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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 그레츠키

last modified: 2015-03-11 09:36:34 Contributors

[1]
이름 Wayne Douglas Gretzky
생년월일 1961년 1월 26일
183cm
체중 86kg
포지션 센터
역대 소속팀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WHA)(1978 ~ 1979)
에드먼턴 오일러스(1979 ~ 1988)
로스앤젤레스 킹스(1988 ~ 1996)
세인트루이스 블루스(1996 ~ 1997)
뉴욕 레인저스(1997 ~ 1999)
국가대표 캐나다 U-20(1977-1978)
캐나다(1981-1998)
등번호 99번[2]
수상내역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 우승 4회
하트 트로피 (MVP) 수상 9회 아트 로스 트로피 (득점) 10회
레이디 빙 트로피 (스포츠맨쉽+기량) 5회
레스터 B 피어슨 트로피 (NHL 선수협 선정 MVP) 5회
콘 스마이스 트로피 (Playoff MVP) 2회
기록 NHL 1,487경기 출장
득점 894골
어시스트 1,963개
총 공격포인트 2,857, +/- +518
플레이오프 208게임 출장
득점 122골
어시스트 260개
총 공격포인트 382

1982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가 레이 레오나드 웨인 그레츠키 리 데커

NHL 전 구단 영구결번
No.99

Contents

1. 개요
2. NHL에 입성하기 전
3. WHA 입단
4. 에드먼턴 오일러스 시절
5. 로스앤젤레스 킹스 시절
6. LA Kings ~ 은퇴
7. 은퇴 이후

1. 개요

캐나다가 낳은 불세출의 아이스하키 선수이자 NHL의 살아 있는 신화. 농구에 마이클 조던이 있다면 아이스하키에는 웨인 그레츠키가 있다는 말이 있다. 실제 둘을 많이 비교하기도 한다. 미국 제일의 스포츠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웨인 그레츠키가 하키의 마이클 조던이 아니고 마이클 조던이 농구의 웨인 그레츠키'라는 찬사를 보낸 바 있을 정도로 그 종목에 미친 영향만 보면 조던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이다. 그의 등번호 99번이 NHL 30개 전 구단 영구결번이 되었고,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의 성화 봉송 첫번째 주자를 하기도 하였다. 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은 이 웨인 그레츠키와 메이저리그재키 로빈슨까지 단 두 명 뿐이다.

2. NHL에 입성하기 전

웨인 그레츠키는 1961년 캐나다의 온타리오주 브랜트포드에서 태어났다. 벌써 두 살 때 부터 기념품 하키스틱을 들고 어머니인 메리를 골키퍼로 하여 골을 넣었다고 전해진다.

북미에 가면 동네마다 야구장 축구장 농구코트 등 사회 체육 기반시설이 잘 되어 있는데에 놀란다. 역시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데, 마찬가지로 하키가 국기나 다름 없는 캐나다는 곳곳에 하키를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날씨가 추운 캐나다의 특성상 부모들이 집 뒷마당에 직접 아이스 링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웨인의 아버지인 월터도 아들들을 위해 뒷마당에 링크를 만들어 웨인과 다른 아들들을 직접 가르쳤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웨인의 재능은 뛰어나, 마을 부모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웨인은 6살때 첫 하키팀에 입단하게 된다. 캐나다의 하키 교육과정은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어, 재능있는 아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팀에 입단하는 것이 보통이다. 입단한 하키 팀은 10세 이상 아동 팀이었는데, 웨인은 6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10세 아동들을 훨씬 능가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웨인은 너무 뛰어나서 자기 나이보다 훨씬 높은 레벨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다. 10세 아동들이 입는 하키 상의가 너무 커서 웨인은 하키 상의 오른쪽을 하키 팬츠의 오른쪽에 집어 넣고 플레이 하곤 했다. 이 스타일은 후에 웨인 그레츠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10살이 되던 해, 웨인은 벌써 85게임에 378골/120어시스트를 기록한다. 하키 신동이 출현했다는 뉴스는 캐나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어린 나이에 벌써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13세가 되던 해에는 기록적인 1000골을 기록한다. 이러한 어린 웨인 그레츠키의 활약은 다른 부모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어, 다른 팀 뿐만 아니라 같은 팀의 부모들까지 야유를 퍼붓곤 했다. 결국 그레츠키가 14세가 되던 해, 웨인의 부모는 웨인을 토론토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웨인의 커리어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으나, 고향에서 웨인이 다른 부모들의 질시, 팀메이트들의 질투 등 여러가지의 압박에 시달렸던 것도 큰 이유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캐나다 아마추어 하키협회에서는 14세에는 고향을 떠나 타 지역에서 플레이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 웨인의 부모들은 협회와 법정 투쟁을 벌여 웨인이 토론토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토론토의 메트로 쥬니어 B 하키리그에서 활약한 웨인은 첫 해에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28게임에 60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32게임에 72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위 리그인 온타리오 하키리그에서 대타로 3게임을 뛰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웨인의 폭발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1977년 온타리오 메이저 주니어 하키리그 (OMJHL) 드래프트때는 체격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전체 3순위로 수 세인트 마리 (Sault Ste. Marie) 그레이하운즈 팀에 지명되었다. 웨인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OMJHL 첫 해에 OMJHL 득점 기록을 갱신하였으며, OMJHL 신인상, 스포츠맨상 등을 수상하였다.

웨인은 입단 당시 자신이 존경하는 캐나다 하키의 레전드이자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레전드 고디 하우 (Gordie Howe)의 백넘버인 9번을 달고 싶어했지만 이미 다른 플레이어가 9번을 달고 있었다. 생각 끝에 감독의 의견을 받아들여 9번에 9번을 더한 99번을 등번호로 달게 되었는데, 이 99번이야 말로 하키 역사상 전설적인 백넘버가 된다. 1978년에는 세계 주니어 하키 챔피온쉽에 캐나다 대표로 선발되어, 최연소 플레이어로써 득점왕, 올스타, 최고 공격수 등의 영예를 안았다.

3. WHA 입단

당시 NHL과 경쟁중이던 신생 하키 리그 WHA (World Hockey Association)는 젊은 스타들을 대거 영입하여 NHL에 대항하려 하였다. NHL은 20세 이하 플레이어 계약 금지 조항이 있었으나 WHA에는 그러한 조항이 없었다. 따라서 웨인은 WHA 팀들의 타겟이 되었으며,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즈의 구단주 넬슨 스칼바니아가 웨인에게 7년간 175만불을 제시하여 웨인은 인디애나폴리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WHA와 레이서즈는 심각한 자금 문제에 직면해 있었으며, 웨인은 레이서즈에서 8경기 출전 후 WHA의 경쟁팀 에드먼턴 오일러스(Edmonton Oilers)에 골키퍼 에디 미오, 포워드 피터 드리스콜과 함께 85만달러에 팔린다. 에드먼턴 오일러스 구단주인 피터 포클링턴은 웨인의 18세 생일날, 웨인과 10년간 캐나다 달러로 3백만불 계약을 성사시키며 오일러스 왕조의 탄생을 예고한다. 웨인은 루키로서 110포인트를 득점하여 리그 스코어링 3위에 화려하게 데뷔하였으며, 신인상을 수상한다.

197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WHA는 드디어 해체된다. WHA팀 중 4개 팀은 NHL에 흡수되었는데, 에드먼턴 오일러스도 그 중 하나였다. 일부 평론가들은 NHL은 WHA보다 재능있는 선수층이 두터우며, 훨씬 더 과격하고 선수들의 체격도 큰 관계로 웨인이 NHL에서 성공하지 못 할 것이라고 내다봤으나, 웨인은 그런 평론가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4. 에드먼턴 오일러스 시절

NHL 입성 첫해인 1979-80 시즌에 웨인은 MVP로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137 공격포인트를 득점하였다. 웨인의 137 포인트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신인 득점 기록이다. 그러나 웨인이 전 해에 WHA에서 플레이 하였으므로 신인상은 받지 못하였다.

1980-81 시즌에는 164포인트를 득점하여 NHL 기록인 보스턴 브루인스의 레전드 필 에스포지토 (Phil Esposito)의 152포인트를 깨기에 이른다. 아울러 바비 오어 (Bobby Orr)의 어시스트 기록인 102개도 깼다. 2번째로 MVP에 선정되게 된다.

1981-82 시즌에는 35년동안 깨지지 않던 기록인 '50게임에 50골' 기록을 깨게 된다. 이 기록은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의 전설적인 골잡이 모리스 '로켓' 리샤드 (Maurice 'Rocket' Richard)가 1944-45 시즌에 수립하고 1980년에 뉴욕 아일런더스의 마이크 보시 (Mike Bossy)가 다시 한번 수립한 기록이었는데, 웨인은 50골을 단 39게임만에 득점하였다. 그 후 웨인은 필 에스포지토의 시즌 76골 기록도 깨버리기에 이른다. 웨인은 1981-82 시즌을 92골, 120어시스트, 80게임에 212포인트로 마감한다. 이러한 믿을 수 없는 활약으로 인하여 웨인은 하키선수로는 처음으로 'AP 올해의 남자선수' 상을 수상하였으며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웨인을 '1982년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한다. 웨인은 매년 자신의 기록을 갱신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2-83 시즌에는 125어시스트, 1984-85년에는 135어시스트, 1985-86년에는 163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에드먼턴을 떠날 시점에는 49개의 NHL 기록을 수립하였다.

하키의 최고 영예인 스탠리컵 플레이오프에서도 이러한 웨인의 업적이 성공으로 바로 연결되었다. 당시의 에드먼턴에는 웨인을 비롯하여 센터 마크 메시에 (Mark Messier), 포워드 글렌 앤더슨 (Glenn Anderson), 야리 커리 (Jari Kurri), 수비수 폴 카피 (Paul Coffey), 그리고 골키퍼인 그랜트 퓨어 (Grant Fuhr) 등 올스타 멤버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축구로 치면 거의 메시,샤비,이니에스타,비야가 이끄는 초호화 스타군단 FC 바르셀로나급의 스쿼드에 메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웨인의 오일러스는 1984, 85, 87, 88년에 스탠리컵 파이널 우승하여 '왕조 (Dynasty)'의 칭호를 얻었다. 웨인은 그 왕조에서도 독보적인 황제로, 그의 위치를 말하면 한마디로 정리된다 8년 연속 MVP.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너무 스타가 많아서 연봉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오일러스는 주축선수인 폴 카피를 트레이드해 연봉절감을 했지만 그럼에도 감당이 되지 않았고. 1988년, 오일러스의 플레이오프 우승 2시간 후, 웨인은 오일러스 구단주인 피터 포클링턴이 자신을 LA 킹스로 트레이드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터 포클링턴의 다른 사업체들이 경영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포클링턴은 현금이 필요하였다. 같은해 8월 9일, 포클링턴은 LA 킹즈 구단주인 브루스 맥날 (Bruce McNall)과 트레이드 협약을 맺어, 오일러스는 LA에 웨인 그레츠키와 더불어 마티 맥솔리 (Marty McSorley), 마이크 크루셸니스키 (Mike Krushelnyski)를 트레이드하고, 그 댓가로 오일러스는 LA로부터 지미 카슨 (Jimmy Carson), 마틴 젤리나스 (Martin Gelinas), 현금 1500만불, 1989년, 1991년, 1993년 드래프트 1st round 지명권을 받게 되었다.

5. 로스앤젤레스 킹스 시절


아이스하키판 남벌

웨인의 트레이드는 캐나다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당시 캐나다 신민주당 원내대표였던 넬슨 리이스 (Nelson Riis)는 캐나다 정부가 나서서 웨인의 트레이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스타디움 밖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구단주 포클링턴의 인형을 만들어 화형에 처하였다. 일부 캐나다인들은 웨인을 배신자라고 비난하였으며, 웨인의 부인인 자넷 존스 (Janet Jones)가 할리우드 여배우였던 점을 의심하여, 웨인이 LA로 가는 이유가 마누라의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는 괴소문까지 나돌기도 하였다. [3]

웨인의 트레이드는 하키에 별 관심이 없었던 LA에 하키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기는 우연찮게도 쇼타임 레이커스를 떠받치던 카림 압둘 자바매직 존슨이라는 거성이 은퇴한 뒤에 밴 액셀라디 디박 정도가 팀의 주축 역할을 하면서 레이커스 입장에서는 바닥을 기던 시점이었다. 야구의 다저스도 88년 우승 이후로 신통찮은 성적을 내고 있었고 NFL레이더스램스도 그저그런 성적으로 별다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한 상황이라 타이밍도 아주 절묘했다.[4] 웨인 그레츠키야 말로 미국 남부에 하키를 전도한 장본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웨인이 LA 킹스에서 활약을 시작하자, 그 여파로 캘리포니아에 하키팀이 두 개가 더 생겼으며 (애너하임 덕스, 산호세 샤크스), 하키의 불모지라 할만한 애리조나피닉스, 텍사스댈러스에도 하키팀이 생겼다 (위니펙 제츠가 피닉스로 이전하여 애리조나 카이오츠가 되었으며 미네소타 노스 스타즈가 댈러스로 이전하여 댈러스 스타스가 되었다).

이전까지 하키는 캐나다와 미국 북동부에서만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캐나다와 미국 북동부는 추운 날씨 덕택에 우리나라 아이들이 축구공 차고 놀듯이 아이들이 어렸을때부터 하키를 즐길 수 있는 여건과 문화가 조성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웨인의 활약에 힘입어 LA는 단기간에 챔피언십에 도전할 정도의 강력한 팀으로 부상하였다. 1992-93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하여 정규시즌에 활약하지 못하였으나, 고디 하우의 포인트 득점 기록을 갱신하여 새로운 NHL 득점왕이 되었고, 플레이오프가 시작되자 웨인은 금세 자신의 기량을 되찾았다. 서부지구 파이널에서 토론토 상대로 결정전인 7차전에 기록한 해트 트릭은 아직까지 많은 팬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만난 동부지구 챔피언인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에 첫 게임 승리 후 아쉽게도 3게임 연속 오버타임 패배를 맛보면서 LA는 그 후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며, 웨인은 결국 LA에 희망이 없다고 보고 트레이드를 요구한다.

6. LA Kings ~ 은퇴


1996년 2월, 웨인 그레츠키가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로 트레이드 되었다는 뉴스가 일제히 모든 언론지상을 장식하였다. 그레츠키는 남은 31게임에 37포인트를 득점하였으며, 블루스는 서부지구 준결승에서 아쉽게 3-4로 탈락하였다. 첫 해의 결과치고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마이크 키난 (Mike Keenan)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올스타 플레이어인 포워드 브렛 헐 (Brett Hull, NHL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레전드 바비 헐의 아들이다)과도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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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그리하여 같은 해 7월, 세인트루이스의 3년간 1500만불 오퍼를 거부하고 뉴욕 레인저스와 2년간 8백만불 (플러스 인센티브) 조건으로 계약한다. 뉴욕 레인저스에서 웨인은 옛 동료였던 센터 마크 메시에와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마크 메시에는 이듬해 프리에이전트로 밴쿠버 커넉스와 계약하여 레인저스를 떠나고, 웨인은 그의 마지막 4 시즌을 뉴욕에서 보내게 된다. 웨인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활약은 1997년 동부지구 결승전으로, 웨인은 플레이오프에서 10골, 10어시스트를 기록하는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웨인 그레츠키, 마리오 레뮤 (Mario Lemieux)를 잇는 차세대 NHL 스타였던 에릭 린드로스 (Eric Lindros)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 패배하게 된다.

그 후에는 뉴욕 레인저스 팀 자체가 94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우승 이후 계속 침체 일로를 걷고 있어서 97년을 이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였으며, 웨인 또한 잦은 부상 등에 시달리며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99년에는 웨인의 은퇴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레인저스의 시즌 마지막 게임 직전에 웨인은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웨인의 마지막 게임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어진 피츠버그 펭귄스와의 1-2 오버타임 패배였다. 게임 후 모든 관중들이 기립박수로 웨인을 맞이하였으며, 스포츠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링크를 돌며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웨인의 이미지는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7. 은퇴 이후


웨인은 그 업적이 후덜덜하다보니 1999년 은퇴 하자마자 명예의 전당으로 직행했다. 그정도로 하키계에 거물급인 인물인만큼 본인도 하키계에 계속 남아있으려 했고, 마침 피닉스 카이오츠의 지분을 살 기회가 생기면서 카이오츠의 지분 10%를 매입해 카이오츠의 구단주가 된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때 아이스하키팀 단장역할을 하기도 한 그레츠키는 2005년 이 팀의 헤드코치가 된다. 하지만 명선수가 명감독이 되지 못한다는 속설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재력도 좋지 않고 선수 육성 능력도 그저 그랬던 카이오츠에서 4시즌동안 143승 161패 24OTL 승률 47.3%의 기대이하의 성적을 냈고 소속팀 카이오츠의 지주회사가 파산하면서 그레츠키도 2009년 헤드코치 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카이오츠에서 손을 뗐다. 이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개인 사업등으로 활동중이며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캐나다 대표팀 단장,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캐나다 대표팀 특별 고문등의 역할로 하키계에 얼굴을 비추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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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13년 열린 윈터 클래식 레전드 올스타전에 초대된 사진이다.
  • [2] 본래 9번으로 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가지고 있던 선수가 있어 99번으로 했다. 훗날 이 번호는 전설이 된다.
  • [3] 자넷 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88년작인 '폴리스 아카데미 5' 이다. 80년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추억의 '폴리스 아카데미' 시리즈를 기억할 것이다. 위대한 남편과 달리 자넷 존스의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 [4] 실제로 킹스의 인기는 팀 창단 이후 최초의 스탠리컵을 차지하는 실적을 낸 최근보다 이 때가 훨씬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