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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last modified: 2015-05-25 23:15:0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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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공식 명칭 이라크 공화국 (جمهورية العـراق, Jumhūriyyat al-‘Irāq)
면적 438,317㎢
인구 36,604,552명 (2014년 추계)
수도 바그다드(بغداد)
정치체제 이슬람연방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 (잘랄 탈라바니)[1]
정부수반 총리 (누리 알-말리키)
공용어 아랍어, 쿠르드어
국교 이슬람교
1인당 GDP 명목 6,900$, PPP 7,100$(2014)
화폐 단위 디나르 (D)
대한수교현황 남북한 동시수교(남한 1981, 북한 1968(1980년 단교))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역사/전쟁
3. 경제
4. 군사
5. 종교
6. 스포츠
7. 외교 관계
7.1. 한국과의 관계
7.2. 북한과의 관계
8. 국기
9. 기타
10. 이라크 국적, 출신의 캐릭터
11. 같이 보기


[2]

1. 개요

서남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공화국. 수도는 페르시아어로 '신의 선물' 이라는 의미의 바그다드. 1932년에 영국에서 독립했고 영국이 들어오기 전에는 오스만 제국의 땅이었다. 좀 더 고대로 가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전부 이라크 땅이다.

본래 독립보다는 자치권 획득에 더 관심이 많던 아랍인들이었으나 영국은 對 오스만 전선에 아랍인들을 이용하고자 무함마드의 자손이며 메카의 샤리프(شريف, 귀족)였던 후세인 이븐 알리(حسین بن علی)와 협상을 벌여 1915년 아랍인의 독립 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맥마흔 선언' 을 발표하고 아랍 반란을 이끌어낸다. 이때 당시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과 함께 행동했던 영국 정보원 로렌스의 일대기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여러모로 과대포장된 이야기이다.

2. 역사

고대 시대 역시 이집트사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이라크의 경우는 리그베다 위키도 그렇고 대부분 메소포타미아 시대 역사는 포함하지 않는 의견이 많다. 이 의견의 이유는 여기를 참조하자. 쉽게 말하자면 몽골 고원에서 건너온 투르크계인 터키인이 아나톨리아에 있던 히타이트, 벨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을 자기 역사로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몽골 고원과 르키스탄에 걸쳐있던 흉노나 돌궐, 위구르, 키르기즈 등을 자신의 역사로 보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이라크는 19세기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중부 지방에 위치한 동네 이름이었을 뿐이고 실체는 오스만 치하의 3개 번국이었다. 주민 역시 메소포타미아인의 문화 등을 이어받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고 종교도 바벨론이나 아시리아 종교, 토착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교를 믿는다.[3] 그리고 북부 산악지대에는 투르크계인 투르크멘인까지 거주한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땅 이름 자체도 이라크는 물론 시리아터키 동부지역 그리고 쿠웨이트이란 남부를 싸잡아 일컫는 명칭이다. 당장 메소포타미아 국가 중 하나인 팔미라는 시리아에 중심이 있다.[4]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에서 가장 먼저 탈락하고 후세인은 통일 아랍국가 건설의 꿈에 부풀었으나 영국은 1917년 팔레스타인유대인의 독립국을 건설해준다는 '밸푸어 선언' 까지 해둔 상태였다. 한마디로 한 집에 이중분양을 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프랑스와 함께 레반트 지역과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접수하고 남아있던 이라크에 무함마드의 씨족으로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하심 가의 일원인 후세인의 셋째아들인 파이살을 파이살 1세로 앉혀 1922년 국제연맹 위임통치라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왕국으로 독립시켜 주었다. 새로운 이라크 왕국의 영토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Vilayet) 3개를 통합시켜서 세워졌는데 오늘날 쿠르드 자치구와 이슬람 국가와 이라크 정부군의 전쟁을 생각하면 왠지 오묘하다(...) 얼마 되지 않아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도 영국에 의해 1921년 요르단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지만 이라크는 1932년에 이르러서야 이라크 왕국으로써 정식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 1933년에 파이살 1세가 서거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가지 1세는 6년 만에 서거, 손자 파이살 2세가 4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1958년에 반란의 위기에 직면한 이웃나라의 왕이자 친척인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이라크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를 기회로 이집트의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 에 영향을 받은 압둘 카림 카심 장군 중심의 자유장교위원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이 무너지면서 이후 이라크는 왕정이 폐지되고 카심 장군을 총리로 하는 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카심 총리의 공화국 정권도 1963년 바트당 쿠데타로 무너지고 68년 이후부터는 계속 바트당 독재가 계속된다.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그 뒤로 후세인에 의한 철권통치가 이루어진다. 후세인의 군복 모습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후세인은 군 출신도 아닌 데다 쿠데타도 아닌 합법적인 권력 이양을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외적으론 바크르 대통령이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나서 건강을 이유로 합법적 절차로 정권을 이양했다고 한다. 허나 당시 분위기가 바크르 대통령 주변 요직은 후세인 쪽 파벌들이 장악하여 대통령의 입지가 매우 약해진 상태였고 훗날 나오는 여러 증언들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매형인 아드난 카이랄라 장군,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인 아드난 함다니, 이복동생 바르찬 후세인, 타리크 알 아지즈, 사촌 알리 알 마지드 장군 등의 정권 핵심층과 엘리트들을 포섭하여 바크르 대통령을 퇴임하도록 강한 압력을 넣었다고도 한다.[5]

사실 후세인 집권 초기만 해도 이라크는 미국과는 단교 상태(1967년)였고 소련에서 지원을 받고있는 아랍 내 대표적 친소 국가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란에서 시아파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이 변했다. 혁명 전 이란의 샤 왕조 붕괴를 위해 암약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혁명과 함께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바톤 터치하듯 이라크가 이란에 대한 무력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2.1. 역사/전쟁

1980년,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결국 양국의 피폐만을 가져왔다. 이라크는 84년, 미국과의 국교 회복과 함께[6] 이후 4년 동안 297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군사원조를 받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1988년, 승리는커녕 쪽박만 깨진 형태로 이란과의 전쟁이 종결되자 후세인은 약이 올랐다. 결국 국내의 불만도 잠재우고 삥뜯기도 겸하여 90년에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가 미국과 서방 세계는 물론이고 인근 아랍 국가까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완전히 밑천까지 거덜내는데 이것이 바로 걸프전이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부시.

걸프전 이후 UN은 안보리결의 687, 688을 통해 후세인 정권의 손발 묶기에 나섰다. 특히 안보리결의 688은 시아파나 쿠르드족 보호를 명목으로 다수의 비행금지구역(북위 36도선 이북과 33도선 이남)을 설정, 이를 기회로 조지 부시는 이라크인들에게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라고 선동하는 발언을 자주 했고 실제로 시아파나 쿠르드족 지역에서 봉기가 빈발했다. 하지만 막상 봉기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는 이를 외면했고 서방 국가들도 나 몰라라 했다. 주변 아랍 국가들도 구경만 하는 판이었다. 정작 비행금지구역만 설정했을 뿐 지상군 이동에 대한 제한은 전혀 없는 반쪽짜리 규제였던 것이다.[7] 그렇게 봉기는 압살되고 애꿎은 희생자만 양산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서 후일 일어나는 혼란의 불씨만을 남긴 채 후세인 정권은 의연히, 계속 유지되었다.[8][9]

UN과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 후세인 정권의 고사를 기도했지만 후세인의 위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군대는 살찌고 아이들은 굶주리는 판이었다. 돌이켜보면 역사상 경제난으로 물러난 독재자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혁명들의 원인은 굶주림 때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사이비 교단급으로 통치를 누가 봐도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엉망으로 하는 데다가 분위기가 제대로 무르익었을 때의 이야기고 대부분은 정해진 조건 안에서는 통치를 그럭저럭 하는지라 도리어 체제가 공고해지는 독재자가 더 많았다.

이라크는 국제사회에 국내 기아 문제를 어필하여 UN으로부터 석유 식량 프로그램(Oil-for-food program)이라는, 군수품을 제외한 생필품과 석유를 거래하는 유예를 얻었다. 이라크인의 생활고에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눈 먼 돈 폭발로 UN 내에서는 뇌물, 부정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이때문에 서방 각국은 서로를 질시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와중에 이라크가 핵 개발을 기도한다는 의혹이 국제사회에서 터져나왔다. 풍문 정도의 애매한 의혹이었지만 UN 사찰단은 이라크 영내에서 방해 받았고 의혹은 부풀려져 갔다. 미군은 제재를 목적으로 몇 번이고 공습을 감행했지만 효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W. 부시(조지 부시의 아들이자 미국 대통령)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병기를 만들고 있다" 고 주장하며 이라크를 위험주자로 지목하고는 싸울 의지도 별로 없는 나라를 조져버린다. 후세인이 1차 걸프전 때도 대량 살상무기에 화학무기, 생물무기를 가지가지 만들면서 쫓아냈던 UN 시찰단을 무역 봉쇄에 경제 제재라는 명백한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전쟁 발발 때까지도 계속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의혹을 크게 살 만 했다. 다만 이는 이슬람 문화권의 자존심에 관한 문화적인 차이(집 안에 다른 남자를 들이지 않는다든가)에 기인한 것으로 서양 문화권과 중동 문화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쟁 직전 후세인은 사실상 조건부 허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미국이 이를 무시했다.

여튼 어떠한 물적 증거 없이 정황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이라크전이 일어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폭격이야 테러에 대한 응징과 차후의 안보를 위해서라고 정당화가 될 수 있다고 쳐도 이라크 침공으로 전쟁을 확대한 것에 대해 깔끔한 근거를 들 수는 없을 것이다. 후세인이 구린내를 슬슬 풍기고는 있었다지만 결국엔 누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니 수도인 바그다드가 이슬람이 형성된 이후 두번째로 비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했다.[10] 처음에 이라크인들은 미군이 들어오자 성조기를 휘두르고 '예스 부시' 를 외치면서 열광했으며 전국의 후세인 동상과 초상화를 때려부수고 신발로 때리며 분풀이를 했지만 이라크 주둔 미군이 계속 '오인 공격으로 인한 부차적 피해' 를 내고 점령지의 문화와 상태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일방적인 행동을 일삼았으며 점령정책을 아주 개판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대혼란이 와서 미국 하면 이를 갈게 됐다.

우리는 미국에게 그렇게 쉽게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이라크 쪽에서 말하자 조지 W. 부시는

이라크 사람들이 점령당하는게 불쾌하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 저도 점령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라며 공개석상에서 이야기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 벌인 짓을 보면 신발이 아니라 총알세례를 받아도 모자란 지경.

이 때문인지 이라크 국내에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의견이 썩 좋지만은 않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함으로써 좋아진 점은 언론의 자유밖에 없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 후세인의 통치 자체는 어떤 사이비 교단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뿐 대체로 막장이었지만 해방자랍시고 들어온 미국과 그들이 이라크에 구현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혼란만 야기하자 그 반동으로 후세인이 차라리 나았다는 소리가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시리아의 알 아사드, 리비아카다피가 결국엔 어떤 꼴을 났는지를 보면 후세인이 있어봐야 결말은 좋지 못할 것이다.

그 뒷수습이 매우 애매하게 된 덕택에 지금 이라크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옥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특히 이라크군 자체는 금방 무너졌는데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과도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CAP)에서 수니파=바트장 잔당[11]이라는 괴이한 공식을 들이대는 삽질을 해대는 통에 직장에서 죄다 쫓겨나고 영향력이 축소되어 장기적으로는 시아파들 손에 도륙나게 생긴 수니파 주민들이 "이대로 몰락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다 죽는다" 고 총칼을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CAP의 온갖 삽질[12]이 겹쳐 반쯤 내전이 되어가는 상황 덕분에 미군만 죽어라 고생 중.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고... 덕분에 미군이 개발하려고 했던 무기들은 이라크 때문에 드는 비용 덕분에 전부 개발취소 크리(EX : RAH-66 코만치, 줌왈트급 구축함). 이 내전에 준하는 상황은 2004년에서 05년 사이 절정이었고[13] 08년까지 계속됐으나 결국 수적으로도 압도적이고 미국의 지지를 받는 시아파[14]가 최종 승자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09년 경 대부분의 소요 사태가 종결됐다.

2010년 9월 1일 미군은 공식적으로 이라크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011년에는 전 병력이 철수하였다. 이라크에는 이행정부(Iraqi Transitional Government)를 거쳐 정식 정부[15]가 출범했고 군사, 경찰권도 정식 정부가 집행 중이다. 적어도 점령 기간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사회적 안정도 회복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 파괴된 전기, 수도 등의 기간 시설 복구는 여전히 미흡하고[16] 미군 점령 기간 동안 뿌려진 사회적 지뢰들은 여전히 현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정치가 이렇다보니 경제도 마찬가지여서 실업율도 제법 높고 다시 이런 요인들이 정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여전히 좀체 상황이 좋아지지 않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이라크는 조금 낫다는 주장도 있다. 최소 정부가 자리 잡는 데 성공했고 국내 안정에도 성공해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어떻게든 정상 국가로서 돌아가지도 않겠느냐는 희망적인 견해도 지배적이다. 다만 그게 언제가 될 지 모른다는 게 문제.

하여튼 미군이 철수한지 며칠 안 가 2011년 12월 수니파 부통령인 알 하셰미가 구속조치당하고 그가 쿠르드인 지역으로 달아나면서 그의 소환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미군이 철수해서 그런 것이라고 미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군이 있어도 이런 종파 갈등은 빚어졌고 테러는 벌어졌었다. 정작 미군은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으니.

2014년 ISIL은 팔루자와 라마디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고 6월에는 대공세를 펼쳐 이라크 정부군과 쿠르드족 민병대 페슈메르가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모술 시를 포함한 이라크 북부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2014년 6월, 오바마 대통령이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한 이후 이라크 정부는 시리아 내전과 연결된 알 카에다 계통 반군의 세력(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의 확대로 급격히 위기에 몰리고 있다. 팔루자가 점령되고 모술이 공격받아 시리아와의 국경이 대부분 ISIS에 넘어갔으며 이참에 쿠르드 자치구 군이 ISIS에 의해 중앙정부와 연결이 어려워지면서 정부군이 철수한 라비아, 키르쿠크를 점령하였다. 이라크 내전 항목 참고.

3. 경제

4. 군사

5. 종교

종교적으로도 미군 침공 이후 막장의 진수가 되었다. 아랍 군부 독재자 모두가 그러듯이[17][18]를 후세인 역시 적어도 종교 꼴통은 아니었다. 후세인 시절에도 소수라고 해도 기독교인들은 차별이 있을지언정 같이 공존했고 이슬람 과격파가 여기 시설을 공격하면 세금으로 복원하고 범인들을 응징하였다. 과격파들에겐 어차피 군부 독재자도 적이기에 후세인에게도 적이기 때문이었고 소수 종파를 배려하여 자신을 지지하게 만들면 나쁠 게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시들도 이라크에선 평온하게 지냈고 그 밖에 야지디교라든지 바하이교 같은 소수 종파들도 공존했다. 그러나 미군이 쳐들어오면서 시아와 순니 이외 소수 종교에겐 지옥이 열렸다.[19]

미군이 철수하면서 대다수인 시아파(인구 60% 이상)가 득세하면서 골치를 겪고 있다. 2012년 와서 정치수반인 알 말리키(시아파)가 순니파인 알 무틀라크 부총리와 부통령인 알 하셰미 탄핵 및 구속을 이뤄냈고 순니파가 다수인 쿠르드인 지역에 간섭하면서 말이 많다. 이라크 내 순니파에선 이란의 원조를 받는 시아파가 득세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내전 양상이란 세간에 널리퍼져있는 잘못된 인식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일반 국민들간의 종파간 갈등은 미미한 편이고 도리어 옆동네 시리아 내전의 불똥이 튀어 외국에서 테러 단체들[20]의 유입과 그로 인한 묻지마 차량 폭탄 테러로 신음하고 있다.

6. 스포츠

역시 오일 달러로 인한 투자 및 여러 모로 축구 강호였다. 국대에 대해 자세한 것은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그 밖에 클럽 축구가 인기가 많지만 역대 아시안 챔피언스리그에서 준우승 2번(1971, 1989)만 기록했다. 중국조차도 역대 이 대회 우승을 거둬들인 걸 보면 화려한 리그 강호라고 볼 수도 없으며 지금은 AFC컵에 나오고 있다.

과거 포항 스틸러스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압바스 자심이 이 나라 출신이다.

7. 외교 관계

세계에 모든 인접한 이웃 나라들이 그렇듯이 이라크 역시 주변 이웃 국가들하고 사이가 안 좋다. 1980년대 8년동안 이란-이라크 전쟁을 치뤘던 이란하고는 말할 필요도 없는 앙숙이고 쿠웨이트와도 1990년 걸프 전쟁을 이후로 불구대천지 원수 그 이상이다. 걸프 전 당시 이라크에게 짓밟힌 원한이 오죽 사무쳤으면 이집트, 사우디, 모로코 등 다른 아랍권 국가들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비난할 때 쿠웨이트만은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었다.[21] 거기다 이란과 쿠웨이트 이외에 시리아,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주변 국가들과도 역사적, 정치적으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고 그나마 이웃 국가들 중에 요르단하고는 사이가 좋은 편이다.[22] 이스라엘과의 관계 역시 다른 여러 아랍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적대적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면서 한때 우호적인 관계가 시작되었으나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거치면서 상당한 적대 관계를 유지해왔다. 후세인 정권 실각 이후 들어선 현 이라크 정부의 경우 후세인만큼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친이란 성향을 보이는지라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으며 일반 국민들의 경우 미국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복잡하다.[23]

유럽 국가들은 그리스와는 사이가 매우 좋은 편이다. 오스만 제국 시기 터키에게 지배당한 역사도 있고 국민감정 역시 터키에게 적대적 감정이 있는것도 비슷하기 때문[24]이다. 거기다 2003년 미국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자 그리스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25]

7.1. 한국과의 관계

이라크는 한때 1968년 북한과 단독 수교하였으나 1989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수교를 하였고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계속해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에는 비무장군인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에 파병되어 주둔하고 있었다. 참고로 자이툰 부대의 환송식이 일부 반전 단체의 시위로 인해 비공개로 열렸던 적도 있었다.

2007년 이후 2014년 현재까지 계속해서 대한민국 국민은 정부 허가 없이 들어가면 안되는 여행금지국가이다. 2014년에 이라크는 ISIL의 준동으로 무정부 상태이기 때문에 인접 국가에서 무단 입국할 수 있지만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2.0을 찍고 싶지 않다면 그만두자.

2013년경 치안이 그나마 좋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삼성이나 LG 등은 이런 나라에서도 자사의 전자제품을 팔려고 했다. 실제로도 이라크에선 LG나 삼성에 대하여 인지도가 매우 높고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오죽하면 중국 짝퉁도 판친다. 참고로 90년대 후반 LG컵 국제 축구대회 같은 대회가 이라크에서 열려 만원 사례를 이룬 적도 있다.

물론 파견을 원하는 이는 많지 않지만 대기업 주재원으로 위험국가에 파견가면 방탄복이 지급되고 오지 수당이 눈 튀어나오게 많이 나온다. 삼성, LG의 경우 특A급 오지이다 보니 국내 근무시 연봉+주재원 수당+오지 수당이 더욱 붙는다. 원래 봉급과 주재원 수당을 제외하고 오지 수당만 해도 대리 급에서 1년에 2,000만원~3,000만원 정도이다. 다만 신입 입사 직후 이라크 파견 근무를 명받자 한 달 뒤 사직하는 등의 케이스가 많은 편이다.

이런 곳에 가면 권총이 지급되고 1억원에 가까운 선불 오지 수당을 받는다는 유머가 있지만 유머는 유머로 받아들이자.

이런 곳에서 주재원이 살 때는 철저하게 요새처럼 가둬진 공업단지 내에서만 활동하고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현지 경호원이 대동된다.

사실 전자제품보다는 이라크의 대세는 남부 지역에 파묻혀있는 검은 황금 약 800억 배럴이고 이걸 개발하기 위해 국제적 규모의 석유 컨소시엄들이 달려들고 있는 판이었다.

한화건설이 80억 달러 규모의 신도시 개발사업을 수주하여 현재 시공 중에 있다.

과거에는 이라크에도 대한항공이 취항했다! 직항은 아니고 제3국인 타이에 중간 기착하는 형태였다.

7.2.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인 1968년에 일찍이 수교하여 단독 수교국으로 부상하였으나 1980년에 일어난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라크의 적대국인 이란을 북한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북한과는 1980년에 단교하였다.

8. 국기


후세인 시절의 국기

현재의 국기는 2008년에 바뀐 것이다. 이전에 사용하던 국기에서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이 이끌던 바트당의 슬로건인 '통일, 자유, 사회주의' 를 뜻하는 세 개의 초록색 별을 빼고 'الله أكبر (알라후 아크바르)' 라는 문구도 글씨체를 바꾸었다. 그 이유는 바뀌기 직전의 글씨체가 사담 후세인의 글씨체였기 때문.


2004년에 제안되었던 새 이라크 국기. 이 새로운 국기는 아랍권에서 외면하던 월성기를 멋대로 통할 것이라고 보고 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이라크인들은 물론 이라크군이나 친미 정부수반들조차도 아예 거들떠도 안 보고 듣보잡 취급하여 잊혀졌다. 실제로 새로운 이라크군 공식 행사에서 이 국기를 매달자 그 자리에 있던 친미 수반들이 벌떡 일어나서 저거 내리라고 항의했고 군인들도 노려보는 탓에 미국 측이 놀라 이 깃발을 내리고 종전 깃발을 할 수 없이 매단 적도 있다.

이는 하얀색-파란색 배치가 기분 나쁘게 이스라엘 국기를 닮은 점도 한 몫 했거니와 초승달을 보통 노랑, 녹색, 빨강, 흰색으로 칠하고 파란 초승달은 찾아볼 수 없는 이슬람권의 배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만들었다. 게다가 월성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튀르크계들이 국기로 주로 쓰기 때문에 서아시아의 아랍권 나라에선 이 국기를 하나도 쓰지 않으며 당연히 이 국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걸 모르고 그저 초승달이라면 이슬람이라고 무지로 만들어낸 미국의 병크이다.

9. 기타

이라크에선 그나마 안정적인 곳이 바로 한국군 비전투병이 파병되었던 아르빌 지역이다. 아르빌은 쿠르드족 자치구역인 쿠르디스탄 지방정부(Kurdistan Regional Government)가 세워지면서 그럭저럭 안정을 찾았고 전쟁으로 박살난 이라크 프로리그도 열렸다. 이 지역이 연고지인 아르빌 FC가 한때 AFC 챔피언스리그에도 나오기도 했다.[26] 물론 쿠르드인 자치정부라 이웃한 터키가 종종 대포를 쏴대며 시비를 거는 문제는 있지만...

정말로 알 필요 없는 사족이지만 엑소시스트의 첫 부분에서 메린 신부가 참가한 발굴 현장은 이라크의 유적이다. 그리고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2에선 왠지 몰라도 소련군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국가별 특수 유닛 중에서 가장 흠좀무한 성능을 자랑하는 데졸레이터가 이라크의 유닛이라서 소련 플레이어들은 너도나도 이라크를 고르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전직 국회의원의 홈페이지에서는 금지어이다.

내무부 대변인 사드 만 이브라힘(Saad Maan Ibrahim)이 독일 ARD와 인터뷰를 했는데 영어로 슬픈 사람이란 뜻인 'sad man' 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고 때마침 본인도 적절히 슬픈(?) 표정을 지어줘서 거의 필수요소로 떠올랐다. 해당 프로그램 전부.


이라크 바스라는 최고 기온이 58.8도였다!

10. 이라크 국적, 출신의 캐릭터

11.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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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쿠르드족 출신의 대통령이다.
  • [2] 현재 이라크 남부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며 이라크에 이미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들도 대부분 남부에서 체류하고 있으나 이라크 북부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라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장악되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법 이전에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으므로 가지 마라.
  • [3] 다만 혈통으로만 보자면 아예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 [4] 다만 그렇다고 해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이라크 역사로 이해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영문 위키에서는 메소포타미아사 역시 이라크사에 포함시키는데 이는 '이라크 지역의 역사' 를 기준으로 잡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실 메소포타미아 같은 경우는 민족사 관점에서 연구하면 온갖 현대 국가들이 계승드립을 칠 염려가 있어서 그나마 이게 가장 중립적이다(...) 한국에서는 중국동북공정 때문에 역사를 민족사적 관점, 속인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속지주의 역사관 역시도 역사학에서는 결코 비주류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 원주민의 역사는 '아메리카 합중국의 역사로서 미국사' 에는 포함시키지 않지만 '북미 지역의 역사로서 미국사' 에는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 [5] 이 부분은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재연하고 있는 부분이다.
  • [6] 이때 미국의 교섭역이 도널드 럼즈펠드. 이후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이 국교 회복 교섭 당시 후세인이 럼즈펠드를 반갑게 맞이하며 포옹하는 모습을 틀어줘서 전미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적이 있다(...)
  • [7] 이라크군이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하면 생각났다는 듯 찔끔찔끔 토마호크 공격을 해댔으나 봉기와는 무관한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마이클 무어 같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전쟁놀음, 침략행위라는 욕을 먹어서 여의치 않았다.
  • [8] 현재 이라크 시아파의 친이란 행보는 이때의 미국의 태도에 대한 배신감과 무관하지 않다. 차라리 원칙대로 시아파 주민들을 보호하고 이를 명분 삼아 후세인 정권을 엎어버렸다면 이란-이라크간 관계도 최악이고 미국 자신도 나름 전성기였던 시절이라 오히려 이라크를 쉽게 안정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 [9] 다만 미국 입장에서도 이라크를 완전히 쓰러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 베트남전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고 쿠웨이트의 회복까지는 주변국들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지만 이라크의 전복은 그렇지 않았으며 거기다 끝물이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소련이 유럽에서 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1개 군단을 차출해온 만큼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
  • [10] 첫 번째 점령자는 중세의 세계 깡패이던 몽골.
  • [11] 애시당초 바트당 세력은 수니파 내에서도 소수였고 민중의 신뢰를 철저하게 잃어버린 상태로 그 때문에 이라크군이 그렇게 쉽게 붕괴된 것이다. 반대로 시리아는 알라위파와 콥트 기독교인들이 철저한 아사드 지지 세력이기 때문에 저항에 투입되는 전력의 규모가 커서 개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 [12] 이라크군 죄다 (무기 환수 없이) 내쫓아 무장세력 만들기, 박살난 병원은 그대로 두고 애꿎은 처방전만 만지작거리기, 이라크 기업의 모든 예금과 부채를 무효로 하기 등등.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의 책 <그린존> 참고.
  • [13] 2005년 이후 미군을 제외한 타국군의 철수가 시작되면서 게릴라의 공격 대상은 미군으로 좁혀졌으나 미군을 공격하면 그 몇 배의 보복이 돌아오기 때문에 2006년부터 소프트 타겟에 대한 무차별 테러로 바뀐다. 결국 06년부터 민간인 사상자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
  • [14] 허나 미국도 시아파를 두고 고민해야 했는데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를 비롯한 이들은 반미 투쟁을 계속 벌였다. 미국으로선 이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게 수백 만이 넘는 지지자들이 알 사드르를 지지하고 알 사드르는 아버지가 후세인에 맞서다가 살해당한 인물이라 반후세인파 인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상금을 걸었다가 되려 거리 곳곳에 알 사드르에 대한 상금을 취소하지 않으면 미군의 목 하나하나에 상금을 걸겠다는 시아파 성직자들의 분노 어린 반응에 결국 미국이 물러나 현상금을 취소했을 정도.
  • [15] 내각제 정부로 각료가 43명이다.
  • [16] 수도 바그다드에서조차 하루에 6시간만 전기가 들어올 지경이다.
  • [17] 시리아,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수단 같은 군부가 집권하던 다른 나라들도 외국 종교(기독교) 선교는 혐오하고 금지시키지만 적어도 자국 내에서 오래전부터 살아오던 기독교도들에 한해서는 공존을 허락한 편이다. 더불어 이들 모두가 종교 과격파는 군사력으로 철저하게 막고 대대로 살아오던 기독교에 대하여 보호한다. 참고로 파키스탄조차도 대대로 살아온 교회들에 대한 테러에 범인들을 잡아 처형시키고 국고금으로 교회를 여러번 재건한 바 있다. 다만 한국 및 해외 기독교 교회는 해당 사항이 전혀 없는 데다가 외부 압력과 연계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테러 당하면 현지 경찰과 군인들이 같이 합세해서 뒤엎고 선교사는 강제 추방 혹은 조용히 제거. 개종자들도 처벌을 받는다. 운이 좋으면 징역이고 운이 나쁘면 사형.
  • [18] 역사 안의 통치자들 중에서는 주류 종교를 견제하기 위해 소수 종교를 후원하는 일이 있었다. 연개소문오다 노부나가불교를 견제하기 위해 도교천주교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천주교를 탄압하였고 오다 노부나가천주교를 믿을 생각이 없었음은 천주교 신부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 [19] 2008년 쿠르드족의 야지디 교도들이 살던 지역에선 야지디교인 소년이 이슬람 시아파 소녀를 사랑한다며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넘치던 야지디 교도들이 가서 그 소녀를 때려 죽였다. 이걸 찍은 동영상이 해외로 퍼져 한국 방송에서도 나왔고 이에 대한 시아파 과격파들의 보복 공격으로 많은 야지디 교인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기독교 외 다른 소수 종교들도 헬게이트가 열렸다.
  • [20] 주로 알 카에다나 그 분파들... 이었지만 최근 알 카에다 지도부가 ISIL과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별개의 단체가 되었다.
  • [21] 공식적인 입장 표명 등으로 대놓고 찬성하진 않았으나 속으로는 엄청나게 지지했다.
  • [22] 그도 그럴 것이 독립초 기 이라크는 요르단의 왕실과 같은 뿌리였던 하심 왕가가 다스리고 있었던 군주국이었다. 1958년 카셈 장군의 쿠데타로 왕정이 붕괴되자 잠시 악화된 적도 있었으나 1963년 카셈 정권 실각 후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다.
  • [23] 과거에는 증오 일색이었지만 현재는 미국의 공격으로 후세인 체제가 붕괴된 점을 부정할 수 없고 게다가 미군이 치안을 유지해 주는 동안에는 그래도 시아파 기득권층의 횡포가 어느 정도 억제되고 최소한의 안전이 유지되는 효과가 있었기에 수니파의 경우에는 이전과 달리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 [24]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이 터키의 참전을 요청했다가 친미 이라크 수반들이 터키군이 이라크 안으로 들어온다면 저항 세력이나 이라크군이 다같이 손 잡고 싸울 거라면서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미국이 화들짝 놀라 전면 없던 일로 했을 정도이다.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서방권보다 오히려 더 증오하는 대상이 터키다.
  • [25] 그리스에 사는 한 이라크계 이민자가 한국인 여행자와 만나서 친해져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리스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는 자신을 처음에 보면 터키 사람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럴 땐 "난 이라크 사람입니다. 터키는 이라크에게도 원수에요. 같은 이슬람이라고 더 좋은 거 없었어요" 라고 하면 그리스 사람들은 대부분이 '맞아요' 라면서 '이라크라면 수백여 년 동안 터키의 압제 속에 고통 받은 게 우리와 똑같군요' 라면서 맞장구치는 게 많다고 할 정도이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 지배 시절에 되려 친오스만 그리스인들이 더 등용되었을 정도로 이라크나 아랍 지역 사람들은 배제당했다.
  • [26] 아르빌 FC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동네북 되면서 지금은 AFC컵에 나오고 있다. 2011년에는 이라크 알 타라바와 같이 이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