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irected from page "우스만"

E,AHRSS

우스만 이븐 아판

last modified: 2014-11-14 16:19:08 Contributors

عثمان بن عفان
ʻUthmān ibn ‘Affān
우스만 이븐 아판


우스만 시대의 이슬람 영토.

(579)~656, 재위 644~656. 이슬람교의 제3대 정통 칼리파. 예언자의 사위이며, 꾸란의 완성자이자 오늘날의 전근대에 고착된 이슬람을 만든 장본인.

정통 칼리파
2대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 3대 우스만 이븐 아판 4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Contents

1. 우울증을 앓는 메카의 대부호
2. 최초로 강대한 세력을 지닌 이슬람 교도
3. 결함많은 3대 칼리파
3.1. 나약하고 불안에 가득찬 환영받지 못하는 3대 칼리파
3.2. 거대세력의 고삐를 푼 경제정책
3.3. 존경받지 못하는 칼리파
4. 예정된 파멸

1. 우울증을 앓는 메카의 대부호

우스만은 메카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아들이자 메카 최고의 권력집단인 쿠라이시 부족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우마이야 가문 출신으로 스무 살에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서른 살 즈음에는 메카 전역에 우스만 가니(부자 우스만)이라고 불릴 정도의 엄청난 재력가였다. 게다가 그는 종종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미남자로 유명한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사람이었지만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등 심리상으로 불안을 품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우스만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데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스만은 또 다른 사업에서도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막대한 이익을 취한 이후 메카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심리적으로 약했던 사람답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온갖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이토록 광할한 우주 앞에서 자신의 존재는 하찮기만 하고, 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압도적인 존재가 있으며 그는 엄청나게 위대한 존재라는 확신이 불연 듯 들게 되었다. 이런 심리상의 혼란과 불안을 겪으면서 메카로 돌아온 우스만은 곧바로 절친한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를 찾아가 자신의 정신적 불안에 대해 털어놓았고, 그러자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사상과 가르침에 대해 설파했으며, 이는 우스만이 품고 있던 고민을 단숨에 풀어주어 우스만은 그 즉시 이슬람을 믿을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가 속해있던 쿠라이시 부족과 우마이야 가문은 맹렬한 이슬람 반대자들 이었고, 따라서 우스만의 개종은 가족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그의 삼촌인 아부 수피안[1]은 무함마드를 반대하는 세력의 총사령관이었고, 우스만의 양아버지는 무함마드를 목졸라 죽이려 했으며,[2] 두 아내는 자신들의 특권을 무너트릴 위험이 있는 이슬람을 믿는 남편을 비판했는데 이를 들은 우스만은 그녀들과 단숨에 이혼하고 무함하드의 딸 루카이야와 혼인했으며, 그녀가 죽자 다시 한 번 무함마드의 딸인 움 쿨툼과 혼인했다.

2. 최초로 강대한 세력을 지닌 이슬람 교도

거의 최초의 부유하고 거대한 세력을 가진 이의 개종[3]에 이슬람 세력은 환호했으며 우스만은 그가 지닌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해 그의 동료들을 지원했는데, 가장 큰 도움은 그가 지닌 부와 상업 활동을 통해 다져진 인맥이었다.

메카에서 이슬람에 대한 박해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무함마드는 이슬람 세력을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로 이주시키기로 하였으며[4] 이에 필요한 자금협조와 협상은 거의 전적으로 우스만에 의해 행했졌다. 이 시기는 이슬람 세력에게 대단히 힘들었는데, 본래부터 가난했던 대다수의 신도나 노예출신 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부 바크르처럼 부호였던 이들조차 모든 재산을 잃는 등 무슬림들은 기를 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5] 그러나 본래부터 뛰어난 사업 수단을 갖춘데다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과 좋은 가문 출신으로 다져진 인맥을 보유했던[6] 우스만은 대다수의 무슬림이 몰락했던 이 시기에도 새롭게 도착한 지방에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고 인맥을 확충하며 사업을 확장했으며, 메카로의 귀환이후 도피 시절 확충한 사업 기반을 토대로 더욱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모스크 건설, 사막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우물의 공사 및 확보, 군자금 등 이슬람 세력 초창기 그의 막대한 자금은 이슬람이 자리잡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3. 결함많은 3대 칼리파

3.1. 나약하고 불안에 가득찬 환영받지 못하는 3대 칼리파

우마르가 생사를 해매던 그 순간까지도 우마르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권하는 움마 대표자들의 모습에 분노를 터트리며 세속화된 이슬람의 변질을 막아보고자 구축한 슈라집단은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과 변혁을 주장한 알리(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보다는 그들 입맛에 맞는 전형적인 부유층인 우스만을 선택했는데, 이미 상당한 재산과 권력을 장악한 이슬람 상층부에게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과 변혁을 주장하는 알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고, 이에 비해 본래부터 우마이야 가문 출신이자 도피 와중에도 재산을 축적하는데 힘쓰던 상류층인 우스만이 고위층의 세력 유지를 위해서는 더 좋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선택은 시작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우선 우스만은 이슬람이 한창 위기에 빠져 있을 무렵 악전고투하던 전임자들이던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와 달리 아내의 병을 이유로 전투에 불참한 적이 있었으며, 이슬람 군대가 패배하자 무함마드를 버리고 전쟁터에서 도망가는 추태를 보인 적조차 있었다. 물론 다시 복귀해 이후 무함마드를 위해 공헌하나 이런 우스만의 과거는 최초의 남자 무슬림이자 무함마드가 위기에 빠졌을 때 끝까지 그를 보호했으며 초기 이슬람 시기 전투이전 사기 진작을 위해 벌어지던 일기토에서 언제나 대표로 참여했으며, 우스만이 도망친 패배한 전투에서도 암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무함마드를 호위했던 소수에 속했던 그의 경쟁자 알리의 모습과는 지나치게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과거에 보였던 추태 이후 자식이 사망하는 등 악운이 이어지고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이슬람의 분열을 막고자 노력한 아부 바크르, 거짓을 말하지 말라며 펄펄 날뛰며 민심을 수습한 우마르[7], 침착하게 무함마드의 유해의 정리 및 뒷수습에 힘쓰던 알리와는 달리 “이제 우리는 어떻게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며 혼란과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다른 무함마드의 측근들과 우스만과의 사이에 넘지 못할 차이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졌고, 우스만 자신조차 무함마드의 다른 측근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도 나약하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하였으며 그 것을 벌충하고자 필사적일 정도의 자선행위와 노예해방, 기도 및 단식을 행하는 중이었다. 이런 심리적인 불안을 품고 있는 자가 이제 막 팽창하기 시작하고 국가의 체계를 갖추어야 할 이슬람 세력의 대표로 선출되게 된 것이다.

이런 약점 탓인지 그는 칼리파 취임과 동시에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 시절부터 이어져온 꾸란을 집대성하는데 집중해 모순되거나 중복되는 부분을 삭제해 하나의 책으로 엮어 냈으며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꾸란이 되며, 이전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기부를 행하며 단식을 하고 기도를 하는데 노력하면서 필사적으로 칼리파의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우스만의 취임시기부터 그를 탐탁치 않아하던 만만찮은 세력들은 그가 하나의 판본만을 꾸란이라 칭하며 다른 기록들을 멋대로 폐기하는 것을 불쾌해 했으며, 그가 세속 군주처럼 군림하려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3.2. 거대세력의 고삐를 푼 경제정책

탁월한 사업가적 수완을 지닌 우스만은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지금까지 대단히 어설프고 기초적이었던 이슬람 세력의 재정 문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는데, 아부 바크르 시절 국고가 설치되고 재정 운영을 시작하기는 하였지만 대다수의 수입은 메디나에 도착하는 순간 곧바로 분배되었고, 우마르 시기 대팽창을 통해 막대한 부가 흘러 들어왔지만 대다수는 자선 활동을 위해 분배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남는 수입은 병사들의 봉급을 위해 소모되었다. 정리하자면 우스만 이전까지의 이슬람 세력의 재정 정책은 잉여금 축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자선집단과도 같은 성격을 지녔는데 우스만은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부서를 나누는 한 편 재정 수입을 끌어올리고 잉여금을 축적해 국가집단에 걸맞는 재정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하였으며, 각지에서 필요한 경비를 국고에서 조달하기 시작한다.

한 편 지금까지 엄격하게 규제되던 토지 구입은 그의 치세기에 폐지되었으며 오히려 무슬림들이 땅을 구입하고자 국가에게서 돈을 빌리는 것을 권장하기 까지 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훗날 역사가들에게 묘사된 초기 이슬람 세력의 전설적인 부의 축적이 시작되게 된다. 한 편 우마르 시기까지 국가의 봉급을 통해 생활하던 칼리파들의 선례는 전설적인 부를 소유한 우스만에게는 통용되지 않았지만 워낙 부호였던 그의 재정감각은 가난하기 그지 없던 전임자들의 검소한 모습에 비하자면 방만한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었으니 우스만의 그런 경제감각 탓인지 이전까지 적절하게 통제되던 봉급들이 급작스럽게 폭등하는 현상을 보인다.

특히 우스만은 그가 총애하는 이들에게는 막대한 사사금을 하사하였으며, 5000개가 넘는 모스크 및 도로 확장 공사, 우스만 자신을 위한 궁전과 이슬람 중심세력을 위한 궁궐 공사등을 시행하였으며, 또한 광대한 제국의 통신 및 교통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도로 및 운하의 보수 및 건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동시에 우물을 팠으며 농업토지를 개간하고 농업용수를 위한 관개시설을 확충하며 이슬람 세력의 경제 성장을 위해 큰 노력을 했다.

3.3. 존경받지 못하는 칼리파

문제는 이런 경제정책의 과실들은 무함마드 시기 끝까지 반대하다 그들의 영향력 상실을 우려해 마지못해 항복하던 그의 친족인 쿠라이시 부족이 독점하였으며, 우스만 자신도 그와 가까운 씨족인 그들에게 막대한 하사금과 갖은 총애를 하사하며 세력 확장에 도움을 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세력은 이슬람 세계의 균형을 무너트릴 만큼 과도하게 팽창하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우스만의 총애를 받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본래 그가 소유하던 시리아의 영지이외에도 유프라테스 강 상류를 비롯한 영지를 하사받음으로 인해 향후 그가 개별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막대한 도움을 받았다.

한 편 극도로 늘어난 세금 수입을 위해서는 강압적인 수탈이 행해질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우려한 지방 총독들은 우스만의 명령에 저항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집트의 총독인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우스만의 명령을 가장 단호히 반대했는데, 그러자 우스만은 곧바로 아므르를 면직시키고 그의 친족인 압둘라를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했다. 압둘라는 이집트에서의 세수액을 두 배로 증가시키며 우스만을 우쭐거리게 만들었지만 이는 아므르의 말처럼 ‘어미 낙타의 새끼를 굶겨가며 어미 낙타에게서 우유를 짜내고 있는 것’ 이었으며, 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가 그토록 걱정했던 이슬람의 세속화와 경제적 부패 및 압제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또 우스만이 보인 친족 총애 현상 및 방만한 경제력 때문에 그의 선임자이던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의 하다못해 그의 라이벌이었던 알리의 검소하고 절제하던 모습을 통해 이슬람 공동체 내부에서 타의 모범으로 존경받던 것과는 달리 우스만은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별다른 모범으로 군림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 폭넓게 통용되던 검소 및 절제의 생활양식을 따르지 않는 인원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런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대다수의 인원들은 이런 차이와 차별에 불만을 품기 시작하여 무엇인가 잘 못 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으며 우스만의 행위가 초기 이슬람이 그토록 비판하고 반대하던 전형적인 세속 군주의 모습을 띠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반대와 혐오, 분노 및 은연히 낮춰보는 시선도 생겨나고 있었다.

4. 예정된 파멸

그의 지나친 압제 때문에 무거운 세금에 고통 받던 이슬람 제국은 그의 치세 말기 이미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특히 그를 우쭐거리게 만들었던 압둘라가 다스리는 이집트는 과도한 세금 부담에 반대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이집트의 시민들은 제발 압둘라를 해임하고 다른 총독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우스만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전승에 따라서는 칼리파의 직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불쾌해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전승이 진실인가 보다도 친족을 우대하던 우스만의 성향상 압둘라의 해임 요구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음을 예상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요구를 들어줄 경우에는 그의 정책적 실패를 의미함과 동시에 그를 마땅치 않아하는 반대세력이 가득한 시점에서 그의 정책적 실패는 곧 몰락의 시작을 의미했기에 들어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압둘라의 압제를 견디다 못 한 이집트 시민들은 그들의 대표를 칼리파에게 보내 직접 청원하기로 한다.

그러자 당황한 우스만은 당시 이슬람 공동체에게서 폭넓은 존경과 영향력을 행사하던 알리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부탁하나 애초부터 알리가 우스만과의 칼리파 선정전에서 밀린 이유가 그가 칼리파가 될 경우 이런 경제적 부패와 압제를 거부하고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가 주장한 이슬람 세력의 초기 순수성을 유지할 것을 천명했기 때문이었고, 그러니 우스만이 칼리파로서 행한 임무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는 알리는 우스만의 요청을 거부하고[8] 결국 우스만은 마지못해 이집트의 사절단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표면에서는 이집트의 총독 교대를 약속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접견을 끝냈지만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았다 여겨 은연중에 불쾌해 하던 우스만은 남몰래 압둘라에게 지금 돌아가는 사절단을 모조리 처형할 것을 명령하는 서신을 보냈으나[9] 하필이면 귀향하던 이집트 사절단에게 서신을 운반하던 노예가 붙잡혀 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분노한 이집트의 사절들은 폭도로 변해 우스만을 다시 찾아가게 되고, 우스만이 혐의를 부인하자 이집트 사절들은 다소 화가 누그러들며 다른 유력한 후보자였던 무와이야 이븐 아비 수피안의 형제 마르완과의 대면을 요구하나 친족을 아끼던 우스만은 마르완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면을 거부하고 이에 분노한 사절들은 우스만은 칼리파의 자질이 없다며 더 나은 사람(예를들어 알리)에게 칼리파 직위를 넘길 것을 요구한다. 이를 들은 우스만 또한 분노하며 “나의 의무는 신에 대한 것이니 폭도의 명령으로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서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으나 분노한 사절들에게 그런 말이 통용될 리도 없어 결국 폭도로 돌변한 그들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
  • [1] 훗날 우마이야 왕조를 창설하는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파안의 아버지이다.
  • [2] 이 시도는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에 의해 저지된다.
  • [3] 무함마드의 아내 카디자는 부호였으나 개종 이후 사업상에 어려움을 겪었고, 아부 바크르 역시 부호이긴 했으나 무지막지한 대부호는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무슬림으로 개종한 노예들을 해방하는데 막대한 재산을 소비했다. 그에 비해 우스만은 메카에서 압도적인 부를 소유한 것으로 유명했다.
  • [4] 이 계획 자체는 실패하게 된다.
  • [5] 메카에서 이주한 세력 대다수는 상업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는데, 그들이 이주했던 지역은 농업을 중심으로 했던 것이 그들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 [6] 다른 이들은 메카와의 연락이 사실상 끊겼지만 워낙 좋은 집안 출신에 막대한 부와 상층부에 탄탄한 인맥을 지녔던 우스만은 여전히 메카내부 인맥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업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 [7] 그러나 정말로 무함마드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눈물을 흘렸다.
  • [8] 다만 이 점이 알리의 칼리파 직위 이후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런 거부가 다 우스만의 사망을 위한 초석이라고 주장한 우마이야 가문과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곧바로 알리 반대 운동을 시작한다.
  • [9] 혹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친족 중 한 명이 보냈다는 전승도 있다. 이 경우 이미 우스만은 실권을 잃었으며 그가 우대한 쿠라이시 부족이 이미 이슬람 세력을 자신들이 장악한 세속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우스만 이후 쿠라이시 부족이 아닌 누가 칼리파에 선출되더라도 이슬람의 분열은 필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