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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농구선수)

last modified: 2015-04-07 14:55:10 Contributors



보상선수로 건너간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였을때

SangMin1.jpg
[JPG image (Unknown)]
극한직업 촬영중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이상민(李相敏)
생년월일 1972년 11월 11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홍대부고 - 연세대학교
포지션 포인트가드
신체사이즈 183Cm, 80Kg
프로입단 1995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소속팀 대전 현대 걸리버스/전주 KCC 이지스 (1995~2007)
서울 삼성 썬더스 (2007~2010)
지도자 서울 삼성 썬더스 코치 (2012~2014)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2014~)

1997~1998, 1998~1999 한국프로농구 MVP
이상민(대전 현대 다이넷) 서장훈(청주 SK 나이츠)

2003~2004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이비드 잭슨(원주 TG삼보 엑서스) 이상민(전주 KCC 이지스) 김주성(원주 TG삼보 엑서스)

전주 KCC 이지스 영구결번
No.11

Contents

1. 개요
2. 기록
3. 선수 생활
3.1. 농구대잔치 시절
3.2. 현대 - KCC 시절
3.3. 이적과 마찰
3.4. 삼성으로의 이적 이후
4. 선수로서의 특징
5. 헐리웃 리
6. 지도자 생활
6.1. 삼성 썬더스 감독
7. 기타


1. 개요

자타공인 역대 최고의 포인트 가드중 한명

대전 현대 다이넷/걸리버스 - 전주 KCC 이지스 -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뛰었던 농구선수. 등번호는 11번으로 KCC 이지스의 영구결번이다. 현재는 서울 삼성 썬더스의 전 코치, 현 감독이다.

별명은 헐리웃 리, 산소같은 남자, 컴퓨터 가드 등등. 별명만 봐도 얼마나 오래 전에 데뷔한 선수인가 느껴진다. 강 모 선수의 후계자로 불렸을만큼 노장이긴 하다.

역대 한국 포인트가드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자랑했던 강 모 선수승부조작 파문으로 인해 비참하게 몰락하고 영구제명까지 당한 현 시점에서 이상민이 한국농구 사상 최고의 포인트가드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1]

2. 기록

정규 시즌
581경기 9.8점 3.4리바운드 6.2도움 1.5스틸 FG 44.6% 3P 35.4% FT 76.8% PER 14.1

플레이오프
51경기 10.7점 3.9리바운드 6.0도움 1.6스틸 FG 47.2% 3P 39.4% FT 82.8% PER 16.8

챔피언 결정전
43경기 10.7점 4.5리바운드 5.0도움 1.4스틸 FG 43.0% 3P 34.9% FT 82.4% PER 13.4

3. 선수 생활

3.1. 농구대잔치 시절

홍대부고 시절에는 천재 가드라는 말을 들으며 동시기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다른 고교팀들을 원맨쇼로 농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학은 연세대로 진학했다. 원래는 고려대 진학 예정이었지만, 고대의 구타 문화가 싫어서 고집을 부린 끝에 연세대로 진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고려대 박한 감독은 구타를 하는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연세대 최희암 감독이 구타의 신봉자였으니 망했어요. 본인도 신입생 시절에는 은근히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외곽슛이 좋지 않고 드리블이 높고 파울관리를 못 한다." 라는 평을 들으면서도 원 가드로 선배인 문경은, 후배인 우지원, 김훈, 서장훈을 이끌고 코트의 사령관으로서 연세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곱상한 얼굴 덕에 이후 두고 두고 이어지는 오빠부대의 인기를 얻었다. 1993-94 농구대잔치 연세대의 20승 1패 우승의 주역 중의 주역.

그런데 연세대 졸업시즌이었던 농구대잔치 1994~95시즌 풀리그 최종전 對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이상민은 후반 4~5분여를 남겼을 즈음 인사이드로 돌파해 오던 김병철의 레이업을 걷어내기 위해 같이 뜨다 착지할 때 선수생명이 위태할 수도 있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이게 바로 그 부상장면. 무릎인대가 끊어져 버린 부상이었는데 이상민이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그걸 보고 팬들이 울부짖는 모습까지 당시 뉴스를 탔다.

대학 졸업 후 현대전자에 입단하나, 부상 치료도 시킬 겸 당장보다 프로화 이후를 노릴 겸 해서 현대는 이상민을 바로 상무로 입대시킨다. 이 때, 대전 현대의 전설을 같이 만들어 내는 조성원도 같이 입대시켰다.

상무 입단 후 이상민은 그때까지는 잠재되어 있던 올라운더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상무에서 본인의 기량이 만개했다기 보다는, 최희암의 손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최희암은 철저한 분업농구를 추구한 감독이라 연세대 시절의 이상민은 자기가 할 수 있는걸 어느 정도 억제를 하면서 리딩에 신경써야 했다.[2] 거침 없이 득점을 하고 좋은 운동능력을 앞세워 리바운드를 걷어내고 적재적소에 패스를 찔러넣으며 허재 이래 최고의 올라운더 가드로 빛나는 활약을 펼쳤고, 그런 활약 속에 두 번이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기도 했다.[3] 하지만 기아자동차와 연세대로 인해 농구대잔치 우승에는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가 상무에 있던 사이, 한국 농구는 프로화가 되며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했다.

3.2. 현대 - KCC 시절

제대 후 프로팀이 된 현대에 복귀하며 KBL에 데뷔했다. 데뷔 시즌에 전년도 8개 팀 중에서 6강에도 못 드는 굴욕을 맛 본 현대를 일약 정규시즌 1위로 올려놓는 기염을 토하면서 1997-98 시즌 정규시즌 MVP의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챔프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 때는 허재의 투혼이 더 빛나서 챔프전 MVP는 실패. 그러나 이 때를 기점으로 현대는 왕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정규리그 3연패와 두 번의 챔프전 우승이 바로 그것.

팀의 에이스 포인트가드로서 맹활약하며 추승균, 조성원, 니 맥도웰과 함께 팀의 전성 시대를 이끈다. 다만, 1999-2000 시즌 청주 SK 나이츠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데릭 하니발의 포스트업과 수비에 털리면서 신선우 감독이 토털 바스켓볼이라는 괴랄한 전략을 들고 나오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는 정말 팀의 대들보였다.

현대그룹이 흔들리고, 팀이 KCC로 팔리고 연고지가 변경되는 동안에도 이상민은 굳건하게 팀을 지켰다. 다시 돌아온 조성원, 기존에 함께 한 추승균과 함께 KCC 소속으로 또 다시 우승을 일궈낸 것.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올스타 투표에서는 무조건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아니, 그가 하락세를 그리고 은퇴가 임박한 순간에도 올스타 투표에는 1위를 고수했다. 아마도 9년 연속 올스타전 투표 1위는 불멸의 기록이 될 듯 하다.

그러나 역시 세월은 속일 수 없는지 03-04 시즌부터는 부상에 시달리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2003-04 시즌 원주 동부 프로미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며 챔프전 MVP가 되기도 했지만, 점차 하락세를 눈에 띄게 드러났다. 2004-05 시즌에는 챔프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못하며 동부에게 설욕당하는 팀을 눈뜨고 지켜보기도. 그래도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경기별로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 일은 종종 있었다.

3.3. 이적과 마찰

누구나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요, 팀의 적장자로 은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상민은 KCC에서 은퇴하지 못한다. 서장훈이 FA로 영입되는 과정에서 보상선수로서 이상민이 삼성 썬더스로 이적했던 것이 원인인데 이 때문에 KCC는 큰 비판을 받았다.

당시 FA 보상선수에서 제외되는 보호선수는 3명까지 지정할 수 있었는데 우습게도 FA로 이적해온 선수는 자동 보호선수로 지정되며, 보호선수 3명에 자동포함이 되었다. 즉, 당시 KCC가 FA로 데려온 서장훈, 임재현은 자동으로 보호선수가 되고, 나머지 보호선수로 선택할 수 있는 선수는 한 명뿐이라는 것. KCC엔 이상민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프랜차이즈스타이면서 "소리 없이 강한 남자" 추승균이 있었기에 둘 중 하나는 보호선수에서 제외해야 했다.

그런데 추승균 역시 노장이라 볼 수 있지만 이상민보다 2살 어렸기에 효용가치는 추승균이 더 크다고 KCC쪽에서는 봤고, 그래서 이상민은 보호선수에서 제외되었는데, 당시 감독인 허재의 말에 따르면 '삼성이 설마 노장인 이상민을 고르겠어?' 라는 생각으로 보호지정을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당시 삼성은 이상민보다 신인선수 지명권을 우선 요구했지만, KCC가 가지고 있던 신인선수 지명권은 하승진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지명권이었기에 그것을 거부[4], 결국 삼성은 이상민을 FA 보상선수로서 데려갔다.

이렇게 되면서 프랜차이즈 스타를 헌신짝처럼 버렸다며 KCC구단과 허재 감독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이상민의 빈자리를 채운 임재현은 봉사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이상민보다 못한 활약을 보인 데다 이적한 이상민이 선봉장으로 플레이오프에서 KCC를 격파하는 상황까지 오자 이상민을 떠나게 만든 KCC는 희대의 뻘짓을 저질렀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5]

그런데 KCC구단 입장에서 보자면 보호선수로 이상민 대신 추승균을 지키고 신인선수 지명권도 지킨 건 결과적으로 대성공이 되긴 했다. 임재현은 FA로 이적한 첫해에 못난 모습만 보였지만 이적 2년차부터는 주전과 식스맨을 오가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이상민 대신 지킨 추승균은 3년 동안 팀의 기둥이 되어 주었으며 결국 이 둘이 팀이 두 번의 우승을 거두게 만든 공신이 되었기 때문. 거기다 삼성이 이상민 대신 달라고 한 신인선수 지명권을 지킨 끝에 그걸로 하승진을 뽑으며 대성공을 거두었으니.

결국 이상민의 이적 문제는 팀의 입장과 선수의 입장이 갈리다보니, 생긴 어쩔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다.

KCC로 온 서장훈은 이상민과의 플레이를 원했다는 인터뷰를 해서[6] 주변사람들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7]

한편으로 허재가 당시 팀 내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던 이상민을 자신의 팀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낸 거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허재 본인은 일부러 이상민을 보낸 건 아니다라고 말을 했으나,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은 남아있다. 이 사태 이후부터 보호선수가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3.4. 삼성으로의 이적 이후

이적한 이후, 첫시즌에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자신의 최다득점을 깨고 35점을 넣어서 승리에 견인 하기도 했다. 결국 그시즌 많지 않은 시간을 뛰면서 9.8점 5.5어시스트 라는 준수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전성기가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삼성 썬더스를 두 번이나 챔피언결정전에 이끌고 가는 능력을 보였지만 두번 다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상민 개인의 인기는 여전했고 역시 이상민 소리가 나오는 활약을 보인 경기들도 있으나, 이상민은 부상과 체력 저하로 더 이상 시즌 내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일 수는 없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삼성을 이끈 것은 안준호 감독의 팀 세팅과 렌스 레더와 같은 좋은 외국인 선수의 힘이 더 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대신 삼성은 그 전까지는 그냥저냥 서울에 있는 팀 정도였는데, 이상민의 영입 이후, 인기팀으로 급부상하는 가외적인 소득은 얻기는 했다.

결국 2009~2010 시즌이 끝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직전까지도 올스타 투표 1위는 이상민이었다.

4. 선수로서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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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전성기에는 183의 키지만 덩크를 꽂아넣는 탁월한 운동능력을 자랑했고, 전성기가 좀 지난 무렵까지도 이에 근접하는 운동능력을 유지했다. 이런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키에 걸맞지 않는 리바운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민이 운동능력에만 의존한 플레이를 한 건 아니다. 적재적소에 공을 배급하며 팀을 이끄는 포인트가드의 기본 덕목에 충실한 선수였고, 그래서 전성기가 지나 운동능력을 많이 잃은 삼성 썬더스 시절에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자신이 직접 수비리바운드를 잡은 후 바로 달려나가며 앞선으로 던져주는 속공 패스는 특히 올라운드함과 패스 능력이 조화된 이상민의 특기.

포스트업 기술을 잘 썼고, 자신보다 힘이 약한 상대가 매치업되면 포스트업으로 상대를 눌러버리는 모습도 종종 선보였다. 이상민이 현역시절이던 90~2000년대까지 이상민보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국내 포인트가드는 없었다. 그 덕에 언제나 국내리그에서 이상민은 압도적인 피지컬로 상대 1번을 찍어눌렀고, 이상민의 포스트업 플레이는 다른 올라운드 능력 있는 팀내 선수와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상대팀이 수비에서 여러 모로 골이 아파지는 상황을 자주 연출했다.

외곽슛은 대학 시절만 해도 좋지 않았으나 이후 발전해서 좋은 건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은 수준까지는 유지했다. 특히 영 안 들어간다 싶다가 중요 순간에 외곽슛을 터트리며 상대 팀을 울리는 일도 많았고, 삼점슛 라인에서 한 발 이상 떨어진 곳에서 뜬금없이 슛을 성공시키는 일도 있었다. 2002 이사안게임 준결승 필리핀전에서 경기 전체로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다 대표팀이 뒤지던 마지막 순간에 3점 버저비터로 대표팀을 승리로 이끈 게 이런 일의 예중 하나.

한편 삼성으로 가기 전 몸이 멀쩡하던 시절에는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탄탄한 몸과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자신보다 큰 상대도 제법 수비해 냈으며, 이런 수비력은 특히 조성원과 함께 나왔을 때 조성원 대신 상대의 2번 포지션 선수들을 수비할 때나 아시아권 대회에서 투 가드로 강 모 선수와 함께 나와 상대 2번 포지션 선수들을 수비할 때 더욱 빛이 났다. 훌륭한 바스켓 센스를 바탕으로 상대 패스의 맥을 끊으며 해내는 스틸도 일품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인 가드 선수들 중에선 최고 수준의 블록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속공 레이업을 하는 상대를 쫒아가 블록해 내는 장면을 종종 연출했고, 김주성 데뷔 이전인 전성기에는 KBL 국내 선수 블록 순위에 서장훈 다음 자리 정도에 들어간 일까지도 있다. 나이와 부상이 쌓이면서 삼성 이적 후엔 수비에서 한창 때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구멍 소리 듣는 일도 생겨나게 되었지만.

포인트가드 치고는 드리블이 높고 불안정했다는 부분은 약점. 때문에 아시아권에서는 피지컬로 상대 1번을 압살했지만 세계무대에선 안정성이 떨어지는 선수였다. 그렇다고 공 간수를 못해서 마구 털리거나 한 일은 없지만, 어쩌다 상대 수비수이게 제대로 공략당하면 턴오버를 남발하는 일도 있었다.

여러 모로 올라운드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스타 가드란 점에서 허재를 잇는 존재였고, 이상민 이후로는 이런 올라운드하면서 기본에 충실한 가드가 한국 농구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5. 헐리웃 리


칭찬 가득 했지만 깔 건 까야 하는 법. 신문기사 링크
한국프로농구헐리우드 액션 하면 가장 손꼽히는 선수가 이상민이다. 상대의 파울을 유도해내는 것은 선수의 능력에 해당하지만, 유독 이상민의 경우는 슬쩍 상대가 닿기만 해도 화려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유난히 자주 보였고, 거기에 이상민의 스타성으로 인한 심판보정 효과 의혹과 그런 이상민의 모습까지도 옹호하는 극렬 이상민 팬덤[8]으로 인해 빠가 까를 만드는 연쇄효과가 이어지면서, 농구팬 일각에서 헐리웃 리라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이상민과 인척관계에 있던 전직 선수출신 석모 해설자도 한 몫 했다.

거기다 이상민은 수비시에도 헐리우드 액션으로 오펜스 파울을 유도하려 하거나 적극적으로 상대의 볼을 뺏으려다 외려 자기가 파울을 하는 일도 많았고, 그로 인해 파울 트러블에 빠지며 팀을 난관에 빠트리는 일도 많았다.

헐리우드 액션과 파울 트러블, 극렬 팬덤은 이상민의 평가를 깎아먹는 3대 요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능력 면에서, 특히 인기 면에서 이상민 이후 이상민을 잇는 존재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KBL의 한계라면 한계고 문제라면 문제.

6. 지도자 생활

2010년 은퇴 후, 2년 동안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삼성의 차기 감독 후보로 점찍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단 2012년 김동광 감독 아래 코치로 임명되어 지도자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2014년 시즌을 치루던 중 김동광 감독이 자진사퇴 되어, 김상식 대행 체제로 남은 시즌을 마무리한하였다.

6.1. 삼성 썬더스 감독



형 이제 선수 아니야... 니네 감독이야

2014-15 시즌부터 삼성의 새로운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코치연수도 다녀왔기 때문에 감독이 될것이라는 것은 예상된 일이었으나, 예상보다 빨리 감독을 맡게 되어 파격적인 선임이라는 의견이 많다.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과 신인 드래프트에서 리오 라이온스와 키스 클랜턴, 김준일을 영입하면서 어느 정도 해볼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무너진 팀을 일으키기는 역부족, 사람들의 예상대로 최하위를 전전하고 있다. 가드진의 이정석박재현이 수준 이하의 플레이를 보여주고, 집중력이 결정적인 순간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이상민 입장에서도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특히 전자랜드와의 경기에서 100대 46으로 54점차 참패라는 역대 기록을 남기면서 흑역사를 썼는데 가뜩이나 팀이 최하위에서 좀처럼 올라올 줄을 모르자 이상민 감독의 경기 운용 등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농구 갤러리 등을 비롯한 일부 극성팬들 사이에선 돌상민이라며 가루가 되도록 대차게 까이고 있는데 심지어는 김상준 전 감독을 재평가해야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고 있다.

그래도 유재학 감독에 의하면 첫시즌 성적은 운에 가깝다 했을 정도고 삼성은 1.5군이 출격한 D리그에서도 SK 2군에게 완전 가비지 패배를 했을만큼 신인 김준일 정도를 제외하면 국내선수진이 처참한 상황이다. 삼성 입장에서도 선수들 이상의 인기가 있는 이상민 감독에게 좀 더 기회를 줄 듯 싶다.

7. 기타

팬들의 스펙트럼 자체가 넓어 전성기 훨씬 지나 삼성으로 이적한 뒤에 A브랜드로 농구화가 바뀌자 '이상민 농구화 주세요' 요구가 빗발쳤다는 A브랜드 관계자의 인터뷰가 있었을 정도에 9년 연속 올스타전 득표 1위. 저 정도 인기를 누릴 선수가 또 나올지는 의문이다.

헐리우드 액션의 경우에도 이상민의 경우는 유독 짜증을 심하게 내는 편이고, 항상 똥씹은듯한 짜증난 얼굴로 팬들이나 일반인들을 대한다는 카더라통신이 있다. 경기후 자기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그려 비싼 액자에 담아 전달해주는 여자팬한테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히고 쓰레기 들듯 액자 귀퉁이 들고 시크하게 걸어갔다고. 나이 들고서 올스타전에서는 장내 진행자가 '제발 덩크 한 번만 보여주세요' 애원하다시피해도 신경을 안 썼다는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때 온라인 게임인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을 했다고 한다. 렐름은 드가드. 원정 경기 때는 노트북까지 써서 틈틈이 게임을 했다고. 당시 한국 서버를 운영 중이었던 Buff Entertainment를 수차례 방문하기도 할 정도였다.

한화 이글스 정민철 코치와 친해서 정민철 은퇴경기에서 23인의 지인에 선정되어 생에 처음 야구 그라운드를 밟았다고 한다.

농구에 대한 안목을 의심케하는 발언을 몇 차례 한 적 있는데, "나라면 드래프트 1순위로 카이리 어빙 대신 지머 프레뎃을 뽑겠다."[9]라든가, NCAA 디비전1 소속인 하버드대 농구팀을 "동아리 수준의 클럽"이라고 평가하는 등 해외농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제레미 린하버드 대학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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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러한 이상민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포인트가드는 김승현밖에 없다.
  • [2] 그래도 최희암은 이상민의 재능을 아껴서 그나마 이상민 하고 싶은대로 하게 놔둔 편이었다. 문경은이나 우지원은 거의 뭐 하루하루 슛 쏘는 기계(...)
  • [3] 이상민의 트리플더블은 당시 한국 남자 농구선수 중에는 최초로 기록한 걸로 알려졌지만, 2012년 들어 이전 기록들이 전산화되는 과정에서 허재, 이원우, 서장훈이 이상민보다 앞서 트리플더블을 기록했음이 발견되었다
  • [4] 실제로 1픽에 걸리면서 하승진을 지명한다.
  • [5] 그리고 레전드를 그냥 데려간 삼성 역시도 엄청난 욕을 먹었다
  • [6] 둘은 연세대학교 선후배. 게다가 서장훈은 앞서 SK에서 FA 자격으로 삼성으로 옮길 당시 본의 아니게 선배 우지원을 날려버렸던 터라(삼성이 우지원을 보상선수로 SK에 넘겼고 그는 곧바로 김영만과 맞트레이드) 이상민이 자신 때문에 팀을 떠나게 된 것이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 [7] 결국 허재 감독과의 마찰, 출전 시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으며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된다.
  • [8] 보통 '이응사' 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팬클럽을 지칭한다. 안티들은 이상민의 응가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까고 있다.
  • [9] 이후 어빙은 NBA의 젊은 수퍼스타로 대성한 반면, NCAA 최고의 득점 기계 프레뎃은 NBA 적응에 실패하고 몰락하게 된다. 훗날 이상민이 고백하길, 어빙 경기는 1번 밖에 안 본 상태에서 그런 발언을 한 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