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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last modified: 2019-06-02 09:13:32 Contributors

'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들에 대해 다루는 항목.

Contents

1.
2.
2.1. 중국 고대의 국가 소국 위나라 魏
2.2. 중국 고대 전국시대의 국가 위나라 魏
2.2.1. 역대군주
2.2.1.1. 삼진 분립 전 (진나라 신하)
2.2.1.2. 삼진 분립 후
2.3.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魏
2.4. 한족 염민(석민)이 세운 魏
2.5. 탁발선비가 세운 魏
2.5.1. 북위의 동서분열
2.5.2. 동위(東魏)
2.5.3. 서위(西魏)
3. 묘청이 선포한 爲


1.

중국 주나라 서주 시대부터 존재했던 나라로 원래 주무왕은나라가 멸망하자 태공망 여상(제나라의 시조), 연나라 시조 소공 석 등은 아예 은을 없애하고 했다. 그러나 무왕의 아우(노나라의 시조) 주공 단의 제안에 따라 주왕의 아들 무경을 봉했고 대신 그 주변에 나라, 채나라, 곽나라를 봉하고 각각 무왕의 아우들이었던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봉했다.

이들은 무경을 감시한다는 목적이었기에 삼감이라고 불렸는데 무왕이 죽고 뒤를 이은 성왕이 어리고 주공 단이 섭정을 핑계로 찬탈하려 한다는 명목을 세워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공 단은 3년 만에 진압하고 주모자였던 무경과 관숙 선을 죽였다. 반란이 참가했지만 소극적이었던 채숙 도는 유배보내고 곽숙 처는 삭탈관직했다. 이 때 관숙 선에게는 후사가 없어 관나라는 아예 복국이 되지 못했으나, 채나라는 나중에 채숙 도의 아들 채중 호를 다시 세워 복국시키고 곽숙 처는 다시 곽나라 군주로 봉했다. 또 은나라 수도 일대를 은에서 위로 이름을 바꾸고 무왕의 동생이자 문왕의 여덞번째 아들 강숙 봉을 봉했다. 수도는 조가였다가 초구, 마지막에는 복양으로 옮겼다. 국성은 희씨이다. 은나라 제사는 주왕의 큰형이었던 미자 계(啓)[4]를 세워 송나라(宋)에 봉했다.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았을 때 그 작위는 백작이었지만 경후 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후작으로 올랐고 기원전 771년 견융에 의해 서주의 수도 호경이 함락되었을 때 주 평왕의 요청으로 무공이 (晉), (秦)과 함께 견융을 몰아낸 공으로 공의 시호를 썼다. 이때 무공은 주 왕실의 사도를 겸함으로써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만 해도 (鄭), 송(宋)와 함께 큰 세력이었지만 제나라(齊), 진나라(晉), 송나라(宋), 노나라(魯) 등의 압박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공자들 간의 자리 다툼으로 쇠퇴했는데[5] 장공이 즉위한 후 장공의 서자이자 환공의 이복 동생 주우가 환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충신 석작 등의 수습[6]으로 환공의 또다른 이복 동생 선공을 세워서 내분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선공은 색골이라서 자신의 계모였던 위 장공의 첩 이강을 범하고 아들 급자(急子)를 낳았다.[7] 또 급자의 며느리으로 온 제나라 희공의 딸 선강스틸하고 수(壽)와 삭(朔)이라는 아들을 낳고 선강을 총애하자 선강과 삭은 급자를 모함했다. 선공도 수를 태자로 삼기 위해 원래 태자였던 급자를 죽이려고 했다. 선공은 급자를 다른 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미리 도적들을 매수해 사신이라는 표시를 보면 죽이라고 미리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수가 이복형을 보고하기 위해 백모(白毛)[8]를 가지고 먼저 떠났고 수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알고 통곡한 급자는 스스로 자신이 목표라는 것을 도적들에게 밝혔고 역시 죽음을 당했다. 이에 충격받은 선공은 화병이 들어 숨을 거두었고 수의 동복 동생인 삭이 뒤를 이어 혜공이 되었다.

혜공은 사악해서 평소 급자와 수를 모함했기에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9] 이에 급자의 동생 검모는 우공자 직 등의 협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을 몰아내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혜공의 외숙부뻘이었던 제나라 양공은 그를 지원해 검모를 몰아내고 혜공을 복위시켰다. 혜공은 돌아와 우공자 직 등은 죽였지만 정작 검모는 주나라로 추방시키는 걸로 끝냈는데 그가 주왕의 부마였기 때문이었다.

혜공이 죽자 그의 아들 적이 즉위하니 그가 의공이다. 의공은 덕후질을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본인도 적족의 침공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의공의 신하 굉연(宏演)이 시신이나마 수습했으나, 칼로 엄청 썰려서 (肝) 외에는 고깃덩어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굉연은 그 간을 향해 절을 한 뒤, 주공의 시신을 장사지낼 관과 기구가 없으나, 자신의 몸으로 관을 대신하겠다고 말하고 스스로 칼을 들어 배를 가른 다음 자신의 배 안에 간을 넣고 목숨을 끊었다. 이를 두고 부복납간(剖腹納肝)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나라가 멸망할 뻔 하였으나, 제나라 환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회복했고 수도를 폐허가 된 조가에서 초구로 옮겼다. 의공의 아들 개방은 제나라로 망명해서 나중에 제나라 간신이 되어 역아, 수조와 함께 환공을 악의 길로 빠뜨리고 뒤를 이은 효공이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소공을 즉위시키는 등 제나라를 말아먹기도 했다. 혜공-의공-개방 3대가 문제

위나라 입장을 보면 문제는 개방이 이런 길을 걸었기 때문에 혜공의 후대가 남아 있지도 않았고 백성들은 정통성이 없었던 혜공과 정신나간 의공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래서 비운의 태자였던 급자의 후손을 찾았지만 급자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수의 아들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검모의 동생 소백 석의 장남 신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대공이었다.[10] 하지만 대공은 몸이 약해 곧 죽었고 그의 아우 훼를 세우니 그가 문공이다. 문공은 우수한 임금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진력했고 이렇게 위나라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때문에 문화는 흥성하였지만 문공이 진(晉)나라 떠돌이 공자 중이를 푸대접했다가 중이가 진나라 문공으로 군주가 되자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계속 몰락했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강국인 진(秦), 위(魏) 사이에 끼어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 후에도 위나라 출공과 장공(이름은 괴외) 부자(장공이 출공의 아버지)간의 육상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괴외가 세자 시절 어머니 남자(南子)(...)[11]가 음탕한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자 죽이려고 하다가 뽀록나서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괴외의 아버지 영공이 죽자 괴외의 아들 장공이 임금이 되었으나, 괴외가 다시 돌아와서 장공을 몰아내고 출공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장공이 군주가 되, 또 장공이 쫓겨나고 제나라와 진나라의 입김을 받아 출공이 되는 등 임금이 바뀌는 혼란이 반복되었다. 겨우 위나라 내부의 움직임으로 출공이 복위하여 안정되나 싶더니 출공이 자기를 불러다 임금으로 삼은 신하를 쫓아냈다가 역관광을 당하는 해프닝까지 빚어졌다.

전국시대가 되자 위(魏)의 압박으로 위(衛)나라 성후는 스스로 칭호를 공에서 후로 한단계 낮췄다. 그러나 위(魏)나라는 마음대로 성후를 폐위시켜 버리고 그의 신하였던 자남 경(子南勁)이라는 영공의 방계 후손[12]을 군주로 세웠으니 그가 평후이다.

그 후에는 평후의 아들 사군 때는 작위가 아예 군(君)[13]으로 떨어지면서 완전히 위(魏)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위(魏)가 (秦)에 관광당하기 시작하면서 위(衛)는 야왕(野王)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고을 하나로 영토가 쪼그라들었다. 사기 춘신군열전을 보면 '진(秦)이 위(衛)를 야왕으로 옮겼다(秦徙衛野王)는 기술이 나온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다른 나라들은 멸망시킨 뒤에 왕이나 그 외 제후들을 평민으로 만든 반면 위(衛)만큼은 멸망시킨 뒤에도 야왕으로 옮겨서 작위를 그대로 놔뒀다. 너무 작아서 야왕으로 옮겨 놓고 까먹었을지도[14] 아무튼 그래서 위(衛)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고 현제라는 강력한 중앙집중 정책을 폈던 진(秦)나라에서 유일하게 봉건제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의 아들인 어떻게 존재감을 알아챘는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평민으로 만들어 버렸고 위는 기원전 209년 멸망했다. 그래도 춘추전국시대에 세워진 나라들을 통틀어 진(秦)을 빼고 제일 마지막으로 망한 나라다(...).

위(衛)나라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폐위된 군주는 시호가 없이 이름만 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군주도 있다.

  • 1. 강숙(康叔) 봉(封) 기원전 1040년? - ? : 주문왕의 9남이자 주무왕의 동복 동생으로 옛 은나라 지역에 봉했다.
  • 2. 강백(康伯) 모(牟)
  • 3. 고백(考伯)
  • 4. 사백(嗣伯)
  • 5. 첩백(疌伯) 또는 지백(摯伯)
  • 6. 정백(靖伯)
  • 7. 정백(貞伯) 또는 기백(箕伯) ? - 기원전 867년
  • 8. 경후(頃侯) 기원전 866년 - 기원전 855년 - 건국 때부터 백작이었지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후작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당나라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강고》에 강숙을 “맹후”라 부른 구절을 들어 원래 강숙은 후작이었고 또 제후의 맏이로서 '방백'이었기 때문에 이후 강숙의 후예들이 '백'을 칭한 것은 '방백'의 의미며 사기에 경후 때에 뇌물을 바쳐 후작이 되었다는 것은 이때에 방백의 권위를 잃어 보통의 제후와 같은 칭호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 9. 희후(釐侯) 기원전 854년 - 기원전 813년
  • 10. 공백(共伯) 여(餘) 기원전 813년
  • 11. 무공(武公) 화(和) 기원전 812년 - 기원전 758년
  • 12. 장공(莊公) 양(揚)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35년
  • 13. 환공(桓公) 완(完) 기원전 734년 - 기원전 719년
  • 14. 주우(州吁)(폐위) 기원전 719년
  • 15. 선공(宣公) 진(晉) 기원전 718년 - 기원전 700년
  • 16. 혜공(惠公) 삭(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6년 또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7년
  • 17 검모(黔牟)(폐위)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8년 또는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7년
  • 16-1. 혜공(복위) 기원전 688년 - 기원전 669년 또는 기원전 686년 - 기원전 669년
  • 18. 의공(懿公) 적(赤) 기원전 668년 - 기원전 660년
  • 19. 대공(戴公) 신(申) 기원전 660년
  • 20. 문공(文公) 훼(燬)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35년
  • 21. 성공(成公) 정(鄭) 기원전 634년 - 기원전 600년
  • 22. 숙무(叔武)(폐위) 기원전 632
  • 23. 하(瑕)(폐위) 기원전 631년 ~ 기원전 630년
  • 21-1 성공(복위) 기원전 630년 ~ 기원전 600년
  • 24. 목공(穆公) 속(速) 기원전 600년 - 기원전 589년
  • 25. 정공(定公) 장(臧) 기원전 588년 - 기원전 577년
  • 26. 헌공(獻公) 간(衎)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59년 : 주색잡기와 사냥만 밝히다가 반란이 일어나 폐위되었다. 사실 죽일 수도 있었으나, 호위무사 윤공타가 당시 최고의 활잡이인데다가 추격하는 장수 공선정이 그의 제자라서 화살촉을 뺴고 빈 화살만 쏘면서 놔주는 바람에 망명에 성공하였다.
  • 27. 상공(殤公) 추(秋) 기원전 558년 - 기원전 547년 : 헌공 축출 후 귀족들이 내세운 바지사장임금으로 위헌공 복위 때 폐위되고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가 불쌍했는지 그래도 시호는 줬다.. 단지 그 시호가 일찍 죽을 상 자여서 그렇지(...)
  • 26-1. 헌공(복위) 기원전 546년 - 기원전 544년
  • 27. 양공(襄公) 악(惡)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35년
  • 28. 영공(靈公) 원(元) 기원전 534년 - 기원전 493년 : 보통 영이라는 시호는 사형을 당하거나 폐위된 군주에게 주로 주어지나, 평범한 폭군이 영을 시호로 받는 일도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런 예이다.
  • 30. 출공(出公) 첩(輒)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80년
  • 31. 장공(莊公) 괴외(蒯聵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78년
  • 32. 반사(斑師)(폐위) 기원전 478년
  • 33. 기(起)(폐위) 기원전 477년
  • 30-1. 출공(복위)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70년 또는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56년
  • 34. 도공(悼公) 검(黔) 기원전 469년 - 기원전 465년 또는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51년
  • 35. 경공(敬公) 불(弗) 기원전 464년 - 기원전 432년 또는 기원전 450년 - 기원전 432년
  • 36. 소공(昭公) 또는 소공(橈公) 규(糾)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26년
  • 37. 회공(懷公) 미(亹)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15년
  • 38. 신공(愼公) 퇴(頹)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83년 또는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 39. 성공(聲公) 또는 성공(聖公) 훈(訓) 기원전 382년 - 기원전 372년 또는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 40. 성후(成侯) 속(速) 기원전 371년 - 기원전 343년 또는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 41. 평후(平侯)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35년 또는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5년
  • 42. 사군(嗣君) 경(勁) 또는 효양후(孝襄侯) 기원전 334년 - 기원전 293년 또는 기원전 324년 - 기원전 283년
  • 43. 회군(懷君)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54년 또는 기원전 282년 - 기원전 253년
  • 44. 원군(元君)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41년 또는 기원전 253년 - 기원전 230년
  • 45. 각(角)(폐위) 기원전 240년 - 기원전 209년 또는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09년

2.

2.1. 중국 고대의 국가 소국 위나라 魏

춘추시대에 존재하던 소국으로 지금의 산서성 예성현 일대에 있었다. 기원전 661년에 진(晉)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2.2. 중국 고대 전국시대의 국가 위나라 魏

전국시대에 등장한 나라로 초창기의 수도는 안읍(安邑)이며 후기 수도는 대량(大梁).

본래 진(晉)나라의 일부였지만 진문공 때 공신인 위주[16]의 후손인 위씨가 조씨, 한씨 등과 함께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으면서 진(晉)의 영토를 분할하여 세운 나라로 전국 7웅 중의 하나이며 춘추전국시대 때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전국시대 초기에는 자하, 오기, 서문표 등을 기용하여 서하 지방을 빼앗고 중산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장하는 등 전국시대 초기에 국력이 가장 강성하였다. 군사적으로도 오기가 훈련시킨 정예 중장보병 무졸(武卒)이 유명했다. [17]위혜왕 시대에 하서를 진(秦)에게 빼앗기면서 수도 안읍의 방어가 어려워져 대량(으로 천도한다. 이 때문에 이 나라를 양(梁)나라라고도 한다.

위혜왕(양혜왕) 때 잇따른 패전과 왕위쟁탈전 때문에 국력을 크게 소모하였으며 기원전 225년에 진(秦)에게 멸망한다.

2.2.1. 역대군주

2.2.1.1. 삼진 분립 전 (진나라 신하)

  • 무자(武子) 주(犨) - 필만(畢萬)의 손자이자 망계(芒季)의 아들.
  • 도자(悼子) 과(顆) - 무자의 아들. 결초보은 고사로 알려져 있다.
  • 장자(莊子) 강(絳) - 무자의 아들.
  • 헌자(獻子) 서(舒) - 소자의 아들.
  • 간자(簡子) 취(取) - 헌자의 아들.
  • 양자(襄子) 만다(曼多) - 간자의 아들.
  • 환자(桓子) 구(駒) - ? ~ 기원전 425년. 양자의 아들.

2.2.1.2. 삼진 분립 후

  • 문후(文侯) 사(斯) - 기원전 425년 ~ 기원전 387년. 환자의 손자. 기원전 403년 제후가 되었다.
  • 무후(武侯) 격(擊) - 기원전 387년 ~ 기원전 371년. 문후의 아들.
  • 혜왕(惠王) 앵(罃) - 기원전 370년 ~ 기원전 319년. 무후의 아들. 양혜왕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361년 대량으로 천도하였고 기원전 344년 칭왕.
  • 양왕(襄王) 사(嗣) - 기원전 319년 ~ 기원전 296년. 혜왕의 아들.
  • 소왕(昭王) 속(遬) - 기원전 296년 ~ 기원전 277년. 양왕의 아들.
  • 안리왕(安釐王) 어(圉) -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43년. 소왕의 아들.
  • 경민왕(景閔王) 증(增) - 기원전 243년 ~ 기원전 228년. 안리왕의 아들.
  • 가(假) -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5년. 경민왕의 아들. 진나라(秦)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이 함락당하여, 삼진(三晉) 가운데 마지막으로 멸국됨.

2.3.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魏

서기 220년 후한 헌제에게 선양 받아 건국했고, 조방사마염에게 선양해 265년 멸망했다. 위(삼국시대) 항목 참조.

2.4. 한족 염민(석민)이 세운 魏

350년 후조 출신 염민이 석지를 살해하고 업(鄴)에서 건국하였다. 국호는 위이며 구분하기 위해 염민의 성을 붙여 염위로 불린다. 그러나 건국 후 2년만에[18] 전연의 공격으로 염민이 살해되고, 뒤를 이은 염지도 포로가 되면서 352년 멸망하였다. 역사가 짧아 16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 원황제(元皇帝)[19] 염륭(冉隆) - - -
- 열조(烈祖) 고황제(高皇帝)[20] 염량(冉良) - - -
1대 - 무도천왕(武悼天王) 염민(冉閔) 영흥(永興) 350 ~ 352 350 ~ 352 -
- - - 염지(冉智) - 352 -

2.5. 탁발선비가 세운 魏

위라는 이름을 가진 역대 전근대 중국 왕조들중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고 비중도 가장 큰 나라이다.
자세한 것은 북위 항목 참조.

2.5.1. 북위의 동서분열


육진의 난 진압 결과 선비족의 이주영(爾朱榮) 집단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주영 집단에는 휘하에 고환(高歡), 우문태(宇文泰), 후경(侯景) 등이 있다. 허나 이주영은 이후 530년 궁중 암투로 인해 효장제에게 암살당하였고,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복수를 내세워 군을 일으켜 효장제를 살해하고, 장광왕 원엽(元曄)을 옹립한다. 그러나 방계로 가치가 없었던 원엽은 531년 이주세륭(爾朱世隆)에 의해 폐위되었고, 절민제(節閔帝) 원공(元恭)을 옹립하였다.

이에 반발한 하북각지의 명족들이 이주씨에 대한 반항운동을 시작했고, 과거 휘하 장수였던 고환과 연계하여 원랑(元朗)을 추대하며 연합정권을 수립하였다. 532년 연합군은 업을 점령하였고, 이주조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한릉산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낙양마저 연합군에게 함락당하였고, 이주씨는 소멸되었다. 낙양에 입성한 고환은 이주씨가 세웠던 절민제(전폐제)와 과거 옹립하였던 원랑을 함께 폐위시키고, 새로 효무제를 옹립시켰다.

고환은 진양에서 마음대로 북위 조정을 주물렀다. 효무제는 고환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낙양에서 탈출하여 장안으로 도망가서 우문태(宇文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이에 고환은 황족 원선견(元善見)을 추대하게 되면서 화북 지역에는 효무제를 받아들인 우문태 세력과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한 고환 세력으로 동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북위는 고환 휘하의 동위(東魏)와 우문태 휘하의 서위(西魏)로 분열하게 되었다. 고환은 수도를 동쪽의 업(鄴)으로 옮겼고, 옛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은 양국가의 최전선 지대로 바뀌며 잿더미가 되었다. 이는 북위의 몰락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동위와 서위는 여전히 원씨들이 황제였으나, 둘다 고환과 우문태의 꼭두각시 내지 허수아비 황제들이었다.

2.5.2. 동위(東魏)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시대
북위/남북조시대 북조 남북조시대 북조 북제/남북조시대 북조
  동위   

534~550

건국 후 고환이 진양에서 모든 정사를 휘둘렀고, 그가 죽자 장남 고징(高澄)이 뒤를 이어 전횡을 휘두르게 된다. 549년 고징은 제왕(齊王)에 봉해지며 사실상 북제를 열었다. 그러나 고징은 노비였던 난경(蘭京)에게 살해되고, 고환의 차남인 고양(高洋)이 제왕을 물려받게 되었다. 550년 고양은 효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으며 북제를 건국하였으며 동위는 16년만에 멸망하였다.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 문헌황제(文獻皇帝) [21] 원역(元懌) - - -
- - 문선황제(文宣皇帝) [22] 원단(元亶) - - -
1대 - 효정황제(孝靜皇帝) 원선견(元善見) 천평(天平) 534 ~ 537
원상(元象) 538 ~ 539
흥화(興和) 539 ~ 542
무정(武定) 543 ~ 550
534 ~ 550 -

2.5.3. 서위(西魏)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시대
북위/남북조시대 북조 남북조시대 북조 북주/남북조시대 북조
  서위   

535~556

건국 후 동위처럼 우문태가 화주에서 모든 정사를 휘둘렀다. 535년 도망온 효무제와 사이가 틀어지자 효무제를 독살하고 새로 문제(文帝)를 옹립하였고, 서위가 건국되었다. 556년 우문태가 죽자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사촌인 우문호(宇文護)가 가지고 있었으며 556년 우문호에 의해 공제(恭帝)가 우문각에게 선양하면서 북주(北周)가 건국되었고, 서위 정권은 31년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 문경황제(文景皇帝)[23] 원유(元愉) - - -
1대 서위 중종(西魏中宗) 문황제(文皇帝) 원보거(元寶炬) 대통(大統) 535 ~ 551 535 ~ 551 영릉(永陵)
2대 - 폐제(廢帝) 원흠(元欽) - 551 ~ 554 -
3대 - 공황제(恭皇帝) 원곽(元廓) - 554 ~ 556 -


3. 묘청이 선포한 爲


묘청의 난 때 선포한 나라 이름. 정식 명칭은 대위국(大爲國)인데, 전통적으로 대○국은 ○나라라고도 하니 위(爲)나라라고도 부를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라 금방 망했어요.

상세한 내용은 묘청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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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현대 한국어와 현대 표준중국어(관화)로는 위(衛)와 위(魏)의 발음이 구분되지 않지만, 광동어(Wai6와 Ngai6), 일본어(えい/Ei와 ぎ/Gi), 베트남어(Vệ와 Ngụy)로는 구분된다.
  • [2] 한자에는 이체자(異體字)가 굉장히 많다. 문헌을 뒤져보면 이것 말고도 다른 이체자들이 많이 존재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구자체를 쓰던 시절에 衞가 국가 표준이었다.
  • [3] 현대 표준중국어에서 성조까지 똑같아 한어병음으로는 도무지 구분할 방법이 없는 위(魏)와 위(衛)를 구분하기 위해, 종종 위(魏)를 Wei로 쓰고, 위(衛)를 Wey로 적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한어병음으로 제대로 적을 때는 둘 다 Wèi라고 적는 게 맞지만 영어 등에서 한자 병기 없이 표기할 때는 예외를 적용하는 것이다. 참고로 Wey는 국어라마자(國語羅馬字, Gwoyeu Romatzyh)라는 표준중국어(관화)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한어병음 Wèi에 대응되는 철자이다. 아마 위(魏)는 중국사에서 자주 나타나 자주 표기되므로 표준적인 Wei로 쓰고, 위(衛)는 춘추시대에만 끗발날렸고 전국시대에는 소국이었으며 이후에는 아예 왕조명으로 쓰이지 않아 표기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듣보잡 일반적으로 안 쓰는 표기인 Wey로 쓰게 된 듯하다. 참고로 국어라마자 표기법은 중국의 두 산시 성(산서성과 섬서성. 중국어에서 첫 음절의 성조만 다름)을 로마자로 구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산시 성 항목 참고.
  • [4] 사기에서는 '개(開)'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한경제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라 우왕의 아들 계, 노나라 민공 노민공도 이름을 '개'라고 기록했으며 전국시대 직전 위(魏), , 삼국이 지백을 무찌를 때 공을 세운 장맹담(張孟談)은 장맹동(同)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저자 사마천의 아버지 이름이 사마담(司馬談)이었기 때문이었다.
  • [5] 사실 무공도 자신의 형 공백을 죽이고 즉위했다.
  • [6] 석작은 주우를 죽이고 주우가 군주가 되는데 공을 세운 아들 석후도 죽였는데 이것은 '대의(나라)를 위해 친족도 죽인다'라는 뜻의 '대의멸친'의 유래가 되었다.
  • [7] 참고로 얼마나 급하게 낳았는지 이름이 급하게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 [8] 얼룩소의 꼬리털로 만든 것으로 사신의 상징이었다.
  • [9] 위선공의 재위 기간 19년을 고려해 보면 선공이 즉위한 후에 태어난 혜공은 즉위했을 때 미처 20세도 되지 못했다. 즉 10대에 이미 형들을 헐뜯고 다닌 것. 싹수가 노랗다
  • [10] 소백은 제양공의 주선 하에 계모였던 선강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보았다.
  • [11] 남자(男子)가 아니다! 남자는 송나라 공녀로 '자'는 성을 의미한다. 남은 시호이며 결국 자성이다.
  • [12] 조상 공자 영은 영공의 서자로 문공의 7세손이다. 위에서 장공이 달아나 위나라에 세자가 없을 때 위영공과 남자에게서 모두 영공의 뒤를 이으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받지 않고 출공을 세우도록 권하고 자신은 고사했다.
  • [13] 원칙적으로 오등작은 국(國: 제후의 봉토)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것인데 반해, 군(君)의 경우 가(家: '국'에 소속된 대부의 봉토)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작위 중 최고위이다. 따라서 위나라 군주의 칭호가 '군'이 됐다는 것은 '국' 취급을 못 받고, '국' 내부에 있는 '가'에 준하는 취급을 받게 됐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위나라를 위가(衛家)라고 불렀다는 건 아니고 대우가 가처럼 됐다는 뜻이다. 다만 이전에도 문헌에서 위군(衛君)으로 쓰는 경우들이 있긴 했다. 예를 들어 《논어》의 〈자로〉 3장에서 공자의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질문할 때 衛君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君 자는 위나라 군주의 작위가 '군'이라는 게 아니고(당시에는 '공'이 정식 칭호였음) 일반적인 의미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었다. 근데 사군의 시대에는 위나라 '임금'의 작위가 정말로 '군'이 된 것이다(...). 당시 자로나 《논어》의 편집자는 당시 끗발날리던 '衛君'이 훗날 그대로 정식 칭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 봤을 것이다.
  • [14] 위나라가 진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이래로 진나라 정계에 위나라 사람들이 진출하는 등 얼마 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가 통일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세운 상앙도 위나라 출신이고, 결정적으로 통일 당시 진나라의 권신이자 진시황의 생부로 의심 받아 온 여불위도 위나라 출신이다. 어쩌면 이런 사정들이 위나라 존속에 뭔가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 [15] 영어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조 부호를 제외한 Wei를 쓴다. 현대 중국어에서 성조까지 같은 위(衛)는 Wey로 써서 위(魏)와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세 설명은 衛 단락의 주석을 참고할 것.
  • [16] 위주의 할아버지 필만은 원래 희씨로 주문왕의 15남 고가 봉해진 곳으로 서융에게 망한 (畢)나라의 후손이었다. 바로 위의 위(魏)나라를 진나라가 멸망시키고 위만에게 봉토로 하사해서 씨를 위씨로 고쳤다.
  • [17] 사기에서 무졸은 진나라 예사(銳士)에 버금가며 제나라, 조나라보다 우위라고 했다
  • [18] 건국한지 16년만에 멸망한 동위보다 역사가 더 짧다.
  • [19] 염민 추존
  • [20] 염민 추존
  • [21] 동위 효정제에 의해 추존됨.
  • [22] 동위 효정제에 의해 추존됨.
  • [23] 서위 문제에 의해 추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