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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last modified: 2015-04-07 22:49:50 Contributors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총통
1대 2대
쑨원 위안스카이 (1912.3 ~ 1913.10) 중화민국 건국
중화민국총통
1대 2대
건국 위안스카이 (1913.10 ~ 1915.12) 위안훙
화제국황제
건국 초대 홍헌제 위안스카이 (1915.12 ~ 1916.3) 제제 취소



1912년 무렵의 위안스카이.


1915년 무렵의 위안스카이.

1859년 8월 20일 ~ 191666

袁世凱(원세개) / Yuán Shìkǎi
○○○ Sky[1]. three circles

Contents

1. 개요
2. 백수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다
3. 독재자의 길
3.1. 21개조 조약
4. 제명에 못죽다

1. 개요

말기의 최대 군벌이자 청을 sky로 보내버린 멸망시킨 장본인. 중화민국 2대 총통. 중화제국 초대이자 마지막 황제.[2] sky니까 자칭 천자를 하는 거지 중국 역사상 최악의 한간(漢奸)이라고도 불린다. 그럼 선통제가 아니라 이 양반이 중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 그런데 뒤에 1917년의 정사복벽 사건도 있고 만주국도 있어 좀 애매하다

한국식 독음으로 읽으면 원세개. 중국어 독음으론 위안--카이.[3] 구한말에 조선에 끼친 영향이 막대해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아직 원세개라고 해야 금방 통하며, 위안스카이라고 하면 무슨 서양사람을 떠올리기도 한다. 성룡은 알아도, 청룽은 긴가민가하는거와 비슷하다. 단, 공식적인 표기로는 위안스카이가 맞으며 국정 교과서에도 위안스카이로 기술되어 있다.[4] 현재는 위안스카이가 자주 쓰이다보니 세대에 따라 서서히 단어 교체가 이루어지는 중.

2. 백수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다

커리어의 시작은 조선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청군의 일원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내정간섭을 주도했는데, 이 때 그의 나이가 불과 23세였다.

사실 위안스카이는 진사 시험도 3번씩이나 떨어진 백수였다. 이것을 보면 위안스카이가 별볼일 없는 것 같지만 중국에서 진사가 되려면 먼저 각 성에서 뽑는 200등 안에 들어서 생원이 되어야 하며, 이런 십몇개 성에서 보낸 수천명의 생원가운데서 50등안에 들어야 한다. 아마도 중국의 과거시험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붙기 어려운 관리임용시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숙부의 빽으로 북양군벌의 임오군란 와중의 조선 출병에 말직으로 참가한게 전화위복, 혼란의 와중에 민가를 약탈하던 청군 7명을 잡아서 즉결처형한 것이 정여창의 눈에 들어 6품직을 받고, 주력군 철수 이후 실질적인 조선 공사직을 수행했다.

이후 갑신정변 진압에서도 맹활약했으며,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에 있으면서 사실상 조선주재 청국 공사 역할을 수행하여 이홍장의 명령을 따르며 조선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 청일전쟁 패전 후 이홍장으로부터 넘겨받은 북양군을 틀어쥔 상황에서 1898년 광서제와 캉유웨이(강유위)가 주도하는 무술변법에 협조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뒤통수를 날려 변법개혁을 박살내고 수구파에게 정권을 넘기는 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첫번째 배신 이것이 그가 한간(漢奸) 소리를 듣게 되는 시발점이자, 그의 커리어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 유명한 사건이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당하였고, 서태후가 죽기전날 갑자기 죽는다. 2008년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로 밝혀졌다.

이후 서태후의 총애를 얻게 되었고, 1899년~1901년 의화단 사건 기간에는 의화단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동남자보'에 가담하여 세력을 거의 잃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이홍장의 뒤를 이어 더욱 출세를 타게 된다.[5] 한동안 청의 외무부[6] 총리교섭통상대신이었으나, 청의 마지막 구심점이던 서태후가 죽은 뒤 황제 푸이의 섭정으로 오른 순친왕의 압력으로 낙향한다.[7]

하지만 다시 전화위복.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청조의 요청으로 정계에 다시 진출하니, 오늘날 국무총리급에 해당되는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8]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속으로는 청조를 타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두번째 배신 일단 신해혁명군의 세력을 꺽는 선에서 상황을 멈춘다. 1912년 1월, 위안스카이는 공화파의 쑨원(손문)과 협상 테이블에 앉고 간단한 조건을 내건다. 자신이 청조를 버릴테니 "쑨원 님이 가지고 있는 혁명정부 대총통 자리를 내놓아라능"이라는 것. 쑨원은 1. 공화국을 건설할 것 2. 수도를 난징으로 바꿀 것이라는 두 조건을 요구했고 협상은 타결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 있는 심복 돤치루이(단기서)에게 황제퇴위를 준비시켰고, 그의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하자 같은 해 2월 12일 선통제를 퇴위시켰다. 이로서 청조는 멸망하고,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자리에 취임하며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3. 독재자의 길

하지만 이미 혁명과정에서도 쑨원이 내걸었던 민주적 조건들을 싸그리 무시하던 위안스카이는 총통이 되자마자 독재를 강화해나갔다. 이에 맞서 쑹자오런,쑨원이 동맹회를 확대해 1912년에 국민당[9]을 결성했다. 결국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을 암살시키기도 했다.[10] 그리고는 '공민단'이라는 정치깡패 집단을 사주해 의회를 개박살내고, 1913년에는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여기에 열강 5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차관을 들이는 등 실로 '매국행위 + 독재자' 크리를 밟는다.

이렇게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자, 그는 모든 중국 권력가들의 영원한 꿈인 황제병(;;)에 걸린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해서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11] 세번째 배신 그러나 여러 강대국들, 주위 인물, 혁명파 학생들과 관리들, 민중들이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린다.


중화제국의 국기



  • 황제 등극 과정에서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이른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신문 사건.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오르는 것에 대해 걱정한 부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하는 측근들과 가족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차기 황제를 노리고 있었던 장남 위안커딩(袁克定, 원극정)이 있었다.[12] 위안커딩은 당시 위안스카이가 시세 파악을 위해서 자주 보았던 순천시보[13]를 위조하여 마치 여론이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후, 매일 위안스카이에게 갖다 주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 한 명만을 위해서 위조된 '위안커딩 특제 순천시보'가 위안스카이에게 계속 전해지게 되었는데, 한참 후에 위안스카이가 밖에서 사온 음식물을 싸고 있던 순천시보와 자신이 쭉 봐 왔던 조작 순천시보의 차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된다.[14] 이 때부터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의 믿음이 덜해지자 심지어 동생들을 죽이려는 사변까지 계획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저 황당한 조작 사건으로 비웃음이나 받고 있지만, 당시의 위안스카이는 나름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을 위해서 신문을 찍는다'라는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단(대범?)했던 사건이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리얼 트루먼 쇼라면 이쪽은 세미 트루먼 쇼.

3.1. 21개조 조약

이에 더해서, 그는 황제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21개조 요구에 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산둥성 칭다오를 조차권을 일본이 그대로 가져가고,[15]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기며, 남만주(뤼순, 다롄항)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한다는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재정, 군사, 경찰, 군수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외국에 땅을 할양하는데에 일본과 무조건 협의해야한다는 이 조약은 사실상 매국조약이나 다름없는 병크였다. 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은 베르사유 조약 반대운동인 5.4 운동(1919년)에 나서고, 결국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군사정부도 탄압 끝에 조약을 들어주지 않겠다며 항복한다.

다만, 이 21개조 요구 수용으로 위안스카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있다. 일본이 비밀리에 요구한 21개조 요구가 민중들에게 전해진건 위안스카이가 고의로 흘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실제로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고민이 그를 죽음(1916년)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부지런히 접촉하면서 중국을 연합국에 끼게 하고 또 일본의 조건을 완화하려고 시간을 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라 개입할 여유가 없었고, 협상에 도움이 될 학생들의 봉기를 무력 진압하려 든 것은 문제였다.

4. 제명에 못죽다

한편,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 위안스카이 토벌을 외치며 1912년 6월에 제2혁명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7월에 일본으로 망명갔다. 그리고 쑨원은 일본에서 1914년에 '중화혁명당'을 조직[16]하여 해외에서 '반(反)위안스카이 독재'운동에 헌신한다.

1916년, 전국 각지에서 제3혁명이 일어났지만, 위안스카이는 격렬한 반대 때문에 자진해서 황제에서 물러났고, 떡고물이라도 건지기 위해 중화민국 총통자리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민심은 그를 떠난 후라 그냥 물러나게 된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6월에 급사하면서 제3혁명은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베이징 국민당 정부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부하들이 위안스카이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이양군벌(北洋軍閥, 북양군벌)이 되어 서로 치고받고 싸우게 된다. 어쩐지 종씨인 원소원술이 오버랩되는 인물.

그와 조선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위안커원은 1914년 태종의 무덤인 소릉에 조각되어 있는 6준마 조각을 빼돌리려다가 발각되었고 달아났다. 그러나 2조각은 이미 해외로 반출되었고 4조각도 조각나서 진품은 현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위 물건이다. 잘 보면 금이 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한국 사극에서는 주로 흥선 대원군에게 뺨 맞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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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병음 표기를 보면 알겠지만, '스' 발음은 권설마찰음이라 한국어 '스', 영어 's'와 동일한 발음이 아니다.(이건 '쓰'로 표기한다.
  • [2] 인정하지 않고 반발하는 사람이 많아서 스스로 황제 즉위와 중화제국 선포를 취소해야 했다.
  • [3] 실제론 위엔에 가까운데 외래어표기법에서 위안으로 적게 하고 있다(...).
  • [4] 이는 중국 사람 이름 표기법이 이원화되어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혼란이다. 현행 표기법에는 신해혁명 이전에 사망한 인물은 우리 한자 발음으로, 신해혁명 이후 사망했거나 생존한 인물은 베이징 표준 발음으로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우리 한자 발음이 관용으로 굳어진 경우(주로 연예인)는 이를 허용한다.
  • [5] 의화단 사건 당시 열강에 싸웠던 장수들 대부분이 중앙정부에 있언 인물들이었고, 중앙정부에 있던 인사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이를 계기로 위안스카이가 권력에 한층더 다가간건 당연한일.
  • [6]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총리아문이 폐지되고 그 대체 기구로 외무부 신설.
  • [7] 순친왕은 그를 애초부터 못마땅했었고 심지어 죽일려고까지 계획했었다.
  • [8] 청조가 이런 태도를 보인 까닭은 양군벌 때문이었다. 당시 북양군은 신군(신건육군=신식육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는데, 그들을 지휘하는 기서가 위안스카이의 직속 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북양군을 이끌어 진압시킬려면 그 실권자인 위안스카이가 필요했다.
  • [9] 오늘날 중국 국민당과 관련없다.
  • [10] 쑹자오런은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그가 이끌던 국민당의 인기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에게 있어서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 [11] 당시 어용지식인들, 언론들 총동원해가면서 '제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엄청나게 선전했다.(...)
  • [12] 반면 차남인 위안커원(원극문)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감우'라는 시를 지어 아버지가 황제 자리를 탐내는 것에 대해 경고를 내비쳤을 정도.
  • [13] 일본 외무성이 중국에서 발행했던 신문으로 일본의 입장을 함께 보여주는 신문이었다.
  • [14] 위안커딩의 누이동생의 회고에 따르면 일이 밝혀진 뒤 오빠(위안커딩)가 아버지한테 허리띠로 맞았다고..
  • [15] 당시 독일은 이 곳에 독일인들이 마실 맥주를 만들 공장 시설을 지어놨었는데. 이로인해 일본이 그 시설과 기술을 이어받아 일본의 맥주가 발달됐고, 전후에 그대로 남아 지금도 중국 칭다오 피쥬는 유명하다.
  • [16] 이 중화혁명당이 바로 오늘날의 중국 국민당의 시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