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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랑

last modified: 2014-11-26 21:56:48 Contributors

Contents

1. 후한 말의 지방관, 삼국시대 나라의 문관
2. 대의 무술인
3. 부론손, 미우라 켄타로만화
4. 후한 건국기의 군벌


1. 후한 말의 지방관, 삼국시대 나라의 문관

王朗
(153 ~ 228)

자는 경흥(景興). 출신지는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본명은 왕엄(王嚴). 아들은 유학자로 유명했던 왕숙이며, 손녀는 사마소의 부인인 왕원희이다.

경전에 통달하여 낭중과 치구의 장으로 임명받았다. 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양사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복상의 예를 취했으며, 후에 효렴으로 천거받고 공부로 초빙받았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서주자사 도겸이 그를 무재로 천거했으나 장안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도겸의 치중으로 있었다. 이때 조욱과 함께 천자에게 왕명을 받들겠다는 표를 올리도록 권했고, 조욱을 통해 표를 올렸다. 도겸은 안동장군, 조욱은 광릉태수, 왕랑은 회계태수로 임명받았고, 이때 사촌형의 모반으로 처형받을 위기에 처한 허정도 보호한다.

그렇게 해서 회계를 다스리던 도중 손책이 장강을 넘어 침입했다. 부친상을 당한 공조 우번이 상복을 벗어가면서까지 손책을 피하라고 했음에도, 자신은 한 왕실의 관리이니 지켜야한다며 고릉을 방비하며 손책군을 상대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손책이 손정의 계책에 따라 사독을 습격하자 주흔과 함께 그를 막으러 갔다 패배하였다. 이때 표류하여 동야까지 밀려갔다. 우번이 동부 후관의 장 을 설득해 겨우 성 안에 들어가나(이때 우번은 노모를 모셔야한다며 회계로 돌려보낸다), 그곳마저도 손책이 군대를 보내니 상승과 왕랑의 군대는 대패한다. 손책은 왕랑의 유학적 명성을 생각하여 그저 문책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그 뒤로 유랑하며 빈곤한 생활을 했고, 아침에 저녁먹을 것이 없어 걱정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친척과 친구를 포용하며 위로하고 모든 행동을 도의에 기초하여 하니 왕랑의 이름은 더욱 높아지고, 이에 조조는 그를 초빙한다. 하지만 곡아에서 출발한 왕랑은 또 표류하여 몇 년이나 고생한 끝에야 도착해 간의대부, 참사공순사로 임명받는다.

213년 위나라가 서자 군좨주, 위군태수를 하고 소부태상대리로 승진한다. 나라의 일을 처리하는데 관용이 있었고 의문이 있는 죄질에는 가볍게 대하며 법을 합당하게 집행하고 옥을 잘 다스려 세인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조조가 육형 회복에 관한 논의를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육형을 회복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종요는 사형에 관한 조항을 가볍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월형이 늘어나게 되니, 이는 불구자를 일으켜서 내시로 삼고, 시체를 살려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오형은 과율에 기록된 것입니다. 사형을 감하는 것을 일등의 법으로 삼게 되면서 죽이지 않고 감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었습니다만, 도끼 모양을 한 형구로 육형을 가한 후에 죄에 따라서 처벌을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전시대에 어진 사람은 육형의 참혹함을 차마 보지 못해 폐지하고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을 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수 백 년이나 지났습니다. 지금 다시 시행을 하게 되면, 많은 백성들의 눈에 감형에 대한 조항이 오히려 제대로 인식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육형에 대한 소문은 이미 도적들에게나 널리 퍼져 있는 것이지, 옛날 사람들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종요가 사죄를 감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형을 감하여 머리카락을 깎는 곤형이나 발을 바르는 월형으로 대신하자는 주장입니다. 죄를 감해주자는 의견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범죄가 증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왕랑이 맞다고 여겼으나, 황제는 아직 촉과 오를 못 평정했으므로 다시 불문에 붙였다.

220년 어사대부, 안릉정후로 임명받으며 조비에게 백성을 양육하고 형벌을 살필 것을 권유하였다. 얼마 뒤 조비에게 황제 하기를 권해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공, 악평향후로 봉해졌다. 이때는 조비의 사냥이 너무 잦다며 상소를 올린다. 222년 이릉대전이 일어나자 조비가 왕랑에게 지금 적을 공격해도 되냐고 묻자 그는 승패가 갈린 다음에 공격할 것을 권한다. 조비가 사다새가 영지지로 모여든 것을 계기로 인재추천을 받자 왕랑은 양표를 추천하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하였지만 조비가 맡은 일을 계속 넘겼다. 손권이 아들 손등을 중앙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자 조비는 군사를 일으켰는데 왕랑은 이를 말렸지만 조비는 결국 장강 앞에서 그냥 돌아오고 만다.

223년 진군, , 갈장등과 함께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번국을 칭하라고 하였으나 제갈량은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고 그저 '정의'라는 글을 지었다. 226년 조비가 죽었을 때 조진, 진군과 함께 조예에게 장의를 전송할 때 더우니 나가지 말 것을 건의하나 조예는 듣지 않는다. 조예가 즉위하자 난릉후에 올랐으며 식읍은 1천2백호였다. 또 모절을 갖고 옥책을 받들어 문소황후의 능에 제사지낸다. 이때 상소문을 올려 백성들을 굽어 살피기를 권하며 사도로 전임한다. 사도를 한 뒤 왕기를 초빙했으나 왕릉이 보내지 않자 편지를 써서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주를 탄핵한다.

228년 11월 사망한다.

장소허정 등과 친했으며, 조방의 대에 왕랑이 지은 역전을 관리등용 수험과목으로 결정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책의 쾌진격에 희생양으로 등장. 엄백호와 한데 묶여서 친구가 돼버렸다. 거기다가 왕랑이 직접 태사자와 칼춤을 추며 일기토를 벌이는 장면까지 나온다.괜히 손녀가 비도를 안 들었다. 손책에게 패배한 뒤에는 한참 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제갈량이 북벌을 하자 제갈량을 회유하러 몸소 나섰으나 제갈량이 준엄하게 반박하자 열받은 나머지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다음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 9권에 있는 제갈량과 왕랑의 설전 부분이다.

왕랑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공명이 수레 위에서 손을 맞잡아 예를 갖추자 왕랑도 말 위에서 몸을 굽혀 답례한 후 입을 열었다.

"공의 크신 이름을 들은 지 오래로 만나뵙지 못하다가 이제야 뒤늦게나마 뵙게 되니 참으로 다행이오이다. 공께서는 이미 하늘의 뜻을 알고 시무에 밝으신 몸이거늘, 어찌하여 명분없이 군사를 일으키셨소이까?"

공명이 대답한다.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치려 함에 어찌하여 명분이 없다 하시오?"

"천수는 변하는 것이고 제위 또한 바뀌는 것이오. 덕있는 사람에게 돌아감이 자연의 이치일지니 지난날 환제, 영제 이래로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천하가 어지러워짐에, 초평, 건안 때에 이르러서는 동탁이 반역을 일삼고 이각과 곽사가 포악하게 굴었으며, 원술이 수춘땅에서 황제를 참칭하기에 이르렀소. 또한 원소는 업땅에서 스스로를 영웅이라 하며, 유표가 형주를 점령하고, 여포가 서주를 집어삼키는 등 그야말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간웅들이 활개치는 바람에 사직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소이다.

그때 우리 태조 무황제 폐하께서는 천하의 간사한 무리들을 소탕하시고 사해를 석권하시어, 만백성이 공경하고 천하 사람들이 그 덕을 우러러보니 이는 권세로서 취함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늘의 뜻에 따르신 것이오. 우리 세조 문황제께서는 문무에 통달하시어 대통을 이어받으셨으니 이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합당한지라, 요가 순에게 제위를 물려준 옛법을 본받아 중원에 자리잡고 만방을 다스리니, 이야말로 천심에 응함이며 인의에 따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지금 귀공은 큰 재주와 큰 뜻을 품고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하면서 어찌하여 천리를 거역하고 인정을 배반하는 일을 행하신단 말씀이오? 공께서는 '하늘에 순종하는 자는 창성하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옛말을 들어보지 못하셨소이까? 지금 우리 대위는 갑옷 입은 병사가 1백만에 훌륭한 용장이 1천명에 달하오. 그런데 어찌 썩은 풀더미 속의 한낱 반딧불로 감히 하늘의 밝은 달빛과 견주려 하시오? 귀공이 지금이라도 창을 거꾸로 잡고 갑옷을 벗어 항복한다면 제후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나라와 백성이 안락하리니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다 듣고 나서 공명이 한바탕 크게 웃고는 입을 연다.

"그대는 한나라의 원로 대신이라 무슨 고견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말씀이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구려. 이제 내가 말할 게 있으니, 모든 군사들은 조용히 들으라. 지난날 환제, 영제 때에 한나라 법통이 흐려지니 환관의 무리가 재앙을 일으켜 나라가 어지럽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천하가 소란하였다. 또한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동탁과 이각, 곽사 등이 연이여 일어나 황제를 핍박하고 백성들에게 잔악하게 굴었도다. 이는 조정에 썩은 나무 같은 관리들만 있고 조정에서는 금수만도 못한 자들이 녹을 받아먹으며, 이리 같은 심사와 개 같은 행실을 하는 무리들이 뒤를 이어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정권을 잡은 탓에 사직은 폐허가 되고 억조창생이 도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내 너의 소행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대대로 동해 가까이 살다가 효렴으로 벼슬길에 들었으면 마땅히 천자를 받들고 국사를 도와 한나라를 평안케 하여 유씨를 일으켜야 마땅하거늘, 너는 오히려 역적을 도와 찬탈을 도모했을 뿐이로다. 그 죄가 깊고 무거워 천지가 용납치 않으며 천하 사람들이 네 고기를 씹어먹기를 원한다. 다행히 하늘의 밝은 뜻으로 한실이 끊기지 않았으니 소열황제께옵서 서천에서 한나라의 대통을 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제 새로운 폐하의 뜻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함에, 너는 아첨하는 신하가 되었으면 그저 몸을 숨기고 머리를 숙여 구차히 목숨이나 이어갈 일이지 어찌 감히 황제의 군사 앞에 나타나 망령되이 천수를 논하는 것이냐?

이 머리 센 필부야, 수염 푸른 늙은 도적놈아! 네놈이 머지않아 황천에 갈 터인즉 무슨 얼굴로 스물네 분의 역대 황제들을 뵈려 한단 말이더냐? 네 이놈 늙은 도적은 속히 물러가고, 즉시 역적의 무리를 내보내 나와 승부를 겨루게 하라!"

공명의 말을 듣고 있던 왕랑은 그만 기가 치솟고 숨이 턱 막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드라마 84부작 삼국지삼국에서도 등장했다. 둘 다 참으로 인상 좋은 할아버지였지만 제갈량을 도발하러 나간 시점에서 사망 플래그를 형성했다. 결국 제갈량의 반박에 참다못해 피를 토하고 쓰러져 사망. 84부작 삼국지와 달리 삼국의 제갈량은 강유에게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놀랐다. 자기 능력을 과소평가

세설신어에는 화흠을 추앙한 일화와 배를 탔을 때의 일화가 있는데, 화흠 항목에 있는 배를 탔을 때의 일화는 이하와 같다.

왕랑은 화흠을 추앙해 화흠이 1년 중 12월에 만물을 모아서 신을 찾아 배향하는 사제일에 자식과 조카를 모아놓고 연회를 열자 이를 따라했으며, 훗날 어떤 사람이 장화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자 왕랑이 따라한 것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니 그렇게 할수록 화흠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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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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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초기 시나리오에서 회계를 차지한 군주로 등장한다. 왕랑 자신의 능력치가 그리 높지 않고, 부하도 없어서 약체 군주.태사자랑 칼질하던 무력(?)은 결코 안 반영했다! 다만 지긴 했어도 제갈량과 설전을 떠서인지 비슷한 포지션인 종요진군의 지력이 70대인 반면 왕랑의 지력은 80을 넘을 때가 있을 만큼 제법 뛰어난 편이고, 부하장수에 우번이라는 정치 지력 둘 다 80을 넘기는 A급 문관이 있어 근처 돌아다니는 재야장수들을 긁어모으기는 바로 옆동네 동오의 덕왕 전하보다는 훨씬 편하다.

삼국지 2에서는 컴퓨터가 맡으면 반 정도의 확률로 외교하러 갔다가 잡혀서 꽤 많이 죽었다. 그래서 꽤 안습세력이고, 대부분 도겸에게 개털린다. 그래도 가끔 역으로 도겸을 털기도 한다. 도겸과 왕랑은 사이가 안 좋았대요, 그래서 맨날 치고박았는데 왕랑은 맨날 졌대요 왕랑:고만해 미친놈아 대체적으로 위치는 좋은데, 군웅할거부터는 안 나온다. 손책이 24국에 거병한 이래 죽었거나.(...) 문관이라 그런지 잘 잡힌다. 십중 팔구는 왕랑이 죽고 우번이 군주인 때가 허다하다.

삼국지 3에서는 지찔이급 군주로 등장. 건업에 타국 소속이 있으면 맨날 엄백호 같이 쳐들어가 달라고 징징거린다. 데모로 틀어보면 알겠지만 틈만나면 다구리 치자고 갈구는데, 아주 환장한다. 왕랑 자체가 잉여라서, 그냥 속 편하게 죽여야 났다. 플레이하면 대체적으로 주흔 아니면 무력형 장수가 아예 없어서, 이마저도 영 시원찮다. 군웅할거라면 손책이 건업 점거해 높은 확률로 연쇄로 멸망한다. 건업 ⇒ 오 ⇒ 회계 순으로. 유비라면 오 밑으로는 남하를 안 하니...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43/37/70/83. 매도, 고무가 있다. 군주로 할 때는 빨리 산월이나 손책이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유요와 엄백호를 정리해서 세력을 키우자. 영웅집결 기준으로 회계에 유찬과 유평, 장안지역에 유략, 시신지역에 낙통, 건안지역에 하제 등 나름 장수들이 있어서 장수진이 허접한 유요와 엄백호를 정리하기는 쉽다. 매력이 없는 버전이라 왕랑, 왕숙, 우번 모두 인재 등용을 잘하는 편이고..

삼국지 10의 능력치는 46/34/76/81/49에 특기는 7개. 설전에선 논파, 항변 특기가 있지만 지력이 70대라 그럭저럭이고, 내정용으로 상업특기가 있어 괜찮다.

삼국지 11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왕랑과 우번의 낮은 매력을 보완할 괜찮은 매력을 지닌 장수도 있다.(보통 왕랑의 아들인 왕숙, 우번의 아들인 우사가 매력이 70대이다. 재미있게도 둘다 막상 섬긴 군주는 조예, 손권) 조금만 인재등용에 신경쓰면 인재추천 이벤트까지 겹치면서 장수를 금방 충원한다. 게다가 공주마냥 주변에 무서운 적이 없어 적당히 어렵게 하고 싶을 때 괜찮은 군주. 다만 9편의 경우는 아랫동네 산월족 때문에 하드코어 군주이다. 당연히 군웅할거 이후 시나리오에서는 조조군 문관이다.

삼국지 12에서는 안타깝게도 제갈량과 설전 중 그의 물 흐르는 듯한 답변에 가슴이 꽉 막혀 말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모습이 일러스트로 나왔다. 하기야 삼국지에서 이 인물의 가장 유명한 일화가 공명과의 설전 부분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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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조형

영걸전 시리즈삼국지 공명전에 주술사라는 레어 클래스로 나온다. 하후무와의 첫 대결에서 잠깐 나오는 거 빼면 주술사가 나오는 일이 없고, 주술사클로 나오는 네임드가 오직 왕랑뿐임을 보면 왕랑을 위한 클래스같기도...공명전에서 주술사가 잉여임은 논외로 하자 하지만 역시나 제갈량과의 설전에 져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었다. 으윽! 꽥!

삼국전투기에서는 율리시스로 나온다. 표류했을 당시에는 캐스트 어웨이의 척 놀랜드로 등장.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삼국지에서는 성우 종국씨가 연기했다. 43부 읍참마속 1편에 첫 등장, 그러나 한 화만에 제갈량과의 설전이 끝나서 겨우 1회만 출연하고 사망했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시리즈 내내 클론무장이었다가 진삼국무쌍 블라스트에 첫 참전. 위나라 무장임에도 진나라 무장(하늘색) 느낌인데 아마 손녀분 때문에 그런 듯.

2. 대의 무술인

산동성 출신으로 당랑권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부론손, 미우라 켄타로만화

부론손이 스토리, 미우라는 작화를 맡았다. '칭기즈 칸=미나모토노 요시츠네설'을 다룬 정신나간 역사 왜곡물. 후속작으로 왕랑전이 있다.1번 항목의 인물이 아니다.

4. 후한 건국기의 군벌

근본을 알 수 없는 점쟁이였지만, 스스로를 왕망이 쫓아낸 황손 유자여라 칭하고 지방 황족들과 호족들을 규합, 한단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대한 황제를 칭했다.

이에 당시 황제이던 경시제 유현이 휘하 황족들 중 경계하던 유수(劉秀)에게 대사마의 직책을 맡겨 하북으로 파견하는데, 유수는 이를 계기로 하북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왕랑을 멸하여 자립했다. 이 유수가 바로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다. 쉽게 말해 주인공의 렙업용 중간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