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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야구)

last modified: 2016-10-08 21:23:25 Contributors

Contents

1. LG 트윈스 투수 코치
1.1. 현역 시절
1.2. 은퇴 후
1.2.1. 두산 베어스로...
1.2.2. LG 트윈스로 복귀
1.3. 기타
1.4. LG 트윈스와의 악연
1.5. 연도별 주요 성적
1.5.1. LG 시절
2. 삼성 라이온즈 출신 전 투수
2.1. 연도별 성적
3. 삼성 라이온즈의 타자
4.SK 와이번스의 투수
4.1. 연도별 성적

1. LG 트윈스 투수 코치


야생마라는 별명이 어울렸던 LG 시절의 투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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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G image (Unknown)]


야생마와 더불어 마운드의 삼손이라는 별명을 생기게 한 현역 시절의 긴 장발과 아웃을 잡아내고 포효하는 승부욕, 추운 날씨에도 반팔 유니폼만 걸치고 나와 공을 던지는 파이팅 넘치는 모습은 현역 시절 이상훈을 기억하는 이들이 가장 기억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블론세이브도 많았다. 과감한 승부를 즐기는 탓에 0B2S나 1B2S처럼 유리한 카운트에서 성급하게 잡으러 들어가는 경우도 잦았거니와, 스피드에 비해 공이 가벼웠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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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만화가 최훈이 그린 이상훈 일러스트.


고양 원더스 투수코치가 된 이후. 그의 상징과 같았던 장발과 수염들이 정돈되었다. 야생마도 성큰옹이 무섭긴 무섭나 보다.[1][2]


두산 베어스 코치 시절. 푸른거탑 행보관 닮았다


2016년 1월 6일 신년식에서.

LG 트윈스
이상훈(李尙勳)
생년월일 1971년 3월 11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학력 강남중-서울고-고려대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3년 1차지명 (LG 트윈스)
소속팀 LG 트윈스 (1993~1997, 2002~2003)
주니치 드래곤즈 (1998~1999)
보스턴 레드삭스 (2000)
SK 와이번스 (2004)
지도자 고양 원더스 투수코치 (2013~2014)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5)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3] (2016~)

1995년 한국프로야구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정명원(태평양 돌핀스) 이상훈(LG 트윈스) 구대성(한화 이글스)

1997년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구대성(한화 이글스) 이상훈(LG 트윈스) 임창용(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 등번호 47번 (1993~2003)
김진명 (1991~1992) 이상훈(1993-2003) 승준 (2004)

SK 와이번스 등번호 47번 (2004)
조중근(2001~2003) 이상훈(2004) 최정(2005-2006)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 해 주십시오. 감독님,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3경기 연속 등판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박빙의 상황이 되자 자진해서 불펜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김성근 당시 감독이 나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자 한 말.

그러나 이 경기에서 그는 이승엽에게 동점쓰리런을 맞고, 곧바로 강판당했다.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가수, 현 지도자. LG 트윈스, 주니치 드래곤즈, 보스턴 레드삭스, SK 와이번스 에서 현역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투수 중에서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과 함께 한, 미, 일 프로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이다.

등번호는 47번(LG, 1993~1997) - 17번(주니치) - 40번(보스턴) - 47번(LG, 2002~2003 & SK, 2004)

1.1. 현역 시절

서울고등학교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좋은 폼을 가진 130대 후반의 공을 던질 수 있는 좌완 투수로 이름이 나있었지만 큰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다고 한다. 한편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돈을 벌기 위해 대학시절 여러 차례 학교를 이탈한 적도 있지만(정확하게 14번이라고 한다.), 학교 선배이자 절친인 고 임수혁과 임수혁 선수의 부친, 그리고 고려대 시절 은사인 고 최남수 감독의 도움으로 대학 야구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투수로 성장했다. 고려대 시절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깨닫고 트레이닝을 늘리며 145km/h까지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좌완 파이어볼러로 한층 성장했다.

고려대학교 4학년이던 1992년 대학야구 춘계리그 때 성균관대학교 와의 경기에서 무려 14타자 연속 탈삼진 이란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우며성대가 죽었슴다;단박에 서울특별시 연고 프로 팀의 영입 0순위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도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였으니. LG 트윈스OB 베어스가 이상훈을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혈전을 벌였지만 결국 이상훈의 향방은 주사위 승부로 결정되었고, 또 OB는 주사위 때문에 호구잡혔다서울특별시 지역 우선권을 얻은 LG 트윈스가 그를 지명하면서 이상훈은 1993년 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2억의 몸값에(계약금 1억 8천 8백만원, 연봉 1천 2백만원) LG의 유니폼을 입었다. #

데뷔 첫 해인 1993년 9승을 거두며 아쉽게 두 자리 승수엔 미치지 못했지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고,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탈락 직전의 팀을 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김태원-정삼흠과 선발 삼두마차를 이루며 1선발로 맹활약, 18승으로 조계현과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 LG가 그 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일등 공신으로 남았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적이었지만 그 해 태평양 돌핀스 소속으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40세이브(세이브포인트가 아니다.)를 올린 마무리투수 정명원의 임팩트에 밀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다.

1995년에도 20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 최후의 좌완 선발 20승[4]까지 기록했으나 MVP는 김상호에게 넘겨 주었으며, 본인도 롯데 자이언츠와 맞붙었던 플레이오프에선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5][6] 어찌 됐건 95년의 이상훈은 98년의 김용수, 2001년의 신윤호와 같이 2014년까지 나오지 않은 LG 출신 MVP에 근접했던 선수였다.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진과는 달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온 1995년 2회 한일 슈퍼게임의 1, 5차전에 선발 등판해서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 12이닝 1실점이라는 엄청난 호투를 펼치기도 했다. 특히 1차전은 일본도 전력을 기울인 베스트멤버였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인 피칭이었고 일본과 상당한 수준차를 느껴야 했던 1991년 1회 대회에 비교해서 한국이 일본과도 비등한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1등 공신. 그래서 일본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95년 페넌트레이스 4일 등판 - 포스트시즌 - 한일 슈퍼게임까지 이어지는 혹사의 후유증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1996년 시즌 도중 손가락 혈행장애의 발병으로 더 이상 선발로 출전이 힘들어지며 김용수와 보직을 맞바꾸어 계투 및 마무리 요원으로 활약했다. 본격적으로 마무리로 돌아선 1997년 시즌에는 10승과 37세이브로 47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구원왕 타이틀 홀더가 되었다. 이는 당시 정명원이 보유하고 있던 한 시즌 세이브포인트 기록을 깬 신기록이었으며 이후 진필중에 의해 기록은 다시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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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시절의 이상훈.

이듬해 1998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여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했고 199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페넌트레이스 우승에도 공헌했다.[7] 98년도에는 혈행장애의 악화와 그런 상태로 무리하게 선발투수로 보직을 정하고 던졌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99년도부터는 호시노 감독에 의한 보직 변경으로 선발보다는 주로 중간계투나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며 빼어난 성적을 거두며 99년부터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선동열의 공백까지 메꿨다. 이후 1999 시즌 종료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 마이너리그 팀에서 뛰는 등 해외에서 활동하다가 방출되어 2002년 LG로 복귀, 2년 간 마무리 투수로 뛰다가 2004년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으나 그 해 시즌 초반에 전격 은퇴를 선언하며 유니폼을 벗었다.

1997년 시즌이 끝난 후 어찌 보면 막무가내로 해외진출을 요구하며 결국 LG 측은 보스턴 레드삭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는데 뜬금없이 MLB 사무국에서 끼어들어 감놔라 배놔라 하는 통에 워크아웃을 거치다보니 몸값이 반 이하로 후려쳐져 있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금액에 LG가 먼저 손을 씻었고 어차피 안고 갈 수도 없는 바에야 자매구단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 후 완전 이적 조건으로 떠나보낸다.

LG 트윈스를 처음으로 떠날 때 프런트와 감정이 극도로 상해 있었다.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주 요인은 그가 야구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광환 감독을 해임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앙금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아서, 임대 중인 일본 무대에서 괜춘한 활약을 보인 뒤 그를 완전 이적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순전히 'LG에 이익을 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절대 일본에 남지 않겠다"는 충격발언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가 바야흐로 주니치 드래곤즈가 다이에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맞아 신나는 재팬시리즈를 치를 무렵(...)

다만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LG와의 감정 이전에 미국 진출에 대한 동경 자체는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니치 대표는 그의 잔류를 위해 설득했지만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오히려 "삼손, 좋아. 남자는 꿈을 가져야 해" 라며 격려해줬다고 한다. 이런 주니치 측의 반응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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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시절의 이상훈.

결국 일본을 거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하지만 유망주라기엔 적지 않았던 나이,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기회조차 적었다. (그냥 실력이 없었다고 왜 말을 못하니!) 결국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던 와중 방출되어 복귀 의사를 타진했고, 김성근 감독이 이를 받아들여 고국에 리턴하게 된다. 그 와중에 애꿎은 김성근을 낙마시켜 버리는데, 김성근과 이상훈 조합도 충분히 유효했을 것이고 두 당사자 모두 납득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상훈과의 계약(이광환 감독의 복귀)을 준수하기 위한 LG 프런트의 과감한 결단력이 아이러니하게도 별 개같은 효력을 발휘한 덕분이다. 2002년의 말도 안 되는 LG 트윈스의 전력으로 준우승을 해낸 김성근 해임의 이유는 'LG가 추구하는 야구 스타일이 아니다'였다. 어윤태의 미친 짓 당시에는 우승을 해야 LG 스타일이었던 듯. 하지만 막상 이광환 감독도 2003년 감독 후 1년 만에 짤렸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이미 많이 지친 몸을 이끌고 3경기 연속 등판하는 투혼을 보였으나 결국 시리즈 전적 2대3으로 뒤지고 있던 6차전 9:6으로 앞서던 9회 말에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고 강판되었고 뒤이어 등판한 최원호가 곧바로 마해영에게 역전 끝내기 백투백 홈런을 내주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LG는 10년 동안 가을야구를 맛보지 못했고,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나서야 김성근의 제자 중 하나인 김기태다시 가을야구를 실현시켰다.

2004년에는 프런트 & 이순철과의 트러블로 SK에 트레이드되었다. 초반에는 괜찮은 공을 던졌으나 이내 급격한 부진에 빠졌고, 결국 친정 팀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며 6억이나 되는 연봉[8]을 포기하고 과감히 은퇴.[9]이 때문에 조범현이 구상했던 조웅천과의 더블 스토퍼 체제가 붕괴되면서 이 해 SK 와이번스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1.2.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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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그룹 "What"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으며 뷰티샵을 운영하였다. 음악을 좋아해서 선수 시절에도 늘 기타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순철과의 갈등도 여기서 온 듯. 당시 이순철 감독은 이상훈이 라커룸에서 기타를 쳐 팀 분위기를 해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상훈은 2010년 4월 5일 LG 프런트의 만행을 폭로한 글에서 자신은 덕아웃, 라커룸에서 기타를 친 적이 없는데 누명을 쓰고 트레이드된 것이라 진술하였다. 사회인 야구에서도 종종 나간다고 하며 그를 봤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공 던지고 덕아웃에서 내려와서 계속 기타만 치고 있었다고 한다. 고된 생활을 했던 자신에게 기타 만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할 정도로 기타라는 악기는 이상훈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은퇴 후 마구마구, 슬러거측의 은퇴 선수 이름 무단사용에 문제를 제기하여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마구마구와 슬러거 측의 병크가 작렬, 사태는 언제쯤 해결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커졌다. 이는 다른 선수들의 경우 KBO 또는 선수협에 권한을 위임한 덕에 양측과의 협의를 통해 문제를 일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상훈은 개인 자격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 그러던 중 프로야구 매니저에 난데없이 서울고 출신 좌완투수 신철수 선수가 업데이트 되었다. 누가 봐도 이건…[10]. 트집잡힐 게 두려웠는지 등번호는 물론 기록마저 죄다 0으로 표기해놨다. 아무리 숨겨봤자 코스트랑 스텟은 어쩔꺼야 심지어 2014년 1월 23일 업데이트에서는 그 철수의 레전드 카드도 나왔다! 베이스 카드는 좌완 최후 20승을 올린 1995년도 카드. 물론 통산 스탯, 수상기록 등은 모두 삭제되어 비어 있지만... 유독 마지막 '기타' 항목에는 마운드의 영원한 불꽃, 트윈스의 심장이라고 이 카드를 소개해, 팬들을 아련하게 하고 있다. 영입을 위한 카드 1성구는, 1995년의 호적수였던 김상진.

그리고 2014년 2월 13일 업데이트로 드디어 퍼블리시티권 계약이 됨에 따라 폭풍 간지나는 이상훈 선수의 선수 사진과 실명이 적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마구마구에서도 2월 19일자로 다시 카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2012년 시즌 후 스승인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고양 원더스의 투수코치로 계약하였다. 그리고 외모가 깔끔하게 정돈됐다.

2014년 고양 원더스가 해체됨으로써 원더스의 수많은 선수, 코치진들이 무직 신세가 되어버렸고 이상훈 코치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에 많은 엘지팬들이 내년 시즌 이상훈이 코치로 친정팀에 복귀해주기를 염원하고 있다. 양상문, 차명석, 이상훈 투수 출신 코치라인 오오

2014년 10월 30일, 스승인 김성근 감독의 뒤를 따라 한화로 간다는 기사가 나왔다. 관련 기사 하지만 이상훈 코치가 직접 오보라고 알려왔고, 그 소식을 들은 엘지팬들은 다들 안심을 했지만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1.2.1. 두산 베어스로...

결국 이상훈의 거취는 김성근의 한화도, 친정팀인 엘지도 아닌 잠실 라이벌인 두산 베어스였다. 충공그깽 관련 기사 두산 팬 입장에선 박명환, 김선우, 임재철 일을 한방에 복수[11] 두산 프런트에서는 "검증되진 않았으나, 좌완투수를 기르는 데 최적의 인물로 판단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송일수 관련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은 프런트의 입지도 되살리고(...) 또한 두산 베어스 특유의 '좌완 잔혹사'를 끝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전의 LG와의 악연이 끝내 걸린 것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으나, 어쨌든 영원한 LG 맨이라고 생각되던 이가 하필 다른 곳도 아닌 잠실 라이벌 팀에 간 것 때문에 많은 LG 팬들이 멘붕했다. 그리고 LG 팬들은 금지어를 깠다


2014년 11월 30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4 곰들의 모임'의 신임코치 환영식 때 정식으로 인사했다.
김태형 감독은 이상훈을 2군 투수코치로 기용한다고 밝혔다. 여담이지만 김태형 감독과는 사적으로 조금 친한 편이었다고.

1.2.2. LG 트윈스로 복귀


2015 시즌이 끝난 뒤 LG 트윈스와 정식으로 코치 계약을 맺고 11년만에 LG 트윈스로 돌아왔다. 맡은 보직은 이천 2군에 신설한 '피칭 아카데미'의 초대 원장으로, 투수 유망주들을 선별하여 선수 개인별 목표 수준 및 육성 기간을 설정하고, 맨투맨 식 지도를 통해 선수들을 육성하는 시스템을 총괄하는 역할이다. (인터뷰 링크)

2016년 10월 8일 LG의 시즌 최종전에 시구자로 나와 수많은 LG 팬들에게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여담으로, 시타자는 노찬엽.) 오랜만에 등판한 마운드에서 공 하나만 던지고 내려가기 아쉬웠는지 1루로 견제구를 먼저 던지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뒤 시구를 했는데, 견제구는 물론이고 시구도 마운드에서 내려온지 10년 가까이 된 사람의 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날카롭고 힘이 실려 있었다. 팬들은 "원포인트로 현역 복귀하셔도 되겠다"는 반응 일색. 후배 투수들이 뭔가 조금이라도 깨달은 게 있길 바랄 뿐...

1.3. 기타

  • 유명한 별명으로는 '야생마', 그리고 머리가 야구선수 치고는 심히꽤 길어서 붙여진 '삼손'이 있다. 덕분에 주니치 시절의 등록명이 삼손 리 였다. 먼저 자리잡고 있던 이종범과「LEE」가 겹쳐서 즉흥적으로 결정한게 별명이었던 삼손 리. 데뷔 초창기에는 머리를 기르지 않았었다.

  • 국내에서 뛸 때 달았던 등번호 47번은 톰 글래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 티비에서 톰 글래빈의 투구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던져야겠다고 마음 먹어서 47번을 달았다고 한다.

  • 롯데 자이언츠 선수였던 故임수혁과는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선후배 사이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방황하던 이상훈을 故임수혁이 도와주고 삐뚤어지지 않게 바로잡아 줬다고 한다. 故임수혁이 쓰러진 후 꾸준히 그를 도와 왔으며 2010년 2월 7일 故임수혁이 끝내 눈을 감자 조용히 그의 옆을 지켰다.

  • 2010년 10월 03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서울 국제 자전거 디자인 페스티벌》중 자전거 락 페스티벌에서 공연 중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XXX 2년이나 남았네"라는 논란의 여지가 충분한 발언을 하였다. # 평소 엄청난 보수성향인 LG 트윈스 갤러리에서도 이상훈을 까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사이트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그날부로 별명이 하나 추가되어 좌생마(…)란 별명이 전 야갤에까지 퍼지게 되었다.물론 이순철이 이상훈을 쫒아낸 걸 잘했다는 LG 트윈스 갤러는 한명도 없다.

  • 2010년 4월, LG 트윈스 팀 후배였던 투수 전승남과 함께 경기도 하남시J-47 스포츠 스쿨이라는 사설 야구 클리닉을 개설했다. 공식 카페는 http://cafe.daum.net/ace2840.

  • SkyEN에서 편성된 <이상훈의 MLB the city>라는 여행 프로그램을 찍은 적이 있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편의 4부작이며 MLB시절 고생했던 이야기등의 사담이 많이 나오니 팬이라면 꼭 챙겨보자. 음악과 관련해서도 이야기를 많이하는데 슬래시의 굉장한 팬인듯하다. 장발의 파마머리도 슬래시를 따라했을지도

  • 박펠레스포츠춘추의 박동희가 3부작으로 나눈 이상훈에 관한 인터뷰가 있다.사람들이 잘 몰랐던 이상훈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과거등이 잘 나와있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itzblue&logNo=130083977621

  • 마구마구 갤러리에서는 '품절쥐'라는 별명이 있다. 본인이 성명권 사용을 거절하면서 더 이상 본인은 야구게임에서 볼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다른게임은 가명을 이용하여 선수를 공개했지만 유독 마구마구는 가명을 쓰지않고 선수카드 발매를 중단시켰다. 덕분에 지금은 이상훈의 카드를 소유한 유저만이 사용 가능하게 되었다. 특이폼이 뛰어나게 구현되어 있으며 본의 아니게 희소성이 가장 뛰어난 카드가 되어서, 거래를 할 때는 평범한 스페셜에도 현금 10만원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 본인이 게임에 나오는걸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라이센스 계약을 모두 거절했다고 하는데 2014년 1월 말, 컴투스 프로야구 매니저의 이삼민이 이상훈으로 변경되 업데이트 되어 엘지팬들을 설레게 하였다. 모든 야구게임 사상 최초. 이어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도 초상권 협의가 드디어 이뤄졌다. 따라서 다른 게임에서도 이상훈이 등장할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고 2월 19일자로 마구마구에서도 이상훈 카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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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유독 사진의 퀄리티가 출중하다. 역대 프야매 레전드 카드 중 가장 간지난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 다만 이 사진 선정에는 웃지못할 일화가 있는데 처음 업데이트 예고에는 지금 사용되는 이상훈의 클래식 카드 이미지와 레전드 카드 이미지가 각각 레전드와 클래식 카드에 적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유저들이 레전드 카드가 클래식 카드보다 사진 퀄리티가 더 떨어지냐는 항의댓글을 달았고 결국 클래식, 레전드 이미지가 지금의 사진으로 변경되었다.

    프야매에서의 성능은 발군으로 명실공히 프야매 최강 덱인 94'LG 덱의 1선발로 군림하고 있다. 좌완에 최고급 구종과 등급을 가지고 있으며 유학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팀 혹은 자팀의 레전드 선발보다도 성능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1.4. LG 트윈스와의 악연

한 줄로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김재현과 함께 대표적인 LG 프런트가 저지른 병크의 희생자. 이 둘은 누구보다도 트윈스를 사랑했고 팬들에게 사랑받던 선수들이다.

2010년 4월 5일, 2009년 7월에 LG 프런트가 복귀를 종용하다가 뒤통수를 날린 행각을 폭로하는 내용의 글을 팬게시판인 쌍둥이 마당에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다음은 그가 쌍둥이 마당에 올렸던 글의 전문이다.

정치 트윈스

안녕하세요 이상훈입니다.

몸이 부서져라 팀 전체가 희생했었던 2002년 시즌을 기억하시는 지요?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전이었던 2002년 뼈와 살을 파고드는 날씨의 한국시리즈… 그곳까지 가기위해 자신들을 버렸던 감독, 코칭 스텝, 선수, 그리고 엘지야구 팬들…

아마도 그 기억을… 지우기란 어려우실 것입니다. 또한 그시절을 그리워하며 엘지를 응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구가 아닌...마치 훌륭한 영화의 클라이막스 같은 장면을 여러 번이나 연출을 한 듯한 신들리고 그 추운 날씨에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경기장면들…

그 이후 2003년 시즌이 끝난 후 전 기타를 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운동도 안하고, 팀 분위기 더럽게 만들었던 선수로 내몰아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억지 트레이드를 당해야만 했던 2004년… 참으로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난 덕아웃..락커룸에서 기타친적없다 어느 미친놈이 거기서 기타를 치냐..? )

내입으로도 조차 입에 오르내리기도 창피했던…
나 자신은 결국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어둠 속에 갇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참아야만 했던…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가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런 모습은 프로야구 선수로써의 자세가 못 된다 하며.....
스스로의 자악에 야구를 그만 두었던…
그 후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이자 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타와 음악을 하며 여러 가지 일거리로 생계유지를 하며 7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제가 선수 생활을 하던 중 은퇴했던 선. 후배선수 들의 모습 중에 가장 많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인적인 사업이나 일을 하다가 야구가 그립거나 야구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부딪혀 구단을 기웃거려야만 하는 전직 야구인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너무나도 쓰리고 아팠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야구인이 되기 싫어서 은퇴 후 결정한 것에 대해서 후회 없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였고 누구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고 뭐든지간에 선택한 결정은 뒤도 안 돌아보며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음악에 있어서는 밴드의 스타일과 색깔대로 4장의 앨범이 나오게 되었고, 계속적인 우리들의 무대에서 활동 중에 있으며… (사업이라 해야 하나요?) 생계유지에 있어서도 많은 벌이는 아니지만 가족들과 하루 세끼 챙겨먹으며 아주 큰 탈 없이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전… 그간에 엘지의 성적을 떠나 맘속으로 진정한 응원을 해왔었고,....
또는 크고 작게나마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엘지 복귀나 야구계의 복귀를 외치던 여러 곳곳의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며 알고 지내왔었고,.. 나의선택 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여러가지들의 현실에 마음아파 했었습니다.

엘지 트윈스 팬들의 목말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엘지의 몰락에대한 여파의 여운이라 생각했으며 마치 옛 애인에 대한 그리움이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엘지도 더더욱 훌륭하고, 아리따운 애인을 만나서 옛 애인에 대한 생각은 지나간 추억으로 만들어지는 날이 오겠지…

또한 새로운 설레임속에 데이트를 즐기며 안정된 살림을 차리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마디로 슬프지만 7년전부터 엘지는 무슨 이유인지? 박혀있는 각각의 조강지처들을 보내 버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중 하나였던 나는 버려진 영혼이라 분명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이후에도 많던 적던 나의 새끼들이라 할 수 있는 후배들이 찾아오거나 때로는 찾아가서 라면에 소주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으로 다독일 때도 있었고, 때론 그들로부터 위로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흔쾌하게도 어느 누구든 만나며 지내왔고, 바쁜 시즌에는 그저 브라운관을 통해서 나오는 야구공과 나무 작대기를 휘두르고 던지는 모습을 보며 부상 없이 1년을 잘 치르는 선수가 진짜 프로야구 선수다라는 것을 맘속으로 후배들에게 전달해가며 살았습니다. 하다못해 얼굴한번 제대로 보지못했던 선수들에게도 그 놈의 마음을 읽어가며 품에 안고싶은 마음에 위로의 말을 직.간접적으로 나의 시간과 정신을 들여가며 표현한 적도 있었습니다

잘 커나가는지 숨죽여가며 그냥 뒤에서 항상 앞장서지 못함을 뼈저리게 아파하며 고통스럽게 6~7년을 남모르게 눈물 흘려가며 살아왔습니다.

엘지에 신인으로 들어와 나의 분신이 되 주었던 47번…
문신으로까지 먹물 들여가며 나의 오른쪽 팔에 고통을 주었던 나의등번호......
지금은 의미가 없어져버려서 몇 년 간 또 다른 고통 속에서 지워도 봤지만‐ 잘 지워지지 않네요......

미국 다이아몬드 안에서 야구에 미친놈들과 눈을 부라리고 맞짱 한번 떠보겠다는 심정 하나로 미국 진출을 외치다 구단끼리 오가는 머니가 모자라다며 쌩 까버리고 일본 주니치에 엘지는 렌트 머니 두둑하게 받아가며 그 당시 일본으로 가지 않으면 나쁜 놈으로 낚인 찍혀야만 했던 98년 초…

결국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어 98년 많은 것을 느끼며 병신처럼 보내다가 어찌라도 해보려고 귀국도 하지 않고 미친 듯이 뛰고, 들고, 던지는 몸부림 속에 얻은 혈행장애를 숨겨가며 버틸 수 밖에 없었던 98년 가을서부터 99년 스프링캠프…그리고 개막전까지의 내 모습…

보직에 상관없이 마운드에만 오르는 것을 좋아했었지만 시즌 중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혈행장애 고통의 숨김을 팀에 전달하고 중간으로 보직을 변경해가며 운이라도 좋았는지 최고의 중간 계투진과 건재한 마무리가 버티고 있는 팀이 되어버린 주니치…그리고 11년 만의 샌트럴리그 우승… 허리 척추 분리증… 툭하면 빠지는 어깨탈골… 거기에 혈행 장애…
특히나 갑작스레 닥쳐온 혈행 장애를 이겨 내느라 혈관주사를 맞아가며…
또 그 해에는 왜 이리도 남모르게 어깨가 자꾸 빠지는지 던지는 팔까지 혈행 장애가 섞여서인지 왜 이리도 아프고 쑤셔대는지 혈관주사에 근육이완제까지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주사를 맞아가며 던지던 99년..... 결국 그것도 되지 않아 양쪽 어깨에 살색 테이핑을 두르고 감고 던졌던 것을 생각하면 2002년 못지않은 개인적인 감동의 시즌을 보낸 것 같습니다.

물론 원래의 생각이었던 야구에 미쳐있다는 미국놈 들과 맞짱 한번 뜨기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일본을 떴지만 그 당시 항간의 언론에 나왔던 쥬니치 구단의 몸값 제시액?
여러분 그것은 그 당시 주니치 대표를 제외한 사람 중 저만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인 듯 홀랑 벗고 핏덩이로 태어나서 죽어선 가루가 되어버리는 인간의 법칙이 있듯이 돈이란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결과 또는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확고한 생각이 아직도 나의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듯 그 당시에도 나와의 약속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화려함은 일본에서의 생활이 더했겠지만 야구 인생의 의미로 따지면 마이너리그의 생활이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무궁무진한 것을 보고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메이저에 성공 못한 놈이라고 할지언정… 지껄이쇼!!! 나에겐 그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야구이기 전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야구를 깨달았고, 야구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더불어서 2002년 같은 미친 듯한 시즌도 있을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나에게 돈과 명예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하는 것을 묻는다면.....난 엄마,아빠 중 누가 좋느냐를 물어볼 것이고 난 그저 내 운명을 받아 들이고 택하겠노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즉!!! 본인 앞에 와있고 그것에 대한 사리사욕이 없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을 택하겠노라고 말입니다.

항간의 사람들은 내게 말합니다. 자유분방?....... 여태껏 말입니다. 그 사람들 과연 날 얼만큼 아는지요? ,......맞습니다. 그리 표현하는 것도 그 사람 자유니 억지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유와,자율이라는 단어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억제할 줄 알고, 사리 판단을 할 줄 알며,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순간 생각합니다. 내가 배운 것이 그렇고 느낀 것이 그러하니….....

서두가 길군요....... 난 항상 그렇다....... 서두가 길다!!

그런데…서두가 너무나도 긴 사연이 있다. (아...손가락 힘듭니다..존칭 빼고 가겠습니다)

03년 이후 벌레같이 트레이드가 되어 바보같이 몇 개월 더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제껏 야구에 대한 나의 후회는 엘지에서 병신같이 트레이드 될 때 그만두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라고 주구장창 물어보는 이들에게 대답했었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나와 팀… 모든 것을 위해서 몸이 망가지던 말던 반팔에 그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던졌던 시절… 그런데 아주 정신적인 병신을 만들어서 나를 내쫓은 팀이 뭐가 좋다고 먼발치에서 나마 팬들과 더불어 엘지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때론 대놓고…
언론에 얘기합니다. 난 엘지 팬이라고 또 엘지의 녹을 먹고 살았다고… 물론 엘지도 나로 인한 녹을 먹었겠지만 말입니다…

6년이 지난 작년 09년 7월 말쯤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엘지 단장이 나와 자리 한번 하고싶다고…!!

난 만나지못할 이유가 없었고 편한 시간 잡아 연락 달라했고 단장과의 약속은 하루 이틀 만에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나 또한 단장이 만나자는 말에 쉽사리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인 5~6월부터 인가 내 주변과 주변이 아닌 온갖 야구 관계자들 누구라고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의외의 곳에서까지 엘지 복귀에 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든 재촉 또는 확정에 대한 인사이드에서 돌아가는 말들이 터무니 없는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나의 귀에 들려왔었습니다.

이에 구단과 단장의 변명은 "이상훈이 오해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인사하려고 점심 한끼 하면서 구단 실무자를 두 명이나 대동하고 2시간이나 점심을 먹었을까?

이 사건이 알려진 뒤 올드 팬들이 잠실구장에《성적은 못 내도 상관없으나 추억은 건드리지 마라》는 플래카드를 걸었다가 두산 직원들에 의해 철거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상훈 선수는 안 그래도 LG구단이 봉중근 강등사건 등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플래카드 만은 걸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플래카드 사건 며칠 뒤에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팔이 더러워지는 것 같다"고 하며 더 이상 LG 구단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글을 올렸다.

2016시즌을 앞두고 LG로 복귀한 뒤 이상훈은 이 때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1.5. 연도별 주요 성적

1.5.1. LG 시절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93 LG 트윈스 28 150⅔ 3.76 9 9 0 0 129 10 78 131
(4위)
1994 27 189⅔ 2.47
(5위)
18
(1위)
8 0 0 140 9 64 148
(2위)
1995 30 228⅓
(1위)
2.01
(2위)
20
(1위)
5 0 0 150 12 51 142
(5위)
1996 41 99⅓ 2.54 3 3 10 0 70 8 42 95
1997 57
(5위)
85⅓ 2.11 10 6 37
(1위)
0 56 6 27 103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98 주니치 드래곤즈 11 32⅔ 4.68 1 0 0 - 32 - 12 33
1999 36 95⅓ 2.83 6 5 3 - 75 - 30 65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2000 보스턴 레드삭스 9 11⅔ 3.09 0 0 0 0 11 - 4 6
2001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2002 LG 트윈스 52 85⅔ 1.68 7 2 18
(4위)
0 53 8 33 92
2003 55 56⅔ 3.34 4 4 30
(1위)
0 42 4 21 55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2004 SK 와이번스 18 14 5.14 0 3 3 1 11 2 9 15
통산 KBO 통산(8시즌) 308 909⅔ 2.56 71 40 98 1 651 59 325 781
NPB 통산 2시즌 47 128 3.30 7 5 3 - 107 - 42 98
MLB 통산 1시즌 9 11⅔ 3.09 0 0 0 - 11 - 4 6


역대수상
연도 수상내용
1995년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

완투, 완봉기록
년도 완투 완봉
1993 7완투 3완봉
(5위)
1994 6완투 2완봉
1995 12완투
(2위)
3완봉
(2위)
1999 2완투 0완봉
통산 27완투 8완봉

2. 삼성 라이온즈 출신 전 투수

이름 이상훈
생년월일 1971년 3월 21일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경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삼성 라이온즈 고졸연고 자유계약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90~1999)
두산 베어스(1999~2003)
롯데 자이언츠(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1990~1995)
이상훈(1990~1995) 백인천(199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4번(1996~1999)
박준혁(1993~1995) 이상훈(1996~1999) 이용훈(2000~2001)

삼성 라이온즈 - 두산 베어스 -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야구 선수. 1번 항목과 마찬가지로 투수였는데, 이쪽은 우투우타. 리틀 이상훈이라는 별명도 있었지만 둘은 사실 동갑으로 LG 트윈스의 이상훈이 10일 빨리 태어났다. 등번호는 77번 - 34번(이상 삼성) - 19번(두산) - 23번(롯데)

LG의 이상훈과 달리 1990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중간계투로 주로 등판했다. 1993년에는 2승 3패 4세이브 평균자책 2.56을 기록하는 등 삼성 라이온즈의 암흑기 시절을 함께 하며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을 냈다. 그러다가 1999년 트레이드 마감일, 포수난을 겪던 삼성 라이온즈두산 베어스에 4억 원을 주고 진갑용을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하면서 사실상 전력 외로 분류된 그를 함께 두산 베어스로 보냈다.

진갑용트레이드 때문에 피해를 본 셈이고, 사실상 삼성 라이온즈에서 버림받은 셈이었지만 당시 투수가 부족했던 두산 베어스의 입장에서는 이상훈을 나름대로 잘 써먹었다. 당시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있었던 재활공장장이면서 동시에 혹사의 신이기도 한 김인식은 잘 하건 못 하건, 선발이건 계투이건 간에 이상훈을 노예처럼 꾸준히 등판시켜 매 시즌 100이닝 가까이 던지게 했다.[12] 덕분에 사실상 마지막 시즌이라 할 수 있는 2002년에는 1군 70경기에 등판하여 133⅔ 이닝을 던져 4승 10패 2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 3.91로 자신의 최다 이닝 기록을 세웠다. 그렇게 불꽃같았던 2002 시즌을 보내고 팔꿈치가 너덜해진 그는 2003년 두산 베어스에서 1군 12경기에 등판하여 16⅔이닝을 던진 후 방출당했으며, 이듬해인 2004년 롯데 자이언츠에 이적하여 1군 2경기에 등판해 딱 3이닝만 던지고 은퇴했다.

짧고 굵었던 LG 이상훈과는 달리 이쪽은 평범한 야구선수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충분히 보여 줬다.

은퇴 후에는 신동주와 함께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2동에 스크린 골프장을 열고 티칭 프로로 활동했다.

여담으로 2013년에 마구마구의 모바일버젼인 마구마구 2014에 1항목의 이상훈선수 레전드 카드를 업데이트 하면서 2항목의 이상훈 선수의 기록과 스텟이 기재 되어있다. 후에 좌투로 변경되었지만 기록과 스텟은 변경되지 않고 심지어 2항목의 동일인물 취급을 받으며 엔트리에 동시등록도 안되는 병크를 터트렸다. (한마디로 엘지 이상훈과 삼성 이상훈이 동일 선수 취급을 받는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2014년 2월 마구마구에서 레전드 이상훈 카드를 마무리 투수로 출시를 해 듀얼 포지션이 적용되지 않는 모바일에서는 선발로 되어있는 터라 당장 적용및 수정 안되게 되었다(+장발위엄을 가진 카드이미지)
돈애 멀어서 독단적으로 카드를 출시한 블루페이퍼의 병크중 하나[13]

2.1. 연도별 성적

  • 투수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0삼성 라이온즈 4 16 0 2 0 - 9.56 30 9 7
1991 17 42⅔ 1 0 0 - 5.91 54 23 21
1992 10 24⅓ 1 0 0 - 9.62 35 20 18
1993 26 84⅓ 2 3 4 - 2.56 76 36 46
1994 27 70⅓ 2 2 0 - 4.48 75 28 35
1995 6 4⅔ 1 0 0 - 13.50 7 2 5
1996 25 76⅓ 2 3 1 - 3.30 71 29 35
1997 31 58 1 2 3 - 5.59 75 25 33
1998 12 21 0 0 0 - 4.29 20 10 1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9 삼성 / 두산 37 101⅔ 4 6 0 - 6.20 119 70 59
2000두산 베어스 40 88⅔ 4 4 2 0 5.99 103 49 63
2001 20 34 0 0 0 2 8.21 43 17 15
2002 70
(4위)
133⅔ 4 10 2 6 3.91 129 50 93
2003 12 16⅔ 1 1 0 1 9.72 26 6 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4 롯데 자이언츠 2 3 0 0 0 0 9.00 7 0 2
통산 339 775⅓ 23 33 12 9 5.22 870 374 453

  • 타자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7 삼성 라이온즈 1 1 .000 0 0 0 0 0 0 0
통산 1 1 .000 0 0 0 0 0 0 0

3. 삼성 라이온즈의 타자

삼성의 외야수 이상훈 참조.

4. SK 와이번스의 투수

이름 이상훈(李相勳)
생년월일 1985년 5월 10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학력 성남고-단국대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2008년 SK 와이번스 2차 3순위
소속팀 SK 와이번스 (2008~2012)

구단 홈페이지 정보
단국대를 졸업하고 200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3라운드에 뽑힌 좌완투수. 계약금 7천만원을 받고 입단했다.

하지만 그동안 딱히 1군에서의 활약이 없었기 때문에 인지도는 매우 낮다. 'SK 이상훈'으로 검색하면 이 선수는 없고 1번의 04이상훈만 주르륵 나온다.(...)

2012 시즌 도중 조용히 방출되었으며 고양 원더스에 들어가 재기를 노렸으나 2013년 10월 퇴단했다.

매우 희귀한 좌완 사이드암이다. 국내에선 두산 베어스의 김창훈 정도뿐.

4.1.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11 SK 와이번스 1 0⅓ 0 0 0 1 0.00 0 1 0
통산 1 0⅓ 0 0 0 1 0.00 0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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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김성근 감독이 최향남SK 와이번스 입단을 거절했던 이유가 최향남의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이상훈이 고양 원더스로 올 때 김성근이 첫 미팅에서 수염을 보고 그게 뭐냐고 지적하자 수염을 자르고 왔다고 한다. 이상훈과 김성근이 LG 트윈스 선수와 감독으로 만났을 때에도 이게 문제가 되었었는데, 이 때도 김성근이 이상훈에게 머리를 자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상훈은 머리는 자를 수 없다고 했고, 김성근은 "너만 예외를 인정할 수는 없다. 너 뿐만 아니라 어느 선수도 머리를 자르게 하지 않겠다." 라고 넘어갔다. 그러나 김성근 성격상 지도자 수업중에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훈 본인도 후배들을 가르치기에는 긴 머리가 적절치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중이고. 최향남도 고양에 합류하면서 이런 것도 생각했을 것이다.
  • [2] 다만 머리카락은 원더스 합류 이전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정리했다고 한다. 기사
  • [3] 정확히는 이천 2군에 새로 개설한 피칭 아카데미의 초대 원장.
  • [4] 과거 삼성의 김일융 역시 좌완투수로 20승을 넘기는 업적을 달성했지만, 그 기록에는 구원승도 몇 승이 포함되어있다. 이상훈은 95년 오직 선발 등판만으로 20승을 거머쥐었다는 부분에서 대단한 기록이다.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류현진, 김광현, 봉중근 등의 기라성같은 좌완들도 해내지 못한 대단한 업적. 다만 2014년 10월 14일 밴헤켄이 20승을 기록, 최후란 수식어가 빠지게 되었다. (국내 투수 중으로 한정하면 말이 되지만)
  • [5] MVP를 김상호에게 뺏긴 이유는 김상호가 잠실 홈런왕과 101타점, 한국시리즈 우승 버프도 있었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고려대 시절의 무단 이탈과 (특히 기자들에게)무뚝뚝한 태도 때문에 기자들에게 평이 안 좋았던 것도 있었다. 하여튼 기레기들이 문제다(이는 1996년의 박재홍도 마찬가지. 이유는 다르지만)
  • [6] 이 해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했던 이유는 시즌 후반기에 이상훈 본인이 20승을 채울려면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등판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상훈은 시즌 중반까지 20승이 거의 확실해보일 정도로 리그를 압도하는 페이스를 보였지만 4일 로테이션이 시작된 이후 급격하게 승수를 쌓는 페이스가 떨어졌으며 결국 시즌 최종 등판에서 쌍방울을 상대로 간신히 20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이 상태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이상훈의 체력은 당연히 바닥나 있었고 결국 롯데에게 난타당하는 요인이 됐다.이상훈의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진에는 이광환 감독의 로테이션 기용과 이상훈 본인의 20승 욕심이라는 두개의 설이 갈리지만 세간에선 이상훈의 20승 욕심 쪽에 무게가 더 실렸다.
  • [7] 당시 주니치에 소속된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을 한국 3총사라고 일컬었다.
  • [8] 10년 전 물가로 비교하면 실질적으로 더 많은 액수다. 거기에 이 연봉은 공을 한번도 안던져도 자동으로 받는 금액이었다.
  • [9] 조범현 감독이 직접 상훈아, 차라리 나랑 같이 그만두자!라고 말했을 만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 [10] 사실 이런 형식의 가명으로 된 선수는 실제 선수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스포츠 게임에서는 꽤 흔한 일이다. 물론 사태의 99%는 초상권료가 원인이다. 마이클 조던, 배리 본즈가 그 예.
  • [11] 박배추는 먹튀라고 LG 트윈스 팬들에겐 금지어지만, 두산 베어스에서는 한때 에이스였다. 그리고 김선우는 선발로 밥값을 했었고, 임재철도 대타, 외야수로 제몫을 해주던 선수였었다. 근데 2006 시즌후, 박명환이 LG로 넘어가서 팬들이 아쉬워했다. 2008-2010년에 먹튀가되서 그렇지... 그리고 김선우, 임재철이 2013년 시즌 후 동시에 이적하자 팬들이 분노했다. 거기에 FA로 이종욱, 손시헌도 뺏기고 김커피가 잘렸으니......
  • [12] 전성기 삼성에 있을 땐 100이닝 이상 던진 적이 없었다. 매 시즌은 아니고, 100이닝을 넘은 시즌은 두산에 이적한 첫 해인 1999년과 2002년이었다. 2000년에는 88⅔ 이닝을 소화했다.
  • [13] 08 엘리트 봉중근이라던가 아직 선발도 되지않는 14아시아 대표팀이란가 스페, 노멀선수스텟의 선수를 레어로 퍼준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