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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last modified: 2016-02-10 17:37:54 Contributors

역대 미국 대통령
41대 42대 43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조지 워커 부시

풀네임 William Jefferson "Bill" Clinton
출신 정당 민주당
생몰년 1946년 8월 19일 ~ 현재
재임기간 1993년 1월 20일 ~ 2001년 1월 20일
서명
188cm

< 1992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time_1992.jpg
[JPG image (Unknown)]
1991 - 테드 터너[1] 빌 클린턴 1993 - 피스메이커[2]

< 199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time_1998.jpg
[JPG image (Unknown)]
1997 - 앤디 그로브[3] 빌 클린턴, 케네스 스타 1999 - 제프 베저스[4]

"A lot of your life is shaped by the opportunities you turn down as much as those you take up."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선택하는 기회들 만큼이나 거절하는 기회들에 의해 정해지게 됩니다.)- 자서전 <My Life>에서.
"I did not have sexual relations with that woman, Miss Lewinsky."
(저는 그 여자, 르윈스키양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5]
"It’s arithmetic!"
(그건 입니다!)[6]

Contents

1. 소개
2. 대통령이 되기까지
3. 1기 행정부(93~97)
4. 2기 행정부 - 화이트게이트와 지퍼게이트로 얼룩진 임기
5. 국외 문제
6. 퇴임 후
7. 평가
8. 그 외

1. 소개

1990년대, 유일한 패권국으로 등극했던 미국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통령[7]

미국정치인, 42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보다 1년 빠른 만 46세의 나이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8]. 또한, 첫 번째 베이비 부머 세대의 미국 대통령.

비록 임기 내내 스캔들로 몸살을 앓았지만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 미국을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하게 만들었던 대통령이라는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다. 후임자 부시가 하도 말아먹어놓은 탓도 있지만

부인은 그 유명한 힐러리 클린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그녀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미국 역대 최초 대통령 커플 탄생!!

2.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식 이름은 월리엄인데 그보다 애칭인 빌이 더 유명해, 대개 '빌리 헤링클린턴'이라고 불린다.[9] 클린턴이 동안인 편이라서 간과하기 쉬운데, 후임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와 동갑이며, 2015년 현재 한국 나이로 70이다. 본격 방부제 미모 2015년 현재도 저 위의 이미지와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중남부깡촌아칸소 출신이며 친아버지는 클린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고로 사망했다. 술주정뱅이였던 계부 로저 클린턴과 친모 아래서 자랐다. 이 때 나온 빌의 별명이 "뺀질이 윌리(Slick Willy)."

원래 그의 이름[10]은 친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었는데, 호적 정리 탓인지 성과 이름 둘 다 바꿨다고 한다. 즉, 클린턴은 계부의 성이다. 계부는 에 취해 아내와 아들을 폭행하곤 해서, 어머니와 이부동생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조숙하게 자랐다고 한다.(다만 마약 투여 혐의도 있는데 이건 사실 오바마도 있었다.)

마약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첫번째 대선운동 시절 비치료용 약물[11]을 해본적이 있냐는 질문이 들어왔을 때의 대답이 압권이다. 클린턴은 "연방이나 의 마약금지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중일 때 마리화나를 피워본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12]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의 대표적인 예로, 영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웠으므로 미국의 마약금지법을 어기지 않은 것은 맞다. 이 발언은 후술하는 '부적절한 관계'와 더불어 그의 교묘한 화술을 이야기할때 필수적으로 인용된다.

조지타운 대학교를 다니고 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을 거쳐 예일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힐러리 로댐 클린턴(결혼 전엔 힐러리 로뎀)을 만난 것이 이때였는데, 그들은 1975년 결혼했다. 이들을 엮어 준 것은 베트남 전쟁으로, 힐러리는 그전까지만 해도 린든 존슨에 대항한 공화당 골드워터의 지지자였다.

환경운동으로 평판을 얻어 민주당으로 아칸소 검찰총장을 거쳐 주지사를 역임[13]했다. 달리 말하면, 92년까지도 클린턴은 인지도가 대단히 낮았다. 그러나 경선 당시 1988년도의 지루한 대선 지지연설의 이미지를 일신한 클린턴은 컴백 키드(Comeback Kid, 돌아온 꼬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민주당 내부에선 이미 90년대 들어서면부터 클린턴을 유력한 대선후보로 점찍었고 92년 대선에 그가 출마할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주지사 임기를 채우겠다는 공약을 했고 걸프전 승리로 엄청나게 치솟은 그의 인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추었다. 아칸소에선 그의 출마를 지지하는 여론이 39%에 지나지 않았고 부시가 한번더 했으면 좋겠다는 여론은 52%에 달했다. 그를 주지사로 뽑은 아칸소 주가 그정도였으니 클린턴이 출마를 망설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로저 포터와의 통화에서 포터가 클린턴에게 "만약 당신이 출마한다면, 당신이 현재 민주당에서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수인 고로 당신을 (마이클 듀카키스에게 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파멸시키지 않을 수 없다."라고 위협하자 그때까지 출마를 망설이고 있던 클린턴은 격노했고 "충고 고맙다. 덕분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되쏘았다. 그러자 로저 포터는 "만약 당신이 96년 대선에 나온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겠지만 이번 대선에 나온다면 파멸할 것이고 정치 생명도 끝날 것이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결국 클린턴은 힐러리와 논의한 끝에 결국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아이오와 상원의원 팀 하킨 등을 제치고 승리하여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가 영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다는 사실 등이 지적되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병역문제였는데 그가 베트남전에 반대했다는 것과 베트남전에 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도피성 유학을 했다는 혐의가 가해지면서 클린턴은 미국의 퇴역군인을 비롯한 보수층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렸고 부시는 "내가 태평양 전쟁에서 총알을 물고 있을 동안 클린턴은 영국에서 못을 물고 있었다!"라면서 맹공을 펼쳤다.[14] 거기에 제시 잭슨같은 급진 진보성향의 유권자들도 클린턴을 위협했고[15] 통념과는 달리 로스 페로가 클린턴의 표를 굉장히 잠식했다. "컴백 키드"는 그렇게 잠시 위기에 몰렸다. 말년의 리처드 닉슨은 의기양양하게 부시가 재선할 것이며 로스 페로가 2위쯤 할 것이고 클린턴이 참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여론은 제법 흔들렸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다 발생시킨 불경기로 당황하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역사에 남을 캠페인 슬로건으로 370명의 선거인단을 휩쓸며 43%의 득표율을 올려 42대 대통령이 된다. 물론 로스 페로가 공화당의 표를 나누어 먹으면서 반사이익을 얻은 측면도 있었다. 여하간 이 문구의 가장 대단한 점은 냉전의 시대는 가고 경제전쟁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단 네 단어로 압축했다는 점이다.[16]클린턴은 12년만의 공화당 집권을 저지하고 여유있게 승리했다.

로스 페로는 불출마를 번복하여 클린턴의 뒤통수를 쳤고 민주당 경선 과정도 초반에는 클린턴이 3위도 겨우 할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클린턴은 정공법과 꼼수를 모두 적절히 활용해가면서 이를 돌파했다. 게다가 부시 자체가 88년 선거에서 답습했던 네거티브 위주의 선거를 치러 유권자들을 질리게 한 탓도 있다. 어쨌거나 클린턴은 매우 힙겹게 선거에서 이겼다.

3. 1기 행정부(93~97)

당선되자마자 미국 경제의 악의 축이었던 쌍둥이 적자(무역적자,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개시했다. 우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기관의 상당부분을 전자화해 공무원 30만명을 해고했고 레이건 정부 이후부터 계속 되어왔던 감세 정책을 폐기하고 누진세를 확대해 재정수입을 늘렸다. 이는 민주당이 다수당이던 1기 전반기에도 가까스로 통과되었다(하원에서 218:216, 상원에서 50:50으로 갈려 앨 고어가 찬성표를 행사해 통과).

그 결과 80년대 말 록펠러 센터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를 사들이며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던 일본을 제치고 초강대국의 자리를 지켰다.

또한 재임 직후 나프타(NAFTA; 북미 자유무역협정)을 채결했고, 부시 행정부 때 폐기되었던 미국 통상법 301조(속칭 슈퍼 301조)[17]를 부활시켜 거의 모든 국가의 무역, 관세장벽을 무너뜨리고, 루과이 라운드 체제를 통해 농산물, 서비스, 엔터테인먼트 사업 부분의 시장개방을 강제해 미국 산업의 시장 확대를 통한 무역적자 해소를 꾀했다. 또 미래산업으로서 IT, 금융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주도의 IT 산업, 디즈니의 오락산업 등 최첨단산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앨런 그린스펀 위원장을 필두로 한 FRB 주도의 경제개혁도 성과를 보여 정부 재정이 흑자로 전환되고 미국 국내 경기가 클린턴의 임기 내내 호황을 이어갔으나 갑작스런 시장개방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아야 했던 여타 국가들(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반미감정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부시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고, 아내 힐러리의 주도하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대형 프로젝트인 국민의료보험 도입이 결국 좌초하고[18] 인기가 곤두박질쳐, 1994년 중간선거에서 대패해 상하원을 공화당에게 전부 내주게 된다[19]. 뒤이어 벌어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을 신속히 해결하면서 인기를 회복했지만 그 뒤로도 여러가지 스캔들 때문에 고생했다.

그러나 첫 번째 임기를 지내고 있었던 클린턴은 높은 경제적 성과를 토대로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밥 돌 상원의원에 압승을 거두고 1996년 연임에 성공했다. 몸 처신만 잘했어도 미국 대선 역사상 초유의 압승을 거뒀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 당시 지퍼게이트가 탄로나기 전에는 화이트워터 사를 통한 부동산 투기 의혹(일명 '화이트게이트')으로 공화당이 공격하고 있었고, 지퍼게이트 외에도 주지사 시절의 여자관계 의혹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다. 참고로 르윈스키 스캔들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98년 1월로, 클린턴이 이미 연임에 성공한 뒤다.

4. 2기 행정부 - 화이트게이트와 지퍼게이트로 얼룩진 임기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은 당시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이다. 속칭 '지퍼게이트.'
사실 클린턴은 대통령 당선 이전,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도 여자 문제로 트러블이 많았다. 1990년 9월 중순, 주지사 연임을 시도하던 클린턴을 아칸소주 개발재정국에서 해고된 직원 래리 콜린스가 클린턴이 아칸소주의 재정을 유용하여 다섯명의 여자와 간통을 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클린턴은 아무것도 모르고 출근하다가 AP통신의 기자 빌 시먼스에게 그 소식을 전해듣고 기겁했지만 매우 침착하게 시먼스 기자에게 콜린스가 지목한 여자들과 인터뷰할 것을 요청했고 시먼스는 다섯 명 전부에게서 그런 적이 없다는 진술을 받았다. 하지만 공화당에서 이를 놓칠리 없었고 공화당 주지사 후보 셰필드 넬슨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클린턴을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했지만 여자들이 자꾸 이러면 고소하겠다고 반발했고 콜린스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터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각설하고 미국에서는 간통죄가 없고 일만 제대로 하면 사생활에 별 신경도 안 쓰지만 위증 및 위증교사(재판에서 거짓말했다.)라는 중죄[20][21]로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에게 개털리고 하원에서 탄핵 의결이 통과되어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TV 생중계 등을 통해 대통령에게도 사생활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자 여론이 어느정도 클린턴에게 동정적으로 돌아서고, 중대한 사건이 아님에도 거짓말 한 번 잘못 했다고 탄핵은 좀 지나치다 싶었는지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면서 가까스로 목숨, 아니 대통령 자리는 지켰다. 물론이지만 이 시기 아내인 힐러리와의 관계는 당연히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혼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22] 훗날 힐러리는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밉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판결문이 인터넷에 퍼져 부모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 때 미국민들 사이에서는 클린턴의 변명을 비꼬아서 "럴섹스(구강성교)는 섹스가 아니다"[23]라는 농담이 생겼고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묘사한 클린턴의 '부적절한 관계'[24]라는 표현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다.[25] 그리고 한때, 미국 대통령의 사무실이라 볼 수 있는 오벌 오피스(Oval Office)가 오럴 오피스라고 우스갯소리로 불렸다. 충격과 공포.

위키문헌에 르윈스키 사건에 대한 클린턴의 대국민 사과문이 올라와 있다. 한국인들의 시선에서, 이 사과문이란 걸 찬찬히 훑어보면 온통 변명뿐이고, 결론은 "이건 내 가족의 일이니 댁들은 신경 좀 꺼주시오."로 읽힐 수 있어 지탄을 받기 쉬울지 모르나, 다시 말하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륜 자체'가 아닌 '클린턴의 위증' 여부였다.

구강성교가 '성적 접촉'(Sexual relation)이 아니라는 대답을 하고 클린턴이 자기는 위증을 안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검사가 질문을 하면서 성적 접촉의 범위를 한정했기 때문이었다. 성기나 항문, 유방등에 접촉하는 것을 성적 접촉으로 규정하고 질문을 했다. 클린턴은 이 질문을 자신이 르윈스키의 그 부위에 접촉을 했는지 묻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에서 성적 접촉을 하지 않았다고 답한 것이다(...).

임기 막판까지도 동생 로저 클린턴과 마크 리치로 대표되는 자신의 후원자들을 사면하여 의회에서 퇴임 이후 청문회가 벌어지는 등 그렇게 깨끗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임기를 보냈다.# 이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도덕적 이미지의) 조지 부시의 당선에 어느정도는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미국인들은 그 뒤 깨끗함과 유능함이 무조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2000년대 내내 한숨을 푹푹 쉬어야 했다.

여담인데 당시 늘그막이던 전설적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클린턴의 성추문을 두고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디마지오는 사랑하던 전 아내 마릴린 먼로가 죽은 것을 존 F. 케네디와의 성추문 때문에 죽었다고 여겼기에 높으신 분들의 성추행을 혐오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마지오는 클린턴도 평생을 증오하던 케네디와 맞먹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잘못한 게 클린턴 본인이니 할 말도 없긴 하다. 또한 2013년 발매된 미국의 래퍼 에미넴의 노래 'Rap God' 에서는 이런 가사가 있다.

랩으로 얻은 돈뭉치가 꽤나 빵빵해. 그걸로 먹고 살고 죽여보기도 했지. 빌 클린턴이 집무실에서 르윈스키랑 거시* 느낌을 즐기고 있을 때부터 말야.
(...)


5. 국외 문제

공산주의의 맹주였던 소련이 붕괴하면서 클린턴 집권기간 중에는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거대세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정책을 무리없이 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클린턴의 대외정책은 순탄치 않았다. 심지어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전쟁광"이라는 비판도 들었을 정도니... 역시 아들 부시의 보정을 받았다

국외에서는 1차 북핵 문제와 관련된 인상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온건파로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26], 코소보 공습과 소말리아 개입도 클린턴의 당시 업적(?) 중 하나다. 특히 코소보 공습 때 미군을 파견하여 당시 코소보 분리 독립에 반대했던 유고슬라비아를 찍소리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2008년 코소보는 결국 독립하게 된다.[27]

한편 한국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이 폭탄 테러로 붕괴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즉시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에 순항미사일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라크에 대해서도 비행금지선을 어겼다는 이유로 심심하면 두들겨 팼다.

더불어 수단 공화국에 있는 화학무기공장을 폭격하게 했더니만 그게 남수단의 유일한 아동 백신 제조공장이라서 많은 남수단 아이들을 죽게 한 일도 있었다. 이를 두고 자신의 성추행을 감추고자 일부러 그랬다는 비난을 들었다.

더불어 1998년 핵실험을 강행한 인도와 파키스탄을 중재하러 간다고 손수 인도 공화국를 방문했으나 당시 인도 총리 탈 베하리 바지파이(Atal Bihari Vajpayee, 혹은 Bajpai. 입는 바지와 먹는 파이와는 상관없다)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 미국 대통령이 인도 총리를 먼저와서 기다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28]

미국이 감싸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중동 지역에서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목표가 되기도 했다. 클린턴 스스로도 중동 평화에 관심이 많아 당선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을 이끌어내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에서 미국의 아랍 공격에 항의하는 민중폭동이 이어지면서 결국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도리어 실제적 업적은 차라리 북핵 문제와 관련된 제재의 정당성 확보 및 북아일랜드 분리독립 문제 해결 측면에 있다.[29]

6. 퇴임 후

연임을 마친 후, 퇴임 기념 파티에서 주연을 맡은 영상을 상영했는데, 제목이 Bill Clinton - The Final Days.#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 자신이 영화팬이며, 배우가 되려는 꿈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중간에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케빈 스페이시가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거울 앞에서 수상소감을 읊어보는 대통령의 손에서 트로피를 뺏어가고, 힐러리가 클린턴이 챙겨준 점심까지 쌩까고 차타고 가버리는 장면과 휴 셸튼 당시 합참의장백악관 전쟁상황실에서 배틀쉽 보드게임을 하던 중 대통령이 셸튼 합참의장의 전함을 침몰시키자 셸튼 합참의장이 대통령에게 "You sunk my battleship!" 드립을 치는 장면이 백미다.

퇴임 후에는 수많은 여자들을 후렸던잘생긴 얼굴과 임기 중 얻었던 인기를 발판삼아 인기 강사, 설가로 뛰고 있다. 사실 화술의 달인이기도 하다. 클린턴과 만나 10분만 이야기해보면 그를 까던 사람도 팬이 돼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여운형? 오죽하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라는 평가도 있다.(특히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 은퇴를 해도 한국나이로 55세였다는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 본인도 대통령을 너무 일찍 그만둔 게 아쉬웠는지 국민들이 원하고 능력이 있으면 2회의 임기를 마친 뒤에도 어느 정도 시간을 거쳐 대통령을 다시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미국 내부에서도 평가들도 너무나 젊은 나이에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 30살에 아칸소 주의 검사총장이 되고, 32살에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고나서 사실상 30대와 40대를 주지사로 지내다가 40대 중반에 바로 미국 대통령이 되어서 55살에 퇴임했으니 이건 무슨 일반 회사원이 회사다니다가 정년 퇴직한 것도 아니고(...) 50대에 정계 진출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사람은 50대에 이미 모든 정치 활동을 끝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들을 위로하러 방문했을때도 현직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보다 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퇴임후에도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보수쪽 미디어에서 비아냥거리는 논조로 MTV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때 정치 자금때문에 진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부지런히 여러 강연에 나가기도 하며 활동하였고 수백만불의 빚을 고작 5년만인 2013년 초에 다 갚았다. 이쯤되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실감이 나서 무서울 수준[30].

클린턴 재단이라는 자선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9월에 첫 모임을 가졌는데 적대적 세계보다는 협력의 세계를 만들고, 세계적 상호의존의 부담을 줄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자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31] 실제로 2006년에 버진그룹[32]의 수익 30억 달러를 지구온난화 문제에 쓴다는 약속[33]을 비롯한 73억 규모의 215개 약속을 이끈 바 있으며,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연구원 로스코프는 현시대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라고 평가했다.[34]

2009년 8월 자국의 여기자의 석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여기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또한 북한에게 현대아산 직원과 연안호 선원들의 조속한 석방을 요청한 걸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미국 정부와는 무관한, 자연인 클린턴으로서의 개인적인 활동으로 되어 있으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전 국무부 장관이며 그 자신이 전직 대통령임을 감안하면 단순히 석방을 위한 협상만 한 것이 아닐 확률이 높아보인다.

2010년에는 아이티 지진의 구호활동에도 나섰는데 2010년 2월 12일 심장에 통증을 호소하며 뉴욕의 병원에 입원했다. 2004년에 심장 문제로 수술을 받은 전력과 관련이 있는듯 보인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 가서 미국의 조예선 마지막 경기를 관람했는데 든 도너번의 극적인 인저리타임 골로 자국이 16강에 진출하자 매우 흐뭇해하는 광경도 보였다.

20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타나서 오바마 지지 연설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대선이 박빙으로 흐르면서 오바마가 클린턴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응해 격전지인 스윙 스테이트들을 돌면서 오바마 지지를 호소했다 던 것. 여전히 민주당 정치인들중에선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라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든 밋 롬니가 당선되든 클린턴이 최후승자일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전직인 그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민주당에서 지분이 높아지고, 롬니가 당선되더라도 야당이 된 민주당의 원로 정치인으로 민주당의 간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 심지어 클린턴이 부인 힐러리의 대선 출마를 고려해서 오바마를 지원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오바마의 재선 이후 힐러리의 인기는 계속 오르고 있다. 반면 공화당의 경우 그나마 낫던 롬니가 잘리고 나서는 현재 누구를 올려야 할 지 고민을 할 정도로 막장이 된 상태.

7. 평가

미국 최대의 호황기에 힘입어 오바마가 재선할 때까지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60년만에 최초로 8년 임기를 마친 민주당 대통령이 되었다.[35] 또 후임자 조지 W. 부시의 실정으로 더욱더 클린턴의 업적이 고조되는 측면이 있다. 오바마의 당선, 재선과 함께 보수화되었던 미국 정치판의 축을 돌리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아래에서 보듯 소수민족과 여성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폈으며, 환경 정책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군동성애 정책을 일신한 "묻지도 따지지도 말하지도 않는다(Don't ask, Don't tell)" 정책, 즉 DADT도 큰 성과 중 하나다. 로버트 라이시(노동부 장관)와 같은 젊은 관료와 로이드 벤슨(재무장관) 같은 경륜의 인물도 잘 등용했다.

하지만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정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난과 잡음도 많았다. 클린턴의 결정적인 탄핵안을 비롯해 의회와 대법원에서도 그야말로 박빙의 표결들이 여러차례 연출되었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믿기지 않을지 몰라도, 퇴임 당시 그는 그렇게 고평가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8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으니 그야말로 위기에 강하고 강운을 가진 사나이였다고 볼 수 밖에...

베이비 부머 세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베이비 부머들은 2차 세계 대전 승리후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미국의 낙관주의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대단히 개인적으로 개방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온갖 성추문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누릴 수 있던 것은 동세대의 성격과도 다르지 않다. "공화주의자는 줄을 서고, 민주주의자는 사랑에 빠진다(The Republicans fall in line, The Democrats fall in love.")는 말에 부합하는 대통령.

8. 그 외

중간 이름에 나오듯이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을 존경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둘다 불륜 혐의가 있다.(...) 공화당에서는 당신은 제퍼슨이 아니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월간조선의 관련 기사에 따르면,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가 개봉했을 때, 백악관에서 사람 여럿 불러놓고 본 적 있다. 꽤 만족스럽게 보았다고 하며, 특히 백악관 날아가는 장면에서 엄청 즐거워했다(...)고 한다.

색소폰 불기를 좋아했으며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재임기간 내내 '색소폰 부는 대통령'이라는 기믹이 꽤 유행했었다. 레슬리 닐슨의 패러디 영화에서도 닮은꼴 배우가 색소폰을 부는 장면이 나온다. 더불어 심슨 가족에서도 이런 기믹을 밀고 나온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장면에서 색소폰을 부는 식으로.

어려운 시절부터 끼니를 때웠던 패스트푸드를 대통령 재임기에도 즐겨 먹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 각료들과 햄버거를 먹으며 국무회의를 하기도 했으며 대통령 재임기에도 백악관을 나가 맥도날드의 햄버거를 자주 사 먹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식성이 클린턴의 심장질환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다. 아내인 힐러리는 이런 빌의 식성을 걱정해서 대통령 식단에 여러 야채를 올려뒀지만 그걸 다 먹고 후식으로 콜라 한캔과 과자를 먹는 등, 그런 아내의 노력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하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채식 위주로 식단을 바꾸고 체중을 많이 줄였다.

어머니 쪽 이부(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로저 클린턴은 가수로 활약하고 있고... 더럽게 재미없는 B급 호러영화 펌프킨 헤드 2에 대사 좀 있는 단역으로 출현했었는데 이 영화가 국내 개봉시 내한을 했었다. 당연히 대통령 동생이라는 후광을 받아서. 친아버지 쪽으로 이복형 헨리 레온 리첸탈러(Henry Leon Ritzenthaler)[36]와 이복누나 샤론 리 페티존(Sharon Lee Pettijohn)이 있다.

오랫동안 정치 활동을 벌이고 있는 아내 힐러리 외에도, 딸인 첼시 클린턴(1980년생)도 곧 정계에 진출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워싱턴 정계에 퍼져 있다. 첼시는 대학 졸업 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금융가로 있다가, 언론 리포터와 국제관계학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다. 클린턴 부부가 설립한 대형 재단에 '빌·힐러리·첼시 클린턴 재단'이라 하여 첼시의 이름을 붙이는가 하면 넬슨 만델라 추모식에 첼시를 동반하기도 했다. 단순히 부모로서 딸을 생각하는 수준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공식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라 벌써 정치 후계자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참고로 Fate/Zero에 등장하는 라이더클린톤클린턴을 다레이어스다리우스 왕 급의 강적으로 생각했다(…).

폴아웃3에서 성우로 나와줄 것을 요청받은 적이 있다. 배역은 엔클레이브의 대통령인 존 헨리 이든.(...) 물론 클린턴은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서구쪽 웹을 돌아다니다 보면 클린턴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며 장난스럽게 부르는걸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유투브에서 클린턴 관련 영상을 보면 십중팔구 저런 댓글이 하나 이상은 있을 정도다. 왜 이런 별명이 생긴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37] 흑인 뮤지션들이 애용하는 색소폰을 잘 부는 점이나 대부분의 흑인들처럼 가난한 빈민층 출신인 점, 흑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38] 등등 몇몇 이유때문에 저런 별칭이 생긴듯 하다.

일설에 의하면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혼혈 대통령일 뿐이고 빌 클린턴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 카더라.[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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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CNN을 설립한 언론재벌.
  • [2] 그해 채결된 평화협정의 대표자들을 말함.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가 대표.
  • [3] 인텔의 전성기를 이끈 CEO.
  • [4] 아마존닷컴의 CEO.
  • [5] 클린턴이 르윈스키 스캔들을 부인하며 한 유명한 말. 이 말은 미국 정치풍자 유머에서 많이 쓰인다.
  • [6] 2012년 9월 5일 민주당 전당대회(National convention)에서 하나의 전설이 된 지지연설의 상징. # 대본 말 그대로 오바마가 당선돼야 하는 이유를 경제수치로 단박에 설명해버렸다.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전직 대통령
  • [7] 민주당 까 기질이 다분한 이원복 교수도 21세기를 열어간 악동같은 대통령이었다고 고평가했다.
  • [8] 하지만 최연소 기록은 아니다. 최연소 취임 대통령은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 [9]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
  • [10]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이다.
  • [11] 오락용 약물, 즉 마약을 뜻한다.
  • [12] 출처는 마이클 샌델 저, 김영사, <정의란 무엇인가>, P187(93쇄 기준)
  • [13] 아칸소의 주지사 임기는 2년이었는데, 78년 당선 후 한번 낙선했다가 82년 재기한 후 재선, 임기가 4년으로 늘어난 86년과 90년에 두번 더 당선되어 자그마치 12년이나 주지사를 지냈다. 주지사때는 교육 정책과 여성, 흑인 등용 정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 [14] 총알을 물다(bite the bullet)라는 숙어를 의역하면 "내가 피똥 싸게 인내하는 동안 날라리 클린턴은 놀았다!"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 [15] 어느 흑인 여가수가 우리 흑인들은 허구한날 서로를 죽여대는데 하루라도 백인을 죽이자!라는 선동을 하자 클린턴은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 뿐만 아니라 흑인이 백인을 차별하는 것 역시 인종차별이자 증오라고 이를 비판했고 제시 잭슨은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면서 클린턴에게 사죄를 요구했다.(...)
  • [16] 2010년 지방선거에서 모 서울시장 후보가 이것을 패러디한 구호를 내걸었다. "바보야 평화가 경제야!"… 하지만 간발의 차로 낙선...
  • [17] 수입장벽을 통해 보호무역을 하려는 국가에게 강력한 무역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 미국이 세계 유일의 최강대국이자 최대의 시장이 된 상황이어서 국내시장에 대한 수입장벽을 철회하지 않으면 사실상 수출길이 막히게 되고, 한국같은 수출형 국가에게는 치명적이다.(...)
  • [18] 이후 의료보험 개선은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민영적으로 전국민에게 해당 될 클린턴 의료보험 개혁내용을 축소해 무보험자들을 보장하는데 집중을 하여 통과를 이루었다. 해당 항목 참조.
  • [19] 트 깅그리치가 주도한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으로 지역이슈에만 집중하던 공화당이 자유지상주의적인 공약을 공동으로 내걸면서 40년만에 하원다수당으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의회 개원 후 100일만에 상당수의 공약이 다수당이 된 공화당에 의해 통과되었으며, 심지어 "재정 균형 수정 헌법"까지 (간발의 차로 부결되었지만) 통과될 뻔 했다.
  • [20] 미국의 사법체계에서 위증죄는 엄청난 죄이다. 미국에서 다른 대통령이 관여한 큰 사건중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을 사임까지 몰고 간 것도 '워터게이트 자체'보다는, 이에 관련해 닉슨이 거짓말을 한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
  • [21] 물론 거짓말을 했다고 무조건 문제가 되는 건 아니고 법정에서 작정하고 위증을 했을 때만 문제가 된다. 즉 진실을 알고 있다 해도 대통령이 사실관계를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넘길 경우에는 상관없다. 클린턴의 경우는 법정에서 대놓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
  • [22] 힐러리의 회고에 따르면 "그 때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던 가족은 우리 집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소파에서 자야 했다고 한다. 바람 피운 주제에 변명할 말도 없겠지만. 사실 클린턴은 첫 대선 당내 경선에서도 이미 섹스 스캔들에 한번 휘말렸으나 힐러리의 강공으로 간신히 극복한 상황이었다.
  • [23] 클린턴이 위증혐의를 변호하려고 본인이 법정에서 한 성교(Sexual Relationship)라는 말에 구강성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 변론에서 나온 말이다.
  • [24] 원문은 'Indeed, I did have a relationship with Ms. Lewinsky that was not appropriate.'
  • [25] 특히 not appropriate의 번역어인 '부적절한'은 일본의 정치인들 사이에 대유행이 되어 뭔가 문제가 생기면 갖다붙이는 사과표현이 되었다. 한국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인듯 하다.
  • [26]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이 퇴임 후 남긴 회고에 따르면 미국에서 북폭에 나서려는 걸 자신이 전화걸어서 결사적으로 저지했다고 하나, 사실 지미 카터가 다 해결했으며 정작 YS는 아무것도 몰랐다. 참고로 당시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북한군이 아직 건재한 상태였던 반면 한국군은 현대화가 완성되지 않은 점. 미군 역시 대북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 등으로 인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 [27] 여담이지만 코소보는 이슬람 신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고로부터 자국을 보호해준 미국을 매우 각별하게 생각하며, 특히 코소보 공습을 단행한 클린턴에 대해서는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딴 도로를 만들 정도로 영웅시하고 있다. 후임 아들 부시 역시 코소보 독립을 적극 지지했기에 클린턴만은 못하지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이 자신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코너에 몰려있고, 의회가 탄핵을 착착 준비 중이던 때라는 것. 이런 상황이 영화 'Wag the dog'에서 비꼬이기도 했다.
  • [28] 도와 파키스탄의 핵개발 참조.
  • [29] 클린턴은 자신이 아일랜드계 조상이 있어서 아일랜드 공화국 대선에, 또 "미국이 지난 1803년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땅의 일부인 아칸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프랑스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라고 농담했다. ("과거 랑스 제국 영토였던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든 프랑스로 이사를 가서 6개월간의 거주요건을 충족하고, 프랑스어를 말할 수 있으면 프랑스 대통령선거 입후보가 가능하"기 때문#.)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지만, 클린턴이 아일랜드에 쏟은 관심의 근거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 [30] 힐러리는 당시 공직자라서 수입이 많지 않았을 것을 감안한다면 자연인인 빌 클린턴이 다 갚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 [31] 재단 사이트
  • [32] 운송업계의 재벌이다.
  • [33] Andrew Jack,'Clinton initiative wins $7.3bn pledges,financial times,2006년 9월 22일
  • [34] David Rothkopf,'슈퍼클래스',이현주 역,더난,2008,p443
  • [35] 공화당에선 아이젠하워와 레이건을 이미 배출한 바가 있다. 재선 성공 자체야 닉슨 등이 있는데 사임 크리...
  • [36] 그의 새아버지의 성을 따른 것
  • [37] 흑인 문학가 토니 모리슨(참고로 노벨상 수장작가다.)가 한 말로 이전에도 자주 쓰였지만 오바마 당선 이후로 사용 빈도가 더 늘어난듯 하다.
  • [38] 한 여론조사에서는 미국내 흑인의 90%가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2008년 민주당 경선 초기 당시 흑인 사회에서 힐러리가 정작 흑인인 오바마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었었다고 한다...
  • [39] 다름아닌 모건 프리먼옹이 한 말이다. 흠좀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