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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형

last modified: 2015-03-06 16:28:02 Contributors

尹元衡
?~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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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여인천하에서 배역을 맡은 이덕화. 왼쪽에 있는 여자는 부인 정난정 역을 맡은 강수연.

Contents

1. 소개
2. 권력을 잡다
3. 희대의 싸이코
4. 권세의 끝
5. 기타
5.1. 애처가?
5.2. 설화
5.3. 그 외의 여담
5.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5.5. 복권
6. 당시 사관의 평가


1. 소개

조선 명종 시기의 문신이자 희대의 간신. 문정왕후의 남동생[1]이자 정난정의 남편이기도 하다.

명문인 파평윤씨 집안 사람으로, 학문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어찌어찌 중종 28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후 권신 김안로에게 찍혀 내쳐졌다가 김안로가 숙청된 이후 복직해 외척으로서 세를 불려 나갔다.

2. 권력을 잡다

벼슬에 오른 후, 세자를 밀어주는 윤임일파와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을 밀어주는 소윤의 정전에서 당연히 명종에 줄을 섰다. 이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파직되었다가, 8개월 만에 인종이 붕어하면서 복직하여 소윤의 영수로서 세를 키웠고, 형인 윤원로를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뒤에는 물론 누나인 문정왕후가 있었다. 이후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영수였던 윤임을 비롯한 대윤 일파(사림세력 포함)를 모함하여 역모죄로 사사하게 한다. 그후 공신이 되고, 형마저 곧장 숙청하여 20년 권세의 길을 닦았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는데 당시 뇌물로 받았던 쌀이 썩어나서 유기 그릇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

또 명종 6년에 우의정으로 임명하려 하자 윤원형이 예의상 한차례 거절했는데, 이후 영의정부터 3사까지 나서서 "윤원형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라며 상소를 올려댔고 결국 어쩔수 없는 척하며 우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보통 왕이 "나 왕 그만두고 세자한테 물려줄래"라고 하면 신하들이 "전하! 아니되옵니다"라며 왕권을 강화하는 이벤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하로써 이러한 이벤트를 진행할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3. 희대의 싸이코

당시 모든 관료의 임명과 진급, 죄수의 처벌이나 방면등이 그의 손을 거쳐갔으며 그덕에 뇌물이 넘쳐흘러 뇌물을 가득 실은 배가 수도인 한양으로 정기적 운항을 할정도였다. 거기다 그 배는 일반 상선도 아니고 "군함"을 징발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또한 바다를 메워 땅을 넓히는 간척사업을 진행해 그 땅들을 자신의 사유지로 사용했고, 국유지도 사유지처럼 사용하는 등 간신의 끝을 보여줬다.

그의 형인 윤원로가 자신이 받는 대우가 너무 작다며 불만을 가지자 곧바로 탄핵해서 죽여버렸고 윤원로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도 죽이려 했다.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는 한때 소윤에서 윤원형 급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소윤의 맹장으로 그의 저돌적인 성미 때문에 대윤과 다른 대신들은 그를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어린 명종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강직한 대신이었던 유관 등의 주도로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무슨 짓거리를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대신들이 문정왕후를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자충수가 되어 이기, 정순붕 등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유관, 유인숙, 윤임 등은 사사되고 그의 아들들은 교형에 처해졌으며 이에 휘말린 종친 계성군 등도 죽었다. 유배가 풀려 돌아온 윤원로는 각종 위험한 발언과 행동을 일삼았는데 "문정왕후는 늙었으니 이제 곧 내 세상이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대비전의 말이다.", "난 한명회와 같아서 날 따르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 "인종은 우매하여 어서 죽어야 한다." 따위인데 하나같이 폭탄 발언들이다. 특히 문정왕후의 위엄을 저해하는 발언까지 한 바람에 윤원형의 싸바싸바가 먹혀들었고 문정왕후는 윤원로를 유배시킨 다음에 몇년 후에 사사해버린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이 포스트 윤원형으로 떠오르던 권신 이량에게 빌붙어서 복수를 하고자 했으니 탐욕만 많은 이량에게 실망한 명종이 이량을 숙청해버리면서 같이 숙청된다.

또 자기 첩의 자식인 두리손이란 아들을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던져 버렸는데 이유가 "자신을 조금 화나게 해서"(...) 이런 미친 놈... 또 집을 찾아온 배다른 동생의 부인을 강간하고 소문이 날까 두려워 그녀를 절에 강제로 보내어 여승이 되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정말이지 훌륭한 싸이코패스의 표본이다.

덩달아 그의 노비들도 기고만장해져 대낮에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천하의 개쌍놈짓들을 해댔다.

4. 권세의 끝

이런 권세는 명종 친정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병사하면서, 야사에서는 그동안 눈치를 보던 명종이 귀양을 보냈고 귀양지에 물거품이 된 권세를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부인 정난정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함께 죽었다고 한다. 꼴좋다

실제로는 빗발치는 처벌 요구에도 명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는데(그래봐야 완전히 실각한 상태지만) 평양의 진장을 잡으러 가는 금부도사를 본 윤원형의 종이 그 금부도사가 자기 집에 오는 줄 알고 정난정에게 고했고 정난정은 남의 손에 죽느니 자기 손에 죽겠다고 독을 먹고 죽어버렸다. 귀가하여 그 사실을 안 윤원형은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다 닷새 후에 정난정 뒤를 따라 죽었다.(....)뭐 이런 바퀴벌레 커플

그가 죽기 직전에는 그에 대한 탄핵 요구가 그야말로 빗발을 쳤는데 명종 20년 8월 3일 홍문관 부제학 김귀영의 소를 시작으로 8월 27일 까지 매일 홍문관과 양사에서 귀양보내라고 난리를 쳤고 8월 9일과 8월 15일에는 좌상 심통원, 8월 11일에는 예문관, 8월 14일에는 대사간 박순과 대사헌 이탁, 8월 16일에는 춘흥부 당상 윤개, 8월 16일에는 좌찬성 홍섬과 육조 당상, 8월 17일에는 대호군 정현, 8월 19일에는 독서당 관원 김계휘 등이 릴레이로 요구했다. 단순 귀양요구에서 중벌 요구에 죄상을 적은 소까지 올라왔다.

명종은 이를 거부하다가 8월 15일에 영의정에서 내쫓고 새로 이준경을 영상에 삼았으며 8월 21일에 윤원형을 파직했지만 요구는 그치지 않았고 새 영상 이준경, 영평 부원군 윤개, 승문원 판교 박승임, 이천군 이수례 등이 벌을 청했고 나중에는 아예 이준경이 백관을 이끌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월 8일 윤원형의 전 장모인 강씨가 딸인 전처 김씨의 억울한 죽음의 범인으로 정난정을 고발하면서 타겟이 정난정으로 바뀌었고 대부분의 윤원형 처벌 요구가 정난정 처벌 요구로 공격 타겟을 바꾸었고 왕이 이에 계속 침묵하면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와중에 11월 13일 정난정은 자살해버렸고 11월 18일 윤원형 마저 죽으면서 탄핵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일설에는 자결을 한 것이 아니라 맺힐 대로 맺힌 백성들에게 정난정과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는데, 파평 윤씨 종친회에서 조상들의 명예를 위해 이를 덮고 자결했다는 소문을 유포했다는 설도 있다. 흠좀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근거없는 야사에 불과하다. 윤원형이 뭐가 예쁘다고 죽음을 좋게 포장해 줄 이유도 없고, 설마 윤원형이 죽음을 곱게 포장해주자는 여론이 있을 정도로 칭송받는 사람이었다쳐도 칭송받는데 왜 맞아죽었겠냐만은 조선왕조실록의 특성상 관련 내용이 없을 리가 없다. 기록 왕국 조선을 얕보는 억측.

5. 기타

5.1. 애처가?

상당한 애처가였다고 하는데, 정난정을 부인으로 놓고 보면 애처가겠지만, 정난정은 정실 부인이 되기 전에는 이었고 애첩가[2] 이전 정실 부인은 따로 있었다. 그 부인을 대상으로 본다면 애처가란 개드립은 절대 나올 수 없다.[3]

5.2. 설화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일화로 인사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윤원형의 병조판서 시절 어떤 무인이 변방의 장수로 임명받고는 감사의 표시로 화살통을 주었는데, 그 무인이 가고 난 뒤 윤원형은 "넌 X발 눈치도 없냐 활도 안 쏘는 나한테 왜 이런 걸 주느냐"며 투덜대고는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다락에 처박아 두었다.[4] 그 무인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 화살통을 열어 보셨습니까?" 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던가?" 하고 되물었더니 "대단한 것이 들어 있사옵니다."고 다시 답하자 윤원형이 "뭐? 레... 레알?" 하면서 화살통을 꺼내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정말로 귀한 담비가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과박스라고 사과만 들어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대감님. 윤원형은 크게 기뻐하며 그 무인을 부유한 읍의 수령으로 임명해 주었다.

또 한 번은 윤원형이 이조판서일 때 어떤 사람이 누에고치 수백 근을 바치고 능참봉 자리를 달라고 했는데 문제는 폭주하는 뇌물과 업무량을 버틸 수가 없었던 윤원형이 하필이면 그 날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발령장을 쓰려고 기다리다 지친 낭관이 윤원형을 깨우며 다음 벼슬 자리를 줄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윤원형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도 못 하고 잠결에 그냥 '고치'라고 답했고, 이 말을 들은 낭관은 진짜 사람 이름이 '고치'인 줄 알고 명단 마지막에 그냥 그대로 '고치'라고 적은 것. 그런데 윤원형의 집에 들른 사람의 명부를 뒤져서 그 '고치'를 찾아보고자 했으나 그런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신상털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녀도 도무지 찾지를 못하다가 엉뚱하게도 '고치'(高致)라는 이름의 가난뱅이를 찾아 참봉 자리를 주었다. 고치 본인은 꿈에서도 생각 못한 벼슬을 거저 하게 되어 어리둥절했다고. 진짜 고치 바친 사람은 망했어요 이에 윤원형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떻게 내색할 수 없었다 한다. 참고로 이 부분은 전래된 버전에 따라 차이가 많이 있으니 대략적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윤원형이 누에고치 수백 근을 상납받음 → 낭관에게 발령장을 쓰라고 하면서 '고치'라고 말을 함 → 그 고치를 사람 이름으로 생각한 낭관이 엉뚱하게도 진짜로 '고치'(高致)라는 이름을 가진 가난뱅이에게 벼슬자리를 줌.

이런 얘기들에서 보듯 뇌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는데 당시 주된 거래 수단이 쌀이었만큼 이 쌀이 너무 많아 썩어버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수법이 유기(1번 항목)로 바꿔 축적했다.[5]

역시 어우야담에 실린 일화로 윤원형이 몰락하기 전 재미있는 일화가 또 하나 있는데, 어느 날 한강 두모포[6]에서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가 고래만한 큰 물고기를 낚아 강가로 끌고 올라왔다.[7] 바닷가에서도 잡히기 어려운 물고기가,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물고기가 한강까지 올라와서 잡혔다는 사실에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일이 경악해서 다들 할 말을 잃고 있는데 누군가 이를 보고 파자점을 치기를, 윤원형의 형(衡)을 파자하면 다닐 행(行)이 나오고 큰 대(大)가 나오며 나머지 부분은 물고기 어(魚)에서 연화발(火→灬)이 빠진 글자가 되는데, 지금 크고() 이상한 물고기()가 잡혀 올라온()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 이는 곧 씨X 이제 윤원형은 아주 X된 거예요 윤원형의 운명이 이 물고기와 같게 될, 다시 말해서 그가 좆망 몰락할 징조라 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자 과연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정말로 윤원형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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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그 외의 여담

여담이지만 선조대의 동서 대분열의 궁극적 원흉(?)이기도. 무슨 말인고 하니 선조대에 동서 대분열의 주역인 김효원과 심의겸이 갈등을 빚게 된 기원이 심의겸이 우연히 윤원형 집 앞을 지나다가 김효원이 그집 대문에서 나오는 걸 보고 빡쳐서 시작된 것이었다.옹졸하기 짝이 없다 진짜 심의겸은 윤원형같은 소인배 집에서 식객으로 밥을 먹는 김효원은 소인배라고 규정하여 훗날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자 소인배라고 맹비난해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져 버린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물론 윤원형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심의겸이 서류결재를 위해 윤원형의 집을 방문했었고 그 때 그 집을 드나드는 식객들에게 쓸 무수한 이부자리를 보았다. 심의겸은 한심해하며 그 이부자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하나하나 물었는데 그 중 김효원의 이름이 나왔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벼슬자리 얻자고 권력자 집에 드나드는 한심한 선비로 여겼던 것이다. 당시 김효원은 아직 벼슬이 없었지만 재야에서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의겸은 이를 기억해두었다가 나중 김효원이 과거급제하고 신고식을 할 때 대놓고 저 인간은 윤원형이네 집에서 빌어먹던 식객이네하고 대놓고 디스를 걸었고, 때문에 김효원은 장원급제를 하고도 몇년간 한직을 떠돌아야 했다. 문제는 김효원 역시 이를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 심의겸을 끊임없이 공격했다는 것이다.

진실은 김효원과 윤원형의 사위가 절친이어서 그 집에 밤늦게까지 과거시험 공부를 하러 간것이었고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안 심의겸도 후회하면서 서로 화해하고 우정을 나눴지만...동서 분당은 이미 두 사람의 불화 수준을 떠나 있었다. 조선조 전체를 뒤흔든 나비효과

5.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윤승운맹꽁이 서당에선 같은 윤씨로서 나쁜 짓을 다해서 더더욱 싫어서인지[8] 귀양지에서 금부도사가 와 사약을 내릴까하여 불안감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지옥에 갔다라고 분노에 찬 결말을 보여준 바 있다.

5.5. 복권[9]

이렇게 간신짓을 한 윤원형도 순종멸망기념으로 복권 되는데, 윤원형의 복권을 건의한 인물은 다름아닌 이완용. 역시 간신배끼리는 통하는게 있는듯.

6. 당시 사관의 평가

윤원형이 강음(江陰)에서 죽었다. 처음 윤원형은 물론을 입어 재상에서 파면되었는데도 며칠을 지체하며 머물러 있다가 동문 교외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그치지 않고 공론이 더욱 격렬함을 듣고 끝내 면하기 어려움을 알았으나, 또 가산이 흩어질 것을 염려해 어둠을 틈타 부인의 행색처럼 밤에 교자를 타고 도성에 들어와 집으로 돌아왔었다. 이어 그의 첩 정난정과 더불어 강음 전사(田舍)에 가서 거처하였는데, 정난정의 죽음을 보고 드디어 분울해 하다가 또한 죽었다.

윤원형이 사림들을 풀베듯 죽이며 흉악한 짓을 있는 대로 다했는데,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더니 금일에 이르러 마침내 핍박으로 죽으니, 조야가 모두 쾌하게 여겼다. 윤원형이 일단 패하고 나니 원수졌던 집에서 떼를 지어 빼앗겼던 재물에 대한 송사를 다투어 일으켰다.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바로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관원을 차출해 재물들을 본주인에게 돌려주게 하니 그 집안에서도 온갖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임금은 위사(衛社)의 공이 있다 하여 3등의 장례를 하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전대의 권간으로 그 죄악이 하늘까지 닿기로는 윤원형 같은 자가 드물 것이다. 중종 말년,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사자(嗣子)가 없음을 보고, 그의 형 윤원로(尹元老)와 더불어 서로 어울려 헛소문을 만들어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문정 왕후가 안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대윤(大尹)이니 소윤(小尹)이니 하는 말이 있게 되어 중종이 이 걱정으로 승하하였다. 혹자는 동궁이 실화한 것이 모두가 윤원형 등의 행위라고 하였다. 그 뜻이 또한 흉참하다 하겠다. 인종이 승하함에 미쳐, 윤임(尹任)을 핍박해 내쫓고는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다가 끝내는 윤임이 다른 마음을 가졌다 하였으니, 실은 윤원형 등이 빚어낸 말이었다. 이 이후로 사림들 가운데 당시 명망이 있던 사람들을 일체 배척해 모두 역적의 무리로 몰아, 죽는 자가 계속되었다.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 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는데, 윤원형은 무슨 일이고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 왕후와 내통하여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여 임금의 우분(憂憤)이 언사와 안색에까지 나타나게 하였다. 내수(內竪) 중 혹 이를 아는 자가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들에게 후히 베풀어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때문에 임금의 일동 일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상이 내수에게 ‘외친이 대죄가 있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윤원형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 말이 마침내 누설되어 문정 왕후에게 알려졌는데 문정 왕후가 이를 크게 꾸짖어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상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상이 감히 할말이 없었다. 모든 군국(軍國)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와 상은 내심 그를 미워하여 이양(李樑)을 신임해 그 권한을 분산시켰다. 정사를 잡은 지 20년, 그의 권세는 임금을 기울게 하였고 중외가 몰려가니 뇌물이 문에 가득해 국고보다 더 많았다. 윤원로의 권세가 자기와 비슷해짐을 저어해,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해서 그 죄목을 열거해 글을 올리게 해서 죽게 하였고, 천첩을 몹시 사랑해 정처를 버리더니 필경에는 그를 독살하는 변을 빚었으며 이어 첩으로 부인을 삼았다. 첩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모두 사대부가에 혼인시켰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첩의 자식도 벼슬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을 힘써 내세워, 이를 미봉하였다. 당시의 재집(宰執)들이 휩쓸려 그를 따랐지만 오직 임권(任權)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기타 흉악한 죄들은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다 셀 수가 없다. 비록 견출(譴黜)이 가해졌으나 체형(體刑)을 면했으니, 세상 인심의 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윤원형 졸기 기사에 대한 사관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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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인천하에서는 실제 역사와는 달리 문정왕후의 오빠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 배역을 맡은 이덕화의 나이가 많아 보여서 오빠 역으로 드라마를 진행하였다고. 실제로 이덕화 씨는 문정왕후 역을 맡은 전인화 씨보다 나이가 13살 더 많고 얼굴도 노안이다.
  • [2] 본래 첩이었던 정난정이지만, 윤원형은 왕에게 이혼을 청해 원래 정실과 이혼하고 난정과 결혼하여 새 부인이 된 것이다.
  • [3] 참고로 이 정실부인 김씨는 윤원형에게 학대당하고 끝내 죽었다. 야사나 소설에선 식혜에 독을 태워 죽였다고 하고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선 김씨를 며칠 굶긴 다음에 독이 든 음식을 한상 잘 차려주어 죽였다고 한다.
  • [4] 이 일화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되는데, 투덜거리는 윤원형에게 맞장구를 치는 하인의 대답이 일품이다. "정말 눈치없는 자올시다. 돈을 좋아하시는 대감님께..."(...)
  • [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재테크의 달인이라며 깠다(...)
  • [6] 오늘날의 동호대교 북단.
  • [7] 문정왕후의 병세 때문에 붕어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낚였다는 설도 있다.
  • [8] 이 만활 보면 윤씨 성 가진 이들의 실책에 작가가 나와 '내가 쪽팔리네...'라고 했을 정도이다.
  • [9] 1번의 복권이 아닌 2번의 복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