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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last modified: 2019-10-18 03:13:32 Contributors

Contents

1. 고려 태조 왕건
1.1. 성장기
1.2. 고려 건국
1.3. 견훤과의 대결
1.4. 후삼국 통일과 말년
1.5. 최후
1.6. 능력
1.7. 정치 스타일
1.8. 평가
1.9. 왕건 상
1.10. 오늘날의 왕건
2. 오대십국시대 전촉의 건국자
3. 王鍵
4. 기타

1. 고려 태조 왕건

고려의 역대 국왕
태봉 1대 궁예 초대 태조 왕건 2대 혜종 왕무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려 태조 어진. 이길범 화백의 작품이다.
이 외에 왕건과 인연 깊은 충남 논산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이 있다.
묘호 태조(太祖)
시호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
(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
연호 천수(天授)
왕(王)
건(建)
약천(若天)
배우자 신혜왕후(神惠王后), 장화왕후(莊和王后),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신정왕후(神靜王后), 신성왕후(神成王后), 정덕왕후(貞德王后)
아버지 왕륭(王隆)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
생몰년도 음력 877년 1월 4일 ~ 943년 5월 29일
양력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66세)
재위기간 음력 918년 6월 15일 ~ 943년 5월 29일
양력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26년)

고려태조.

1.1. 성장기

왕건의 족보에 대해서는 의종대에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돈이 많았다. 그의 증조모의 아버지 강충은 집에 천만금을 쌓아놓았을 정도였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즉 왕건의 선대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세력가였다.

왕건의 탄생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세계에 도선 대사의 유명한 예언이 있어 원문 그대로를 소개하면 이렇다.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당시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왔다.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알려주자 세조가 급히 좇아가 만나보고는 마치 진작부터 안 듯 친밀해졌다. 그리고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조사하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은 임방[1]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그리고는 봉인한 봉투를 만들고 그 겉봉에다가,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 그 때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2]3년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왕건의 아버지는 송악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륭이며 후에 후고구려의 궁예왕이 세력을 키우며 명성을 떨칠적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휘하로 들어가 젊은 나이일 때부터 공을 세우며 벼슬도 계속 올라갔다. 아버지인 왕륭이 송악의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왕건의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왕륭의 송악 세력은 패서 일대의 다른 호족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어느 틈엔가 왕건이 호족 세력의 수장격이 되었다는 것은 왕륭과 왕건의 능력과 지략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궁예에게 속한 후 898년 궁예의 명령으로 양주와 견주를 치는 첫 전투에 나섰으나 별 소득이 없었지만, 2년 뒤인 900년에 다시 궁예의 명을 받고 경기도 광주,충주,당성,청주,괴양의 경기도 중남부와 충청북도 일대를 모두 평정해 궁예의 한반도 중부 지역 지배에 궁예에 다음가는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특히, 이후 후백제와 싸울 때에 견훤이 방심한 틈을 타서 해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도읍 바로 아래에 있는 해안가의 나주 지역을 점령했던 일은 최고의 공적이었다. 매우 심한 공방전들이 있어 나중에 929년 견훤이 탈환하고 다시 6년후인 935년 4월에 왕건의 명령으로 고려의 유금필이 재탈환하는 심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주를 통하여 백제의 도읍을 바로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 동안 후고구려와 고려가 백제를 압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왕건이 무역을 통해 세력을 기른 호족 집안 출신이기에 본래 해전에 능한 반면, 견훤은 나주 지역의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대처를 소홀히 했던 데에 있었다. 이후에도 견훤의 고향인 상주에서 견훤과의 수차례의 전투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임금에 다음가는 지위인 시중 벼슬을 받았다.

1.2. 고려 건국

후에 궁예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세력있는 호족들을 숙청하던 중에 어느날 뜬금없이 관심법으로 왕건의 마음을 꿰뚫어 역적모의를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며 왕건을 압박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궁예의 옆에 있던 최응이 붓이 바닥에 떨어져 줍는 척 하면서 왕건에게 복종할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이에 왕건은 스스로 역적모의를 인정하고 죄를 빌자 궁예는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란 칭찬과 함께 처단한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화의 일부를 하사하면서 용서하였다.

이러한 궁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대체적으로 궁예가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해 당시 잘나가던 왕건을 일부러 걸고 넘어져 무언의 경고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심지어는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부인인 강비와 그 소생 왕자들까지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강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패서 호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긴 하다. 왕건도 (내 위세에 눌려서) 역심을 실토했으니 너희들이라고 무사할것 같으냐?라는 것. 궁예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중 벼슬에 있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리도 없고, 게다가 역적모의를 시인했음에도 정직하다는 칭찬과 함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왕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궁예의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저 다음의 궁예와 왕건의 대화는, 요약하자면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니가 주장한 해군 증강계획 말인데, 니가 맡아서 해라" 쯤 된다. 사실상 새로이 증강된 해군은 왕건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되므로 궁예는 그 전에 미리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했던 것.

그러나 이 일로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일단 그 자신이 시중 벼슬에 있으면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궁예의 숙청에 안전할 수 있을지 두려움을 품게 된것이다. 그러던 상황에 고려의 4대 개국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찾아와 지금의 왕은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시중이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왕건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으며 궁예를 제거하고 918년 6월 15일 고려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약간 넘긴 42세였다. 이듬해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1.3. 견훤과의 대결

개성의 왕건 능인 현릉에 있는 왕건의 초상화.
문명 4에서의 왕건 모습은 여기서 따온 듯하다.

고려의 왕이 된 왕건은 초기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들을 잘 구슬려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던 왕건은 후백제견훤과 화친을 맺고 충돌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의 요충지였던 야성을 쳐서 함락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조물성에서 충돌한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승부가 나지 않자 양측은 서로 화친을 맺어 볼모를 교환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조카가 갑작스레 병사하자 견훤은 왕건측의 독살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에 고려를 공격하게 되어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왕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927년에 일어났던 대사건인 '공산 전투'의 대패가 치명타였다. 여기에서 대패해여 호족들이 후백제에 붙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났는데, 결정적인 것은 928년 오어곡성 전투로 왕건이 직접 출정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 전투에서 명지,양식 등 6명의 장군들이 한꺼번에 투항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때는 왕건이 그의 생애 가장 엄격한 처벌을 했는데,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과 장수들의 가족들을 모조리 철퇴로 때려죽이고 시신은 산에 던져 산짐승들과 새들의 밥이 되게 하였다. 칼 대신 철퇴로 죽인 이유는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는 처형법이기 때문... 정사들에서도 왕건이 이렇게 혹독하게 법을 시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적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나온 허구를 그대로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정사들에서는 이때 왕건이 군사들을 궁궐뜰에 집합시키고 투항한 장수들의 가족들을 끌어와 조리돌린 다음 그들을 저자거리에서 참형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다만 왕건의 인덕과 뛰어난 호족관리술 덕분에 '창전투'와 '운주전투' 후의 후백제의 경우처럼 호족들과 관리들의 대규모 투항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각설하고 후백제 견훤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다져진 노련한 전술과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왕건을 몰아 붙였다.

이때에 왕건은 견훤에게 수차례 패하며 수세에 몰렸는데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1만명, 연구에 따라 2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개국 공신이었던 신숭겸마저 전사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왕건은 신숭겸의 도움으로 황급히 도망가면서 대구의 많은 지역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 도주 루트를 따라 대구시가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공산 왕건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본래 공산 전투 당시에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목 하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하였다. 이때 견훤은 왕건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물렸는데 왕건은 견훤의 군사자 숫적으로 열세에 놓여 겁을 먹고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는 여세를 몰아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계략으로 급히 추격해오던 왕건의 군대를 매복술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던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왕건이 견훤을 팔공산으로 유인하기 위해 싸우다가 거짓으로 도주하는 작전을 쓰자, 이걸 사전에 예상한 견훤과 후백제 측은 팔공산 안에 있던 왕건의 매복군 바깥에 역매복군을 둔 다음 거짓으로 왕건의 작전에 말려들어가 추격하는 모양새를 취하다가 왕건군이 팔공산 안에 모두 들어가자 역매복군과 추격군이 기습적으로 역습을 가해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3]

공산 전투 패배 이후 왕건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후백제와 국운을 건 전투를 수 차례 벌였으나 공산전투에서 입은 왕건의 피해가 워낙에 컸기에 이 피해는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아 929년 12월에 벌어진 창전투의 서막인 '저수봉 전투'의 대승리 이전까지 3년여간을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외에도 자신이 친정에 나서지 않은 전투들인 오어곡성과 나주 함락,의성부 함락 등의 패전들을 계속해서 겪게 되었다.

그러나 견훤의 이 상승세는 결국 929년 12월~930년 1월에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크게 꺾여 왕건과 고려는 후백제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기록에서도 나오지만, 이 대패로 인해 후백제는 전사자만 8천여명을 내어 후백제가 멸망한 전투인 일리천 전투의 사망자 5천 7백여명을 훨씬 능가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후백제는 고창전투 패배 직후 견훤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해 후백제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순주를 습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한뒤 순주를 약탈하고 돌아간 사건과 932년 9월과 10월에 상귀와 상애 등의 장군들을 시켜 대규모의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수도 개성과 그 근방과 황해도,충청남도 일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약탈하고[4]이후 왕만세가 이끄는 고려 정규 해군을 대파해 고려에 큰 피해들을 준 사건을 제외하면 모든 전투들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한다.

고창 전투의 경우 이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동 지역의 세 호족 가문이 왕건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중 하나였는데, 왕건 특유의 넓은 포용력과 친신라 정책이 토착 세력들의 호감을 끌었던 듯하다. 승리 후에 왕건은 안동의 호족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 왕건에게 벼슬을 받았던 김선평, 권행[5], 장정필이 안동 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안동 삼태사'라 부른다.

하지만 흔히 이들 김선평,권행,장정필이 이렇게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이야기가 되나, 고려사에는 이들의 독립된 열전이 전혀 없고[6]다만 고려사 지의 경상도 안동부의 설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패배시켰을때 이들이 전공을 세워서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왕건의 경우 유금필,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최응 등의 중앙 조정에서 일하는 자신의 관리들보다 지방의 호족들에게 더 쉽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상부로 부르는 면이 많았다. 일례로 왕건은 몽웅역 전투에서 그 지방의 아전인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의 도움을 힘입어 승리했다는 그 한 가지의 이유로 그 사람에게 대광의 벼슬을 내린 반면 박수경의 경우, 고려 건국 초창기에 왕건의 명으로 견훤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지키는데 파견되어 견훤의 군대로부터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조물성 전투에서는 다른 장군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어 이후 유금필이 왕건을 구원하러 도착할때까지 왕건군이 버틸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발성 전투에서는 왕건이 견훤군에게 포위를 당해 위기에 처하자 사력을 다해 싸워 왕건을 구하고, 이후 일리천 전투에 투입되어 후백제 멸망에 공을 세워 한씨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는 많은 공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왕건 생전에 대광으로 승진한 적이 없다.

이는 최응도 마찬가지로 그는 왕건 정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문신이여서 왕건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뛰어난 신하들도 그(최응)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라고 극찬을 했고 고려 현종때 왕건의 신하들중 문신으로서는 유일하게 태조 왕건의 공신으로 공신각에 배향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살아생전에 왕건에게 대광 벼슬을 받은 적이 없었고, 죽은 직후에 '원보'(元甫)로 추증하고 이후로 계속 추증해 결국 대광의 직까지 올라갔을 뿐이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고창전투의 승리는 그들의 활약이 결정적이였다고 무조건 단정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왕건은 고창 전투에서의 상승세와 매곡성의 공직의 투항으로 인해 충청남도 남부 지역의 정보를 잘 알 수 있게 되자 공직의 안내로 932년 7월 '일모산성' 공격에 직접 나섰고, 견훤은 불리해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또 왕건이 일모산성 공격에 직접 나선 틈을 타 932년 9월과 10월 부하 장수 상귀와 상애 등으로 하여금 개경과 그 근방과 황해도,충청남도 일대를 공격해 파괴하고, 왕만세가 이끄는 고려 정규 해군을 대파하여 왕건은 고려 건국 후 처음으로 해전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왕건이 비록 바닷가에서 태어나 물에 익어 해전에 능했다고는 하나 견훤도 나주를 빼앗긴 후에 절치부심하여 열심히 해군력을 길러 왔던 것이다. 그러나 1년전에 참소로 인해 곡도(지금의 백령도)로 귀양가 있던 유금필이 자신의 귀양지인 곡도와 인근의 포을도, 2개 섬에 배치되 있던 해군들을 급히 수습해 이들 후백제 정규 해군을 대파하자 그 기세가 완전히 꺾이게 된다.[7]유금필이 이때 이 2개 섬의 해군만으로 후백제 정규 해군을 대파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이후 후백제 해군이 다시 고려의 영토와 바다를 침략해 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935년 4월(동국통감의 기록.)왕건의 명령으로 유금필이 929년에 고려가 빼앗겼던 나주와 목포,진도와 인근 섬들을 다시 재탈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역습까지 가능한 상황으로 수군을 재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모산성 공격에 나선 왕건은 5개월만인 같은 해 11월인 932년 11월에 일모산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견훤은 927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함락시킨 후 신라의 친백제 정권 수립을 위해 경순왕을 옹립했지만, 경순왕은 견훤의 뜻과 다르게 여전히 친고려적인 성향을 계속해 보인 것에 분노해 아들 신검을 시켜 933년 5월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기습적으로 침략해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켜 후백제에 정식으로 합병하려는 계획을 시도했다. 고려는 927년과는 달리 뒤늦게나마 이 사실을 알고 당시 신라의 의성부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시켜 신라를 구원하도록 했고 이때 유금필은 사정이 급박했던 관계로 장사 80명을 선발해 결사대를 조직해 신라 수도 경주를 지키러 출발했다. 양측은 사탄에서 부닥치게 되었지만 유금필과 부대원들의 위용에 눌린 신검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으며 이후 돌아가는 길에 자도에서 신검의 군대와 맞붙었지만 유금필 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후백제 군은 금달,환궁 등 장군 7명이 포로로 잡힌 것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극찬했다. 이후 개선한 유금필을 맞이하게 된 왕건은 옥좌에서 내려와 유금필의 손을 잡으며 '그대가 세운 전공은 옛적에도 드물었으니 내가 이것을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에 유금필은' 나라의 어려움에 자신을 잊고, 나라의 위급함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당연한 도리인데, 성상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라고 왕건의 극찬을 물렸으며, 이에 왕건은 유금필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8]

이와 같은 상승세를 힘입어 고려는 934년 9월 후백제에게 빼앗겼던 운주를 다시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왕건이 친정했다. 이에 견훤은 이를 막기 위해 5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친정에 나섰으나 930년 고창 전투 이후 몇 년동안 대부분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사기충천해진 고려군과 이미 후백제군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 된 백전백승의 후삼국시대 최대의 명장 유금필[9]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였고, 견훤은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눈치채 왕건에게 여기서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서로 화친할 것을 제의했지만 견훤의 약세를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의 허락을 얻어 강한 기병들을 동원해 후백제군이 진을 치기도 전에 돌격해 3천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후백제는 후백제 최고의 용장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상달,최필과 책사 종훈, 견훤의 어의(御醫)로 추정되는 의사 훈겸이 사로잡히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퇴각했으며 이 전투 이후 웅진 이북의 30여군이 일제히 고려에 투항하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견훤은 68세에 이른 고령의 나이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체감하고 자신이 정한 후계자에게 후백제의 제위를 물려줄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견훤은 후계자 계승 문제에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해 아들이었던 신검에게 왕위를 강탈당하고 유폐당하였던 견훤고려에 귀순하였는데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대인배의 면모를 드러내어 민심을 얻고 이를 후백제와의 결전에서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간파하여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진다. 상보란 한자로 尙父로 쓰며, 이 때는 아비'부'가 아닌 어르신'보'로 새겨읽으므로 상부가 아닌 상보가 정확하다. 왕이 손위의 권신에게 사여하는 존칭으로써, "그대는 우리 아버지(즉 선왕)보다 못하지 않음"정도의 뉘앙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은 10살 차이 이렇게 견훤마저도 왕건에게 큰 대접을 받자 견훤은 감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견훤마저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에 신라도 고려에 투항해왔고, 발해가 멸망한 후에 태자가 유민들을 이끌고 망명하자 이 또한 받아들이니, 이 시점에서 고려의 국력은 이미 후백제를 훨씬 압도하였다.

1.4. 후삼국 통일과 말년

왕씨족보에 그려진 왕건
이때에 신검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몇개월만에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라 왕건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왕건이 발해계 잔당과 북방의 이민족, 그리고 견훤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대의 세력을 아우른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자 후백제는 망했어요...마침내 후삼국시대를 50년만에 종결시켜 삼국통일을 이루는 대업을 이루었다.

후삼국의 통일 사업을 완수한 후에는 국가의 체계와 기틀을 잡는 한편 장남이었던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왕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은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이었으나 그 외가쪽 가문의 세력이 무척 한미하였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호족들로 부터 얻은 아들들이 왕위를 탐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렇게 장남을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이 덕분에 본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장남 왕무가 훗날에 왕건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왕건은 최후에 자신이 무척 아꼈던 충복이었던 강직한 재상 박술희왕규를 불러들여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고 그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고려의 왕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데 참고해야 할 훈요 10조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1.5. 최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왕건의 붕어를 매우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재위 26년째인 서기 943년 5월 정유일, 재신(宰臣) 염상(廉相)과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한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 '대개 생명이 있는 천하 만물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며 만물의 자연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것이 있으랴.' 하였으니, 전고(前古)의 명철한 군주는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에 걸린 지 이미 20일이 지나 죽음을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도성 안팎의 중요한 일은 경들이 태자 무(武)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 하였다.

며칠 후인 병오일. 이 날 죽기 직전에 왕건은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에게 유조를 적게 했다. 유조에는 내외의 모든 관료들은 다 태자의 명령을 따르도록 할 것이며,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나라 문제위나라 문제의 고사에 의거하여 검소하게 지내라고 지시했다. 이 유조를 다 불러 주고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말이 없던 왕건이 갑자기 훼이크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혼란스런 한반도를 통일하고 오백년 고려의 왕업을 다진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1000년간의 통일 한반도의 기틀까지 다진 이 영웅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잠시 후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완전 쿨함

1.6. 능력

당대에 왕건 자신의 군사적 능력도 결코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패서 왕건의 집안이 해상 호족 세력이였던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은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년 동안 시달렸다. 또 견훤의 고향인 상주를 둘러싼 여러 차례 공방전에게 결국 승리함으로 육전에서도 견훤을 격파하는 면을 보였다.

하지만 고려 건국 이후의 왕건의 군사적 능력은 견훤보다는 한 수 아래였던 듯. 공산 전투에서는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탈탈 털려서 신숭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 했고, 장기인 해전에서도 비록 나중에 되찾았다고는 하나 나주를 빼앗기는 등, 나중에는 견훤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궁극의 화친 능력과 유화력. 견훤의 아버지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영향권에 들게 하고, 견훤이 세운 신라의 왕인 경순왕도 아군으로 끌어들여 신라를 자신의 편으로 붙게 했다. 또한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킨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도 토착 호족 세력의 마음을 빼앗은 덕분에 가능했었다. 놀라운 수준의 화친 능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았다(...). 이런 결과는 물론 정략이나 용인술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 토대가 되는 왕건 자신의 인화력이 대단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항우유방과 같은 모습이다.하지만 유방과 달리 왕건은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지 않았다.

1.7. 정치 스타일

정책적으로 정략결혼을 많이 하여 왕비가 수십명이었다고 한다. 비가 6명에 빈이 23명. 이는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서 각종 회유책으로 정략 결혼과 사성 정책(공이 있으면 성을 내림)에다가 땅을 지급(역분전)하고 지방마다 일부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지만 왕건은 단순히 호족빠가 아니였다. 강경책으로 인 제도를 썼다. 그 기초는 상수리 제도로 호족의 자식들은 개경에 머물게 했으며 사심관 제도로 지방에 행정, 치안의 특권을 줬지만 못하면 대 책임을 물게 했다. 이 기인 제도 때문에 자살하는 호족 자식들도 있었다.

숭불정책 불교빠이였으며 신라 하대 지방호족 출신이기 때문에 불교를 더 선호했었다(사실 조선 이전엔 유교보다 불교가 더 선호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개인신앙으로써 큰 역할을 차지했다.). 훈요 10조에서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불교빠였지만 후에 이게 백성들을 힘들게 해서 성종이 최승로 의 시무28조를 받아들여 잠시 폐지시키기도 했다.

덤으로 훈요 10조에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금강) 바깥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소리를 남겼는데 이 건 지금의 전라도를 뜻하며 지역드립을 유발시키는 곳에 자주 쓰이고 있지만 이 것은 2대 왕 혜종이 전남 나주 출신 호족의 외손자라는 것과 신숭겸, 최지몽 같은 측근들을 간과한 것이다. 태조 왕건에 대한 대중역사서를 썼던 김갑동 교수는 흔히 훈요십조의 이 내용이 전라도 지역을 가리키는 것을 해석 문제로 보고 친궁예 세력이 발호했던 청주지역이나 후백제 세력의 마지막 저항이 있던 충청도~전주 일부라고 보고 있다. 훈요십조의 그 내용은 순전히 왕건 자신의 정치적 입지 문제로 후손들에게 남긴 것일 뿐. 오늘날만큼 쓸데없이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은 일도 받을 일도 없는 것이다.

1.8. 평가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는 군신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1권 태조 신성대왕 편 중에서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했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켰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았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았다. …(중략)…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았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왔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내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었다." -승로의 시무 28조 중에서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후하다.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남북한 분단까지 천년간 이어지는 단일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고려-조선 교체기처럼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고대를 청산하고 중세를 열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민족 포용책을 썼고, 적국에 대해 매우 관대한 면도 그렇고, 무신정권 시절 이런 기치를 내세운 반란세력이 있긴 했지만 왕건 이후엔 지역에 기반한 신라나 백제의 부흥운동 같은 게 대부분 사라졌다는 점에서 단일한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고려 무신 정권기에 고구려,백제,신라의 부흥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왕건의 민족융합정책이 매우 불완전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은 고려 무신 정권기의 고구려,백제,신라의 부흥 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고려 충렬왕때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언급하면서 지역을 초월해 삼한의 사람들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심어지면서 이후로는 더 이상 고구려,백제,신라의 부흥운동을 기치로 한 반란이나 민란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려 무신 정권기의 고구려,백제,신라의 부흥 운동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이 단순히 당시 고려 조정의 반란 진압 능력이 신라 말기보다 훨씬 뛰어나고, 또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의 역량이 후삼국시대의 궁예와 견훤에 비해 훨씬 떨어졌기 때문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연히 왕건과 그 후대 고려 왕들의 민족융합정책의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우선 고려는 수도 경주에 거주하는 소수의 진골귀족에게만 고위관직을 허용하고 그 외의 신라 본토인들과 고구려,백제 계열의 주민들을 철저하게 차별한 신라와 달리 나라의 전 지역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서 과거제도와 음서제를 통해 전 지역의 사람들이 실력과 세력이 있으면 천민과 노비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고위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디, 그렇기 때문에 고려 무신 정권기에서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났어도 해당 지역들에서 과거제도와 음서제를 통해 고려의 관리와 고위 관리가 되어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옛 삼국 출신의 관리들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자신에게 크게 기여한 각 지방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것이 후대 고려 왕조와 임금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경우들이 당연히 있었다. 그래서 고려 전기의 현종은 제 2차 여요전쟁때 수도인 개성이 함락되자 왕건이 궁예 정권 시절 가장 크게 활약한 전장이고, 평양과 더불어 왕건의 제 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나주로 피난을 간 것이고, 또 고려의 대몽항쟁때 전라도 지역에서 옛 백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며 민란을 일으켰던 이연년 형제의 난을, 박서와 더불어 귀주성 대첩의 영웅으로 백성들과 조정 신료들의 인망을 크게 얻었던 김경손이 나주 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진압했던 것이고, 고려말의 공민왕 당시 제 2차 홍건적 침입의 전반부에 홍건적의 공격으로 대패한 공민왕이 수도인 개성을 떠나 고창 전투로(고창 전투 이전까지는 안동을 고창으로 불렀음.)고려 왕조에게는 매우 뜻깊은 지역인 안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여기서 전열을 재정비해 이듬해 20만 대군을 집결시켜 수도인 개성탈환작전을 성공시켜 홍건적을 대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임금들과 신료들 당시 당연히 나주와 안동은 고려 왕조와의 역사적인 깊은 인연과 이들 지역에 대해 고려 태조 왕건과 후대의 고려 왕조가 극진한 혜택을 준 이유들로 인해 고려왕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 당시 태조 왕건 사망 이후 후대의 고려의 임금들과 신료들이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이후 고려 충렬왕때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언급하면서 지역을 초월해 삼한의 사람들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심어지면서 이후로는 더 이상 고구려,백제,신라의 부흥운동을 기치로 한 반란이나 민란은 사라졌고, 오히려 이후 고려가 멸망할 당시 목숨을 걸고 고려 왕조를 위해 충성을 다한 사람들은 대개가 옛 백제와 신라계 사람들이였다. 최영(본관이 철원 최씨로 철원 최씨는 최치원을 시조로 하는 경주 최씨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신라계라 할 수 있다.),이색(본관이 한산 이씨로 지금의 충청남도 남부 지역으로 당연히 백제계이다.),정몽주(본관이 연일 정씨로 연일은 경상북도 포항 근처에 있는 지역으로 당연히 신라계이다.),이숭인(고려 중기의 천재 시인 정지상과 더불어 고려 왕조 최고의 대문학가로 명나라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이숭인의 경우 본관은 성주 이씨로 성주는 경상북도 대구 근처에 있는 지역으로 당연히 신라계이다.),정지(관음포대첩의 영웅이자 고려 말 왜구들이 최영,이성계와 더불어 두려워한 대표적인 고려 명장으로 그의 본관은 하동 정씨이다. 하동은 경상남도에 위치해 있으니 당연히 그는 옛 신라계이다.)같은 옛 백제,신라계 인물들이 고구려계 인물들을 제치고 고려말에 고려왕조 사수에 가장 앞장섰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왕조의 민족융합정책이 성공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단순히 고려 무신 정권기에 부흥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왕건의 민족융합정책이 매우 불완전해 사실상 실패에 가깝다는 식의 이야기는 올바른 이야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 23년후 발해가 건국되어 남북국시대가 열렸으며 뿌리 깊은 골품제와 고구려와 백제계 백성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제도 정책들과 포용 의지 부재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 출신의 귀족과 백성들에게 신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옛 고구려와 백제 영토에 살던 백성들은 그대로 고구려와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갔고 2백여년이 넘어 신라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흔들리자 궁예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를 탄생시켰다. 이를 재통일하고 다시는 갈라지지 않도록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들을 성공적으로 마련한 인물이 왕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을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통일의 시조로 본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위기에 처한 발해 및 발해부흥운동을 돕지 않아 한국사에서 만주가 떨어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있다.

926년 발해의 멸망은 아직 여유가 없었다지만, 후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정안국이나 흥료국 같은 발해 후속국들이 지원을 요청해오면 거리를 두는 정책을 펴고, 단지 귀순해오는 일부 유민만 받아들였다. 이는 외교에 관한 일로 볼 수 있는데, 발해 부흥국들은 대놓고 거란의 적대 세력이었으므로 이들을 지원하게되면 당대 최강국 거란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취적인 건국 초기라지만 거란 역시 강성했던 터라 그 아무리 전쟁 방면으로 잔뼈가 굵은 왕건이라도 함부로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거란이 고려에게 대놓고 시비 걸며 서경 이북을 내놓으라던 성종 시기 고려의 조정은 서희가 나서기 전까지 바짝 쫄아 서경 이북을 할양하기로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나 왕건도 할 말이 있는 것이 당시 고려는 건국초기인 데다가 밑에는 후백제라는 강적이 존재했음은 물론 시조인 왕건이 견훤에게 참패한 뒤 죽을 뻔 하는 등 위기가 있었고 게다가 왕건 사후에도 혜종 정종 등 연달아 왕들이 의문스럽게 사망하고 왕건의 호족우대정책으로 호족들의 힘이 원체 강했고 국가의 여러 제도들이 정비되지 않아 그야말로 어수선한 시기였기 때문에 애초에 군사들의 파병은 힘들었다.

또 결혼 동맹으로 호족들을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확인된 부인만 29명으로, 이쯤 되면 결혼 동맹의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꼭 필요한 가문과 결혼한 것도 아니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부친 오다련은 나주 호족이긴 했으되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만 나주인 목포에 있던 인물이었고 고려사에서는 대놓고 오씨를 원나잇 상대로 하려 했으나 오씨가 임신하려고 노력해 성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결론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그가 건드렸다가 덜컥 임신한 사람들을 많이 들였다는게 된다. 서전원 부인의 경우 그나마도 가문도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부친이 관직을 가지지도 않았다. 결혼 동맹이 이렇게 막장이 되자 그 가치의 인플레를 막기 위해서 왕가와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을 정하기도 했고 근친혼이 성행하게 된다. 더불어 왕족들의 성씨를 정하는 제도도 설정하게 되는데 이것도 걸작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왕씨와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왕씨 성을 따르지만 딸을 낳으면 외가의 성을 따른다. 이는 그 딸이 딸을 낳아도 딸의 성씨를 따르게 되며 이리 되면 그 가문과 지속적으로 혼인 동맹을 맺을 수 있고 지위의 인플레도 막을 수 있긴 하다. 그런데 이게 정상일 수는 절대 없다.

다만, 왕건의 부인들의 수와 결혼까지 가게 된 내력은 고려와 정적의 관계인 조선왕조에서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선 고려사에 실린 장화황후 오씨와의 성관계는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사실로, 왕건이 장화황후 오씨와 성관계를 하는 도중에 왕건이 장화황후 오씨를 임신시키고 싶지 않아 오씨의 몸이 아닌 돗자리에 사정을 했는데, 오씨가 일어나 돗자리에 묻은 정액을 주워서 자신의 몸 안에 넣어서 혜종을 낳았는데, 그래서 혜종의 얼굴에는 돗자리 자국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니 과학적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조작으로, 그래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장화황후 오씨를 폄하하기 위해 정종 세력이 조작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보다는 고려태조 왕건과 고려를 폄하하기 위한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종 세력이 아무리 장화황후 오씨와 혜종을 비하할려고 해도 고려의 태조이자, 정종의 아버지인 왕건의 성생활을 고려사의 기본 자료였던 고려왕조실록에 넣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도 고려사에서 왕건의 가정사에 안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10] 이것들은 고려를 폄하하기 위한 조선왕조의 조작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만약에 왕건이 당시 지배층인 호족들의 딸들과 한 번 성관계를 맺고, 버렸다고 한다면 왕건은 호족들의 원한을 사 고려를 건국하고 삼한을 통일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증거들로, 조선왕조선조수정실록 편찬을 주도한 이식(李植)은 조선시대 개성에 대해서 쓴 야사인 '송도기이'(松都記異) 부록에서 "내가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니, 군신 상하가 음란하고 방탕하고 요괴하고 허탄한 정상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므로 그 풍속과 인재가 옛과 같지 않은 것을 의심했다. 고도(古都) 사람을 보건대, 백성들이 모두 질실(質實)하고 돈후(敦厚)해서, 비록 그 풍속이 장사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또한 능히 부지런히 일해서 여유 있게 재산을 벌어 남과 다투지 않으며 남녀가 놀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마을에는 창기(倡妓)가 없으며, 그 집이나 의복ㆍ음식의 제도는 옛 나라의 남은 법을 숭상하고 지켜서 세상을 따라 변천하지 않았다. 혁명이 이루어지고 나라가 없어진 때를 당해서 의관을 한 사람들은 새 나라를 따라 옮겨 가지 않으면 도망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가문은 귀천의 구별이 없고, 관리 선발에 따른 법과 제도를 본래부터 비루하고 하찮게 여겼다. 그러나 이따금 호걸스럽고 재덕이 있고 기예가 있는 사람이 뛰어나서 일세의 영웅이 된 자가 많았으니, 고려조의 인재와 풍속을 가히 상상할 만하거늘, 역사를 만드는 자가 '승국'(勝國. 전 왕조를 일컫는 단어임.)을 헐뜯고 깎는데에만 힘써서 그 사실이 묻히고 말았다."라고 말했으며, 또 정약용의 스승이자, 조선 후기 최고의 대실학자중 한 명인 '성호 '이익'(李瀷)도 자신의 제자이고, 우리나라 야사들중 '삼국유사','연려실기술'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야사인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에게 보내는 편지(성호전집 제24권 / 서(書) 안백순에게 답하는 편지 갑술년(1754, 영조30)〔答安百順 甲戌〕)에서 자신이 고려사를 대신해 새로운 고려의 역사책을 쓸려고 했지만, 자료들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또 설령 짓는다 하더라도 조선 조정에 의해서 없어질 것이 뻔하니 그만 두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야사모음집인 '연려실기술'의 제 1권 태조조 고사 본말의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 편의 '원천석'(元天錫.)부분에서 '축수편'(逐睡篇.)이라는 야사 내용을 인용한 내용은 원천석이 일찍이 고려말과 조선초의 일들을 적은 '야사'(野史.) 6권을 쓰고 죽기 전에 상자에 담고 자물쇠를 채워 자식들에게 말하길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라고 당부한 후 죽었는데 그의 증손자때 원천석의 종족들이 "이제는 세월이 오래됬으니 열어보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의논을 모아 상자를 열고 책들의 내용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조선 조정에서 말하는 고려말과 조선 초의 사실들과 대부분 달랐고, 이에 그들은 조선왕조를 의식해 크게 놀라 "이 책은 우리 종족을 멸할 물건이니 이미 이것을 본 이상 소문나지 않기가 어렵다."라고 말하면서 모두 불태워 버린 유명한 고사도 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조선왕조현종실록과 현종수정실록에는 '원천석'이 '야사' 6권을 썼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왕조의 무서운 정보력(?)을 잘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의 양식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중 고려사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에 가깝게 없고, 대부분이 정확성과 공정성,상세성 면에서 엉망이라는 식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다.[11]이런 것들로 보아조선왕조가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을 편찬하면서 자신들의 정적인 고려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많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후계 구도를 엉성하게 잡아서 아들 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후견인이라고 붙여준 것이 박술희인데 박술희는 왕건이 아끼던 인물이긴 했으되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계 쪽이 힘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상기했듯 오다련은 진짜 나주 호족도 아니고 세력을 가질만큼 강한 인물도 못됐다. 그렇다면 사돈 가문이라도 힘있는 가문을 들여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당시가 건국 초이고 호족 세력이 매우 강한 만큼 황주 및 개경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해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충주나 청주, 광주, 경주 같은 패서 지방이 아닌 타 지역에 기반을 둔 유력한 호족과 맺어주어 개경 세력을 견제하도록 해줬어야 했다.[12]결국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졌다.[13]

다만 고려사를 보면, 왕건이 승하 직전 당시 옆에 있던 재상이었던 왕규, 염상, 박수문에게 안팎의 중요한 일들 중 오랫동안 결정짓지 못한 것은 경들이 태자(혜종)와 함께 처결한 후 보고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록이 있는데, 만약 이들이 다른 이들의 입김이 아닌 왕건의 의도대로 재상에 임명된 것이라면, 거기에 이들이 박술희와 같은 고명 대신이었다면, 당시의 왕건으로써는 나름 괜찮은 방법을 취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자 왕씨 성을 받을 정도로 나름 능력 있는 문신이었고, 광주의 호족으로써 지방의 호족이었으며, 염상은 축성 쪽으로 많은 활약을 한 무장 출신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 당시 거의 대부분 사망한 개국 1등 공신들의 다음 서열인 2등 공신이었고, 박수문은 패서 호족인 평주의 호족이자 아버지 박지윤과 동생인 수경과 더불어 왕건의 장인으로써 외척이었으니, 중앙의 패서 호족과 지방 호족은 물론 개국 공신이나 외척에 문무 신료까지 모두를 어느 정도 적절하게 아우르는, 위에 언급된 이들보다 좀 약해보일지는 몰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또 고려시대 정사들인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기록들에 의하면 정종이 왕규의 잔당을 숙청했을때 그 수가 300여명이였다고 나오는데, 조선 개국 당시와 비교해 조선왕조 개국공신의 수가 52명이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엄청난 숫자여서 왕건의 후계 구도 계획이 세간에서 논의되는 것처럼 무능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혜종 본인이 후삼국통일 전쟁에 왕건과 함께 늘 출정해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대단한 용맹과 지략을 가진 사람이다보니, 소위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잘 할 것.'으로 믿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일찍 죽은 것인지 아니면 왕규의 난에 같이 휩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의 기록 이후로 행적을 알 수 없는 염상을 제외하더라도, 왕규는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혜종과 박술희와 갈등을 벌이다가 빈틈을 보임으로써 결국 혜종이 몰락할 계기를 제공하며 자신 역시도 정종과 왕식렴에 의해 살해당했고, 박수문은 혜종 혹은 왕규나 박술희 등에 대해 불만이 있어 반대편에 합류한 것인지 아니면 누이와 딸, 조카 등을 왕건의 부인으로 들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데다 왕식렴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패서 호족 출신이어서 제거가 안 된 것이거나, 혹은 그의 동생이 정종과 광종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중 하나인 박수경인 관계인지는 몰라도,[14]정종이 즉위한 후에도 동생인 박수경과 축성 작업을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음으로써 혜종 사후에도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니... 내외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있었든 왕건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왕건 자신이 자신의 사후 후계자 쟁탈 문제가 일어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정실황후들인 6번째 부인의 아들까지만 황위계승권이 있다고 천명했고, 견훤이 전쟁터에 주요 아들들을 늘 데리고 가 그들의 세력을 키워준 것과는 반대로[15]자신의 장남인 혜종만 데리고 가 다른 아들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는 등의 조처들을 취했지만, 더 치밀하지 못해서[16]결국 고려 초기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는데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17][18]





1.9. 왕건 상





1993년 북한 개성 태조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 머리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만든 뒤 그 위에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사라졌다. 위의 상에는 성기가 매우 작게 표현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마음장상'이라고 하며 성인으로서 성욕을 초탈한 모습을 표현한 불교적 표현이다. 이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국보 전시회에서는 중요 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나체 상에 옷을 입히는 형태의 상은 토속 신앙의 조각상의 양식이라고 한다#

1.10. 오늘날의 왕건


그를 다룬 드라마 작품으로는 KBS태조 왕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작 왕건보다는 궁예견훤이 주인공 같은 이상한 드라마다.

최수종이 열연하였다. 방송전에는 사극의 주인공으로는 맞지 않을 거라게 세간의 평가였다. 당시 최수종의 이미지는 눈크고 겁많은 부잣집 도련님 수준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실제 역사상 왕건도 실전으로 잔뼈가 굵은 장군보다는 온화한 이미지의 부잣집 도련님에 가까웠으니 오히려 이쪽이 고증에 맞다는 주장도 방영 당시에 있었다. 어쨌건 방송이 나가면서 우려와는 달리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캐릭터 자체가 무장형 군주 보다는 무난한 성장형 군주여서 그런지 궁예와 견훤 역으로 열연한 김영철과 서인석의 포스에는 조금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견훤, 궁예 같은 강렬한 인상은 없어도 그야말로 '주인공다운' 인덕을 갖춘 선량하고 결백한 영웅이라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해낸 편이다. 오히려 근래 몇몇 사극이 자주 일으키는 문제처럼 견훤과 궁예가 그저 막무가내로 악마화 되거나 미화가 지나쳐 페이크 주인공 화가 되는 문제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왕건의 결백하고 인덕을 갖춘 '영웅 다움'이 대단히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뭐 다른말로 하면 개성이 강한 궁예나 견훤에 비해 심심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얘기도 되지만.

그러나 자신을 배신하고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의 가족들을 철퇴로 죽이고 시신은 산에 버려 산짐승들과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라고 명령하는 잔혹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이것은 실제 사실이 아니고 드라마의 창작이다.
정사들에서는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이들을 조리돌린 다음, 시장 바닥에 끌어내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c7v2CPta0eE#t=401
어찌 되었든 간에 상당한 주인공 포스를 풍긴 최수종은 이 후에도 해신, 대조영 등을 비롯한 각종 사극물에서 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재밋는 점은 이 드라마가 왕건을 최초로 다룬 작품이긴 하지만 왕건이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아니다.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다름 아닌 용의 눈물.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산발하고 길게 수염을 늘어트린 모습으로 "네가 내 자리를 찬탈하고도 모잘라 내 자손들까지 모조리 죽일려고 하니 네 놈 역시 벌을 받으리라!"라며 칼을 들고 위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역전의 용사이자 맹장인 이성계가 두려움에 질린 모습으로 왕건 앞에 무릎을 꿇고 "폐하!"라고 부르면서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라한다. 일회성 등장이지만 어쨌든 등장은 등장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대표 야사모음집인 '연려실기술.'과 '생육신'중의 한 사람이였고, '사육신'의 전기인 '육신전'을 쓴 추강 남효온의 저서 '추강집'에 나온다. 이때 이성계는 놀라 살생부에 적힌 왕씨들의 경우중 특정한 한 페이지에 적힌 왕씨들은 살려 주었다고 한다.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가 천도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조선왕조에서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 70여명의 처소에 불을 질러 그들을 해산을 시킬려고 했는데도 끝내 굴하지 않아, 불길을 피하지 않고 모두 죽는 길을 택한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의 기개에 질린 것이 원인이였다.

이 당시 배우는 성우 출신 탤런트인 김경응. 김경응은 또 회안대군 이방간의 아들인 이맹종 역할로 출연하였다. 즉 1인 2역. 그리고 훗날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최영의 조카이자 이성계 암살 사건을 주도한 김저 역할로 출연해서 역시 조선 건국 세력과는 대척점에 서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제일 백미는 태조 왕건에서는 박수문 역할로 나왔다.

이 야사는 용의 눈물과 비슷한 시대를 다룬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약간 반영이 되어 나온다. 다만 왕건 본인이 직접 등장한 것은 아니고, 조선을 건국한 직후 이성계가 옥좌에 앉아 있다가 네 이놈!! 하고 꾸짖는 환청을 듣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 장면이 나오기 직전에 "목소리만이라도 최수종을 카메오 출연하는 게 어떨까?"라는 농담성 제안이 넷상에서 나돈 적이 있었다. 실제로는 최수종이 아니라 당시 음향 제작진 중 한 명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고 한다. 대신 직접적으로 왕건이 묘사된 게 아니라서 이 야사를 잘 모르는 사람은 왕건의 목소리인지 잘 모를 듯하다. '용의 눈물' 때와는 달리 여기서의 이성계는 호통 소리를 듣고도 "뭐? 뭐?"라며 태연히 대꾸하는, 좀 더 역전의 용사다운 모습으로 나왔다. 그러나 드라마 정도전의 마지막 회에서는 이방원의 반란으로 자신이 아끼던 두 아들을 잃고, 또 정도전을 잃고, 자신은 사실상 왕위를 잃은 상태가 되자 예전예 이인임이 자신에게 '불행해지고 싶지 않으면 옥좌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기어이 옥좌에 앉게 되면 옥좌가 이성계 자신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는 말을 애초에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 꿈에 대한 이성계의 반응은 실제로는, '연려실기술'과 '추강집'에서 이성계가 두려워했다고 기록에 나오고, 또 이성계의 고조 할아버지때부터 이성계가 조선의 왕위에 오르기 직전의 행적들을 다룬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들을 보면 태조실록 1권, 총서 31번째기사 태조가 용맹스럽게 멧돼지·범 등을 사냥하다 라는 기사와 태조실록 1권, 총서 34번째기사 태조의 사냥 솜씨를 야인들이 칭송하다 기사, 그리고 태조실록 1권, 총서 39번째기사 참지정사 안우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서울을 탈환하다 라는 기사들을 보면 실제 이성계는 호랑이와 표범과 적군들을 피해 도주한 기록들이 있어 의외로 겁이 많은 부분들도 보여서 실제 꿈에서 왕건의 저주를 듣는다면 저렇게 겁에 질려 어쩔줄 모르는 것이 논리적으로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라 하겠다.

사실 왕건 입장에서는 이성계에게 극도로 빡칠만 한게, 왕건 역시 쿠테타로 나라를 뒤엎고 자기가 왕이 된 뒤 두 나라를 항복시켜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성계처럼 자기가 무너뜨린 나라의 왕족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지는 않았다. 이때 이성계의 대학살로 인해 개성 왕씨는 그로부터 60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인구수가 회복이 되지 않아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수 희귀 본관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매우 슬픈 처지가 되었을 정도이다. 이에 비해 왕건이 직접 죽였다고 확실히 기록된 전 왕족은 후백제의 양검, 용검 정도인데 양검과 용검은 패륜아+역적이라 사실 죽어 마땅한 짓을 한 인간들이다. 신검 또한 결국 왕건에게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인간도 패륜아+역적 무리의 수장 입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역시나 죽는 게 당연하고, 이후 후백제의 견씨나 신라의 김씨, 박씨, 석씨 등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으니....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지방 세력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왕건이 황좌에 앉아 있다 해도 호족들을 대량으로 숙청할 상황이 아니긴 했다. 왕씨 대학살은 이후 태종 이방원의 결단으로 중단되었다. 참고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왕씨 대학살'에 대해 "세상에서 전 왕조의 왕족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라며 간접적으로 이성계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1970년에도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조왕건>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왕건이 궁예의 폭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궐기하여 고려를 세우는 과정을 영화화한 듯.



중국인이 분명하다. 위의 어진과 뭐가 닮았다는거지?
(문명 4에 등장하는 왕건)
이게 뭐야 몰라 무서워 화내면 더 무섭다#

이상하게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계속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한국 팬들은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을 지도자로 하게 해달라고 여러번 건의했으나... 3이나 4 모두 왕건이 한국의 지도자.하지만 5에서는 세종대왕이 나왔지 게다가 3에서는 대머리로 등장한다. # 베타버전이 더 무섭다 # 시대가 변하면서 더 안습해진다 친일파 스타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고려청자와 고려 인삼만이 알려진 탓이 아니냐는 분석과 시드 마이어가 유일하게 본 드라마가 태조 왕건이라서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태조왕건을 봤는데 어떻게 최수종이 나오지 이런 양반이 나오냐... 사실 Korea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고려왕조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조선왕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국가의 역사를 잡은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왕건이 지도자가 되어도 이상할 것은 없긴 하지만. 대신 문명 5에서는 세종대왕이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4에서의 지도자 특성은 재정적, 방어적. 어정쩡한 특성이라고 하는 유저도 있는 듯한데 아무래도 '방어적' 특성 때문에 그런 듯하다. 하지만 재정적 특성이 꽤 괜찮은 특성이고 특성 잘 이용해서 굴리면 꽤 할만하다. 자세한 건 문명 4 워로드 항목의 첫 카테고리 참조. 물론 후속작의 세종대왕의 포스에 비하면 후달리지만 절대로 '구린' 지도자는 아니다. 애당초 문명 4에서는 '구린' 지도자는 없다. 해당 항목에도 나온 얘기지만 확장팩에서 '공격적, 방어적'이라는 괴이한 조합으로 변경된 일본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저 왕건의 모습을 보고 아무리 봐도 중국인같이 생긴 왕건의 얼굴을 보자 "이게 뭐야! 나의 왕건은 이렇지 않아!", "아놔 지금 한국인 무시하나요?" 등의 반응을 보이는 네티즌들이 대부분인데, 사실 저 얼굴이 어떤 의미에서는 고증이 잘 된 얼굴이다. 왕건의 얼굴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후덕한 풍채의 인물이었던 듯. 아무래도 태조 왕건으로만 왕건을 접해서 저런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2000년에 출시된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인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려측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기마 영웅으로 칼을 휘둘러 공격하는데 공속이 느린 편이지만 임진록2곽재우 분신술과 비슷한 보호신장 기술을 가지고 있다. 게임 속 얼굴과 캐릭터 조형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묘사된 왕건의 모습을 따 왔다.

KDX-2 충무공 이순신급의 4번함인 DDH 978은 왕건의 이름을 따서 '왕건함'으로 명명되었다. 왕건이 장수로서 보여준 먼치킨급 활약과 혼란스러운 후삼국 시기를 평정한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높이 평가받아 이렇게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2. 오대십국시대 전촉의 건국자

전촉의 역대 황제
1대 고조 왕건 2대 후주

왕건의 능인 영릉(永陵)
묘호 고조(高祖)
시호 신무성문효덕명혜황제(神武聖文孝德明惠皇帝)
연호 무성(武成, 908년 ~ 910년)
영평(永平, 911년 ~ 915년)
통정(通正, 916년)
천한(天漢, 917년)
광대(光大, 918년)
왕(王)
건(建)
광도(光圖)
생몰기간 847년 2월 26일 ~ 918년 7월 11일
재위기간 907년 ~ 918년 7월 11일

847 ~ 918, 재위 907 ~ 918)
자는 광도(光圖).

소의 난 평정에 가담하여 공적을 세웠다. 그 뒤 당나라의 실력자였던 환관 전령자(田令孜)의 양자를 해, 희종(僖宗)이 황소에 쫓겨 (蜀)으로 피신했을 때 도와 벽주자사(璧州刺史)를 했다. 이후 점차 권모 술수로 촉 전체와 한중을 장악하였고, 903년 당나라로부터 촉왕의 지위를 하사받았으며, 이후 907년 후량이 당나라를 멸망시키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후에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심사단(尋事團)이라 불리는 비밀경찰을 만들어 불평분자들을 압박하고 살해했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왕팔(王八), 중국의 비속어중 아주 유명한 것으로 정착한다.

여담으로 한자가 1의 인물과 정확히 같다(...). 거기다가 생몰년과 제위기간도 묘하게 겹친다. 왕건은 877년생이며 918년에 제위에 올랐다.

죽은 직후 양자와 친자 사이에 제위 쟁탈전이 났으며, 승리한 막내 왕연이 사치에 몰두하면서 끝내 에게 나라가 멸망한다.

3. 王鍵

블리치에 등장하는 도구.

영왕, 왕족이 사는 공간으로 가기 위한 열쇠. 대대로 호정 13대총대장에게만 소재가 구전된다. 만들기 위해서는 10만의 혼백과 중영지라고 하는 특정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왕건이 만들어질때 이 10만의 혼백과 중영지는 소멸하는 걸로 보인다. 나생환.

천년혈전편에서 0번대효스베 이치베에왕건의 정체에 대해 총대장 이외의 사람에게 밝혔다. 이치고가 영왕궁에서 정령정으로 돌아올 때 그냥 뛰어내려 버렸는데, 실은 새로 만든 사패장이 왕건이라 72겹의 차단결계를 뚫고 올 수 있었다는 것. 이점을 영번대가 모를리가없는데 이치고에게 사패장으로 넘겨주는걸보면 의도적으로 유하바하를 영번대가 처단하기위해 만든물건인듯하다. 아니면 그냥 우연 게다가 유하바하가 도착한때부터 싸움준비가 바로되어있었고. 그런데 개털렸잖아

유하바하는 바하의 친구

4. 기타

거대한 물건을 왕건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王과 물건(物件)의 건(件 - 물건 건)이 합쳐져서 나온 말인 것 같다. 1번 항목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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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북쪽
  • [2] 乾符, 874년 ~ 879년까지의 연호다.
  • [3] 이 반대 이야기의 근거 자료 출처는 이도학 교수 저의 궁예,진훤,왕건과 열정의 시대 211P~213P.
  • [4] 최근 이도학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개성에도 상륙해 일시적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왕건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갔지만 박수경의 사력을 다한 구원으로 왕건은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 [5] 원 이름은 김행인데 고창 전투에서 특히 큰 공을 세워 왕건이 권씨 성을 하사했다.
  • [6]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기전체 역사서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중요한 인물들은 독립된 개인 열전을 남긴다. 고려사에서는 이들 안동 삼태사보다 비중이 떨어지는 윤선, 흥달 같은 인물들도 개인 열전이 있는데 이들 안동 삼태사의 독립된 개인 열전이 없다.
  • [7]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유금필이 이때 후백제의 해군을 대파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단지 유금필이 곡도에서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곡도와 포을도 2개 섬의 해군을 수습해 이를 막을 수 있게 해놓았다라는 이야기만 있다.
  • [8] 자도 전투의 유금필의 전공에 대한 왕건의 연이은 극찬은 고려사 유금필 열전과 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나온다.
  • [9]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과 조선왕조단종실록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 12월 13일 신축 2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고려의 공신·충신·명장 등을 왕씨의 제사와 함께 제사하도록 하다'라는 기록들을 보면 왕건이 견훤을 여러 번 이기고 삼한을 통일한 것은 모두 유금필의 공이였다고 말하고 있고, 현대의 많은 국사학자들도 왕건이 삼한을 통일한 것은 유금필의 활약 덕분에 가능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 [10] 여성과 한 번 성관계를 가져놓고 책임을 지지 않고 상대 여성들을 버렸다는 이야기들. 왕건을 무책임한 바람둥이로 기록한 일.
  • [11] 이들은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원천석의 '운곡시사'(耘谷詩史.)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의 '육신전'(六臣傳.)에 대해서는 많은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자신들이 섬기는 왕조인 조선왕조에서 쓴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 [12] 다만 충주나 황주와 같은 유력 호족 가문 같은 경우에는 당시 그들이 미는 장성한 황자들이 이미 존재했던 만큼 굳이 혜종을 지지할 필요가 없었고, 그걸 왕건도 알았기에 일찌감치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 [13] 결국 의 대숙청이 필요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왕건이 만들었다.
  • [14] 이 쪽이 가장 확률이 높다.
  • [15] 신검,양검,용검.
  • [16] 특히 혜종과 정종의 혼인문제.
  • [17] 이것이 왕건과 유방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하지만 지방 제후왕들을 모두 숙청한 유방도 그의 사후, 아내였던 여태후와 여씨 세력들이 크게 득세해 한나라 초기, 한나라가 크게 흔들렸다. 또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의 경우에도 황실의 안정을 위해서 공신들을 대부분 죽였지만, 그의 사후 얼마 후에 영락제가 반란을 일으켜 주원장이 후계자로 선정했던 명나라 2대 황제 건문제와 그의 신료들을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을 볼 때 완벽한 후계구도 계승이 이처럼 어렵다는 것이다.
  • [18] 이들에 비해 조선의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은 완벽한 후계 구도 계승을 위해서 자신이 아직 건장할때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도 군권은 가져 세종의 뒤를 봐주고 무고한 세종의 외가를 참혹하게 숙청해 인륜과는 별도로 완벽한 후계 구도 계승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