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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last modified: 2016-06-01 10:22:53 Contributors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올스타 베스트10
선동열
(투수)
이만수
(포수)
장종훈
(1루수)
박정태
(2루수)
김재박
(유격수)
한대화
(3루수)
양준혁, 이순철, 장효조
(외야수)
김기태
(지명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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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선수시절.


2012년 올스타전에서 SK 와이번스 감독 자격으로 입장하는 모습.

삼성 라이온즈 영구결번
No.22

이름 이만수(李萬洙)
생년월일 1958년 9월 9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강원도 철원군
학력 대구중앙초-대구중-대구상고-한양대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82~1997)
지도자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캐처 (2000~2006)
SK 와이번스 수석코치/2군 감독 (2007~2011)
SK 와이번스 감독 (2011~2014)[1]

1983년 한국프로야구 MVP
박철순(OB 베어스) 이만수(삼성 라이온즈) 최동원(롯데 자이언츠)

1983~1987년 한국프로야구 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용운(MBC 청룡) 이만수(삼성 라이온즈) 장채근(해태 타이거즈)

1983~1985년 한국프로야구 홈런왕
1982년 1983~1984년 1985년 1986년
김봉연(해태 타이거즈) 이만수(삼성 라이온즈) 이만수(삼성 라이온즈)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김봉연(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2번
창단 멤버 이만수(1982~1997) 영구결번(2003년 지정)

SK 와이번스 등번호 22번
이한진(2006) 이만수(2007~2014) 서진용(2015~)

SK 와이번스 4대 감독
김성근 (2007~2011.8.18) 이만수(2012~2014.10.23 ) 김용희(2014.10.23~)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게 기적이고, '미라클'이다. 선수들에게 고맙다. 뒤는 생각하지 않겠다. SK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됐으면 좋겠다. 내가 없더라도, 다른 감독이 오시더라도 그 트렌드는 정착됐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미련은 없다. -2014 시즌 넥센 히어로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Contents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연도별 성적
2.2. 은퇴
3. 미국 시절
4. SK 와이번스 수석코치 및 2군 감독 경력
5. SK 와이번스 1군 감독 경력
5.1. 2011년 감독대행 시절
5.2. 2012 시즌
5.3. 2013 시즌
5.4. 2014 시즌
5.5. SK감독시절의 전반적인 평가
6. 해설자로서의 경력
7. 별명
8. 기타

1. 개요

삼성 라이온즈포수, 前 SK 와이번스감독이자 현재는 MBC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이자 KBO 야구발전위원회의 부위원장.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한국프로야구 원년 레전드이자 최초의[2] 영구결번 선수, KBO 최고의 포수 중 한 명, 그리고 수많은 최초 타이틀을 가진 최초의 사나이.[3]

그리고 한국인으로 최초의 메이저리그 코칭 스태프[4]

SK 와이번스 의 감독으로써는 혼란한 팀 분위기를 추스르고 2년연속 준우승을 이뤘으나 그 이후 하위권에 머무르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감독

2. 선수 경력

1982년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한 한국프로야구 원년멤버 중 한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 선수로 16시즌동안 활동했다. 프로 원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오래 뛰었던 선수다.[5] 별명은 헐크. 등번호는 22번으로,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영구결번이다. 현재 삼성의 영구결번인 양준혁의 10번도 다른 선수들이 단 적이 있지만[6] 이만수의 22번만큼은 은퇴한 후에도 아무도 단 사람이 없어서 삼성 라이온즈 역사에서 유일하게 22번을 단 선수로 남게 되었다.

삼성의 초대 본좌. 이만수-양준혁-이승엽으로 시작된 본좌라인 계보 중 한축이었으며. 삼성의 역사는 이만수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삼성 본좌라인 중 유일한 우타자이지만 삼성에서의 우승경험은 전후기 통합우승을 이룬 1985년 뿐,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은 없다. 등번호에 2가 2번 들어있어서(…) 그런 걸지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포지션은 포수.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00호 홈런, 200호 홈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 다양한 타이틀 및 통산 기록으로 대한민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성실성과 노력으로 대표되는 선수로 1985년 삼성이 플로리다로 훈련을 갔을 때, 정규 훈련+야간 개인연습+새벽 개인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한 현지인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강원도 철원군 출신으로 삼성의 3대 레전드 본좌 라인 중 유일하게 대구광역시 출신이 아니다.(양준혁이승엽은 대구 출신) 단지 이건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복무지인 철원군에서 그를 얻어 그렇게 된 거고 아버지가 군에서 전역한 후, 어릴 때 대구로 이사해서 정착, 대구에서 자랐다. 학교도 대구상고[7]를 나왔고 삼성에서 오래 뛰었기 때문에 출생지만 철원일 뿐 완전한 대구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위대한 타자 중 하나이지만 박철순과 마찬가지로 흑역사가 존재했던 선수인데 트리플 크라운을 이룰 당시 김영덕 감독이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내며 기록 밀어주기를 하는 바람에 덩달아 이만수도 욕을 먹고 그 대가로 MVP를 최동원에게 빼았겼던 흑역사가 있었다.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낸 기록조작 감독 ㅅㅂㄹㅁ 그리고 선수시절 말년 삼성의 은퇴 제의를 계속 거절하자 은퇴식도 치루지 못한 채 1997 시즌 후 방출당해 결국 은퇴했고, 자비를 들여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가게 되었다. 또한 과거 선수시절에 팬들에게 캔 투척을 했다는[8] 웃지 못할 흑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삼성의 슈퍼 인기스타. 기량이 떨어진 1990년대에는 거의 나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며 경기가 끝나가면 팬들은 이기건 지건 대타 이만수를 외쳤고 이만수가 나오면 병살을 치든 삼진을 당하든 홈런을 치든 팬들에게 환호성을 받았다. 이만수가 타석에 나오면 그날 삼성이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그 옛날 에스에스패션(현 제일모직 패션부문) 위크엔드[9]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바로 아래 동영상을 참고하자.


이 때만 해도 이만수는 어린이들에게 그야말로 우상이었다. 당시 야구 선수가 이런 광고에 나올 정도라면 어느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초창기 크보의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말년에 대타로 2루타라도 때려내면 원정팀에서도 기립박수를 쳐주기도. 삼진을 당하면 다들 만수바보~ 만수바보하고 관중들이 놀렸는데 그게 비웃는게 아니고 정말 동네 친한 바보형(..)을 놀리듯이 한것으로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

장종훈과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나마 1번의 우승이라도 있으니(이만수는 85 통합우승, 장종훈은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그걸로 위안을 삼자. 하지만 삼성은 85 통합우승의 경우 공식적인 우승이지만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못했고 이만수를 보유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0회 우승, 6회 준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선수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우승은 마침내 2005년에 월드시리즈에서 코치로 재직중이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우승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16시즌동안 1449게임에 출장, 5034타석에서 타율 .296, 타점 861, 홈런 252, OPS .907을 기록했다. 16시즌동안 3할 타율을 6번, OPS 9할 이상을 9번이나 달성한 레전드 중 레전드이다. 조정 OPS는 무려 155. 어느 타격의 신사자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다.특히 타격이 약한 포수로서 이 정도의 타격을 기록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역대 홈런왕 3번[10], 타격왕 1번, 포수 골든글러브 5번을 수상한 레전드이다.''' KBO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 타격 성적만으로는 KBO 최고 포수라고 할 수 있고, 정교함과 장타를 종합한 전반적인 타격 능력을 놓고 보면 박경완은 통산타율 2할 5푼의 공갈포에 불과하다고 봐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그의 볼넷:삼진 비율. 통산 4310타수 672볼넷 490삼진으로 10타수당 삼진 1개에 지나지 않을 만큼 정교한 타격과 파워를 겸비한 타자였다. 당시 리그에서 푸홀스미기나 다름없던 위엄을 뽐내던 타자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수비실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김영덕, 김응룡, 심지어는 백인천 등의 감독들은 팀의 공격력을 믿고 이만수가 1이닝이라도 더 수비를 하게 하려고 투수에게 배팅볼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다. 또한 김성근감독 역시 이만수를 보고 "이만수의 경우에는 단순하고 착한 친구다."라고 평했다. 단순해서 상대팀 감독으로서 상대하기 편했다고.

김성근 감독 강연에 보면, 늘 나오는 이야기중에 하나가, OB코치 시절, 이만수 팔뚝에 힘줄바뀌는 것만 보고도, 구질을 다 알아내서 써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상식선에서만 봐도 이만수 깍아내리기의 일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는데도 뒤를 보면서 이만수 팔뚝을 보고 사인은 읽었다는 판타지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게 대단하다. 아니면 코칭 스테프가 망원경이라도 가져와서 읽고 그걸 타자한테 전해 줬다는건데.... 상식선에서 생각해보자.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만수의 수비 능력을 까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는데 바로 1990년 한국시리즈 3차전 당시에 백인천 감독이 일부러 홈런을 맞았다고 하는 이야기다. 당시 LG가 3-0으로 앞선 9회말 상황에서 백인천 LG감독이 자기팀 배터리에게 직구 승부를 지시하였고 이만수는 3-2 추격 홈런을 때렸었다. 후일 이 사건에 대해서 백인천 감독은 이만수를 다음 경기의 선발 포수로 출전 시키기 위한 볼배합이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만수가 그만큼 만만했다고 이야기했다. 따지면 한국 시리즈에서 1점차 추격 홈런을 일부러 맞아 줬다는 말이니. 사실이라면 대단한 배짱이 아닐수 없다. 흠좀무 다만 삼성팬들 사이에서는 당시 홈런을 때렸든 말든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이며 백업과 넘사벽의 차이를 보이던 포수를 상식적으로 다음 경기에 뺄리 없다는 점. 홈런 더비에서도 몇개 못치는 홈런을 무슨 수로 의도 했냐며 예지안이라도 있었냐는 점. 한국시리즈에서 일부러 1점차 추격을 당하는 감독이 실존 한다면, 그거야말로 정상이 아닐거라는 점을 들어 그냥 백인천 감독의 자기 변명성 인터뷰로 받아들이고 전형적인 이만수 깍아내기와 자기미화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시 백인천 감독 말에 따르면 홈런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안타 한 방 맞아주려는 의미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며, 다른 포수인 박정환의 임기응변식 스타일을 어려워하여, 이만수를 계속 내도록 정상흠에게 높은 직구를 던지도록 한게 여러 책 및 인터뷰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만수의 수비 능력이 뛰어 났다는 주장과 기록도 많은며, 같이 뛰었던 김시진롯데 자이언츠감독에게 그의 수비 실력에 대해 묻자, 김시진과 배터리를 이뤘을 때 가끔 포수와의 사인 없이 던지는 노 사인 변화구들을 모두 다 받아낼 정도로 좋은 수비실력을 지녔었다고 하였다. 실제 이만수의 현역 시절 수비스탯을 비교해 보았을 때 1990년대 이후 최정상급 포수로 인정받는 박경완과도 큰 차이가 없고 도리어 수비적인 측면에서도 당시 1급에 위치해 있었다. 바보 만수로 대표되는 희화화 이미지+4번타자 포수+당시 일선 지도자들의 짠 평가가 이미지를 왜곡시킨 것에 가깝다. 당시 리그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현역 시절의 포수 이만수는 공격, 수비 모두 흠잡을 곳 없는 완성형 포수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투수 리드(게임콜링)에 대해서는 특출난 장점이 없었다고 하지만 일단 이선희, 김일융, 김시진 등 80년대 삼성의 투수들은 다들 리그 초일류 투수들이었기 때문에 이만수가 투수 리드를 잘한다고 티가 나지도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만수의 수비력은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만수의 현역 시절 공격력이 거의 푸홀스급이다 보니 수비력이 심하게 저평가 당하는 편이다. 사실 이러한 수비 문제는 지금까지도 떡밥 던져졌다 하면 순식간에 콜로세움이 열리는 이만수vs박경완 비교 시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박경완이 포수 수비력으로는 역대 원탑급이기에 이만수의 수비력이 상대적으로 꿀릴밖에...

지금도 이만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타격은 역대급,수비는 테러급'일 정도이니.. "이만수의 어깨가 약하다 ,물어깨다." 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야구팬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져 있지만 사실 이만수의 통산 도루저지율은 0.377이다. 물어깨라고 욕먹기에는 정말 억울한 성적이다. 당시 선수들의 도루성공률이 형편없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저 정도 도루저지율이면 준수하다는 소리 들으면 들었지 절대 물어깨라고 욕먹을 정도는 아니다. 또한 이만수의 게임당 에러율(포수 포지션)은 0.047로 박경완의 0.057 ,진갑용의 0.069보다도 낮다. 야구 전문 사이트조차 이만수를 편견에 사로잡혀 까는 극성팬들임이 많음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만수가 포수를 보던 시절의 투수들의 구위나 변화구, 그리고 박경완이 활약하던 시절의 투수들의 구위나 변화구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당장에 이만수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가 거의 없었으니...... 게다가 야구가 발전하면서 늘어나게된 포수의 역할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박경완이 더 수비를 잘 했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스포츠는 발전하기 마련 지금 선동열이 크보에 돌아온다고 해도 과거와 같은 기록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이는 의미 없는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이만수 vs 박경완 논쟁이 개싸움으로 변질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SK 와이번스 팬덤과 관련이 깊다. SK 감독으로서 논란을 야기해왔던 이만수와 SK의 레전드로 여겨지는 박경완의 비교이기 때문에 이만수의 평판이 바닥까지 추락하기 좋은 비교 환경이 되어버리게 된 것도 원인이다. 사실 선수 시절에도 과도한 리액션 등등으로 야구계에서 적을 많이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폄하당하는 측면도 있다.

홈런기록의 경우도 논란이 있는데, 삼성이 한국시리즈 단골이면서도 매번 해태에게 진 이유를 애시당초 이만수가 기록관리를 위해 약한 투수를 상대로 홈런을 쳤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만수의 경우 최동원, 선동열같은 에이스 투수에게 친 홈런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이런 논란도 나온다.

한편으론 1996년 6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쌍방울 경기에서 박진석과 빈볼시비로 추격전까지 벌였는데,[11]


분명 험악해야 정상인 상황인데 어째서인지 둘의 표정이 훈훈하다. 그래서 관중들은 오히려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설마 이거 노리고 서로 짜고 친건 아니겠지? 이 때 박진석의 발이 너무 빨라서 쫓아가던 이만수가 제풀에 지쳤다고... 그런데 더 웃긴건 이만수가 추격을 하면서 삼성 후배선수들한테 "저거 잡는 사람 내가 빵사준다"라고 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참고로 이만수를 말리러 뛰어가는 이광길 코치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이만수 수석코치와 SK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2.1. 연도별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삼성 라이온즈 78 270 .289 78 16
(6위)
1 13
(4위)
51
(5위)
46 6 50 .500 .400
1983 98 357 .294
(8위)
105
(7위)
12 0 27
(1위)
74
(1위)
53
(4위)
0 49 .555
(2위)
.379
1984 89 300 .340
(1위)
102
(6위)
17
(8위)
1 23
(1위)
80
(1위)
45
(9위)
3 38 .633
(1위)
.414
(3위)
1985 103 357 .322
(5위)
115
(5위)
19
(9위)
2 22
(1위)
87
(1위)
63
(5위)
7 56 .571
(2위)
.414
(2위)
1986 59 212 .321 68 8 0 16
(3위)
39 31 1 27 .585 .367
1987 85 299 .344
(2위)
103 14 1 18
(2위)
76
(1위)
56
(6위)
6 51 .579
(1위)
.431
(2위)
1988 86 285 .323
(6위)
92 13 0 18
(3위)
58
(4위)
47 6 48 .558
(2위)
.419
(3위)
1989 110 359 .284 102 11 0 20
(3위)
64
(4위)
55
(10위)
4 52 .482
(4위)
.373
1990 110 359 .287 103 13 0 26
(2위)
57 50 3 59 .540
(2위)
.386
1991 118 378 .317
(5위)
102 18 0 17
(7위)
74
(6위)
51 6 64 .500 .413
(4위)
1992 93 305 .289 88 11 0 22
(6위)
70 50 7 60 .541 .402
1993 78 193 .207 40 3 1 5 20 21 0 24 .311 .294
1994 109 233 .253 59 14 0 12 37 24 0 33 .468 .343
1995 97 158 .215 34 10 0 5 27 17 1 32 .373 .344
1996 97 193 .285 55 12 1 6 38 14 2 24 .451 .359
1997 39 52 .231 12 2 0 2 9 2 0 5 .385 .298
KBO 통산
(16시즌)
1449 4310 .296 1276 193 7 252 861 625 52 672 .519
(8위)
.388

2.2. 은퇴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급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우승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선수의 성적과 결과만 보고 가차없이 결정하던 삼성 그룹 특유의 방식때문에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은퇴식도 없이 1997 시즌 후 방출당했고, 사실상 반 강제적으로 은퇴를 당했다. 당시 삼성 팬들의 어마어마한 반발은 덤.

안좋게 커리어를 마무리한 레전드의 대표 사례격으로, 제아무리 초특급선수라도 나이먹고 노쇠하면 구단도 처치곤란인데 발이 느린데다가 나이를 먹은 후 포수 수비가 불가능하게 되면 다른 포지션으로 전업하지 않는한 지명타자외에는 자리가 없는데도 이만수는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포지션 전환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은퇴할 당시 이만수의 나이는 40세였다. 반면 팬들의 지지가 여전히 두터웠고 현역 연장 욕심이 있었던 이만수의 입장과 달리 뛸 수 있는 상황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대타 외에는 보직을 제대로 줄 수 없는 감독 입장에서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12]

위에서 1990년대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라 언급했지만, 실제로 주전 포수 자리를 내놓은 건 1993 시즌부터이고 사실상 대타 외에 기용이 어려웠음에도 1993~1996년 4년 동안 대타로 총 777타수를 기록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타석에서의 기회는 상당히 많이 받은 셈. 1997년의 경우 무릎 부상 악화로 선수 생활 자체가 어려운 가운데 치른 시즌이라 52타수에 불과. 그리고 삼성은 재계약을 포기한다.

은퇴식을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이만수가 떠나고 2년 후에 은퇴한 유격수 류중일. 은퇴 경기를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양준혁. 이만수의 탈단과정과 이로인한 연고팬들의 반발 & KBO 레전드에 대한 KBO 구단들의 예우에 대한 야구팬들의 반발이 공론화되면서 한때 우승에 눈먼 토사구팽구단,통성이라는 악명까지 있던 삼성 라이온즈[13]도 이러한 악습이 많이 시정되었고 2003년에 22번을 이만수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삼성 구단의 레전드 죽이기의 안타까운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많은 삼성 팬들은 한 동안 '이만수 감독 복귀' 떡밥을 꾸준히 밀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3년 삼성에서 감독 제의를 했다가 이만수가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준비까지 다 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계약을 파기했던 사건을 생각하면 그냥 그들만의 꿈일 듯.[14] 사실 이때문에 당시 삼성에서는 김응용 - 선동열 라인이 매우 건재했었다. 2010년 시즌 후 준우승 감독인 선동열을 갑자기 내치긴 했으나 후속 감독은 이만수가 아닌, 삼성의 또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류중일이 맡게 되었고, 4년 연속 우승까지 안겨주게 되어 프런트나 팬들에게도 신임이 두터워져 이래저래 이만수의 삼성 복귀는 힘들 듯하다. 오히려 이제는 이만수의 SK 감독 커리어로 보아, 차라리 그때 삼성 감독으로 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삼성팬들이 태반이다.

양준혁, 이종범에 이어 무릎팍도사 출연이 확정, 2010년 3월 3, 10일에 2편으로 나뉘어 방영되었다.

3. 미국 시절

은퇴 후 마이너 리그에서 코치생활을 했으며, 이 시절 발굴한 선수가 훗날 한국프로야구에서 큰 활약을 하는 틸슨 브리또. 여기서 삼성에서 외면한 은퇴와 영구결번 관련 작은 행사를 치뤄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2000~06년에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캐처로 지냈었다. 한국인으로 최초의 메이저 리그 코칭 스태프 소속으로 2005년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를 했다. 무릎팍 도사에서 당시 코치로서 당시 몇 안되는 A급 공신으로 뽑혀서 4억 보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카퍼레이드에서도 A급 공신이라 맨 앞에 서 있었다고. 당시 받은 우승 다이아 반지, 우승 다이아 목걸이(와이프용으로 구단에서 제공), 우승 기념 시계(스위스산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시계)도 함께 나왔다. 당시 그 우승기념물품은 구단에서 1000개를 뿌린 것이라고.

  • 불펜 캐처라는 보직에 대해 설명하자면, 언론에서는 이코치라고 부르며 정식 코치에 준하는 직함으로 강조를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불펜 캐처는 불펜 코치(한국에선 배터리 코치와 같은 역할)의 보조 겸 선수 대신 불펜에서 불펜 투수들의 공을 받는 선수와 코치의 중간 위치이다. 한국에서는 2군 캐처가 이 역할을 하고, 일본, 미국에서는 정식 코칭스태프로 등록하여 활동한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사례. 재밌는 것은 불펜 캐처의 이런 위치 때문에, 비상대기긴 하지만 메이저리그 선수로 등록된 적도 있다. 실제로 경기 출전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화이트삭스의 정식 코치 였던 것은 사실이다.[15]

여기에도 흑역사가 있는데, 앞에 내용처럼 2003년에 삼성라이온즈에서 감독제의를 받고 당시 화이트 삭스에서 맡고 있던 코치직을 사임한 상태였는데 이게 결국 삼성의 병크로 없던일이 되면서 실업자가 되자 화이트 삭스와 다시 계약을 했다. 무릎팍 도사에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관련기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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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K 와이번스 수석코치 및 2군 감독 경력

SK 와이번스 No.22
이만수(李萬洙)

김성근 감독이 계약할 때 구단에서 이만수를 수석코치로 요구했었고, 감독 취임 후 수석코치 취임식을 했다. 게다가 김성근감독을 이만수자리 옆에 앉혀놓고 이만수 수석코치는 소감이라며 팀을 어떻게 바꿔가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김성근감독은 이 상황에 위화감을 느꼈고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음을 보였다.[16]

구단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정했으나 2007년 SK 와이번스의 수석코치로 국내 복귀시 차기감독직을 보장받았다는 설이 있었고, 설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대내외적으로 김성근 감독의 2년 임기 이후 차기감독감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 부임후 연속 우승 등 좋은 성적을 거두어 계약연장을 하게 되면서 구단. 김성근 감독 이만수 코치 3자간의 갈등을 겪었다.

국내 복귀 후에는 SK 와이번스에서 수석코치를 맡고 있으며. "스포테인먼트" 정신을 강조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예로 2007년 5월 26일 문학구장이 만원을 이루었을 때 "알몸 런닝"을 공고했었고, 경범죄 처벌 위험에도 불구하고 팬 서비스 차원에서 밀고나가 "팬이 있어야 야구가 있다."를 강조했었다.
하기야... 코치를 못하니 이거라도 잘해야지...

거기다 이번에는 10시즌에 우승할 경우 정형돈과 같이 여장을 하고 그라운드를 한바퀴 뛰겠다고 한다니...그런데 정말 SK가 정규시즌 우승하고 한국시리즈까지 일방통행으로 종결...과연 그는 뛸것인가? 다들 궁금해했는데 뛰지 못했다. 시리즈 내내 화병감기에 걸려서 우승 순간 라커룸에 누워 있었고 결국 병원에 실려갔다고.기사링크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삼성에는 이젠 더 이상 감정이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뉘앙스가 용서라는 의미보다는 무반응, 무감동에 가까운듯 하여 어쩌면 삼성팬들에게는 더 슬픈 발언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심리적으로 "이제 삼성 라이온즈는 뭘하든 말든 특별히 관심 없는 팀"이라는 선을 그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 차라리 미워라도 하면 그걸로라도 삼성에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제 이만수에게 있어서 삼성이라는 구단은 특별한 애착이 없이 단지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하는 여러 구단 중에 하나라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단에서 2008년말 김성근 감독과 3년 재계약하면서 이만수 코치는 1년 단위로 계약을 이어갔다. 이유는 다른 팀에서 감독으로 스카웃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는데...그 이후 한화, LG, 롯데, 삼성의 감독이 교체되었지만-더군다나 이 팀들의 감독인 한대화, 박종훈, 양승호, 류중일은 이만수에 비해 지명도나 커리어가 앞서지 않는다- 언론의 하마평에만 오를 뿐 선택되지 않는 것은 현장에서 그의 평가가 좋지 않다는 반증이다.[17]

2010년 6월 19일 수석코치에서 2군 감독으로 보직 이동되었다. 김성근 감독과 프런트와 갈등이 주원인이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그 기사가 내려간 데 이어 반론성 기사도 나오고 있다. 박동희 기자가 블로그에 김성근 감독과 프런트와의 갈등을 암시하는 내용을 게재하여 아직까진 혼돈의 카오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유야무야, 쉰 떡밥이 되었다. SK 프런트 측에서 부랴부랴 봉합한듯.

2010 올스타전에서 시포를 맡았다. 시구와 시타는 삼성라이온즈에서 배터리를 이루던 김시진 감독과 장효조.

2010년 8월 16일 다시 2군감독에서 1군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다시 한번 보직이 2군 감독으로 변경되었다. 김성근 감독은 그 이유를 이제 감독 수업 받을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김성근 감독과 SK 프런트간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고. 2011년 시즌을 끝으로 김성근 감독과 SK의 계약이 종료되는 만큼, 감독 수업을 염두한 2군 감독직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상황. 2012년부터는 드디어 감독직을 수행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예상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구단측에서는 이만수 감독대행의 잦은 보직이동에 불만을 김성근 감독에 직접 표시했고 이것이 김성근 전 감독의 중도사퇴 원인중의 하나로 꼽힌다.

2군 감독 시절에는 2군 경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무능'과 '이중성'을 보였다는 의견이 있다. 선발의 컨디션과는 무관하게 6이닝을 던지게 하고, 최원제, 박희수 등 주로 나오는 계투 역시 몸상태가 안 좋더라도 던지게 했다. 이때문에 2010년 후반기 2군에 있었던 박희수는 시즌이 끝나고 재활조에 편입되어야 했다. 그저 혹사가 아니라 제대로 육성해서 팀의 전력이 돼야하는 선수들이 2군에서 망가지고 있었다는 것. 또한 내야수로 2루수나 유격수로 출전하던 박계현을 같은 경기에는 외야수로 기용하는 등, 야수 운용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선수를 굴리고도 성적은 퓨처스리그 북부리그 하위권. 어느 정도냐면 2010년도 퓨처스리그 2위였던 팀을 2군감독 되자마자 꼴찌로 만들었을 정도. 참고로 2010년 SK 2군은 계형철 감독이 2군감독으로 돌아오자 그나마 성적이 올라서 4위로 마감했다. 물론 2군리그 성적이야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2위하던 팀을 꼴찌로 추락시킬 정도면 무능하다는 소리 들을 만도 하다.

5. SK 와이번스 1군 감독 경력

5.1. 2011년 감독대행 시절

부임 초기에는 서투른 투수교체로 인한 연패와 감독대행임을 자각하지 못한 인터뷰 등으로 SK팬들에게 눈치도 능력도 없다고 까였으나 에이스 김광현, 정근우등 주전 상당수가 부상으로 빠지고 SK팬들의 경기장내 시위로 극심하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팀을 잘 추스려 남은 시즌 김성근 감독이 거둔 승리를 포함하여5할 승률을 마크하여 3위를 지켜냈다. 포스트시즌에서 전문가들이 체력과 전력상 열세라 예상했던 KIA 타이거즈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감독대행 최초이자 5년 연속 한국 시리즈 진출을 이뤘으나[18] 시즌 1위 삼성 라이온즈에 패해 준우승하였다. 어쨌든 기대치보다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3년 10억의 조건으로 SK 와이번스 차기 감독에 부임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만수/2011년 참고.

5.2. 2012 시즌

시즌 초중반의 삽질과 계속되는 연패로 SK가 한때 6위를 하고, 매끄럽지 못한 인터뷰와 과도한 리액션에 대한 비난으로 인해 한때 방송에서까지 언급될 정도로 평판에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가을이 되면 팀이 강해지는 버프와 가끔 터지는 신의 한수 전략으로 최종순위를 2위로 마감하고 한국시리즈에 6년 연속 진출에 성공하면서 전년보다는 전체적인 평가가 좋아졌기는 개뿔... 여전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었다. 다만 가끔 삽질 경기운영을 하기도 해서 이만수 안티들이 더더욱 강성 안티가 되었다는 점을 빼고.

자세한 것은 이만수/2012년 항목 참고.

5.3. 2013 시즌

전년도의 인터뷰 논란은 계속되었고, 게다가 9월 25일 7년만에 가을야구에 참가하지 못하며 김성근의 저주 SK 왕조를 멸망시킨 역적 0순위가 되었다. 경질설이 나돌았지만 프런트는 선동열처럼 2014년에도 재신임을 하기로 했다.


5.4. 2014 시즌

어그로들 빼고 SK 팬들이 그렇게 염원하던 계약 마지막 해이다. 2013년까지만 하더라도 "이만수가 프런트의 앞잡이니 재계약하는 거 아닌가"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프런트와 사이가 상당히 안좋은 암시를 남겼기에 재계약할 가능성은 많이 낮아졌다.

하지만 조인성, 스캇 사건을 보면 알겠지만 2014년에 그 SK 와이번스의 최대강점이었던 팀케미가 처참히 무너졌으며, 또한 2014 시즌 후에 최정, 박재상, 나주환, 김강민왕조 시절의 주전 라인업이 대거 FA를 신청하게 되는데 설령 이들을 전부 잡는다고 해도 전력은 +도 -도 없이 0인데다가, 과거 이진영, 정대현 그리고 정근우의 예에서 알수 있듯이 프랜차이즈 선수 붙잡는 데에도 상당히 인색했던 전적을 생각해보면 SK 와이번스는 이만수 감독이 쫓겨나가더라도 최악의 경우 팀 자체를 사실상 리부트(...)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후반기 갑작스럽게 좋은 성적으로 4강 싸움에 상당한 고지에 올라왔다. 9월 10일 김광현이 최악의 부진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타선은 꾸준히 터졌지만 아시안 게임 휴식기 이후 10월 경기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4강 싸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10월 17일 목동 넥센전에서 패배하면서 5위가 확정되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찾아온 솩복절 그렇게 그는 계약이 만료되었고, 재계약에 실패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이만수/2014년 참고.

5.5. SK감독시절의 전반적인 평가

SK를 제외한 KBO 9개 구단 팬들의 종신갓동님

시작부터 좋지 못했던 감독 생활이였고, 그 때문에 다소 이미지가 안 좋은 채로 시작했기 때문에 판단은 유보되어 왔으나...어이없는 용병술과 임기 만년 개판이 되버린 팀 융화력으로 전성기 SK 왕조를 말아먹었다. 결국 타 팀 팬들에게 SK의 영원한 종신감독으로, 자기 팀 팬들에겐 금지어가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입티디라는 신조어가 나온 것처럼 말 그대로 입이 문제다. 물론 이만수가 살았던 세대의 한국의 스포츠 교육이 기록 향상에만 집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만수의 이런 언행 미숙에 대해 조금 변명할 수라도 있겠지만,[19] 감독의 자리는 매의 눈으로 기사거리를 찾는 언론을 상대하며 선수들의 심리상태와 입장도 고려해야하는 막중한 자리라는 것이기 때문에 이만수가 비판을 많이 받는 것이다.

가장 흔한 패턴은 말이 계속 바뀌는데다가 본인 입으로 한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번복한다.경기를 이기면 그것은 포수의 리드 덕분이지만 포수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포수의 블로킹이며 투수리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고 말했던 것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투수 리드가 현대야구에 있어 큰 효용을 가지는가는 수많은 야구팬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사안이긴 하지만, 감독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왔다갔다하면 팀 자체가 흔들린다. 이 밖에도, 이만수 감독의 각 시즌 항목을 참고하면 말이 바뀌거나, 감독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언행을 보인 바람에 구설수에 오른 일이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주요 어록으로 돌아다니던 것은, 감독을 위해 이겨달라, 차라리 골절이였으면 복귀가 더 빨랐을 것이다 등이 있다. 분명한 것은, 팀의 지도자인 감독으로서 할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수형 인터뷰 각도 좁히셔야

사실 이만수 감독 부임 첫 해였던(감독대행 시절 제외) SK 와이번스의 성적은 2위로, 성적 자체로는 꽤나 선방했다고 볼 수 있지 않냐는 의견이 종종 나온다. 문제는 최종성적 2위까지 가는 여정인데, 전임 김성근 감독 시기 SK 와이번스가장 부진했다는 2011년에도 3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건만 2012년 SK 와이번스는 시즌 중에 무려 6위까지 찍고 올라오는 기염을 토했다(...) 이러니 기껏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해놓고도 선수빨이라는 주장이 SK 팬들 사이에서 크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 그 다음해인 2013년 시즌 SK는 6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예년에 비해 투타 전반적으로, 특히 타격쪽에서 많이 페이스가 떨어진 것이 그 원인으로 2013 스프링캠프 때 닥공을 강조하고, 미국에서 맥스 베너블 타격코치를 데려온 것 치고는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sk 와이번스는 강병철, 조범현, 김성근 순으로 내로라하는 명장들의 손길을 거쳐온 팀이다. 이만수가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팀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감독의 능력이 어느정도만 있었다면 우승은 상당히 쉬웠을 것이다.실제로 정말 비슷한 케이스로 한화 이글스의 이희수 감독이 우승한 적이 있다.[20]

일부에서 제시하는 미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국 프로야구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못했다는 논리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게, 원년부터 한국에서 선수하던 사람이 적응을 못했다라 이만수 감독이 취임하고 나서 선보인 무한 번트와 불펜 노예질 운영은 메이저리그식 야구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오히려 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이 비판하는 '한국 구세대들이 구사하는 일본식 야구'에 훨씬 가까웠다. 실제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프런트스카우트로 일한 경력이 있는 칼럼니스트 대니얼 김은 다음스포츠 칼럼 '송재우, 대니얼김의 더블플레이'에서 "이만수 감독님의 야구는 메이저리그 스타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요. 전혀 달라요"라면서 혹평한적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메이저리그 전문 해설자인 송재우도 동감을 표시했다. 과연 리그에 따른 스타일 차이 때문인지는 의문이다. 적응이 문제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오히려 점점 퇴락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건 적응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스승 김성근 감독 체제의 SK 와이번스에서 1군 수석코치와 2군 감독을 거치며 준비된 차기감독으로 무려 5년의 시간을 보낸 이만수 감독이 적응을 운운한다면, 사실상 무명코치 신세에서 덜컥 감독 자리에 오른 김경문 감독이나 염경엽 감독의 호성적은 설명할 길이 없다.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 하는게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적응력이 떨어지는건가.[21]

종합해보자면, 본인만의 원칙 및 야구관을 종잡을 수 없고,[22][23] 가만히 있으면 주목받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을 본인의 경솔한 발언 때문에 일을 키우는 일이 잦다. 이명기한동민을 중용한 것은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조차도 양아들 한 명의 존재와 본인의 발언(...) 때문에 빛이 바래는 상황. 이러한 안 좋은 평가는 모두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만큼 발언이라도 조금 더 심사숙고해서 했다면 조금 더 좋은 평가를 기대할 수 있겠으나.. 2013 시즌이 끝나고는, 그런 거 없다.

여담으로 한때 인터넷에서는 진정한 SK팬을 운운하는 이만수 지지자들이 많아 보여서 평가가 생각보다 좋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박재홍 은퇴식때 이만수 이름이 나오자 대규모 야유사태가 벌어지면서 오프라인 인천 야구팬들의 반응이 뽀록나는 바람에[24] 이만수 지지자들이 죄다 잠수를 타기 시작했다.[25] 더군다나 2014년 박경완의 은퇴식에서도 이런 광경이 재현.... 이 쯤 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한 2014년 내내 지적되어 온 불펜 혹사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시즌 초반부터 박정배를 미친듯이 굴리면서 8월에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불펜진 붕괴를 불러왔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윤길현, 전유수, 진해수에게 넘어갔다. 시즌 후반기부터 이 셋은 혹사의 여파로 구위 저하로 인한 부진을 겪었으며, 아시안게임 휴식기가 끝난 10월에도 부진이 계속 이어지면서 4강 탈락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박정배는 어깨 통증의 심화로 시즌 후 어깨수술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4년 11월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은 2014 시즌 외국인 투수 로스 울프는 선발인 자신을 강제로 불펜전환을 시키고서는 2이닝 세이브를 맡기는 건 기본에 제대로 워밍업을 할 시간도 안 주고 올려보내기까지 했다며 디스. 그리고 2군 선수들은 불펜 피칭을 하루에 평균 150개를 던지게 하고, 어떤 타자는 지나치게 많은 타격연습에 결국 손이 부러지기까지 했다는 발언도 하였다.
-----------해당글은 노리타가 작성하였습니다.------

6. 해설자로서의 경력

2014년 12월 18일 MBC SPORTS+ 객원해설자로 데뷔한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라오스는 어떡하라는건지[26] 한화 vs SK 중계를 맡게 되면 그날 국내야구 갤러리는 대폭발 정민철도 참여하면 더 꿀잼

엠스플 개객기들아 갓동님 해설한다며 왜 안나오냐

7. 별명

별명은 헐크, 떠벌이,[27] 대한민국베이브 루스[28] 감독 대행 시절, 그리고 이후 이어진 SK 감독 시절에 김성근 감독의 팬들 및 SK팬들이 붙인 별명으로는 유다, 이만셔, 삼성 종신감독, 다중이, 만수라 백작,[29], 물개박수, 돌만수 등이 있고 지지하는 팬층(주로 야갤)에서는 만수르라고 부른다. 하지만 2013년 시즌에 SK가 부진하면서 그냥 지지하든 까든 대충 만수르로 칭하기도.

2013년에는 정근우라늄, 진해수소폭탄, 전유수소폭탄, 문승원자폭탄,박희수소폭탄을 실험하는 이만슈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와 비슷하게 팔도의 폭탄을 수집한다고 팔도폭탄 수집가라는 별명도 나와서 큰 웃음을 주었다.[30]옆동네모 핵무기만 수집하면 완벽한가?이왕이면 차르봄바도 수집하시는게만수노트라는 제목으로 웹툰에서도 폭탄수집한다고 까였다.(참고로 날짜는 앞에 서술한 리플보다 이쪽이 먼저) 근데 달린 배뎃이 더 가관

2014년에는 타자 용병인 루크 스캇과의 언쟁에서 비롯한 겁쟁이, 거짓말쟁이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선동열의 각동님과 더불어서 갓동님으로 별명이 굳어졌다.

8. 기타

  • 2011년 6월 27일, 프로야구 30년 역사상 최고의 별로 뽑혔다.#

  • 2011년 7월 23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했다. 당시 시포는 선동열이 맡아서 관중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 종교는 매우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다. 아들 이름도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종"에서 따서 지었을 정도다. # 이만수 SK 와이번스 수석코치“신앙도 훈련 필요” 그것뿐이라면 괜찮겠지만 2군감독 재직시 선수를 "종교를 봐서 차별한다"거나 "선수에게 강제로 전도를 하고 다닌다" 하는 루머로 김성근 감독의 팬들에게 더욱더 까였다. 삼성 현역 시절에는 (종교가 없는) 후배들을 모두 일요일에 교회로 강제로 출석시키게 했다가 구단측에서 경고를 받았다고 본인입으로 밝히기도 했다. 아무래도 토요일 야간경기후 일요일 아침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라서 강제로 끌려가는 신참들이 구단측에 밀고한 듯 하다. 이러니 구단 눈밖에 났지 불암콩콩코믹스에서도 인용되었다.# 이만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현재는 인천 남구 학익동에 있는 은혜의 교회에 다닌다. 교회에 유니폼을 입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은혜의 교회에서 정체불명의 '이만수 팬클럽' 단관행사를 열어 문학 구장에 출동하는 바람에, 팬들 사이에서는 "구장에서 예배를 볼 지도 모르니 우리는 목탁을 들고 가자"라는 주장이 나돌기도 했다. 안치용이 이에 대해 본격 디스하는 말을 했는데 2011년 준플레이오프 1, 2차전 모두 벤치에서 대기했는데 이때 안치용의 타격감은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되도 안되는 이호준 내리고 안치용 올려라!"라는 말도 나왔다. 그리고 3차전에서 선발 라인업에 올라간 안치용에게 기자가 이유를 묻자교회도 안나가는데 감독님이 왜 올리셨을까???라는 말로 디스했다. 기사링크 앞에서도 잠깐 나오는 사실이지만 사실 이만수는 원래는 개신교 신자가 아니었다. 개신교 신자인 부인때문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듯.

  • 야구선수 출신이 모 건강식품 업체 인사와 엮여 사기를 당했다는 이니셜 기사의 주인공이었다. 여기에는 이승엽도 관여되어 있었다.

  • GQ 2011년 12월호에서 김성근 전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이만수 감독과 SK 프런트의 언행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여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 항목 참조. 다만 이만수 입장에서도 김성근과의 감정이 좋을 수가 없는 것이, 80년대에는 팔뚝 힘줄 드립으로 포수 수비 막장설이 떠돌게 되는 원흉이었으며, 90년대 삼성 감독으로 와서는 자기 제자 쓴다고 프랜차이즈였던 이만수를 말도 안 되게 홀대했으며,[31] 2000년대에는 자신이 감독으로 될 것으로 내정되어있던 SK 감독 자리를 장기집권했고, 2010년대에 겨우 감독이 되니까 김성근을 따를지언정 이만수는 못 따르겠다고 하는 선수들의 문제, 황폐화된 SK 구단 팜 등 이만수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이만수 개인으로 봤을 때는 사람인 이상 김성근을 싫어할 요소가 충분하다.김성근의 저주를 선수 시절, 감독 시절 통틀어 두 번이나 맞았다

  • 이천수와 엮여서[32] 수능2만 번 봤다는 내용의 개드립 유머도 있다. 하지만 이정수이재수 앞에서는 닥치고 버로우

  • 2011년의 한 설문조사에 의해 프로야구 감독들 중에서 유일하게 故 노무현 전대통령을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이다.

  • 현역시절엔 한국프로야구 사상 데드볼을 가장 많이 맞은 선수였다. 총 112개의 데드볼을 맞았는데, 이만수가 홈런을 칠때마다 과도한 리액션을 취하는 바람에 빡친 타팀 투수들이 합심해서 고의로 빈볼을 던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 지금도 그 습관을 못버린게 문제지만 현재는 박경완이 이미 그 기록을 깬지 오래지만 이만수는 대부분 빈볼을 맞았다는 점에서...

    • 빈볼성 사구를 자주 맞은 이유 중 하나로 선수들에게 어그로를 자주 끌어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KBS 이병훈 해설의 경우 이만수에 대해서 유독 비판을 자주하는데 팬들은 그 이유를 현역 시절에 있었던 이만수와의 일화와 엮어서 추측하기도 한다.

  • 만리타들은 이만수가 본의 아니게 유다라는 별명으로 억울하게 까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김성근 감독의 해임과 문학구장 소요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만수를 SK로 데려오면서 했던 SK 프런트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일어난 사태이고 이만수는 프런트와 잘못 엮이는 바람에 까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김성근 팬들도 SK 프런트가 이만수를 데려올 때 김성근에게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던 것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만악의 근원이 SK 프런트라는 점에는 친 이만수와 반 이만수 양쪽 모두 동의하는 것이 현실이다. 프런트를 죽입시다 프런트는 우리의 원수. 그러고 보니 타 종목 프로리그에서도 SK가 한건 했었지 아마? 맞다. 여기도 있었지!

  • 감독대행 시절이나 정식으로 SK 와이번스 감독직을 수행하면서부터 깔끔하지 못한 언행과 인터뷰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가장대표적으로 감독을 위해 이겨달라고한것이 있으며, 감독 취임 초기에는 매번 인터뷰 내용과 실제 선수기용이 다른경우가 많고 말과 행동의 앞뒤가 안맞는식의 언행불일치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주었다. 그 외에 과도한 리액션[33]으로 어그로를 심하게 끌기도 하였지만, 욕먹은 효과가 있는건지 이런식의 언행은 자제하겠다고 하기도.## 그러나 2013년 시범경기 인터뷰를 보면 도로아미타불. 몇몇 솩갤러들은 혀갤러에게 염경엽을 인터뷰 인스트럭터로 보내달라는 식으로 이만수를 조롱하기도 할 정도. 염감이 인터뷰를 잘하긴 하지

  • 2013년 10월 4일 노컷뉴스의 팟캐스트 스토커가 이만수의 경질에 대한 단독보도를 한다고 밝혀 경질설이 떠올랐으나.. 관련기사 구단 측에서는 마지막 계약년도인 내년까지 감독임기를 보장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SK팬들은 웁니다

  • 기타 이만수의 주옥같은 명언들은 다음 링크 참고.##깨알같다.

  • 2014년 3월경 기사에 따르면 라오스에 야구단을 만들고 구단주가 되어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단 기사가 보도되었다. 몇몇 팬들은 SK감독만 안했으면 욕을 먹을일도 없고 업적도 많아서 존경받았을 텐데 하며 측은스런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만수는 위에서도 열거되있듯이 선수시절엔 트리플 크라운, 5년연속 골든글러브, 코치로는 월드시리즈와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했을 만큼 남들이 한번 쌓기도 힘든 업적을 다수 쌓았다. 감독생활을 하면서 위 업적을 상당부분 깎아먹고 있는것. 선수시절 이미지를 깎아먹은 걸론 이분도 한가닥 한다. 그나마 이만수 감독이 나은 점은 삼성 감독을 안해봐서 삼성 팬들에게는 순수하게 레전드 선수로서 사랑받는다는 거.

  • 이글스 써는 기계로도 알려져 있다. 신생팀 NC한테도 호구짓하던 양반이 유독 한화만 만나면 김성근의 생령이 씌인 것마냥 지력과 전술이 업그레이드 된다. 저위에 쓰인 단점들이 한화전에선 상당히 줄어들고 희한하게 운까지 엄청 좋아진다. 근데 한화 상대로 못하는 구단도 있나? 2014년 와서는 한화상대로도 고전 하는 중인데??

  • 2014년 4월 16일 박동희가 쓴 칼럼에 따르면 故 최동원 전 감독을 임종 사흘 전부터 당일까지 매일 찾아와 문병을 했다고 한다.(박동희의 야구탐사) 부산과 롯데를 그리워한 철완 정말 인생에서 SK 감독시절만 딱 떼면 한국야구계의 전설인데...

  • 윤희상 급소 부상 사고에 관한 본인의 코멘트에 의하면 현역 시절 공에 급소를 너무 많이 맞아서 혹까지 생겼다고 한다.

  • 공식 홈페이지가 있다. #

  • 흑역사로 대구우유 CF가 있다(...).# 이시대 진정한 프로 이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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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감독대행 기간 포함.
  • [2] 은퇴 후인 2003년에 지정 되었지만 이것이 삼성 라이온즈 최초의 영구결번이다.
  • [3] 한국프로야구 최초 안타, 최초 타점, 최초 홈런, 최초 100홈런, 최초 200홈런 기록 등 많은 최초 기록을 가지고 있기에 붙은 별명이다.
  • [4] 이걸 두고 코치가 아니라 불펜 포수일 뿐이다라며 까는 사람들이 있지만, 시카고 화이트삭스 공식 로스터를 보면 화이트삭스에선 불펜 포수도 엄연히 정식 코치 보직에 속한다. 메이저 팀 중에서도 불펜 포수가 코치 보직에 속하는 팀도 있고 그렇지 않은 팀도 있다.
  • [5] 실업야구 경력이 있긴 있었다. 육군 경리단(통합후 현재의 상무) 소속으로.
  • [6] 허규옥, 장효조, 정성룡, 김기태, 김주찬. 승권 등 무려 7명이나 된다.
  • [7] 대구상고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를 받지 않은 몇 안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대신 감독이 되면서 이자까지 덤으로 저주를 받는 중이다
  • [8] 1990년 해태와의 3연전 중 2패를 하고 병살타를 친 뒤에 관중석에 날아온 맥주캔을 맞았는데, 분에 못이겨 이것을 다시 던졌던 것. 그러다가 1:12000(!)의 대치상황이 되어 결국 마이크 들고 직접 사죄하고 한달 동안 경기에 출장도 하지 못했다고.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cateid=1028&newsid=20110711130650603&p=SpoChosun
  • [9] 후일 피도, SS311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2007년 판매 부진을 이유로 없어졌다. 지금은 제일모직 스포츠 브랜드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 [10] 그것도 83~85 3년연속으로 달성했다. 장종훈과 이승엽, 그리고 박병호 이외엔 그 누구도 이루지못한 전인미답의 대기록.
  • [11] 이만수가 2회와 4회, 박진석에게 2타석 연속으로 볼넷을 맞았다. 그래서 뛰어간것.뉴스라이브러리
  • [12] 게다가 후배들에게 종교를 강요했다가 구단에게 경고를 먹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팬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구단의 눈밖에 날 짓을 많이 했다. 밑의 기타 내용 참조.
  • [13] 물론, 이맘때 프로야구판에는 그렇게 은퇴선수 예우하는 팀은 단 한팀도 없었다. 레전드 예우로 나름 좋은 평을 받는 한화 이글스도 안 알려진 8~90년대 레전드의 소리소문없는 은퇴사례가 적지 않고, 우승을 이끈 99년 이후에야 장종훈,송진우등의 선수의 은퇴를 예우하면서 좋아진 케이스. 사실 그마저도 일종의 으리에 가까운 케이스다.
  • [14] 사실 통성 이미지 씌운건 이 사건이 제일 컸다.
  • [15] MBC 스포츠플러스의 폴 코너코와의 짧막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만수를 코치라고 부르고 있었다.
  • [16] 근데 취임 당시의 기사를 보면 좀 미묘하긴 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 [17] 단, 일각에서 제기하는 이만수 SK 감독 내정이 다른 구단에게까지 알려져 있었다면 동업자정신에서 아예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 [18] 문제점도 드러났다. 부상후유증에 시달리던 김광현의 무리한 포스트시즌 기용, 김성근 전감독의 부임시보다 작전 간파 빈도가 늘고 공수에서 조직력이 약해진 모습도 보였다.
  • [19] 한국의 스포츠 교육으로 인해 발생한 좀 더 극단적인 사례로 이호성같은 케이스도 있다. 이만수도 어찌보면 기록 향상에만 집중하느라고 사람들 다루는 체계적인 리더쉽 교육을 받지 못한 피해자라고도 볼수 있다.
  • [20] 그 때 당시 한화 이글스는 배성서,김영덕,강병철 순으로 평가가 좋은 감독들을 거쳐왔고, 정말 운이 좋게 우승했다지만 1999년 플레이오프의 기세로 우승하려는 롯데를 상대로 맞이하게 되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롯데를 4대1로 셧아웃시켜버렸다. 이만수가 최소한의 능력이 있었다면 우승을 할 가능성이 정말 높았다는 것이다.
  • [21] 게다가 김성근 감독은 메이저리그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음에도 메이저리그에 대해 매우 잘 아는 지도자임을 2008년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고, SK 와이번스 왕조 건설은 분명 메이저리그에 대한 이해도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데, 이만수는 메이저리그 코치 생활까지 하고서도 팀을 무너트리는데 공헌했다.
  • [22] 이만수에 비하면 돌커피 커피작두는 최소한 혹사도 덜시키고 수비지향적이라는 야구관이라도 있다... 게다가 이 쪽은 섣불리 인터뷰를 하지도 않는 편이고
  • [23] 이만수 감독 스스로 실패했다고 평한 자율야구만 해도, 해태 왕조 시절의 김응용 감독은 단체훈련은 두세시간으로 끝내고 나머지는 개인훈련으로 돌리는 방식을 고수했고 넥센 히어로즈염경엽 감독도 데뷔 첫 해에 자율야구로 제법 괜찮은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팀도 아니고 SK 와이번스처럼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팀에서 자율야구가 처참할 정도로 실패했다면 그건 자율야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운용방식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선 자율야구가 이제 결실을 본다고 하질 않나
  • [24] 온라인상의 만리타 삼빠들이 주장하던 '만수까들은 (김성근을 옹호하거나 삼성을 까기 위해)SK팬으로 위장한 LG팬이나 KIA팬 혹은 옛 쌍방울에서 넘어온 SK팬들이고 순혈 인천야구팬들은 이만수에게 호의적이다'라는 논리가 사실이라면, 단지 이만수를 야유하기 위해서 슼빠, 갸빠, 옛 쌍방울빠들이 그 악천후를 뚫고 문학까지 가서 자기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거나 혹은 오히려 싫어하는 선수인 박재홍의 은퇴식에 참석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 논리이기 때문. 박재홍이라는 선수가 광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천 팬들에게서 인천의 순혈 레전드나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고, 오히려 고향인 광주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은퇴식에 참석한 이들은 당연히 대다수가 옛 도원아재들과 그들의 후예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뼛속까지 인천 야구를 응원하는 팬들일 것이므로 인천 야구팬들이 이만수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은 완전한 헛소리이다.
  • [25] 그 많아 보인 온라인 지지자들 중 몇 몇 추종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삼빠 내지는 그냥 슼빠들의 발끈을 즐기는 어그로 종자라는 뜻.
  • [26] 사실 라오스 야구단 후원은 이미 감독 시절부터 해왔던 일이다. 감독보다는 좀 더 여유로운 해설자라면 야구단 후원 쯤은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다. 틈만 나면 저녁식샤 하시고 야구단 후원하러 다니시는 분도 있는데 뭘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도 완전 이주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오가면서 야구를 보급하겠다고 밝혔었다.
  • [27] 언론에는 헐크, 선수들 사이에선 떠벌이란 별명이 유행했다고 한다.
  • [28] 미국에서 이만수를 소개하는 기사를 쓸 때 쓰는 별명이다.
  • [29] 앞의 다중이와 비슷한 의미로 출처는 엠팍.
  • [30] 기사에 달린 한 네티즌의 드립
  • [31] 결국 김성근 감독은 선수단과 마찰을 빚다가 짤렸고, 다음 우용득 감독은 김성근 감독이 엘리트 의식에 싸여있다고 깠던 그 선수들로 준우승했다.
  • [32] 미묘하게도 둘다 인터뷰 스킬이 영 좋지 않은 공통점도 있다.
  • [33] 이건 현역선수시절때부터 했던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