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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

last modified: 2015-03-30 14:09:55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의병 운동의 전개
4. 이후의 행보
5. 도저히 쉴드가 불가능한 한계점
5.1. 중국이 곧 세계의 중심이어야만 한다.
5.2. 그럼 중국은 왜 망했지?
5.3. 그가 바라는 세계질서는?
5.4. 그러면 방안은?
5.5. 점입가경
5.6. 복고를 통한 부국강병의 방안?
5.7. 동양을 지키는 방법
5.8. 자유평등에 대한 시각
6. 결론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위정척사파
柳麟錫 1842. 1. 27~1915. 1. 29

1. 개요

독립을 꾀한 독립운동가라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으며 그 한계 또한 수구꼴통의 전형이었던 인물. 뒤에서도 나오지만 이 평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독립운동 했다는 사실덕분에 그 어처구니 없는 한계점마저도 가려지는, 어쩌고 보면 운 하나는 대단히 좋은 인물이다. 독립운동 덕에 단점이 가려졌다고 운이 좋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호는 의암(毅庵)이다. 강원도 성군 가정리 출신.

제천에서 나온 의병대장으로도 유명하며, 실제로 제천시에서 한방도시와 함께 홍보용으로 많이 내거는 인물이다. 의병을 이끌었으나 패퇴한 이후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으로 가서 은둔하였다.
이듬해 잠깐 돌아왔으나 다시 북방으로 건너갔다. 이후 고종이 퇴위당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은둔했으며 1913년에 우주문답이라는 저서를 지었다. 이후 서간도로 다시 돌아갔으며 방전현 방취구에서 사망했다.

2. 생애

1842년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조부 유영오가 화서 이항로와 교분을 맺고 있던터라 선생은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 사상에 심취한다.

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과 함께 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3. 의병 운동의 전개

1893년에 제천 장담으로 이사했으며, 이곳이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된다. 이후 을미사변이 터지고 단발령까지 겹치자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유인석 역시 이에 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제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1895년 5월 2, 3일 양일간에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사실상 의병항쟁의 준비단계를 밟는다.

유인석의 문인들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후 단양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하였으나, 반격이 지속되자 유인석은 이들을 영월로 모두 모이게 하였고, 여기서 의병들의 간청으로 의병장에 오르게 된다.

이후 충주성을 점령하고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였으며, 이후 관군의 반격에 지쳐 충주성을 버리고 제천으로 퇴각했다. 이후 단발령이 철회되고 김홍집 내각이 축출되자 거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전언이 내려왔다. 그러나 정부가 특히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또한 망국 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고집을 부렸다.

이후 제천전투에서 크게 패하고는 제천성을 상실했다. 이후 의병들을 이끌고 소규모 전투를 행하면서 서북으로 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관군의 압박이 이어졌으며, 이후 서간도로 망명한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의병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다. 일제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도 좋은 이유였지만, 동시에 유인석은 청의 군사적 원조도 기대하고 있었다.

서간도에서 무장세력은 인지라 그곳 관리는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며, 이에 유인석은 9월 28일 혼강(琿江)변에서 의병진을 해산한다.

4. 이후의 행보

1897년 3월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곧 다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다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황해도평안도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향음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서 그놈의 존화양이 의식은 계속 고취시켰다.

고종이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이 맺어지자 1908년 7월에 연해주로 망명을 떠났으며,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경술국치에는 이에 반대하는 성명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1913년에는 그의 사상을 집약한 우주문답을 저술했으며, 1914년에는 서간도로 돌아갔다가 1915년에 관전현의 방취구(芳翠溝)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그저 평범한 위정척사파에 속한 의병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5. 도저히 쉴드가 불가능한 한계점

유인석은 사실 의병 활동 당시 평민출신 지휘대장이기도 했던 김백선을 '양반에게 항명했다'라는 죄목으로 처형한 병크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 사건 자체는 조금 더 복잡한 사건이었는데, 김백선이 항명한 안승우는 정작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양반가 출신의 의병장이었으며, 안승우 본인 역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이었다. 김백선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원군을 안 보냈다며 칼을 빼들고항명하다가 군기 문란죄로 처형당했던 것이다. 일본군에게 패퇴할 당시 김백선은 요청했지만 안승우는 원군을 보낼 상황이 못되었고, 대신 다른 의병장들이 원군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보내겠다고 해놓고 결국 보내지 못했거나, 기껏 보낸 원군이 정작 전투를 기피하고 퇴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에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대거 잃고 분노한 김백선은 알려진 대로 본영으로 돌아가 안승우에게 칼을 빼들며 분노했고, 진작부터 김백선을 곱지 않게 보던[1] 유인석은 군율 위반으로 김백선을 처형했다.
또한 나라 구하겠다고 모여든 의병들 중에서 동학도를 싸그리 골라내서 반역도라고 처형한 것 역시 그 시대의 유림 인식의 보편적인 한계라고 친다하더라도, 유인석이 비판받아야 하는 점은 그러한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의 사상과 지향점이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이 병탄당한 시점에서도. 애초에 유인석이 원한 것은 독립된 대한제국이 아닌 독립된 양반의 나라 조선이었다. 이런 점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저서 우주문답에 서술된 그의 아주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우주문답에 서술된 그의 신념과 세계관은 다음과 같다.

5.1. 중국이 곧 세계의 중심이어야만 한다.

유인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사상을 아주 집중적으로 주장한다. 심지어 대한제국의 성립과 고종의 칭제건원을 보았음에도! 우주의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은 중국을 종주로 하며 이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유인석은 아주 분명히 주장한다.

'중국'은 나라가 한 가운데 있어서 그 행하는 바가 상달인데, 상달이란 도리에 통달하는 것이다. '외국'은 치우쳐 변두리에 있는 나라이며 그 행하는 바는 하달인데 하달이란 형기를 이루는 것이다. 상달은 중국의 장기요, 하달은 외국의 장기이다. 이것이 서로 달라지게 된것은 풍기와 품격이 서로 달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13년의, 당대 최고의 위정척사파라는 인간의 사상적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국은 역사 이래 일찍 문명을 이루었으며 성군이 나왔고 성현과 철인이 이어져 윤리,예악,제도,문물과 도덕 경술이 빛났기 때문에 당연히 상달은 중국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 중국의 풍토이며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문명하다는 곳이라는 것이다. 반면 외국은 거칠고 치우친 곳에 있으며 문명이 늦게 시작했고, 도리도 밝지 못하며 형기의 사욕을 추구하여 좋은 음식, 사치한 옷, 웅장한 집, 예리한 무기, 기이한 재주와 교묘한 술책 등으로 우위를 다투기 때문에 하달의 외국이 된다. 또한 공리에만 급하며 욕심만 많아서 천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유인석이 직접우주문답에 저술한 중국과 외국을 보는 그의 기본시각이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자.

5.2. 그럼 중국은 왜 망했지?

유인석은 중국이 실하면 외국이 복종하고, 중국이 허하면 외국이 침범한다는 것으로 그 분석을 퉁쳤다. 외국의 '하달'이 갈수록 심해져서 하늘에 전기시설 놓고 땅에는 철로를 만들고 배와 차로 사람을 해치고 천지인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난국'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돌파한다는 계책이라는 것으로 "다른 방도가 없다.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중화질서와 도덕의 회복이다(...)

5.3. 그가 바라는 세계질서는?

그가 우주문답에 써놓은 마땅한 세계질서는 다음과 같다. 그는 중국을 '제왕'이 다스리는 것은 천지개벽이래 세워진 대일통의 규범이며, 중국이 외국을 '통할'하고 일국이 만국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바꿀 수 없는, 올바른 이치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라는 것이 하늘이 낙서(洛書)를 내려주어 구주(九疇)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성들이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것은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이며,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법을 의논하는 것은 도를 없애고 기강을 그르치는 것이라고도 분명히 써놓았다. 그리고 가장 중국다운 것은 황제로서 대통을 세우고 공자로서 '종교'를 삼으며 오륜을 지키고 전통적인 의발을 준용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빼놓지 않았다.

5.4. 그러면 방안은?

그런거 없다. 유인석은 정치에서 두 가지를 가장 중요시 했는데, 법치를 하지말고 '선정'을 베풀라는 것이었으며 '정전(井田)'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20세기에! 물론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방략과 역사적 현실적 고찰따위는 우주문답에 조금도 나와있지 않다. 그저 '당연히' 추구해야 할 지향이자 가치인 것이다.

5.5. 점입가경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헛웃음이 나오게 하는 이런 지극히 시대착오적이고 봉건시대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 그 처절하도록 낮은 판단력은 '세습'이라는 것에 대한 유인석의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유인석은 삼대의 세습도 '천리(天理)'이며, 귀족이 되는 것도 '천리'라고 생각했다. 세습해야 혼란을 그치게 할 수 있으며 신하의 자리를 세습해야 나라의 세도 유지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주장또한 전부 우주문답에 그대로 적어놓았다. 일본의 성공은 그저 일시적인 것이며, 서양의 문물은 일본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써놓았다. 제대로 된 역사를 공부한 위키러라면 유인석의 이러한 주장들이 다분히 근거도 없으며, 심지어는 유인석이 그렇게 핏대를 올려가며 '비난'하는 대상인 서구문명과 역사에 대한 일체의 통찰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유인석은 나라를 빼앗긴 와중에도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인 복고적 세계관을 설정하고 여기로 돌아가기만을 아주 강력하게 외치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다.

5.6. 복고를 통한 부국강병의 방안?

그가 제시한 나라를 위한 일곱가지 계책을 보자. 유인석이 제시한 계책은 도(道),덕(德),학(學),정(政),형(形),문(文),무(武)이다. 그는 삼강오상의 도를 근본으로 하여 육경과 사서를 강학하여 도덕을 이룰 수 있다고 했고 이로써 옛날의 이상적 통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면 나머지 일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했다(...) 유인석은 복고를 통해 강국이 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서 삼대의 학제를 회복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자면, 8세가 되어 소학에 들어가고 15세 때 대학에 들어가 농, 공, 상, 병의 직분을 나누자는 것이다. 누군가는 직업교육을 통해 자강하자는 시도라고 미화해 줄 수 있지만 이 시대는 이미 1913년이다(...) 참고로 타이타닉이 침몰한 해가 1912년이다.

5.7. 동양을 지키는 방법

유인석이 말하는 동양을 지키는 방법과 앞으로의 외교관계는 이러하다. 유인석은 동양에는 중국, 조선, 일본이 있을 뿐이라고 분명히 규정했으며, 일본은 실속은 없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니 조선에 사죄하고 바른 이치를 따라 스스로 자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스스로 천지의 중심이 되어 일본과 조선과 사이 좋게 지내며, 이러면 동양 삼국이 하나가 되고 강해지며 중국은 세계의 종주국이 되고 서양은 스스로 물러가게 된다(...) 이는 앞에서도 보여진 중국에 대한 맹목적인 존화의식이다. 심지어 유인석은 설사 중국과 조선이 평등해져도 중국은 원래 우리보다 뛰어나니 당연히 중국을 좋아하고 따르는 데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마음가짐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쯤되면 답이 없다.

5.8. 자유평등에 대한 시각

유인석에게 있어 저것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주문답에서 천지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산에도 높은 산과 언덕이 있으며 물에도 하천과 바다가 있으니 당연히 사람에도 평등은 없다고 했다. 그는 평등이라고 하면 질서가 없고 질서가 없으면 어지러워진다고 하였으며 자유라면 사양하지 않고 사양하지 않으면 다투게 되니 오늘날 세계가 어지러운 것도 평등과 자유에서 야기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한다면 사람이 사람이 되는 까닭을 잃은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유인석의 뇌에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사회적 규정은 오로지 상하와 빈천에 따라서 구분된다는 점을 아주 강력히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사람의 인품에는 고하가 있으니, 백성들 중에서 뛰어나지 않은 자는 만 가르쳐 대처방안만 배우게 할 뿐이다. 어찌 선비들처럼 대학을 배워 앎에 이르겠는가? 성품의 고하에 따라 넘을 수 없는 분수가 있고 분수를 잃으면 이치를 잃는다. 아래에 있는 백성은 윗사람의 앎에 따라 인도되고 행할 따름이다. 백성은 소인인데 억지로 군자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한다면 스스로 아는 것으로 생각하여 다 안다고 할테니 도리만 그르친다'라고도 주장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우주문답은 1913년에 지어진 저서다.

6. 결론

결국 헌종 시기에 태어나 나라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았고, 그리고 나름의 지배층에도 속하는 계층이었으면서도 나라가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체의 고찰도 생각도 없었으며, 그저 자기가 설정해놓고있던 복고적인 세계관에만 매료되고 이것만을 지키려 했던 진정한 수구꼴통에 불과한 인물이다. 최익현조차도 이렇게 맹목적인 복고정책을 주장한 인물이 아니었다. 실제로 위정척사파는 일제의 병탄이 코앞에 닥치자 서양과 일본이 몽땅 나쁜놈이다라는 식의 척왜양사상을 어느정도 버리고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는 목표로 어느정도 단결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유인석은 그러한 위정척사까지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된 1910년대 이르러서도 결코 봉건적 복고 세계관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것만이 정의이고 반드시 다시 구현해야 할 사회정의이자,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라는 고집을 꺾지 않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인간은 단순히 시대적 한계에 묶인 '애국자'로서만 생각해야 할지 곰곰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아주 극단적인 예시의 인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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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유인석 진영에서는 김백선이 자기가 이끌던 포수들과 함께 독립을 한다느니, 심지어 김백선이 윗선을 다 엎어버리고 자기가 대장이 되려 한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