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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아이 히로미츠

last modified: 2015-03-02 01:10:49 Contributors


드래곤즈] 감독 시절

오이치아이 히로미츠(落合 博満)
생년월일 1953년 12월 9일
출신지 일본 아키타
투타 우투우타
데뷔 1978년 드래프트 3순위
포지션 2루수, 3루수, 1루수, 지명타자[1]
소속팀 선수시절
롯데 오리온즈(1979~1986)
주니치 드래곤즈(1987~1993)
요미우리 자이언츠(1994~1996)
닛폰햄 파이터즈(1997~1998)
감독시절
주니치 드래곤즈(2004~2011)

198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에나츠 유타카
(닛폰햄 파이터즈)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오리온즈)
히가사오 오사무
(세이부 라이온즈)

198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부머 웰스
(한큐 브레이브스)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오리온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2.1. 아마 시절
2.2. 롯데 오리온즈 시절
2.3.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2.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5.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3. 감독 시절
4. 프런트로서 주니치 복귀
5. 이야깃거리

1. 소개

일본야구선수이자 감독. 현재 주니치 드래곤즈 단장.

현역시절 최고의 타자로 찬사를 받았으며 감독으로도 상당한 실적을 남긴 인물. 그러면서 오레류(オレ流),[2] 좀 의역하면 내 맘대로라는 성격으로 대표되는, 일반인의 상식을 넘은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도무지 종잡기 힘든 인물이기도 하다. 타입을 많이 타다보니 일본 내에서도 호불호가 꽤나 극명하게 갈리며 한국에서도 대충 이미지는 능구렁이 같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2. 선수 시절

2.1. 아마 시절

인생이 참 희한한 점이 많은 게 특징. 그 당시 지역에서는 제법 강호로 알려진 아키타 공고 재학 중이었지만 연습이 싫다라는 이유로 야구부에 들어갔다가 탈퇴. 그럼에도 오치아이가 중학교 때부터 워낙 실력이 뛰어났던지라 대회만 있으면 부원들이 사정사정 해서 정식부원도 아닌 그를 4번에 세웠다고 한다. 참고로 영화광인 오치아이를 부원들이 돈을 모아 구한 영화티켓으로 낚았다는 흠좀무한 전설도 전해진다.

대학시절도 에피소드의 연속. 도요 대학에 입단한 오치아이는 당시까지 선후배 간에 상명하복이 확실한 대학 야구부의 전통이 맘에 안 든다고 학교 째 때려 치우고 그냥 귀경해 버렸다고 한다. 이후 볼링에 흥미를 가져 볼링 프로 시험까지 볼 계획으로 프로테스트를 신청했으나, 그 기간 중 속도위반으로 딱지를 떼는 바람에 벌금을 내고나니 수험료가 없어서 프로볼링 테스트도 좌절. 이후 고교시절 은사의 추천으로 사회인 야구단인 도시바 후추에 선수 겸 사원으로 입사하여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2.2. 롯데 오리온즈 시절


1978년 사회인 야구대회 에서 맹활약 하며 프로 스카우트 들의 눈에 띈 오치아이는 그해 드래프트에서 롯데 오리온즈에 3위로 지명되며 우여곡절 끝에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마우치 카즈히로는 극렬 레벨스윙 주의자였기에, 오치아이가 당시에 가지고 있던 어퍼스윙[3]을 교정해 보겠다고 오치아이에게 달라붙었다...만 줄창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는 통에 두손 두발 들고 포기.(...) 입단 1년차의 햇병아리 주제에 저는 감독님의 방법을 이해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그냥 자기 스타일+옆에 있는 다른 선수의 타격폼 따라 하기로 독자적인 타격폼을 만들었다. 누가 봐도 어딘가 모르게 엉성하기 그지없는 오치아이의 타격폼이었으나 공 하나는 정말 잘 맞추었다.

이 특이한 타격폼을 두고 코치들이 말이 많았는데 마침 지나가던 왕년의 안타 제조기이자 롯데에서 선수 말년을 보내고 있던 장훈 선생이 오치아이의 타격 모습을 보고는 "저 정도 스윙이면 충분히 잘 칠 수 있어"라고 한 마디를 던지고 간 이후, 코치들도 전혀 태클을 걸지 않고 기술적인 부분만 서포트하는 정도로 끝냈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 오치아이의 타격폼을 두고 카네다 마사이치는 대놓고 '저건 아마추어나 하는 스윙이다'라고 디스했는데, 이게 오치아이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는지 이후에 다른 OB 선수들의 이름을 말할 때 당연히 연장자의 예우로 '상(さん)'을 붙였는데 카네다만 이름 뒤에 '상'을 안 붙였다는 얘기도 있다. 삐돌이[4]

입단 2년차인 1980년 시즌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올라간 오치아이는 이듬해 1981년에 수위타자, 1982년 시즌에는 일본야구 사상 최연소 3관왕이란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순조롭게 강타자의 면모를 드러냈는데, 한편으로는 1982년에 기록한 3관왕이 전체적으로 저조한 기록으로 간신히 달성한 것이라는 점을 두고 비평가들이 3관왕의 가치를 깎아내렸다고 한다.[5] 이에 발끈한 오치아이는 2년 뒤인 1985년, 타율 0.367, 52홈런, 146타점 이란 압도적인 성적으로 3관왕을 획득한 뒤 간접적으로 '이래도 내가 영양가가 없냐?'라는 식으로 어필했다는 듯 하다. 홈런 수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은 볼 아랫 부분을 깎아치고 스핀을 걸어 비거리를 늘리는 법을 익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롯데시절 총 3회의 3관왕을 획득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평소 오치아이의 특이한 성격을 이해하고 감싸주던 이나오 카즈히사 감독이 1986년 시즌 종료 후 해임 되면서 롯데의 중심 타자인 오치아이가 직접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하는 파격적인 사태 발생한다.

2.3.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결국 오치아이는 1987년 시즌을 앞두고 4:1 트레이드로 주니치 드래곤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덧붙여 오치아이는 그 해 일본인선수 중 최초로 1억 엔 연봉을 받게 되었다. 역시 구단은 돈이 있고 볼일이다

이후 주니치에서도 꾸준한 페이스를 보이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단 롯데의 홈구장인 카와사키 구장보다 약간 넓은 나고야 구장으로 옮긴 탓에 주니치 소속 시절 오치아이의 홈런 수는 전체적으로 다소 줄기는 했지만, 1993년 시즌을 제외하고 매년 20홈런 이상은 찍었고 홈런왕과 타점왕을 각각 2회씩 차지했다.

1989년 116타점으로 센트럴리그 타점왕을 차지하였는데, 양 리그에서 타점왕을 기록한 선수는 오치아이가 처음이었다. 1990년 시즌 종료 후 구단이 제시한 연봉에 불복하고 일본인 선수로는 최초로 연봉 조정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종반까지 타격 삼관왕을 노릴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지만, 타격왕은 야쿠르트후루타 아츠야에게 꼴랑 3모 차이(후루타 0.3398, 오치아이 0.3395)로 아쉽게 내주고 타점은 후루타의 팀메이트 히로사와 카츠미에 8타점 부족하여 2위에 그치며 홈런왕(37개)만 손에 넣은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1993년에는 개인통산 400홈런을 달성하였다.

어쨌거나 오치아이는 주니치 에서도 강타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뽐냈다.

2.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이후 FA제도가 처음 도입된 1993년 오프시즌에 최초로 FA를 선언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요미우리에서는 3년 동안 붙박이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팀을 센트럴리그 2회 우승으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95년에 2천안타 달성, 96년에 500홈런, 1500타점을 기록하는 등 현역시절 통산 기록의 대부분을 요미우리 시절에 작성했다.

한편으로 요미우리 소속이던 1995년 한일 슈퍼게임의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한국 투수들의 관광 가이드로 맹활약 하기도(...).

2.5.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그러나 96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가 키요하라 카즈히로를 영입한 것에 대해 반발하여 구단에 자유계약을 신청,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하게 된다.

포지션이 겹치는 키요하라가 영입되며, 자기와 키요하라의 존재 때문에 마음이 불편할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을 배려했다는 설이 있다. "나가시마 감독님의 안타까운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에는 나이탓인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미 97년 시점에 만 44세였고, 지금까지 이만큼 활동한 것이 신기한 나이였다. 결국 98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오치아이의 20시즌 통산 성적은 7627타수 2371안타, 타율 0.311, 510홈런, 1564타점, 1135삼진, 1475사사구. 이것이 대학과 사회인 야구를 거치면서 방황하다가 남들은 프로에서 8~9년 경력이 쌓이고 전성기를 맞이할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한 늦깎이 신인의 통산 성적이다. 오치아이가 얼마나 자기관리에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스탯이라 할 수 있다.

유니폼을 벗은 이후 오치아이는 주니치 감독이 되기 전 까지 야구 해설가로 활동 했는데, 특유의 전파스러운 입담으로 해설하는 통에 이 시기에 그의 진정한 오레류 스타일이 일본 야구팬들에게 각인되었다고.

3. 감독 시절

2004년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정식으로 감독 오퍼가 온 것을 받아들여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의 1군 감독을 맡았다.

감독이 돼서도 여전히 그놈의 오레류가 발동되는데, 감독이 되고 처음 한 일이 유니폼 디자인을 바꾸는 것이었다.[6] 그리고 시즌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그만의 특이한 선수기용이 빛나기 시작했다.

진짜 이 시기의 선수기용은 보통 상식을 뛰어넘는 기행에 가까운 게 많았는데, 마운드에 뻔히 좌투수가 올라와 있고 우타 대타요원이 빼곡한데 굳이 좌타 대타를 내보낸다던가, 반대로 투수도 상대가 주포급 좌타자라 누가 봐도 '아 원 포인트 릴리프로 좌투수가 나오겠군' 하는데 다음날 선발 예정인 우투수를 내보낸다던가 하는 일도 있고 타선 역시 수비력을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멘도사 라인에 걸치는 극 수비형 야수를 1번쯤 기용한다던가 하는 기행이 이어졌다. 신기한 건 그런 맛 간 기용이 이상하게도 잘 맞아 떨어졌다는 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당시 4번타자이자 팀의 주포인 타이론 우즈를 1번에 둘까도 심각하게 고민해봤다고 한다. 하지만 잘 뜯어보면 선수기용은 나름 철저하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게 중론.

감독을 맡은 2004년부터 2009년 현재까지 두 번의 센트럴리그 제패, 3번의 일본시리즈 진출, 1번의 일본시리즈 제패[7] 등 감독으로의 업적도 대단한 편.

한국에는 능구렁이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경기 몇 번 보면 알겠지만, 경기 내내 시종일관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보통 심판에게 항의하러 나오는 감독들은 대개 흥분해서 뛰쳐나오는 게 보통인데 오치아이 감독이 이런 상황이 오면 마치 허허 심판양반 그건 아니지 않는가라는 표정으로 허허실실 대며 걸어 나와서 30분 넘게 실실 쪼개면서 일관된 표정으로 항의하기도 한다. 보통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가지 항의하는 스타일의 사람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보통사람은 아닌 듯. 그리고 그렇게 푸근한 아빠미소로 항의하다가 안받아들여지면 지킬과 하이드처럼 표정이 싹바뀌면서 선수들을 다 퇴장시키는 예능감까지 발휘한다! 이것 때문에 심판이 화들짝 놀란게 보일정도. 참고로 일본야구는 5분이상 항의하면 지연행위로 퇴장처분을 내리는데, 오치아이는 2011년 8월 9일부로 감독력 8년 중에 8번이나 퇴장을 당했으며 이는 역대 퇴장횟수 3위(...).[8] 그리고 그러면서도 심판에게 폭언을 했다는 이유로 당한 퇴장은 단 한번도 없고 순전히 납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연행위 퇴장으로만 저 기록을 세웠다. 빡치면 베이스 뽑아 집어던지는 외국인 감독(전 히로시마 감독인 마티 브라운)과는 대조적

2011년 시즌 후반,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서프라이즈가 아닌 구단이 멋대로 자른데다가, 오치아이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있었으나 "현장을 맡고 있는 건 나니까 멋대로 발표하지 말라"라고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막장 프런트에서 선수를 쳐버린것. 이때 유명한 사건이 주니치 구단사장이 주니치가 9회에 역전타 맞을때 환호한것까지 드러나서 엄청나게 논란이 일었다. 그만큼 현장 관련해서 언터쳐블이였던 오치아이를 프런트가 밀어내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던 것.

그리고 언론사인 주니치답게 자사 신문과 계열사 언론매체로 오치아이를 엄청나게 디스했으나(...), 다른 언론사에서는 당연하지만 오치아이 편을 들었다. 오히려 구단의 숱한 방해를 뚫고 언제나처럼 콩까던 2위하던 주니치가 상당한 게임차를 극복하고 다시 1위로 센트럴리그 우승까지 이뤄냈다는 점때문에 일본시리즈에서 석패하고도 오히려 오치아이가 명장소리 듣는, 주니치 프런트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효과가 났다.한국이나 일본이나 프런트가 문제

4. 프런트로서 주니치 복귀

팀을 떠난 2년동안 주니치는 팀 레전드 중의 한명인 다카기 모리미치를 감독으로 등용하여 오치아이 색채 지우기에 나섰다. 그러나 다카기는 10.8 결전 당시의 감독으로서 이미 그 당시 한계가 드러난 감독이었다. 굳이 10년 전 사건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재임 기간동안 바타 히로카즈를 비롯한 선수들과의 불협화음과, 돌출발언으로 팬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이런 감독을 무려 17년만에 감독으로 복귀시켜서 오치아이 재적 당시의 성과는 '오치아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프런트가 선수단을 잘 구성해서 얻은 성과'임을 증명하려 했으나, 다카기 감독 복귀 2년만에 팀은 2001년 5위 이후 12년만의 B클래스라는 치욕을 기록하게 된다.

결국 프런트는 실패를 인정하고 다카기 감독은 자진 사임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주니치의 감독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에 뒤통수를 날리면서 주니치 구단의 GM으로 팀에 복귀하게 된다. 감독자리에는 포수인 다니시게 모토노부를 선수 겸 감독으로 선임하고 2013년 시즌오프의 연봉협상으로써 GM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연봉협상자리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연봉 삭감조치를 취하면서 또다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주전 유격수자리를 지켜오던 베테랑 이바타에게 75%가 넘는 연봉삭감을 통보하면서 자진 퇴단하게 만든 것을 시작으로 주전급 대부분이 25%이상의 연봉삭감을 피하지 못했으며, 2013시즌 36세이브를 올린 이와세조차 겨우 연봉 동결 통보를 받을 정도. 그나마 이와세의 연봉 동결이 가장 후한 대우였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연봉삭감의 칼바람속에서도 예년 같으면 반발에 계약보류를 선언했을 대부분의 선수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군소리 없이 도장을 찍고 나왔다는 거. 일본시리즈가 끝나자 마자 일본 스포츠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는 게 그날의 주니치의 연봉협상 결과일 정도로(...) 프런트로서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팀은 2014년에 성적 폭망(...)

5. 이야깃거리

  • 스스로 매스컴에 밝히고 있지만 일본 야구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한다는 건덕후라고 한다. 방송 등에서 꽤나 진지하게 건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걸 보면 내공이 장난 아닌 듯. 단 보통 자기 얘기를 잘 안하는 오치아이 감독의 평소 성격을 볼 때 건덕후인건 맞지만 요새 방송에서 하는 건 조금 립서비스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한때 돌았지만 감독실에 큐리오스 포스터가 붙으있으며, 2008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요미우리가 메이크레전드라는 표어에 트란잠이라고 대답해주고, 오치아이 전용 엑시아라는 엑시아 개조 프라모델까지 만들정도의 건덕후로 이건 립서비스 수준이 아니다(...).


    (...)
    그러고 보니 성씨가 같은 야구인 중에 이 분도 건덕후로 유명한데?

  • 2007년 약 50년 만에 주니치 드래곤즈일본시리즈에서 우승시키면서 주니치에선 인기가 많을 듯하다. 천하의 호시노도 주니치에서는 우승은 이루지 못했다. 지독한 콩라인목메달 호시노

  • 구회 가입조건인 2000안타 이상을 쳤지만 명구회에 가입을 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2000안타-200승에 도달하지 못한 수많은 대스타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라고...라고는 말했지만 실제로는 명구회에 등록된 선배선수들(특히 명구회의 수장격인 가네다 마사이치)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라는 점과, 오치아이 자신이 명구회에 속하는 것을 그리 안 좋게 생각해서 가입을 안한 것으로 보인다.

  • 현역시절 이야기로 몇 개를 꺼내 본다면 빈볼에 맞자 이후 타석부터 잇달아 상대투수를 향해 직격 타구를 날려 투수를 공격하는 것으로 혼쭐을 냈다. 그리고 베이스에 나가서 씨익 웃었다고 한다(...).[9][10] 아울러 500호-1000호-1500호-2000호 안타를 모두 홈런으로 기록했다. 1000경기, 2000경기 때도 홈런을 쳤다. 일본에서는 의도적으로 홈런을 노린 결과라고 한다니...흠좀무

    한번은 어느 기자가 "기념 안타들이 전부 홈런인 걸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당연하지. 노리고 쳤으니까."라고 대답했다(...).

  • 프로 입단 이후에는 배탈이 날 수도 있어 좋아하는 생선회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았고, 아들은 마당에서 나는 스윙소리에 잠이 깨거나, 원정경기에서 동료가 호텔방을 방문하면 나체로 스윙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 엄청난 공처가로도 유명하다. 아내의 말에는 깨깽하면서 기어들어간다고. 그러나 대시는 오치아이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했었다. 자신에게 담담하게 신뢰를 보내는 것을 보며 한눈에 반한것. 그리고 아내의 일은 본인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한다. #

    아내인 노부코 여사는 9살 연상인데, 이 아줌마가 기가 쎈걸로 유명하다(...) 그 성격을 보여주는 한 일화.

    오치아이의 요미우리 이적때 배번 6번을 원했지만 6번은 이미 주인(시노즈카 카즈노리)이 있는 상태. 나가시마 시게오가 직접 나서서 다른 번호를 달아달라고 해도 사정을 하는데도 오치아이는 "순순히 6번을 내놓는다면 유혈사태는 없을 것이라능"이란 태도로 요지부동 이었고, 결국 나가시마는 노부코 여사에게 SOS를 쳤는데 이 노부코 여사가 나가시마 감독의 빠순이광팬 이었다. 나가시마는 노부코 여사와 통화 중에도 영구 결번된 자신의 3번까지도 줄 수있다며 오치아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었고, 결국 노부코 여사는

"오늘 중으로 배번선택을 완료시키겠다. 하지만 감독님의 3번은 절대 안된다."

라며 반나절만에 오치아이에게 60번을 선택하게 하는 괴력을 보여준다. 이 때 입단 인터뷰에서 "나가시마 감독을 헹가레 쳐드리러 왔다."고 했는데 나가시마의 관심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보란듯이 우승을 실현시켰다. 여담이지만 노부코 여사는 오치아이를 어린아이 취급한다고 한다. 노부코 여사의 저서인 "악처가 좋은 남편을 만든다."[11]를 보면 남편 조련의 끝장을 보여준다. 이런 철학자가 생각나면 진거다. 그녀가 남편을 부르는 애칭은 히로.

  • 요미우리 시절에 마쓰이 히데키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준 바도 있다.[12]

  • 주니치 감독을 물러난 뒤 2012년 7월. 뜬금없이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게임에서 오치아이 부모와 아들과의 대결이라는 타이틀로 출현하였다.(...) 실황야구가 일본 내에선 최고의 인기게임이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게임광고에 출현할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팬들의 입장. 그놈의 오레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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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입단 초기에는 '미스터 롯데' 리토 미치요의 뒤를 이어 3루를 볼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결국은 2루수로서 활약을 했다. 주니치 시절 말기~요미우리 시절 초기에는 3루수, 그리고 요미우리 시절 말기~닛폰햄 시절에는 1루수.
  • [2] 마이페이스보다도 좀 강한 뉘앙스로 생각된다.
  • [3] 흔히 일본에서는 신주(神主)타법이라 불린다.
  • [4] 이 악연 때문에 오치아이는 통산 2000안타를 넘겼음에도 구회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오치아이도 2011년 6월 16일 주니치의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키가 287세이브로 개인통산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을 때, "일본 프로야구에서 영원히 깨기 힘든 대기록이 두 개 있다. 왕정치의 868홈런과 카네다 마사이치의 400승 이다" 라며 카네다를 추켜세운 바 있다.
  • [5] 타율 0.325, 32홈런, 99타점 이었다. 그럼 06년의 이대호는???
  • [6] 처음 새 유니폼이 나왔을 때 오치아이는 예전 70~80년대 드래곤즈가 입었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혀 예전 분위기를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새파랗다.(...)
  • [7] 2007년 시즌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 치고 올라가 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일본시리즈 최종전에서 후에 많은 논란을 낳은 결정을 내렸는데...퍼펙트 게임 NPB 항목 참조.
  • [8] 선수시절까지 포함하면 10번. 유튜브보면 요미우리시절에 심판 가슴 강타해서 퇴장당하는 영상이 떠돌고 있다. 주니치시절 호시노한테 배운거 나가시마 영감님 밑에서 보여줬다나 흠좀무. 오치아이가 요미우리에 있을때 나가시마 영감님은 개꿀빨았다고....
  • [9] 이 투수는 가시오 오사무(東尾 修). 통산 257승을 거둔 세이부의 레전드 투수이며 세이부 감독으로도 7년 연속 A클래스를 달성한 세이부의 진짜 레전드인데 히가시오는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사구(死球) 기록 보유자다.
  • [10]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히가시오를 공격(?!)한 때는 오치아이가 롯데에 뛰었을 때였는데, 오치아이가 주니치로 이적한 87년에 두 사람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연봉 1억엔 선수가 되었다.
  • [11]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간된적이 있다. 2014년 현재는 20년도 더 지난지라 절판.(1994년 발매)
  • [12] 마쓰이 히데키의 인터뷰 내용으로는 오치아이와 목욕탕에서 만나 종종 타격 이론에 대해 들었는데, 당시에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몰랐지만, 연차가 쌓이고 타격에 눈이 띄이면서 오치아이가 말했던 게 이런 뜻이었구나 이해를 하게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