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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클린스만

last modified: 2015-02-16 04:18:40 Contributors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 (Jürgen Klinsmann)
생년월일 1964년 7월 30일
국적 독일
출신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괴핑엔
포지션 스트라이커
소속팀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81~1984)
VfB 슈투트가르트 (1984~1989)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89~1992)
AS 모나코 (1992~1994)
토트넘 핫스퍼 FC (1994~1995)
FC 바이에른 뮌헨 (1995~1997)
UC 삼프도리아 (1997~1998)
토트넘 핫스퍼 FC (임대) (1997~1998)
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 (2003)
지도자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2004~2006)
FC 바이에른 뮌헨 (2008~2009)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1~)
국가대표 108경기 47골

1995 Ballond'or
수상
조지 웨아
2위
위르겐 클린스만
3위
리 리트마넨
1988 독일 올해의 선수
수상
위르겐 클린스만
1994 독일 올해의 선수
수상
위르겐 클린스만

역사스만

Contents

1. 소개
2. 선수생활
3. 감독시절
4. 기타
5. 선수기록
5.1. 리그 기록
5.2. A매치 기록
5.3. 우승 경력
6. 감독기록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루디 푈러
(2000년 - 2004년)
위르겐 클린스만
(2004 - 2006)
요아힘 뢰프
(2006년 -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로타어 마테우스
(1990~1996)
위르겐 클린스만
(1996~1998)
올리버 비어호프
(1998~2000)


1. 소개

현행 외국어 표기법을 따르면 르겐 클린스만이라 적는데, 1990년대 현역 선수로 뛸 당시엔 국내 팬들에게 르겐 클린스만으로 통했다. 지금도 유르겐 클린스만으로 기억하는 팬이 많으며, 사실 어지간한 축구 매니아가 아닌 이상 그냥 클린스만이라고 안다. 그도 그럴 것이 1994 FIFA 월드컵 미국 예선 3차전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환상적인 터닝 발리 슛을 날려 전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장본인이니...그 날 2골을 기록했다. 유르겐이든 위르겐이든 하여간 클린스만.[1]

별명은 황금폭격기(Golden Bomber)와 다이버(Diver). 프리미어리그 시절 페널티킥 유도를 위해 넘어지는 연기를 잘해서 영국에서는 별명이 "diver"이다. 그런데 막상 저 별명을 전해들은 클린스만은 크게 개의치 않아 했고, 토트넘 시절 골을 넣을 때마다 팀원들과 함께 다이빙을 했다. 기자회견에서는 "런던에 다이빙 배우기 좋은 곳이 어디냐"라는 엄청난 드립까지.

1990년대를 장식한 무수한 스타 플레이어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레전드 스트라이커였지만, 묘하게도 인지도가 2% 떨어진다.[2] 그러나 이는 인지도를 해외 / 현시점으로 확장했을 때 얘기고, 당대에는 1990년대까지 극강을 자랑하던 리즈시절독일 국가대표 내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자원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독일 축구계에서 올리버 비어호프라는 걸출한 공격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의 은퇴 이후 스트라이커의 부재로 인한 공격력 부족이 지속적으로 논의되기도 했고.[3] 어쨌거나 역대 독일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계보에서 당당히 우베 젤러, 게르트 뮐러, 칼 하인츠 루메니게, 루디 푈러를 잇는 한 축으로 불리는 위대한 선수였다.

현역 시절의 스타일은 득점기계. 머리, 발 등 축구에서 사용가능한 부위는 일단 갖다대고 득점을 노리는 악착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골대 앞에서 득점을 주워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일단 공을 잡았다 하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위협적인 공격수였다. 드리블이나 스피드, 제공권, 킥력 모든 면에서 준수했던 전천후 스트라이커. 전형적인 클래식 스트라이커의 스타일은 아니었으며, 발재간도 준수한 공격수로서 보다 현대적인 스트라이커의 유형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피지컬로 상대를 누르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최전방 원톱보다 세컨톱으로 많이 기용되었다. 특히 무엇보다도 클린스만을 가장 돋보이게 했던 위협적인 무기는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에 의한 다이렉트 슛이다. 투톱 파트너에게 수비수들이 몰리면 그 틈을 타서 크로스나 패스가 건네지는 순간 최소한의 터치로 날리는 슈팅은 일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커리어 내내 발리나 다이빙 헤딩과 같은 멋진 장면을 많이 연출했다.[4] 극단적인 수비로 일관하며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의 유럽무대에서 이러한 클린스만의 능력은 더더욱 빛을 발했다.

클린스만의 커리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독일 축구 그 자체다. 객관적으로 보면 도저히 우승을 노릴 만한 팀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토너먼트만 나갔다 하면 꾸역꾸역 이겨서 우승해 버리는... 그리고 그 중심에 항상 클린스만이 있었다. 팀의 존망이 달린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냅다 골을 넣어버리는...흠좀무

여튼 실력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문제는 인물이나 캐리어 자체가 기이하달까...
상당히 독특한 행보를 보여줬던 선수였다. 그 문제는 바로 역마살. 위 목록에서 얼핏 보이듯이 여타 전국구 골잡이들과 달리 특정 팀을 대표하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라도나 하면 누구나 나폴리를 떠올리지만, 클린스만에겐 이런 면이 없었다.[5]

저니맨 생활 덕분에 클럽 커리어는 명성보다 초라하다. 보통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을 노리며 에이스 급들은 리그별 최강팀으로 옮기지만 클린스만의 커리어를 보면 슈투트가르트, AS모나코, 토튼햄 핫스퍼, 삼프도리아 등 중하위권 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초창기 슈투트가르트 때의 경우도 보통 선수들은 시작은 중위권팀에서 해도 경력이 쌓이면 리그 강팀에서 쭉 활동을 이어가지만 클린스만은 전성기 때 인테르를 떠나 AS모나코로,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 토튼햄 핫스퍼로 이적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줬다. 덕분에 우승 기록은 별로 없다.

대신에 그는 88 올림픽 당시 서독대표로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건 올림픽대표로 참가한 경험이 있다.

2. 선수생활


클린스만은 여덟살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서, 1982년 슈투트가르트 킥커스(Stuttgart Kickers)라는 2부리그 팀에서 처음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재능을 인정받아 1984년 분데스리가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뛰게 된다. 이후 5시즌 동안 156경기 79골을 넣었다. 거의 경기당 0.5골을 기록한 셈. ㅎㄷㄷ 이어 훌쩍 이탈리아 인터 밀란으로 옮겨 3시즌 103경기 36골[6], 또 훌쩍 프랑스 AS 모나코로 옮겨 2시즌 65경기 29골을 넣는 활약을 펼친다.

그리고 클린스만은 또 훌쩍 떠나는데... 이 독일병정이 선택한 리그가 프리미어리그.
일단 까기로 작심하면 인종 차별조차 서슴치 않기로 악명 높은 영국 팬, 게다가 하필 영국과 독일은 축구판에서 한일전 못잖은 앙숙이거늘...

1994~1995시즌 토트넘 핫스퍼 FC로 이적한 클린스만은 불과 1시즌 동안 41경기 21골을 넣으면서 일약 토트넘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심지어 게리 리네커[7]의 뒤를 잇는다는 찬사까지 들었지만... 다음 시즌 훌쩍 독일로 떴다. 지못미 토트넘.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2시즌 동안 65경기 31골을 넣으며 여전히 녹슬지 않는 기량을 선보였고, 또 훌쩍 이탈리아로 떠나서 1997~1998시즌 삼프도리아에서 뛰었다. 다만 이 때는 1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토트넘으로 임대를 갔다. 삼프도리아에서는 8경기 2골, 토트넘에선 15경기 9골. 네놈은 그냥 하루하루 골 넣는 기계일 뿐이지

이때 토트넘은 강등권에서 허덕였는데, 클린스만이 리그 잔류를 다투는 팀을 상대로 극적인 몰아치기(4골)를 연출하며 팀을 위기에서 구출했다.[8]

하지만 클린스만은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결국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결심한다. 그리고 또 훌쩍 떠났다. 이번엔 미국 캘리포니아로(...) 완전히 이주했다.
한동안 축구계를 떠나 미국에서 조용한 삶을 누리나 했는데,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2003년 미국 오렌지 카운티 블루 스타 팀에 등장, 8경기 5골을 기록한다.

3. 감독시절


은퇴 후 미국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던 도중 독일 국가대표팀은 유로 2004에서 2무 1패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탈락한다.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녹슨 전차군단'이란 비아냥을 듣던 독일 대표팀이었으나, 아득바득 독일답게 토너먼트에서 성적을 냈지만 끝내 한계에 부딪힌 것. 그러자 독일 축구협회는 루디 푈러를 경질하고 발빠르게 클린스만을 대표팀 감독에 선임한다. 6월 23일 독일이 탈락했고 클린스만이 감독직을 맡은 날이 7월 26일. 어느 나라의 축구협회와 대조되는 축구 행정이다

젊은 클린스만 감독은 일단 지휘봉을 잡자 과감한 개혁을 시작했는데, 당시 독일 축구계와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사건으로 철밥통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던 올리버 칸을 내치고 옌스 레만을 주전 골키퍼로 내세운 것을 비롯해 잇달아 반감을 살만한 조치를 내렸다. 캘리포니아 오렌지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생뚱맞게 쏼라쏼라 미국인 체력코치를 데려오더니 선수들의 기초 체력을 따져가며 노땅들을 갈구지 않나, 게르만 정신을 부정하듯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소속이자 독일가나혼혈 공격수 다비드 오동코어를 전격적으로 대표팀에 발탁해 독일 축구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9] 순혈주의를 고집하던 당시의 독일 국가대표팀에 흑인 선수가 뛴다는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화제거리이자 이슈였다.[10][11]

많은 논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이 이끄는 신형 전차군단은 2006 FIFA 월드컵 독일 대회에서 포르투갈을 꺾고 3위를 차지한다. 비로서 클린스만은 감독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제 2의 축구인생을 시작하나 싶었는데... "아 집에서 좀 쉴래"하더니 사임하고 또 훌쩍 떠나버렸다(...).

클린스만이 사임하자 독일 축구협회는 곧바로 클린스만을 보좌했던 수석코치 요아힘 뢰프를 감독으로 선임하였는데 클린스만의 공백은 당시에도 없을거라는 의견이 많았다. 사실 클린스만은 대표팀 감독 취임 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독일 대표팀의 개혁을 주도했으나 선수들의 사기와 팀 케미스트리, 트레이닝 방법 등에만 열중하였지 전술적인 부분은 뢰브 수석코치가 다 알아서 했기 때문이었다. 주제 무리뉴라파엘 베니테스, 펩 과르디올라처럼 자신이 모든걸 맡아서 하는 감독도 있는가 하면 알렉스 퍼거슨이나 프랑크 레이카르트처럼 전술적인 부분은 수석코치에게 상당 부분 일임하는 감독도 있는데 그 반면 클린스만의 경우 아예 그런 부분은 뢰브 수석코치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필립 람의 경우 국가대표와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클린스만을 겪어봤지만 클린스만이 하는 말이라곤 "넌 골을 넣어야 한다. 이길수 있다" 따위의 사기진작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적인 부분에서 미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2008/09 바이에른 뮌헨 감독 취임 후에도 취약한 모습을 보여 줬다. 그런데 트레이닝에는 큰 관심을 보여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 부임시 데려온 피트니스 코치만 무려 4명. 다만 바이에른 뮌헨에서 한 시즌도 채우지 못하고 해임당한 것은 리그에서도 우승권에서도 밀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당시 승승장구하던 FC 바르셀로나에게 완패를 당한 것도 있지만 FC 바이에른 뮌헨 전통의 훈련과 팀 세션을 개혁하면서 상층부와 의견 충돌도 한몫했다.

FC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고 휴식을 취하던 클린스만은 2010년 10월 메이저리그 사커 팀 토론토 FC 자문역으로 취임했고 9개월 뒤인 2011년 7월 30일,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간 관계로 미국 생활이 길었기 때문에 미국 축구계 사정에도 밝은 데다가, 감독으로서 월드컵 3위를 차지한 경력까지 있는 만큼 미국은 꺼낼 수 있는 최상의 카드를 꺼낸 셈이다. 미국은 이미 6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16강까지 달성했는데, 그 이상을 노린다는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2011년 클린스만 감독 취임 후 23승 6무 8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더군다나 미국을 꺾은 그 한 팀은 바로 브라질(!!!) 또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1:0으로 이기기까지 했고 2013 골드컵에서 파나마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조별리그 추첨에서는 영 지못미스러우면서도 묘한 대진이 걸렸다. 자기 입장에서 조 편성 힘들게 나오는거야 북중미 팀들이 늘 겪는 숙명이니 그렇다 쳐도, 첫 상대 가나를 제외한 다른 유럽 두 팀이 독일포르투갈. Aㅏ... 게다가 독일은 자신이 선수로서 족적을 남긴 조국임은 물론 2006 FIFA 월드컵 독일 대회 4강을 이끌었을 떄 수석코치로 자신과 함께 일하고 후임 감독까지 된 요아힘 뢰프가 여전히 감독으로 있어서 묘한 대진이 연출되었다. 독일과 포르투갈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강팀이고 가나도 무시 못하는게 아프리카에서 축구 강국인데다가 2010년에 미국을 탈락시킨 팀이다. 만약에 미국이 2014년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한다면 미국 축구팬들 사이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경기 가나전에서 조지 알티도어의 초반 햄스트링 부상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버저비터 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지난 2번의 월드컵에서 당한 빚을 갚았다. 두번째 경기 포르투갈전에서는 이른 시간 선취골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전에 2골을 몰아넣으며 역전승 일보직전까지 갔으나 종료 직전 동점골을 먹으면서 아깝게 2-2 무승부. 조국인 독일과의 3차전에서는 1-0으로 패배했으나 포르투갈과의 골득실 싸움에서 이기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6강전 벨기에를 상대로 1:2 패배를 당해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조별 본선과 16강에서 보여준 끈끈한 조직력과 물러서지 않는 화끈한 공격력에 사람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클린스만은 지도자로서 한단계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미국 내에서도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는 등 클린스만의 대표팀 감독 임명은 성공적으로 돌아간 셈. 미국축구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다기사

2015년 2월 아스톤 빌라 FC가 강등권에 쳐지게 되자 11일 경질된 램버트의 후임 감독 물망에 오르고 있으나 미국축구협회에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대회까지 클린스만 감독과 계약을 연장했기 때문에 그가 아스톤 빌라의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4. 기타

같은 시대 독일을 대표하는 또 다른 선수이자, 함께 힘을 합쳐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대회 우승을 일궈낸 철인 로타어 마테우스와 심각한 불화를 겪기도 했다. 쉽게 말해 마테우스가 불이라면 클린스만은 얼음, 피차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할 타입이었다. 지금도 축구팬들 사이에선 마테우스가 독일 일간지 빌트와 죽이 맞아서 클린스만을 까댄 것으로 유명한데(...), 결국 유로 1996에선 둘이 대판 싸웠고 마테우스는 대표팀에 불참했다.[12] 그러나 1998년 두 사람은 월드컵 무대에서 다시 동료로서 뛰게 되고, 그냥 노장도 아닌 회춘한 노장인 두 사람은 녹슨 전차군단의 쓸쓸한 몰락을 맛보고 대표팀을 떠나게 된다.

여담으로 댈러스 코튼볼 경기장에서 열렸던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최종전에서 대한민국과 맞닥뜨려 2골을 기록했다. 흠좀무한 터닝슛으로 대한민국을 침묵에 빠트린 주인공(...)


당시 전반을 클린스만의 2골과 리들레의 득점으로 3-0으로 마쳤지만, 후반전을 시작하고 나서 황선홍홍명보의 합작으로 20분 만에 대한민국이 2골을 터뜨려 3-2로 따라붙었다. 후반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거의 걸어다니는 수준이었던 독일 선수들에 비해 대한민국 선수들은 2골을 넣은 후 맹렬한 기세로 독일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결국 3:2로 독일의 승리로 끝났지만, 클린스만 본인은 훗날 당시 경기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그 때 5분만 더 있었다면 우리가 졌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 클린스만은 10년 후 다시 만난 대한민국에게 1:3으로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여담이지만 홍명보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 이후 인터뷰에서, 현역에서 상대해 본 공격수 중 가장 어려웠던 선수로 클린스만을 꼽았다. 브라질호나우두도 잘하긴 했지만 클린스만만큼은 아니었다고.

부친인 故 지크프리트 클린스만 (Siegfried Klinnsmann ~2005) 은 제빵사임에 따라, 지금까지도 언론에서 종종 "빵집 아들"로 수식된다. 지금도 클린스만의 가족들이 슈투트가르트의 보트낭 (botnang) 에 빵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인도 선수시절 초창기에 제빵사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

5. 선수기록

5.1. 리그 기록

시즌클럽리그경기
1981/82슈투트가르트 키커스2 분데스리가61
1982/83슈투트가르트 키커스2 분데스리가202
1983/84슈투트가르트 키커스2 분데스리가3519
1984/85VfB 슈투트가르트분데스리가3215
1985/86VfB 슈투트가르트분데스리가3316
1986/87VfB 슈투트가르트분데스리가3216
1987/88VfB 슈투트가르트분데스리가3419
1988/89VfB 슈투트가르트분데스리가2513
1989/90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세리에 A3113
1990/91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세리에 A3314
1991/92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세리에 A317
1992/93AS 모나코리그앙3519
1993/94AS 모나코리그앙3010
1994/95토튼햄 핫스퍼프리미어리그4121
1995/96FC 바이에른 뮌헨분데스리가3216
1996/97FC 바이에른 뮌헨분데스리가3315
1997/98삼프도리아세리에 A82
1997/98토튼햄 핫스퍼프리미어리그159
2003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USL[13]85

5.2. A매치 기록


연도출장
198720
198882
198941
1990156
199140
1992132
1993106
19941411
199596
1996147
199772
199884
합계10847

5.3. 우승 경력


  • FC 인테르나치올레 밀라노 (1989/90 - 1991/92)
  • FC 바이에른 뮌헨 (1995/96 - 1996/97)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987 - 1998)

    • 1988 Seoul Olympic Bronze medal
    • 1990 FIFA 월드컵 (1) : 1990
    • EURO 1996 (1) : 1996
    • US CUP (1) : 1993

  • 개인

    • 서독 올해의 축구 선수상: 1988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 1994
    • FWA 올해의 축구 선수: 1995 (토트넘 홋스퍼)
    • IFFHS 올해의 세계 최다 득점 선수: 1995

6. 감독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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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004년 12월 19일 부산에서 열린 대한민국독일의 A매치에서 독일이 한국에게 최초로 졌을 때의 감독이 클린스만이었다. 스코어는 3:1로 대한민국의 승리. 한국 쪽의 득점은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이 했다. 독일은 전반에 미하엘 발락이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었다. 보러가기
  • [2] 이는 다이버 논란과 더불어 후술되는 역마살로 인한 끊임없는 이적에서 기인한다.
  • [3] 물론 2002 월드컵에서 루디 푈러 감독이 눈여겨본 폴란드산 헤딩기계가 혜성처럼 출현하고, 이후 애국자가 나타나면서 이런 걱정은 싹 사라져 버렸지만.
  • [4] 일례로 1998년 월드컵 이란전에서 같은 팀의 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반사적으로 다이빙 헤딩한 적이 있는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 일이라 당시 축구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천히 돌려보면, 골포스트맞고 튕겨나오는 공을, 쇄도하던중에 만나, 왼 발로 왼쪽으로 점프한, 다이빙헤딩..
  • [5] 클린스만의 강력한 동료이자 원쑤인 마테우스도 따지고 보면 비슷하다. 뮌헨글라드바흐, 바이에른, 인터밀란 어느쪽이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지만 레전드라고 하긴 참 어정쩡하다. 그나마 꼽자면 바이에른이 어울릴듯 하지만... 둘다 독일의 레전드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듯?
  • [6] 이 때, 오렌지 트리오가 건재하던 AC 밀란을 상대로 스쿠데토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로타어 마테우스안드레아스 브레메와 함께 게르만 트리오로 불리기도 했다.
  • [7] 영국의 스트라이커. 토트넘에서 일본으로 가기 전 3년 간 있었다. 1986년 월드컵 득점왕. 그보단 '축구란 단순하다. 22명이 공을 쫓아 90분간 뛰다가 언제나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란 말로 유명하다.
  • [8] 처음에 왔을 땐 독일 선수라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토트넘 팬들이었으나, 막상 떠났던 그가 다시 오자 구세주라도 온것처럼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리고 팀을 구해냈다.
  • [9] 당시 오동코어는 대표팀 경력이 전무한 상태여서 그 여파가 더 컸다.
  • [10] 사실 2002 FIFA 월드컵 당시 루디 푈러 감독이 가나에서 귀화한 흑인 공격수 게랄드 아사모아를 발탁하긴 했지만, 클린스만이 벌인 잇단 개혁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을 받았다.
  • [11] 앞서 언급된 다비드 오동코어게랄드 아사모아 말고도 21세기 들어서 폴란드계 출신의 미로슬라프 클로제, 루카스 포돌스키, 트르 트로쵸프스키나 터키계인 메수트 외질 등 이민자 2세 출신 선수들이 독일 대표팀에 즐비한 만큼 이제는 대표팀 순혈주의를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수 있다.
  • [12] 이 당시 독일에게 있어 클린스만은 대체불가 자원이었지만, 수비수로 발롱도르까지 거머쥔 걸출한 리베로 마티아스 잠머로 인해 마테우스는 대체가능한 노장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잠머가 1998년 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은퇴하게 되면서 마테우스가 재발탁된다.
  • [13]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하위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