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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last modified: 2019-03-21 01:12:13 Contributors

충무공 이순신
忠武公 李舜臣
이순신, 우성 作, 1953년
성명 이순신(李舜臣)
출생 1545년 음력 3월 8일
(율리우스력 4월 18일)[1]
사망 1598년 음력 11월 19일
(그레고리오력 12월 16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건천동
(현 서울시 중구 인현동 1가 31-2)
국적 조선
본관 덕수 이씨
시호 충무(忠武)
여해(汝諧)
기계(器溪), 덕암(德巖)
평가 성웅(聖雄)
비고 사후 영의정 추존
必生卽死必死卽生 필생즉사 필사즉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휘하 병사들과 무관들에게.

Contents

1. 소개
2. 이순신의 말
3. 그의 얼굴
4. 일대기
4.1. 태어나기 이전
4.2. 임진왜란 전야까지
4.3. 임진년의 맹활약
4.4. 계사년 이후
4.5. 어이없는 파직
4.6. 전설이 되다
4.7. 사후 조선에서의 평가
5. 이순신 연표
6. 이순신의 전투 목록
7. 사망에 관한 논란
8. 이순신의 전술
9. 이순신의 인격
10. 능력에 대한 저평가와 반박
11. 그밖의 이야깃거리
11.1. 이순신의 장검에 얽힌 이야기
11.2. 일본에서의 이순신
11.2.1. 한국과 일본 양국 인터넷상에서의 이순신 평가
11.2.1.1. 일본
11.2.1.2. 한국
12. 대중문화 속의 이순신
13. 관련 항목
13.1. 인물
13.2. 사건
13.3. 그 외

1. 소개

유명수군도독[2] 조선국 증[3]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4] 대광보국숭록대부[5] 의정부 영의정[6]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7] 덕풍부원군
(有明 水軍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豐府院君)
[8][9] 정헌대부[10]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겸 삼도수군통제사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兼 三道水軍統制使)
[11] 충무공이순신
(諡 忠武公李舜臣)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중 한 명[12][13]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성웅(聖雄)[14]
2개국 수군의 최고 계급 보유자 겸 영의정[15]

조선 중기의 무관이자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지휘관. 는 여해(汝諧)이며, 시호충무공(忠武公)이다. 순신이라는 이름은 태몽에서 할아버지가 이름으로 점지했던 순 임금의 신하라는 뜻에서 붙은 것이며,[16] 여해라는 자는 서경(書經)에서 순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면서 했던 말인 '가서 너는 화합시켜라(往哉汝諧)'와 우 임금에게 양위하면서 했던 말인 '오직 너라야 화평케 하리라(惟汝該)'에서 따온 것이고, 충무라는 시호는 나라의 수호에 큰 공훈을 세운 이에게 내리는 최고의 칭호로 촉한제갈량, 남송악비, 조선김시민 등도 이 시호를 받았다.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군신(軍神)이라는 평가가 손색없는 한반도 최고의 명장(28전 28승 0무 0패)이며, 성웅(聖雄)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위대한 인물이다. 인류사에 보기 드물게 이런 존칭들이 과장이 아닌 경우로 볼 수 있다. [17]'''

병법서에 나온 사항은 그냥 보면 당연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사항 처럼 보이나, 이를 실제로 현실에 적용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은 병법서에 나온 사항을 현실로 실현시켰다. 그래서 역사상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위대한 군인인 것이다.

굴하지 않는 정신력과 시대의 선두를 달린 탁월한 전략과 전술을 보였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함대의 건조와 훈련과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18] 나아가 개인과 나라의 온갖 내·외부적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의(義)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후대에 두고두고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이순신의 말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19]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즉 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 명량 해전을 개시하면서

此讎若除 死即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금일고결사 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마라.
 ─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사실 그가 집필한 난중일기 자체가 명언집

3. 그의 얼굴

정형모, 1978년.
경상남도 통영시 제승당에 있는 구군복 차림의 영정.하지만 밑에서 언급하듯이 실제얼굴은 아니며 상상에 의해 그려진 영정.
충청남도 아산시 신정호에 있는 동상.
1999년에 탄신 400주년 기념을 위해 세워졌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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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세종로 사거리(광화문)에 있는 동상. 1968년에 세워졌다.[21][22]

이밖에도 현충사에 있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사모관대 차림의 영정과 광화문 광장에 있는 동상이 그의 이미지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이순신의 영정은 모두 상상화로, 유성룡징비록에서 쓴 '용모가 단아하고 정갈하였다.(容貌雅飭)'는 묘사에 근거하여 그 이미지대로 그려져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증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유성룡의 이순신 묘사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무골이었음이 분명한[23] 김덕령에게도 같은 묘사를 한 것으로 미루어 저 표현이 실제 용모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홍우원, 남파집, 백호집과 같이 1600년 경에 쓰인 서적에서 한결같이 이순신의 용모를 무인답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세기 이후에 그려진 영정들은 지나칠 정도로 선비처럼 그렸다고 비판받는다.

이순신과 같은 해에 무과에 합격한 고상안(高尙顔)이 1594년 3월에 한산도에서 이순신의 얼굴을 직접 보고는 남긴 평가가 그의 문집인 태촌집에 전하며, 이순신의 사위의 배다른 동생인 윤휴는 이순신의 가솔들로부터 그의 용모를 전해들었는데 모두 이순신의 용모를 남성적인 무인의 모습으로 전하고 있다. 보다 후대의 사람인 홍우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을 팔척 장신에 팔도 길어 힘도 세고, 제비턱과 용의 수염과 범의 눈썹에 제후의 상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其言論術智 固是撥亂之才 而容不豐厚 相又褰唇 私心以爲非福將也
그 언론과 지모는 실로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생김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않고 관상도 입술이 뒤집혀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있는 장수가 아닌 듯했다.
 ─ 고상안의 태촌집
복이 없긴 없었다. 임금복이...
公長軀精勇 赤髭髥膽氣人也
공은 체구가 크고 용맹이 뛰어나며 붉은 수염에 담력 있는 사람이었다.
 ─ 윤휴의 백호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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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조선시대에 그려진 충무공의 영정,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고상안과 같은 동시대 인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이순신의 얼굴은 지금의 표준 영정과는 다소 거리가 멀고, 오히려 무장에 더 적합한 얼굴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저 위의 조선시대에 그려진 충무공 영정의 경우에는 제3공화국때 주로 그려진 영정과 달리 무장의 이미지가 강함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충사 소장 영정에 나와 있는 관복의 흉배는 위에 호랑이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파도무늬가 들어 있는데, 이런 문헌에도 없고 유물도 없다. 당시 이순신은 무관 2품으로서 호랑이 한 마리와 구름무늬로 된 흉배가 달린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고증이 정확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순신의 품계는 단순히 '무관 2품'이 아니라, 정2품 상계 정헌대부였다. 정2품은 문·무관 구별 없이 주는 품계였고, 벼슬로 치면 6조 판서에 버금가는 자리다. 또한 이순신은 사후 최종적으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이자, 의정부 영의정에 봉해졌으므로, 단순히 무관 2품에 해당하는 관복으로 그리는 것이 오히려 고증에 맞지 않다. 어차피 이순신은 생전에 영정에 나온 것과 같은 관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영정의 관복은 어디까지나 이순신 사후 추증된 의정부 영의정의 벼슬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 것이다.

다만 이순신이 활동한 16세기에는 관복의 목 부위가 깊게 파이지 않았고 소매가 현재의 영정처럼 지나치게 넓지도 않았다는 점은 지적할 만 하다. 또한 족대(발판)와 바닥 문양이 당대 양식과도 달랐다. 종합적으로 보면 현재 널리 알려진 영정 속의 이순신 복식은 3세기 뒤인 19세기 양식이며 정면을 바라보는 구도 또한 17세기 후반부터 볼 수 있는 영정의 화법을 따르고 있다. 숙종 이전까지의 관복 초상화는 우측면으로 몸을 살짝 튼 구도로 그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권오창 화백의 등 뒤로 미완의 역사적 사실에 보다 가깝게 그리는 충무공 영정이 보인다.

현재 국가표준영정 7점을 그린 전통인물화가이자 복식전문가인 권오창 화백이 자료를 수집하면서 충무공 국가표준영정의 잘못된 점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며 개인적으로 충무공 영정 작업을 틈틈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용모에 대해서는 그 역시 무장답지 않게 너무 선비처럼 그려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이상 용모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16세기 당시의 충무공 초상화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현충사를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모셔진 충무공 영정의 얼굴이 다 제각각인 상황에서 얼굴에 집착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그 대신 권 화백은 영정 속에 나타난 복식(服飾), 즉 옷과 그 장식품에 주목한다. 얼굴이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복식은 시대별로 특징이 다르고, 충실하게 고증하면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증정 중등조선역자에 등장한 이순신 초상

2013년 <증정 중등조선역사>라는 책자에서 이순신의 생전에 그렸다고 알려진 초상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잘 살펴보면 눈썹이나 눈매, 수염등, 전반적인 스타일이 완전한 무골로 묘사한 이 항목 위쪽의 영정과 꽤나 일치한다. 이 눈썹과 수염, 눈매는 좀 후에 그려진 영정들과도 상당히 비슷하다. 하긴 막강한 군법을 통해 병졸을 다스렸던 인물이 인자한 인상이면 좀 이상하다. (...) 깔끔하게 E를 시전할 독기가 있어야지 그래도 무골로 묘사한 영정들도 무인치곤 꽤나 선비와 같은 느낌이 들어가있는 걸 보면 유성룡의 묘사가 마냥 형식적인건 아니었는 듯. 그러니까 현대에 그려진 모습을 좀더 무인답게 바꾸면 된다. 한눈에 E를 시전할것 같은 느낌으로 #


위사진은 1958.8.15일 발행된 50환권으로 한면은 독립문이고 한면은 이순신동상.[24]과 거북선이다.#

이순신은 우리나라 화폐에 나타난 유일한 무인이다. 시간적으로만 따진다면 이순신은 이승만을 제외한 역대 모델 중 데뷔가 가장 빨랐다. 분신인 거북선은 1953년 10환, 100환,1000환권에, 이순신 동상은 1958년 50환권에 처음 모습을 보였다.
지금까지 이순신과 거북선이 우리 화폐에 나온 것은 10차례(지폐·동전 포함)나 된다. 1970년 발행한 첫 기념주화에도 이순신(100원화)과 거북선(5000원화)이 각각 등장한다.
보통 일반인들#은 1973년에 나온 500원 지폐가 처음인 줄 알고 박정희대통령의 배경으로 등장한 줄 알고 있지만, 보는 바와 같이 1953년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인으로서의 대중성과 위치가 확인되는 것이고 1958년 위인으로 처음 등장한것도 이승만 대통령 때로 지금 화폐의 다른 위인들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할 수 있다.##

4. 일대기

4.1. 태어나기 이전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중국의 4대 성제를 아들 이름으로 부르시다니...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25]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26] 이식 같은 유명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아들의 혼인잔치를 벌였다는 좋지 않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애초에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이면 신원[27]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된 이들을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 부르며 그것이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 중에서도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여겨졌고 재상에다가 왕실과 인척까지 맺게 되었다. 그 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여담으로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고로 위작인 '칭기즈 칸 어록'[28]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4.2. 임진왜란 전야까지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다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전 보성군수 방진(方辰)의 딸과 혼인하였고,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29]

28세 때에는 무과 별시에 응시했다가 승마 중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버드나무 가지로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 되던 1576년 2월이 되어서야 식년무과에 급제하여[30], 동년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장교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자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즉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는 뜻. 참고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일기 자체는 쓴 것이 있지만, 백의종군을 끝냄과 동시에 태워버린 것으로 표현했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서른여섯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이 전까지 종8품 이하였던 이순신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셈이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기지로 파악된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오동나무 사건[31]과 이 사건 이후 부임해 온 전라좌수사가 전임자인 서익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 감영의 도사(都事)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실제 근무 평점을 조목조목 들먹이고 타 진포와 비교하는 식으로 정면 논파해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는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어쨌든 서익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 셈이었고, 이순신은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 10월, 병마절도사 발포만호 시절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이 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 김우서의 모함으로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다. 김우서는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

1585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 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32] 전투 이후 군관 이운룡과 함께 자신의 첫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북변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패배한 자와는 다르다고 구분짓고 장형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33] 아래는 선조가 이일의 장계를 받고 나서 "녹둔도에서의 전투 결과는 일반적인 패배랑은 조금 다르지 않음?"이라며 두둔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달만에 시전부락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일설에는 조정에서 상급자인 이일을 처벌할 수 없어 대신 이순신을 처벌했다는 말도 있다. 쉽게 말해서 조정에서는 이일의 책임이지만 상급자 체면이 있으니 현장 책임자였던 이순신이 책임은 없지만 대신 희생하라는 등의 식으로 말이다. 이일이 정치인들과 연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연줄설이 설득력 있는 것도 지원요청을 한 현장 지휘관을 무시한 것부터가 직무 태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를 모르는 조정과 왕이 아닌 만큼 이는 전쟁 준비를 한다면서도 정치적 탐욕에 미쳐서 죄없는 사람을 부당하게 처벌해 자진해서 전쟁이나 전투 수행을 완전히 망친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34] 중요한 것은 이일이 이순신을 변호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순신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웠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 이일이 이끄는 400여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35]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뒤 낙향하였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발령은 극심한 파행을 보였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 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순신과 원균이 같이 천거되었다는 점. 그렇게 이순신과 원균은 같은 날 같이 같은 계급으로 진급후 보임되었는데 이순신은 전라도, 원균은 경상도에 각각 배치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원균의 진급을 가리기 위해 이순신을 이용했다는 의견도 있다[36]. 경력이나 전과는 이순신이 더 위인데도, 정작 부임지는 원균이 최고 요직인 경상우수사인 걸 감안하면 설득력이 없지 않다. 그나마 원균의 무과 급제가 더 빨랐다는 것 정도가 앞서지만.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6일(계미) 2번째기사
사간원이 전라 좌수사에 초수된 이순신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기사
간원이 초수된 이순신을 개차하고, 나주 목사 이경록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하였다.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함경도 근무당시에도 이일의 모함으로 처형당할 뻔한적이 있었으나, 형을 백의종군으로 낮춰서(실상은 무효화) 살려준 게 선조였다. 여기에 이순신이 원병요청을 거부한 증거자료를 가지고 당당히 맞선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이일은 이것 때문에 처형까지는 못했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 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 (조광조는 그 뒤 6개월만에 동지성균관사였던 종2품이 되었고 종2품은 삼도수군통제사의 품제와 같았다. 그 후 4개월 뒤 정2품인 사헌부 대사헌이 되는데 이순신 역시 1년 뒤인 1592년 한산도 해전을 계기로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간다).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다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 물론 권율도 만만치는 않았다. 46살에 과거에 급제해서 50살에 도원수가 되었다.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과 5개 전문 수군기지 소속 병력을 지휘 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37]도 이 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순신은 전란을 대비해서 거북선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전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4.3. 임진년의 맹활약

1592년 4월 13일 임진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5월4일 최초의 출격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켰다. 이것이 옥포해전이다. 옥포만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에서의 승전이었다[38] 옥포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Search & Destroy - 즉 수색섬멸전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2명.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전멸시키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 여기서 최초로 거북선이 투입됐다. 여기서 이순신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다. 6월 2일에 왜선들이 당포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고 당포로 향해 21척을 박살내고 당포에서 도망간 왜선들이 당항포로 도망갔다는 걸 알고 추격해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시키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깊은 전투였다. 이 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후퇴로 인한 유인후 함대 반전 및 포위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 여기 참고.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이 때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

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 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거짓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 대첩은 규모로만 따지면 국지전이었으나 그 결과는 임진왜란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보급로가 끊겼으며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서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 등 주요 곡창지대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지대가 온전히 남아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계통 또한 회복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산도 대첩 참고.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 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3차 출전으로 왜군의 수륙병진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물고기밥이 되자 경악한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성과를 단순히 보급차단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보급 차단은 보기에는 적 전투 병력 섬멸보단 그 비중이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몇백년 뒤,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전선 붕괴나 미국의 무기대여법 같이 해상 보급로는 그 유지에 따라 전선은 물론 전쟁의 흐름까지도 결정짓게 된다.

일본의 보급은 부산항으로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이송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기본 계획은 접수한 정복지에서의 현지 조달이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가다노 쓰기오나 기타지마 만지, 사토 가즈오 등 일본측 역사학자들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 교수는 당시 제대로 된 육로가 닦여 있지 않아 수레를 운용할 수도 없는 조선[39]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억지로라도 부산에서 조선의 각 전략적 요충지 및 주둔지까지 육로로 식량을 조달할 경우 이를 수송할 인원과 호위할 인원들이 대거 필요하고, 이들이 목적지까지 가면서 수송할 군량을 먹어 치우고(...) 빈 손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여 되려 본진에 돌아가야 하니 식량을 달라고 했을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40]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병장기도 없는데 군량 집어 던지면서 싸울 것도 아니고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적의 기본 전략 자체를 붕괴시켰음을 의미했다.

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척을 죄다 가라앉힌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 했다. 여담으로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이유도 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 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만호 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

4.4. 계사년 이후

계사년(1593년) 2월 6일에 조선 수군은 5차 출전을 하여 웅포에서 왜군을 7차례 공격해 왜선들을 격멸했으나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술로 전술 방향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7월 15일에는 전라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고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위한 터전을 개간했다.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직책에 없는 별정직으로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 충청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전체가 각 지휘관들의 갈등 없이 통제사 하나의 지휘를 따를 수 있는 직위였다. 현재로 치자면 해군 삼남작전사령관이나 해군 작전사령관급이라고 봐도 될 위치이다.

1594년에 6차 출전으로 당항포에서 다시 한번 왜선 30여척을 분멸하나, 담종인토패문을 받고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항의의 서한을 올린다. 금토패문과 평화 협상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난중일기》서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595년에는 아예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아달라고 상소까지 올려 보낼 정도로 둘의 사이는 험악해진다. 단 이순신은 자신을 비호한 류성룡, 이원익과 시시콜콜한 요구에도 모두 응한 충직한 부하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신들이나 무장들 또한 제법 거리를 두고 묘사했고, 구면일 경우엔 경멸감도 나타냈다는 면에서, 그 연장선으로 볼수도 있다. 특히 그는 장수 평가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서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무장은 별로 없다. 개중에는 나름 능력있는 장수도 있었지만 비교대상이 이순신이니... 대신 그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는 배로 엄격했다. 또한 명이나 왜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조선의 장군이 침략군의 장군에게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여준 각종 범죄는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둘사이의 영향인지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직된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이번엔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 수군을 괴롭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규모 징발, 토지 유실은 농업생산량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3년에 걸친 지독한 흉년으로 이어져 보급과 병력 유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다 가공할 역병까지 겹쳐 수천의 장졸들이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에 탈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은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삼도수군 17000여 명 中 사망자 1904명, 감염자 3759명. 도합 566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음을 밝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처벌하고 어떻게든 병역 자원 유지를 위해 애쓰는 한편 피난민, 유민들을 수습하고 둔전을 경작해서 보급을 자급자족하였다.


4.5. 어이없는 파직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1596)과 정유(1597)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논평

정유년(1597년)에 일본이중간첩인 요시라[41]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한양을 점령한 가토는 조선침공의 상징이었고, 선조는 가토의 머리가 절실했다. 선조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전력이었던 이순신에게 가토가 바다를 건너올 때 그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이 이중첩자한테서 넘어온 정보를 신뢰하지 못했고, 망망대해에서 적을 기다리는 것을 자살행위로 여겨 출정하지 않았다는 통설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이순신은 분명히 부산으로 출정했다. 다만 싸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유년의 부산포 진격은 권율이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다른 정탐꾼 등의 보고를 통해 작성한 장계에 근거한다. 권율의 장계에 따르면 1597년 2월 10일에 김응서가 동승한 63척의 전선이 부산포로 진격해 한바탕 무력시위를 했다. 왜군이 견내량 주변에 왜성을 쌓아 틀어막았다 어쩌니 하지만 왜군이 세운 안골왜성과 가덕왜성은 소규모의 성들로 조선 수군의 진격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할 수준이었다. 김응서의 보고에 따르면 부산 앞바다에 조선 함대가 정박하자 왜군 300여 명이 저항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나 별달리 충돌은 없었다.

날이 저물자 조선 수군은 절영도로 후퇴했는데 이중첩자로 알려진 요시라가 찾아와 가토가 조만간 부산에서 나와 바다로 싸우러 올 것이라는 정보를 주는데 앞서의 통설은 여기에 근거하는 것 같다. 이순신과 김응서는 의논 끝에 위험 부담이 크다고 판단, 12일에 회항을 시작했다. 회항 도중 가덕도에 정박했는데 가덕왜성의 왜군이 기습하여 병사 하나를 죽이고 5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몹시 열받은 이순신은 김응서 휘하의 육군 지원을 받아가며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공성전을 벌였고, 요시라가 직접 사정해 포로들을 전부 돌려받아 회항했다.[42]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과 맞부딫치는 사태를 막았고, 이순신 역시도 일부 함선만을 이끌고 왔기에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진을 뒤로 물렸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막후교섭에서 일본 수군이 진군하지 않을 방침임이 확인되고, 일본군의 규모가 당시 이순신이 이끈 일부의 함대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지나치게 많고 진이 갖춰져 있자 이순신은 작전을 포기하고 회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고의 정합성도 문제가 되었다. 도원수였던 권율은 김응서의 장계와 육군의 첩보가 큰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이는 조정의 의심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을 개연이 있다.

결국 조정은 이순신이 조정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하였고 원균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Wrong move bixch 서울로 압송된 후인 3월 4일 감옥에 투옥된 이순신은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은 한차례의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이때 압슬형을 받았다고도 하나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당시 실록에 나온 선조의 언행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등의 이러한 언행과, 이미 김덕령을 무고하게 때려죽인 전례로 비추어 볼 때, 고문의 강도에 대해 기록이 없다고는 하나 고신이 가벼웠다고는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많다. 때문에 그 전까진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던 이순신이 이 때의 후유증으로 이후 잔병치레가 잦아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백의종군 이전에도 이순신은 며칠동안 앓았다는 기록도 있고, 거기에다 이순신은 당시 적잖은 나이였으며 게다가 엄청난 주당. 설상가상으로 몇 년 동안이나 미칠듯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다. 심한 고신을 받지 않지 않았더라도 저 지경이면 누구든 몸 망가지기 십상이다. 때문에 건강 악화와 고신은 큰 상관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이 때 치명적일 만큼의 고신을 받았으면 그로부터 불과 몇 달 뒤에 그 명량 해전을 치를 수 있었겠느냐?는 말도 있으나[43] 고신과정이 잘 드러나있는 남이의 옥사를 살펴보면, 해답이 있다. 사극판타지에서 나오는 것처럼 무작위로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문답과정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복을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 곤장 20대~40대를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때문에 심한 고신이라고 해도 당장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44] 무엇보다도 고신의 목적은 죄를 자복하게 하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순신이 받은 고신으로 몸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이가 50대였다.아무튼 정탁이원익의 필사적인 만류로 고신은 한차례에 그쳤고, 4월 1일 28일간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풀려나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떠나 그곳 에서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 이 때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는 단순히 선조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했다고 보기엔 심한 언행을 한 것이 사실이다.[45]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기사를 참조하면, 윤두수는 평소에도 원균을 단순히 두둔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금에 둘도 없는 명장 이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평양성 지킨다고 호언장담하다가 털리질 않나(...), 제멋대로 장문포 해전을 기획하여 다 말아먹질 않나, 조정에서 이순신을 못마땅 해하는 선조에게 편승하여, 전시에는 지휘관을 바꾸면 안 되나 이순신은 반드시 체직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결국 이 사람도 칠천량 해전의 직접적인 주역이라 봐도 무리가 없다.[46]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칠천량 해전 이후의 언행인데, 선조실록에 의하면 칠천량 해전 이후 비보를 접한 조정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건 까놓고 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하기 싫으니 단일한 지휘관을 임관시키기를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왜 수군의 대병력에 각개격파 당하자는 소리나 진배 없다. 임란 초기에 조선 육군이 탈탈 털린 원인을 생각하면 이 사람이 과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 사람의 주장대로 했다면 조선 수군의 재기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서해와 제해권을 장악한 왜 수군은 수로를 통해 한양으로 아주 빠르게 진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4.6. 전설이 되다

7월 16일 원균의 지휘 아래 출격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다. '소멸'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실상은 원균의 용렬한 지휘에 기강이 해이해진 조선수군이 왜군의 기습을 받자 전부 육지나 바다로 도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원균을 옹호하는 분들은 "당시 조선군은 장비에 있어서 일본군보다 크게 뒤쳐지지 않았지만 이를 활용할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사들의 질이 낮아 사기를 담보하기 힘들었기에 이런 대규모 도주가 일어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장비활용에 대한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이다. 임진왜란 5년간 이순신이 지휘해서 벌인 해전만도 20회가 넘는데 운용교리가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는것도 마찬가지. 5년간 전쟁을 했던 군사들이면 이미 베테랑이다. 이런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생각해보자. 차라리 사자가 지휘하는 양떼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떼를 이겼다는 속담이 더 잘 들어맞는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라는것은 중요한거다.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은 300여척[47]의 함대가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는 다시 말해 조선 수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력이었다.[48] 단 한 번의 전투로 조선 수군의 전력 전체가 소멸한 것. 그나마 배설이 전함 10척을 수습해 진도로 퇴각했다.[49] 이 전함들은 이후 명량해전에 투입되는 전설의 12척 중 10척이었다. 또 이후에 비정상적인 조선 수군의 전투력 회복을 근거로 이 때 대부분의 조선 수군 함선들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도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패전 책임은 분명했다. 그 후 원균의 생사는 불명. 왜군에게 죽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인식이지만 전후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 처참한 패전으로 조선은 되찾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상실했다.

당황한 조정은 7월 23일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여담으로 이때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라는 교서를 내릴 정도로 저자세로 굴면서도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땐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50]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수군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통제사였다. 일전을 앞두고 배설은 달아났다.

9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선조의 뜻을 알리는데, 이는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어떠느냐고 물어본 것. 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싸우기를 결심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란[51] 전설의 대사로 대표되는 '상유십이' 장계. 남해와 서해 남쪽을 완전히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정부에서 권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싸우기를 결심한다.

9월 16일 이순신은 수습한 전함 13척(이후 1척이 더 보강되었다)과 어선 일부를 대동하고 명량에 출격했다. 이때 초반에 전투에 나선(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가늠했던) 왜군 함선만도 133척에 달할만큼 절망적이다 싶은 전투였으나, 이순신은 수많은 왜선을 격침하고 결국 승리하여 왜군이 제해권을 잃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왜선의 숫자는 난중일기의 133척, 그리고 격침한 왜선은 대략 31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 우선 왜군 함선이 133척이었다는 기록은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후대에 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500척까지 불어난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의 수치가 대단히 설득력이 크고, 일본쪽 기록과도 어느 정도 교차검증이 되는 수치이다.

    한편 31척을 격침하였다는 기록에 대해, 확실하게 격파된 배의 숫자만 기록했으며 실제로는 100여척을 격파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설득력이 낮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선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 모두 31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후방에 있었을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주살한 일이 100여척 격파의 근거로 들어지기도 하지만,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선봉에 선 장수이고, 애초에 일본 수군이 함대를 펼칠 때 지휘관이 후방에 위치한다는 것은 일반론에서 의거한 것으로, 검증된 사항이 아니다. 특히 세키부네로 구성된 함대 중 31척을 격파했다는 내용은 당시 일본 수군 전체의 1/4이 수장되었다는 이야기고, 이는 당연히 절대 적은 전과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교차검증의 기본적인 의미조차 모르는 주장이다. 자세한 건 명량 해전 참고. 게다가 100척 격파의 근거는 '구루치마 미치후사 주살'이 아니라, <고산공실록>에서 "도도 다카도라가 활에 맞아 손에 부상을 당했고 군감 모리 다카마사까지 세키부네에 타고 있다가 급히 빠른 소선으로 옮겨타 도망갔다가 위기에 빠졌으나, 다카도라 부하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위기를 벗어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군감이 선봉에 선 함대도 있는가? 군감은 정치장교가 아니다.

  • 또한 133척이라는 것도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지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내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라는 난중일기의 구절로 보아 이순신이 일단 적 함대와 접선하자마자 직접 교전에 들어간 것만 센 것일 확률이 높으며, 난중일기에는 명량해협에 접근한 왜선 숫자를 제대로 언급한 적이 없다. 그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온다'고만 했을 뿐, 선조실록에서도 130척은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온 것을 센 숫자라고 나와있지 전체 척수는 나와있지 않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왜선 전체의 숫자를 정확히 가늠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 한편으로, 교차검증 부분에서는 애초에 일본 문서에는 명량해전에 참전한 수군의 척수는 물론, 참전 다이묘도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외에는 참전했는지 참전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진법표에 나와있는 약 8000명의 일본수군을 토대로 60x133해서 비슷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수군이 과연 수부같은 비전투인원을 계산한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전투인원을 계산할 경우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수군만으로도 거진 1만에 가까운 군세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14일 탐망군관 임준영의 보고에서는 적선 200여척이 확인되고 있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행록의 333척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폄하하지만, 행록의 기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 이분이 일부러 과장하고 싶어서 과장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피난민의 증언을 충실하게 옮겼을 뿐이다. 더군다나, 500척 기술을 마치 정조대에 과장한 것처럼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조대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500척 이야기는 정조대의 사람들이 알아서 부풀린게 아니라 당시 피난민들의 증언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그대로 옮겨 썼을 뿐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해전 참전 전체 왜군 선박수가 133척이라고 분명히 단정지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명량 해전에서 왜선의 숫자를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당시 왜군의 규모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52]

세간에서는 보통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자진을 펼쳐 축차전술을 펼친 적을 막아냈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다르다. 당시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제외한 12척의 배들은 정오가 지날 때까지 대장선이 패배하는 대로 도망가기 위해 뒤에서 미적거리다, 거제 현령 안위가 먼저 대장선을 구원하러 가는 것을 보고 나머지 배들도 뒤늦게 전투에 동참하였다. 즉, 믿기지 않게도 이순신의 대장선은 단 한 척으로 전투의 중반부까지 왜군의 전선들을 무수히 폭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원인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그에 실린 화포를 비롯한 조선의 장사정 무기들의 압도적인 전투력, 그리고 훨씬 열세였던 왜군의 해전 무기체계(조총과 일본활, 칼)와 명량 주변의 지형 및 해류, 마지막으로 이들 요소를 더 굳건하게 만든 이순신의 전투 의지였다.

  • 역사스페셜에서는 명량의 좁은 해역과 급한 조류를 이용, 명량쪽에 배의 이동을 묶어두는 함정을 설치해 적의 연쇄충돌과 행동불능 상태를 이용한 뒤에 포격으로 쓸었다고도 하는 거 같지만, 그건 이 믿기지 않는 전적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이끌려 오히려 단견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우선 당시 왜군의 대선단을 빈약한 쇠사슬 같은 것으로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목선이라고 해도 화포를 포함한 각종 무기와 탑승자들의 수를 더하면 수백톤에 달하는 무게인데다, 이정도의 무게를 가진 움직이는 물체를 저지할 쇠사슬을 만드는건 현대 기술이라도 불가능하다.[53][54] 그리고 그런 데에 쓸 쇠사슬이 있었다면 차라리 화살이나 포환을 하나라도 더 만들었다는 게 정설. 이 철쇄설이 기록된 "호남절의록"이 있는데, 여기에 나온 철쇄설을 믿으려면 김억추가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해버렸다(...)는 기록도 믿어야한다. 더구나 이 책이 나온 건 1907년. 그런데 철쇄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인데, 이를 통해 이전부터 철쇄설이 해당 지방에 돌았던 것이 사실임은 알 수 있다. 일본학자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정한역일한사적에도 일본군의 명량 패전원인은 이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된 이유로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일부 시중 책이나 인터넷 문서 중에 '철쇄를 만들 철이 있었으면 그 철로 대포를 만들었겠지! 기록에도 이순신이 철이 부족해 아우성이시잖아!'하는 글이나 주장이 있으면 살포시 씹어버리자. 이순신이 부족하다고 한 쇠붙이는 동철, 즉 구리다.@

    사실 철쇄는 수로 차단용이 아니라 항만 방어용으로 널리 쓰이던 것이다. 당장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모두 항만 입구에 철쇄가 설치돼 있었고, 이중 전라좌수영 철쇄는 설치 포인트가 현재도 사적지로 남아 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용도로 널리 쓰여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도 투르크 함대를 막기 위해 철쇄를 설치하자 메메드 2세가 함대를 통째로 육로 운송하는 것으로 대응한 바 있다. 다만 이 경우 보통 부표와 부표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적에게도 뻔히 보이기 때문에 안 걸린다. 애초에 접근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인 것이다. 이런 항만방어용 철쇄가 우수영에도 설치돼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고, 우수영은 명량해협 서쪽 끄트머리에 있으므로 우수영 수비용 철쇄가 울돌목 차단용 철쇄로 오인된 것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해석과 연계해서 명량해전 자체의 결전장이 해협 한가운데가 아니라 우수영 앞바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이 견해는 이민웅 교수(해군사관학교 교수로 현역 해군 중령)의 저서 임진왜란 해전사(2004)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를 지지하는 학자는 사실상 없거나, 있더라도 소수이다. 사실은 애초에 관심 가진 학자도 별로 없지만. 이 주장이 지지를 못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울돌목이 지닌 최소한의 지형상의 유리함이 없다는 것이다. 울돌목은 그나마 소수로 길목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우수영 앞바다는 그런 이점도 없는 허허벌판이라서 이런 곳에서 싸웠다가는 수적열세로 인해 앞뒤로 포위되어 전멸당하기 알맞은 곳이다.

  • 2011년 4월에 나온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권에 좀 더 충공깽한 연구보고가 있다. 명량해전이 일어난 날의 조류를 연구한 것으로, 과거 1965년과 1977년에 각각 당시 기준으로 측정했던 조류 측정치와는 달리, 전투 초기엔 오히려 조류의 유리함을 받은 것은 일본군이고, 반대로 통상의 상선은 가장 불리한 시기에 전투 초반을 싸웠다고 한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류가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통제사의 상선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지세까지 거슬러가며 혼자 전반부 전투를 감당했다는 게 된다(...). 혹시 진짜로 무슨 능력이 있으셨던 게 아닐까

이순신 본인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으나, 어쨌든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은 칠천량 패전으로 궁지에 몰렸던 정유재란의 국면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다.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고 왜군의 서해 우회는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진출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철벽방어선 진주성[55]은 제 2차 진주성전투로 초토화 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초반 일본군은 영남 남부지방의 통로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해 호남을 싹쓸이 했으나, 직산에서 명군의 빠른 진군과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패퇴한 후[56] 충청도 일대에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이적인 승전보는 일본군의 뇌리에 서해를 장악당함으로서 보급을 차단당했던 임진년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고 일본군의 북진의지는 완전히 꺾인 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겨울철임에도 왜성들을 쌓는 등 수성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노량해전이 벌어질 때까지의 2년간 해전은 3회. 일본 수군은 철저하게 이순신을 피하려고 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수군 재건에 주력했다. 다행히 명량 직후에 승전 소식을 들은 칠천량의 패잔병과 피난민들, 흩어진 전선들이 고금도의 새 수군 수영에 속속들이 합류하여 조선 수군은 불과 한 달 사이에 본래의 위용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그 뒤 의 수군 제독인 진린이 합류하였는데, 그는 무능하고 탐욕스런 인물이었으나 이순신은 처음에는 명 수군의 행패를 핑계로 본진에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려는 척을 하여 그에게서 명 수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는 한편, 이후 진린에게 자신이 세운 공로를 전부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이 때문인가, 진린은 이순신에 대하여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는 경칭[57][58]으로 불렀다고 하며, 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여담으로, 진린은 1543년생으로 1545년생인 충무공보다 나이가 많다.)

소설가 김경진은 이 부분에 대하여 진린 혹은 다른 명나라 장수에 의하여 이순신의 전공이 명 신종 만력제에게 상주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으나, 명신종실록 및 명대의 역대 상주문 중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의문이 있다. 참고로 이순신이 명 신종실록에 보이는 것은 단 한 차례, 동정군이 명나라에 복귀한 1599년 전사한 이순신에 대해 포상을 명하는 만력제의 조칙에서일 뿐이다. 이때 전해진 물품이 아직도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신종 만력제가 이 당시를 전후해서 30년 동안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신하들도 만나지 않는 엽기적인 태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후에 정조실록에서 보면 확실히 명나라 직책으로도 수군도독으로 된걸 보면 올라가긴 한거 같은데 이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후 왜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명 함대와 합류해 철수하는 적 주력과 노량 앞바다에서 충돌한다. 뒤로는 조정과, 앞으로는 왜군과 싸워야 했던 고독한 영웅은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적선 2백 척이 격침되고 50척만이 도주했다.

도독(진린)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남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 이항복, <백사집>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고,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만나기 이전에 무능한데다 부패했고 조선군 때리기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질 포악한 명나라 도독이었던 진린은 그의 죽음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통곡했고, 그의 아들 보고는 말에서 내려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대부분의 명군과는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 하고 통곡하여 운구가 옮겨지는 데에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는 대목에서는 정말 눈물이 날 지경. 그야말로 한국 역사상 이 정도로 민초들의 경애를 받던 위인은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 그러나 전후 선조는 이순신을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했으나 선조 자신의 위치 때문에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하였다. 이는 주위가 모두 반대했음에도 선조 혼자 우겨서 이뤄낸 어이없는 성과(?). 그러나 당장 선조 사후부터 원균은 먹튀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는 조선의 성웅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왜곡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 이순신의 시호 '충무공'을 선조가 붙인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시호다. 정확히는 1643년(인조 21년)에 내려진 시호라서 공이 죽은 후 꽤 오래 뒤에 붙여진 셈.

일각에서는 이순신을 두고 '군사독재정권이 띄운 조작된 영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59] 이는 정말 근거 없는 소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군사독재정권이 파시즘적 대중동원을 위해서 이순신의 이미지를 이용했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일리가 있으며, 그 당시, 정확히는 유신정권의 성립 이후하성군선조의 말도 안되는 대우에도 국가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점을 부각시켜 독재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교육시켰다는 점은 그 당시 교사들이 증언하는 흑역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재정권의 필요에 의한 선전이 말 그대로 세계대전을 치룬 을지문덕사실 전공은 이쪽이 킹왕짱이다이나 기타 한국사의 쟁쟁한 영웅들을 제치고 이순신이 독보적인 찬양을 받는 원인도 되기에 씁쓸한 면이 있다.
물론 후세의 독재정권이 그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용하려 했는지와는 별개로 이순신의 역사적 공적 자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이순신은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영웅으로써 그 이미지가 독재정권에 의해 이용된 것이므로, '조작된 영웅'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시대만 해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충무공의 사당을 세운 경우도 있다. (이게 한두번이 아니다. 임란 직후 이순신 휘하에서 복무했던 병사들이 돈을 모아서 공적비를 세운 것부터 시작해 통영 백성들이 돈을 모아 사당을 세우기도 했고, 아예 통영 쪽으로 임관한 현감이 자비를 털어 공적비를 세운 것까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사당과 공적비는 10개 이상이며 대부분이 지금도 남아있다.) 순조 시대까지도 통영 백성들은 이순신의 기일에 모두 소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순신의 운구행렬 때 백성들의 통곡만 봐도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독재정권으로 '영웅성'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독재정권이 이순신의 '영웅성'을 이용한 것이다.

다만 조선 후기에 이순신 같은 명장이 조선왕조 장수들의 모범이 되다 보니 정말 사정이 어려워도 "이순신은 했는데 넌 왜 못해?!"라고 갈굼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중 한 예가 바로 박문수(...). 박문수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시절 중국 선박들이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숱하게 행하자 이를 단속하기 위해 함선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예산 지원을 조정에 건의했었다. 하지만 영조로부터 "이순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대를 만들었는데? 네가 알아서 해봐"라며 묵살당했다.통제사또가 미워집니다

이순신의 후손들은 너무 위대한 조상을 둔 죄(?)로 소질 적성 무시한 채 군대로 끌려가야 했다. 덕수 이씨는 이순신 이후 300여년간 조선 최고의 무반 명가로 자리잡았는데 무려 267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 문과 급제자는 단 1명 배출했다. 당장 이순신의 아들, 조카 다 하나같이 이순신의 밑에서 종군했고, 조카 이완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우다 여의치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자 이훈과 이신도 각각 이괄의 난, 정묘호란때 전사했다. 말 그대로 온 집안이 국가유공자인 셈. 이런 모습은 이후로도 계속되어서 이인좌의 난때 이순신의 후손이었던 5대손 충민공 이봉상(전사)은 처조부가 윤휴였던 이인좌가 거듭된 설득에도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역적에게 항복할 순 없다며 항거하다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윤휴가 등장한 이유는, 다름아닌 자기 서형의 반려자가 이순신의 서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9대손 이용희는 병인양요에 참전했다.[60] 또한 그 유명한 삼도수군통제사에도 역대 208명의 통제사 중 13명이 덕수 이씨 충무공파로 이는 전주 이씨, 전의 이씨 다음으로 많다.

후손들도 이런 내력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는데, 이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혼란스러워 했던 당시 운현국에 칩거해있던 흥선 대원군에게 이순신의 8대 후손인 이문영이 배알했는데 흥선대원군이 일본을 물리칠 방안을 물어보자 이문영은 거기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자신도 이렇게 못났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도 어찌 잘났겠는가 하고 대답했다고. 실제로 운요호 사건을 이끈 로다 기요타카가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도 이순신의 후손 중 12명이 독립운동을 하였고, 10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2013년 1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민화도 이순신의 후손이다. # 이민화는 김좌진의 부관으로 김좌진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외국 사이트에도 소개되어 있다. # 영어를 할 수 있다면 읽어보자. 이에 따르면 이순신은 어깨에 박힌 총알을 입으로 빨아내 뱉는 것만으로 일본군 함선 2척을 폭파시켰고 12척의 우주선(...)을 운용했다고 한다.

4.7. 사후 조선에서의 평가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도 있었으며 기율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중략)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후략)
ㅡ 《조선왕조실록》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

상께서 말씀하셨다." 때에는 비록 군사력이 강하였어도 외적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는데, 변란이 잇따르니 진실로 경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이원익이 말하였다."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ㅡ 《승정원일기》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이원익의 대화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후략)
이항복,《충민사기》

수군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ㅡ 《달천몽유록》, 1600년경 쓰여진 소설.[61]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류성룡,《징비록》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62]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무후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분뿐이다.
ㅡ 김육,『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거인(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ㆍ이 서평(李西平: 당나라 때의 명장 이성李晟)ㆍ악무목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휴,《백호전서》 중 통제사이충무공유사[63]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효종,《조선왕조실록》효종 11년/1659년 윤 3월 30일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숙종 《현충사 제문》

이순신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는데 옹진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아놔 이순신은 했는데 왜 너님은 못함?
ㅡ 영조,《조선왕조실록》영조 20년/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 근데 이건 박문수가 무능한 게 아니라 이순신이라서 가능한 것 같은데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그러니까 제 잘못이 아니라고요
박문수,《조선왕조실록》영조 26년/1750년 7월 3일

이 충무공이 나옴으로써 조선이 망하지 않았고 통제영이 완성됨으로써 왜구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불식되었다.
ㅡ 원중거,《승사록》[64]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정조,《홍재전서》[65]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문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정약용,《경세유표》
이렇듯 이순신은 사후에 이미 조선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왕이나 신하들도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수이자 중국의 인물들에게도 꿀리지 않는 인물로 칭송하고 있었다.

5. 이순신 연표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기재되어 있다.

  • 1545년(1세)
  • 1565년(21세) : 20살이 되는 해에 결혼.

  • 1573년(29세)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해서 탈락.

  • 1576년(32세)
    • 2월 :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생활을 시작하다.
    • 12월 :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햐다.

  • 1579년(35세)
    • 2월 : 종8품 한성 훈련원 봉사로 배직.
    • 10월 : 충청도 병마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병영으로 가다.

  • 1580년(36세)
    • 둘째형이었던 이요신이 죽었다.
    • 7월 : 전라좌수영 관내 발포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로 전근.

  • 1582년(38세)
    • 1월 : 군기경차관[66]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부당한 보고를 올려 발포수군만호직에서 파직했다.
    • 5월 : 종8품 훈련원봉사로 복직되었다.

  • 1583년(39세)
    • 7월 :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 8월 :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 10월 : 경원고을 건원보의 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 11월 15일 :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 1584년(40세)
    • 1월 :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다.

  • 1586년(42세) :
    • 1월 : 시복시 주부(종8품)가 되었다.
    • 2월 :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임명 되었다.
    • 8월 :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게 되었다.

  • 1587년(43세)
    • 1월 :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 10월 : 둔도 전투가 일어나다. 그리고 이일의 모함으로 백의종군되다.

  • 1588년(44세)
    • 1월 :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었다.
    • 6월 : 아산으로 내려가다.

  • 1589년(45세)
    • 1월 : 비변사에서 불차채용[67][68]을 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 2월 : 이광의 추천으로 전라도 감사 휘화 조방장(종4품)에 임명되다.
    • 11월 :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 12월 : 류성룡이 천거해서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으로 관직에 오르다.

  • 1590년(46세)
    • 7월 :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관원의 반대[69]로 개정되었다.
    • 8월 : 정2품 평안도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관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었다.

  • 1591년(47세)
    • 2월 13일 : 이억기, 이천, 양응지와 함께 이순신을 남해 요해지로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를 받았고 이전 처럼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4품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 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했다.

  • 1592년(48세)
  • 1593년(49세)
  • 1594년(50세)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6번째 출동.
    • 3월 4일 : 당항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29일 : 장문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1일 : 영등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4일 : 장문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597년(53세)
    • 2월 6일 :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 2월 10일 :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 2월 25일 : 통제사직에서 해임되다.
    • 2월 26일 : 후임 삼도 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 3월 4일 : 감옥에 투옥되다.
    • 4월 1일 : 옥중생활을 마치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 4월 11일 : 어머니가 별세하다.
    • 4월 13일 :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하다.
    • 7월 23일 :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 수군통제사에 복직하다.
    • 8월 18일 : 배설로 부터 12척의 전선을 인계받다.
    • 8월 28일 : 어란진에서 8척의 왜선과 조우, 교전끝에 승리를 거두다.
    • 8월 29일 :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 9월 2일 : 배설이 도주하다.
    • 9월 15일 :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받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 9월 16일 : 13척의 전선과 일부 어선을 동원해 울돌목에서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 1598년(54세)
    • 7월 19일 :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20일 : 명군과 합류해 장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7일 : 명군과 합류해 왜교성 전투를 진행하였으나 명군의 무리한 전술로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다.
    • 11월 19일 :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요격, 분멸하다. 이순신은 총탄에 맞아 전사하다.

  • 1604년
    •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의정에 추증되었다.

  • 1643년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 1793년

6. 이순신의 전투 목록

출전 년도 날짜
(음력)
해전 아군 피해 성과
1차 출전 1592년
(선조 24년)[70]
5월 7일 옥포 해전
(玉浦海戰)
1명 부상[71] 적선 26척 격침
합포 해전
(合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및 전멸
5월 8일 적진포 해전
(赤珍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11척 격침[72]
­ ­
2차 출전 5월 29일 사천 해전
(泗川海戰)
2명 부상[73] 적선 13척 격침 및 전멸
6월 2일 당포 해전
(唐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1척 격침 및 전멸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알 수 없음 적선 26척 격침
적지휘관 전멸
6월 7일 포 해전
(栗浦海戰)
알 수 없음[74]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 ­
3차 출전[75] 7월 8일 한산도 해전
(閑山島大捷)
19명 전사,
116명 부상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키자카 사베에,
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76]
7월 10일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42척 격침 및 전멸,
3960여명 전사
­ ­
4차 출전[77] 8월 29일 림포 해전
(長林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6척 격침
9월 1일 준구미 해전
(花樽龜尾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대포 해전
(多大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평포 해전
(西平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8척 격침
영도 해전
(絶影島海戰)
피해 없음 적선 9척 격침
초량목 해전 피해 없음 적선 4척 격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6명 전사,[78]
25명 부상,
일부 전선 파손
적선 128척 격침,
3800여명 전사[79]
­ ­
5차 출전 1593년
(선조 25년)
2월 10일 ~ 3월 6일 웅포 해전
(熊浦海戰)[80]
협선 4척 전복 적선 51척 격침,
와나 지카카쓰 전사,
2500명 전사
­ ­
6차 출전 5월 2일 2차 웅포 해전
(熊浦海戰)
피해 없음 추가바람
­ 1594년
(선조 26년)
­
7차 출전 3월 4일 2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31척 격침 및 전멸
­ ­
8차 출전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척 격침
10월 1일 영등포 해전
(永登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10월 4일 2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 ­
9차 출전 1597년
(선조 30년)
2월 10일 산포 전투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 ­
- 8월 27일 어란포해전
(於蘭浦海戰)
불명 불명[81]
9월 16일 명량 해전
(鳴梁海戰)
2명 전사로 기록
나머지 불명
적선 31척 격침,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타 노부토키 전사,
전사자 불명
1598년
(선조 31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折爾島海戰)
30여 명 추정[82] 적선 50여척 격침[83]
9월 20일 ~ 10월 7일 장도 해전/왜교성 전투
(獐島海戰/倭橋城 戰鬪)[84]
조선수군 130여명 사상,[85]
명나라 전선 30여선 침몰 및 파손,
명 수군 2000여명 전사
적선 30여척 격침,
11척 나포,
3000여명 사상
11월 19일 노량 해전
(露梁海戰)
조선수군 10명 전사,[86]
300여명 부상
명 수군 500여명 사상
적선 200여척 격침,
100여척 나포,
150여척 반파,[87]
2만 ~ 3만명의 사상사(추정치)

7. 사망에 관한 논란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7년 이상을 끌었던 전쟁이 끝났다. 그의 죽음이 너무도 극적이어서, 이에 대하여 자살의도설, 사망위장 후 은둔설 등등의 근거없는 낭설이 유포되고 있으나, 어떤 것도 근거는 없다. 특히 자살의도설에 대해서는 이순신의 행장에 "免胄(투구를 벗다)"란 표현이 있어, 이순신이 죽기 위해 일부러 갑옷을 벗고 전선에 나갔다는 추측이 난무했으나, 胄는 갑옷 전체가 아니라 투구만을 일컫는 말이며, 더욱이 "免胄"란 어휘 자체가 《좌전》을 출처로 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다"란 의미를 갖는 관용어임이 널리 알려지면서 부정적인 견해가 주류가 되었다. 물론 행장의 지은이가 두 가지 뜻을 모두 담아서 이 단어를 골랐을 수도 있겠으나...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서는 '사망위장 후 은둔설'을 채택하면서 '그것이 이순신에 대한 정당한 보답'이라고 하여 음모론 주장자들의 심정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 바 있다.

그런데 자살설은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도 상당히 널리 퍼져있긴 했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좌전에 나오는 관용구의 의미를 몰라서 자살설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순신 생존'에 대한 정보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결국 당대인들의 이순신에 대한 심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보니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중간에 부하장수인 가리포첨사 이영남이 전사하자 자신의 갑옷을 벗어 덮어주고 자신이 직접 북을 두드리며 지휘하는... 그러니까 눈에 확 띄는 모습으로 지휘를 하다가 저격당해 죽는다. 이도저도 아닌 뭔가 어중간한 느낌인데 PD가 자살설과 전사설을 절충한 것이라고 한다.근데 자살설을 납득하면 으쩐지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한 이영남에 대한 고인능욕이 돼버리는 것 같은데...[88]

분명히 선조가 당시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던 이순신을 견제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게다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이순신은 분명 부산포로 출정을 했으며 나름 선조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근데 선조는 그런 사실을 모른척 하고 이순신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을 했다. 당시에야 몰랐다 하더라도, 이순신이 추포되고 고문이 시작되기 전까지도 몰랐을까? 아무리 전시상황이라고는 하나 일국에 왕이라는 사람이 개인적인 정보망도 없었을까? 몰랐다 하더라도, 칠천량 해전 이후에도 이순신을 견제하는 걸 보면 선조의 병맛스러운 행동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선조의 자격지심과 민심의 중심이 되는 전쟁영웅들에 대한 피해망상이 극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초본 징비록에 의하면 선조는 원균의 패전 이후 그 외에 방법이 없다는걸 알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자기손으로 이순신을 재기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김명원과 이항복이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고 하자 말없이 회의석상을 나가버리고 남아 있던 대신들이 의결을 해서 통제사 복직이 결정된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이순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 암우한 군주인 선조의 존재를 자살설의 주요한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노량해전이 마지막 해전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랬던 것일 뿐, 아직 부산과 울산 등에서 일본군의 철수가 완료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즉 노량해전이 마지막 해전이어서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노량해전 자체도 명나라에서는 거부한 작전이었고, 진린이 참여한 것은 순전히 이순신과의 의리 때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자. 다만 진린이 전사한 등자룡과 함께 명나라 군선이 아니라 조선의 판옥선을 타고 출진했던 것은 의리 때문이 아니라, 명군 측의 전선이 워낙 막장(...)[89]이었던 탓이다.

거기다가 행록이나, 이순신 주변 인물들의 문집을 보면, "오늘 저 적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식의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도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쳐부수는 것을 주장했다. 이런 멘탈을 가진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게다가 "이 원수를 갚을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는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거꾸러 원수 갚기전엔 죽일생각 말라는 시위와도 같은 것이다. 즉, 이순신은 적보다 먼저 죽을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종종 자살설의 요소로 면사첩이 쓰이는데, 이것은 창작물과 실제 역사를 혼동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우선 소설 ""과 해당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가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내린 것처럼 묘사되는 장면이 있고, 원균명장설을 철저하게 부정했으며 고증에도 어느 정도 신경쓴 소설 《칼의 노래》에도 이 면사첩이 나오는데,문제는 여기서 선조가 면사첩을 내린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면사첩을 준 인물은 명나라 경리 양호가 초유문(적이나 적에게 붙었던 자들을 너그러운 조건으로 포용한다는 포고문)과 함께 면사첩을 보내었다.[90]

일단 면사첩 자체는 원래 조선왕조의 제도가 아니었다. 면사첩의 기록은 왕조실록에서 선조와 인조시기 딱 19건 정도만 나오고, 조선의 국제인 경국대전에서도 국제상 기록이 없다.[91]
여기서 집중적으로 면사첩이 나타난 선조 실록의 12건의 기록을 확인해보자. 면사첩을 처음 가져와서 배포한 인물은 명나라 장수인 황응양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독자적으로 조선에서 면사첩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인조 시기인데, 인조시기의 경우 면사첩이 발급된 이유가 이괄의 난이 직접적이기 때문에 임진, 정유년 경우와 동일시 할 수 없다.

면사첩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현재 이순신 역사 연구회와 같은 학술 단체에서는 면사첩 자체가 이순신에 대해서 부여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지방 장수에게 면사첩을 내려보내 적을 회유하게 한 적이 없으며,[92] 결정적으로 난중일기나 기타 징비록 등 조선장수나 문인들의 기록에서 조선군이 왜란 당시에 면사첩을 배포한 기록이 없다.

반면 선조 30년 12월 23일의 기록에서 선조가 말했듯이 이미 군문(軍門)과 경리(經理) 대인의 분부에 따라 면사첩(免死帖) 3만 장을 인출(印出)하였다는데서 면사첩 자체에 대한 권한은 조선군이나 정부가 가진 것이 아니라 명의 소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 경리들이 조선군의 일선 사령관에게 면사첩을 보낸 사례도 오직 하나 이순신에 대한 부여이며, 이순신이 이후에 이것을 배포했다든지 하는 내용이 행록이나 기타 문집, 야사 등지에서도 없기 때문에 하나의 특수적인 사례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93]

특히 이후 인조 시기에서 면사첩이 군율을 위반한 자에 대한 면사권(비변사 등록)까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양호가 내려보냈다고 해도 썩 이상할게 없는 맥락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순신이 면사첩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기를 통해 잘 드러난다.[94]

아무튼 선조가 이순신에 대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무능한 왕조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싸웠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다. 여러 사료에서 볼 때 이순신은 선비로서 국가에 충성하는 유교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 만약 당대의 누군가가 이순신을 두고 '왕을 혐오하고, 백성들을 위해 싸운다'라고 공식적으로 발언했다면 그것은 이순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 생존설.#도 만만찮게 퍼져있는데 그 근거로 이순신은 선조 임금과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위장하고 도주 후 은둔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한 근거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1613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는 800m 정도 이장되었다. 이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8. 이순신의 전술

요약하자면

  • 솔선수범과 공정한 신상필벌을 바탕으로한 부하들의 신뢰[95]
  • 규정에 철저한 엄격한 군율
  • 실전을 가정한 철저한 훈련
  • 정보수집과 정찰의 중시
  •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한 근대적 함대전 사상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벽력같이 적선을 분멸하는 전략을 사용하곤 했다. 다만, 드물잖게 보이는 정자전술과 학익진의 연관성 문제는 사실무근이다. 이는 해군 전술과 무기체계에 대한 기본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한 착각이다. 이순신의 함대전술이 그 시대로부터 수백 년 앞선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자전술과 연계시킬 이유와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조선 수군 수준의 함포 사거리 가지고 정자전술을 시도한다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딱 둘로 쪼개졌던 프랑스-스페인 연합해군 꼴이 날 수도 있다. 당시에도 횡대로 늘어선 프랑스 연합함대를 영국 해군이 종대로 들이쳤다. 정자전술에 의미가 생긴 것은 함포 사거리가 5km를 넘어선 시대, 즉 19세기 후반 이후였다.

어쨌든 조선 수군은 당시 아시아권에서 널리 쓰이던 해전 전술보다 한 단계 이상 발전한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압도했는데, 이에는 이순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 이전의 해전 전술 관련 기록들에서는 이처럼 화력을 중시한 경향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해전에서 불패의 전적을 세운 인물로 싸워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이길 수 있는 작전과 전장만을 택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적의 피해를 높이는 전술을 썼다.

김탁환을 비롯한 기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라는 이유로 이순신을 까곤 하는데그럼 지는 전장을 택하라 이거냐, 사실 저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는 말은 지휘관에게 있어서 최고의 칭찬이자 명장이 되기 위한 필수요소이다. 게다가 승리하기 거의 불가능했던 명량 해전에서 승리했으니 저 주장은 의미가 없다. 이순신은 손자병법에서 가장 큰 승리 다음으로 "아군 피해를 최소화 하고 적군을 물리치는 가장 이상적 논리를 따랐을 뿐"이고 어느 전투나 전장에서도 안전하고 승리가 보장이 되는 전투는 없을 뿐더러 전투 개시가 되면 무조건 이길려는 작전을 펼지지 않는가? 반대로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택했다면"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스스로의 무식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소리다. 원균하고 연대를 했을때도 이순신은 원균의 제안한 작전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휘관이자 장군이라는 직책이 있는 자가 병법이나 전술, 전략을 모르고 부하와 병사들은 무의미하게 많은 희생하고 승리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때 당시 시대를 살펴보면 일본군은 계속 북쪽으로 북진하고 있으며 조선 육군이 제대로 힘을 못 쓰고 패배하고 심지어 용인전투에서 일본군 2천명도 안되는 병력가지고 조선군 4만여명이 패배를 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이순신 또한 이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특히나 국운이 달린 해전이고 조선조정에서도 전폭적인 지원 받지 못한 상황이고 소모전을 벌이면 일본군한테 결국은 밀리게 되는 양상인데 이순신 입장에서 완벽한 승리가 필요했다. 이순신은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하고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지휘관이 중도에 전사해 혼전 양상이 된 노량 해전을 제외하고 그가 수행한 모든 전투에서 조선군의 전력을 거의 완전하게 보전하기까지 했다. 무패일 뿐 아니라 모든 승리가 손실이 거의 없는 완전 승리였으며, 이것은 그가 이길 수 있는 전장을 택해서 신중하게 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덕에 적의 보급선을 끊을 수 있었고, 육지에서 싸우는 왜군의 전쟁수행능력을 꺾을 수 있었다. 만약 선조가 요구한 것처럼 무리하게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전장에서 싸웠다면 이와 같은 결과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단적으로 옥포, 한산도(견내량), 명량 해전 등 몇몇 전투[96]를 제외하고는 접전 당시에는 항상 조선수군이 왜군보다 수적 우위를 유지했는데 이는 전체전력이 적보다 열세일지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적보다 우세한 세력을 동원즉 쎄빠지게 뛰어서하여 적을 압도하는 현대 기동전의 총화를 실전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전투가 왜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이나, 유인 후 매복공격으로 시작했다. 이것으로 이순신은 전장의 헤게모니를 왜적에게 넘기지 않은채로 우월한 전투를 운영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해전들은 전쟁의 판국을 뒤집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싸움을 피한 적은 없다. 도리어 넓게 본 전술로 왜군의 단순한 전략을 이겨먹은 우월한 싸움이엇다.

게다가 잊으면 안되는 것은 왜국 장군들은 그 스스로가 다이묘이면서도 해군쪽에 있던 이들은 수십년간 해적질 해처먹은 베테랑인데다가 절대 바보가 아니란사실이다. 이런 왜장들이 스스로 불리한 지형까지 줄래줄래 기어들어오게 만드는 것은 이미 개개인의 능력을 벗어난 초월자의 섭리에 가까운 일이다. 손자나 육도삼략,오자 모두 이것을 역설했지만 이를 시행해낸 이는 전무했고 이순신이 그나마 이 이상과 가깝게 해낸 것이다. 왜군으로봐서는 전과는 별로 다를게 없이 전투를 햇는데 그저 자기편 만 줄줄이 죽어나가는 상황. 이는 일개 무부로 위용을 과시하는 맹장 따위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임이 분명하다.
내가 이기고 상대가 지는 상황과 지형으로 이끌어 싸운다는 상대방 스스로 하여금 스무집을 제하고 두는 바둑요, 차,포에 마까지 떼게하고 두는 장기이다.

또한 정찰과 첩보를 이용한 철저한 정보수집을 무척 중시해서 단 한번도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았고, 왜군이 어설프게 기습이나, 야습을 기도하다 조선수군의 매복에 걸려 역으로 관광타기 일쑤였다. 특히 처음으로 그와 맞붙은 도도 다카토라가 제일 많이 당했다.

도도뿐만 아니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 다른 일본 수군의 장수들도 전부 이순신에게 개관광당하고 말았다... 결국 왜군은 계속된 참패로 본거지 부산마저 위험해지자 아예 요충지마다 진지를 쌓고 해전을 극력 회피하는 우주방어로 나오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유독 엄격한 군율을 가진 걸로도 유명했다. 어느 정도로 가혹했냐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으며,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았다. 게다가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침몰선은 0척, 사상자 합하여(사망자가 아니다. 전사+부상) 100여명밖에 안 되는 숫자다. 아군 사상자보다 적선 격침수가 더 많은 조선의 기묘한 장군 오히려 역병으로 죽은 이가 더 많다. 이거 뭐냐... 사실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서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건 그 시대 전쟁의 특징이지만, 특히 조선 수군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애초에 전사자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한 판에 병사자는 만 명을 넘는 수준이다. 전사자와 병사자 비가 1:100에 가까운 군대라니, 최전선의 군대가 이렇다는 걸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만 이순신에 대해 엄격한 군율로만 보고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순신 본인에 대한 신뢰감이야말로 그가 실질적으로 부하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요인이다. 단순히 엄격한 군율을 강조하기만 하는 이였다면 다른 해전은 몰라도 명량 해전의 승리는 나올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평소 권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챙기거나,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명량 해전처럼 도박과도 같은 무모한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 명량 해전 당시 조정에서는 이미 '수군 폐지령'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칠전량에서 패배했던 수군 장수들 중에는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은둔해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부정적인 전망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경우, 부하들은 그대로 도주해도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의 돌격명령이 통했다는건 군율에 대한 무서움보다는 이순신에 대한 신뢰로 봐야 한다.

이러한 신뢰와 군율이야말로 선진적인 화포 및 조선 기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승리를 보장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용인 전투칠천량 해전에서 보듯이, 조선군은 사기가 낮아서 뛰어난 지휘관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없으면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붕괴해 도망치곤 하는, 그러니까 이길 만한 게임을 셀프멘붕해서 던지는실론즈? 고질적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엄정한 군율로 이것이 방지되었기 때문.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 팀에서 오더 세우는 이유가 다 있다.

즉 이순신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인 장군들은 모두 첩보와 병사들의 조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군대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순신의 분명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는 사실이 폄하될 수 없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뛰어난 군재를 가진 수많은 장수들이 그 호전성이나 아집에 의해서 혹은 전공을 더 쌓기 위해서 아군을 희생시키거나 학살을 자행하는등 불필요한 전투를 치른 흑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자면 항상 최소의 희생으로 최선의 효과를 취하였으니 오히려 칭송해 마땅한 일이다.

특히 전술적인 면에서 이순신은 항상 왜군의 기동을 방해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한산도 전투에서 유인한 뒤 포위하여 적을 묶어놓은 것이나 명량 대첩에서 좁은 길목으로 유인해서 자중지란을 유도하여 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투시 조선수군의 집중된 화력과 함선의 높은 내구성 같은 장점은 극대화되었으며 일본 수군의 숫적인 우세와 뛰어난 근접 전투력, 기동성은 봉쇄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었던 철저한 첩보 능력,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할 때까지의 계략과 기동 능력, 그리고 전투 개시의 타이밍, 적을 이길 수 있는 포진, 전투시 발휘되는 뛰어난 통솔 능력 등을 본다면 이순신의 군사적 재능은 당대 최고라고 볼 수 있다.

이 조건들은 손자병법에서 나오는 이상적인 승리의 조건과 동일하다.(싸우기 전에 이긴다.) 특히 정보에 있어서 우월함은 손자병법이 제일 강조한 조건인데, 이순신은 정보를 수집하고 다루는 면에 있어 교과서적인 면모를 보였다. 손자병법이 제시한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장수.

비록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는 하나, 경상우수사로 미리 부임해 있었다면 임진왜란이 임진왜변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투지휘능력, 전략/전술은 절대적이었다. 비록 여러 부분에 있어 욕을 먹는 선조지만, 적어도 북방 수비를 맡던 이순신을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수군의 중책을 맡긴 전쟁 초기까지의 인사행정만큼은 최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경상우수사로는 원균을 임명했다.[97]

9. 이순신의 인격

어릴 적부터 이어진 유승룡류성룡과의 우정이 유명하며[98] 그 탓에 정치적으로는 애초에 어디에도 쏠리지 않은 중립이었음에도 동인, 그 중에서도 남인 계열로 취급받았다. 단, 사실 남인 계열로 취급받기 시작한 건 전라좌수사가 되고 임진왜란때의 전투로 주목받은 이후이다.

가족으로는 어머니 변씨 부인과 아내 방씨, 첩 2명과 아들인 이회, 이열(이울), 이면 등이 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지,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 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99]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릍 타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이 때의 이순신이 느낀 슬픈 감정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이순신은 상주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선조가 이 소식을 듣고 고기를 하사한 적이 있다. 다른 인물이라면 순수하게 이순신의 건강을 걱정해서 고기를 먹고 몸을 추스리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하필 그 선조(...)인데다, 난중일기의 기록도 "주상(主上)께서 고기를 하사하니 비통하고, 또 비통하다."고 나와 있다.(정유년 12월 5일) 따라서 이 일에 대해 선조가 일종의 충성심 테스트를 했고, 이를 눈치챈 이순신이 복잡한 감정을 일기에 썼다는 해석도 있다.

아내인 방씨는 무관 출신인 방진의 딸이었는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진의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 오자 방진이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씨가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를 쏟아내며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서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문집인 서애집 출처)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100],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류성룡이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있는 외모와는 멀었으며 글을 읽고 단아한 선비 같았다고 하였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101][102]를 받았으나 이순신은 "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읍현감으로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이나 조카들의 행동은 정읍 주민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또한 이순신의 셋째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자식 둔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건만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1597년 10월 14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1597년 10월 16일) 참고로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고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이에 대해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있다.[103]

그가 남긴 기록이나 여러 문헌에 의하면 굉장히 깐깐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충무공유사》의 기록을 해석한 결과 원균을 가리켜 원흉(元兇)이라 부르며 열심히 까댄 것이 밝혀져 충무공과 원균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小有違令 卽當軍律 소유위령 즉당군율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명량 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상당히 엄격한 상관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 모모가 기강이 태만하므로 베었다, 곤장을 때렸다' 등으로 가득차 있다(예를 들어 김완이나 황옥현 등). 특히 많이 처벌받았던 자들이 관할 지역의 아전들. 고려시대 지방의 지배계층이었던 향리들은 조선 건국 후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수령에게 무보수로 봉사하는 보좌하는 아전으로 굴러떨어졌고, 이에 살 길이 어려워진 아전들은 중간에서 갖은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는 조선시대 내내 커다란 사회문제였다. 이순신의 입장에선 나라와 백성들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판에 아전들의 비리나 과실을 눈감아 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난중일기 기사에 한산도 대첩 출진 하루 전에 군졸인 황옥현(黃玉玄)이 군영을 탈영해 도주하다 붙잡았는데 이순신은 이 황옥현을 그대로 참수했다. 사실 군졸 뿐만 아니라 장수들도 많이 도주한 사례가 있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기를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그리고 난중일기에 소개된 또다른 일화로는 아전 하나는 소를 데리고 군량을 가지고 오던 중, 강가에서 밥을 먹다가 잠시 술을 반주로 걸쳐 먹었는데, 그 사이에. 소가 멋대로 강에 빠져 죽었고 군량은 모두 못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전은 관리 소흘의 책임으로 참형에 처해졌다(!!) 이순신의 수군은 기본적으로 모든 군량을 쪄서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물을 먹은 쌀은 군량으로써 가치를 상실했고, 이 때문에 못쓰게 된 쌀과 물을 먹고 죽은 소는 그날 병사들 저녁 식사로 제공되었다.

명량해전 전 수군을 수습하러 다니면서 훔친 소를 끌고 가던 백성들이 왜적이 온다고 떠벌리고 다니자 목을 벤 일도 있다. 이를 가지고 이순신의 유일한 실수라면서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수군궤멸로 이미 절망에 빠진 백성들 사이에서 정식보고 절차도 거치지 않고 동네방네 왜적이 쳐들어온다 떠들고다닌 소 절도범(사실 이것만해도 중죄다.)들을 곱게 대해줄 이유가 전혀 없다.

그외 불시에 병영을 순시해 무장과 병력상태를 점검하는 일이 잦았는데 무기에 녹이라도 슬어있으면 기본이 곤장 80대였다. 다만 곤장을 맞고 죽은 경우는 없고, 평시에 잘 관리하면서 할 거 다 하면서 놀고 있으면 오히려 상을 주기도 하는 등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한, 그야말로 완벽한 원리원칙주의자의 모습이다.

상당한 완벽주의자로 가차없이 백성들을 징집해 수군으로 훈련시켰으며, 전함 건조 등의 일도 철저하게 했다. 당시 수군은 칠반천역 중 하나라 한번 입대하면 빠져나오기도 힘들었고 후손에게까지 피해가 미치기에 탈영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에 따라 탈영자의 친족을 수군으로 강제 징발하는 법도 있었다. 그 법이 너무하다 하여 친족 대신 끌려온 사람을 면제코자 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순신은 장계를 2차례나 올려 그 일을 반대했다. 그외에도 철저한 엄벌주의자로 수많은 부하들을 처형하고, 형을 가해서 어떻게든 수군에서 벗어나려 용쓰던 수졸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했다.

하지만 최고 지휘관으로서 군대의 규율을 잡는 것은 원래부터 당연한 일이었고, 탈영, 물자횡령, 적전도주는 현대에 와서도 심하면 사형까지도 당할 수 있는 사유이다.[104]

게다가 당시 상황은 외적의 침입이 계속되는 전시상황이었다. 이렇게 철저히 규율을 다졌기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왜군을 상대로 그 많은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 명장이란 불리한 전투에서 이기는 장수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우는 장수 또한 명장이다.

또한 상벌에는 항상 공정했으며 백성들과 병사들의 식량공급과 생계, 부정부패의 절대엄금 등 민생에도 진심으로 최대한 신경쓰는 등의 장군이자 목민관으로서도 병사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보살펴 주었기에 백성과 병사들은 이순신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며 반기를 들 생각을 품지 않았다. 엄격하지만 가혹하다 평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많은 문건에서 이순신이 벌하거나 벌하려 했던 죄인들이 한 행동들은 대부분 군기위반, 탈영, 군용물자 유용 및 횡령, 군무이탈이나 군무회피 알선 등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전시엔 중형을 피하기 힘든 중범죄였다. 정상적인 원리원칙을 집행하는 이순신의 행동을 부패가 일상이 된 조선 중기의 행정 기준으로 보니[105] 가혹해 보이는 것일 뿐. 권율의 경우 탈영병을 즉결 처분했다 하여 일시 해임되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전멸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순신이 돌아오자 울며 절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등 이순신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고 전해진다.

짧게 줄여서 말하자면 제대로 FM이다. 그래서 존경은 하지만, 상관으로 모시기엔 빡세다고 평을 하기도.# 능력이 엄친아 급이니 절대 따라해선 안되는 인간의 표본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철저히 신경쓰는 탓인지 굉장히 자주 아팠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중일기에 "아파서 배에서 '웅크리고(縮) 있었다"거나 "밤새 사곽란으로 고생했다", "혼절해 있었다" 등의 서술이 많다.[106] 실제로 난중일기 중에 "아팠다"는 기록만 찾아도 수십 차례가 넘는다. 이는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에,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이나 치료가 없었던 점 등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명량해전 이후 명나라 수군 도독이었던 진린하고 연합을 했을때도 영의정인 류성룡이 최악의 연합이라고 평가할 정도인데도 성절이 포악하고 조선인 때리기 주저 없는 진린이었는데도 이순신하고 같이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이대인'이라고 부를정도였다.

이순신의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은 활쏘기와 음주[107], 그리고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승경도놀이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의외로 부하 장수들과 함께 승경도놀이를 즐기는 기록도 제법 자주 나타난다.4성 장군과 보드게임 까페를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대의 무인답게 활쏘기를 즐기셨다. 난중일기에는 대개 15발중 10~11발 정도 명중했다고 한다. 퇴마록의 저자 이우혁은 후속작 왜란종결자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의 무예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32살 무과시험 합격 했어도 그렇게 뛰어난 성적이 아니었고 중간성적으로 합격했다고 함 지금이야 이 정도 기록이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때는 활덕후의 시대 조선시대. 거기다 무장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잘 쏘는 편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장수로써 모자라다 싶을 정도로 못쏜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그에 대해서는 이러한 근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장수들이 모여서 대결을 해보면 대충 40발 초반이 꼴찌를 기록했는데 이순신 장군께서 (특별히 잘 맞추어서) 기록해놓은신 것이 43발이었다." 잘 쐈다 못 쐈다는게 보통 10여발 까지 차이는 나지 않고 당시의 나이를 생각할 때, 엄청 못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장수들 평균에서 조금 떨어지는 수준으로 보인다.[108]

10. 능력에 대한 저평가와 반박

이순신의 승리에는 당시 조선의 기술과 무기(화포등)의 영향이 컸으므로, 이순신의 전투에서의 공적이 모두 이순신의 능력에 의해서였다고 평가하기에는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그럼 원균은 뭔데? 그 우수한 무기로 승리한 건 이순신밖에 없는데 이순신 무기수혜설 항목 참고.

기본적으로 이순신의 전략이 조선 수군의 우수성에 기반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한 요소들을 잘 활용해내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적의 피해를 극대화시킨 것은 다름아닌 이순신의 능력이다. 실제로 숫자, 장비가 우세한 아군이 잘못된 전략이나 지휘관을 만나서 전쟁에서 죽 쑤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자주 있으니, 갖고 있는 것을 잘 쓰는것도 충분히 능력이다.

① 함상에서의 화약무기 운용, 특히 대포의 운용에는 많은 제한 사항이 따른다. 적 함선뿐만 아니라 대포가 거치된 아군의 함선도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상에 떠있는 선박은 롤링(rolling), 요잉(yawing), 피칭(Pitching) 등 다양한 흔들림(동요) 현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같은 흔들림 현상은 지상에서 보다 함상에서의 화약무기 명중률을 현저하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탄도곡선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한 박혜일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사각 5도일때 사거리는 152m, 10도 일 때는 289m, 20도일 때는 525m라고 한다. 이러한 사거리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사각에 따라 상당한 사거리 차이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5~10도 수준의 롤링은 황천이 아닌 일반적인 해상 조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각 5도를 적용했을 때 5도의 롤링으로 인한 오차가 더해진다면 사각이 10도가 된다.

박교수의 계산결과를 참고할 경우 이때 발생하는 사거리 오차는 137m나 된다. 단거리라면 표적이 되는 선박의 크기가 있으므로 롤링에 따른 오차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사격시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당히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각 변화에 따라 발사체의 비행 최고 고도 문제이다.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 사격시 계산결과를 보면 사각 10도시 대장군전 비행중 최고 고도는 13m다. 이 정도 비행 고도라면 어느 정도 사거리 오차가 발생하더라도 표적 선박의 높이가 13m 이내라면 어떻게든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에 명중할 수가 있다. 하지만 사각 20도면 대장군전의 비행중 최고 고도가 50m, 사각 30도면 최고 고도 100m, 사각 44도면 최고 고도가 200m에 달해서 이야기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 수군이 10~20도 정도 수준의 사각으로 사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5~10도 수준의 롤링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사각은 15도, 20도, 25도, 30도로 변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사거리 오차는 둘째 치고 대장군전의 비행고도 자체가 50~100m로 높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높이라면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의 돛보다 더 높은 고도로 선박 상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롤링에 따른 사각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보다는 사각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최고 비행 고도의 변화가 명중률 향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차 부담 때문에 20도 이상의 사각으로 사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요잉 등에 따르는 좌우 오차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체 길이가 30m 정도인 일본의 대형 아다케 정도라면 배의 중심부를 겨냥했을 때 배의 선수와 선미 사이의 각도차이는 사거리 50m 일 때는 33도, 사거리 100m 일 때는 그 절반정도인 17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거리 100m 일 때는 17도, 사거리 50m 일 때는 33도 이상의 요잉의 발생하지 않는 한 오차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잉은 롤링보다는 부담이 적다는 의미이다.

박혜일 교수는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와 비행고도를 계산했지만 롤링과 요잉, 피칭 등에 따른 오차 문제는 천자총통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총통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오차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법은 가급적 근거리에 접근한후 사격을 하거나 사각 자체를 가급적 작게 잡는 길 뿐이다. 만약 사각 5도로 사격할 때 발사체인 대장군전의 최고 비행 고도는 3.2m에 불과하므로 이 경우에는 사거리 오차가 발생해도 좌우 조준만 정확하다면 어떻게든 표적이 되는 선박을 맞출 수 있다. 10도의 경우에도 최고 고도는 13m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 극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흔들림 현상이 있는 함선에서 화약무기를 사격할 때 높은 명중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해서 사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을 선택, 수평에 가깝게 사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세기 이전 조선의 포가는 사각 조절이 매우 어렵거나 불편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군이 간접사격에 참조할 수 있는 사각별 사거리 제원이나 화약량별 사거리 제원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 경우 체계적인 사거리 수정은 불가능하고 경험에 기초한 임의적인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수평사격에 가까운 낮은 사각이 아닐 경우 화약무기 운용요원의 숙련도가 이례적으로 높지않는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유럽 전근대 해군들이 상대적으로 수평에 가까운 사각으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도 이 같은 롤링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나 비행고도 오차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박혜일 교수는 이렇게 롤링에 따른 사각의 불확실성, 화약량과 발사체의 무게 차이를 고려할 경우 사거리 약 70m 정도까지는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100m가 넘어갈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선 수군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전거리는 표준형 조총 유효사거리인 50m를 벗어나면서도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다. 천자총통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아무리 크게 잡아도 이상적 사각은 20도 미만, 유효 사거리는 400m 이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피차 이동하는 선박 간에 벌어지는 해전에서 과연 아군이 원하는 교전거리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이 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의 교전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에서 유효사거리가 50m가 넘는 9몬메 이상의 대형 조총을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실제 교전상황은 훨씬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수군 함선이 조선 수군 함선에 과도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도 화약무기 운용상의 제약점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가 완전히 붙는 접현전의 경우에도 화포의 사용이 제한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대형 아다케 등 적의 함선 높이가 판옥선과 동일하거나 더 높다면 접현전 상태에서도 화포 운용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키부네나 고바야처럼 일본 함선의 높이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라면 접현시에 하향사각을 해야만 사각이 나올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하향사격시 대포 운용에 어떤 제한사항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거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정 거리 이상 접근했을 때, 특히 완전히 배가 붙는 접현 상태에서는 총통의 사각 제한 때문에 사격 불능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는 질려포통 등 손으로 투척할 수 있는 화약무기나 활 등 일반적인 투사무기를 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조선군의 화포에 몆차례 맞는다고 안택선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그 화포가 빠른 속도로 연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조준이 쉬운 것도 아니고, 발사 하더라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일본 수군이 모두 죽는 것도 아니다. 일본 수군이 바보도 아니고 화포에 몆차례 당했으니 기를 쓰고 노를 저어서 판옥선에 달라붙으려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

물론 상기한 설명은 선상에서 화포 운용의 어려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위의 내용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 '대포는 이순신의 기적적인 승리 행진과 별 관계 없다'고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상에서의 고민과는 별개로 이순신의 전투에서 대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대포의 화력이 조선군이 일본군에 비해 유리했으며, 이를 이용한 것이 이순신의 전술에 핵심 중 하나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대포가 있으니까 이긴 것이고 이순신의 존재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오류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극단적인 예시 하나를 이미 알고 있다.)

애초에 임진왜란의 해상전은 동아시아의 해상전이 함포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이며, 이러한 개념을 체계화하고 실전에서 응용하고 조선군의 장점을 극대화 하였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순신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화포는 거들 뿐이었다. 결코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졸라 짱쎈 조선 화포가 크아아아하고 울부짖자 일본 전선들이 터져나간 것이 아니다.

② 왜선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날래고 또 수가 많았다. 판옥선은 무겁고 둔중하다. 이것은 조금만 잘못하다 보면 금방 거리가 좁혀진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적을 분산시키고 적의 접근을 막으며, 반대로 우위에 설 수 있는 경우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이순신의 대표적인 승전으로 꼽히는 한산도 해전의 경우도 틀어박힌 적을 유인해 쌍학익진으로 적을 단숨에 격멸한 것이다.

③ 왜선에 타는 조총수 및 보병들은 대부분 아시가루로, 조선과 비슷하게 농민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100년이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경험을 많이 쌓은 역전의 숙련병들인데 반해, 조선 수군의 병졸들은 태반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농민 출신들이었다. 2번 항목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자면,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거나 군율이 흐트러져서 접근을 허용하면 그건 아주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조선군이 백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건 아닌데, 백병전으로 이행하면 순식간에 전투력이나 사기 면에서 밀리며 패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④ 이순신에게 보급이 끊기기 전의 왜군들은 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출병했으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조정으로부터 쌀 한 톨도 지원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 조선 수군은 자금, , 화약, 금속, 배를 수리할 목재 등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109][110]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을 유지해주기 위해서 공물을 보내야 했는데, 심지어 공문서 쓸 종이조차 없어서 이순신이 지원해주는 상황이었음에도 조정에서는 늘 공물이 부족하다고 닦달했다(...).[111]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전쟁 수행 중에 군량이 필수 인데 한산도 진영을 잡을 때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경지에 농사를 하도록 조선조정에 건의까지도 하였다. 결국은 어렵사리 한산도 군량 생산 승인을 얻었다. 백성들은 이순신 옆에 붙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고 백성들은 편히 농사를 짓고 그런 군량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바치기도 했다

⑤ 정보전과 탐색전도 항상 철저히 하여 단 한 차례도 왜군의 기습이나 야습을 허용하지 않았고, 항상 왜군이 어설프게 야습을 시도하다가 되려 역관광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⑥ 일본도 전란 중반으로 밀폐형 층루선과 대조총을 일부 투입하면서 전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애당초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함선이 조선의 판옥선처럼 안정감이 있는 함선이 아닌데다 선상 백병전을 선호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포계통 무기를 조선군처럼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이 화포를 사용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군의 제일 큰 화약병기는 오오츠츠(大筒)라고 하는, 단순히 구경을 늘린 화승총이었다. 그나마도 위력에 비해 다루기 까다롭고 화약 소모가 많은 등의 문제로 널리 사용된 건 아닌 걸로 추정된다. 이런 대구경 조총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등의 공식기록을 사실상 찾을수 없기 때문이며, 칠천량 해전과 관련된 자료들 중에도 일본측 기록에 '판옥선 한척에 대해 서너척의 배로 포위하고 선상백병전으로 가야 승산이 있다'라는 식의 자료들이 존재한다. 일본에서 사실상 제대로 된 화포가 실전에서 선을 보인 것은 사카 성 전투 당시.

⑦ 아무리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지휘관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큰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다. 개전 초기에 이순신이 있던 전라좌수영에 비해서 큰 덩치를 자랑하던 경상우수영의 원균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모든 무기를 없애 버린 것이라든지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온갖 노력으로 간신히 마련한 조선 수군을 한큐에 말아 먹어버린 궁극의 팀킬을 자행한 것을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하게 무기의 차이로 조선군이 이겼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군은 상술했듯이 병사들의 낮은 숙련도와 사기를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능력으로 커버했기에 이길 수 있었고, 실제로 칠천량의 조선군은 원균 같은 무능한 자가 지휘관이 되자 그런 우수한 무기체계와 승전 경험을 마치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11. 그밖의 이야깃거리

  • 만약 외국인이 한국인에게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한국인이 누구이든간에 "이순신"이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김타카니랑 원균빠돌이들 빼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위인으로서 이순신의 위치는 독보적인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최고의 명장을 논할 때는 반드시 거론되며, 한국인이 존경하는 위인으로는 세종대왕과 함게 늘 1위를 다투고 있다.

  •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역사상 위인들은 후대의 연구로 드러난 크고 작은 오점[112]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순신의 경우는 인지도 때문에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있는데도[113] 오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었는데도 발견된 오점이라고 해봐야 '부하들의 군기에 대해서 처벌이 엄격했다'밖에 없고 이마저도 당시의 기강이 허술[114]하고 엉망인 시대적인 요건이나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하면 오점이 아니라 전쟁이 없는 평시였어도 당연한 조치다. 현대에도 전쟁중에 탈영하거나 민간인을 약탈한다거나 하는 것은 최고 사형까지 갈 정도로 큰 죄이다.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해군의 다짐

  • 당연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에서 엄청나게 좋아하는 위인이다. 훈련병들은 기본적으로 정훈으로 이순신에 대해서 배우며 훈련병용 교재에서도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다. 해군의 다짐 또한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로 시작하며 군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자존심의 대상이다.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에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

    참고로 해사의 연구자들은 다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비해 이순신에 대한 분석 및 연구를 오랫동안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순신과 관련된 정보나 자료는 한국에서 가장 많다고 할수가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장교들의 지식 수준은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면 정색하며 제독이라 부르라고 하고 해군부심 쩐다 명색이 충무공 리더쉽 센터에서 나왔다는 장교가 훈련소 정훈시간에 날조된 징키스칸 어록을 다시 날조한 이순신 어록을 가지고 강의하는 수준이다. 짤막한 이순신 영화를 만든적도 있는데 명랑철쇄설(...)을 지지하고 참수리보다 작은 판옥선이 주무장으로 승자총통을 쓰는 발로 만든 작품이다. 아무리 학계가 따로있다지만 충무공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치고는 한심한 수준. 그러다보니 한국해군은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그저 이순신의 승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존인물 이순신이나 조선수군사를 연구하는데는 쥐뿔도 관심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 밀덕들은 충무공이라는 상징성 강한 명칭은 구축함에 사용한 것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항공모함은 무리겠지만 이후의 이지스함에다 쓸 수도 있었는데 좀 참지...' 정도의 뉘앙스. 이지스함은 결국 세종대왕급으로 진수되었고, 이중 3번함에 이순신의 조력자였던 류성룡의 이름을 딴 '서애 류성룡'이 붙여졌다. 뭐 이순신 장군 성격이라면 구축함이라도 불만이 없을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하지만 원균함이 생기면 어떨까?

  • 해군이나 해군 출신자 등 일부에서 해군의 장성 계급 호칭인 제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공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싸우는 수군에서 올렸으니 그럴 듯할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의 고급 지휘관들은 육해군을 오가는 경우가 많았고, 이순신도 커리어를 육상에서 시작했다. 게다가 당대 명나라 육군을 이끈 이여송이 제독이고 수군을 이끈 진린은 도독이었다(이여송이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제독검"이 <무예도보통지>에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현대식 호칭으로 과거의 사람을 부르는 것은 좀 생각해 봐야 할 듯. 그러나 '장군'이라는 호칭도 당시에는 안쓰였다는 것은 마찬가지. 장군이라는 호칭 자체는 당시에 당연히 존재한 호칭이었지만 수군절도사급에게 장군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결례였고 그보다는 낮은 직급의 장수에게 쓰는 호칭이었다.[115] 그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을 호칭할 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장군'의 호칭이 아닌, '통상', 혹은 '통상대감', '통제사또', '영공' '이공' 등으로 불렀다.

  • 특히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 前 대통령이 많이 존경했다고 한다.[116] 그 존경 덕에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고 아름답게 증축되었고,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한국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현재 사용되는 원화 중에 100원 주화의 앞면[117]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고, 그 전에도 구 500원권 지폐에 등장한 적이 있다. 숫제 서울시는 광복 전 일본인들의 거리였던 경성부 본정목에 충무로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다만 이 때문에 이순신은 박정희가 의도적으로 띄워준 것이라고 디스당하기도 하는데, 박정희 이전에도 전국에는 크고작은 이순신 사당이 있었고 민중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 효종,숙종,영조대에 이순신에 대한 추숭사업이 여러번 진행되었고, 숙종 대에는 현충사를 확장하고 거기에 숙종이 친히 제문을 내리기도 했으며, 정조 대에는 충무공 전서를 내는 등 조선왕조 후반기 동안 꾸준히 추숭사업이 이뤄졌다.

  • 무속 신앙에서는 용장군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참조. 용장군이라는 것은 흔히 물에서 싸우던 무인들을 영령으로 모시는 것이라고 한다. 무당의 신앙은 무당 개인적으로 신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충무공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은 존재한다.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민간에서 이순신을 신으로 섬겼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수의 '영당풍어굿'. 풍어굿은 원래 물고기가 잘 잡히게 하기를 기원하는 굿인데, 여수의 '영당'이라는 곳은 충무공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물론 이 사당에 모셔진 신은 충무공 뿐만 아니라 최영, 등도 모셔져 있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속이나 민간신앙에서 충무공이 신으로 모셔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참고로 여수의 영당은 여수시 남산동 어항단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방문해서 이 굿을 보는 것도 좋을 듯. 전통적으로 매해 정월 대보름에 이틀에 걸쳐 벌였는데, 오늘날에는 지역행사처럼 벌인다. 이 굿을 하다 보면 무당이 "여수는 이순신 장군님 덕택에 나갈 적에 빈 배로~ 올 적에 만선하야~"라고 외친다.

  • 풍어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은 부하들을 시켜 청어 잡이에 열중했다. 한산도에 개간한 둔전만으로는 병사들과 피난민을 위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청어잡이로 군량을 때우려 했던 셈.[118]

  •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이 공을 세운 해군에게 주기 위해 만든 훈장 중에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파마머리 독재자가 너무 이순신만 띄워주고 그 밑의 민중들의 투쟁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즉각 평가절하되었다. 그러면서 자기네 돼지 3부자는 신격화에 그 잘나신 동지들은 숙청이라니 과연 인지부조화의 극치 뽀글이 클라스! 여담이지만, 한홍구가 말했던 거짓된 신화로의 이순신이라는 것의 예로 든 것이 북한의 저런 모습을 든 것이다. 다만 2014년 들어서는 외세 배격을 목적으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위치하고 있다.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아가는 김에 묘소가 현충사 경내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방문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충사와 이순신의 묘소는 떨어져 있다. 현충사는 아산 염치읍에 위치하고 있으니 주의할 것.

  • 이순신의 업적이나 가지고 있는 비중만 보면 임진왜란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이며 근래 들어 임진왜란의 다른 전투들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에는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은 이순신이 벌인 전투들의 일대기와 몇몇 유명한 육전들을 다루는 수준에서 머무를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룬 책들은 이순신이 반드시 언급되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간 경우 아예 주인공급의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 수많은 업적으로 한산도 대첩 축제 등 그와 관련된 축제를 여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여수엔 이순신대교로 불리는 다리가 있는데 그 유래는 그 다리의 길이가 1545m로 1545년생이신 이순신의 생년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 현대에는 무략이나 전술, 충심 만이 아니라 전란 속에서 사람들을 이끈 리더쉽과 철저한 관리 능력에 대해서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 역사상의 Bad Ass들을 소개하는 사이트에서[119] 이순신을 Bad Ass한 제독으로 소개하고 있다.

  • 영국 해군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그의 저서인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에서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 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 라 쓴다.###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쫓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ㅡ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pp. 66-67.[120]

또한 인격적인 비교 뿐 아니라 군사적인 역량의 비교에서도 이순신은 불리한 상황을 자신의 군사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극복했으나 넬슨은 불리한 상황에서의 전투를 치른 바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군사적 역량이 두드러져 보인다. 넬슨이 치른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트라팔가르 해전 역시 영국 함대가 유리한 상황에서 치러졌다.

  • 이순신의 필체가 담긴 친필 편지 원본이 발견됐다.관련 기사

  •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 남은 문헌은 난중일기, 충무공전서, 난중잡록, 충무공행록, 통제사이충무공유사, 충무공행장, 충무공시장, 명량대첩비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헌이 있다.

  • 이순신 장군의 13대 종손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신문 기사가 발견되었다. #

  • 2013년에 난중일기에서 삼국지연의를 인용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또한 《청성잡기》에서는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피해 은거한 도우(道友, 도 닦는 벗)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몰랐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알고 있어서 큰 일이 있을 때면 매번 그와 상의하였다. 왜구가 침입하자 공은 사자를 통해 편지를 전하여 나랏일을 함께 도모하자고 부탁했다.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으니 다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숙독하면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여기에서 효험을 얻은 것이 많았다."라는 글귀가 발견되기도.삼국지를 세번 읽은자와 상대하지 말라.

11.1. 이순신의 장검에 얽힌 이야기

이순신 장검 - 보물 제326호

이순신의 검은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약 2m에 가까운 크고 아름다운 길이 때문에, 오래전 부터 이순신의 키는 2m 50cm(...) 내외가 될 것이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동래성에서 출토된 조선 갑옷을 통한 추정과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의 평균적인 키가 164라는 결론이 나와서 실제로 키가 그렇게까지 컸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170cm 전후의 키로 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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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촬영된 쌍용검.

그리고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한 칼인 쌍룡검의 행방은 며느리도 모른다. 근 100년째.

현충사에 소장된 이순신의 장검을 참마도로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조선은 화약병기나 원거리 병기에는 많은 투자가 이뤄진 반면(세종,문종 참조), 도검문화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국가다. 조선의 병과상 검을 사용하는 병과는 팽배수로 한정되어있었고,[121] 전반적으로 보병은 장창과 당파로 무장했고,[122] 기병에게 가장 선호되는 무장은 장창과 월도와 같이 리치가 긴 무기나, 편곤이나 철퇴 같은 타격병기[123]였다. 때문에 물건들어가는 쇠의 양과 제작에 걸리는 시간에 비해 위력은 한정적인 참마도같이 비효율적인 물건은 만들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고, 애초에 도검 자체에 대한 대우나 일반적인 인식도 무예도보통지에서 나오듯이 썩 좋지 않다. 조선의 도검문화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성호이익의 성호사설인데, 성호 사설에서 이익은 "우리나라 병사들은 일본도를 얻으면 경사면을 갈아내는데, 이 경사면이 있어야 칼의 날이 손상당해도, 쉽게 갈아서 쓸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칼날의 경사면을 갈아내버린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 초기 문종 실록에서도 병사들이 임의로 칼날을 분질러 일부러 길이를 줄이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검신을 아예 없애버리는 상황도 벌어져, 문종이 도검의 길이는 법적으로 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또한 이순신 본인부터가 도검에 대한 인식이 마뜩찮다. 일반적으로 왜검을 손에 넣으면 소유하거나 진상하는데, 이순신은 죄다 녹여서 물자로 전환시켰다. 이순신 본인은 검법이 맞지 않다. 라고 했으나 황진이 통신사를 수행하고 오면서 왜검을 사왔던 점. 조선이든 명이든 쌍수도를 적극 장려하려고 한적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전시 물자 확보를 위한 핑계였다고 볼 수 밖에. 또한 승산이 충분함에도 근접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패주하는 일이 많았던, 다시 말해 근접전 자체가 익숙치 않았던 조선군의 현황과 수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본도는 그리 효율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다만 이순신의 함대 내에 항왜 출신 병사가 존재했음이 확인되므로 이들은 자신의 일본도를 가지고 싸웠을 것이다.

현충사에 전시된 검에 대해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태아검처럼 장식용~군기 확립을 위한 장식이라고 설명돼있으므로 요주의. 또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새로 검을 만든 것이 편하게 쓰였다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장검은 태구련 등 대장장이들이 자신들이 대장장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든 장식용 검으로 갑오년에 만든 물건이고, 이순신이 새로 만든 검은 그 뒤인 정유년 이후다.


참고로 현충사 장검 날 옆면 홈 안에 칠해진 빨간 줄은 만들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공업용 페인트로 칠을 해놓은 것이다.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칠했는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으며 페인트칠이란 사실이 2014년 8월 하순에서야 밝혀지면서 문화재청에서 이 페인트칠을 벗기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이견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11.2. 일본에서의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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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보고 장비를 생각한다면 지는거다...


옛날 일본에서는 대략 이런 식의 맹장 이미지인 듯 싶다. 1854년 일본의 출판사 금행당에서 발간한 <조선정벌기>라는 책 속의 이순신. 이 책은 임진왜란 전까지의 조선 역사를 서술하고 전쟁 진행 상황을 일본 입장에서 그림으로 서술한 책이다. 고증 따위 안드로메다지만 제법 무섭게 그렸다. 특히 들고있는 방천화극 징비록이 일본에서 발행되면서 처음 알려졌지만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는 김시민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고, 이후 메이지 시대의 해군 연구에 의해 일본 내에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순신은 Sun-죄를 혼자 타고 Hulu 도둑을 부러 Cholla에 군인의 문제의 병사 해군 Jiedushi는 tortoiseshell의 배를 만들어 타다오 크라운 닭고기 숲
李舜臣單騎にして胡虜の賊兵を破る。和兵の至るに及んで全羅水軍節度使となる。龜甲船を造る。忠勇鷄林に冠たり。[124]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125]에 으뜸이었다.일본이 잘못했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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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역시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으로 이 그림은 사천 해전 때 부상을 당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위의 텍스트 내용도 싸움 중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했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무인다움을 찬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이순신은 대개 류성룡의 징비록의 영향을 받아 영웅다운 인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126]

1908년 발행된 일본해군의 사토 테츠타로 제독의 저서 《제국국방사론》에서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덕분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Throughout history there have been few generals accomplished at the tactics of frontal attack, sudden attack, concentration and dilation. Napoleon, who mastered the art of conquering the part with the whole, can be held to have been such a general, and among admirals, two further tactical geniuses may be named: in the East, Yi Sun-sin of Korea, and in the West, Horatio Nelson of England. Undoubtedly, Yi is a supreme naval commander even on the basis of the limited literature of the Seven-Year War, and despite the fact that his bravery and brilliance are not known to the West, since he had the misfortune to be born in Joseon Dynasty. Anyone who can be compared to Yi should be better than Michiel de Ruyter from Netherlands. Nelson is far behind Yi in terms of personal character and integrity. Yi was the inventor of the covered warship known as the turtle ship. He was a truly great commander and a master of the naval tactics of three hundred years ago.(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몇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서 태어났기에 서양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진왜란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상급의 지휘관이다. 누구든 이순신과 비교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Michiel de Ruyter)보다는 뛰어나야한다. 호레이쇼 넬슨은 인간성과 성실성 측면에서 이순신만 못하다.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뚜껑 덮힌 배를 발명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A Military History of the Empire (Japanese: 帝國國防史論), p. 399, by Admiral Tetsutaro Sato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목차 중 'Legacy'의 3번째 단락 참고.

러일전쟁 후 각국 해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일본 해군에 미군 해군사관생도들이 방문했는데, 한 후보생이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각하께서는 어떤 해군 장군을 가장 존경하십니까?" 라고 물었다당연히 그 후보생은 넬슨을 생각했겠지.... 그러자 도고 제독은 "나는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한다네. 그분에게 비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하고 대답했던 일화가 전해지나[127], 출처들이 하나같이 신빙성이 없는 서적들로, 날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28] 어차피 당시의 일본 해군에서 이순신에 대한 숭배가 공공연히 이뤄졌음은 교차 검증할 사료가 많아서 굳이 진위가 불분명한 도고의 어록을 인용할 필요가 없으므로, 괜히 도고의 어록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사적으로 도고 역시도 이순신을 존경했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들이 확실한 증거가 없고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사항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신뢰성이 부족하다.

다만 이런 신빙성 부족한 발언이 만들어질 정도로 근대 시기 일본에서도 이순신이 인지도가 높았다는 것은 알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지도를 이용하여 조선의 이순신-일본의 도고 헤이이치로를 연결하고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과 비교함으로서 '동양의 해군 전통'을 '서양의 해군 전통'과 동등하게 만들면서 내선일체(…)를 홍보하려는 프로파간다적인 목적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 일본 문화는 '겸손함'을 나름대로 미덕으로 보기도 하므로, 도고가 스스로를 넬슨보다 위대하다고 자랑하는 것 보다는 '동양에는 서양의 넬슨보다 위대한 장수가 있고, 나는 그 사람을 존경한다'고 하는 식으로 짐짓 '겸손함'을 보이는 것이 보다 '훌륭한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129]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 해군에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순신을 굉장히 팔아먹었다(…). 당시 일본 해군육군은 다른 나라 군대라고 말할 정도로 반목과 경쟁이 심했는데, 해군 측은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들면서 "것 봐라. 해군 없으면 날고 기어도 전쟁에서 못 이긴다"는 내용의 선전을 했다. 일본도 전근대 시기에 수군이 분명 있었지만, 해양 세력은 대부분 왜구 같은 지방의 비주류 세력이라서 기록이 미비하였으며 일본 주류 세력의 전쟁사는 대부분 육군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순신처럼 전국적인 네임밸류가 있으며,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니 이순신을 "해군 강화의 명분"으로 들이댈 만하다.

일설에 따르면 러일전쟁의 한 일본 해군 병사는 "마음 속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승전(쓰시마 해전)을 기도드렸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뭔가 이탈리아군이 한니발한테 승전 기도를 하는 듯한 느낌이다

11.2.1. 한국과 일본 양국 인터넷상에서의 이순신 평가

11.2.1.1. 일본
한국에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일본의 연구자들 역시 이순신의 능력과 그가 전쟁에 미친 영향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런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일본 인터넷의 분위기 때문에, 특히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들 중에서도 이순신 관련 문서는 그 왜곡의 범위가 상당히 큰데, 사서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장의 대목만을 짜집기해 자국의 역사에 유리한 결론을 내기로 악명높다. 아래는 위키를 제외한 이순신 관련 왜곡사례나 수법들이다.

  •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등 전과의 폄하.
    • 일본 우익들이 전투에선 졌지만 전략목표는 달성했다고 평가하는 명량 해전으로 일본의 서해 진공은 완전히 좌절했으며, 수군력의 약화로 이후 큰 공세를 하지 못하고 왜성에 의지한 수비전,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 노량 해전에서는 마치 이순신이 전쟁 범죄라도 저지른 듯이 퇴각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추격하다가 역관광 당했다. 식으로 써 놨으며, 조선군이 괴멸당하고 일본군이 전력을 온존하여 승전한 것처럼 써 놨다.
    • 도요토미, 도쿠가와 양대 세력이 큐슈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둘 다 시마즈를 분쇄하지 못한 채 강화를 맺었을 정도로 막강한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 참전 이후 천하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몇천도 안되는 병사 밖에는 동원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이유가 주로 거론되나 노량해전의 피해 역시도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 노량해전이 종전 전에 벌어진 엄연한 전투행위라는 점도 무시하고 있다. 노량해전은 조명연합군의 마지막 대공세였던 사로병진 작전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벌어졌다. 더구나 사천의 왜성을 바다에서 포위하다가 응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벌어졌으므로, 위와 같은 시각은 당시 전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 조선과 일본의 기록들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태도.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일본 측 사료는 군충장과 진지표, 전황보고서 등 신뢰도가 높은 1차 사료들을 대단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수치적인 면에 있어서, 총 참전 인원 십수명 수준의 전투에서도 보고를 위한 군충장을 작성했던 전국시대의 특성상 부대배치와 병력 현황, 일본군의 병력 흐름 등을 자세하고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일본군 장수들의 가문 기록은 조선의 족보 기록과 비슷하게 가문의 공은 부풀리고, 피해를 축소하여 명예를 치장하는 면이 있어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예컨데 있지도 않았던 명군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조선인들이 남긴 기록과 마찬가지로 당대인이 남긴 1차 사료이며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기록의 신뢰도만 따지면 조선측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130] 또한 조선측 기록, 일본측의 행정문서와 교차검증을 통해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추론해낼 수 있다.
    • 문제는 이들이 조선과 일본의 자료들을 '적당히 입맛에 맞게' 추려내고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적당한 사실이 배합됨으로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 일본 극우세력이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학생들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정통성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새 역사교과서에서는 일부러 이순신을 뺐다. 기존 대부분의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이순신의 초상까지 실려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부 사용자들도 이순신 항목을 왜곡하고 있는데, 이순신/일본어 위키백과에서의 왜곡을 볼 것.

11.2.1.2. 한국
반일감정이 높은 편인 한국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쪽은 정반대로 출저가 불분명한 사료나 검증으로 왜군의 피해를 지나치게 부풀리는 식. 한국어 위키백과도 출저가 불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꽤 보인다.

불멸의 이순신 등,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사극에서도 일본군의 규모를 늘리는 오류를 볼 수 있다. 재미있게도 상기한 위키백과의 '명량해전에서의 일본군 1만 사상' 기재는 다름아닌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나레이션이 출처였다.

사실 이는 드라마 제작진만의 잘못은 아니다. 한산도해전 8,980명, 명량 18,000명 사상 등등의 과장된 자료출처는 옛날 일본 선박이나 함대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을 때 대선-아다케, 중선-세키부네, 소선-고바야로 잡고 일괄적으로 200명, 100명, 40명씩 대입해서 계산한 것으로, 제법 그 역사가 긴 설이고 여러 반론들이 있었지만 이 설이 가장 널리 퍼져서 되려 넷상에서는 정설 비슷하게 취급되게 된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이를 무조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문제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는 이순신역사연구회가 발행한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내용을 인용해 명량해전일본군 사망자를 "일본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라 기술하고 있다. 90명씩 승선하는 대 세키부네는 존재하지만 기함용이나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 혹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규모가 커진 것이 대다수고, 이 시기에는 승무원 50~60명 내외의 세키부네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므로, 이를 일괄적으로 100명으로 계산하는 것은 희생자수를 2배로 격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순신이 지금까지 칭송받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명량해전이나 노량해전 같은 일부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함대규모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접전지역에서는 자신의 병력을 적의 병력보다 많게 유지하였던 뛰어난 전술적 식견에 있다. 따라서 이순신이 항상 '압도적인 열세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라는 과장은 오히려 이순신의 주된 장점을 깎아내리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인터넷 상의 자료는 왜곡된 부분이 있고, 이는 인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역사상의 인물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기록에 따른 철저한 사료 검증이지, 무의미한 과장과 미사여구는 아닐 것이다.

12. 대중문화 속의 이순신

13.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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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교황 레고리오 13세가 1582년년에 개력했으므로 이순신이 태어났을 때에는 아직 서양에서도 그레고리우스력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4월 28일이다. 참고할 기사는 #
  • [2]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 38권, 17년 [[7월 21일](임자) 1번째기사].
  • [3] 사후에 추증한 품계와 직위. 이순신에 대한 추증은 하도 여러 번 이루어져, 최종판이라 볼 수 있는 충무공 묘표를 따른다.
  • [4]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졌는데, 그 중 1등급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받은 사람은 딱 세명인데,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
  • [5] 정 1품의 품계.
  • [6] 임진왜란 종전 직후에는 우의정, 그 후에 선무공신에 봉하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으로는 정조 때 가증.
  • [7] 영의정이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관직들이라 여기 같이 붙었다.
  • [8] 이하는 전사 직전의 관직.
  • [9] 조선의 관직에서 '행'은, 실제 받은 품계보다 낮은 직위에 임명될 경우에 붙는 설명이다. 정헌대부는 정2품 품계인데, 삼도수군통제사는 신설 직후는 정3품, 정식 직책이 된 이후에도 종2품이었다.
  • [10] 정 2품의 문반 품계. 조선이 무반을 천시한 것은 여기서도 알 수 있는데, 이순신에게 무반의 품계인 '장군'을 주지 못하고 문반 품계인 '대부'를 준 이유도, 무반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이 최고이고 그 이상으로 가려면 문반 테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11] 시호. 역대 임금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이름. 문반은 '文', 무반은 '忠'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가장 격이 높다.
  • [12] 그가 지휘한 첫 해전인 옥포 해전부터 마지막으로 지휘한 노량 해전까지 총 28회의 해전의 전적은 28전 28승 무 0패. 다만, 사로 병진 작전 중에 육군의 비협조로 공자로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정도는 있다. 물론 이 때는 수군이 주력이 아니고 육군이 주력이어서 그런 것. 이는 인류 전쟁사를 통틀어도 거의 유일무이, 전무후무하다시피 한 전적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23전 23승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에게 이순신이 몇 번 이겼냐고 묻는다면 23전 23승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13] 병법에서 말하는 명장은 크게 2가지 유형이 있는데 1번째 유형은 철저한 준비로 전황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이기는 싸움만을 하는 명장 2번째 유형은 상대적인 열세에서 우세한 적과 싸워 이기는 명장이다. 전통적인 병법서에서는 2번째 유형보다 1번째 유형을 더 높게 쳐주는데 충무공 이순신은 전형적인 1번 유형의 명장이면서도(대표적인 것이 한산도 대첩 육상전에서도 구사하기 힘든 거짓후퇴 및 유인, 매복을 위시한 포위섬멸전을 육상보다 최소 수배는 더 구사하기 힘든 해전에서 완벽하게 구사했다.) 명량 해전을 통해 2번째 유형의 명장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 [14] 1931년 이윤재작인 <성웅이순신>이란 전기작품에서 처음 이순신을 성웅으로 칭함
  • [15] 조선국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명국 정1품 도독을 함께 지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국군해군참모총장미군원수를 함께 지낸 셈이다.
  • [16] 형제들의 이름도 유가에서 숭상하는 전설상의 임금들의 신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큰 형은 이신(李羲臣), 작은 형은 이신(李堯臣), 아우는 이신(李禹臣)이다.
  • [17] 하늘이 보낸 인물에 선조(...)가 들어가기도 하고,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선조는 임진왜란 전만 해도 이순신의 후원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했을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도 선조가 강하게 고집한 결과이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의심이 본격화 된 것은 이몽학의 난 이후이다.
  • [18] 게다가 이순신은 식량, 병력등의 중앙정부의 지원은 단 한번도 받지 않고 군대를 운용했으며, 오히려 전국이 털리는 바람에 종이마저 부족한 중앙정부에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한산도 일대에 둔전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 했으며, 청어를 잡아 이를 군비로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모든이들이 기피하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을 벗고 뛰어다녀 강제징집(...)을 시전해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적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 한번 뿐이었다.(반대로 원균에게는 5천명의 병력을 지원해주기 까지 했다. 물론 그 결과는...)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자급자족해가며 자체 보급을 했고 그 보급한 병력으로 일본군을 캐발랐다는 소리.
  • [19] 해당 검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 [20] 문화관광부로부터 표준 동상으로 인정받았으며, 높이 8.45m의 단일 동상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 [21] 2008년경에 한 번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었다.
  • [22] 이영훈이 작사, 작곡하고 이문세가 부른 1989년 노래 <장군의 동상>은 바로 이 동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다.
  • [23] 그의 초상을 본 가토 기요마사참으로 장군의 용모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 [24] 1952년 진해 북원로타리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동상이다. 동상제막에 이승만대통령과 정부주요인사도 참여하였다. 이 동상에 제를 드리는 것이 계기가 되어 진해군항제가 생겨났다고 한다. 또 이것과 더불어 1953년 통영 남망산 동상과 1955년 부산 용두산공원 동상이 이미 광화문 동상보다 10여년 일찍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25] 이와 함께 이순신이 중인출신임에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낭설도 같이 퍼졌는데 이순신의 본가인 덕수 이씨는 엄연한 양반가문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역시 양반이 맞다.
  • [26] 율곡 이이와의 일화 한 가지. 이이가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중, 어느 날 율곡이 "거 우리 친척 중에 이순신이라고 똘똘한 놈이 있다며? 함 보자 그래"라고 말을 전했는데, 이순신은 "율곡 선생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사적으로 만나면 안 될 것 같다."라면서 "인사권을 가지신 동안엔 만나지 않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27]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
  • [28] 사실 위작이라기 보다는 칭기즈 칸이 이랬으니 절망하지 말아라라는 의도로 만들어졌는데 어쩌다 보니 실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되었다. 처음 이걸 지은 사람도 나중에 이게 돌고 돌아서 누가 실제 어록이라며 퍼와서 소개해주는 바람에 황당해했다고 한다.
  • [29] 성웅의 부인답게 방씨부인도 굉장히 당차고 슬기로운 성격이였다. 가장 잘 알려진 얘기로 부인이 어릴적 밤중에 도둑이 집에 들자 명궁인 아버지 방진이 활로 응사했다. 허나 도적들은 이미 내통자가 있어 화살을 미리 치운 후 였다. 거기다가 밤중이라 시야가 좁아져 속수무책이던 상황. 그때 아직 어린 방씨가 화살은 아직 많이 있다며 한 무더기의 화살을 가져왔고 그 얘기를 듣자 도적들은 지레 놀라 도망쳤다. 나중에 알고보니 화살이 아니라 여인들이 베를 짤때 쓰는 대나무였다.
  • [30] 병과에서 4등을 했다. 한편 이 4년간의 공백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박중훈이 이순신으로 분한 천군이다.
  • [31] 발포진의 관사에 수령이 오래 된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 좌수사 성박이 이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다고 제지한 일.
  • [32]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가 불법점거하여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추후 통일이 되면 영토분쟁의 가능성이 높은 곳.
  • [33] 백의종군 자체는 보직해임 정도의 형벌로 장군을 병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아니다.
  • [34] 참고로 배한성의 고전열전 난중일기에도 녹둔도 전투가 있다.
  • [35] 토벌군은 전사자 없이 여진족 전투원 380명을 죽이고 여진 가옥 200여 가구를 불태웠다.
  • [36]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이 파트에서 좌수사에 원균을 먼저 꽂았는데 신하들이 반대해서 선조가 "콜~."하는 게 나온다.
  • [37] 조선 수군은 고을마다 배의 정수가 정해져 있었다. 평시에 편제를 벗어난 함선은 철저한 관료제 사회이자 군사반란으로 건국된 조선의 성격상 엄격하게 금했다. 어쩌면 거북선은 그 정수를 벗어난 일종의 비인가 장비였을 수도 있으나 거북선 건조시에 전라감영에서 군관 등이 파견된 것으로 미루어 상부의 허가 내지는 묵인 정도는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말 그대로 전력의 강화임과 동시에 어쩌면 불법이었을 수도 있는 셈. 실제로 임란 전에 정수 외의 배를 건조해서 전투부대에 운용하다가 파직된 수군 장수도 있었다.
  • [38] 육-수군을 통틀은 최초의 승전은, 임진강변에서 부원수 신각의 군대가 군을 무찌른 전투가 있다. 단, 전투 직후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 관계를 확인않고 섣불리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신각은 이기고도 적전도주 죄목으로 참형당한다.
  • [39] 사실 이 때문에 조선은 하다못해 세금과 진상품도 조운선을 통해 수로로 조달했다.
  • [40]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기타지마 만지 저/경인문화사/2008 ,『이순신과 히데요시』 가다노 쓰기오 저/우석출판사/1999
  • [41]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냈다고 한다. 고니시와 가토는 앙숙.
  • [42] 참고로 비슷한 상황에서 원균은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칠천량 해전 항목 참조.
  • [43] 이순신이 백의종군 시작 후 불과 6개월 뒤에 명량 해전이 일어났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명량해전 초반에는 완전히 통제사 무쌍 급으로 이순신의 배 혼자서 다 싸웠다.
  • [44] 다만 역모 사건과 관련되었거나 기사환국에서 오두인, 박태보 등을 문초할 때처럼 왕권과 관련된 죄목이 명백할 경우엔 죽을 수 있을만큼 강한 고신이 가해질 수도 있으나, 전후사정을 봤을 때, 이순신에게 강한 고문이 가해졌다기 보담은 남이의 옥사에서처럼 사실관계를 우선 밝히는 양상의 고신이 가해졌을 것이다. 또는 이순신에 대한 분위기가 선조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했을 가능성도 있다.
  • [45] 하지만 윤두수가 세운 작전에 대해 선조는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 경우가 꽤 있다. 그리고 대개는 선조의 시각이 맞았다.
  • [46] 게다가 윤두수가 원균이 이순신에게 무례하게 한 것에 대해 애기했는데, 그 내용이 원균이 자기 친척인데 이순신이 원균의 후배여서 원균이 질투심에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윤두수 스스로가 원균을 변명한답시고 오히려 더 졸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물론 선조는 이것을 알지 못햇다.
  • [47] 주력 전선 판옥선과 소수의 거북선, 후선과 협선 및 척후선 포함
  • [48] 조선 수군의 주임무는 일본의 해적을 감시하고 임진왜란의 경우와 같이 일본의 정규군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해상전력 대부분을 충청, 전라, 경상의 세도에 집중시켜 놓았다. 다른 지역 해상전력의 경우 수군절도사 직위를 해당지역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겸임할 정도로 유명무실했다.
  • [49] 배설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배설 항목 참조.
  • [50] 배설은 도망갔고, 김억추는 명량 해전 이후 육진으로 전근 가버렸다. 그 이후 임명된 수사들(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은 전부터 이순신 휘하에 있던 부장들이라 지휘체계에 큰 혼선이 오지는 않았다.
  • [51] 원문은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 [52] 생각해 보자. 당시 적의 함대는 100여척이든 300여척이든 500여척이든 우르르 밀고오는 상황이고, 이걸 요격하겠다고 나선 아군 함대는 고작 10여척에 불과했다. 이런 급박 + OTL 상황에서 누가 되든 일일이 적함이 몇척이나 되는지 편하게 세고 있을 수가 있나--;;
  • [53] 다만 쇠사슬이 아닌 현수교 지탱등에 쓰이는 강철 케이블이라면 가능한데, 손가락 두께의 특수강 수천가닥을 꼬아서 만드는 이 케이블 기술은 1900년대 초에나 등장했다(...). 진짜 쇠사슬로 왜군 함선을 막았다면 통제사또께서 어디서 외계인 고문을 하신 걸지도...
  • [54] 비슷한 예로 중국 삼국시대 말 가 망할 때 장강을 타고 상류에서 내려오는 서진 군대를 양자강에 쇠사슬을 쳐서 막아보려 했지만 진나라 군대는 기름 먹인 뗏목을 잔뜩 떠내려보낸 뒤, 거기에 불을 붙여서 쇠사슬을 녹여버렸다고 한다. 물론 쇠사슬이 저 정도 불에 녹아버릴 리는 없지만,(철쇄 중간의 부표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고작 뗏목의 질량낙하에 뚫렸다고 한다면 철쇄의 효력은 그저 안습일 따름(...).
  • [55] 일본에선 제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성 지휘관인 진주목사 김시민을 모티브로 한 '목사'라는 괴물을 만들기도 했다.
  • [56] 소설가 김경진은 자신의 소설 임진왜란에서 직산전투는 단순한 양군 충돌에 불과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 직산전투는 도합 1만에 달하는 양군 병력이 6차례에 걸쳐 충돌한 상당히 큰 전투로 일본군은 선빵을 날린데다 지원군으로 기병대까지 투입하고도 명군을 이기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직산 전투로 인한 일본 측의 사상자는 전무했고 일본군의 전력도 거의 온전이 보전한 채로 전투가 끝났기 때문에 사실상 직산 전투의 의의라고 해봐야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 막은 것에 불과하다. 즉, 이건 섬멸전이었다기보다는 일본군을 밀어낸 '구축'의 의미가 더 강했던 셈.
  • [57] 실로 대단한 일인데, 중국어에서 야(예)는 대충 '아버지'등의 뜻이 있고, 노야(라오예)는 '나리, 마님'이란 뜻이 있는 존칭이기 때문이다. 당시 기준으로 대국에서 지원을 온 천병의 수장이 소국의 수군 장수를 나리라고 높여 불렀단 뜻이다.
  • [58] 알기 쉽게 설명하면 4성 장군인 미군 해군참모총장이 2성 장군인 대한민국 1함대 제독을 오히려 상관처럼 예우하며 말을 할 때 'Sir'를 붙였다는 얘기다.
  • [59] 특히 2005년도 영화 '천군'에서는 북한 장교로 분한 김승우가 극중 대사로 "그건 남조선에서 만들어진 영웅 아닌가." 라고 대사를 친다... 그런데 북한의 해군 최고위 무공훈장 이름이 이순신훈장인데?!
  • [60] 이 부분은 덕수이씨 전체가 아니라 충무공파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율곡 계열인 문성공파는 반대로 문과에만 줄줄이 급제 했다. 이는 덕수 이씨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성공파 중심의 문골세력과 충무공파 중심의 무골세력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다.
  • [61] 어떤 선비가 꿈에서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영웅들(김시민, 송상현, 조헌 등)이 한자리에 모여 한 마디씩 하는 걸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인데 여기서 다른 영웅들은 이순신을 가장 상석에 앉힌다. 전사한 원혼들에게 신립은 욕을 먹고 원균은 몰매를 맞는다.
  • [62] 장순과 허원은 모두 당나라 안사의 난 때 활약했던 장수들이다. 함께 수양성을 지키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전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안록산이 이끄는 반군의 회유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모두 충절을 지켰던 인물로 칭송받았으며 도교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 [63] 윤휴 이복 형의 장인이 바로 이순신이다. 백호전서를 읽어보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질 정도로 이순신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64] 계미사행의 수행원으로 승사록은 사행을 다녀온 뒤 쓴 기행문이다.
  • [65] 윤휴와 더불어 조선 후기 이순신 팬질(…)의 양대 산맥. 홍재전서나 실록 곳곳에서 이순신에 대한 칭송을 침이 마르도록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 [66] 일종의 임시 검열관
  • [67] 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다.
  • [68] 1587년에 전라도 손죽도를 왜구가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전라좌수군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하기 바빴으며 녹도만호 이대원 만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와 징후를 감지하자 조정에서 유능한 무관들을 특채로 채용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 [69]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되지 않으면 자리를 바꿀수 없다.
  • [70] 1592년 한해 전사자는 총 39명이고 부상자 162명이다. - 1967년, 이형석자 임진전란사 부표 1701~1706쪽.
  • [71] 임진장토 만력 20년. 1592년 5월 10일 계본.
  • [72] 적선이 모두 격침되었다.
  • [73]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 군관 나대용.
  • [74] 2차 출전 모든 전투 총합해서 전사 11명, 부상 47명
  • [75] 7월 6일 출전.
  • [76] 할복 자살했다.
  • [77] 8월 24일 출전.
  • [78] 녹도만호 포함.
  • [79] 함선이 128척이나 날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수가 의외로 적은데, 당시 일본군은 해상으로 나오지 않고, 바다가 보이는 육상 진지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도 더 많은 수의 적함을 날려버리는데 작전 목표를 두었다.
  • [80] 총 5번의 교전이 있었는데 이를 세분화해서 나누는 경우도 있다.
  • [81] 양 측다 교전이 아닌 탐색전 형식이라 사실상 피해가 양측다 없었다. 참고로 이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모두가 겁을 먹고 나서지 못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몰아냈다.
  • [82] 출처는 위키피디아. 16,607명 전사라는 말이 있는데 출처를 알 수 없다. 이정도 피해면 조명연합군은 전멸당한 거다. 그러나 절이도 해전이 저렇게 대규모 해전이 아니라는 가설이 더 설득력있다. 적선 50여척을 격파했다는 식의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서 나오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이 끝나고 50년 뒤에 작성되었고, 이분의 행록에서 절이도 해전에 대해 취급했으나 소규모 해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 [83] 舜臣自領水軍 突入賊中 發火砲 燒五十餘隻 賊逐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 [84] 이순신의 단독 작전이 아닌 명나라군과의 연합 전투다.
  • [85] 이 때 조선군의 피해는 이순신이 반대했지만 명나라 수군의 무리한 단독 작전으로 왜군에게 쫒기자 어쩔 수 없이 도와주었고 그 때문에 입은 피해다.
  • [86]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박동룡, 흥양 현감 고득장, 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 포함.
  • [87] 기록들에 따라 다른데 확실한 건 300~500여척의 전선 중 50여척만 살아 돌아갔다는 것이다.
  • [88] 다만, 세간에서 인간 이순신을 연구한다는 취지 아래에 무작정 죽기 무서워서 자살한 척 했다는 설보다는, 전란을 끝내겠다는 신념 아래에서 전란을 길게 만들어버리고, 그 결과로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남쪽바다에 뭍어버린 자신에 대한 속죄로 적탄에 스스로 맞은 것처럼 묘사한다. 중요한 대사는 바로 이 바다는,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물론 이게 자살설이 아귀가 들어 맞는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 후술.
  • [89] 실제로 명군의 주력 전선인 호선과 사선은 그 크기가 일본측 전선인 세키부네보다도 작은 배라 화포조차 제대로 탑재되지 않는 막장 전선이다.
  • [90] 이우각이 쓴 통곡, 이순신 실록에서도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 [91] 다만 순조 19년 승정원 일기에서 다시 면사첩이 언급되기는 한다.
  • [92] 울산성 전투 당시 가토 기요마사를 효유하기 위해 면사첩이 보내졌는데, 당시 면사첩을 보낸 것은 명나라 경리 야불수가 직접 영기와 상공기, 면사첩 등을 함께 사람을 시켜보냈다. 그리고 선조 26년에 황응양이 강화(江華)에 있을 때에 면사첩(免死帖)을 가져와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면사첩의 배포 자체는 조선군이 독단으로 수행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 [93] 이 때문에 선조가 면사첩을 보냈다는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임진~정유년 당시 현장 지휘관으로써 면사첩을 받은 장수는 오직 이순신 한명 뿐이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94] 이를 두고, 일부 서적에서는 평소에 항상 입버릇처럼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순신에게 면사첩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종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 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 [95] 어떤 의미로는 그동안 저평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른 해전은 군율이나 사전 준비등의 다른 요소들로 가려질 수 있지만 명량 해전은 이를 빼놓고는 설명할수가 없다.
  • [96] 수적으로 불리했던 이 해전들 중 옥포해전은 기습으로, 한산도 해전은 유인후 포위... 전술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시작한 해전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심지어 저 명량해전조차 좁은 물길과 빠른 유속으로 유명한 명량을 끼고 싸웠을 정도로 이순신의 전략적 식견은 대단했다. 물론 최근의 연구자료에서는 명량의 물결이 오히려 전투 초반에 조선군의 기동을 방해했다고는 하지만, 명량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아예 싸울 수조차 없었다.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친 울돌목은 전장으로서는 최악의 환경이지만, 당시 절대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의 입장에서 포위를 피하고 그나마 유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지형과 환경의 제약은 그 수가 많은 쪽에 더욱 불리하기 때문이다.
  • [97] 당시 전라도 수군이 좌, 우수영 모두 합쳐 함선이 최대 50척에 불과했는데 반해, 경상우수영은 단독으로 최소 75척~최대 100척 가량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는 경상도가 일본에 접해있는 최전선이기 때문.
  • [98] 유성룡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파직될 떄 선조에게 이순신은 저와 동향 사람인데 강직하여 직무에 맞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라고 하기도 햇다.
  • [99]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
  • [100] 이에 대해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씨가 사위를 박대함으로서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의 표시를 보냈다는 해석이다.
  • [101]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 [102]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 [103]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이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의 슬픔도 있었겠지만 이면이 이순신 본인을 가장 많이 닮아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라는 점 떄문이기도 했다.
  • [104] 한국 군형법 기준 탈영: 제27조(지휘관의 수소 이탈) 지휘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수소를 이탈하거나 배치구역에 임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2. 전시, 사변 시 또는 계엄지역인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 물자횡령: 제75조(군용물 등 범죄에 대한 형의 가중) ① 총포, 탄약, 폭발물, 차량, 장구, 기재, 식량, 피복 또는 그 밖에 군용에 공하는 물건 또는 군의 재산상 이익에 관하여 「형법」 제2편제38장부터 제41장까지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1. 총포, 탄약 또는 폭발물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2. 그 밖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 적전도주: 제30조(군무 이탈) ① 군무를 기피할 목적으로 부대 또는 직무를 이탈한 사람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적전인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
  • [105] 예를들어 원균을 비판할때 자주 나오는 친인척 입시하의 부정시험 같은건 당시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 [106] 현대의 학자들은 만성위염 또는 위궤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 [107] 의외의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난중일기에서 누가 오면 술을 먹여 보냈다거나 밤새 같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정말로 많이 나온다. 부하나 동료 아무개가 술 먹다 뻗어서 인사불성이 됐다는 기록도 많다.
  • [108]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자신이 활쏘기를 얼마나 했는지를 '활 ~순(巡)을 쏘았다'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1순(巡)'은 한 사람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화살 다섯 개를 쏘는 것을 의미한다. '5순'을 쏘면 화살 25개를 쏜 것이고, '10순'을 쏘면 화살 50개를 쏜 것이다. 이순신은 활쏘기를 하면 대개 10순을 쏘곤 했다.
  • [109] 실제로 난중일기에 병사들이 상륙해서 배 만들 목재를 조달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 [110] 이 행위는 왜군들도 자주 했다. 전장에서 자원을 모아서 무기를 만들어 싸우는, RTS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임진왜란 때는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엄연히 보급로가 시원찮아 보급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지, 국가에서 보급을 안해 줬던 게 아니다.
  • [111] 불멸의 이순신에도 이를 묘사했다. 극중 군졸인 대만이 도성으로 보내는 공물을 보면서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이거 그냥 확 불질러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자 영갑이 '누가 아니래냐. 총알에 화포에 피해가면서 전쟁하는 놈들, 애쓴다고 곡물 보태주지는 못할 망정, 둔전소에서 곡식 나오는 족족 도성으로 보내라, 명나라 놈들한테 보내라, 참말로(...)'라 대답한다. 그에 호응하는 군졸들이나 백성들은 덤. 실제로도 수군 간부/병사들이나 백성들 할 것 없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 [112]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거나 등등. 심지어는 세종대왕만 해도 장영실에 대한 석연찮은 숙청이라든지, 화폐 사용을 무리하게 정착시키려다 많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 일이나, 팔만대장경을 왜나라에 주려고 한 일, 백성들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면서 본인은 매 끼니 고기를 먹었다는 등의 자잘한 오점이 있다.
  • [113] 사실 그렇지도 않다. 2000년대까지 국내 사학전공자 중에 순수하게 이순신 연구해서 박사 학위받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임진왜란이나 임진왜란 해전전반 혹은 선조시기 정치사와 연관지어서 다뤘고 해군은 충무공 리더쉽센터를 만든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리더쉽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연구소를 만드는 등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인물 이순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학자들에게 관심을 못받은 케이스다.
  • [114] 얼마나 허술했는지 장부상 오차에 화살이나 군량 정도가 아니라 군함!!이 비는 수영도 있었다!!
  • [115]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이 자신을 장군이라고 부른 부하에게 개념없다면서 화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굉장히 고증이 잘 된 장면.
  • [116] 또한 각 지역마다 위인 한 사람씩 선정해 사당을 보수하고 그 행적을 널리 알리게끔 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장사(壯士) 김덕령,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이 무렵 부각된 위인들.
  • [117] 상식적으로는 뒷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초상화 있는 쪽이 앞면이다.
  • [118] 임진왜란뿐 아니라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는 청어잡이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청어는 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했으며, 대마도에 보내 왜구들을 달래는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 [119] 아예 책으로도 나왔다. 여기에는 김유신도 소개되어 있다.
  • [120] 무슨 문헌을 참고하고 썼는지, 계속 'Yi-sun'이라고 이순신 장군을 호칭한다.
  • [121] 하지만 팽배수나 등패수 역시 방패 안에 표창을 가지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것을 투척한 뒤에 전방에서 아군의 진영을 보호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한다.
  • [122] 당파로 적의 창을 잡으면 장창병들이 찌르는 방식
  • [123] 특히 마상무예에서 검을 쓰는 것은 기예 수준으로 취급되었다. 무예도 보통지 참조.
  • [124] 원 한문 텍스트 옆의 일본어 구두 표시(한국의 구결에 해당됨)까지 옮겨 일본어 어순으로 재배열한 것.
  • [125] 鷄林. 원래 신라의 별칭이지만 '고려'와 함께 조선을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링크된 루리웹 댓글 중에 '계림은 조선을 낮춰 부른 말이다'란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본토에서의 무사나 상인들조차 조선다발을 그냥 고려자기라고 불렀다. '조선', '고려', '계림' 등은 애초에 서로 통용되는 말이었던 것. 일본은 조선의 국호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온 외교관이 국서에 고려라는 말을 썼다가 "남의 나라 국호도 모르면서 외교를 하려 하느냐, 고려는 400년 전 망했다"라고 쫓겨난 적도 있다.
  • [126] 김시덕, <그림이 된 임진왜란>
  • [127] 다른 유명한 일화로 "넬슨과 나는 비교하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마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도고 제독에 관한 이런 일화들의 원전은 川田功이 쓴『砲弾を潜りて』(博文館、1925年)이며, 이 책은 전기소설이다.
  • [128]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몇 개의 서적에서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사료로써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 모양.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라는 발언이 실려있다는 『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는 서적도 일본과 중국의 국교회복 서명운동의 실시를 위함과 동시에 한일회담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 서적인 듯하며, 그리 신뢰할 수는 없는 서적이라는 모양이다(#).
  • [129] 이런 정서는 오늘날 일본 문화 컨텐츠에서도 은근히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 캐릭터가 '내가 제일 잘났다!'고 날뛰는 모습은 별로 좋게 보지 않고, 어떤 역사상의 인물이나 같은 분야의 선배격인 인물을 '룰 모델'로 삼고 거의 광빠(…) 적으로 추종하며 그 사람을 본받아 정진하는 태도를 더욱 좋게 본다.
  • [130] 예컨데 난중잡록. 신뢰도가 높은 강항의 기록도 그의 입장상 풍문이 상당수 섞여있고 교차검증시 틀린 부분이 있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