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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last modified: 2015-09-30 12:10:23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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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사나이

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히로히토 일왕 암살 미수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Contents

1. 생애와 의거
2. 언론 보도
3. 후일담

1. 생애와 의거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 이렇듯 본래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좌절과 순응을 잘 보여주는 듯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 듯하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각종 차별을 받으면서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이후 31세에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알게 되고 상하이에 도착하나 처음엔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을 받았다. 워낙 일본인같은 제스쳐 그리고 능숙한 일본어 솜씨 때문에 임시정부의 직원들로부터 '일본영감'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 별명을 증명하듯이, 일본인 사회나 마찬가지인 상해의 홍구지역에 거주한지 1년도 안 되었는데도 일본인 지인이 수 없이 많았으며 심지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까지 지인으로 두었으며 일본영사의 내정까지 무상으로 출입했을 정도. 심지어 이봉창이 의거를 하러 일본으로 갈 때 부두까지 나와서 잘 갔다오라고 마중을 나온 일본경찰까지 있었다. 김구는 이봉창과의 여러 번의 질문과 대화를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들과 함께 여관에서 한 술자리에서 왜 "일왕을 처단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말할 정도로 대범한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에게 밀정이라고 의심을 하거나 비판적인 임시정부 요인들과 술과 고기를 직접 사와서 대접까지 하면서 대인배스럽게 호탕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 때, 이봉창은 자신이 왜 일왕을 암살할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나는 작년에 동경에 있을 때 하루는 일본 임금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경하러 가서 한참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때 가슴이 일렁이고 온몸의 피가 솟구쳐올라 내게 무기만 있다면 큰일을 한번 해볼 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에 일왕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버려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이 취중진담이 일왕을 암살한다는 엄청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봉창의 취중진담이 있었던지 며칠 후,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치겠습니다.

결국, 임시정부 측에서 그 진심을 이해하고 의거를 계획하게 된다.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시기는 1931년 12월 13일. 그리고 백범일지에는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으로 잠입했는데 얼마나 치밀했는가 하면 도쿄에서 숙박을 했다가 거사 바로 전날 도쿄를 벗어나 가와자키시에서 숙박을 했다. 일부러 숙박장소를 도쿄에서 외곽으로 변경한 이유는, 일왕의 행차전날 밤부터 각 치안기관에서 도쿄 관내의 음식점, 여관, 유곽, 절, 빈집 등 공공장소를 검문하기로 예정이 되어있기에 변경했으며 일본 경찰도 이봉창의 치밀함에 놀랐을 정도.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헌데 정작 의거 장소에서 떨어진 사쿠라다몬(桜田門) 의거로 유명하다.

각설하고, 안타깝게도 이봉창은 여러 대의 마차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일왕이 탄 마차인지 알지 못했고,[2] 결국 그렇게 던진 폭탄 하나는 다른 마차를 맞췄고 그 폭탄은 마차를 끌던 말과 그 말에 탄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3]에 결국 히로히토 암살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폭탄 투척 이후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이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 이에 죄책감을 느낀 이봉창은 자수를 했다. 이 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


1932년 1월 8일 거사 직후 체포된 이봉창.

이봉창에 대한 공식 취조는 1월 8일 오후 3시 50분에 시작되었다. 경시청 형사부장 자리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차단된 상태에서 진행했으며 검사가 직접 취조했다. 아래의 글은 검사가 직접 작성한 본문을 그대로 번역, 옮긴 것이다.

범인은 언어가 명석하여 일본인과 다름이 없고, 태도는 태연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띄우고, 이런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관념은 털끝만큼도 없다. 1928년(소화 3년) 11월에 거행된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교토로 갔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10일간이나 유치된 것에 분개하여 사상의 변화를 일으키고 1930년 11월에 상해로 가서 중국인 경영의 레코드회사 영창공사에서 근무하고, 백정선[4]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1931년 12월 23일에 도쿄에 왔고, 1932년 1월 4일에 백정선으로부터 은행을 통해 다시 100원의 송금을 받고, 7일 아사히여관을 떠나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의 유곽에서 묵고, 8일 오전 8시에 전차로 하라주쿠에 도착하고, 검색이 심해 거사에 불리함을 알고 전차로 요쓰야 역으로 가고, 다시 경시청 앞으로 가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


금성출판사의 학습만화에서는 공판 때 이봉창에게 일본인 법정 관계자가 무례하게 굴자 이 일본인을 항해 당당하게

"나는 너희 왕을 상대하는 자인데 어찌 이리 무례히 대하느냐?!"

라며 일갈했다고 한다. 의사가 일왕 암살 용의자였고 더군다나 일본의 식민국가인 조선인이었으므로 사형은 거의 확실시된 시점이었을 텐데도 이런 간지폭풍의 발언을 법정에서 거리낌없이 한 것. 오오 이봉창 의사 오오
다만 출처가 불분명하므로 확인바람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백범 김구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전에 이봉창의 의거 실패를 기억하여 제대로 터지는 폭탄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하나로 무시무시한 전적을 올렸다. 참고로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 시 사용한 폭탄 모두 상해에 있는 병공창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당시 창장은 자기네가 빌려주었던 폭탄 화력이 미약하여 암살 미수에 그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윤봉길에게는 시험을 거듭한 폭탄을 성심성의껏 제조하여 20여 개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 때 폭탄 제조 의뢰를 한 것은 김구의 지시를 받은 김홍일 장군으로, 공장 측의 배려로 폭탄을 김 장군의 집으로 운반해주었다. [5]

광복 후 김구가 1946년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묘에 안장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 언론 보도


1932년 1월 10일 중앙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테러. 매우 비난하는 어조의 기사를 실었다.

당시 신문사 사장은 노정일. 일부에서는 이 기사를 실은 신문사 사장이 여운형이라는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있는데, 이 무렵 여운형은 감옥에 있었다.

여운형은 1932년 7월에 출옥하고, 지인들의 도움(대표적으로 조동호가 그를 도와주었다.)을 받아 1933년 2월에 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되었고,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쳐서 창간되었다. 위키백과를 보더라도 1933년 2월 16일 여운형이 중앙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봉창 테러는 1932년 1월에 있었으므로, 저 사건은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를 맡기 전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 보도라는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조선중앙일보에 나왔다는 표현도 당시 쓰여진 다른 기사들과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지 한 대목만 인용하고 그걸 근거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1932년 1월 10일 동아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테러. 동아일보 역시 이봉창의 테러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는 어조의 글을 실었다.

당시 국내(조중동 해당 2번)에서는 이봉창의 테러에 대해 매우 비난하는 어조로 썼다. #(단, 일본 사법성 발표의 인용인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원로 언론인이신 이혜복 옹(1923년 생) 말씀에 따르면 "그 당시 신문을 그렇게 쓰지 않으면 신문이 못 나간다. 총독부로부터 검열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되려 사건을 보도한 자체가 쾌거라는 의미. (검열시대엔 행간을 잘 읽어야한다) 이 분 말씀에 따르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총독부는 신문사들을 압박해서 독립운동가들을 '강도' 등의 표현으로 쓰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반면에 해외에 있어 총독부의 검열 대상이 되지 않았던 한인 신문사(대표적으로 미주에 있던 한인 신문사 신한민보)들은 '통쾌한 의거였다'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중국 신문에선 이 사건을 보고 "불행히도 맞지 않았다"라고 적는 바람에 이를 빌미로 일본군은 여러 공작 활동[6]을 벌여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고 이 기사를 실었던 그 신문사와 그 지역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다. 그걸 기념한답시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었는데, 그 때 참석한 참가자들 사이에는 때를 기다리던 윤봉길 의사와 폭탄 두 개가 있었고...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윤봉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3. 후일담

한편 의거 이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친일파였다.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 여러 일본 고위층을 방문해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것에 대해 송구스럽다며 사죄를 했으며 9일에는 친일단체 120명을 소집해 궁성 입구에서 직접 사죄를 또하는 짓거리를 저질렀고 국내의 친일 세력들은 1월 9일 서울의 요정 식도원에 모여 이봉창 의거에 대해 사죄하기로[7] 하는 망나니 짓거리를 저질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 사건을 자신들이 했다고 알렸는데, 그 결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각종 지원이 끊겨서 서예에 일가견이 있던 김구는 그림을 그려 팔며 힘들게 임시정부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로, 윤봉길의 의거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생의 길을 얻고 남경중앙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훈련반도 보내고, 돈을 지원받아서 보내기도 한다.

한편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80년대 중순에 이봉창 열사 미망인이 별세한 소식이 작게 보도된 바 있다. 남편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면서 당시 보도에선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보통 그러듯이 매우 궁핍하게 살아가셨다고 한다.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받으며 연금이니 여러 혜택이 주어지긴 했지만...

참고로 외모가 배우 유해진과 상당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환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해진 주연의 의사 이봉창을 기다려보는것도 좋을것 같다.근데 유해진이 너무 촐싹거리는 이미지가 박혀있는지라.. 안될거야 아마 근데 의사께서 원래 유쾌한 성격이신 듯 하니, 분위기 잡을 때만 제대로 잡으면 문제 없을 듯

비슷한 인물로 조명하가 있다. 이쪽은 일왕의 장인을 독 묻은 칼로 찔러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국내가 아닌 타국 (대만)에서 의거를 일으킨 점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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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맨 오른쪽 사진은 합성으로 밝혀졌다. 이봉창의 얼굴 사진을 그림에 떼어 붙인 것. 의거 전 중간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 내용이 흐릿하여 알아보기 힘들자 왼쪽 사진에서 얼굴을 따와 만든 것. 잘 보면 턱선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결정적으로 큰 사진으로 보면 붙여놓은 티가 살짝 난다.
  • [2] 흔히 대통령이 이동할 때, 대통령이 탑승한 것과 똑같은 자동차가 5대씩 이동하는 걸 생각해보자. 여담이지만 장량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에도 비슷한 이유로 실패했다.
  • [3] 그런데 당시 타임지 기사에 따르면 이노무 말이 몸빵을 한 덕에 상으로 당근 한 상자를 받았다고 카더라.
  • [4] 백정선은 김구 선생님이 쓴 가명. 이 의사는 단 한번도 김구라고 언급하지 않은채 가명인 백정선만 언급한다.
  • [5] 김홍일 장군이 이봉창, 윤봉길 의거 당시 폭탄을 제작했다는 설이 있는데 오해이다. 정확히는 윤 의사의 폭탄은 왕바이슈가 제작을 했다고 한다.
  • [6] 대표적인 예가 가와시마 요시코가 벌인 공작인 '일본인 승려' 스파이 사건.
  • [7]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