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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last modified: 2018-12-31 19:56:21 Contributors

촉한의 역대 황제
촉한 건국 1대 소열제 유비 2대 효회제 유선

  • 본 항목은 삼국지의 인물인 유비(촉한 소열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뜻은 유비/동음이의어 항목 참조.

생몰년도 161년 ~ 223년
재위기간 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 (계사일)
묘호 열조(烈祖)[1]
시호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劉備)
현덕(玄德)
연호 장무(章武)

Contents

1. 개요
2. 이름과 칭호
3. 유비의 생애
3.1. 유년기
3.1.1. 부록: 유비의 계보
3.2. 황건의 난
3.3. 공손찬 휘하
3.4. 서주에서
3.5. 방랑 군주
3.6. 유표 휘하로 가다
3.7. 손오와의 동맹
3.8. 형주의 주인이 되다
3.9. 유비의 입촉
3.10. 한중 공방전
3.11. 이릉대전과 최후
4. 유비의 능력
4.1. 전투력
4.2. 사람을 보는 능력
5. 유비의 인물상
5.1. 조조의 라이벌
5.2. 유비의 매력
6. 황족 논란
6.1.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들 수 있을까?
6.2.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사칭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6.3.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유비에게는 동성의 일족이 존재한다.
6.4. 유표, 유장 등 당대의 유씨 군웅이 유비를 친족으로 보았다.
6.5. 적대 인물들도 혈통을 의심하지 않는다.
7. 기타 매체
8. 기타사항
8.1. 토사구팽 재현?
8.2. 진짜 성격 관련
8.3. 유비의 자식들
8.4. 외아들?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군주로 소설《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아들인 후주 유선의 전 임금이었음으로 선주라고 불린다. 그가 세운 촉한의 경우 원래 당대에는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 때문에 이라고 국가명칭을 공표하였지만, 삼국시대가 끝나고 난 후부터 후대에서 오늘날까지 전한, 후한 구별하듯이 지방에 할거한 한나라라는 뜻에서 촉한이라고 불린다. 역사적으로 일부에서는 계한이라는 이름으로 칭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전한과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이라는 의미로(끝 계(季)) 촉에 정통성을 주는 명명법이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유비의 생김새는 기이하다. 그는 귀가 어깨에 닿고 손이 무릎에 닿는 괴물과 같은 파격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사실 큰 귀나 긴 팔 등등의 설정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외모와 일치한다고 한다. 정사에 따르면 그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수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의명분을 중시하며, 이미지 관리가 뛰어났던 점으로 보아 정치가로서의 롤모델로 평가되어왔다.

그는 한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역사적으로 그가 반동탁 연합군에 가입한 일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영웅기》에는 영제(靈帝, 재위 168~189) 말 유비는 수도에 있다가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에서 무리를 모았다가 영제가 죽자, 유비 또한 군을 모아 동탁(董卓) 토벌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조조와 약간의 친분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연의나 후의 이루어진 창작물에서는 보통 이때부터 조조와 유비가 서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다만 연의에서는 공손찬의 부하로 참전했다고 묘사되지만 공손찬은 동탁 토벌에 참여한 적이 없다.

또한 유비는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며 난세의 온갖 역경을 이겨냈던 인물이다. 짧게 말하면 그는 짬밥이 굵은 사람이었다. 더불어 그는 삼국지시대의 흐름을 이끈 커다란 주요인물들 중 하나이다. 보통 다른 시대라면 조조 같은 강력한 군웅 한명이 가뿐하게 다 쓸어버리고 새 왕조를 여는 왕조 말기의 잠깐동안 벌어진 혼란기정도였을 뿐이었을 삼국시대를 수많은 창작과 민담의 무대로 만든 이는 강대한 조조의 세력에 끝까지 맞선 유비다. 삼국지 이야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황건란때부터 세상에 나선 수많은 군웅 중에서 가장 미약한 기반으로 시작했으나 가장 오랜 세월 역사의 무대에 살아남아서 유일하게 살아 생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만화 창천항로에선 한중 공방전 즈음 해서 조조가 미증유의 군웅할거... 그로부터 어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가. 유비. 유현덕이여, 살아남은건 무명에서 부터 올라온 너 혼자뿐이구나, 유비!! 만 여의 밤을 지나 남은것은 너와 나 단 둘뿐 이라고 참으로 창천항로다운 간지대사를 내뱉는다.

삼국지연의의 유비의 포지션은 몰락한 귀공자다. 그가 가졌던 황족이란 타이틀로 인하여 그가 얻은 실익은 없었고, 또한 삼국시대때는 그보다 더 유력한 황족도 많았다. 연의의 유비의 최고의 무기는 눈물로써 오죽하면 유비냐 울기도 잘한다라거나 유비는 눈물로 천하를 차지했다 말이 있을 정도다. 연의의 이러한 설정 때문에 유비는 흔히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인물로 평가 받고 해석되기도 한다.

2. 이름과 칭호

널리 알려진 표기인 '유비 현덕'이라는 명칭은 본래 일본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며[2], 이를 한국에서 쓰는 건 일본의 영향이다.[3] 연의 본문에서는 유비, 유현덕, 현덕, 유황숙, 한중왕, 소열제 등의 호칭으로 그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자와 이름을 다같이 소개할 때는 성은 유, 이름은 비, 자는 현덕이라고 길게 늘여 쓰거나, 줄여서 부를 때는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지 유비 현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일본에서 '성+명+자'라는 식의 표기가 흔히 통용되는 것("유비 현덕", "조조 맹덕" 등)은 이렇게 쓰는 것이 보통 한자를 2+2로 4자씩 쓰는 일본식 이름과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쪽이 익숙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삼국지 매니아들은 이렇게 부르는 방법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이런 사람들도 삼국지 문화 밖으로만 나가면 중국인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전근대 시기 대부분의 중국인, 한국인은 성명과 자, 혹은 호를 별도로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팬덤 내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관행에 불과한 것.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이나 부모, 조상, 군주 등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쓰지 않음을 예로 여겼고 발음도 하지 않았다. 이를 피휘(避諱)라 부른다. 피휘할 대상은 아니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대놓고 면전에다 이름을 부르면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다고 한다. 자(字)를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부르고 실제로 그렇게 아는 사람이 있는데 자야말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다. 요컨대, 이름名은 부모로부터 받은 귀한 것이므로 굉장히 친밀한 존재(가족 이상 아니 가족중에서도 연장자)나 부를 수 있는 것이고, 字란 스스로 '나를 이렇게 불러주소~'하는 이름이기에 사회생활 할 생각이라면 자,그러니까 유비의 경우 유현덕이라 깍듯이 불러드려야(!) 하는거다. 다만 공식적으로 문서에 기록될 때에는 인물의 이름名을 쓴다. 자字는 아무리 흔히 불리운다해도 비공식적 이름임에 분명하단 인식이다. 고로 벼슬과 자는 같이 쓰지 않는다.

그리고 성+자를 하면 존중의 의미이고 벼슬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성+벼슬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꽤 존중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김사장, 이교수, 박장관 이렇게 부르는 것과 같다.

유비의 다양한 호칭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유비(劉備) : 본명.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고대 중국,한국은 부모같은 사람이 아니면 이름을 부르는건 상당히 무례한 일이며, 평대가 되기에 아군이라면 당연히 쓸 사람이 없고한 명 있긴 하다, 오히려 적이 많이 쓴다. 유비놈이라던지. 그래도 낮춰 불러 귀 큰 놈이라든가 돗자리 짜던 촌놈 하는 식의 욕설로 호칭하는 경우와 비등비등...
  • 현덕(玄德) : 자.
  • 유현덕(劉玄德) : 성+자. 딱히 벼슬이 없을 때는 이 호칭이 자주 쓰였다.
  • 귀 큰 아이 : 적대 군주가 유비를 욕할때 부르는 이름. + 여포가 죽기 직전 부른 이름.. 예를 들어 여포유언이 있다. 그리고 이 회사를 깔때도 쓰인다
    • 자매품으로 당나귀같이 귀가 큰 자(기령), 돗자리나 짜던 촌놈 등이 있다.
  • 유예주(劉豫州 : 도겸, 조조가 상표하여 예주목을 벼슬로 받았을 때의 호칭. 사실 유비가 자주 있던 소패는 예주 패국 패현으로 추정된다.
  • 유황숙(劉皇叔) : 연의에서 헌제와 만난 다음 족보를 뒤져보고 황제의 숙부뻘이라 하여 붙은 호칭. 주로 아군들이 유비의 혈통을 높이려는 뜻에서 자주 쓴다.
  • 유좌장군(劉左將軍) : 헌제를 만나고 좌장군 벼슬을 얻었을 때 불렸을 듯하다. 실제로 '유좌장군'이라기보단 유예주라고 더 불렸을 듯하다. (제갈량이라든가.)
  • 한중왕(漢中王) : 한중왕에 오른 뒤에 쓰인 이름.
  • 선주(先主) : 촉한의 앞선 군주라는 뜻. 정사 삼국지에서 쓰인 호칭이다. 성+선주라고 해서 불린 적이 있는 듯. 나라 시대의 기록 가운데 삼국지를 소재로 한 연극을 보고 한 농부가 의자를 머리에 쓴 다음 "유선주 같지 않나?"면서 장난을 쳤다는 것이 있다.[4] 위의 정통성을 이은 진의 사가인 진수가 촉한을 꽤나 존중했음을 나타내는 묘한 칭호다.
  • 소열제(昭烈帝) : 시호+제(帝)를 붙여서 황제로 취급한 것. 정통성을 인정하여 가장 높이 평가하는 호칭이다.[5] 물론 시호이므로 생전에 저렇게 불린 적은 없다.
    • 소열 : 帝는 떼고 시호만 부르는 명칭. 한국에서 조선시대 왕들을 부를때 보통 시호를 부르듯, 조선시대에 유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소열로 부르는 기록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 음흉한 놈, 사기꾼, 배신의 달인 : 촉까들이 종종 쓰는 호칭. 물론 촉까가 아니어도 유비를 저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개중 음흉한 놈이란 호칭은 그 유서가 깊다.

3. 유비의 생애

3.1. 유년기

전한 경제의 아들인 중산층중산정왕 유승의 먼 후손으로, 황실과 같은 성을 쓰는 집안이다. 황족이라면 황족이지만, 후한은 전한 황실의 자손에게는 황족의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유승의 아들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으로 유정은 제사에 바칠 한무제에게 적게 올렸다가 파면되었다. 거기다 유비는 유정의 직계가 아닌 방계 후손이었던데다가 부친 유홍을 어려서 잃어 어머니와 돗자리를 짜고 신발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유비는 15세에 비로소 학문을 배울 수 있게되었는데,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주전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유비는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공부를 시작한지 몇 년되지 않아 탁군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생각되며, 돌아온 후 그는 무리들을 모은 뒤 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촉서 선주전)

3.1.1. 부록: 유비의 계보

삼국지연의에는 헌제가 종정을 시켜 가져 온 족보를 보고 유비를 황숙으로 인정하는데 사실 유비의 조상은 경제, 유승, 유정, 아버지 유홍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화려한 족보는 엄연히 연의에서 만든 조작이다.[6] 어쨌든 여기서는 김홍신 평역판에 있는 계보를 그대로 옮긴다. 한자는 생략. 혹시 문제가 있다면 원문은 놔두고 각주로 교정바람.

효경황제 → 7남 중산정왕 유승 → 육성정후 유정 → 패후 유앙 → 장후 유록 → 기수후 유연 → 흠양후 유영 → 안국후 유건 → 광릉후 유애 → 교수후 유헌 → 조읍후 유서 → 기양후 유의 → 원택후 유필 → 영천후 유달 → 풍령후 유불의 → 제천후 유혜 → 동군범령 유웅 → 실업자 유홍 → 유비

하지만 위나라의 중신 유엽의 족보가 유비보다는 더욱 황위계승서열이 높은 위치(그러니까 헌제 유협과 촌수상 더 가까운 위치)이기 때문에 유비가 황족인 것은 맞지만 일각에서의 평가가 절하되고 있다. 참고로 유엽은 후한 광무제 유수의 후손으로 유비에 비하면 직계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위치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유비의 혈통이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사람도 많고 음모론이 돌기도 하는데, 후한 때의 족보는 인재 선발을 위한 현량과 제도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조작하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3.2. 황건의 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훗날 오호대장군이 되는 관우, 장비와 만나 거병하게 된다.(도원결의) 이후 유자평이라는 사람이 조정으로부터 황건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유비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부른다. 따라서 유비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그에게 종군한다.

연의에서는 관우, 장비가 이때 유비와 의형제를 맺었다고 전하는데(도원결의) 정사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그들이 의형제를 맺었거나, 혹은 그에 준할만큼 매우 친밀한 관계임은 정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정사 관우전에서는 장료와의 대화에서 관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나는 조공께서 후히 대우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劉將軍-좌장군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함께 죽기로 맹세하는 것은 주로 의형제를 맺을 때 하는 것이고 또한 비시전에서 보면 관우에게 그들의 관계는 군신관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으며, 또한 관우를 죽인 이후 여러 인사들이 유비가 관우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자면 유비와 관우는 실제로 의형제였을 가능성이 높고, 장비의 경우(야사인지 정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입촉 후에 직급 높고 깡도 센 법정에게 하도 갈굼을 당하자 제갈량이 법정에게 편지로 장비는 유비의 의제니까 너무 심하게 갈구지 말아달라고 한 것을 보면 장비 또한 유비와 의형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비는 황건적의 난에서 추정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여러차례 공을 세우고 장거와 장순의 난에서도 공을 세워서 벼슬을 받았지만 그는 처음 받은 중산국 안휘현의 현위(縣尉)[7]직은 독우를 구타하는 사건으로 인해 관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파견 나온 독우는 유비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며 또한 유비는 그가 부임하자마자 자신이 파직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아 원한이 있는 사람이 독우로 파견된 것은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혹은 공을 세워 관리가 된 자들은 중앙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아 독우를 보내 처리했는데, 이를 눈치챈 유비가 선수를 쳤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의견으로는 십상시 놈들이 관직장사를 해야겠는데 유비는 현위를 돈주고 산 게 아니라 장거와 장순의 난을 진압한 군공으로 얻었기 때문에 돈주고 관직을 사서 하는 사람들에 비해 쫓겨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장거와 장순을 상대로 전투하느라 죽을만큼 고생한 게 생각나서 울분을 못참고 독우를 팼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독우가 그를 만나주길 거부하자 유비는 그를 중산국과 탁군의 경계지점까지 끌고 가서 묶은 뒤 매질해 죽이려고 하였는데 독우가 '자기는 단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애원하자 마음을 바꿔 살려주기로 하고 매질만 한 뒤에 인수를 그의 목에 걸고 자신은 관직을 버리고 군 경계선을 넘어 달아난다.

그뒤엔 하진이 파견한 조정 관리의 모병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웠고 이로써 받은 관직인 하밀승은 그가 버렸고 그 뒤 임명된 고당현위직은 받아들인다. 그 뒤 얼마 안 있다 현령으로 승진하였는데 산적(황건적의 잔당으로 추정)의 침략으로 인해 현령직을 버리고 노식 문하에서 안면이 있었던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참고로 유비는 하진이 파견한 조정 관리 모병에 응한 덕에 독우를 구타한 죄를 사면받기도 했다. 하진은 자신의 모병에 응한 자는 지위 고하와 죄질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준다고 선포했고 유비는 관직을 얻으려고 모병에 응한 게 아니라 독우를 팬 혐의를 씻기 위해 모병에 응했다.

3.3. 공손찬 휘하

공손찬 밑에서 그는 주로 원소와 대결할 때 전선을 맡았었고 거듭된 전공으로 그는 평원령으로 승진한 뒤 얼마 안 있어 평원상이 된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었을 땐 원소가 기주목이 되었을 때였는데(공손찬전) 따라서 그는 원소를 최전방에서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조운과 처음 만나지만 당시엔 그냥 면식관계였다.

평원상이었을 땐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이 쌓였는지 북해태수 공융이 황건적의 침입을 받자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도 한다. 유비는 3천 명의 병력을 태사자에게 보내주어 구원을 해 주었다.(태사자전) 연의에서는 유비가 의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직접 구원을 간 것으로 묘사했다.

그 뒤 원술과 원소와 전쟁을 하였고(192년) 이에 조조유표가 원소에게 가담하고 도겸과 공손찬이 원술하고 연합하여 대규모 국지전을 벌였다. 유비는 이때 평원 고당현에서 이들 원소-조조 연합군과 싸웠으며 유비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다.(무제기)

그 다음해에(193년) 조조는 도겸을 공격하였으며 10여 개 성을 점령했고, 또 그 다음해인(194년) 조조의 부친인 조숭이 도겸에게 카운터로 살해된다. 이에 조조는 서주를 공격하여 학살을 벌인다.(서주 대학살 참고) 이에 도겸은 동맹관계였던 공손찬 휘하의 청주자사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전해는 이에 응하여 서주로 내려온다. 유비는 전해와 함께 내려왔다.(선주전)

유비는 조표와 함께 조조와 맞서나 패배한다.(무제기) 그뒤 여포가 조조의 배후를 급습하여 조조가 회군하자[8] 유비는 소패에 그대로 머문다. 도겸은 유비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던지 그에게 4천 병력을 떼어주고 표를 올려 그를 예주자사로 삼는다.(선주전)

3.4. 서주에서

도겸은 그 해에 죽었는데(194년) 이때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전에 유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던 북해상 공융은 유비를 지지했다. 유비는 그로 인해 서주의 주인이 되어 2년간 다스린다.

196년 조조에게 마침내 패배한 여포가 유비에게 의탁한다. 유비는 그를 받아주어 소패에 주둔하게 한 뒤 원술과 싸우러 간다. 그러나 후방에 남겨진 장비가 배반한 여포에게 패하자[9] 유비는 서주로 되돌아가 여포와 일단 화목하였고, 유비군은 과거 자신들이 여포에게 호의로 내주었던 소패에 머무는 신세가 되고 만다.

유비가 소패에 머물자 1만 명의 병력이 유비 휘하에 모였는데 이때 미축이 사재를 털어 도와주었고 또한 유비에게 자신의 여동생(미부인)을 주었다고 한다.(미축전) 이에 유비의 세력이 커진 것을 경계한 여포가 유비를 재차 공격하니 유비는 조조에게로 달아난다.(선주전) 정욱이 유비를 죽일 것을 간언하나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유비를 예주목으로 삼고 패성에 머물게 한다.(무제기)

패성에 머무는 동안 유비는 조조에게 헌제를 잃은 후 막장이 되어 떠돌아다니며 노략질중이던 양봉한섬을 살해한다. 이때 유비는 양봉과 면담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그를 잡아 죽였고 한섬은 양봉을 잃자 병주로 달아나다 장선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된다.(동탁전)[10]

3.5. 방랑 군주

198년 유비군이 여포군의 군마를 약탈했다는 이유를 들어 여포장료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한다.(선주전) 이에 유비는 격파되고 가족을 버리고 달아난다.[11] 조조는 이 사태에 직접 출병하여 여포를 공격하고 유비는 조조군과 함께 종군하여 하비성을 공격한다. 여포는 격파되었고 유비는 처자를 되찾는다. 그 뒤 조조와 함께 허창으로 되돌아온다. 조조는 표를 올려 유비를 좌장군으로 삼고 예우를 매우 두텁게 하였는데 심지어 나갈 땐 유비와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이때 조조는 유비를 장패에게 사신으로 보내어 자신을 배신한 장수들을 인도할 것을 요구하는 임무를 주기도 하였다.(장패전) 그리고 유비와 술자리에서 천하의 영웅은 너와 나밖에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12](선주전) 그러던 중 유비는 헌제를 만나 그의 밀명을 받들게 되고 이에 몰래 동승, 왕자복, 충집, 오자란 등과 조조를 죽일 것을 공모하게 된다.[13] 또한 사냥터에서 조조가 자신의 지지자를 알아보기 위하여 헌제의 활을 사용하는 무례를 범하자 관우가 조조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을 유비가 말리기도 한다.(관우전)

199년 망한 원술원소에게로 가려하자 조조는 유비를 보내 원술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정욱곽가가 유비를 놓아주면 안된다고 진언하였고 이를 들은 조조는 유비를 추격하게 하였으나 막을 수 없었다.[14](정욱전) 유비가 도착하기 전에 원술은 죽어 있었고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하여 죽이고 서주를 되찾는다. 유비가 도착하자 바로 서주의 군현 대다수가 배신하고 유비에게 붙었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원소와 동맹을 맺었고 원소는 유비에게 기병을 보내주었다.(원소전)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으나 유비는 이들을 격파한다.

200년 동승, 왕자복 등과 계획했던 모반사건이 발각되어 동승이 처형된다.(의대조 사건) 조조는 동승의 딸이자 헌제의 후궁인 동귀인(당시 회태 5개월이었다고 한다)를 교살한 뒤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위서에 따르면 유비는 조조의 대장기만 보고 달아났다고 한다.(선주전) 다만 사마광은 "유비가 필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음을 헤아리니, 위서는 매우 터무니없다."라고 평가했다.

유비는 원소의 아들인 청주자사 원담에게 갔는데 원담은 유비에게 무재로 천거받은 적이 있었고, 유비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보기를 이끌고 나와 그를 맞이한다.(선주전) 원소는 자신의 도시 업에서 200리 밖까지 나와 유비를 직접 마중하며 헌제의 밀명에 대해 언급하며 유비를 한의 충신이라 부르며 맞이한다. 또한 원소의 진영에 머무를때 유비는 마침내 조운을 얻는다.

이후 원소와 조조는 관도에서 싸웠는데 유비는 문추와 함께 조조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문추는 목숨을 잃는다. 유비는 그 뒤 여남으로 보내져 유벽과 함께 허도를 공격한다. 그러나 조인이 이끄는 기병에게 패배하고(조인전) 유비는 원소에게로 되돌아 간다.(선주전)

그 뒤 유비는 원소를 설득해 유표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설득한 뒤 다시 여남으로 되돌아 간다. 이번엔 공도와 함께 연합하여 수천의 병력을 구성한다. 조조는 채양을 보내 공격하나 전사하자 조조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패해 유표에게로 달아난다.

3.6. 유표 휘하로 가다

유표에게로 달아난 후 유표는 유비를 조조 세력과의 최전선에 위치한 신야에 주둔하게 하였고 여기서 유비는 제갈량을 얻게 된다.(삼고초려) 이때 조조는 유비가 유표와 함께 배후를 칠까 매우 염려하였는데 곽가는 유비를 쓴다면 유표가 그를 제지하지 못할 것이고 그를 안 쓰면 쓸모없어질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안심시킨다.(곽가전)

그런데 조조가 업성을 공격하고 있을 때 유표의 명령으로 유비가 북침을 한 적이 있었다. 조조는 급히 하후돈이전을 보내 유비를 막게 하였는데 유비는 진채를 불태우고 달아나 하후돈을 복병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였고 그를 박망파에서 격파한다. 이전이 구원병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군은 철수한다.(이전전)

조조가 오환족과 싸울 때 유비는 유표에게 허도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나 유표는 듣지 않는다.

208년 조조는 형주를 공격하였고 때마침 유표가 죽고 유종이 뒤를 잇는다. 유종의 대신들(연의에선 채부인도 추가)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유종은 처음엔 거부한다. 이때 부손이 유비를 언급하며 설득한 과정이 볼만하다.(유표전)

부손은 유종더러 그와 유비가 누가 더 낫냐고 질문하고 유종은 내가 유비보다 못하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부손은 조조를 유비보고 막으라고 해도 힘든데 유종이 감당할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만일 유비가 조조를 막아낸다면 형주는 유종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 대화를 통해 유표의 신하들이 유비에게 가진 경계심을 엿볼 수 있다.

유종은 결국 조조에게 형주를 들어바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이 항복하겠다는 결정이 전선에서 조조와 대치하고 있던 유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조과 남하하여 완성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유비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싸울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5] 유비는 나중에야 유종이 항복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따라서 사람을 유종에게 보내 소문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유종은 항복한 사실을 송충을 통해 전했고 유비는 이런 소식에 크게 놀랐고 격분했는데 그 이유는 조조가 이미 코앞에 있고 조조에 항복한 형주와 조조 본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유비군은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분노하여 송충을 겨누며 '널 죽여야 마땅하나 널 죽이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외치며 부하들과 작전을 논의한다. 이들은 남쪽으로 가 형주의 관원들과 군사를 사로잡아 강릉으로 데려가 농성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유비는 자신을 받아주었던 유표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다하여 거절한다.

최전방에서 고립된 유비는 달아나야 했는데 조조는 유비가 강릉을 점거하여 농성하는 것을 우려하여 기병 5천을 뽑아 호표기라 하여 하루만에 300리(한나라 시대 1리 = 415.8m 따라서 125km에 해당)를 달려 장판파까지 추격해 이르렀다. 이 때 자발적으로 유비를 따라가는 백성들이 10만 명에 이르렀는데 신하들이 버리고 도망가자 하였으나 유비는 이들을 딱하게 여겨 버리고 행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한다[16]. 결국 이 기병의 추격이 이르자 유비는 자신의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호표기의 대장인 조순은 이런 과정에서 유비의 두 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조는 강릉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조인전)

이 과정에서 유비의 가족은 흩어졌고 조운은 필마단기로 유비의 부인 감부인과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온다.왜 구했니 조운아!!장비장판파에서 만인지적의 위세로 조조의 대군을 막아낸다. 가족까지 잃은 유비는 필사적으로 강을 따라 도망가다 관우의 배를 만났으므로 한수를 건넌뒤 1만여 병력을 가진 강하태수 유기와 만난 뒤 하구에 도착한다.

장판에서 백성들을 데리고 떠난 것을 보고 "백성을 방패로 삼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예로 창천항로가후. 진삼국무쌍에서 위군 루트로 장판파를 진행할 경우 이런 뉘앙스의 대사가 나온다.). 혹은 책임지지도 못할 거 뭐하러 데려갔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데리고간 게 아니라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갔다는 게 더 정확하다. 당장 원서인 정사 삼국지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가재를 정리해 따라붙었다고 적혀 있다.

애초에 유비는 10만이나 되는 백성들을 억지로 끌고갈 병력도, 식량도 없었고, 행군엔 짐덩어리나 마찬가지인 백성들이 따라오지 않는게 유비군에겐 훨씬 더 유리했다. 거기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추격군이 군과 백성을 가리지않고 밟아죽여가며 밤낮으로 쫒아오는 급박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엉겨붙어오는 백성들을 내팽겨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백성을 방패로 삼았다는게 말이 안되는 것이, 그 백성들 속에 유비 자신의 가족들이 있었다. 방패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가족들만큼은 먼저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유비는 자신의 가족들도 백성들과 함께 움직이게 했고, 결국 부인이 죽고 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는 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덕분에 조운의 전설이 탄생했다 괜히 습착지가 높이 평가한 게 아니다. 백성들이 따라간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지만, 정사에서 조조가 서주 대학살을 일으키고 관도대전에서 포로들을 파묻어버렸다는 걸 생각하면 조조의 악명이 퍼졌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조조는 적대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파괴하려는 목적인지 적이 지배하는 백성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하는 일이 많았는데, 서주 대학살 이외에도 원소 치하에서 살던 업의 백성들이 강제 이주를 당하고 가산을 빼앗기는 등, 백성들이 가혹한 대우를 받은 기록이 여러 번 있다.

사실 사서들을 봐도 유비가 "처자"를 버린 기록은 있어도 "백성"마저 저버렸다는 구절은 없다. 심지어 무제기를 보면 유비가 "부하"마저 저버렸다는 기록이 있어도 백성을 버린건 없다. 그렇게 볼 때 추격을 따돌리고 어느 정도 수습해 남은 백성들을 어떻게든 데리고 간 모양이다. 애시당초 유비도 마냥 도망가기 보단 장비를 보내 추격군을 막게하기도 했고.

3.7. 손오와의 동맹

이때 노숙은 형주에 있었는데 형주에 온 이유는 사망한 유표의 조문을 핑계로 형주의 내부 사정을 염탐한 뒤 공격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였다.(노숙전) 이때는 조조가 공격하기 이전이었으므로 혹시 형주에 내분이 있다면 손권이 끼어들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한 것이었다. 이런 말을 손권에게 하면서 노숙이 유비를 평하는 것이 흥미롭다. 노숙은 유비를 일컬어

“유비와 같은 천하의 영웅이 조조와 불화가 있어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그의 재능을 질시하여, 중용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었다. 하북에서부터 항상 패배해서 쫒겨다니던 유비가 저멀리 중국의 남쪽 끝 오월에 있던 노숙에게까지 천하의 영웅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인데, 이는 유비에 대한 동시대 인물들의 시선을 알 수 있게 해준다.(노숙전)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숙은 돌아가는 길에 하구에 있는[17] 유비를 방문한다. 노숙은 손권과 힘을 합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유비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이때 손권은 아직 조조와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유비와 손잡고 조조와 대항한다는 것은 노숙 혼자만의 구상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유비는 노숙을 도와 손권을 설득할 인물로 제갈량을 선택해 노숙과 함께 오로 가게한다.(노숙전)

노숙이 되돌아간 뒤 오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벌였는데 유종의 대신들처럼 손권의 대신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손권은 불쾌해하였지만 신하 모두의 생각이었으므로 뭐라하지 못했다. 그가 잠시 옷을 갈아입으려고 몸을 일으키자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노숙이 뒤를 따라갔고 손권이 노숙에게 의견을 묻자 노숙은 조조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노숙전)

그 뒤 제갈량도 손권과 면담하게 되는데 그에게 `조조는 강성하니 항복할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자 손권은 `그럼 유비는 왜 항복을 안하는가?'라고 되물었고 제갈량은 `유비는 뛰어난 영웅인데 어찌 남의 밑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18]'라고 말을 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하였고 조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제갈량전)

이때 주전파인 주유는 파양에 있었으므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노숙은 주유를 수도로 불러들였고 대신들과의 회의석상에서 주유는 이름난 무장답게 조조군의 약점을 지적하고(먼거리를 와서 싸움, 유리하지 않은 지형에서 싸움, 단합이 안 됨, 겨울이라 말먹이 등 식량 조달에 곤란을 겪음) 오군의 강점을 지적하면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며 항복론자를 제압한다.(주유전)

손권은 이에 주유, 정보에게 총 3만의 병력을 지휘하게 하고 노숙과 제갈량을 동행하게 한다. 유비는 주유와 만났고 유비에겐 2만여 병력이 있었으므로 이들과 병력을 합쳐 총 5만의 병력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의 수십만[19] 대군과 싸운다.(선주전) (적벽대전)

적벽에서 화공으로 대승을 한 뒤 주유와 유비는 힘을 합쳐 조조군을 맹추격한다. 조조는 화용도에서 진창을 풀로 메꿔가면서 길을 만들어 간신히 탈출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한다. 주력은 대부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피해를 작게 보는 시각도 있긴 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무제기만을 본 서술. 조조는 이후 몇 년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며, 남하 당시 획득한 형주 땅에서 조인이 1년여를 버티는데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해 결국 상당수를 상실하고 만다. 남하하면서 획득했던 형주병들이 전부 흩어져버려 유비, 손권의 전력기반이 된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소설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그냥 살려보내준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소설에만 나오는 완전한 허구이다. 화용도 항목 참조.

3.8. 형주의 주인이 되다

이 후 조조군과 싸워 유비는 남군과 형남4군을 얻는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비가 아예 땅을 빌리지 않았다, 형남4군도 손권한테 빌린 것이다 등 여러가지 설이 있고 꽤나 경과가 복잡하기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형주 공방전의 형주 정복 부분 참고.

그 뒤 손권이 촉을 취하려고 하였고 주유는 촉 정벌을 하기위해 강릉을 떠나 파구까지 가다가 도중에 죽었고 손유를 보내 익주를 취하려고 했으나, 유비는 친족인 유장을 공격할 수 없는 명분을 들어 결사반대해 이를 좌절시킨다.

3.9. 유비의 입촉

211년 장송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공격해 한중을 합병하자고 간언한다. 유장은 이를 옳게 생각하고 장송을 유비에게 사신으로 보낸다. 그런데 앞서 부손은 유종에게 유비는 유종이 부하로 다룰만한 자가 아니며 조조를 막아내면 형주는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간언한 적이 있다.

이는 유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유장은 유비를 다룰 수 없을 뿐더러 유비가 장로를 합병하고 조조를 막는다면 촉은 유장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손이 예측한 식으로 장송이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다. 장송은 아예 처음부터 유비를 불러들여 그를 촉의 주인으로 삼을 속셈으로 유장에게 이런 간언을 한 것 같다. 이것은 법정전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익주별가 장송(張松)이 법정과 서로 친했는데 유장이 함께 큰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며 늘 남몰래 탄식했다.”

라고 말한 것을 보아 장송과 법정은 유장에 대해 그다지 충성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장송이 유비를 만난 뒤 보낸 사신은 다름아닌 법정이었다.

유비가 익주에 도착했을 때 유장이 군사를 늘려주었고 그 결과 그 병사는 3만이 되었다고 한다.[20] 유비는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선주전) 이때 유비가 유장과 만난 자리에서 장유라는 사람이 종사였는데 유비는 장유가 수염이 많은 것을 보고

"과거 내가 탁현에 살고 있을 때 모(毛)성을 가진자가 특히 많아 동서남북 모두 라는 집이 많았었소. 탁현의 현령이 수많은 털이 탁을 에워싸고 사는구나!라고 했소."

라며 놀린다.

그러자 장유가 대답을 하는데

"과거에 상당군 노현의 장이 되었다가 탁현의 령으로 승진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당시 어떤 사람이 편지를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노현이라고 기록하면 탁현을 무시한는 일이 되고, 탁현이라고 기록하면 노현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노탁군으로 쓴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위 말은 유비가 탁군 출신인 점을 들어 노탁군(수염이 없는 군주)이라는 것을 은근히 비꼰 것이었다. 유비는 이를 잊지 않고 있다가 훗날 장유가 220년 조씨의 천하로 바뀌고 유비가 222년과 223년 사이에 익주를 잃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그를 참수한다. 그런데 실제로 220년 조비가 찬탈하고 223년 유비가 사망하는 것을 보면 그 예언이 맞은 셈이다.

212년에 장송(자교)의 내통혐의가 발각되어 장송이 참수당하자 유비는 유장과 전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13년(자치통감에서는 214년)엔 유비군이 낙성을 포위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 유비의 군사(軍師) 봉추(鳳雛) 방통(龐統)이 낙성 공격을 지휘하다 유시(어지러이 날아오는 화살, 눈 먼 화살)에 맞아 유비군 진중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이후 유비는 낙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나서 성도를 포위할 무렵에 유비의 부수관 탈취와 동시에 형주에서 출병하여 익주 각지를 평정 중이었던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유비 본군(3만)과 합류한다. 214년엔 오호대장군(관장마황조)의 세 번째 장수인 서량의 마초가 서촉으로 도망 와 유비군에 합류하였고 뒤이어 유장이 항복하게 된다.

214년 유비는 인사를 골고루 배치하는데 그에게 원한이 있는 자이건 혹은 유장과 친척관계인 자건 간에 인재를 기용했으며 대체로 유장에게 소외된 인물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혹여 반대파의 구심점이 될 지 모를 유장은 한지로 보내버린다.

유비는 익주에 입성한 뒤 토목사업을 벌인 것 같은데 진군이 "이전에 유비가 성도로부터 백수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많이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비하였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진군전) 이 때문인지 조조가 한중으로 진군해올 무렵까지 '하루 수십 번의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같은 214년, 헌제의 아내인 복 황후가 조조에 의해 살해당했다. 조조가 212년에 위공이 되어 황제인 헌제를 끌어내리고 마음대로 국상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복 황후와 그녀의 외척세력이 조조를 제거하여 황권을 다시 회복하려 하였고, 이에 조조는 화흠을 보내 복 황후를 죽이고 복 황후 소생의 두 황자도 독살하였다.[21] 외척들과 황제 쪽에 붙어있던 인사 200여명을 죽인 후 조조는 자신의 딸 조절을 헌제의 새 황후로 삼게 했다. 동귀인 이후 또다시 벌어진 이러한 사태에 유비는 큰 분노를 내보였다.

215년엔 손권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 이때 사신으로는 제갈근이 파견되었고 유비는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전부 돌려주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오주전)

손권은 여몽을 보내 장사, 영릉, 계양을 빼앗았는데 유비는 이에 대응하여 군사 5만을 이끌고 직접 유비가 형주에 있었을 때 근거지로 삼았던 공안으로 내려왔고 관우를 익양으로 파견하는 등 싸움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선주전)

그런데 215년 그해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촉과 오는 위나라의 확장에 크게 긴장하게 된다. 이에 손유 양측은 다시 만나 합의를 거쳐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자신은 남군, 영릉, 무릉을 갖기로 합의한 후 조약을 맺고 일을 매듭짓는다. 즉 이 시점에서 형주 문제는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3.10. 한중 공방전

유비 생애 최고의 리즈시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가 조조를 공격하고...

218년엔 유비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위나라에선 김의가 위의 수도인 허창에서 길본, 경기, 위황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헌제를 취한 뒤 유비를 불러들일 것을 계획하나 진압된다.(무제기)

219년엔 유비군이 전투에서 대승해 위의 장군 묘재 하후연이 (황충 또는 유비에 의해) 참수된다. 이에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는 직접 군을 이끌고 지형을 기반해 맞서 조조에게서 한중을 수비한다. 그리고 헌제를 협박해 위왕의 위를 받고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한 조조에 맞서 한중왕(漢中王)을 칭하니 마침내 유비는 천하삼분을 완료한다. 한중왕이라는 칭호가 가지는 의미는 항목을 참조.

하지만 219년 관우형주 공방전에서 북진하던 중 서황에게 패배하고, 이후 위와 밀약을 맺고 형주의 남군을 기습 침공한 손권의 오나라군에게 형주를 잃고 본인은 참수당하는 일이 생긴다. 관우의 죽음에 슬퍼하며 복수를 준비하던 장비 역시 부하인 장달과 범강에게 살해당한다. 유비는 크게 놀라 격분하며 울었다.(도원종언)

220년엔 조조의 아들 조비가 마침내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스스로 위나라의 황제를 칭하게되고 유비는 조비에 대항하여 221년에 한나라 황제를 칭하게 된다. 그리고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선포하였으며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물론 헌제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당대의 유비가 가진 야심을 부정하기 힘든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물론 선양 직후에는 유비와 그의 수하들이 정말로 헌제가 살해됐다고 오해했을 수 있지만 시간이 한참이 지난 나중에도 계속 착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헌제가 안락공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여생을 보냈다는 사실은 위나라의 국가 기밀도 아니었다. 따라서 촉나라 수뇌부가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헌제가 선양을 한 것이 적법하다고 인정한다면 촉은 절대로 '한'의 정통 계승자가 될 수 없고, 선양이 사실상 강압적이었으니 선양이 무효라고 간주할 경우 유비 역시 황제(헌제)의 자리를 찬탈한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비는 전자의 논리대로라면 조비를 새 황제로 인정하고 모시는 게 옳고물론 현실성은 없지만... 후자의 논리대로라면 황제를 칭하지 않은 채로 "역적 조비 물러가라~"라고 헌제 복위 운동을 벌이는 게 옳았다. 정 유비가 황제가 돼야겠다면, 헌제를 태상황제로 선포하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촉한에서 헌제는 영원히 조비한테 살해당한 사람으로 공표돼 있어야 했다(...). 그래서 헌제는 이래저래 산송장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물론 유비가 헌제의 유폐 사실을 알리고 헌제의 탈출이나 복위 등을 추진했다면 헌제의 목숨이 더 위험해졌을 것이므로, 현실적으로는 당시 촉나라가 취한 스탠스가 합리적이었다고 쉴드칠 여지도 있긴 하다. 실제로 조조 생전에도 허창의 반 조조세력이 헌제를 옹위하고 익주를 차지한 유비와 내통하려던 사건이 있었고 이때 수많은 이들이 살해당한걸 생각한다면... 정치적으로 보아도 한번 헌제가 죽었기에 황제를 칭했다가 이후에 황제가 살아있으니 그 스탠스를 수정한다는 것도 정통성에 흠집을 줄 수 있는 부분이고.

여담으로 노환으로 죽은 조조는 형식적으로나마 왕의 직위였고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지만 찬탈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의 신하로 죽은 조조와는 달리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둘만의 관계로 볼 때 유비가 역적승리자가 된 것이라는 시선이 있다. 물론 조비가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어 조조을 무제로 추존하긴 했지만 조조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

3.11. 이릉대전과 최후

222년엔 유비는 군사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한다.[22]

형주를 다스렸던 유표와 그의 장남 유기의 뒤를 이은 유비가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견때부터 오라면 이를 갈던 형주 각지에서는 이에 크게 호응한다. 또한 형남의 토착민족이던 무릉만족의 왕 사마가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유비에게 종군한다.[23] 유비는 이릉에서 육손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유비는 7백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를 엮은 뒤 군을 주둔시킨다.(문제기)

당시 위의 조비는 이 소식을 듣고 "유비는 병법을 모르는군. 7백 리에 이르는 군영을 세워 적을 막겠단 건가. 전쟁에 관한 손권의 상주가 곧 도착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릉대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혜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 내용 참고.

사실 4만의 병력이 대략 300킬로미터에 이를 정도의 길이에 주둔하는 것은 지나치게 넓게 퍼진 것이며 또한 나무 울타리를 엮은 것은 화공에 노출시킨 것으로 어느 정도는 조비가 맞는 소리를 한 것 같다. 고원, 습지, 험한 곳을 감싸고 진영을 구축했다는 말은 이 지형의 외각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것인데 그 말은 곧 배후에 험지와 고원 습지를 두고 진지를 구축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병력의 이동로는 한정되어 신속한 기동은 제약된다.

이렇게 기동이 제약될 경우 각 진영에 주둔하는 병력이 서로 지원하기 어렵고 따라서 적의 각개격파에 취약해지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육손은 각개격파로 나가 위의 약점을 정확히 찔렀다.

육손전에 보면

"화공을 먼저 펼친 다음 동시에 함께 공격해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두로와 유녕은 달아날 곳이 없어 항복하였다. 그의 배, 병기, 수군, 보병의 물자는 한번에 거의 소실되었다"

라는 언급을 토대로 유비가 패배당했을 때 각개격파된 전황임을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역전의 용사인 유비가 이러한 진을 구축한 것은 납득이 잘 안 가는데 연의에선 유비가 무더위를 피하게 하기 위해 병사들을 옮겼다고 한다. 하지만 단지 이러한 이유만으로 이러한 각개격파의 위험이 높은 배치를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육손전의 다음 구절이 정사에서의 유비의 배치 의도를 추측할 수 있게 도와준다.

"신은 처음에는 그가 바다와 육지로 함께 진출할 것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주전에 보면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水軍)은 이릉(夷陵-남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다."

이를 미루어 추측해 본다면 유비는 에 비해 빈약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릉은 장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유비는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여 육군이 수군을 최대한 지원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유비군이 강가에 배치되어있는 정황은 육손이 공격할 때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을 놓았다라고 하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대치되는 주장도 있다. 지도가 없는데 여기를 참고. 이 글대로라면 유비군에겐 어복과 자귀에 이르는 보급로가 구축되어 있는데 이 보급로는 육손이 산길을 타고 급습하거나 장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등의 기습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때문에 유비가 길게 병력을 포진시켜 보급로를 수비하는 것은 조비의 말과는 달리 지극히 상식적인 배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넓게 퍼져 배치한 것이 패배의 요인이 아니고 다만 유비가 본영이 화공에 쉽게 노출되는 장소에 주둔한 것이 문제라는 설명이다.

어쨌건 육손은 '조조조차 두려워하는 적'이라고 말했으며 '실로 강한 적수가 우리 경내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비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며 조조도 두려워하는 영웅이다. 오늘 그런 자가 우리의 국경을 위협하는데 국가의 은혜를 입은 장수들이 화목하긴커녕 서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라고 한 것으로, 휘하 장수들을 질타하고 적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는 목적이 강하기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황권의 조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군대를 움직인 유비의 행동으로 미뤄보면 적에 대한 경계심 강화용일 뿐이고 이후 이릉대전 전개와 그 후일담을 생각하면 육손은 유비의 군재를 높게 보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유비가 오반을 시켜 소수의 병력을 보내 오군을 낚으려고 했는데, 이걸 보고 한당 등이 오반을 격파해서 아군의 사기를 올려야 한다고 간언하자, 육손은 반드시 음흉한 계책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거부했고, 결국 유인책이 실패하자 유비는 8천 명이나 되는 복병을 이끌고 철수하는 모습을 보여 오나라 장수들은 육손의 선견지명에 놀랐다.

이후, 육손이 손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유비는 통상의 이치를 어기고 자신의 집을 지키지 않아 과감히 군대를 보냈는데 앞뒤로 군사의 운용을 살펴보면 실패는 많고 성공은 적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臣)은 처음에 유비가 바다와 육지로 함께 진출할 것을 걱정했습니다만, 오늘날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드니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폐하(손권)께서는 안심하십시오."고 했다.

다만 이 편지의 경우 육손이 손권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실수가 아님에도 손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수군에서 과연 촉한군이 오군을 이길 수 있을까? 장비마저 죽은 상황에서 말이다. 그걸 황권이 알았기에 유비에게 자신이 수군쪽을 보좌해주겠다고 했는데 유비는 제맘대로 수군을 움직여 궤멸적 패배를 당하고 황권은 고립돼 버렸다. 결국 황권은 목숨이라도 부지해야겠으니까 어쩔 수 없이 위나라로 눈물을 머금고 귀순했다.

결국 유비는 이릉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다. 애초에 수군을 황권에게 일임했더라면 육군은 그지경이 될 지언정 수군의 피해는 최소화되었겠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아 수군도 똑같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장수들 앞에서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주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셈인데, 말의 성격이나 앞 뒤 상황을 살펴보면, 오히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쪽이 유비에 대한 육손의 생각에 가까울 것이다, 어쨌거나 실제 이릉대전 초반부는 오의 장군들이 연이어 깨지면서 손오에 위기가 찾아 온 것은 사실이므로 결국 유비의 군재는 보통 범용한 장수보다는 낫지만 육손이나 조조같은 당대의 빼어난 군재를 가진 이들보다는 못 하다는것이 사실일것이다.

어쨌든 유비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수습했다고 한다. 물론 위나라 때문에 육손이 깊게 추격하지 않은 것도 한 몫 하긴 했다. 이후 유비는 군사를 수습해서 백제성에 주둔한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223년 백제성에서 죽는다. 관우장비의 죽음과 형주 상실, 이릉 전투 패배 등 잇따른 악재로 인한 홧병이란 설이 있다.

유비가 죽기 전

"짐이 처음에는 병이 다만 하리(下痢-이질)였는데 그 뒤 잡다한 병으로 옮겨 거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라는 것을 언급하는데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원수를 갚기는커녕 일생일대의 대패를 당한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게 아닐까. 손권이 유비가 백제성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거나, 조비 침공시 육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봤을 때 어쩌면 재차 오를 침공할 의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육손은 이를 비웃었다.

223년 유비는 백제성에서 죽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유비는 후사를 제갈량이엄에게 부탁하는데 그로 인해 이엄은 유비 사후 제갈량에 이어 2인자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된다. 제갈량의 기산 정벌 때 이엄은 수송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는 유비가 싸울 땐 제갈량이 담당하였고 이엄이 면직된 뒤엔 제갈량의 후계자인 동윤이 맡은 매우 중대한 책무였다. 또한 이엄전을 보면 제갈량이 기산에 출정하자 승상부의 일까지 맡았다고 하는데 이는 내정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유비의 탁고대신이라는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볼 수 있는 예이다.

4. 유비의 능력

4.1. 전투력

연의의 유비는 그 조상인 유방에게 비롯된 전형적인 중국식 영웅 - 무능하지만 덕이 많고 주변에 뛰어난 인물이 많은 - 이다.

반면에, 정사(正史)의 유비는 덕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여러번 굵직한 전적을 올렸다. 공손찬 밑에서 원소를 막는 역할을 하여 공을 세워 승진을 한 사실이나, 도겸이 유비를 소패에 주둔시켰던 것, 여포가 그를 소패에 주둔시켰던 이유, 조조가 유비를 여포쪽에 붙여두었던 이유, 원소가 조조의 후방을 교란시키도록 유비를 파견했던 것, 유표가 신야를 그에게 맡긴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더불어 박망에서 하후돈을 격파한 것도 조운이 아니라 유비의 용병술이였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장(劉璋)이 보낸 유괴(劉璝), 장임(張任) 그리고 등현(鄧賢) 등을 모조리 격파했다. 후에 유장은 이엄(李嚴)을 보냈지만 이엄마저 유비에게 항복했다.[24] 그리고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지키는 낙성을 공격하는데 1년여 간을 보냈다.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상황에서 세를 키웠다'는 식으로 이 일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유장의 군사적 성과와 유비의 반란 이후 대처 방식은 대체로 무능하거나 적절치 않으며, 유비가 처음 입촉할 당시부터 유장 세력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유비에게 호응하는 세력이 있었고, 유장 세력을 바깥에서부터 군사적으로 공격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촉의 내부에서 유장의 지원금을 미끼삼아 적극적으로 유장 휘하 세력을 포섭한 것으로 볼 때, 이는 대체로 군사적 능력을 운운하기 이전에 도리어 자신이 쌓아 놓은 명분과 신의를 이용했던 유비의 정치적 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

실제로 본격적으로 유장을 공격하기 시작한 유비는 성도로 쾌진격하기보단 군현등을 장악하며 호족들을 포섭했으며 이는 조운, 장비, 제갈량등이 지원을 오는 것이 쉬워지는 잇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벽 이후 손가와 유비 세력은 대놓고 촉을 '언제나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또 취해야 하는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유장 세력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평가가 이러했던 것이다.

이릉대전에서는 오나라보다 정황상 열세의 상태에서 오나라에 적대적이었던 이민족들을 포섭하였고 이이, 유아, 손환를 격파했고 주연송겸의 방어선을 뚫지못했다. 이후 육손은 유비를 도발했다. 육손에게 패한 방릉 땅의 호족 문포와 등개를 유비는 아끼면서 장군으로 임명하였는데, 육손의 투항 권유에 넘어간 문포가 재차 오나라로 도주함에 따라 유비의 꼴만 우습게 되어 버렸다. 또한 유비는 황권의 조언을 듣지않은 채 강공으로만 일관하다가 황권을 포로로 잡히게 만들었다.

유비는 조조원소 등과 달리 체계화된 전술을 심도있게 배울 기회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25] 원술과 대치할 때도 유비는 한달 넘게 원술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여포(呂布)의 뒷치기 때문에 본거지를 잃게 되어 달아나야 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싸우기 힘들다. 조조가 서주 공략 중 황급히 연주로 돌아가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단순히 예상하지 못한 뒷치기인 것도 있지만 상대가 여포라는 점도 한몫했다.

한중 공방전에서는 하후연이 죽은 뒤, 조조가 직접 나섰으나 이미 요충지를 다 차지한 상태였던 유비는 험한 땅에서 지키며 교전에 응하지않는 식으로 서서히 조조에게 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도록 했으며 조조는 결국 한중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유비의 머리에서 나온게 아니라 법정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 책략들 중 적합한 것을 선별하여 채택하는 것도 총사령관의 능력이다. 이건 조조 역시 마찬가지.

반면, 법정(法正)전에서는 세(勢)가 불리하여 오히려 유비가 있는 곳까지 화살이 날아올 정도였음을 볼 때 대군을 이끌고 온 조조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던 것 같다. 이러한 점은 교전에 응하지 않으며 수비로 일관했다는 무제기의 기록과는 충돌한다. 정사 삼국지 조상(曹爽)전은, "과거에 조조가 두 번 한중에 들어갈때 대패할 뻔 했었다"라며 그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부자에서 조전은 유비의 용병술이 서툴다고 평가했고, 다른 선비인 부간은 유비의 용병술에 대한 조전의 평가는 부정하지 않되, 유비가 너그럽고 법도가 있어 능히 사람을 죽도록 싸우게 할 수 있다고 평했으며, 휘하의 뛰어난 인물로 관우와 장비, 그리고 제갈량을 들어 유비의 뛰어난 인용술을 강조했다.

위략(魏略)에서는 유비가 유대(劉垈)왕충(王忠)에게 조조가 직접 오면 모를까, 니들같은 잡것들은 내 상대가 안돼.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근데 그 이후 정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와버렸다…. 그리고 유비는 얼마나 황망했던지 먼발치서 조조의 깃발만 보고도 혼자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유비가 격파한 장군들은 유대, 왕충, 채양, 하후돈 등인데 이들은 군재(軍材)가 있었다는 기록[26]이 특별히 없었으니 양민학살이었다거나 작은 전투에 강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유비 생전에 있었던 모든 크고 작은 전역들은 모두 유비 주도로 그의 지휘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27]

조조에게 약했다곤 하지만 조조는 물량에서 언제나 유비보다 앞서 있었고 그도 자기보다 세가 강한 원소 등을 깨부순 먼치킨임을 고려해야 한다. 따지고보면 조조도 도겸을 이기지 못해(조조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조조가 서주로 쳐들어간 적이 있다.) 홧김에 백성을 학살한 적이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산양공제기에서는 적벽에서 조조의 군선을 불태운것을 유비라고 기록하고 있고 화용도에서 조조가 달아나며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구나라고 말했다고 적혀있다. 그 유비한테 패해서 도망가는 마당에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곤란하고 조조가 자신의 라이벌로써 유비를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오주전에서는 유비가 먼저 공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뒤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하지만 둘다 조조를 격파한 걸 유비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유비가 조조에 맞서 대등하게 싸운 건 적벽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이 적벽의 싸움이 삼국지연의에선 유비가 한 거라곤 조조를 추격한 것뿐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

다른 건 몰라도 유비가 패배를 수습하는 능력 하나는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흩어졌던 사병들이 다시 모였다는 기록이 여러번 보이며, 패배해도 손놔야 할 정도까지 간 적은 거의 없다. 이릉에서의 대패 이후에도 군사를 두 번이나 수습했다.[28]그러니까 전법을 힐링으로 붙인게 신의 한수 조조가 자주 친정(親征)을 나가고 그의 부하들도 대부분 조조의 지휘 아래가 아니라면 수비 위주로 나가는 등 위나라의 전략의 기본은 조조를 중심으로 돌아간 데 비해, 유비군의 경우는 유비가 총지휘를 맡으나 어느 정도 장수들의 재량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조조군의 장수들이 조조의 말이라면, 유비군의 장수들은 어느 정도 재량권이 있다랄까.

천하삼분책으로 유명한 융중대의 북벌 계획은 유비와 서북지역을 공략하고 관우가 형주에서 북상해 양쪽에서 협공해 들어가는 것을 골자로 하며 이때 관우에게 형주의 군권을 따로 내줬다. 위나 오에서 이런 경우는 사마씨 일족, 주유, 육손 등등 드문 사례다. 그리고 위나 오는 창업자가 알아서 군권을 갖다줬다기보다 이들이 군권을 쟁취한 것에 가까웠다.

유비가 왜 이렇게 초반에 많이 패배를 했는가는 그의 초반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손견처럼 제대로 된 군력을 보유한 것도 아니였고[29]. 이후에도 볼수 있듯이 유비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패배 수습은 뛰어나고 웬만한 상대에겐 크게 당하지 않는 정도지만 상대가 강하면 와장창(...) 패배하는 정도의 역량이었기에 교육과 경험의 부족은 더더욱 쓰라렸을 것이다.

거기다가 기껏 처음 얻은 영지인 서주도 진군의 말에 따르면 빼앗기기 쉬운 땅이었던데다가[30](이는 훗날 여몽도 같은 말을 한다.) 여포원술과의 싸움에 자기 기반을 다 잃었고, 겨우 다시 자기 기반을 찾으려하니 조조에게 쫓기고, 기껏 의탁한 원소는 조조에게 개발살나고…. 거기에 군력이 너무 모자라 유표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았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초반 자원도 안 좋은데 다른 세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적벽대전 이후에야 겨우 숨쉴 틈이 생겨 확장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기적인 것이 유비의 삶 초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 불려가서 싸워준 덕분에 사실 용병대 대장같은 인물이 아니었나하는 썰도 있다.

종합하자면 연의에서 묘사하는 정도로 무능하진 않고 그렇다고 최상급의 지휘관은 아니지만 웬만한 상대에겐 지지 않거나 이길 수 있는 그럭저럭 무난한 능력의 지휘관이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유비의 진정한 능력은 전투력이 아니다.

위빠, 정사빠 등에게 열심히 까이는 것과 반대로 유비 패왕설이라고 당시 유비의 패기가 엄청났음을 추측하는 설이 있다

4.2. 사람을 보는 능력

하지만 유비의 진정한 능력이라면 역시 용인술과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고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터득한 용인술은 인재의 장단점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적절한 기용으로 유비를 삼국시대의 주연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고 나아가 백성의 마음까지 가져 그를 영원한 민중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단순히 인재를 아끼는 것과는 다르다. 인재를 아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대로 쓰는 건 아무나 못 한다.

이게 유비, 조조 두 굇수와 손권의 가장 큰 차이점.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손권은 인재를 아끼긴 했지만 인재를 쓰는 방식에선 아쉬운 점이 많았다. 물론 손권은 두 사람과는 달리 후계자였기 때문[31]에 어느 정도 페널티가 심하게 들어간 것도 있다.

또한 유비의 집단은 최강자인 조조에게 자주 패배해 도망가는 와해당하기 딱 좋은 위치의 집단이었다. 이런 집단을 잘 구슬려서 데리고 다닌 걸 보면 유비의 지휘력과 통솔력은 훌륭했던 모양이다. 지휘/통솔력보다는 "인망"이 좋아서 사람들이 거기에 감화되어 따라다녔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32] 장수들은 모를까 대부분의 백성들은 유비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니.

유비는 관우, 장비, 조운에 비해 짬밥에서 밀리는 장수인 위연의 재능을 파악하고 과감하게 한중태수로 임명하는 결단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촉한의 문무백관들이 한중태수의 자리에 장비가 임명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비는 위연을 한중태수로 임명하며 어떻게 일 처리를 할지를 위연에게 물었고 이에 위연은 매우 유창하게 답변하여 좌중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반역자의 상(相)이라며 위연을 죽이려 했는데 유비가 "그러면 다른 항복한 장수들이 불안해한다"며 반대했다고 서술하여 그의 인망을 더욱 높였다.

양의가 머리가 좋길래 중용해봤더니 시종일관 유파와 화합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이를 지켜본 유비는 분란을 심하게 조장할 것을 우려하여 홍농태수라는 껍데기뿐인 직책으로 좌천시킨다. 반면 자신을 그렇게나 싫어하는 유파는 어떻게든 정중히 모셔와서 자신과 일을 함께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판단 같아 보였다. 그렇게나 무시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모셔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유파를 영입하는 데에 성공하자 유파는 촉한의 내정을 확실하게 책임졌으며 유비의 재정상태를 크게 개선시켰다. 황권은 원래 유장의 참모로서 유비가 익주로 들어오는 목적을 파악하고 반대한데다 유장이 항복하기 전까지 계속 항전을 하던 유비 입장에서는 얄미운 인물이었지만 유비는 그를 중용하여 한중 공방전에서 법정과 함께 종군 참모로서 유비의 승리에 공헌했고, 이릉 대전 패배 후 위에 투항했을 때도 끝까지 감싸줘서 황권은 유비에 대한 의를 잃지 않았으며, 황권의 아들 황숭은 촉한 마지막 저항 일원 중 한명이 됐다.

장비가 사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우려해 충고하기도 했고, 마속에 대한 평은 예언에 가까울 정도다. 제갈량은 마속이 천하의 기재라 보았지만 유비는 마속의 한계를 꿰뚫어보았고 결국 제갈량은 울며 마속을 목베게 되기까지 이른다(읍참마속)

게다가 아군뿐 아니라 적군에도 그 통찰력은 그대로여서 한중전에서 유비가 두려워한 장수 장합은 훗날 제갈량의 북벌 때 위나라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진군이나 전예처럼 유비 밑에 있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후 대박난 케이스도 있다.[33]

조조에게 쫒겨 서주에서 달아나며 헤어진 진등은 서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망이 드높았고 손책의 대군을 적은 병력으로 막아내기도 하여 조조 또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할 정도였다. 유비는 그가 조조밑에 있던 시절에도 담력과 포부를 갖춘 천하의 영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방통의 사례가 반론으로 재기될때가 있는데 사서에선 유비가 방통을 직접 만난 기록은 없고, 작은 현의 현령을 맡겼으나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면관되고, 이후 노숙과 제갈량의 천거를 받고 실제 면담을 해본 후에 제갈량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었다. 익주 종군 중 그가 전사하자 슬퍼했을 정도면 방통의 능력이 적어도 신뢰받을 정도는 된다는 의미다.

5. 유비의 인물상

연의에서는 인의를 강조하면서도 여포와의 일화라거나 오나라와의 관계 등에서 현대 시각으로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주어 능구렁이라는 평을 받는다. 특히 유비의 이러한 연의상 단점을 좀 더 부각시킨 이문열 삼국지가 널리 퍼지면서 유비의 인물상에 대한 평가가 기울었는데, 이는 다소 과도하지만 거짓된 이미지라고만 할 수는 없다.

공손찬과의 관계는 딱히 논란거리가 없어 보인다. 유비가 공손찬에게 무슨 피해를 줬다는 기록도 없이 그냥 떠난 것 뿐이고 공손찬은 황족 유우를 죽이는 등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명분으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여포가 사로잡힌 뒤 조조와 유비 앞에서 나를 기용하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조조를 꼬드겼을 때, 이를 고민하는 조조에게 유비가 "(여포의 양아버지인) 정원동탁의 일을 잊었으냐."고 진언하는 일이 있는데, 이때 여포가 '천하의 간사한 인물이야말로 바로 너다.'라고 유비를 욕한다. 그러나 유비는 갈 곳 없던 여포를 받아주었고, 여포는 유비를 배신한다. 그러므로 여포에 대한 유비의 처분은 정당한 것이다. 여포가 방천화극의 가지 끝을 화살로 맞춰서 유비를 구해준 일을 들어 그래도 유비가 배신한 게 맞다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여포가 뒷치기 안 쳤으면 이렇게 될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여포가 유비를 쫓아낸 건 두 번이다.[34] 정사에서는 장비가 도겸의 잔당을 정리하는 중 그 잔당이 여포에게로 도망했다고 나와 있어, 도겸 세력이 유비에게 모두 굴복하지 않은 과정에서 새로 들어온 여포 세력과 결탁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원소를 배신하고 유표에게로 붙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원소 휘하의 객장으로 유비가 활동한 지역부터가 유표의 영지에 가깝고 유표와 원소는 외형적으로는 동맹 비스무리한 상황이었고, 유비의 역할 역시 이런 원소와 유표의 동맹화고하게 하고 조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였다. 그러다가 조조의 부하인 조인에게 패배한 뒤에 원소에게로 돌아가려면 조조의 영역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긴 한 것일까?

나라의 건은 누가 뒷통수를 쳤는지에 관해 자세한 내역은 복잡한데 형주를 누가 점령했는가 그리고 어느 때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가가 모두 복잡하게 엉켜있고 역사학자들도 비판하는 세력이 다르므로 형주 공방전 항목을 참고하도록 하자.

유비는 한때 흔히 굽힘이 없는 강직함의 대명사로 알려져있는 인물이니 만큼이나 이 논란은 거세고, 한편으론 비굴한 인물로 묘사가 되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난세였고, 숱한 비굴함을 통해서 살아남아야 승자가 되는 것이었고, 더구나 백성들과 같이 피난을 갈때에는 자신의 가족들을 백성들 곁에 가게 했고, 백성들과 함께 갔다. 정말 비굴한 인물이라면 재빠르게 자신의 식솔들 부터 챙기고 짐이나 다를거 없던 백성들도 포기하고, 먼저 자신과 수하들과 같이 먼저 탈출할지 모른다.

더구나 당시는 난세였었고, 아무리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사람도,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쉽지가 않다. 하지만 유비 입장에선 민심은 천심이었었고, 또한 그 말은 그때나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었고, 이러한 것이 곧 조조의 최고이자 최후의 숙적으로 부각이 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유비 자체가 여러 군주에게 의탁하고 여포에게 한때는 이러한 면을 지적받았기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결국 이때의 결정으로 비굴한 인물로 묘사가 된건 말끔히 사라진 셈이 아닌가 한다.

물론 정사의 유비는 연의에서 묘사되는 마냥 군자가 아닌 당대의 효웅인만큼 그 역시 남을 배신하고 우롱한 행태가 없지 않다, 단적으로 유장을 치게 된 사건은 이미 익주로 들어올때부터 촉을 먹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백한 배신이다. 적어도 도덕적인 면에서 이 사건에서 유비가 보인 태도를 변호하려는 것은 극단적인 촉빠의 논리일 뿐이다. 정사의 유비가 왜 '인의의 탈을 쓴 효웅'으로 불리는지 보여주는 일화로 고우영 선생은 유비의 이런 면을 조그마한 이득은 희생하고 더 큰 이득을 한번에 먹으려는 꿍꿍이를 가졌다고 표현했다.

유비가 장로와 대치하던 중 조조가 손권을 치게 되자 손권이 유비에게 구원요청을 보냈고, 조조가 보낸 악진의 대군을 얼마 안 되는 병력을 거느린 관우 혼자 이겨내기 힘들다 생각한 유비가 유장에게 지원군을 줄 것을 청했지만 유장이 지원군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유장을 향해 군을 일으킨다. 그전까지는 동족이라면서 친하게 굴더니 막상 자신이 힘을 얻으니 태도가 바뀐 셈이다. 이전부터 유비는 장로 세력을 공격해주길 청한 유장의 요청을 무시하며 유장이 보낸 군비를 자신에게 민심을 돌리는 수단으로 멋대로 사용했고, 배신하기 불과 6개월 전까지 지속적으로 유장에게 자신의 군을 증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유비 스스로가 이 일이 명백하고 극명한 배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35]

유비가 숨기고 있었던 야심은 방통과의 대화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연회에서의 기습을 논하는 방통에게 유비는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 라고 말한다. 즉, 유비는 자신의 은혜와 신의를 촉을 먹어치울 수단으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군웅에게 아주 당연스러운 일이고 은혜와 신의라는 대외적 이미지를 주요 홍보수단으로 삼아온 유비에게는 특히나 중요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유비가 "배신을 꺼리는 도덕적인 군웅"이었다는 연의의 이미지는 대단히 편중되어 있으며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유장이 상당부분 익주의 혼란을 초래한 면도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배신은 배신이다. 진수는 이를 유장은 영웅으로서의 자질이 없어 땅이나, 관직을 빼앗긴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 불행이라 할 수 없다고 평가했지만, 반대로 주석을 단 습착지와 배송지는 유비가 유장을 치고 양심의 가책 없이 기뻐하며 연회를 베푼 일에 대해 가열차게 비판했다.

무릇 패왕(霸王)은 필히 인의(仁義)를 갖추어 이를 근본으로 삼고 신순(信順)에 기대어 이를 근원으로 삼으니, 한 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그 도가 어그러지는 법이다. 이제 유비가 유장의 땅을 습격하여 빼앗고 권(權-권도, 권의)으로 일을 이루니, 신(信)을 저버리고 정(情)에 어긋나 덕의(德義)가 함께 잘못되었다. 비록 이로 말미암아 공(功)이 융성하다 하나 의당 크게 상하고 패한 것으로, 비유컨대 손을 끊어 몸을 보전한 격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습착지의 주
유장을 습격하도록 꾀한 것은 그 계책이 비록 방통에게서 나왔으나, 의로움을 거슬러 공을 이루고 본래 궤도(詭道-부정한 방법, 속임수)에 말미암은 것이라 내심 꺼림칙하여 즐거운 마음은 절로 그치게 마련이니, 이 때문에 유비가 즐거워하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경솔하게 대답한 것이다. 유비가 술자리를 한창 즐긴 것은 시의에 맞지 않아 그 일은 화를 즐기는 것(樂禍)과 같은데, 자신을 무왕에 비교하며 더더욱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유비의 잘못이고 방통에게는 잘못이 없다.
배송지가 덧붙인 주

유엽(劉曄)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는 마치 부자지간과도 같다고 하는 등 인덕을 갖추고 연의보다도 훨씬 실리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등 소위 말하는 인덕의 군주로 잘 나타나 있다.

세세한 면을 보면 당시 유비의 인기는 천하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사에서도 유종이 항복한 것을 따지러 형주에 갔다가 세가 불리하여 유비가 형주를 떠나자 유종의 측근과 형주의 민간인 다수가 또 유비를 따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단순 백성뿐 아니라 유종의 측근마저 유비를 따르려 했을 정도였다면 당시 그의 인망이나 정치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정사 삼국지에서 "임기응변과 재략이 조조에 미치지 못하였다."라고 적었다. 조조가 문무를 비롯하여 예술과 문학 등 어느 측면을 보더라도 먼치킨이었음을 생각하면, 또한 그가 위진의 실질적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임을 감안한다면 도리어 당시로서는 이 묘사는 칭찬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외에 정사의 평에는 크고 굳세었으며 꺾여도 구부러지지 않고 끝내 남의 사람이 되지 않았다고 표현한 걸로 보아 꽤 굳은 의지를 가졌고 의지가 강했다. 여러 정황을 볼때 유비는 당대에서 손꼽을만한 인물로, 충분히 한 시대의 효웅이라고 불릴 자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고우영 삼국지등으로 삼국지를 접한 일부는 관우, 장비가 분명 유비를 쪼다로 보고 속으로 업신여겼을거라 주장하는데 자존심이 센 관우나 역시나 거친 편이었을 장비[36]가 끝까지 섬긴 것만 해도 그런 억지는 무리다.(연의에서는 도리어 유비가 장비와 관우의 단점이나 행동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제갈량에게 황제가 되어달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함으로써 죽어서도 제갈량을 의리와 인정으로 묶어내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단한 인물. 이는 연의나 이문열 삼국지에서 유비에게 애매하게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다고만 쓰고 어떻게 사람을 이끄는 지에 대한 묘사가 안 나오기 때문에 생기는 일인 듯하다.

또한 정사의 기록을 보면 자신을 만나주지 않은 독우를 직접 100대 두들겨 팬 바가 있으며(연의에서는 장비가 팬 것으로 되어있지만)[37] 익주에서는 심지어 다른 장군들의 가솔을 인질로 잡는 등 거친 모습도 보이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유를 죽인 적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천지를 먹다의 유비에 더 가깝지 않을까.(…) 덕분에 그를 바탕으로 적절히 확대 해석한 이런 썰도…. 유비 최강전설존나 패버리고 천하를 얻은 유비

연의에서는 유황숙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지만 실제로 황숙도 아니고 유예주라는 명칭으로 더 오래 불렸던 듯.

중국에서는 연의의 이미지 탓인지 무능하고 음험한 인물로 여겨지는 듯하다. 중국 속어 중에는 "유비가 아두를 내던진 것은 인심을 매수하기 위해서이다."[38]라거나 "유비는 울어서 강산을 차지했다."라는 부정적인 말들이 많다. 이렇게보면 고 화백의 해석은 꽤나 중국인들의 해석에 가까운 셈. 이는 고우영 화백이 유년시절 만주에서 태어나고 생활했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얼굴에 수염이 적은 것이 컴플렉스였다고 한다. 그것을 가지고 비아냥거리던 유장의 신하를 입촉 후 제갈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형시킨 적이 있다고 하니 꽤 큰 컴플렉스였던듯 하다. 허긴 얼굴을 궁둥이처럼 민둥민둥하다고 했으니 화날 만도 하지.[39]

죽기 전 유선에게 "착한 일을 작다고 아니하면 안되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삼국지 선주전에 분명히 있는 기록이고, 소학과 명심보감에 인용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장이다.

연의에서는 툭하면 적들에게 "돗자리나 짜던 천한 놈이"라면서 출신 문제로 욕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황족인 동시에 하류층인 미묘한 사회적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나 저러나 확실한건 유비는 처자를 의복 취급하며 버리고 다 박살나는 한이 있더라도 죽으면 죽었지 굴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만화 창천항로 후반부에서는 조조가 유비를 생각하며 미증유의 군웅할거, 살아남은건 무명에서부터 올라온 너 혼자뿐이구나. 유비, 유현덕이여 라고 감회에 잠기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정치적으론 유비가 큰 집단을 다스린게 익주 입성 후라서 자료가 적지만 익주에 입성하자마자 충분히 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는 모습도 보이지만 토목 공사나 금주령등 빡빡한 모습도 보인다. 그렇다고 무조건 빡빡한 것은 아니고 신하들의 말을 잘 듣고 그에 따르는 유연한 면도 있었다. 이 부분은 간옹 항목 참조. 어쨌거나 대체로 이전 익주의 권력구도에서 소외되었던 인물들을 등용함으로서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는데, 이 과정에서 익주를 얻는데 꽤 진통을 겪었다. 의외로 깐깐한 면이 있었는지 은근히 부하들을 자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40][41] 익주 입성 후 유비의 이런 빡빡한 정치에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조조가 촉을 치자고 하자 오히려 유비가 익주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부하가 얘기한다. 이를 볼때 깐깐하게 사람을 가려서 자신을 확실히 따를 사람을 남겨놓는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5.1. 조조의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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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유비에 대하여 진수는 '유비는 항상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였다. 조조와 하는 행동의 반대의 행동을 하여 세력을 구축하여 대항하였다. 이것은 조조에게 대항하여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보다는 조조가 자신을 받아 들일 그릇이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평하고 있다. 실질적으로도 조조가 통일군주가 못된 건 유비 때문. 다른 때는 맨날 발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딴지를 놓아버려서[42] 촉을 까는 위나라팬들에게 대역죄인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에 반해 조위의 형법이 무겁고 세금이 과했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이에 대응한 적이 많다는 것을 들어 "그나마 유비와 제갈량 덕분에 일부의 백성이 조위 아래의 힘든 삶을 빠져나갈수 있었다"고 반박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실제로 『구주 춘추』의 주석「방통전」에 '나(유비)와 조조는 물과 불의 관계이다. 조조가 엄격하면 나는 관대하게 대한다. 조조가 난폭하면, 나는 인덕에 의지한다. 조조가 책략으로 나오면 나는 성실하게 행동한다. 언제나 조조와 반대 행동을 취해야만 비로소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이처럼 그는 항상 조조와 상반된 모습으로 살았던 것 같으며 삼국지 연의에서도 유장을 배신할 당시, 이와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조조와는 어떻게 봐도 원수 사이였지만 당시 문화가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서로 간간히 서신을 교환한 모양이다. 순욱(荀彧)이 죽었을 때 유비는 서신을 보내며 간신이 나라를 망친다며 은근히 조조를 비판하기도 했고, 또한 조조가 죽었을 때 조비(曹丕)에게 조문을 위해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비는 이 사신을 죽였다. 삼국시대에 가장 호적수다운 인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조조가 유비를 가리켜 자신과 더불어 천하의 단 둘뿐인 영웅이라고 평가한 점과 함께 적벽에서 패한 후 유비는 나의 영원한 맞수라고 평가했고, 조조가 한중에서 패하고 유비가 승리한 이유를 법정이 유비를 도와줘서 그럴 줄 알았다고 했으며, 유비도 언제나 조조와 반대되게 행동해왔다. 이러한 점들을 열거한 뒤 생각해보면 서로가 서로를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렇다보니 실제로는 어떠했는가를 떠나 일단 대중적인 이미지로는 조조가 실력주의에 냉철하고 실리 위주, 대를 위해서 소는 비정하게 희생할 수도 있는 효율 정치의 대명사라면 유비는 인정와 인덕으로 무장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인덕이 넘치는 유비'의 이미지가 잘 드러나는 에피소드가 신야 탈출로써, 유표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잇게 된 유종이 아버지가 다스렸던 형주를 조조에게 갖다바쳤고, 이에 유표에게 의탁해 그를 도와 신야에서 조조를 견제하고 있던 유비는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야를 버린채 유표의 장가 유기와 연합하기 위해서 강하로 이동하게 됬는데, 이때 신야성 주민 10만명이 유비에게 애걸복걸하며 자신들도 데려가달라고 부탁하였다. 제갈량을 포함한 모든 신하들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유비는 백성들과 생사를 함께 하겠다며 무리를 무릅쓰고 모든 신야성 주민들을 받아주어 함께 길을 나선다.

정사 선주전에 따르면 이 일은 제갈량이 반대한 것은 아니고 조조에 쫒기는 유비의 무리가 십여만에 이르러[43] 하루에 행군이 10리를 가지 못할 정도로 지체되자 어떤 사람이 '지금 무리 가운데 갑옷을 입은자는 적으니(군사는 부족하고 피난민은 많은 상태)'이걸 어찌 하겠습니까?'고 이르니 유비가 "무릇 큰일을 이룰때는 필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법이니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어찌 내가 이들을 버리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동진의 학자 습착치는 이 말을 두고 "형세가 위급한데도 도를 잃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애초에 연의에서 제갈량, 정사에서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군량도 군사도 부족한 상태로 적에게 쫒기는 파멸적인 상황에서 백성들까지 데리고 가봐야 도망치는 속도만 느려지고 짐밖에 안된다. 이는 순전히 유비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전까지의 유비의 정치적 생활을 생각해보았을때 그는 항상 애민정신에 그의 정치적 생명과 목표를 두었었고, 이제 곧 국가를 건설하려는 마당에 백성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이었을 것이다.

《정사 삼국지》 무제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조가 유비의 존재에 불안감을 내비친 적이 여러 번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주인공이 된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대 최강의 군주였던 조조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서 결국 황제가 된 인물이었고, 당시의 군주들에 비하면 온화한 유비였으니 역사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더하여 유비는 늘상 조조의 제1종 경계 대상이었으니, 악역 조조에게 맞서기에는 유비보다 더 좋은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유비를 향한 대중들의 인기도 높았던 터라 서주 대학살, 회남 사천 한중 지방에서의 대규모 백성 강제이주를 통한 유랑민들의 대량 발생, 원소 투항병 7~8만 생매장 사건, 황제인 헌제를 허창으로 강제로 모셔온 후 앞에서 칼을 차고 다니는 등 강압적인 행위를 하고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주군인 헌제의 아이를 밴 동귀인와 동승, 이후 황후였던 복 황후마저 둘다 매질로 참혹하게 죽여버리고 자신의 딸을 그 자리에 들어앉힌데다 결국 아들대에 왕조를 무너뜨린 일, 양수 최염, 여백사, 순욱, 공융과 같이 팽당한 자들의 처참한 죽음과 같은 이름 높은 악행들로 인해 당대에 이미 넌 그냥 나쁜 놈으로 여겨지던 조조에 맞선 상대이니 소설 속에서 유비가 선한 설정을 맡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5.2. 유비의 매력

마성의 남자

연의에서 유비의 가장 큰 강점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을 부각시켰는데 실제 정사에서도 유비와 가까이 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인간성에 매료되었고 그가 통치한 곳의 백성들 역시 유비에 대한 애정은 대단했다. 단, 유파는 제외. 유파는 사람들이 보면 왜 그런지 정말 궁금할 정도로 유비를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익주평정 후 할 수 없이 부하가 되었다.

유비는 어려서 노식의 밑에서 공부를 했을 때 자신의 종친인 유원기는 유비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평하며 그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대주었다. 정사에서 같이 공부한 동종 유덕연의 아버지 유원기라고 언급하며 딱히 칭호를 붙이지 않는 점을 미뤄 유원기는 유비와 가까운 친척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유비의 인간성 하나만 보고 그런 지원을 해준 것을 미뤄볼 때 유비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어릴 때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유비는 인망이 대단했다. 비록 방랑군주로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공손찬, 조조, 원소 등의 객장으로 밥을 구걸해 먹는 위치에 있었다 해도 그 인망을 잃지 않아 관우장비ㅡ 옛 도겸의 부하 중 미축, 미방, 손건은 유비가 이렇게 한량 신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섬겨 나중에 촉한을 건국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심지어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를 따라가지 못했던 진등 같은 이는 여러 명사에 대해 칭찬하면서 유비는 왕패의 재력이 있다고 평가하며 공경한다고 얘기했다.

또한 유비의 매력을 보여주는 다른 일화는 유비가 평원의 상을 지냈을 때였다. 평소 유비를 깔보고 불쾌해 하던 군민 유평(劉平)이 유비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하지만 그 자객은 유비를 만나보고는 유비를 찌를 수 없어 실토하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는 것만 봐도 유비의 매력을 알만하다. 아무리 힘든 세상이었다지만 싸워서 진 대장이 어디 있다는 걸 알자마자 그를 찾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이 유비에 대한 신뢰와 충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한 말 많은 군주들이 몰락하고 군세를 잃었지만 유비의 경우처럼 패배 후에 알아서 주군을 찾아간 사병 조직은 많지 않다. 거기다가 한 번은 유비가 조조의 대장기를 보고 놀라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간 뒤에도 그를 찾아 돌아온 사병들이 있었다.

다음은 정사에서 언급된 유비의 매력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 유비가 원소 밑에 있을 적에 조운 밑에 유비를 따르는 일단의 군사들이 있었는데, 원소 밑에서도 대놓고 스스로를 "유좌장군의 군사"라 칭하면서 유비를 끝까지 따랐다.
  •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유비가 구원하러 왔었는데 유비에게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이 따라다녔다.
  • 도겸이 죽게되자 도겸은 두 아들이 있었으나 스스로 유언하길 유비가 아니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업을 생면부지의 유비에게 맡긴다.
  • 유비가 여포에게 패해 조조에게 달아나자 조조는 유비에게 자신과 같은 수레에 타게 하고 같은 자리에 앉게 하였다.
  • 유비가 조조에게 패해 원소에게 달아나자 원소는 자신의 성에서 200리 밖까지 마중나왔다.
  • 유표가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형주를, 식객에 불과한 유비에게 넘기려 했다.[44]
  • 형주가 조조에게 항복하자 유비는 신야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이때 10만 명의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 내려갔다.
  • 장송, 법정은 유비를 만나보곤 유비에게 익주를 넘겨줄 것을 결심하고 자청해서 유비의 스파이 노릇을 한다.

상대인 조조가 일찌감치 항복하면 받아주는 편이기에 유비의 매력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항복하면 쫓기지도 않고 편히 살 수 있는데,[45] 유비의 부하들은 처자를 버리면 버렸지 유비와 함께 쫓기는 길을 선택했다. 당장 개국공신인 미축의 경우는 재산과 동생들과 자기 인생을 당시 아무것도 아니었던 유비에게 올인했다.

그리고 조조가 유명한 학자인 배잠에게 형주에서 유비와 함께 지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평가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배잠이 말했다.

그가 만약 중원에 있다면 민심이 흔들리고 백성들이 핍박에 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변방을 차지한다면 변방 최고의 군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 세설신어 <식감中>

이 말이 "유비 그 인간 능력 겨우 지방군주감 정도밖에 안돼요.ㅋㅋ"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유비가 이미 중원을 차지한 조조와 함께 있으면 조조의 기반이 흔들리고 중원이 피튀는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뜻. 게다가 조조 앞인데 "유비님 능력은 너님보다 더 대단함."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설사 지방을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그냥도 아니고 최고의 군주라고 평가하였다.[46] 적어도 유비를 마냥 폄하할 정도로 무능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은 건 확실하다.

하여간 정사고 연의고 간에 유비는 주변 인물들이 보기엔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 캐릭터로 그려진다. 마성의 남자 워낙 확고하게 강조된 부분이라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 유비의 사람을 이끄는 매력을 그려내는데, 예를 들어 조조빠 성향의 창천항로든 유비에게 우호적인 화봉요원이든 이 부분을 잘 묘사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제갈량을 얻기전까지는 유학자들하곤 영 인연이 없었는데 문제는 당시 유능한 문사나 지략가들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했다는 것(...). 이런 점에서 유비의 인망은 피지배층에만 인기있는 반쪽짜리 인망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 부분은 유비가 배경에 아무것도 없어서 그렇다는 추측도 있다. 뒷배경이 빵빵한 조조, 원소는 일찍부터 많은 인재들을 모았지만, 사실상 인생의 절반 이상이 방랑이었던 유비는 그런 배경이 없었기에 인재를 모으기가 힘들었다는 것. 그렇기에 관우가 조조를 버리고 유비에게 돌아간 것과 제갈량이 아무것도 없는 유비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 당시에도, 현재에도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확실히 유비는 평원령 시절 다른 부자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지배계층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주의 명사이면서 평생 유비를 따랐던 미축 등은 오히려 특별한 케이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유비의 이런 면이 반영되어 매력을 100 아니면 99를 찍고 있다.[47]

6. 황족 논란

"유비가 정말로 황족인가?"는 자주 논의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문열이 평역 삼국지에서 제시한 견해인, "중산정왕은 100명이 넘는 자식을 두었는데, 그 많은 자손들 중에 족보를 사칭해서 끼어드는 것은 쉽지 않겠는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추측이고, 당대의 시대상과도 맞지 않다.

6.1.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들 수 있을까?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드는 일은 조선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가짜 족보가 나돌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인쇄술의 발달로 집집마다 제각기 족보를 갖출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짜라도 일단 족보를 만들어두면 그 문헌에 근거해서 같은 조상이라고 우겨서 끼어드는 시도를 할 수 있고, 끼어들기를 당하는 쪽도 '문서화'된 족보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영부영 일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조선 시대에는 원칙적으로는 씨족 질서를 어지럽히는 중죄로 보아 처벌당하는 범죄 행위였다.

그리고 조선도 사실은 좀 애매한 게 조선 초중기까지는 "에이, 내가 안동 김씨긴 한데 우리 집이 강릉에서 오래 살았네 그냥 강릉 김씨 하겠소"하면 강릉 김씨였다. 또한 본격적인 족보 위조의 초창기에는 족보 위조한답시고 끼어든 작자들이 완전히 날조라기보단 어느 정도 몰락한 잔반과 금전적 거래로 말을 맞췄으며 돈으로 문중에 이런 저런 일들을 해줬기 때문에 깊게 파고들어서... profit!이 될 이유가 별로 없었다.

아무튼 후한 말에는 조선시대와는 상황이 달랐다. 족보가 집집마다 있는게 아니다. 당시는 인쇄술이 없었고, 종이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조선시대와는 달리 집집마다 족보를 한 부씩 갖춰둘 수가 없었다. 즉, 족보는 일족의 유력자나 관청에서 보관되거나, 친족들의 기억에 의지해서 서로의 관계를 식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친족을 인증하는 것은 일단 친족 서로 간의 기억과 유력자만이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헌 정보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원시적인 수단을 쓰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일족임을 사칭하여 끼어드는 건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친족을 강압하거나 일시에 속여서 많은 사람의 기억을 일시에 변조해야 한다는 건데, 원리적으로는 거의 비트코인을 위조하겠다는 발상이나 다름없다.(…) 또한 당시는 농경사회다보니 요즘처럼 친척이 잘 모이지 못하던 시절도 아니고, 딱히 따로 할 일도 없고 가까운 거리에 모여서 사니까 뻔질나게 친척집 들락거리는게 바로 취미생활 취급이었다.

당시의 친족 사회는 조선시대 말기나 대한민국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폐쇄적이고 견고했다고 봐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현대 사회와는 사회상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6.2.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사칭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의 후예는 촌수를 따질 수도 없는 엄청난 방계다. 실제로 중산정왕의 자손은 그 숫자가 너무나 많았고,[48] 유비 정도의 방계 황족은 빗자루로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애초에 전한계 황족은 후한이 개국되면서 왕공 등의 작위도 다 날라갔다.

유비 이외에 그 시대에 군웅으로 이름을 날린 황족(유표, 유언, 유우)들은 유비보다 훨씬 격이 높아서 공(公)의 작위를 받은 황족이었으며, 진왕 유총처럼 왕(王)의 작위를 가진 황족도 있었다. 하지만 유우는 공손찬에게, 유총은 원술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유요손책에게 축출당하였다.

황족도 힘이 없으면 얼마든지 비참한 수모를 당할 수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가 방계 황족을 자처해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기껏해야 을 잇는 정통성 정도일 것이다. 그 정통성도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한 이후 즉, '힘'을 갖춘 뒤에야 도움이 되었다.

중산층의 후예라 카더라.

6.3.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유비에게는 동성의 일족이 존재한다.

당시의 중국 사회는 일가 친척간의 배타적인 상호 부조 구조가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유비도 친족인 유원기로부터 학비 지원을 받은 일이나 그 외의 친척과의 관련이 약간 기록되어 있다.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되어있고 배송지나 다른 이들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6.4. 유표, 유장 등 당대의 유씨 군웅이 유비를 친족으로 보았다.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를 소개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유비가 유장의 친척이라는 이유였다. 유장이 유능한 인물은 아니였지만 친척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는 아니였다. 유표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시 관념에서 성씨 사칭은 중대한 범죄 행위이고,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다면 가만 넘어갈 리가 없다. 그리고 후한 조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6.5. 적대 인물들도 혈통을 의심하지 않는다.

조조, 조비마저도 유비의 혈통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유비가 칭제를 하면서 멸망한 한(후한)을 잇는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漢)이라 했다. 따라서 유비의 혈통을 부정할 수 있었다면 후한을 멸한 조비 측에서는 정당성을 위해 당연히 유비의 혈통을 부정했을 것이다. 실제로 후한 말에 상대방의 혈통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다면 그 점을 트집잡아 공격하는 프로파간다는 매우 흔했다. 예를 들어, 원술이나 공손찬원소가 얼자라고 '종놈'이라고 헐뜯었으며, 원소는 조조의 혈통이 '환관' 집안이라고 헐뜯었다.

유비에게 조금이라도 의혹의 여지가 있었다면 당연히 적대 진영에서는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적어도 혈통에는 의혹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반증할 수 있다.

이렇듯 당대의 거의 모든 기록과 당시 사람들이 당사자인 유씨 일족에서 적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유비가 유씨 황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후대사람들이 유비의 황족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다. 당대 사서를 보면 혈통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뭔가 기록에 남기거나 확실하지 않다고 서술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대로, 헌제 유협이 황숙으로 부른 부분이 유비의 황족인 이유 중 하나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연의의 창작으로 실제로는 유비가 헌제와 만나서 헌제가 황숙으로 부르게 되는 기록은 없다. 애초에 그것 없이도 유비가 황족임을 증명하는 기록은 위에 등재한 것처럼 아주 넘쳐난다(...).

이처럼 당대 사람들도 황족이라고 인정하거나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는데 무려 1800여 년이 된 지금 와서 부정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떻게 보면, 흔히 얘기하는 조조의 재평가 바람 및 그 여파로 나타난 촉까들에 의해 유비가 혈통을 가지고 사기쳤을 거라는 '지레짐작'에서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촉까들 및 특정 극렬 조조빠나 위빠들 눈에는 유비같은 '무능한' 놈[49]이 높은 자리에 있던 건 분명히 혈통을 사칭해 얻은 이익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건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에서만 유독 두드러진다.

7. 기타 매체

삼국지삼국지연의를 제외한 기타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유비를 다루는 항목. 항목이 길어져 따로 분리한다.

8. 기타사항

8.1. 토사구팽 재현?

유비까들 중에는 만약 유비가 천하를 통일했다면 관우, 장비, 제갈량 등을 모조리 토사구팽했을 것이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이 설의 근거는 한고제의 후손이니까….에다가 유방이 도망치다가 자기 자식들을 수레 밖으로 던져버렸는데 그걸 하후영이 계속 다시 수레에 태우는 짓을 반복하다가 기어이 유방에게 화를 냈는데 유비 역시 장판교에서 조운이 애써 구해온 아두를 땅바닥에 던졌으니 똑같이.... 애초에 유비가 아두를 땅바닥에 던졌던 것은 아두 때문에 조운을 잃을 뻔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기 때문으로, 이는 오히려 유비가 얼마나 부하를 아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므로 해당 설의 근거가 되기는커녕 반박 자료에 해당한다.

애시당초 근거부터가 엉망인지라 별로 반박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천하 통일도 못하고 사망한지라 이 사람이 광무제처럼 행동할지, 주원장처럼 행동할지는 예측하는거 자체가 무의미할 뿐더러, 해당 항목에 보다시피 한고제 유방 자체도 아무 인간이나 토사구팽한 것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면서 순욱을 토사구팽한 조조나 육손을 토사구팽한 손권에 대해선 침묵하는 유비까도 많다. 저 둘은 천하통일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토사구팽했다.

8.2. 진짜 성격 관련

유비의 진짜 성격은 정사에 이르기를 학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놀고 먹으며 수렵하길 좋아했다는 묘사가 있다. 그리고 유비의 행적으로 미뤄볼 수 있는 유비의 진짜 성격은 사람을 밑에 두길 좋아했으며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길 좋아하는 성격이였다.

예를 들면 미방의 잘못으로 미축이 스스로를 포박하고 유비에게 나타나서 자기 일족을 멸해달라고 울면서 빌었을때도 유비는 "공은 잘못이 없습니다."라 말하며 미축과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전해를 따라 서주 구원병으로 파병됐을 때에는 굶주린 백성들 수천을 거두기도 했다. 정황상 이들은 조조의 1차 서주 침공 탓에 발생한 전쟁 난민으로 보이는데, 유비가 끌고 온 병력이 천명 남짓한 숫자였다는 것과 이러한 난민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하등 도움될 것 없다는 점을 볼 때 이후의 당양 전투때의 피난민 행렬과 비슷하게 볼 수 있을듯.

아무리 천하의 개쌍놈이라 해도 일단 자기 백성으로 들어오면 진심으로 자신의 혈육으로 생각한 군웅이 유비였다. 심지어는 그 쓰레기같은 양의조차 참수를 못하고 홍농태수라는 빈껍데기 관직을 줘서라도 어떻게든 데리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조조같았으면 목이 달아났어도 여러번 달아났을 그 양의조차 품으려고 노력한 게 유비다.

삼국지에 등장한 모든 군웅들 중 이렇게까지 자신의 아랫것들을 아낀건 유비가 유일했다. 조조는 순욱을 버렸고 손견은 조무를 버렸으며 손권은 육손을 버렸다. 또한 원소는 전풍을 버렸고 동탁 역시 여포를 업신여기다가 역관광당했으며 도겸은 자기 백성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하는데 그냥 수수방관했다. 하지만 유비는 아무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수하로 들어오길 죽음으로 거절한 장임을 너무나 아까워하며 대성통곡했고, 유독 자기를 매우 싫어했고, 죽을 때까지 전혀 충성하지 않던 안티 유비의 대명사 중 한사람 유파마저도 관직까지 줬다.

문제는 이런 유비만 바라보고 따르던 백성들은 유례에 없는 개고생을 하게 된다는 거다.괜찮아!유예주만 있으면 돼!

8.3. 유비의 자식들

유비의 자식들 가운데 행적이 알려진 이는 양자 유봉, 장남 유선, 차남 유영, 삼남 유리 이렇게 4명이다. 유영과 유리는 유선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으로 유선의 후손은 영가의 난 때 몰살당해 지금까지 내려오는 유비의 후손은 모두 유영의 후손이다. 다만 유리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이외에는 딸이 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서 조순전의 '장판파에서 유비의 두 딸과 군수품을 획득했다'는 대목이다. 다만 그 이전에도 딸들에 대한 기록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관련 기록은 전혀 없는데 저 기록이 전부이다. 아마 다시 찾아오지는 못한 듯 하며 일설에는 조순의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진 삼국무쌍 차기작에서 촉 무장으로 나올지도

양자 유봉에 대해서는 유비가 시종일관 친자식으로 여기고 아끼며 좋아했다. 유봉이 죽은 이유는 겉으로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유봉이 주둔중이던 상용은 위나라의 땅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면 반란을 걱정해야 한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제갈량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심백준의 유비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오지만, 유봉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갈량의 독단이 아니라, 유비의 합의가 있었다.

8.4. 외아들?

삼국지연의에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외아들로 묘사되었고, 정사 삼국지에서는 외아들이라는 묘사는 없으나, 형제나 남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것으로 보아 진짜 외아들이거나 아니면 일찍 형제 남매를 사별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진짜 외아들이라면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케이스인 셈.[50] 대신 평생동안 신의를 지킨 의형제들이 있잖아
다만 숙부인 유자경(劉子敬)[51]이 있었기에 사촌 형제들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자경 역시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이며 그의 자손에 대한 언급이 없어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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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훗날 사가에서 추존한 거라서 국가 차원에서 정식으로 공인된 적은 없다. 참고로 조선의 인조의 묘호가 될뻔한 열조가 이 열조가 맞다. 다행히 이 묘호가 쓰이지 않았는데 이유가 인조의 아들 효종이 "우리 아빠는 삼국지의 루저 유비보다도 위대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유비가 들었으면 기분 나쁘겠다 근데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보는 건 오늘날 인조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좋지 못하기 때문인 거고, 효종으로서는 당연했다. 유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떴고, 아들 대에 북벌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나라가 망했다. 그럼 인조를 유비에 비유하면 효종 대에 북벌에 실패하고 조선이 망한다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북벌을 꿈꾼 효종이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불길하잖아
  • [2] 격식상 원래 이름 대신 부르기 위해 만든 것이 자(字)와 호(號)이다. 유비 현덕이라 부르는 것은 이이 율곡, 혹은 이도 원정이라 부르는 것과 진배없다. 한 마디로 삽질.
  • [3] 일본에서 이렇게 이름과 자를 같이 붙여 부른 것은 외자 이름을 어색하게 느끼는 일본 현지 사정에 맞춘 번역 때문이라고 한다.
  • [4] 면류관을 의자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황제의 지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 농부는 관청에 잡혀갔지만, 황제가 무지렁이 시골 농민이 장난친 걸 가지고 진지 빤다며 풀어주게 했다.
  • [5] 소열은 시호이고, 연호는 장무이다.
  • [6] 애초에 봉지 이름이 전한 이름으로 치면 고증 오류다.
  • [7] 오늘날의 찰서장대대장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해당 현(縣)의 치안과 국방을 담당했다.
  • [8] 연의에서는 이 소식을 듣자 곽가가 "기왕 회군하는 거, 유비에게 글을 보내서 늘은 이만 물러가주지"오늘은 이만 봐준다는 식으로 하시면 주공이 유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셈이 됩니다."라고 말한다.
  • [9] 연의에서는 장비가 그놈의 술주정(…) 때문에 조표와 마찰이 생겼고, 조표가 성을 빠져나가 여포와 공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사에서는 그 자리에서 조표를 죽였다.
  • [10] 연의에서는 양봉, 한섬 모두 유비에게 결딴나며, 백성을 괴롭히는 그들을 처단하여 조조에게 잘보이기 위해서였다고 서술되고 있다.
  • [11] 유비는 일평생 가족을 버리거나 잃은 적이 많았다. 여포와 조조에게 그렇게 되었는데 한두 번은 처자를 돌려받았지만 결국에는 돌려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특히 나중에 조조에게 장판에서 쫓길 때 두 딸이 조조군에게 사로잡혔는데 돌려받지 못했다. 일설에는 그들을 사로잡은 조순의 아들들의 후첩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기록이 없어 안습이다. 또 연의에서는 감부인이 정실로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처자를 자주 잃은 유비의 가정을 첩이었던 감부인이 관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비의 정실은 누구인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건 유비의 황후는 감부인, 즉 소열황후 감씨와 나중에 마지막으로 들인 목황후 오씨(오의의 누이로 유언#s-4 유언의 아들 유모의 부인으로 미망인) 두 사람만 황후로 인정받았다.
  • [12] 연의에서는 유비가 동승 일행과 함께 공모한 이후 조조가 부른 것으로 묘사하여 유비의 위기감을 증폭시킨다. 또한 유비가 조조의 그 발언(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밖에 없다)에 놀라 젓가락을 떨어트린 뒤, 그걸 번개 소리에 놀랐다고 둘러대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 여담이지만 조조는 여기서 당대의 군웅들을 한꺼번에 까는 위업을 선보인다(조(삼국지)"조조 항목 참고).
  • [13] 이 부분에 관해서 실패할까봐 도망갔다고 하는데 '때마침 사명을 받아 실행하지 못 했다'라고 기록되어있고(선주전) 유비가 출정한 것은 199년 12월, 동승이 처형당한 것은 200년 정월로 약간이나마 시간차가 있다. 뭐, 애초에 유비는 그 명분을 이용할 생각이었을 생각이었을 것 같다. 애초에 조조를 죽일만한 힘도 없겠지만.
  • [14] 그토록 유비를 경계한 조조가 유비를 순순히 내보내준 것이 의외이다. 연의에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넣는다.
  • [15] 선주는 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 - 선주전
  • [16] 사람들이 믿기 힘들어하는 삼국지의 이야기 중 하나가 이 부분인데, 현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
  • [17] 강하가 아니다. 강하는 적벽대전 뒤 오의 땅으로 평생 유비의 땅이 되지 못했다.
  • [18] 즉 `손권은 장강을 끼고 많은 군대와 모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나 우리 주군인 유비는 천하의 영웅이므로 어찌 항복하겠소?'라며 은근히 깐 것.
  • [19] 오 약 3만, 유비군 약 2만으로 정사의 전기마다 병력 규모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는 손유동맹과는 달리 조조군은 20만에서 80만까지 정사의 전기마다 기록이 매우 다르다.
  • [20] 이 때 손권은 유비를 활로라고 욕하였다.
  • [21] 화흠이 문을 부수고 황후를 끌어내자 머리를 풀어헤친 채 산발을 하고 끌려가던 황후가 헌제에게 살려달라고 하자 헌제는 울며 "나도 언제까지 살지 모르오"라 대답하였다.
  • [22] 이릉전에서 대패한 것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는다. 당대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승산이 없지만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
  • [23] 대전이 오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형주인들과 무릉만족의 반오감정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수차례에서 걸친 반란이 일어난다. 그리고 촉한서진에게 멸망하자 바로 서진에 종군한다.
  • [24] 연의에서는 황충위연이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엄은 방통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포위했다가 생포 및 항복시켰다.
  • [25] 유원기 덕분에 어느 정도 교육을 받긴 했지만 전술이나 전략 관련은 아니었을 것이다.
  • [26] 사실 하후돈과 함께 출격했던 명장 우금도 격파한 바가 있다
  • [27] 그렇기 때문에 관우, 장비 등 초창기부터 유비를 따랐던 신하들의 전공과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선 유비의 전적을 살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총사령관은 유비지만 직접 일선에서 싸우는 건 휘하 야전사령관과 참모들이니까.
  • [28] 물론 육손이나 손권이 어부지리를 노린 조비의 공격 때문에 유비를 더 추격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건 명백한 사실.
  • [29] 손견에게는 원술이라는 훌륭한 뒷배경이 있었다. 후한 말기에 명망과 명분 양쪽에서 원술을 뛰어넘을만한 군웅은 유표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원술은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갖추기 못했기에 자기가 직접나가 싸우기 보단 손견을 시키는게 낫고, 손견 또한 싸우면서 누적되는 손해는 원술이 커버해주니 좋고...이 둘간의 관계는 양자가 서로 이득을 보는 공생관계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 [30] 교통의 요지이며 사방이 평탄하다. 이 말인 즉슨 지리적 여건상 방어에 도움이 되는 요소가 거의 없다는 말이니..
  • [31] 후계자였기 때문에 처음엔 신하들에게 의지했고, 손권이 성장한 이후에도 그것이 약간 굳어졌다가 손권의 지도력과 충돌하면서 군신관계가 살짝 애매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장소. 뭐만 하면 까인다.
  • [32] 나중에 받을 보상은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않고 그냥 이 사람이 맘에 드니 끝까지 함께 한다는 심정으로
  • [33] 진군은 등용 직후 유비가 여포에게 밀려나면서 제대로 중용할 새가 없었고, 전예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해야하는 집안 사정 탓에 떠났다.
  • [34] 드라마 신삼국에서도 자신을 욕하는 여포에게 "저는 장군을 받아주었고 서주목의 인수까지 양보하고 소패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장군께서는 주위의 참언만 믿고 저를 두번이나 죽이려 하셨는데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따지자 여포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 [35]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急)하면 나는 관(寬-너그러움)하고 조조가 포(暴-사나움)하면 나는 인(仁)하고 조조가 휼(譎-속임)하면 나는 충(忠)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小故)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구주춘추의 서술. 즉, 유비는 이 배신이 (조조와도 같은) '너그럽지 않고 인하지 않은', '천하에 신의를 잃을' 배신행위라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 [36] 단 실제 역사상의 장비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성질이 거친건 정사나 연의나 별 다를 것은 없지만.
  • [37] 아는 사이인데 만나주지 않고 유비가 한스럽게 생각한 것을 봤을 때, 독우가 뇌물을 요구한 게 아닐까. 갑자기 유비가 미치지 않고서야 힘들게 얻은 벼슬을 갑자기 독우패고 버릴 리가 없다. 헌데 다른 기록에 의하면 독우는 유비를 공적 없이 임명된 자로 간주하고 유비를 내쫓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유비가 이를 염려하여 독우를 만나려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이것을 독우가 단칼에 거절해 버리니, 즉 유비의 해명 자체를 들을 생각을 안해버리니 결국 "에헤라디야 어차피 빼앗길 놈의 관직, 화풀이라도 좀 하고 가자|심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 [38] 사실 정사에서도 유비는 가족에게 큰 애정을 보이는 면이 드물다. 위험하다 싶으면 처자를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 [39] 평소에 자주 유비를 걸고 넘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어쩌면 자신을 반대하는 익주측 인사들을 제압하기 위한 제스처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제갈량이 만류하자 "향기나는 난초라도 문 앞에 나 있으면 베어낼 수밖에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40] 장완의 경우 직무태만으로 처형당할 뻔했으며 방통의 경우 역시 직무태만으로 높게 보지 않았다.
  • [41] 다만 장완의 경우 오에 항복한 반준의 인척이라서 불이익을 당했을 수도 있으며 방통 역시 주유 밑에서 일했기에 유비가 신중했을 경우도 있다.
  • [42] 대표적으로 천하삼분지계와 적벽대전.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했으면 말 그대로 이겼다 삼국지 끝!이었을 것이다.
  • [43] 이것은 병사들과 피난민을 합친 수치였을테니 연의 묘사대로 10만명 모두가 민간인은 아니었을것이나 갑옷입은 자가 적었다고 언급되었으니 민간인의 수가 적어도 수만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 [44] 이 내용은 배송지가 각주로 단 위서에 나오는 기록이다. 엄밀히 말해 정사는 아니고, 배송지는 스스로 각주를 덧붙이면서도 '이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기록의 신뢰성을 비판했다. 당시 유표의 정황을 보았을 때 유일하게 형주의 호족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던 유비에게 무게를 실어줌으로서 기반이 없는 자신의 후계를 보호하려는 시도가 아니면 모를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대단히 낮다.근데 기어들어온 식객에게 후계 보호를 맡기고자 했던 거도 만만찮게 대단해보인다
  • [45] 특히 장비, 미방 등은 조조 밑에서 중랑장이나 상국 등 높은 자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벼슬을 버리고 유비와 함께 쫓기는 길을 선택했다.
  • [46] 굳이 변방 최고의 군주라고 한 것은 유비 생전에 보여준 이민족 친화 능력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 [47] 삼국지 시리즈의 매력100 캐릭터는 3의 초선(특정 이벤트로 출현)과 후기 시리즈의 고대무장조상님 정도이다.
  • [48] 아들이 100명이 넘었다... 황족 인플레이션이 벌어진 원인 중 하나.
  • [49] 이 문서에서 나열된 사항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당대의 여러 효웅과 비교하여 유비 및 그 진영에 속한 인재들의 능력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 [50] 나홀로 북벌로 유명한 강유도 외아들이다..
  • [51] 또는 유경(劉敬). 맹달이 피휘를 위해 자를 자경(子敬)에서 자도(子度)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