 떠는 것이란 식의 자기 변명을 앞장서서 한다(...) 참 양심도 없지. 각국에 파견된 대한제국의 주재 공사를 소환해야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완용.

2.3. 고종 폐위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하자 총리대신 이완용과 내각대신들은 고종에게 몰려가 물러나라고 협박한다.

이완용은 황제를 향해 을 빼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고함을 질렀다. 고종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 매천야록

이완용은 송병준과 함께 이토가 사주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 내각 회의에서 황제 퇴위를 결정했다. 전화선을 끊고 수라를 거부하는 고종을 협박해 대리청정의 답을 얻어낸 뒤 고종도 순종도 없는 자리에서 강제로 즉위식을 날치기 진행시켜버린다.

사실 그 전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 일원인 박제순[13]에게 넌지시 고종 퇴위를 제의하나, 의외로 별로 동조하지 않자 그를 물러나게 하고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앉힌 것이었다.

여하간 고종은 황제 대리를 주장하며 끝까지 버텼다. 고종이 응원을 위해 임명한 궁내부 대신 박영효마저도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 자리를 피했으나 이완용은 스스로를 궁내부 대신 서리에 임명하고(;;)[14] 그 일을 행했다. 그 직후 (20일) 메이지 덴노의 "순종 즉위" 축하 메시지가 오자 즉각 반응, (22일) 대리청정을 황제로 바꾸어버렸다.

2.4. 정미7적의 필두

  • 순종 즉위 직후, 24일 미7조약(한일 신협약)으로 내정까지 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안을 토씨 하나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황실 보호 따위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미7적.

  • 그해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된 한국군이 합류한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났을 때 이완용은 일본군 대장 하세가와를 매일 찾아가 의병토벌에 대해 논의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자리에서 '조선인 현병보조원 제도'를 계획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의병장 가 체포되었을 때, 허위를 처벌할 것을 순종한테 상소를 올린 것도 이완용이었다. 그래서 의병장 허위는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만다.

    순종 년간에 이완용은 총리대신을 해먹으면서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으로, 사돈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승녕부 총관(고종의 비서실장)은 처남 조민희, 아들 이항구는 승녕부의 시종을 시키는 등 인척 내각을 이룩했고, 황태제(영친왕) 책봉 문제에도 참여하여 콩고물을 챙겼다.

  •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사법권을 넘기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돈까지도 반대하면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내각 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치고 내각 총사퇴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자 그는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와 단독으로 조약(기유각서)에 서명해버렸다. 그리고 회의는 없다고 통보해 버린다. 이건 무슨(…)..

12월 4일에는 일진회의 한일합방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일진회의 계획보다도 한국에게 훨씬 불리했다.[15]

2.5. 이재명 의사의 암살미수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완용의 집은 민중들에 의해 불타버렸고 자신 또한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16]의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당시 현역 군인이었던 이재명의 습격을 받는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불행히도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 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17] 이재명 열사는 합병 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뤄졌던 외과 수술에 대한 기록은 몇 남아 있지 않은 중요한 의학사 자료로 인정된다. 동 시기의 다른 외과 수술 기록이 전부 파기된 데 비해 재판의 증거로 사용되었기에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술은 대한민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의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분들이 "한국 의학의 발전이 5년만 늦었어도……"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모 의대의 흉부외과 총론 시간 첫 수업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의업에 충실한 것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게도 한다."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흠좀무? #

또한 맹꽁이 서당에서도 경술국치 당시 이용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나는 네놈처럼 길거리에서 칼빵맞기 싫다디스한 장면도 나온다.

2.6. 다시 살아난 후 경술국치 전야까지

5월 30일 부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에 오른다. 군부 출신으로 강경파였던 그는 일방적으로 경찰권 회수를 통보했고, 내각은 데라우치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전에 무기력하게 통과시켜버렸다. 7월 23일, 한국 합병에 대한 세부사항 논의까지 마치고 데라우치는 입국했다. 이즈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이완용도 요양을 마치고 상경했다.

이완용은 8월 4일부로 비서 이인직("혈의 누" 작가)을 통해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아마도 송병준의 일진회 등에게 선수를 뺏기기 싫었던 모양.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라는 반응을 보냈다. 합병 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라면서 추가를 요구했는데, 황실 보호가 아닌 어디까지나 황실의 지지를 통한 자기 입지 강화를 위해서였다. 일본 입장에서도 황실이 고분고분한 것은 결코 나쁘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상황에서 나라는 무조건 뺏길 수 밖에 없는 상태였고, 이완용은 매국의 공과 함께 매국의 이미지를 전부 자기가 가지게 된다.

주저하는 이들을 데라우치에게 일러바쳐 압력을 행사하고,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동경으로 보내는 등(이용직은 이를 간파하고 가지는 않았다.) 갖은 수단을 써서 순종의 윤허를 받았다. 고종에게는 "신이 하지 않아도 송병준과 일진회가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완용이 물러 난 후 고종은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한 자는 바로 이완용 아니던가!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 말인가!"라고 통곡했다. 한때나마 그를 믿어주었던 주군에게까지 신임을 잃었던 것.

그리고 8월 22일, 이완용은 이용직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고 최후의 내각 회의를 열고는 한일합방조약을 통과시켰다. 이후 1주일 동안은 숨겼다가 8월 29일자로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된다.

이 때 나이 52세, 그는 그렇게 스스로 나라를 팔아 먹었다.

2.7. 경술국적 매국노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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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8월 4일자 매일신보. 이완용이 기고한 글로 순종의 이복동생, 왕세자 영친왕(이은)[18]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과의 강제결혼 결정을 '일선(日鮮) 영구의 친선'으로 미화했다.

강제 병탄이 이루어지자,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도 이자의 아이디어였으니, 1910년부터 1919년 사이의 헌병 경찰 제도는 사실상 이 자가 만든 것이었다. 물론 헌병보조원 제도는 정미의병 때부터 있었지만 이걸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것은 이완용의 짓이 맞다. 또 명목상의 총독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다.

3.1 운동 직전에 민족대표가 가담을 요청했으나 개념차게 거절하고는 조선총독부에 알리지 않았다.. 라는 떡밥이 있으나 신빙성은 거의 없다.

신빙성이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이, 3.1 운동 직후엔 "어리석은 조선인들"이란 내용으로 시작되는 경고문을 3번이나 발표했다. 내용도 가관인데 1차는 4월 5일 "황당한 유언에 속지 마라."였고, 4월 7일에 "돌이켜 자신을 구하라."라는 협박성 뻘글을 다시 썼다. 5월 29일, 3.1 운동이 가라앉자 조선은 일본의 통치 아래 복지가 증가했으며, 실력양성에 힘써야 한다는 최종 뻘글을 썼다. 이런데도 그가 민족대표를 할 뻔했다고? 당연하게도 다시 집이 잘 탔다.

이 뻘글 발표로 다음 해 후작으로 승급하였고 1921년에는 창덕궁을 일본 왕실 별궁으로 만들자고 본인 스스로 2번이나 건의 했다 무산되기도 했다. 그 이후 팔아 먹을 나라도, 국민도 없어지자 조용히 살다가 1926년, 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뒈졌다. 최후의 왕인 순종이 죽기 4개월 전이었다. 그의 업보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안락한 죽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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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 신문 1면에 이완용 사망소식을 대서특필로 다뤘다.)

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위후작이공지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뤄젔다.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천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드라마 각시탈에서도 그 장면이 잘 나오는데 결국 시신이 히로인에게 짱돌을 맞는다. 이에서 보듯 당시에도 지극히 당연하게도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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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으로 이완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동아일보는 위에 언급된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는 천벌을 받아야지"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가면 해당 기사 부분이 지워져 있는데, 이는 총독부의 검열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2월 14일자에 '본보압수'라는 제목 하에 "2월 13일 기사 중 당국(當局)의 기휘(忌諱, 금지령)에 저촉된 바가 있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 가면 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니 참조하자. 옛날 신문이라 한자가 좀 많다. 한자보다도 고문표현이 많은데, 첫 문단만 의역해보자면 "아무리 겹겹이 실드를 쳐도 저승사자의 칼빵과 몽둥이 찜질은 못 피했다"이다. 신문 발행일은 당시 일본의 연호인 다이쇼(大正)로 표기되어 있다.

그밖에도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에는 이틀 연속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짤막한 촌평을 달아두고 있다. 이는 네이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요즘말로 고인드립 수준이다.

  • 2월 12일 : 구문(口文 :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후작 이완용은, 작일(作日 : 어제) 황천객이 되엿다고, 지옥행하노라고 무던이 고달풀걸.

    = 한마디로 말해 이제 지옥으로 가니 고생길 시작. 우왕굳.

  • 2월 13일 : 구문 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엿스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쉽게 말해서 "염라국도 팔아먹을까봐" 걱정된다는 이야기.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이 일어났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는 양반이었고 이후에는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한 데다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관리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 1978년에 이완용의 증손자 석형은 파묘를 하고 화장했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으며 위치는 육군부사관학교에서 매우 가깝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 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완용의 관(정확히는 관뚜껑)은 당시 인부가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가져갔다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을 이완용의 손자뻘 친척이라고 상당 기간 오해받던[20]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비로 구입해 자택에서 불태워 버렸다고 전해진다. 결국 부관참시로 이완용의 무덤은 사라지고 관과 유해는 불타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매국노의 말로.[21][22]

직함하나는 더럽게도 많이 받아서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 조선사편찬위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 선만노몽(조선, 만주, 러시아, 몽골)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환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2009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완용의 이름이 당연히 그리고 당당히 들어가 있다.

이완용은 1910년대 토지, 임야 등 확인된 것만 여의도 면적에 약 2배에 해당하는 1300여 필지, 1천6백만㎡를 소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받은 토지를 대부분을 매각하여 현금화하였으나 총 규모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윤형은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1997년 7월 승소하였으며, 반환된 북아현동 일대의 토지는 당시 시가로 30여억원에 달하였다. 이윤형은 곧바로 이 토지를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으며, 놀랍게도 한 방송사의 추적 결과 이민은 이윤형 혼자 떠났으며 본인 이외의 국내에 남은 자손들은 궁핍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연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3. 이완용의 성품

일단 처세술에는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초기에는 그의 영민함을 감탄했던 선교사 겸 의사인 알렌도 후에 이러한 평을 남겼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즉, 머리는 잘 돌아갈지 몰라도 줏대라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인물이란 평. 좋게 평가해서 당시의 일본처럼 기계같이 매뉴얼에 따라 딱딱 행동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한마디로 말해 영혼이 없는 인간이란 소리므로 욕 맞다. 참고로 알렌은 고종을 어떻게 평가했냐 하면, 매천야록에는 "내가 구만 리에 사천 년의 역사를 봤지만 조선 황제 같은 인종은 처음 보는 인종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알렌은 조선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

나라를 판 것도 모자라 자신의 치부에도 열심이었다. 민영휘라고 해서 민씨척족 세도가문에서 권세를 누린 수구파 관료로 일제에 합병되고 난 이후에 악질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제시대 동안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인 작자를 제외하고 다음 위치로 갈 정도로 치부하여 조선에서 두번째 부자가 될 정도다. 당장 죽기 직전에 보유한 자산이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450억원 가량 된다. 그것도 물려 받은 것은 거의 없고 합방기념 은사금도 아닌 자신이 땅 투자해서 번 돈이었다. 즉, 부동산 투자 해서 부자됐다는 소리. 땅으로는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 2배 면적을 보유했으며, 집을 여러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한일 신협약 때 10만원, 합병 때 15만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다. 이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평방미터(3천평 남짓), 그의 땅의 1% 밖에 되지 못한다.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은 그를 가리켜 '마음이 바르고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정치가', '대한(大韓)의 몇 째 안 가는 재상',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한 인물'로 평했다고 하지만(……)[23]

4. 이완용에 대한 떡밥

  • 이완용의 행적에 대해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꾀한 인물이란 평가를 하는 자들이 있으나 한 마디로 말해서 헛소리이고, 여러 마디로 말해서 근거가 거의 없다.

    그 같은 주장의 증거로 자주 제시하는 것이, 당시 독립협회와 얽혔던 일인데, 이는 당시 조선 지식계층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지 이완용의 위치를 말해주는 대목은 아니다. 게다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완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보신에 신경 썼던 사람이므로, 그가 민족이나 대의를 위해 행동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 가끔씩은 "황실을 보호했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데, 위에서 보았듯이 결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단지 황실에게 조금이라도 환심을 사고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이 떡밥 때문에 명성황후(드라마)에서도 마치 그 시절에는 조선 왕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그는 고종 독살설의 가장 강력한 용의자이다.한마디로 황실보호는 헛소리다. 애초에 황실을 보호하는 인간이 황제 밥을 굶기고 전화선을 끊고 협박하면서 메이지 덴노한태 사죄하라는 소릴 하겠나... 이런 주장은 주로 고종을 까는 사람들이 이완용과 고종이 친했다는 소설을 써서 최대한 고종을 까려고 나오는 뻘소리다. 잘나가는 이웃집 사람 눈치를 봐서 집주인 끌어내서 집 뺏고 세간살이 뺏고 온갖 모욕 다 줘도 죽이지만 않으면 위하는 것이란 소린데 말도 안되지...

  • 이완용의 평판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아들 이승구[24]가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서 그걸 안 아들이 남 보기 부끄럽다고 자살한 거라는 소문까지 돌았다.[25] 하지만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

  • 순종때인 1908년, 이완용은 한국 근대사 최악의 매국노 답게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순종은 실권이 없었다. 그 때 복권된 대표적인 사람이 윤원형.
    다만, 복권자를 자세히 보면, 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이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한 사람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이 복권되긴 했다.
    원래 이러한 일을 저지른 이유가 이완용이 자기가 찔려서 간신들의 복권을 추진했는데 그 와중에 광해군간신으로 취급받고 인조반정때 처형된 정인홍이 복권되었다. 문제는 근현대로 오면서 정인홍조선을 구원한 위대한 세 사람 중의 1인으로 까지 취급되었고 인조암군으로 까이고 있으니 아이러니. 어쨌거나 당대 간신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임에는 맞다. 다만 그건 당대의 시선이고, 오늘날 정인홍을 간신으로 보거나, 숙종 대의 남인계 대신들이나, 영조 초반의 소론계 대신들까지 간신으로 취급하지는 않으니, 이 부분은 역사의 판단에 맡길 문제인 듯. 애당초 이 취급의 발단은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이었다.

  •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 어찌되었던 총장급 인물로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적혀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덕분에 성대는 훌리건들에게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 ㅋㅋㅋ'라고 테러당한다. 정작 성균관대에서도 게재는 할지언정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건만(…)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적으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고종 때 와서는 그냥 좀 어느정도 실력만 되면 대사성 타이틀만 붙여줬다고 봐야 할 듯. 실제 저 페이지로 들어가보면 고종대의 대사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26]

  • 80년대 동시대를 다룬 KBS 대하사극 독립문에서는 고 김진해씨가 이완용으로 열연했다. 역시 이 드라마에서는 매국노 시전을 적절히 보여주었다. 후대의 사극 명성황후에서는 충신으로 나오지만.

  • 이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대상으로 같은 집안인 것 뿐인 역사학자 이병도는 물론이고,이완용의 고향이 아닌데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전라도,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삼성그룹의 창시자 이병철 등이 있다. 누구는 저걸 트집잡아 특정 지역을 반역의 땅 운운하고, 누구는 특정 기업을 깎아내린다. 해당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인터넷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가 아니며 오히려 30촌이나 차이나는 사실상 성씨만 같은 남남이다. 그리고 이완용 후손 중에 이병철이란 사람이 있지만, 그 이병철과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별개의 인물이다. 애초에 본관 자체가 아예 다르다.

  • 배짱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곳에 두번떨어지는지는 더 드문 일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 이덕일은 이완용이 노론의 최후의 수장으로 노론 세력을 대표해서 나라를 팔았다는 희대의 개소리를 늘어놓지만 믿지 말자!

5. 관련 어록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폴란드 같은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라를 팔아먹었니?
- 1896년 7월, 이완용 <독립협회 강연>중 발언

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독립협회 강연 중 한 발언은 이완용이 인간사회를 약육강식사회로 바라보는 증거이기도 하다.

6. 기타

웃기는 일이지만, 일본어는 죽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과 대화할 때는 반드시 영어로 했다고 한다. 처음 육영공원에서 배운 영어는 형편없는 실력이라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 같이 간 이상재의 자조(반벙어리)를 면치 못했지만, 오랜 미국생활로 인해 그의 영어실력은 일취월장. 총독부의 인간들보다도 한 수 위였다고. 흠좀무. 때문에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그나마 할 줄 아는 일본인과 영어로 대화하며 일했다. 알고 있는 일본인 인맥도 넓지 않아서,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가 1906년 학부대신(일종의 교육부/교과부 장관)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칭찬했다.

근대 문물에 관심은 있었던 듯.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그렇게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27]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정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 쓰레기도 줄인 그는 효율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는 위업을 달성한 꼴이 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글씨는 꽤 잘 써서 당대의 축에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 앞서 언급했듯이 독립문 건립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도 이완용이었다. 하지만 행적 때문에 글씨의 수준과 관계없이 가격은 바닥을 긴다.

또한 재테크에도 뛰어나 조선 팔도 곳곳에 이완용의 사유지를 늘려갔다. 그가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400억 원이 넘는다고 하며 자기 재산의 3배를 늘렸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 어쩐다 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단 몇몇 후손들은 이에 반대하며 자신의 성을 바꿔가면서 반대하려는 세력도 있다.

중국에서도 매국노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중화민국 북경 정부 시절 양사이(梁士詒)라는 사람이 내각을 조직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이게 당시 말 많던 산동반도의 소유권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중국 사람들이 내부에서 반발이 심헀다. 당시 오패부(吳佩孚)[28]라고 그 당시 직예파(直隷派) 쪽 군벌이 이를 비난하면서 전보를 날리고 양사이를 과거 중국의 여러 매국노와 더불어 이완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욕을 날린다.

대략 내용이 다음과 같다고.

─ 양사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양사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하였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양사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29]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30]

저렇게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면 당대 중국 사람들이나 식자층도 이완용 - 나라 팔아 먹은 사람 이라고 인식이 되었고 이름도 유명했다는 이야기.[31]

이완용이 같은 친일파의 추천으로 하마터면 종묘에 모셔질(배향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이게 실현됐다면 종묘에서 여러 사람 뒷목을 잡았으리라(…)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우(李家完用). 그냥 이씨 가문의 완용이라는 이름이다. 그래도 매국노 주제에 자기 조선 이름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이다. 대한제국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건 이완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그의 과오를 덮어줄 수는 없다. 앞 항목에서 본 그의 성품 때문에 그의 행적을 덮어줄 수도 없다. 아돌프 히틀러 항목을 참조하자. 따지고 본다면 모든 후손들이 '의무로' 자기를 욕하게끔 배우도록 한 희대의 병크.국가가 지정한 100퍼센트 매국노이니 애국열사다 뭐다라고 포장하는 짓을 하면 그 즉시 매국노로 몰린다. 아니 그 전에 포장할 만한 건덕지도 없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하다 보니 다른 동명이인들의 삶도 완전히 망쳐버렸다. 즉 이 인간 때문에 이완용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내에서 언급만 해도 부정타는 단어의 상징이 돼버린 셈이다. 당장 이완용이란 이름 가진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이니(……)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건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식의 동명이인들이 까이는데 예를 들자면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도 독립전쟁이 끝난 지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자국내에서 까이기도 한다. 어찌 보면 이것도 악업에 추가해야 할지도?

여하간, 인간으로서는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갔다.

2011년 5월 20일 이완용에 대한 평전이 나왔다.(김윤희의 <이완용 평전>)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이 '이성'은 근대적 이성, 성찰이 결여된 도구적 이성, 합리적 이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접근은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읽힐 수 있다. 애시당초 이성적`합리적이라는 평가가 당위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사실 민족주의가 아직 활발하지 못한 시점이기도 했다. 본격적 민족의식 각성과 민족주의의 열망은 3.1 운동을 이후로 촉진된다. 다만 이완용의 여러 행적들, 민생에 대한 외면과 일제에 의한 민생고를 생각할 때 이완용이 옹호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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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문제에서도 신랄하게 까였다. 국사선생님의 분노[32]

2013년 1월 중순경 위키피디아 한국어 버전 이완용 항목에 이완용을 매국노로 평가한 부분을 삭제하고 조선을 근대화시킨 위인이라는 류의 내용을 추가한 지속적인 반달이 행해졌다. (정보없음 부분) 이후로도 잊혀질 때마다 특정인들에 의해 문서가 훼손되고 있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GTA경성에는 플레이 가능한 3 캐릭중 하나로 등장했지만[33] 게임 클래스와의 시너지가 겹쳐, 결코 좋게 그려지지 않았다.근데 배우와 젊은시절의 모습과 묘하게 비슷하다(...)
초장에는 권위를 악용해서 지나가던 일본 순사를 두들겨패질 않나, 기생집에서 기력 회복을 해 댄다. 염천교 거지패를 처리하라는 퀘스트를 받아 이동을 해야 하는데 조작법 실수로 김첨지의 인력거를 뺏어 직접 끌고 가는 신세가 되고, 전투에 들어가서 무기를 준비하는데 자꾸 삑사리가 나서 이상한 것(깻잎과 불로초)만 들다가힐링용 허브? 그 와중에 김춘삼의 낭심샷(…) 집중공격에 고자가 된다.
그 다음부터는 기생과 어울릴 수 없게되는 바람에 빡쳐[34] 악랄한 짓을 벌이다가 고자의 무서움을 보라구 등장한 각시탈에게나타났→다↗, 각시→탈↘! 총을 쏘며 저항하지만 쇠퉁소에 총알이 다 튕겨나가고, 가뜩이나 없는 곳을 계속 가격하는 이크에크샷(…)으로 응징당한다. 얼쑤 절쑤 그야말로 현세대 후손들까지 까는 SNL 코리아 작가의 깊은 생각

GTA 3.1절편에도 최종보스로 재등장하는데 플레이어케릭터인 독립운동가가 버튼 액션에 실패하자 마구 패지만, 시간을 넘어 등장한 윤형빈의 주먹에 한방에 뻗는다.

전북 부안군에는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은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는데, 그 이후에 이완용이 엄청난 짓거리들을 한지라, 광복 후 이 공덕비는 수차례 수난을 당했고, 본래 서있던 자리가 아닌 줄포면 면사수소 뒤편에 반파된 채로 보관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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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광주부(광주군)는 현재의 성남시, 하남시, 강동구, 잠실을 제외한 송파구강남구 등도 관할하고 있었다.
  • [2]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으로 곧 판교지역이다. 생가는 백현동 226-1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판교신도시가 개발되면서 같이 철거되었고, 현재 그 위치에는 백현8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상태다.
  • [3] 사실 상황에 따라 성향을 달리해왔기 때문에 극악의 기회주의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4] 전우용, 《오늘 역사가 말하다》
  • [5] 이완용의 고향에 대해선 약간 논란이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되는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분당구 백현동)이지만#, 역사학자 이병도는 이완용의 고향이 전라북도 익산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병도의 발언은 근거가 무덤이 전북 익산에 있다는 것 정도이며 자기도 전해들었다는 카더라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그리 높지 않다. 게다가 이완용과 전라도의 접점은 이완용의 양애비 이호준이 이완용을 입양한 후 전라도 찰사로 부임하여 몇 년을 그곳에서 지낼때 이완용이 종종 양부를 문안하러 갔었던 정도만이 있을 뿐이다.
  • [6]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8/200508040042.html
  • [7]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3페이지
  • [8] 당시 조선에서 이러한 행보는 엄청난 시도였다. 1880년대에 조선은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의 간섭으로 대외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활동한다는것은 매우 힘들었던 상황이었기 때문. 그런 상황에서 주미공사 설립하고 놈을 공사관으로 파견한것은 그만큼 고종이 이완용을 신뢰했던 유능한 관료였음을 말한다.
  • [9] 작가 송우혜는 이 사건의 주도자를 엄귀비로 보고 구국의 화신 엄비 운운한다. 그러다 잊혔다. 북한에서는 일단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과 이완용이 참여했다는 점을 들어 미제국주의자 대위 훈련대장 다이와 매국노 이완용, 윤치호가 작당한 고종 납치극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나 후자나(...)
  • [10] 회비도 가장 많이 냈다고 한다.
  • [11] 당시 러시아제국 공사관이었던 스페에르(베베르의 후임으로 부임)는 이완용을 어떻게든 쫓아낼려고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넣었다고 한다.
  • [12] 체결 전의 어전 회의에서는 이완용의 이 논리가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런 유유부단한 행보 때문에 을사육적 소리도 듣는다.
  • [13] 을사조약 시기 외무대신. 이후 참정대신 한규설이 항의표시로 물러나면서 참정대신을 맡게 된다. 을사조약 시기에도 초기엔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래봐야 매국노지만. 경술국적도 된다.
  • [14] 이는 이완용이 맡은 총리대신이 대신의 임명, 파면이 가능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고종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부여한 권한으로, 사실 을사조약 때도 참정대신 한규설이 을사 오적들을 파면시키려 했던 것도 이런 제도에서 근거하긴 한다. 하지만 한규설은 역으로 쫓겨났다(...)
  • [15] 일진회는 일본의 병합 계획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서, 마치 대영제국스코틀랜드처럼 독자적인 내각의회를 가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16] 여담으로 이 놈도 콩고(現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이다.
  • [17] 다만, 이재명의 의거로 중상을 입었던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로 말년에 죽을때까지 해수병을 앓았다.
  • [18] 사실 왕세제가 바른 호칭이지만 고종이 왕세자로 부를것을 고집했다. 물론 경술국치 전의 호칭은 황태자.
  • [19] 다만 사망원인을 보듯이 이재명 의사가 찌른 칼날이 평생 그를 옥죄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 [20] 이병도의 조부와 이완용의 항렬이 같아 손자뻘이란 거지 실상은 그냥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머나먼 친척이다. 촌수로 따지면 30여 촌 정도 될 거라고 하니.
  • [21] 다만 이에 대해 정지환 기자는 이병도가 자신의 실증주의를 져버린 행위라고 비판했다.
  • [22] 하지만 이병도의 이러한 행동은 역사학자로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또, 이병도의 전후 행보와 성향을 볼 때 단순히 이완용의 친일 행태에 대한 분노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완용의 흔적을 지우려는 행위로 읽을 수도 있다.
  • [23] 앞에도 밝혔지만 이완용은 당시 독립협회의 중심 간부였다. 독립협회에서 세운 독립문 현판을 쓴 사람도 바로 이완용이다.
  • [24] 협성회등 구한말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구국활동에 전념했다. 대표적인 견부호자의 예.
  • [25] 매천야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 [26] 평균적으로 보자면 고종 재위 15886일/대사성 344명=1인당 평균 46.18일 재직. 한 달 반 정도이다.
  • [27]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니고, 임금을 비롯한 중전, 대비급의 인물들이나 할 수 있었고, 실제 선조 대 서인 정철의 경우, 후궁이 이따위 짓을 한다고 대놓고 깠다가 역관광당한 예가 있다.
  • [28] 물론 오패부 역시 무슨 애국심에 불타는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당대의 평범한 군벌 중 하나로, 양사이를 비판한 이유는 양사이 내각이 봉천 군벌인 장작림계의 지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대개의 군벌들이 장제스의 북벌로 세력을 잃은 뒤에 친일적인 태도를 취한데 비해서 그는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서도 최소한 항일의식만큼은 있었던 것으로 과히 나쁘지는 않은 평가를 내리기는 한다.
  • [29] 북송시대 대신으로 금나라 병사가 개봉을 하자 포위화전을 주장하고 강왕을 인질로 가게 한 인물이다.
  • [30] '만주군벌 장작림' 中
  • [31] 당대 중국에서 일본 관련해서 조선 문제가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기도 했지만
  • [32] 허나 문제는 '애들이 욕 단어를 보고 뭘 배우겠냐', '이러니 애들이 욕을 하지'라고 되려 까이고 있다. 확실히 어떤 상황이던지 간에 학생들이 보는 시험지에다가 욕설단어를 직접적으로 써놓은 건 문제가 있다.
  • [33] 게임캐릭터와 플레이어 배우 모두 김민교다.
  • [34] 고자가 되기 언에는 맞을 때마다 사과하더니 스 미 마 셍 고자가 된 후에는 일본 순사들도 그를 적대한다. 조 또 마 떼 하지만 출동만 하고 잡지는 못하고내가 친일파인데 어쩔거야 권총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