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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last modified: 2016-10-22 15:44:42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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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1.1. 개구쟁이
1.2. 독립운동에 투신
1.3. 정치인
2. 대한민국의 외교관


1.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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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2.11[1] ~ 1972.05.11

李範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호는 철기(鐵驥).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아내는 김마리아

1.1. 개구쟁이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이라고 한다. 1900년 경성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여의고, 8살 때 새어머니 김해 김씨를 맞이하여 그 슬하에서 자란다. 어려서 영특하였지만 개구장이였다. 일본 헌병이 말을 타고 지나가자 말에게 돌을 던지거나 새총을 쏘기도 했다. 한 번은 말이 놀라 요동치는 바람에 일본 헌병들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 때문에 이범석의 아버지를 소환해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2]

이범석은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은 뱀을 맨손으로 잡아다가 외양간에 가서 소들 항문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소들이 놀라 경기를 일으키다가 하나 둘씩 푹푹 쓰러져 그대로 죽었다. 이건 장난 수준이 아니다. 당시 소값은 엄청났다. 아버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이범석에게 도끼를 던졌다.

그러나 새어머니 김해 김씨는 어린 아이가 그 정도 장난도 칠 수 있지 않느냐며 대들던 중, 어린 아들에게 도끼가 날아오자 몸으로 도끼를 막는다. 도끼는 새어머니의 무릎에 맞았고 새어머니는 이후 절름발이가 된다.

뒤에 이범석이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고 집안은 일본 경찰 감시하에 놓인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그가 노숙자 생활을 하며 끼니를 거르지 않나 염려하며 그를 찾아 만주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작 자신이 낳은 친자녀들은 본국에서 일본 감시하에 놓이게 됨에도..... 새어머니의 지극정성에 감복하여, 이범석은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에게 더욱 각별하게 된다.

1.2. 독립운동에 투신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집안 머슴 출신의 대한제국 군인이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항일을 결심했다. 1915년 경성고보 3학년 때 한강에서 수영을 하던 여운형[3]을 만나 그의 낚시에 걸려서 함께 중국으로 떠나 만주 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고 중국 운남 군강무학교의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4]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는 등 독립군 활동을 하였다.

만주의 독립군벌 중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 나와바리 투쟁이 벌어지자 그는 민족주의자 진영에 섰다. 김좌진세봉도 암살당하고 외로운 처지에 놓였을 무렵, 이승만청산리 대첩봉오동 전투의 쾌거 소식을 방송을 통해 듣고는, 이범석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노고를 칭찬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승만은 그가 고생한다며 친필서신과 만년필, 종이, 호랑이 가죽 피복을 선물로 보낸다. 이승만의 러브레터 공세에 이범석은 그대로 감격을 먹게 된다.

더 이상 사회주의자들을 상대할 수 없자 지청천과 함께 만주를 떠나 김구 세력과 합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결성되자 지청천과 함께 창군에 참여했다. 1941년 광복군 중장에 임명되고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여담으로, 임정 시절 때 장준하가 좌파 냄새가 난다며 깠다(...) 흠좀무.

1.3. 정치인

8.15광복 이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뒤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국가지상, 민족지상"을 내세운 극우운동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설한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상대편으로 하여금 그를 조선의 군국주의자, 심지어는 히틀러 추종자란 비판을 받게 만들었고, 족청은 이범석 유켄트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히틀러가 죽고 나치 독일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5][6] 밀덕후인지도 (사실, 당시 극우반공 민족주의를 주장한 정치인들 대부분이 히빠였다. 장제스라거나... 여담이지만 1940년대 초반인 일제 말기에는 나의 투쟁을 비롯하여 극우민족주의 및 파시즘을 섭렵하는 히빠 독립운동가도 소수지만 존재했다...) 자동차를 탈 법한데 아침마다 을 타고 경무대에 출근하기도 했다.

대단한 이승만 추종자였으며 이승만에게 잘 보인 덕에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고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윤치영의 후처 은혜의 인척이기도 했다. 허정은 자서전에서 그가 윤치영후처인 은혜에게 누님누님하며 쫓아다녔다고...

여순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 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국회속기록에도 나온다...훗날 실리문서에 의하면 김구와 백의사의 염동진은 극우 반대파, 제4연대장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한다. 실리 보고서. 그런데 제4연대장은 최남근으로, 여순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6.25 전쟁 중에 한강철교 폭파를 건의했고[7], 부산에서 장택상과 이승만에 대한 충성경쟁을 벌였다.(발췌개헌) 이범석은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의원 통근 버스를 연행하여 발췌 개헌을 통과시키고 이승만 장기 집권에 공헌하였다(부산정치파동).

사실 한강철교 폭파는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인 신성모가 너무 빨리 한강철교를 폭파한 탓에 국군의 물자 및 장비들이 후퇴를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그래서 신성모가 까인다.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더 까여야한다(...) 하지만 사실 이범석도 제대로 된 건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범석이 한강 철교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황당하게도 "퇴로가 막혀야 한강 북쪽의 국군이 더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신성모가 한강철교를 너무 빨리 폭파해서 국군을 궤멸시킨(...) 것은 이범석의 건의를 충실하게 따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범석은 이승만에 대한 열성분자였으며 장택상, 이기붕과 각각 충성경쟁을 벌이기도 했다.[8] 하지만 족청계가 세력이 강해지자 이승만은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승만은 이범석이 군사력을 등에 업고 자기자리를 넘볼 것을 걱정했던 것. 따라서 다른 극우단체인 신성모대한청년단을 내세워 원내세력이었던 족청계를 정계에서 쫓아내버린다.

우선,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족청을 대한청년단에 흡수시켜야하니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범석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승만은 이에 맞서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트린 뒤에 이승만보다도 나이 많은 노인이었던 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없다는 뜻(자유당 항목 참고).

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비밀리에 자유당 당원들에게 이범석 대신 태영을 지지하라고 했고 미리 손을 써두었다.

이러한 조치는 후에 한국전쟁 초반 고전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군사분야 전문 단체였던 족청계를 떨어트리고 그 빈 자리를 사적인 단체인 대한청년단으로 충원한 결과 병크가 연이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신성모가 후임 국방부장관이 된 건 국군 희대의 흑역사가 되고 만다.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했고 장택상이 배후 공작을 벌인걸 확인, 이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관여했다며 장택상을 고소하였고, 그러나 무죄.... 후에 족청계 인물들과 정변을 모의했으나 소문이 유포되어 실패한다.

나중에 장택상이 일제시대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부산에서 만난걸 족청 부하들을 통해 입수하여 장택상친일파로 몰아 국무총리직에서 해임시켰다. 그러나 이 일로 이범석의 측근인 우정등이 희생된다.

4.19혁명 후에 국민의당을 창당해 최고의원이 되었으나 후에 탈당하고 67년에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회담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으며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72년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

여담으로, 박정희가 만주군 중위여서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급 과거를 가지고 있었으나 박정희 형인 박상희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점과 함께 광복군 참모장에 있었던 이범석이 과거 적이였던 박정희를 끝까지 지지했기 때문에 박정희 본인이 과거 문제에서 꽤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범석은 덕분에 자유당 출신들이 줄줄히 사형당하던 3공 초기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극우반공 자주국방을 주장한 박정희와 상통하는 측면이 많아서 그런지 박정희가 엄청 띄웠다.
90년대 초반 비밀 해제돼서 공개된 주한미군 G-2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측에서는 상당히 싫어한 인물이었다. 그의 민족(혹은 국수주의)주의적인 측면에 대해서 상당히 싫어한 셈, 미국 측의 시각으로는 "부패한 중국군벌을 연상케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극화에서는 의외로 공기 수준인데. 이장호 감독의 송정 푸른 솔에에서는 나름 용감한 독립군 장교로, MBC 1공화국에서는 김현직씨가 2공화국에서는 김기현씨가 역을 맡았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성우가 맡았다.

부인은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김마리아로 군국주의자의 아내답게 마상쌍권총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은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와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이이다.

2. 대한민국의 외교관


1925 ~ 1983

李範錫, 평양 태생. 박정희 정권 때 외교관으로 발탁되었다. 영어실력도 좋았지만, 당시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비동맹권외교의 추축이었던 인도 공화국와의 외교관계구축에 상당한 성과를 내는 등, 실력 좋은 외교관으로 호평을 받았다. 인도주재대사로 재직하며 당시 수상이었던 인디라 간디와 절친했기에 가능한 일.

1980년 9월부터 1982년 1월까지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82년 1월 남덕우 내각이 퇴진하고 창순 내각이 출범할 때 대통령비서실에 임명되었다. 그 해 6월부터 이듬해인 1983년 10월까지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을 지냈다.

1983년 전두환-이순자 내외의 서남아시아-대양주 6개국 순방을 앞두고 인도보다 버마를 먼저 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 건의는 묵살되었다. 결국 이범석은 전두환을 수행하여 버마로 갔다가 전두환 대통령 도착 직전 예행연습으로 흘러나온 진혼곡 때문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이북 출신인 노신영과 반목했던 사이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범석이 죽기 얼마 전에 화해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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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음력으로는 10월 20일. 경자년 출생. 음력 생일인 10월 20일을 아무 설명 없이 표기하는 경우가 흔하여 주의할 필요가 있다.
  • [2] 그러나 일본 헌병이 대상이라선지 그의 아버지는 당당했다고.
  • [3] 당시 여운형은 조선인들의 도항절차와 수속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 [4] 북한의 초대 국방장관(민족보위성장)인 최용건도 이학교를 나왔다. 6.25 개전시 남북한 국방장관이 모두 이 학교의 동문인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최용건은 김일성이 주도한 한국전쟁 개전에 소극적이었고, 초기 전쟁 지휘는 김일성의 심복인 김책이 주도했다고 한다.
  • [5] 한국에서 나치를 연구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한국에서 나치를 연구한 인물로 이범석과 호상을 지목했다. 그 외에 춘원 이광수도 히틀러를 연구했다 한다.
  • [6] 초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던 안호상은 나치즘에 영향을 받아 '강력한 지도자 밑에 모두가 단결하자'는 일민주의를 제창 이승만 독재를 합리화했다. 그도 이범석처럼 나치의 패망소식을 듣고는 슬퍼했다. 더불어 자발적인 학생회를 해산하고 군대식 학도호국단을 만들고 교련(전투훈련)을 시행해서 학교를 군대식 체계로 조직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도 승승장구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었다. 안호상의 부인은 바로 유명한 친일시인 모윤숙, 둘은 이광수의 소개로 만났다. 역시 유유상종...
  • [7] 백사 이윤영의 회고록에 나온다.
  • [8]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이기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