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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last modified: 2019-03-07 20:22:1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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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잘생겼다

영원한 청년

Contents

1. 소개
2. 생애
3. 사망
4. 성격과 일화
5. 작품
5.1. 진짜 윤동주의 작품
5.2.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
6. 중국의 역사왜곡
6.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7. 기타
8. 새로운 학설?


1. 소개

일제 강점기의 청년 시인으로,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애국심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인물.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대쯤부터는 대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서 추앙받는다. 더불어 북한에서도 인정받는 추세다[1]


2. 생애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 일대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윤동주 집안은 꽤 유복하여 명동촌에서도 유지로 손꼽혔다고 한다. 북간도 명동촌 사람들은 반일감정이 특출하기로 유명해서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도 않고 왈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2]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반일감정이 높아 일본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중학교로 건너왔으나 중학교에서 벌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인해 학교가 폐쇄 당하자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유년-소년시절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기 때문에, 윤동주의 시에는 만주에 대한 묘사를 자주 볼 수 있다. 별 헤는 밤이 대표적.

숭실중을 거쳐 진로를 결정할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문과로 결정, 경성에서도 반일감정이 높아 조선어를 가르치고 태극기가 곳곳에 붙어있는 연희전문학교 문과(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진학을 결정했다.[3] 이때 학과 문제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 밖에 더 되냐는 반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대나 법대를 원했고 어찌 식민지 시대나 지금이나 어른들의 고집은 바뀐 게 없다... 고집 셌던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하여 매일 이 문제로 밥그릇, 물그릇이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941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진학에 성공, 젊고 활기찬 윤동주와 서울은 궁합이 잘 맞아서 이 시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명시가 써졌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와 총독부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던 시기 무사히 졸업하고, 졸업 후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 1942년 일본 도쿄 릿쿄대학과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를 다녔다.

하지만 그가 쓴 시에 짙게 서려있는 반일감정으로 인해[4] 1943년 귀국하려던 도중 일본경찰에게 연행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된다.[5] 하지만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수감된 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뇌일혈로 병사했다. 8.15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다.


3. 사망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윤동주가 복역 중 생체실험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생겼고, 만화책 아일랜드에서도 언급된 적 있다. 윤동주는 실제로 복역 중에 어떠한 주사를 자주 맞았고 함께 수감된 외사촌 형이자 친구 송몽규 또한 이 주사를 자주 맞다가 1945년 3월 10일 급사했다.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았다는 말을 하여 오래전부터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다. 그리고 1980년 5월호 현대문학지에 한 일본인 시인(이름 정보 추가바람)이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윤동주의 죽음과 얽힌 음모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군은 전시체제라 생리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가 실험대상으로 지목된 것. 윤동주에게 주사한 물은 다름 아닌 후쿠오카 앞바다의 바닷물로 [6] 일본군이 연구하던 이런 생리식염수 연구는 이미 십 수 년 전 유럽에서 동물에게 실험하여 이미 검증이 끝난 실험이었다고... 731부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군은 이런 미친 실험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미치광이 집단들이었다. 한마디로 윤동주는 일본군의 무식한 뻘짓에 개죽음을 당한 것. 정말 더더욱 열 받는 일이다.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큐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7] 기사 딱히 고문당한 일도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생체실험이 윤동주의 사인으로 유력하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당숙인 윤영춘.[8][9] 일각에서는 일제가 뇌일혈 사인도 일제의 조작 아닌가, 했지만 해수 속의 세균감염의 증상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시는 15살 때부터 썼고, 만주에서 지내던 시절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삼은, 발랄한 형태의 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20세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삶에 대한 고뇌,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가 시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지만 30년대까지는 대체적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옛날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스텔지어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연희전문 시절인 1941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삶에 대한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유명한 작품인 별 헤는 밤, 서시[10], 화상, 회록 등도 이 시기의 작품들. 더불어 그는 시를 쓴 날짜를 모두 적어둬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 출판했다.[11][12]
기사1
기사2


4. 성격과 일화

  • 연희전문대학을 다니던 때의 이야기는 윤동주와 같은 하숙집에서 하숙을 하던 후배 정병욱의 회고록에 윤동주의 학창시절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는데 매번 학교를 갈 때나 사석에서 만나면 매번 옷이나 신발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했다고 한다.

  • 책을 볼 때는 책에 줄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독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 일제의 전시물자수탈에 의해 학교 밥이 사람이 먹기엔 거시기한 양과 맛을 자랑했음에도 배고파하는 후배들에게 밥을 나눠줬다고 한다.

  • 시내에서 영화를 본 날이면 중국집에서 한잔하기도 했는데 술에 취해도 남의 뒷담 화를 하거나 한일이 없었다고.

  • 밤에 공부나, 시를 쓰다가 산책을 나가는 것을 즐겨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후배인 정병욱을 불러서 같이 산책을 갔다고 한다. 정병욱이 5살이나 어린 후배임에도 반말을 전혀 하지 않고 '정 형, 이라 부르면서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13]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도, 지금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미남이기에, 일본 유학 당시에 여러 일본여인네들 울렸다는 도시전설도 존재한다. 윤동주를 회고한 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美男)이었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中)

남자 국어선생들의 주적1[14]

  • 잊지 못할 윤동주를 여기서 볼 수 있다.http://felicityk.egloos.com/1260659

  • 연희전문시절 순이라는 여학생을 짝사랑 했으나 모태솔로이자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끝내 일본으로 유학 가는 날까지도 고백을 못했다고 한다.[15]


5. 작품

5.1. 진짜 윤동주의 작품

  •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6]
    • 서시(序詩)
    • 자화상
    • 소년
    • 눈 오는 지도
    • 돌아와 보는 밤
    • 병원
    • 새로운 길
    • 간판 없는 거리
    • 태초의 아침
    • 또 태초의 아침
    • 새벽이 올 때까지
    • 무서운 시간
    • 십자가
    • 바람이 불어
    • 슬픈 족속
    • 눈감고 간다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쉽게 씌여진 시
  • 회록

언어영역에서는 꽤나 자주 나온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 많고, 주제의식 또한 분명한데다,[17] 194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이육사의 시보다는 은유의 난이도가 낮고, 이상처럼 시에 어려운 기교를 부린 것도 아니기에, 수험생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중 하나. 시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학생들에게 상당히 건전하고 권장할 만하기에, 출제위원들도 잘 출제하는 듯. 다만 자주 나오는 만큼 내기를 꺼려하는 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이지만, 친일행적이 없는 작가이기에[18] 유난히 출제위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2011년 수능에서도 그의 시 <자화상>이 또 출제되면서 모든 장르의 작가를 통틀어 수능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작가가 되었다. 또 그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시인 백석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듯. 그의 시집인 《사슴》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5.2.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19], 김소월의 <가을 아침에>, 필자불명의 <편지>[20]

특히 <편지>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편지>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 '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

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편지>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편지>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심지어, 잘못 알려진 시를 부산일보에서 확인도 안하고 기사에 실었다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91021000179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을 바로잡는 기사도 있는데, 윤동주 作이라고 아는 시들과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22782


6. 중국의 역사왜곡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해방이 되고 관동군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21] 그러다 어느 일본인 교수가 마침 중국에 가게 되자, 유가족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다행히 윤동주 묘소가 찍힌 사진을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한-중 국교가 수립된뒤 윤형주가 재종형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22]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도 세우고 묘소도 제대로 정비했다. 그런데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으로 포장해버리고 조선족들은 그를 중국 조선족이라 주장하고 있는 실태다.

윤동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명분이 섰다
"명분이 섰다" 라고 운운하는데 주목하자.

中 동북공정이 덧칠한 항일시인 윤동주 생가
대문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으로 국적 바꿔 / 대표작 '서시'도 한자로 번역한 조형물 설치

6.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화인민공화국법상 <조선족><민족(民族)은 조선민족이며 국적(國籍)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확한 합의를 가지고 있다.[23]

재만 조선인들의 조선족이라는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는 대장정 이전의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 건국, 즉 1949년 10월 1일 이후부터이다. 따라서 윤동주는 조선 출신 재만 조선인의 후예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상단에서 서술한 중국측의 공작과 같이 중국 국적을 소유한 "조선족"이 아니다. 윤재옥은 고종즉위 22년인 1886년 북간도로 이주했고 그의 증손 윤동주는 1917년에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했다.

윤동주는 그렇다면 한국인인가?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며. 한민족으로서의 민족개념 외에 국가로서의 근대 한국(韓國) 개념은 개화기인 1897년 8월 17일 광무 건원 대한제국[24] 시기부터 문헌상 실질상 양면 모두에서 존재하였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 조선인으로 윤동주 생전에 한국의 개념이 부재했기에 윤동주는 한국인이 아니고 되려 현대에 일컬는 조선족의 정체성과 직접적 연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또한 현재 조선족은 남북한의 국적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시문학의 현대 연구에서 만주, 중국지역 대비 재일 조선인 측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례가 훨씬 많은 원인 중 하나다.[25]

윤동주를 조선민족의 공동 위인으로 민족차원에서 접근하자는 시각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중국과 옌볜성은 윤동주를 "조선인" 도 "조선민족"도 아닌 "조선족 애국시인" 이라며 <중국의 조선족>으로 규정지어버리고 있으니 이는 실로 가소로운 작태라고 할 수 있겠다.


7. 기타


  • 2010년 12월 30일, 구글에서 그의 탄생 93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로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 80년대에 TV문학관 특선으로 저항시인 3부작이[26] 방영되었는데, 윤동주 편에서 송승환이 열연했다.

  • 2014년 최근에는 ebs '라디오 인물열전(회당 10분짜리 음성 드라마)'에 그의 삶이 총 6부작으로 그려졌다.
이 라디오 드라마는 윤동주역 성우의 윤동주의 실제 성격을 고려하지 못한 목소리 연기로 윤동주의 팬들이라면 감정이입을 못하고 이따금 폭소를 쏟아낼 수도 있을 것이나, 마지막 6부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이 저려올 것이다. 추가로, '윤동주 평전'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가 그 책을 많이 참고 하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ebs 라디오 인물열전 1~6부작


  • 숭실중학 재학 시절에 찍은 사진 중에 앞에는 정일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거만하게 앉아있고, 그 뒷줄의 가운데에 문익환 목사[27]
가 있고, 그 오른쪽에 윤동주가 서있는 사진이 있는데, 문익환의 왼쪽 사람이 장준하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젊은 시절의 장준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가 다르기에 확실히 장준하가 아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코만 봐도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익환의 왼쪽에 서있는 분은 코가 휘어져있는데, 젊은 시절 장준하의 코는 휘어져 있지 않다. <윤동주 평전>의 세 번째 개정판을 보면 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 책에 실린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다.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장준하선생은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을 뿐더러, 선생의 유족들 또한 "사진에 있는 분은 장준하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증언하셨다고 이 책의 저자 송우혜는 말한다.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장준하와 윤동주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진은 정일권 항목 참조.)

또,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문익환 본인이 말하길, 숭실중학에 한 학년 아래로 진급하게 된 윤동주가 평소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인데 유난히도 자신의 모자와 바꿔 달라고 조르기에 문익환윤동주에게 호떡을 실컷 얻어먹고 모자를 바꿔 쓴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일권도 숭실중학에 다녔었는가? 하는 점을 따져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은 윤동주문익환이 숭실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니 말이다. 고로, 앞줄에 앉아있는 사람은 정일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실중학사참배 거부 문제로 일제가 숭실중학에 압력을 행사하자 윤동주,문익환은 자진 사퇴(그 당시의 실중학에 재학하던 많이 학생들은 이 문제로 자진 사퇴를 했다)를 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북간도 유일의 5년제 학교인 광명 중학으로 진학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일을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광명 중학이 일제에 협력하고, 일본 위주의 교육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문익환정일권은 이 광명 중학의 동창이다. 이 광명중학을 문익환은 5학년으로 편입했고, 윤동주는 4학년으로 편입했으니 각기 1년,2년을 다녔고, 이때 윤동주의 성적표를 보면 일본어 성적이 제일 나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가 일본어로 수업을 받은 것은 이 광명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전에 다녔던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은 반일계 학교로 수업은 모두 조선어로 했으니, 전 과목을 일본어로 수업했던 광명 중학의 성적은 나빴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윤동주의 '서시'의 시비(詩碑)가 일본 도시샤 대학에 있다. 바로 옆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도 있다.


종사촌송몽규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연희전문학교을 같이 다닌 동갑내기 절친한 벗이자 사촌 형이다. 윤동주보다 등단도 빨랐고, 윤동주와는 달리 교토제국대학에 합격할 정도의 대단한 인재. 구체적인 전공은 사학과 서양사전공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촌형에 대해 윤동주가 컴플렉스를 느꼈다는 설도 있다.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인들 중에서도 팬이 존재하며 연구자[28]도 있다.

우연히 윤동주의 사진을 본 후 이런 미남이 무슨 시를 썼나.하면서 찾아보다 빠져들었다는 예도 보이며,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된 후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보다 충격을 받았다는 예도 있다.

가수 윤형주의 육촌형이며 건축사학자이자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였던 일주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가 다녔던 릿쿄대학에는 현재 윤동주 시비가 서 있다. 릿쿄대가 성공회 미션스쿨인 관계로 성공회대학교와 자매결연 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한 다리 건너 릿쿄대 동문 등 관계자들에게 윤동주가 알려져 윤동주 추모미사, 시 낭송회 등을 열기도 했다고 한다.

마광수 교수가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윤동주 분석 논문이 엄청난 퀼리티라고 한다.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의 생을 다룬 영화 '동주'를 연출한다. 윤동주 역에는 영화 쎄시봉에서 6촌 동생으로 출연한 배우 강하늘이 캐스팅되었다.


8. 새로운 학설?

보통 윤동주의 이미지는 소극적 저항시인으로써 굳어져 있는 경향이 있는데 90년대 후반부터 교수진들 사이에서 저항시인이 아닌 단순한 자아성찰 시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윤동주 시에 대한 평가에서 핵심이 되는 바 중에 하나는 그의 시관과 신성과의 연관이다. "십자가"에서는 명백하고, 심지어 "서시"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한다. 그 밖의 시도 이런 식으로 해석 가능하다. 구체적으로는 윤동주가 믿게 되었던 기독교의 윤리 의식이 윤동주 시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볼 때 윤동주의 저항의식은 단순히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다기보다, 종교적 성찰과 연관이 있게 된다.

이것을 윤동주가 특정 종교의 관점을 숙달한 결과로 보는 것은 옳지 않고, '사랑'("별헤는 밤"), '참회'("참회록") 등의 개념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식으로 보아야 한다. 과하게 기독교 윤리와 직접 연결시키고야 마는 해석도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어휘들은, 지금에야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상어에서는 물론, 시어로는 생경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윤동주가 이 말들을 접한 연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을 그의 종교에서 찾는 것이 이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작품에만 한정되어 윤동주를 논하지 않고, 윤동주의 전체 일생 속에서 윤동주를 고찰하고자 하는 장점이 있다. 윤동주가 배웠던 학교, 그 지역의 종교적 특성, 가족사 들을 함께 참고하여 시를 해석하는 것이다. 늘 지적되는 윤동주와, 윤동주 스스로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릴케'와의 연관도, 이러한 신앙의 내재화 속에서 더 확연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윤동주가 읽었던 릴케는 당연히 일본어로 번역된 시였다) 구원의식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성찰이라는 면에서 그 유명한 릴케의 "가을날"과 윤동주의 "십자가"는 무언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윤동주 시의 고유한 내재적 특징을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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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90년대 후반 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될 때 월간중앙의 취재에 의하면 연변에서는 동생보다 듣보잡이고 연희전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북한에서는 기피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 [2] 한자로 일자와 왈자는 표기가 같다. 대신 왈자는 가로로 긴 모양
  • [3] "문학은 민족사상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라고 후배에게 이야기 할 정도. 당시에도 연대 문과는 인기가 있었던 거 같다.
  • [4] 무릎팍도사 문성근 편에서는 일본군에 어쩔 수 없이 입대하게 된다면 일본군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고 하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그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2년의 징역을 언도한 교토 지방재판소의 판결이 이해가 된다. 최소한 군부 내에서의 반란이 아니라도 무언가 행동을 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대부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 친구였던 장준하선생.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와 함께 체포되었던 사촌 송몽규마저도 투옥 중 사망하였기에 진실은 알 수 없게 되었다.
  • [5] 이 사건과 관련된 도시전설로 윤동주, 송몽규와 같이 투옥되었던 한국인은 제3 고등학교 재학생이었는데, 담당검사가 다름 아닌 3고의 선배. 간단한 훈계만 듣고 석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
  • [6] 바닷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혈관으로 들어가는 점이 다르다고 보면 된다. 위생상 두 방법 다 안 좋긴 마찬가지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건 토하거나 나중에 배변으로 나올 수 있지만 살균작업 거치지 않은 무수한 세균이 득실거리는 바닷물이 영양실조 상태의 인간 혈관에 주사된다면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 [7] 이전 글이나 많은 서적에서 바닷물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말해서는 혈장대체용 생리 식염수이다. 이것은 전쟁 당시 수요 때문에 미국도 연구한 것인데, 다만 일본의 경우는 기술상의 문제로 해수를 생리식염수로 바꾸는 실험을 했다.
  • [8] 한국의 시인(1912~1978), 영문학자, 중문학자이자 윤형주의 아버지. 윤동주보다 5살 많다. 외국어에 능통해 영문학과 중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참고로 윤영춘 본인도 윤동주가 체포될 시기 비슷하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아들 윤형주에 의하면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부에 다닐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했지만 본인의 수감과 5촌 조카 윤동주의 옥사를 겪는 바람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이후 일본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문학자는 하지 않았다.
  • [9] 무릎팍도사 문성근편에서 문성근이 일본군 징집문제로 장준하, 윤동주, 그리고 그의 아버지 문익환의 얘기를 했다. '문익환은 신학자로 절대로 입대할 수 없다는 의지로 신학교장과 담판을 지어 전학 가게 되었고, 장준하는 입대 뒤 탈영해 독립군으로 들어가려 하였고, 윤동주는 일단 입대한 뒤 일본군이 약해질 때를 틈타 내부에서 난을 일으키자 했었으나 윤동주의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생체실험을 받다 죽었다.'라고 한다.
  • [10] '서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정본에 따르면 '무제'.
  • [11] 세간에는 정병욱(1922~1982)이, 이 시집 출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아니고 경향일보 기자 처중이 주도적이었다. 거기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등이 합세.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1946)이 31편의 시집(1948)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시집을 간행할 적 경향일보 주필이던 정지용이 도움을 주었으며 추천사를 써준 것도 정지용이었다(추천사에 보면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살이 되도록 시집도 한 편 내 본 경험 없이!라는 처절한 외침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정지용과 강처중은 각각 납북, 월북 등의 사정으로 80년대 후반까지 금서처분 받게 되어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병욱 교수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 윤혜원씨가 1948년 12월 고향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시(85수)들을 품에 안고 내려와 현재의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다. 당시 윤혜원씨는 윤동주의 미발표시들을 위해 자신의 연구자료나 가족 앨범 등의 개인자료들도 모조리 포기했다.
  • [12] 그 밖에도 윤동주는 2권 분량이 될 시를 남겼으나 스승 이양하(1904~1963)에게 이걸 전해주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분실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정확히는 자신의 시들을 3권의 책으로 분류했는데 이 중 2권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범우사(윤동주 시집) 참조.
  • [13] 조선시대엔 나이어린 동생들에게 오히려 존댓말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오성과 한음에서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의 풍습을 지켜왔으면 현재처럼 존칭 때문에 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 [14] 백석임화까지 주적 3인방. 어지간히 잘생긴 교사가 아니면 수업시간에 사진만 보는 여학생도 있다.
  • [15] http://www.ddanzi.com/ddanziNews/3552286
  • [16] 밑의 목록은 1941년에 시집에 실으려 했던 19편의 시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 [17] 어느 정도냐 하면, 윤동주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물으면 무조건 '자기반성과 성찰'을 고르면 끝이다. 물론 윤동주가 지은 '오줌싸개 지도' 같은 동시 비슷한 녀석이 출제되면 그런 거 없겠지만 수능에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주제로 한 시가 출제된다.
  • [18] 굳이 친일행적으로 트집잡을 만한 것이 있다면, 창씨개명 하나 정도. 하지만 당시에 창씨개명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고, 윤동주의 경우도 하지 않을 시에 일본으로 유학가는 것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퇴학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히라누마 도오쥬우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시집 원고에는 언제나 윤동주로 표기했고, 창씨개명 신청서를 내기 5일전에 벌써 참회록 써놓고 자책과 반성을 했다. 오오 윤동주 오오. 그리고 애시당초 창씨개명했다는 도오슈라는 이름은 윤동주의 동주(東柱)를 일본식으로 읽은것일 뿐이다. 창씨개명 때 이름을 아예 일본식으로 갈아엎는 사람들이 많았다는걸 생각하면...
  • [19] 원작은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의 작품 <내 인생에 황혼이 오면>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 [20] 필자는 알 수 없지만, 안치환의 노래 <편지>의 가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 고승하도 문방구 노트 표지에 인쇄된 시와 당시 학교에 적응을 못해 자퇴하려던 학생이 편지처럼 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든 것. 노래가 완성된 시기가 1984년이니 꽤 오래전부터 오해가 시작된 듯하다.
  • [21] 집안이 개신교였던 관계로 공산화된 지역에 있을수가 없어서 대부분의 친인척들이 아예 남으로 내려왔다.
  • [22] 윤형주보다 나이가 많은 윤동주의 친척들은 이 시기에 이미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윤형주가 북간도로 대표로 갔다고 한다.
  • [23] 때문에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재일 조선인과 다르게 대한민국북한 국적을 지니지 못한 상태이고 이국 국적 취득도 중국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하다.
  • [24] 약칭 국호로써 대한제국은 대한과 한국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 [25] 윤동주의 창작활동은 대부분 일본에서 하라누마 도오슈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유학생활 과정중에 이루어졌다.
  • [26] 하나는 백윤식이 열연한 이상화 편, 다른 하나는 김흥기가 열연한 이육사편이다. 이상화 편에서는 미니어처로 관동대지진이 재현되었다.
  • [27] 문성근의 부친으로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은진중학,숭실중학,광명중학을 함께 다닌 친우이다.(징집 령에 대한 판단이 가른 운명).
  • [28] 1984년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완역본이 출간되기도 했으며, 1995년엔 일본 NHKKBS가 합작으로 그의 사망 5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다. 여기서 중국에 있는 그의 고향 및 일본에서 그가 유학당시 지내던 곳, 지인들 인터뷰도 나왔으며 일본인 대학 동창생도 나와서 인터뷰한 바 있다. 당시 방송에서 일본인 동창생은 그는 말이 없고 과묵하며 항상 뭔가 글을 적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다큐멘터리에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