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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

last modified: 2015-03-10 09:48:03 Contributors

Contents

1. 留贊
1.1. 개요
1.2. 생애
1.2.1. 손오에 임관하기 전
1.2.2. 오나라 시절
1.2.3. 그의 최후
1.2.4. 후일담
1.3. 기타 미디어
2. 劉纂
3. 劉瓚
4. 劉粲
4.1. 개요
4.2. 근준의 난
4.3. 한나라의 분열


1. 留贊

1.1. 개요


留贊
(183[1] ~ 255)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 자는 정명(正明). 유략, 유평의 아버지. 회계 장산 출신이다.

적을 만났을 때 머리를 풀어헤쳐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는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 뒤에 나가 싸워 백전백승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전적이 뛰어난 인물이지만 결국 73세의 나이로 전사하는 슬픈 인물이기도 하다.

1.2. 생애

1.2.1. 손오에 임관하기 전

젊어서 군리가 되어 황건적의 난 때 황건적의 두목 오환과 싸워 직접 그를 죽였는데, 싸우는 도중에 상처를 입은 다리가 결국 덧나 다리가 굽어 펼 수 없게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장수가 될 것을 포기하지만 매우 열렬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는 책을 읽더라도 병서와 삼사[2]만을 읽었는데, 매번 명장이 전공을 세우던 형세를 보면 책을 보며 홀로 탄식하였다. 어느 날, 그는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 모은 다음
지금 천하가 어지럽고 소란하며, 영웅과 호걸이 나란히 일어나는데, 과거의 일을 두루 살펴보니, 부귀는 보통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건만, 나는 앉은뱅이가 되어 평민의 동네에 있으니, 죽으나 사나 달라질게 없소. 지금 내가 내 다리를 자르려는데, 다행히 죽지 않고 다리가 펴지면, 아마 다시 쓰임을 얻을 것이나, 죽으면 그걸로 끝이오.
라고 하며 자신의 다리를 자르려고 하자 친척들이 모두 그를 막았다.

하지만 이 똘끼 충만한 유찬은 틈이 생기자 기어이 칼로 다리의 근육을 자르니 피가 콸콸 흘러 한동안 기절한다. 집안 사람들이 매우 놀랐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일이 이미 일이 끝난 뒤라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결국 다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가 상처가 낫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일본한 중딩이 이 행위를 비슷하게 따라하고 미국한 의사가 이 행위를 똑같이 따라하는데…….

1.2.2. 오나라 시절

이 소식을 들은 능통이 그를 청해 만나보고 기이하게 여겨 표를 올려 유찬을 천거해 기용되었으며, 유찬은 거듭 전공을 세워 둔기교위까지 승진한다. 하지만 매번 시사득실에 대하여 간언을 하고 아첨을 하지 않고 직언만을 하니 손권이 그를 꺼렸다.

252년에 위나라가 제갈각이 쌓은 성을 공격하기 위해 제갈탄호준에게 7만명을 주어 적을 공격하게 했는데, 유찬은 제갈각의 명을 받아 여거, 당자, 정봉과 함께 선두 부대가 되어 파견된다. 당시 동흥의 위나라의 호준을 비롯한 장수진은 유찬 등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두건과 칼, 방패만 갖춘 상태에서 술을 마시며 크게 웃고 떠들며 군대를 엄격하게 정돈하지 않았다.

유찬의 군대는 쉬진 않고 해안을 따라 올라가 산을 따라 서쪽 위로 간 다음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적을 마구잡이로 베니 위나라 군대는 흩어져 부교를 건너려다 수만 명이 익사했으며, 낙안태수 환가가 익사하고 이 때 자신의 아비 한당의 시체까지 들고 위나라에 항복한 아들 한종을 붙잡아 참수하게 되니 이 공으로 유찬은 좌장군에 임명된다. 이때 유찬의 나이 70살.

1.2.3. 그의 최후

255년에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좌호군이 되어 여거와 함께 손준을 따라 수춘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길에서 병에 걸리니 손준은 유찬에게 수레와 치중을 거느리고 먼저 돌아가도록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들은 제갈탄은 놓치지 않고 장반을 보내 유찬을 습격하게 하니 255년 2월, 결국 고파에서 유찬의 군대는 장반이 보낸 4천의 군사에 따라잡힌다.

유찬이 병이 깊어 진을 정비할 수가 없어 질 것을 깨달아 곡개와 인수를 풀어 조카에게 주고 말하길
내가 장수가 된 이래로 적을 파하고 기를 빼앗았지만 일찌기 진 적은 없었다. 지금 병이 깊고 병사는 약한데다가 수 또한 비교할 수 없으니 너는 어서 가거라. 모두 죽는 것은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다만 적을 쾌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조카가 받지 않으려 하자 유찬은 칼을 뽑아 베려 하니 그제서야 조카는 곡개와 인수를 받아 떠났다.

거기다가 유찬이 걸린 병이 깊어 3년 전까지만 해도 팔팔하게 적진을 종횡무진으로 돌파하던 유찬은 자신이 평소에 즐겨하던 머리를 풀며 노래를 부르고 적으로 돌격하는 것도 못 하는 상태였으니 결국 패배를 맞게 되자 탄식하면서
내 싸움엔 항상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 이처럼 병이 깊으니 진실로 천명이구나!
라 외치며 손릉, 장수 등과 함께 전사하니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의 죽음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깊이 안타까워했다.

1.2.4. 후일담

그리고 장반은 전투에 승리하여 유찬의 목을 수도로 보내는데 그때 유찬의 관인과 부절도 함께 보낸다. 결국 그가 살리려고 한 조카도 죽게 되었다는 것. 그의 둘째 아들 유평의 일생도 박복하여 손호에게 진언했다가 주살당할 뻔하자 분노와 불안으로 죽고 만다.

1.3. 기타 미디어

유찬.jpg
[JPG image (Unknown)]
삼국지 8, 삼국지 9, 삼국지 10, 삼국지 11 일러스트
유찬12.png
[PNG image (Unknown)]
삼국지 12 일러스트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무력, 통솔 70대에 나머지도 모두 60대를 기록하고 있는 준수한 무장. 심지어 수명도 길다. 다만 자가치료 기능은 아쉽게도 딸리지 않은 것 같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3/74/64/58. 분투, 몽충을 가지고 있다. 아들도 가진 노병계 병법이 없어 아쉽다. 연의 때문인가...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4/75/66/55/65로 좋다고 말하기엔 애매하지만 훈련특기가 있으니 훈련셔틀로 쓰면 적어도 밥값은 한다. 근데 여기에 "고증오류가 있는데" 생년을 보면 육손과 동갑인데 10에서부터 생년을 168로 병크을 저질렸다.(...) 사실 생년이 183년이라면 중반기이나 후반기에 가면 쓸만한데. 황건의 난, 군웅할거에 등장하지않은 유찬이 그렇게 설정이 되었으니. 게다가 안고치고 최신작인 12편까지 이어진다.무슨 짓거리야 그나마 9편은 육손과 동갑이지만. 이건 뭐...

삼국지 11의 특기는 눈물이 있을 정도로 잉여스러운 추진 안습 그래도 능력치는 좋은편이니 특기를 갈아 버리거나 성장시키면 된다.

삼국지12의 일러스트는 그가 머리를 풀고 고함을 지르며 싸웠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무력이 전작에 비해서 정봉과 같은 무력치을 찍었다!(무력이 81) 전법은 전공격강화. 아쉬운 점이라면 생몰년이 명확한 인물이라서 활약했을 때는 분명히 노익장이었음이 분명한데, 일러스트는 청년이라는 괴리감이다.

삼국전투기에선 드래곤 길들이기의 스토이크로 패러디 되었다. 바이킹인 스토이크로 패러디된 것은 병에 걸렸음에도 싸우다 전사한 그의 최후와 바이킹의 생사관[3]을 감안한 패러디인 듯.

2. 劉纂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 주거가 죽자 손노육의 남편이 된다.

235년에 여릉의 이환, 노합과 회계의 수춘, 남해의 나려 등의 도적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키자 유찬은 당자와 함께 여대의 지휘 아래 이들을 무찌르면서 236년 수춘을 항복시켜 유찬은 이환을 사로잡고 당자는 노합을 사로잡아 이들을 참수한다.

256년에 거기장군을 지낸 유찬은 손준문흠이 위나라를 공격하자는 건의에 대해 여거, 주이, 당자와 함께 적을 공격할 계획[4]을 세웠는데, 손준이 죽자 취소되었다. 그러나 여거, 등윤이 손준의 뒤를 이어 손침이 정권을 잡은 일에 반발하자 문흠, 당자와 함께 여거를 공격한다.

266년 사마소의 장례식에 다녀온 정충이 익양을 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자 육개는 그 일에 반대하는데 유찬은
하늘이 오행을 낳았는데, 누가 전쟁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거짓 수단에 의지하여 서로 다투는 것도 종래에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누설하는 것이 있다면 어찌 놓칠 수 있겠습니까 ? 마땅히 첩자를 보내 그들의 정세를 관찰해야만 합니다.

라고 말해 정충의 의견에 찬동했는데, 손호 또한 마음 속으로는 유찬의 의견이 맞다고 여겼지만 결국 육개의 의견에 따라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3. 劉瓚

(? ~ 311)


삼국시대 촉한의 황제 유선의 넷째 아들로 정사 후주전에서 유선의 아들들이 허봉 제도로 준 왕들의 봉작을 나열할 때 잠깐 나오며, 256년에 강유가 성도로 돌아올 때 신평왕이 되면서 대사면이 행해졌다.

당연하지만 유찬이 받은 지역은 허봉 제도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유찬이 지배한 곳이 아니라 유찬이 허봉으로 받은 신평은 옹주 서쪽에 있는 지역 중에서 하나이며, 263년에 촉이 멸망하자 일가와 함께 나라로 이주하여 지내다가 311년에 유요, 유종, 유순, 유거 등과 함께 영가의 난으로 유요, 왕미 등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고 한다.

유영의 손자인 유현만 살아남은 것으로 볼 때 후손은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밑의 인물과는 별 관계는 없지만 살해당한 것이 밑의 인물이 황제가 된 국가인 전조가 이끄는 군사다.

4. 劉粲

오호십육국시대 전조의 역대 황제
3대 열종 소무황제 유총 4대 은황제 유찬 5대 유요

묘호 -
시호 효은황제(孝隱皇帝)
연호 한창(漢昌, 318년 7월 ~ 318년 9월)
유(劉)
찬(粲)
사광(士光)
생몰기간 ? ~ 318년
재위기간 318년

4.1. 개요

유찬의 생몰년은 ? ~ 318년이며 재위 기간은 318년이다. 묘호는 없고 시호는 나중에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유요가 추증해준 효은황제(孝隱皇帝)이다.

유찬은 유총의 차남으로 모친은 알려져 있지 않고 는 사광(士光)이다. 310년에 유총이 황제에 즉위하자 하내왕(河內王)에 책봉되었다. 친척인 유요와 함께 서진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311년에 낙양을 함락하였으며 이후 장안 및 진양 방면의 전선에서 유요와 함께 활약하였다. 당시 후계자는 이전에 유총의 이복 동생이자 황태제로 유찬의 숙부였던 유예였는데[5] 유찬은 외할아버지뻘인 근준과 유총이 총애하는 여러 환관들과 합심하여 유예를 모함하여 폐위하고 살해한 다음 뒤이어 이복 형이자 유총의 장남 유역도 모함하여 살해하였으며 마침내 황태자가 되었다.

4.2. 근준의 난

318년 주색에 곯아있던 유총이 죽자 황제가 된 유창은 주색에 빠져 아버지가 남긴 부인들과 놀아나기 시작했다. 그 해 9월 근준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하고 국정을 맡겼는데 근준은 유찬의 조서를 멋대로 꾸며 사촌동생 근명을 거기장군, 근강을 위장군에 임명하여 금군을 장악했다. 이 후 근준은 순식간에 반정을 일으켜 궁궐을 급습해서 유찬을 죽였다.

근준은 유찬의 외아들이자 태자 유원공을 비롯해서 수도 평양에 있던 유연, 유총의 자손을 비롯한 모든 유씨 황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 없애고 유연의 능묘인 영광릉과 유총의 능묘인 선광릉을 도굴해 부장품과 보물들을 손에 넣고 죽은 그들의 관을 꺼내 부관참시하고 불태워 버렸다. 근준은 유총 시절부터 박대를 당하지 않고 외척의 지위에 올랐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근준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진서> 이구전에 의하면 유찬을 시해한 근준은 옥새를 얻어[6] 동진의 도독하남삼군군사였던 이구에게 이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유연은 도각(屠各)[7]의 작은 우두머리이며 진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틈타 유주와 병주에서 난을 일으켜 천명을 멋대로 들먹이고 를 유폐하여 오랑캐의 조정에서 시해하는데 이르렀소. 항상 군사를 이끌고 재궁을 도울 것이니 이로 인해 이를 들어달라고 청하오.

이구는 이 사실을 동진의 원제 사마예에게 알렸고 사마예는 이 틈을 타서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유총에 의해 피살된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의 영구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근준이 난을 일으킨 원인은 서진을 멸망으로 몰고 간 흉노에 대한 증오심이 일찍부터 있었고[8] 기회를 보아 자신이 실권을 차지한 후 유씨 일가를 도륙내고 다시 진나라를 부흥시킬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근준은 겨우 평양 일대만 다스리고 있었고 나머지는 장안에 있던 유요와 양국에 있던 석륵이 지배하고 있었다. 유요와 석륵은 근준을 토발한다며 군대를 일으켰고 근준의 근대는 먼저 석륵의 군대와 양릉에서 싸웠다. 근준이 선제공격을 했지만 석륵은 짬밥으로 이를 모두 격퇴하고 도리어 근준을 평양까지 몰아부쳤다. 유요도 평양 부근의 적벽까지 오자 태부 호연안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유요에게 투항했다. 한의 신하들은 유요에게 황제가 되도록 권했고 유요는 이를 받아들여 즉위한 후 대사령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근준의 일족은 제외되었는데 근씨를 모두 없애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근준은 버틸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석륵에게 화친을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12월 근명과 근강 등은 근준을 죽이고 유요하게 항복했다.

4.3. 한나라의 분열

석륵은 근씨들이 가까이 있던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고 유요에게 항복하자 대노하여 조카 석호를 선봉으로 삼아 평양을 공격했다. 근명이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유요에게 구원을 요쳥했다. 유요는 유아에게 평양으로 가서 근명을 구원하게 했는데 근명은 유아의 호위를 받으며 일족들과 성 안의 1만 5천여명을 데리고 빠져 나왔다. 하지만 유요는 군대를 동원해 근명을 포함해 근씨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뒤이어 석륵은 평양을 불태운 후 철수했다. 유요와 석륵은 서로 군세가 만만치 않다고 여겨 화친했다. 유요는 수도를 폐허가 된 평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했다. 319년, 석륵은 유요가 황제에 오르자 왕수를 사자로 보내 축하했다. 유요 역시 아직은 석륵을 칠 때가 아니라고 여겨 이를 받아줬는데 조평탁이라는 자가 유요에게 왕수가 석륵이 보낸 첩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유요는 왕수의 목을 베었다.

유요는 석륵을 태재에 임명하고 조왕(趙王)으로 봉할려고 했었는데 살아남은 왕수의 부관이 겨우 도망쳐 석륵하게 왕수의 죽음을 알렸다. 이에 석륵은 대노했다. 이 후 유요는 나라 이름을 조(趙)로 바꿨으며 석륵도 조왕에 즉위했는데 유요의 조를 전조, 석륵의 조를 후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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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육손과 동년이다!
  • [2] 사기, 한서, 동관한기
  • [3] 바이킹들은 전사하지 않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병사나 자연사하게 될 경우는 자신을 칼로 찔러 죽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 [4] 손준전에는 留贊으로 되어있지만 그 유찬은 255년에 이미 죽은 상태에다가 직책도 다르기 때문에 번역자의 실수로 추정된다.
  • [5] 유총이 유화를 죽이고 그를 황제로 세우려고 했으나, 거절하자 일단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나중에 황제 자리를 넘긴다면서 황태제로 삼았다.
  • [6] 전국옥새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전국옥새는 나중엥 염위가 멸망할 때 동진에 보냈기 때문이다.
  • [7] 북방 오랑캐의 일종
  • [8] 진서에서도 항상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고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