臥龍生 (1930 ~ 1997)
2. 이력 ¶
- 1955년 : 군대를 퇴역한 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친구 동창철(童昌哲)의 권유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1957년 : 와룡생(臥龍生)이라는 필명으로 데뷔, 대만의 성공만보(成功晩報)에 처녀작 풍진협은(風塵俠隱)을 발표했다. 풍진협의 성공 이후 민성일보(民聲日報) 경홍일검진강호(驚虹一劍震江湖)를 실어 3쇄까지 찍는 성공을 거뒀다.
- 1958년 : 대화만보(大華晩報)에 비연경룡(飛燕驚龍)을 연재하며 일약 무협소설의 거장으로 발돋움한다.
- 1959년 : 상해일보(上海日報)에 철적신검(鐵笛神劍)을 발표, 1960년에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옥차맹(玉釵盟)을 연재하며 모두 3쇄 이상 재판을 하여 성공을 거둔다.
참고로 연재한 신문들은 당시로 치면 한국의 지상파 3사(MBC, SBS, KBS)급의 지명도를 지녔다. 한 곳에서만 연재해도 메이저급인데 세개 다 연재했단 건 초유명작가란 것이다.
- 1960년대 : TV 드라마로 눈을 돌려 극본편집과 제작자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 이후 다시 작가로 회귀하여 신작을 작성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생활고를 겪는다.
- 1970년대 : 어느 유명출판사가 그의 필명인 와룡생을 매입하기를 희망하고, 생활고에 시달린 와룡생은 필명을 매각한다.
- 이후 : 필명을 매입한 출판사는 대량의 위작을 출판하고, 와룡생은 사실상 작가 생명이 끝나고 기존에 저술한 작품과 감독한 드라마의 판권마저 모조리 잃게 되었다. 필명 매각 이후 출판계와 인연을 완전히 끊은 뒤에 1997년 대만에서 타계했다.
유언은 " 내 이름을 찾아와라"였다고 한다.
3. 대한민국에서 와룡생 ¶
6, 70년대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가로, 오죽했으면 다른 작가들 작품조차 와룡생의 이름을 달고 찍어냈다. 무려 김용 작품조차.....
오늘날 한국 무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대 배경이 모호한 강호에서 구파일방과 악의 세력이 정사대전을 벌이는 이야기'는 바로 와룡생의 영향이다. 오늘날 한국 무협계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정파, 사파의 구분은 와룡생의 작품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개념이다.
좌백은 와룡생의 의의를 무협에서 '역사'를 제거한 것으로 보았다. 이로서 무협은 중국의 역사라는 배경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특정한 시대로부터 자유로워저 판타지 세계가 돼버린 것이다. 국가 공권력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고, 무림인들은 백주대낮에 칼을 들고 싸우며 몇천 명이 무리지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사투를 벌인다. 와룡생의 세계에서 강호무림인은 정파와 사파,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로 나누어져서 싸움을 벌인다.#
이러한 측면은 '국민당군'에 복무하며 군벌내전기를 겪은 와룡생의 인생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청의 지배가 붕괴한 무법지대의 중국에서 소년병(…)으로 살아온 와룡생에게 강력한 황제나 철저한 공권력은 오히려 실감할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와룡생의 소설은 이러한 '현실사회'를 투영하여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각 무림 문파는 중국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벌의 투영이며 정파와 사파는 극한으로 몰고가던 이념 대립의 투영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작품이 표절 당했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광 수준으로 개나 소나 베껴대서[1] 지금 와룡생 작품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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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내에서 비디오로 출시된 무협시리즈 중 에서 심검(心劍)이란 드라마의 케이스에도 와룡생 원작이라고 버젓이 붙어있었다. 실제로는 와룡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