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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last modified: 2015-02-14 21:41:3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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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대한민국독립운동가. 호는 매헌(梅軒).

丈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Contents

1. 훙커우 의거 이전
2. 훙커우 의거
2.1. 몇 시간밖에는 쓸 수 없는 시계
3. 최후
4. 반향
5. 비판
6. 사진 논란
7. 그 외



1. 훙커우 의거 이전

1908년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의 5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이다. 글자를 몰라 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못하는 농부를 보고 교육에 뜻을 가져, 야학과 강습회를 열어 문맹 퇴치 및 계몽운동에 힘썼다. 이후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만주 등의 지역에서 갖가지 사회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 애국단에 소속되었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라면서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와 만났다고. 이때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달라"라고 부탁했다.

1932년 4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했다.


2. 훙커우 의거

1932년 4월 29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승리로 장식한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에게 굴욕을 안기고, 상하이 훙커우(홍구)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쇼와 탄신 기념 행사와 전승 기념 행사를 가진다.[1]

거사 얼마 전에 있었던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이외에는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이에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사용했다. 이때 투척했던 폭탄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다. 도시락 폭탄은 자폭용(!)으로 들고 갔지만 불발로 알려져 있다.

다만 체포된 후 조서에서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

"29일 아침 자동차를 타고 신공원(훙커우 공원)으로 가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보자기를 찢어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뚫은 것은, 폭탄을 보자기에 싼 채로 던지려고 폭탄의 발화용 끈을 당기기 위해서였다. 상황을 보니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다.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하여, 도시락 상자 폭탄은 땅 위에 내려놓고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자결하여 중일 간의 분노를 고조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은, 자살용으로 들고 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사건으로[2]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츠구는 그 자리에서 인수분해되고, 상하이 일본군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장군은 부상을 입은 후 상처가 악화되어서 죽었다. 상하이 공사 시게미츠 마모루[3]는 다리가 망가지고,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 겐키치[4] 장군과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을 입었으며, 해군 제3함대 사령장관 해군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은 한쪽 눈이 날아가 애꾸가 되었다.[5]

여기서 민간인이 휘말렸다는 주장이 있으나, 피해자로 기록된 민간인 신분인 2명은 각각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와 일본 거류민 서기장 토모노뿐이다. 즉, 일본과 아무런 연관도 없이 이걸 구경하러 온 민간인이 죽었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 애초에 철저한 검열이 있던 자리의 귀빈석에, 아무 연고도 없는 민간인이 있을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2.1. 몇 시간밖에는 쓸 수 없는 시계

이때,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걸 알고 있어서 김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새로 산 시계김구에게 주고, 김구의 낡은 시계로 바꿔 팔에 차고 갔다고 한다. 이 때 김구에게 한 말이 정말 명언이다.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또 식장에 가는 길에 김구에게 남은 돈을 다 주었는데, 김구가 "돈 좀 가져가면 어때서 그렇소?"라고 묻자 윤봉길 의사는 "자동차 값 다 치러도 5~6원은 남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참고로 당시 소학교 교사 월급이 20원이었다.


3. 최후

이렇게 일본 군민 관료들을 싹 날려버린 건 좋았으나, 앞서 말한 도시락 폭탄의 불발로 결국 붙잡혀 순국했다. 시신은 봉분도 없이 모처에 암매장됐는데, 훗날 김구의 지시로 박열 의사가 수습하였다.

1994년에 일본의 시민 운동가인 야마구치 다카시가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라는 책에 의하면, 사실 일본군은 윤봉길을 현장에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오히려 윤봉길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고 일본군이 침략군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질 수 있을 것을 염려해서, 일본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시카와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했다고. 어쨌든 이때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25세.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살다 갔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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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모습.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윤봉길은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후 숨을 거두었다.


4. 반향

이 사건은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중국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 이전에는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일제의 앞잡이'로까지 여겼고 이 때문에 만보산 사건(완바오산 사건) 같은 한중 대립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의 의거 이후로 이러한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장제스"우리 군사 100만 명이 못해낸 일을, 1명의 조선인이 이루어냈다" 라고 극찬했고, 그 후 김구임시정부에 지원을 약속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장제스는 (생색을 낸 것도 사실이지만) 임시정부의 절대적인 우군이 되어 카이로 선언에서도 한국독립이란 조항을 명시하는데 절대적 영향력을 끼치는 등, 윤봉길의 의거의 나비효과는 엄청났다. 같은 독립국이었음에도 류큐는 독립하지 못했지만 한국은 독립할 수 있었던 원인 역시, 윤봉길의 의거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


5. 비판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여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난하여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정치인 테러' 같은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6]

박헌영은 윤봉길의 의거 정신 자체에는 높이 평가했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는데, 1932년 7월에 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라고 보았으며,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 행위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6. 사진 논란

한때 윤봉길 의사가 의거 후 연행되는 사진이 진짜냐 가짜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위의 연행되는 사진은 日 아사히 신문의 보도사진인데, 상하이 타임즈 등의 중국 신문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후 수십명의 일본군에게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질질 끌려가 차에 '던져'졌다고 보도되었다. 즉, 일본중국 양측의 보도내용이 다르기에, 이 사진 속의 인물이 정말 윤봉길 의사가 맞는가?가 논란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마무리한 시점에서, 주변 군인들(내지 중국 군인-민간인 포함)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중국 상하이 타임즈 쪽의 보도가 신빙성이 높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가설을 채택하여, 사실 사진 속의 인물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고, 일본군 측이 자신들의 신사적인 대우를 어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체포하여 연행한 것을 찍었다고 방영했다.[7]



7. 그 외

물통 폭탄이 의거에 사용되었음에도, 불발된 도시락 폭탄이 왠지 윤봉길 의사 전용 유니크 아이템 느낌이라 임팩트가 강해서, 어린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던 시절 도시락을 던지며 윤봉길 의사 흉내를 내는 장난을 종종 하곤 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폭탄은, 독립운동가김홍일 장군(훗날 대한민국에서 3성 장군까지 진급)이 제작한 것이다. 백범일지에 왕웅이라는 가명으로 나오는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 의사가 사용한 폭탄도 제작했는데, 폭탄의 위력 부족으로 이봉창 의사가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사용할 폭탄을 열심히 제조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성능 실험에서는 성공적으로 폭발했으나, 도시락 폭탄은 터지지 못했다.

사족으로 이 분의 후손 중의 한 분(손녀)은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국사 선생님으로 있으며, 18대 대선에서 승리한 새누리당 박근혜 캠프의 인수위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가 있고 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인 윤모순(模淳)과 윤담(淡)에게 남긴 유서. 보물 5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키백과에서 저격수로 분류되어 있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스나이퍼가 아니고, 당시뿐이 아니라 현재에도 높은 사람을 어떤 형식으로든 처치하면 대개 '저격'으로서 분류된다. 여기서의 저격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는 뜻이 아니다. 저격(狙擊: 노리고 겨냥하여 총을 쏘거나 치는 것)의 한자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

2014년 7월 3일 진수한 손원일급 잠수함 5번함이 윤봉길함으로 명명되어 윤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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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저날 구파 정기 의사도 나름대로 계획했지만 입장권을 얻지 못해 실패했으며, 백 의사는 그 이듬해 중국 주재 일본 공사였던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다 실패, 이시하야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효창공원에 나란히 묻혔다.
  • [2] 이 뒤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의 직함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1932년 당시 기준이다.
  • [3] 시게미츠 마모루1945년 9월 3일, 도쿄만에 정박해있던 미 해군 전함USS 미주리 함에서 열린 항복문서 조인에 외무대신이 되어서 등장하는데, 그 때에도 다리를 전다. 참고로 시게미츠 마모루 이 양반의 손녀사위롯데 신격호 회장.
  • [4] 이 사람은 훗날 할힌골 전투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일본군 참조.
  • [5] 이 때문에 노무라는 예편 후 외교계로 전향했다.
  • [6]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한인애국단의 의거 전에는 임시정부는 자금줄이 끊겨 김구가 그림을 그려 파는 돈으로 조직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판국이었으나 이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것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이다. 외교론주의로만 일관한 이승만의 활동이 독립운동에 도움이 됐을지 여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정작 하와이에서 지낼 때와 해방 정국 당시에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폭력 사건의 배후로 암약하였던 인물이 이승만이다.
  • [7] 해당 방영분에서는 실제 중국 측의 신문도 자료로 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