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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last modified: 2016-05-29 19:57:54 Contributors

오스만의 통치에 의한 숭고한 국가
دَوْلَتِ عَلِيّهٔ عُثمَانِیّه
Osmanlı İmparatorluğu
ottoman_flag.jpg
[JPG image (Unknown)]
ottoman_emblem.png
[PNG image (Unknown)]
국기 국장[1]
존속기간 1299년 ~ 1922년
표어 دولت ابد مدت/Devlet-i Ebed-i Müddet
(불멸의 제국)
국가 (아래 국가 항목 참조)
위치 서아시아, 동유럽, 남유럽, 북아프리카
수도
쇠위트[2] -> 부르사[3] ->
부르사, 에디르네[4] ->
코스탄티니예
정치체제
국가원수 베이[7] -> 술탄 -> 황제[8]
공용어 오스만 터키어[9]
민족 오스만인[10]
종교 이슬람, 정교회, 유대교
주요사건 1299년 건국
1529년 1차 빈 포위
1683년 2차 빈 포위
1839년 탄지마트 개혁
1876년 헌법 제정
1908년 2차 헌법 제정
1915년 갈리폴리 전투
1919-1923년 터키 독립전쟁
1922년 해체
통화 리라[11]
성립 이전 룸 술탄국, 그 외 여러 국가들[12]
멸망 이후 터키, 그 외 여러 국가들[13]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초기 역사
2.2. 전성기
2.3. 몰락의 시작
2.4. 메흐메트 알리
2.5. 멸망과 새로운 시작
3.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
4. 이야깃거리
5. 역대 황제 목록
6. 오스만 제국에서 모티브를 따 온 나라가 등장하는 창작물들

1. 개요

존속기간 : 1299년 ~ 1922년(623년간 존속.)

현대 터키 공화국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는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 투르크 제국 등등 부르는 명칭이 가지가지다.[14] 영어로는 오토만(Ottoman)이라고 쓰기 때문에 오토만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초대 파디샤(Padişah)인[15]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16]의 이름에서 따왔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터키 본토는 물론이고 흑해 일대와 발칸 반도 전체, 헝가리, 튀니지, 리비아, 알제리, 팔레스타인,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아르메니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에티오피아 지역까지 세력이 뻗칠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말 그대로 로마 제국 이후 본격 3대륙 장악국가. 뿐만아니라 직접 지배하고 있는 곳 외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수니파 이슬람권의 큰형님 노릇을 하기도 했다.[17]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17세기 제국 인구가 대략 3천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동시기 프랑스 인구가 2천만이었다. 양국의 영토 크기 차이를 생각하면...[18]

참고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등의 게임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등으로 인해 오스만 튀르크의 국기라고 하면 무조건 붉은 바탕에 흰색 초승달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와 유사한 디자인의 깃발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오스만 튀르크 후기에 해당하는 1793년이다(게다가 초승달이 세로로 길쭉하고, 별의 모양도 다르다). 그 이전까지는 큰 초승달을 쓰지 않거나 붉은색 바탕에 노란 초승달을 사용하거나 하는 등 다양한 디자인을 사용했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링크 참고.

2. 역사

2.1. 초기 역사

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황제 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를 사로잡고 그 군세를 대파한[19] 알프 아르슬란 이후 셀주크 제국본가에서 떨어져 나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세력을 규합하며 소아시아를 호령하던 룸 셀주크십자군 전쟁 크리를 맞은 이후로 심심하면 형제간 반목질과 반란으로 비실대면서 마누일 1세 콤니노스 황제 이후 덩달아 비실대던 비잔티움 제국과 같이 아웅다웅하고 있었는데, 1243년 몽골이 아나톨리아를 침입해 룸 셀주크를 조공국으로 만들어버리고 50여년에 걸쳐 역사에서 증발될 때까지[20] 룸 셀주크는 분열을 거듭한다.

이 와중에 생겨난 몇몇 튀르크 소국들중 하나가 바로 오스만 조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오스만 가문의 시조는 쉴레이만 샤로 원래 이란 서부와 중앙아시아쪽에 있던 튀르크멘(Türkmen) 유목민의 부족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고향을 버리고 아나톨리아로 도피하여 룸 술탄국의 보호를 받았다. 몽골의 침입이 좀 잦아든 뒤에는 돌아가려 했으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다 익사해버렸고[21] 그 후 그의 아들인 에르투으룰 가지는 그대로 정착하여 룸 술탄국편에서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해 공을 인정받아 오늘날 앙카라인근에 봉토를 받고 베이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오스만 제국의 창업주인 오스만 1세이며 그는 룸 술탄국의 붕괴를 틈타 독립[22]하여 당대에 아나톨리아의 비잔티움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2대 술탄 오르한 가지는 발칸 반도에 교두보까지 구축하여 오스만 제국의 포스를 떨치고 일백년후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을 기반을 닦았다.

이후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소국들을 복속시켜가며 소아시아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팔레올로고스 가문 밑에서 이전보다 배이상 비실대던 비잔티움 제국과 전성기를 막 지나 기울어가고 있었던 세르비아불가리아를 속국으로 삼으며 위엄을 떨치며 발칸 반도를 뒤흔들고 우위를 다지며 역사책에 기술될 내용을 약간 더 앞당기는 듯 싶었으나, 동쪽에서 티무르라는 이름의 듣보잡이 나타나 칭기즈 칸가문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아나톨리아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방에 할거하던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을 병합해나가는데, 이로 인해 쫓겨난 군주들이 티무르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 티무르가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 참고로,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를 점령할 당시 그 유명한 '코소보 전투'가 있었다. 세르비아의 입장에선 비록 코소보 전투에서 패했으나 전투의 무대가 된 코소보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성지로 여겨졌는데, 코소보가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알바니아계 민족이 하나 둘 뿌리를 박아 알바니아인들의 땅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이는 오늘날 코소보 사태의 단초가 된다.

발칸 반도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이 연합한 십자군에게도 코폴리스 전투에서 대승하면서 싸움에는 자신있었던 당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는 이 듣보잡이 칭기즈 칸의 뭐라든 알 바가 아니었으나, 자기 동네를 건드리는 작자에게는 손봐줄 이유가 있었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호령하던 무시무시한 튀르크 군대를 직접 이끌고 출발했지만 더 무시무시한 중앙 아시아의 전투민족조차 굴복시킨 티무르에게 말 그대로 개털렸다. 바예지드 1세의 별명이 이을드름(Yıldırım), 터키어뇌제(雷帝)였다는 걸 생각하면 티무르의 무서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23].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히고 황후가 능욕까지 당하는 꼴을 보게 된[24] 술탄은 굴욕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25][26], 제국은 서로 반목을 일삼는 아들들과 호랑이 자리를 대신하려는 여우들의 손에 맡겨져 여러 개로 찢겨져 나가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오스만 제국은 약 십여년간의 암울한 전간기를 맞으며 혼돈에 빠진다. 흡사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비잔티움 제국을 보는 듯한 이 전간기를 끝낸 것이 흐메트 1세로, 제위를 노리던 다른 형제들을 모두 주살하고 아나톨리아와 유럽의 영토를 규합하는데 성공한다. 티무르가 동물원에서 탈주시킨 여우들을 도로 잡아 가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시기(정확하게 적자면 1300년부터 1453년 즈음까지)의 오스만 지도층은 변방의 영주, 튀르크멘 지도자들, 황자들이었고, 이러한 지도자들은 오스만 군주를 동등한 권력자들 가운데 제 1인자로 받아들였다. 술탄들은 거의 동등한 엘리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그들과 협상을 했다.

2.2. 전성기

15세기의 팽창기는 '14xx년 어디 정복'의 단순한 나열에 불과하게 된다.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군은 악마의 가호를 받는 무적의 군대 정도로 취급받았다. 또한 제국의 황제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후 스스로를 '로마황제(룸 카이세리)',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칭하였고 튀르크인들은 간접적으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임을 자처했다.[27][28] 물론 로마 황제는 대 유럽용, 술탄 내지는 파디샤는 이슬람 세계 전용 명칭이고 대내적으로는 튀르크인의 전통적인 군주 칭호인 칸(오스만 터키어로는 한)이라고 통칭했다. 아타튀르크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망하자 칸 역시 사라졌다. [29]

특히 '대제'로까지 칭송받는 쉴레이만 1세의 치세는 오스만 제국의 최대 번영기로, 당시 카를 5세 치하의 서유럽 제국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로 1차 빈 포위가 있었고(결국은 물러나긴 했지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은 사치와 부의 극을 달렸으며 수많은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30][31] 1530년대에는 에게 해의 제노바인들과 베네치아인들의 거점이 남김없이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며 오스만 군대가 이탈리아에까지 상륙했고 로마 함락이 멀지 않은 듯 싶었다.

14세기 초부터 술탄은 그저 거의 동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튀르크멘 지배자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 절대적 군주라는 논리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고위 관료와 야전군사령관들은 이 논리에 치열하게 논박했지만, 이 관계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으로 극적으로 변한다. 이 정복으로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된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가끔 독립적인 행보를 했던 거물급 튀르크멘 지도자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았다[32]. 또한 이런 흐름은 데브시르메[33][34] 출신자들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메흐메트 2세는 절대적 권력의 논리를 법제화했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술탄은 이론적이긴 하나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고, 신료들에 대해 생사 여탈권마저 가지고 있었다.

2.3. 몰락의 시작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쉴레이만 1세의 치세를 오스만 제국의 쇠퇴 기점으로 만든다. 왜냐면 연이은 정복으로 인해 비대해진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쉴레이만 1세는 사법 제도의 정립과 예니체리의 확대 등 여러 관료주의적 개혁을 진행했는데, 이것은 관료제의 비대화를 불러오는 한편 예니체리의 엘리트 군사 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을 붕괴시키고 군벌화를 촉진함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며[35] 술탄의 위치는 흔들렸다. 특히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동안 하렘 출신 황후의 정치적 위상이 격상되었는데[36] 쉴레이만 사후 무능한 술탄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태후들이나 황후가 실질적으로 술탄의 자리에 오르면서 종전의 절대군주적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했다.[37] 황후와 태후들, 거기에 황녀들의 힘[38]이 강해져 이들이 나랏일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 하기 시작했다. 휘렘 술탄이 황후로 책봉된 1534년부터 투르한 하티제 술탄(Turhan Hatice Sultan)의 권력이 쾨프륄뤼(Köprülü) 가문으로 넘어간 1656년 까지의 기간을 여인들의 왕조(Kadınlar Saltanatı)[39]라고 부른다.

예니체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 엘리트 군제의 또다른 축이었던 티마르 제도와 시파히 또한 붕괴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제도들은 정복지의 부족으로 인해 붕괴가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 기병대였던 시파히는 티마르 제도를 통해 정복지를 봉토로 하사받았는데,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한계에 이르자 더 이상의 봉토가 나올리가 없었고 티마르 제도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티마르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던 시파히 또한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 군사력의 양익이 모두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도중 무너졌다. [40]

한편 쉴레이만 1세가 정복한 영토들도 모두 시원치않았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획득했던 영토들 중 타브리즈를 비롯한 상당한 부분은 결국 그냥 돌려줬고, 그나마 획득한 영토도 페르시아와의 끝없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특히 헝가리는 수탈과 전쟁으로 인해 수백년 동안 풍요로웠던 옥토가 졸지에 황무지로 변해버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으며[41], 달마시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넘어오는 약탈자들과 해적들에 의해 피폐해졌다.

쉴레이만 1세 사후, 베네치아와의 길고 긴 물량전과[42] 레판토 해전의 패전,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정체기에 들어간다.[43] 특히 1683년 시도한 2차 빈 포위는 침체하는 오스만 제국의 위신을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일발역전시킬 기회였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역관광당한다.

이 와중에 스페인에서 시작된 물가 혁명이 오스만 제국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이미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화된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더이상 가중되는 부담을 버틸 수가 없었다. 정복지의 지주 계급으로서 군비의 약 절반 가까이를 지탱해주던 시파히들이 감당을 못하고 몰락하자 시파히들이 부담하던 군비까지 중앙에서 전부 떠안아야 했다. 따라서 끝없이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재정적 출혈은 이제 오스만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결국 1585년 오스만 제국은 태후 사피예 술탄과 관료들의 주도로 공용 화폐였던 '악체(Akçe)화'의 평가절하를 결정했으며[44] 이후 100년 동안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맛보기 시작하면서 쉴레이만 1세 사후 20년 만에 오스만 제국은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한편 이 위기는 쉴레이만 1세의 정책으로 막강한 정치 권력을 손에 쥔 이후 경제권까지 넘보기 시작하던 예니체리 계급의 세력 확장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예니체리들은 떨어진 수입만큼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무력으로 토지를 강탈하는 등 온갖 더러운 짓을 해댔는데, 오스만 제국의 세수는 대부분 이런 농토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특권층인 예니체리들이 토지를 집어먹는만큼 가뜩이나 좋지못한 오스만 제국의 재정 위기는 심화되어 계속 악체화의 평가절하만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나라의 땅이란 땅은 다 집어먹은 예니체리들은 오스만 제국을 일종의 폴란드식 귀족 공화국으로 만들어 술탄을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개혁 시도를 무력으로 중단시켰느며 폴란드의 귀족들처럼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18세기부터 서구화된 군사제도를 도입한 러시아가 계속 팽창하였고, 러시아는 자주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벌이며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많이 빼앗아 축소시킨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은 흑해와 카스피해, 카프카즈 방면의 영토를 상당수 상실했다.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던 한 시대의 강자는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며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1808년에 제위에 오른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사촌형이었던 셀림 3세가 왕권을 농단하는 예니체리들을 박살내려다가 도리어 암살당한 것을 잊지 않고 예니체리들을 안심시키면서 민심을 얻고 최신 병기와 새 편제를 도입해 친위대를 양성했다. 뒤늦게 조짐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챈 예니체리들은 술탄을 쫓아내기 위해 평소 밥먹듯이 하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마흐무드 2세는 몰래 양성한 친위군을 직접 지휘하여 예니체리를 개발살냈다. 이때 유럽에서 들여온 대포 15문의 30분에 걸친 포격에 예니체리 만여명이 믹서기 갈듯 갈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일생 일대이자 전 오스만 가문의 원수였던 예니체리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아직 진통이 남아있었다.

이 무렵의 권력 구조 양상을 보면, 이미 쉴레이만 1세 재위 기간 중 권력은 군주 개인에서 그의 해방 노예, 피후원자라 할 수 있는 데브시르메 출신자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데브시르메 관료들은 그 이전부터 통제받지 않는 특권 집단으로 자리잡은 예니체리 계급이나 태후, 황후와 결탁하여 실질적으로 제국을 장악했는데, 이는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크림 반도, 남쪽으로는 수단, 서쪽으로는 알제리, 동쪽으로는 코카서스와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비대해진 제국을 술탄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해진 까닭에 영토를 다스리고 유지할 행정 관료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쟁하거나 통치하는 술탄이 아니라 관료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술탄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이들이 즉위시킨 술탄들 중 대다수는 머리가 좀 이상하든가 나이가 어려 태후의 섭정이 필요했다. 결국 무라드 4세의 경우를 제외하면 19세기의 마흐무드 2세와 압뒬하미드 2세가 통치하기 전까지 국권을 실제로 장악할 수 있었던 술탄은 없었다.

국가의 권력은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재상과 파샤 가문으로 넘어갔다. 술탄의 권력이 있던 곳에는 예니체리 군벌을 등에 업은 민간인들의 과두제가 등장하고, 옛 관례들의 자리는 새로운 관례들이 차지했다. 데브시르메에 의한 관료 등용은 지배 계급의 권력 세습으로 대체되었다. '아직까지는' 콘스탄티노플의 중앙 정부가 실제로 통치권을 갖고 있었지만, 군주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실권을 지고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군주들이 권력을 다지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2.4. 메흐메트 알리[45]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방 총독의 권세가 대단히 강력했다.[46] 본래 술탄의 명을 받고 총독으로 내려왔던 것이 오스만 제국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19세기가 되면 현 터키 국경 밖의 영토는 전부 준독립화했다. 당대 이집트도 실제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총독 통치 하에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본래 알바니아 출신이었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서구식 조병창을 건설하고 유럽식 교육을 도입하는 등 기세등등하고 있던 중에 그리스 독립전쟁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개털리는 걸 보자 겁도 없이 전쟁에 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이집트 총독 자리를 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보려는 수작을 부리다가 술탄이 거부하는 바람에 수틀려서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군은 연이은 전쟁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시리아를 점령한 뒤 곧장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개혁이 완료되지도 않았고 예니체리가 남긴 상처가 여러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어처구니 없는 졸전이었다. 유럽 열강의 도움으로 제위는 보존했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으나 시리아를 통째로 무함마드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분통이 터진 마흐무트 2세는 개혁을 가속하면서 무함마드 알리를 손봐줄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함마드 알리가 시리아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곧바로 8만 대군으로 시리아를 침공했다가 4만여명의 이집트군의 반격에 의해 개털렸으며 덤으로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전 오스만 제국 해군이 무함마드 알리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마흐무트 2세는 홧병으로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47]

황당해진 유럽 열강들은 이집트에게 철수를 요구했으나, 프랑스가 이집트를 후원하고 있었으므로 무함마드 알리는 프랑스가 알아서 해주리라고 여기고 가볍게 씹어버렸다. 결국 영국이 함대를 파견하고 침공 위협을 해보이자 그때서야 침공을 중단하고 전 시리아를 도로 돌려주고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알리는 최초의 목적인 이집트와 수단의 세습을 확립했고, 이후 1956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설립하게 된다.[48] 이로서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다만 당시 기록을 보면 이때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중 가장 돈이 많이 들어오는 지역이 발칸반도 다음으로 바로 이집트였다(...)

2.5. 멸망과 새로운 시작

비록 오스만 제국의 중근동 영토의 정세가 일시적으로 안정되기는 하였으나, 반대편 유럽 영토는 1821년부터 1827년 사이에 발발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르는 등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을 통해 근대식의 의회제도와 헌법을 도입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지만, 국내 보수세력의 반발과 속셈을 알아차린 열강의 간섭으로 인해 좌절한다. 1853년 러시아와의 사이에서 발발한 크림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유럽연합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승리하였으나 제국의 피폐화를 가속시켰으며, 승리도 부질없이 20년 후 다시 쳐들어온 러시아에게 결국 참패했다.(제5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렇게 동유럽의 영향력을 잃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형국의 유지를 위하여 독일에게 접근[49]하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10월 29일 동맹국 측에 참전을 결정[50], 결국 패전국이 되어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나라가 갈기갈기 찢겨나가게 된다. 거기다 이 틈을 노려 그리스까지 고토수복을 외치며 쳐들어온다.

그리고 이때 일어난 사람이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아타튀르크였다. 그는 본래 술탄 메흐메트 6세의 명으로 아나톨리아 내륙을 장악한 독립분자들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1919년 삼순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독립군에 가담하고는 연합군에 항복한 술탄 정부를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고 같은해 시바스에서 대국민의회(Türkiye Büyük Milli Meclisi, TBMM)[51]를 열고, 군대를 모아 아나톨리아 앙카라를 거점으로 3년에 이르는 터키 독립전쟁을 펼친 끝에, 그리스군을 쳐부순 후 술탄을 폐위시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그다음엔 그리스군을 격퇴하였고 연합군과 새로운 협상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은 1922년 부로 멸망하고 현재의 터키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3.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

오스만 제국시기 지방통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앙은 정부가 파견하는 행정관(Paşa, Bey, Sancakbaşı, Kaymakam)이 통치했으며 향촌은 현지 유력부족이나 세력이 자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인구도 많고 부유한 발칸지방을 굉장히 세세하게 나누었는데, 1878년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바툼, 아르트빈, (현재 행정구역 기준으로) 으으드르, 아르다한, 카르스를 러시아에 할양한 직후의 지도는 다음과 같다. (터키어) 위 지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방행정구역가운데 가장 큰 단위인 빌라예트(Vilayet)[52]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산작(Sancak, 군단 주둔단위)[53], 마할레(Mahalle, 향촌단위로 오늘날의 '동, 리'에 해당된다)등으로 세분화된다. 자세히 보면 당시의 오스만 행정구역이 거의 정확하게 이라크(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이집트(므스르 헤디브령), 리비아(트라블루스가르프 빌라예트),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스나 빌라예트)의 전신임을 볼 수 있다.

4. 이야깃거리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400여년 가까이 지배하여 역사상 최장기간 지배한 기록을 세웠다.[54] 최전성기의 로마 제국부터 19세기의 슈퍼파워 영국, 20~21세기 슈퍼파워 미국조차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장기간, 그것도 완벽히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록.

인류역사상 최초로 독립된 공군을 창설, 운영한 나라다. 오스만제국에 비행기가 들어온건 1909년 11월에 벨기에인 파일럿 바롱 드 카테르(Baron de Catters)가 이스탄불에서 시연한 부아생(Voisin)형 비행기로 중량 500kg, 최대시속 76km로 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를 본 술탄 메흐메트 5세가 앞으로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거라고 판단하고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청년 튀르크들과 함께 1911년에 공군을 창설했으며 초기에는 17기밖에 안되는 비행기를 가지고 정찰및 전령목적으로 운영했지만 1912년에 발발한 발칸 전쟁과 같은 해에 있었던 리비아 전쟁에서 대활약을 하고, 공화국성립 이후 터키군이 이 부대를 인수받아서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912년 발칸 전쟁당시 오스만 공군의 모습

오스만 제국의 국가는 본격적으로 서구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마흐무트 2세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주된 국가행사때 예니체리에 속한 군악대인 메흐테르[55]가 행진곡을 연주하는 식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국가'라는 개념을 도입한건 그가 처음. 때문에 오스만 제국 멸망기까지 사용된 국가들은 전부 서구풍, 특히 고전주의적인 요소와 터키 음악의 음계를 가미한 형태를 갖고 있으며, 장엄하다. 한편 듣고있으면 왠지 음울해서 제국 말기의 느낌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미디예 행진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사가 없는것도 특징.

오스만 제국의 국가는 마흐무트 2세 이후 새로운 파디샤가 즉위할때마다 바뀌었으며, 마지막 파디샤인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자기만의 국가를 갖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국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것은 링크도 함께 첨부한다.

마흐무디예 행진곡(Mahmudiye Marşı): 사용시기는 마흐무트 2세 제위시기인 1808-1839년, 훗날 오스만 제국으로 귀화한 이탈리아인 주세페 도니체티(Guiseppe Donizetti)와 그의 형제인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가 작곡했다.



메지디예 행진곡 긴 버전

짧은 버전

메지디예 행진곡(Mecidiye Marşı): 압뒬메지트 제위시기인 1839-1861년에 사용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주세페 도니체티가 작곡했다. 두 종류가 있는데, 긴 버전과 짧은 버전이 있다.

아지지예 행진곡(Aziziye Marşı): 압뒬아지즈 제위시기인 1861-1876년에 사용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인인 칼리스토 구아텔리(Callisto Guatelli)가 작곡했다.

메지디예 행진곡(Mecidiye Marşı): 1876년에만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 시기 파디샤인 무라트 5세가 단명[56]했기 때문이다.

하미디예 행진곡(Hamidiye Marşı): 압뒬하미트 2세 제위시기인 1876-1909년에 사용되었으며, 터키인이고 메흐테르 대장(Mehterbaşı)인 네지프 파샤(Necip Paşa)가 작곡했다. 그 때문인지 유일하게 터키색이 강한 음악이다. 유일하게 가사가 있는 것도 특징. 언어개혁전이라 당연히 오스만 터키어로 되어있지만, 번역본도 함께 첨부한다. [57] 내용은 대략 오스만판 장공기념가.[58] 마찬가지로 네지프 파샤가 작곡한 서구적인 음악도 사용했다.


Döşetti Hicâz'a demir yolları
그 분은 히자즈에 철도를 놓았네
Kuruldu Hamidiye Alayları
하미디예 연대를 설립했네
Hudûdlara koştu onbinlerce cân
수만의 적들은 국경너머로 달아났다네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Haliç'te yeni bir tersane kurdu
그 분은 할리치에 새로운 조선소를 세웠네
Denizaltıları deryaya vurdu
그 분의 잠수함들이 대양을 누비네
Dar-ül aceze ve kuraba kurdu
다륄아제제와 구빈원을 세웠네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İlim, fende, teknikte kalmadı geri
그 분은 학문,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물러서지 않았네
Nice mektepler, yollar onun eseri
얼마나 많은 학교와, 길들이 그 분의 작품이던가
Devrinde olmuştuk cihan devleti
우리는 혁명을 통해 이루었네, 세계의 국가를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Ezmedi ezdirmedi hiçbir kimseyi
그 분은 어느 누구도 억누르지도, 억누르게하지도 않았네
Vermedi verdirmedi bir karış yeri
영토 일부도 내주지도, 내주게 하지도 않았네
Halkının hizmetinde hakk'ın bir eri
인민에 헌신하여 권리를 주셨네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İsterdi milleti hep yüce olsun
그 분의 신민들은 원했네, 그 분의 영광이 드높기를
Osmanlı'nın şanı dünyaya dolsun
오스만인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Huzurunda cihan selama dursun
안식 속에서 이 세상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같은 시기에 사용된 서구풍의 하미디예 행진곡

레샤디예 행진곡(Reşadiye Marşı): 메흐메트 5세 레샤트의 제위시기인 1909-1918년에 사용되었으며 이탈리아인인 이탈로 셀벨리(Italo Selvelli)가 작곡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인류 역사상. 적어도 유럽사상 최초로 군악대를 운용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고대부터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한 용도로 나팔소리 같은 것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순수하게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목적만으로 음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오스만 제국의 정예군인 예니체리. 예니체리 내에 딸린 군악대를 메흐테르(Mehter)라고 하는데, 이는 해당 항목 참조.

5. 역대 황제[59] 목록

※ 참고로 여기 나온 황제 이름들은 터키식 발음이다. 아랍식 발음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메흐메드 : 무함마드, 압뒬하미드 : 압둘하미드[60], 쉴레이만 : 술라이만 같은 식. 또한 현대 터키어에서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인명들 중에 끝이 'd'로 끝나는 것을 't'로 발음하고 표기한다. 이를테면 메흐메트(Mehmet), 무라트(Murat) 같은 이름들을 터키 공화국 이전에는 아랍 문자의 'd' 음가로 표기하여 메흐메드(Mehmed), 무라드(Murad)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61] 또한 오늘날에도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옛날식 표기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이 d와 t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대수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비고
00 에르투으룰 가지(Ertuğrul Gazi)[62]1230 1281
01 오스만 1세(Gazi Birinci Osman) (1281)1299 1324
02 오르한(Orhan Gazi) 1324? 1360
03 무라트 1세 휘다벤디갸르(Birinci Murat Hüdavendigâr) 1360 1389.6.15
04 바예지드 1세 '뇌제'(Yıldırım Sultan Bayezit) 1389.6.15 1402.7.20
혼란기 (1402~1413)[63]
05 메흐메트 1세(Birinci Mehmet) 1413.7.5 1421.5.26
06 무라트 2세(İkinci Murat)[64] 1421.6.25 1444
07 메흐메트 2세 '정복제'(Fatih Sultan Mehmet)[65] 1444 1446
- 무라트 2세(İkinci Murat)[66] 1446 1451.2.3
- 메흐메트 2세 '정복제'(Fatih sultan İkinci Mehmet)[67] 1451.2.3 1481.5.3
08 바예지드 2세 '정의제'(Veli İkinci Bayezit) 1481.5.19 1512.4.25
09 셀림 1세 '엄격제'(Yavuz Sultan Selim Han) 1512.4.25 1520.9.21
10 쉴레이만 1세 '대제', '입법제'(Kanuni Sultan Süleyman) 1520.9.22 1566.9.5 최장 즉위(45년 359일)
11 셀림 2세(İkinci Selim) 1566.9.29 1574.12.21
12 무라트 3세(Üçüncü Murat) 1574.12.22 1595.1.16
13 메흐메트 3세(Üçüncü Mehmet) 1596.1.27 1603.12.20
14 아흐메트 1세(Birinci Ahmet) 1603.12.21 1617.11.22
15 무스타파 1세(Birinci Mustafa)[68] 1617.11.22 1618.2.26
16 오스만 2세(İkinci Osman) 1618.2.26 1622.5.19
- 무스타파 1세(Birinci Mustafa)[69] 1622.5.20 1623.9.10
17 무라트 4세(Dördüncü Murat) 1623.9.10 1640.2.8
18 이브라힘(İbrahim) 1640.2.9 1648.8.8
19 메흐메트 4세(Dördüncü Mehmet) 1648.8.8 1687.11.8
20 쉴레이만 2세(İkinci Süleyman) 1687.11.8 1691.6.22
21 아흐메트 2세(İkinci Ahmet) 1691.6.22 1695.2.6
22 무스타파 2세(İkinci Mustafa) 1695.2.6 1703.8.22
23 아흐메트 3세(Üçüncü Ahmet) 1703.8.22 1730.10.1
24 마흐무트 1세(Birinci Mahmut) 1730.10.2 1754.12.13
25 오스만 3세(Üçüncü Osman) 1754.12.13 1757.10.29
26 무스타파 3세(Üçüncü Mustafa) 1757.10.30 1774.1.21
27 압뒬하미트 1세(Birinci Abdülhamit) 1774.1.21 1789.4.6
28 셀림 3세(Üçüncü Selim) 17894.7 1807.5.29
29 무스타파 4세(Dördüncü Mustafa) 1807.5.29 1808.7.28
30 마흐무트 2세(İkinci Mahmut Han) 1808.7.28 1839.7.1
31 압뒬메지트 1세(Birinci Abdülmecit Han) 1839.7.1 1861.6.25
32 압뒬아지즈(Abdülaziz Han) 1861.6.25 1876.5.30
33 무라트 5세(Beşinci Murat Han) 1876.5.30 1876.8.31 최단 즉위(93일)
34 압뒬하미트 2세(İkinci Abdülhamit Han) 1876.8.31 1909.4.27
35 메흐메트 5세 레샤트(Beşinci Mehmet Reşat Han) 1909.4.27 1918.7.3
36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 Han) 1918.7.3 1922.11.1 최후의 술탄
37 압뒬메지트 2세(Halife İkinci Abdülmecit) 1922.11.19 1924.3.3 최후의 칼리파
폐위 이후 오스만 가의 수장
- 압뒬메지트 2세(Halife İkinci Abdülmecit) 1924.3.3 1944.8.23
38 아흐메트 니하트(Ahmet Nihat Osmanoğlu) 1944.8.23 1954.6.4
39 오스만 푸아트(Osman Fuat Osmanoğlu) 1954.6.4 1973.5.19
40 메흐메트 압뒬아지즈(Mehmet Abdülaziz Osmanoğlu) 1973.5.19 1977.1.19
41 알리 바스프(Ali Vâsıp Osmanoğlu) 1977.1.19 1983.12.9
42 메흐메트 오르한(Mehmet Orhan Osmanoğlu) 1983.12.9 1994.3.12 [70]
43 에르투으룰 오스만(Ertuğrul Osman Osmanoğlu) 1994.3.12 2009.9.23
44 오스만 바예지트(Osman Bayezit Osmanoğlu) 2009.9.23

6. 오스만 제국에서 모티브를 따 온 나라가 등장하는 창작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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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882년에 황제 압뒬하미드 2세가 채택.
  • [2] 1299~1335
  • [3] 1335~1363
  • [4] 1363?~1453,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사이에 비잔틴 제국이 끼어 있는 형국이었기에 소통이 어려워, 수도가 두 군데 필요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며 통합. 또한 에디르네가 정확히 몇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었으며 언제 수도가 되었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다.
  • [5] '황제(파디샤)' 대신 '술탄' 을 칭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즉 제국 성립 이전의 술탄들은 재상 이하 여러 귀족 관료들의 눈치를 어느 정도 살펴야 했기에 '전제군주' 로서 군림하지는 못했다. 이 귀족 관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데브시르메 출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전제군주정을 확립한 인물이, 바로 메메드 2세.
  • [6] 1876~1878, 1908~1920년 간
  • [7] 1299~1383년. 베이(bey)는 본래 지방 태수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이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나온 나라임을 잘 보여주는 용어라고 할 만 하다. 대략 왕 정도에 해당하는 술탄보다는 지위가 낮아서, 의역해서 생각하자면 '공작(公爵)' 정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 [8] 황제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인 파디샤(Padishah), '술탄 중의 술탄' 을 뜻하는 '술탄 에스 셀라틴(Sultan us-Selatin)', '로마 황제' 라는 뜻의 '카이세르 룸(Qayser-i Rûm)' 등이 쓰였다. 이 밖에도 몽골어인 을 쓰기도 하고 셀림 1세칼리프를 칭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제국 말기에는 칼리프를 칭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여전히 술탄이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동안 술탄이라 했던 것이 관습화된 것으로 러시아의 군주가 차르 에서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줄곧 차르라 했던 것과 비슷한 예.
  • [9] 터키어를 쓰지 않는 지방에 칙령을 내리거나 공문서를 작성할 때는 현지의 언어도 함께 썼다. 종교인들은 아랍어, 학자와 문필가들은 페르시아어를 쓰기도 했으며, 오스만 터키어는 이 두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10] 20세기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 내의 민족들은 언어와 종교에 관계없이 법적으로 모두 '오스만인'이었으며, 종교에 따라 무슬림과 즘미(Zımmi, 비무슬림이지만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를 믿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신앙을 믿을 권리를 보호받는 사람들)로 차이를 두었다. 19세기 이전 기록에도 튀르크멘, 룸, 보쉬낙, 아랍인, 유대인 같은 민족의 이름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는 출신지와 언어에 따라 구분을 둔 것으로 공식적인 구분은 아니다.
  • [11] 리라화 사용 이전에는 악체, 파라, 쿠루쉬, 마흐무디예, 메지디예 등등 다양한 통화를 사용했었다.
  • [12] 13~16세기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 병합, 1396년 불가리아 병합, 1453년 비잔티움 제국 병합, 1456년 세르비아 병합[71], 1463년 보스니아 병합, 1517년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 시리아, 레반트, 아라비아 병합, , 1556년 알제리 병합, 1574년 튀니지 병합
  • [13] 1822년 그리스 독립, 1830년 프랑스알제리 병합, 1878년 루마니아 독립,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 1878년 세르비아 독립, 1881년 프랑스튀니지 병합, 1908년 불가리아 독립, 1912년 알바니아 독립,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22년 오스만 제국 해체, 터키, 키프로스,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집트, 예멘, 이라크, 쿠웨이트 분리
  • [14] 우리나라에서 '튀르크'라고 하면 셀주크 아니면 오스만 밖에 모르던 예전에는 보통 오스만 튀르크(90년대 초반만 해도 그냥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로 교과서에 나왔었다.) 혹은 오스만 터키라고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튀르크나 터키는 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사실 오스만 제국 본인들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불기 전까지는 튀르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운 호칭이다. 덧붙여 셀주크 제국도 비슷하게 튀르크라는 명칭을 굳이 붙이지 않는 편이다. 단, 이쪽은 오스만 조의 경우와 달리 스스로가 튀르크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한 편.
  • [15] 당시는 단지 베이. 최초의 술탄은 그의 손자 무라트 1세. 최초의 파디샤는 메흐메드 2세.
  • [16] 사실 '아타만(Ataman)'이 오스만의 진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오스만은 아타만의 후손들이 선조의 이름을 고풍스런 아랍식으로 만들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려고 붙인 이름이다.
  • [17] 몰디브나 인도의 이슬람 제후국들,소말리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아체의 지원요청을 받고 원정군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대부분 포르투갈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인도양의 무역루트를 둘러싼 이슬람-카톨릭 세력의 갈등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건 영문위키의 일련의 사건 참조.영문위키
  • [18] 오스만 제국의 영토 중 상당수가 사람살기 어려운 땅이라는 점과, 프랑스는 농토의 비율이 높아서 비슷한 면적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인구가 많은 편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이것도 전성기때의 인구다. 말기인 1914년에는 2500만에 불과했다. 카를 5세의 제국이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을 사실상 다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유럽 내 영토의 인구만 놓고 보면 동시기 프랑스와 간신히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을 정도니. 사실 현재의 프랑스 인구가 독일이나 오스만 투르크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을뿐인 터키에게 도 밀리는건, 이는 19세기 중반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시기까지 프랑스가 출산율이 낮은수준에 머물면서 인구증가테크를 제대로 타지못한게 크다. 인구학자들이 만약 프랑스가 이 당시에 인구증가 테크를 제대로 탔으면 인구 1억을 넘는 인구대국이 되었을것이라는 얘기를 할 정도면 말 다한 셈.
  • [19] 사실 여기에는 로마노스 4세에 반대하여 5만명의 대군 중 2만명을 수도로 돌려버린 막강한 수도 관료귀족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공이 지대했다... 이후 로마노스 4세가 어찌어찌해서 풀려나오기는 했는데 황제를 갈아치우다가 망했어요
  • [20] 당시 룸 술탄국의 종주국이던 일칸국의 지배자들이 최후의 술탄이 죽은 뒤에 후임 술탄을 임명하지 않아서 그냥 사라져버렸다.
  • [21] 때문에 쉴레이만샤의 무덤은 시리아에 있다. 1970년대까지 이 무덤만큼은 터키의 월경지로 남아있다가 현재는 시리아로 귀속된 상태이며, 천하의 개쌍놈들 ISIS가 파괴하려고 노리고 있는 상황. 결국 터키가 군사를 보내 무덤을 터키로 이장해 왔다.기사
  • [22] 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에르투으룰이 정착하여 기반을 다진 앙카라는 1290년에 에르투으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첫번째 수도는 오늘날 부르사 근처의 쇠위트(Söğüt)로 정해졌으며, 오스만 제국이 다시 앙카라를 차지한 것은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56년.
  • [23] 다만 이때 오스만군은 티무르군에게 정면 승부에서 박살난 것이 아니라, 티무르의 책략에 휘말린 것. 티무르는 전투 도중 양군 모두의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던 쿠북 강의 흐름을 인위로 바꾸어 오스만군이 식수로 활용할 수 없게 했다.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해 오스만군으로 강제 편제된 튀르크계 소국 출신 병사들이 일제히 오스만군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으니, 참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세르비아 등 당시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으로서 참전했던 기독교도 병사들 가운데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
  • [24]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보는 발칸측 역사학자들 주장과 과장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쉴레이만 1세 이전까지의 술탄들이 정식으로 황후를 두지 않았던 이유가 이 사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25] 자살설, 살해설, 병사설등의 주장이 맞서고 있다.
  • [26]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티무르가 바예지드를 박대하다 못해 인간발받침으로 썼다고까지 기록해놓았으나, 티무르 왕조 측 기록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예지드를 일국의 군주의 예로서 정중히 대했으며 바예지드가 죽자 티무르가 깊이 애도했다고 되어있다. 다만 이런 경우 항상 그렇지만, 적당히 절충해서 듣자.
  • [27] '서로마'와 '비잔티움'을 별개의 국가로 생각하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당시의 비잔티움은 로마로부터 떨어져 나온 별개의 제국이 아니라 로마 제국 그 자체였으니 로마 제국을 쓰러뜨린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게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 [28] 처음으로 로마 황제를 자처한 메메드 2세는 자신의 주장을 두 가지 근거로 뒷받침했는데, 먼저 로마 제국(즉, 비잔틴 제국)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를 수도로 하고 있는 제국(오스만 제국)의 군주라는 것. 그리고 선대 술탄인 오르한이 비잔틴 황녀와 정략결혼한 적이 있으므로 비잔틴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남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유럽 입장에서는 그런 거 알 게 뭐야 라는 태도로 나왔지만,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입장에서는 조금 거슬렸던 모양. 이후 쉴레이만 대제 시대에 합스부르크 황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체결한 조약에서, 쉴레이만은 '황제' 로 표기된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는 황제 칭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스페인 왕' 으로만 표기되었다.
  • [29] 이거 중요한 대목이다. 오스만 제국 뿐만 아니라 라이벌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사파비 왕조들도 비슷하게 전근대 다민족, 다종교 제국들은 각기 다른 신민들에게 다른 직함과 명분을 내걸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러니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저런 다민족 제국들을 내부에서 부터 서서히 해체해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만 하더라도 자국의 유럽계 신하들과 주변국들에게는 이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아랍계가 주도하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아라비아~이집트 일대는 정통 아바스 왕조 칼리파에게서 양위 받은 칼리파로서의 권위를, 아나톨리아와 카프카스, 타타르족이 지배하는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에서는 칭기스 칸을 계승한 카간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했다. 이 중에서도 로마 제국, 특히 동로마 제국의 유산은 종교적 차이를 떠나서 지중해권 전체의 아랍인들과 이집트 등지에도 강렬한 문화적 자취를 남긴 가장 힘이 쎈 직함에 속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 [30]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오스만 제국 멸망 8년 뒤인 1930년에 무스타파 케말의 명으로 우편법 개혁이 단행되면서 공식화되었고, 그 이전까지는 콘스탄티노플의 아랍어식 발음인 '콘스탄티니예(konstantiniyye)'로 불렸다. 다만 여기에서는 널리 알려진 바에 따라 이스탄불이라고 한다.
  • [31]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에 비견되기까지 하는 오스만 제국 최대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푸즐리(Fuzûlî), '시인들의 술탄' 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키(Bâkî) 등이 모두 쉴레이만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했다. 또한 쉴레이만 본인도 무히비(Muhibbi, '연인' 이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시를 남겼으며, 제국 각지에 수많은 모스크를 짓는 한편 메카와 예루살렘의 모스크를 수리했다.
  • [32] 특히 콘스탄티노플 정복 직후 재상이자 튀르크멘 명문 출신인 할릴 파샤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그 후임 재상으로 데브시르메 출신인 자가노스 파샤를 임명했다. 이로써 튀르크멘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하락(역대 재상 가운데 처형된 사람은 그가 첫번째였다), 메메드 2세는 예니체리들을 이용한 중앙집권화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33] 예니체리 양성제도...지만, 비단 예니체리뿐만이 아니라 기술자나 예술가, 종교인, 정치가 등도 양성했다. 징집한 소년들의 자질을 검사한 뒤, 군인 체질이다 싶으면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이라는 과정을 이수시켜 예니체리로 만들고. 군인으로 만들어도 좋지만 그러기에는 영특함이 아깝다고 생각될 경우 이츠 오을란(İç oğlan) 과정을 가르쳐 관료로 만들었다. 또한 예니체리로 만든 뒤에도 건축이나 기타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재능을 보일 경우 그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오스만 제국이 긴 세기에 거쳐 아바스조 칼리파 제국의 몰락 이후 사오분열되었던 수니 이슬람의 심장부인 중동을 재통일하고 수많은 유럽의 강력한 라이벌들과 맞서 싸울수 있었던 건 당시로선 굉장히 혁신적이었고 유동적인 인사 체계를 도입한 것이 컸다.
  • [34] 정리하면, '데브시르메 = 예니체리 징집제도' 가 아니라는 말. 바로 위에 나오는 '메메드 2세는 예니체리들을 이용한 중앙집권화를 확립' 이라는 말도, 사실 '예니체리' 가 아니라 '데브시르메 출신자' 로 바꾸어야 옳다.
  • [35] 예니체리들의 전투력 쇠퇴로 생긴 공백은 크림 칸의 군사력이 대신했다. 이 관계는 퀴칙 카이나르자 조약에서 오스만 술탄과 크림 칸의 유대관계가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는 크림 칸들이 오스만 황족들 다음으로 오스만 술탄위 계승 순위가 높았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36] 본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쉴레이만 대제 이전까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쉴레이만 대제가 그가 사랑했던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였던 휴렘 술탄을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하고 결혼하게 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하렘 출신 황후들이 생겨났다.
  • [37] 술탄들이 무능한데다 그저 하렘의 후궁들이랑 향락에 빠져사니 정치가 제대로 될가 없다.
  • [38] 예외적으로 셀림 2세 제위기간에는 황후도, 태후도 아닌 셀림 2세의 누나 미흐리마흐 술탄이 정치에 개입했다. 태후 역할을 할 휘렘 술탄은 셀림 2세가 즉위하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 [39] 직역하면 '여성들의 지배'
  • [40] 아이러니하게도 군사적 쇠퇴기에 들어가던 17, 18세기의 오스만 제국은 튤립 시대(Lâle Devri)'라 불리며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맞았다. - 튤립 시대에 관한 글은 해당 링크 참조.
  • [41] 사실, 오스만 제국의 수탈로 헝가리의 경제가 막장이 되었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먼저 유독 헝가리에 대해서만 폭정을 자행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농민들이 숲과 늪으로 숨어든 것도 오스만의 폭정을 피해서라기보다 그 주변이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쟁터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다, 비록 헝가리 일부에 불과하지만 낙농업과 포도주 제조업이 활성화하여 수십만 마리의 소를 수출하고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으로 포도주를 수출하기도 했다. 즉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헝가리의 상황이 막장이 되었다고 하면 옳지만, 오스만의 폭정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 [42] 베네치아가 수백 년에 걸쳐 영토를 상실하긴 했지만 당대의 최고 부국답게 국가의 모든 물량을 다 동원해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특히 크레타 섬을 두고 무려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의 휴전도 없이 계속 싸웠다. 17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던 와중에는 십수년에 불과하긴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집어먹기도 했다.
  • [43] 레판토 해전에서 패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은 "키프로스 장악이 유럽의 팔을 자른 것에 비할 수 있다면, 우리의 패배는 고작 수염을 자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평했고, 실제로 레판토에서 상실한 함대는 꼴랑 2년만에 3배의 규모로 재건한 뒤 스페인이 1535년 뺏은 튀니지를 탈환했다. 생산력이 가히 저그 수준. 물론 배는 그렇다 쳐도 경험 많은 해병들이 그렇게 죽어나갔으니 전투력은 많이 손실을 입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레판토 해전의 패배는 더이상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큰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 [44] 악체는 오스만 시절의 화폐로 1악체는 1.154그램으로 만들어졌으며, 3악체가 1파라(para)의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평가절하를 한 방식이 전근대 화폐들이 다 그렇지만, 은에다 다른 금속(주로 주석이나 아연)을 섞는 식이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의 시대배경이 바로 이 시기라, 악체화의 평가절하가 소개되는데, 여기서는 예니체리들이 급료로 받은 악체화를 바다에 던져봤더니 그것이 물위에 뜨는 것을(...) 보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어있다. 악체화의 무게는 굉장히 가벼운 편이라 더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오스만 제국은 결국 1687년에 쿠루쉬(Kuruş)를 도입했다. 이 쿠루쉬화는 120악체=40파라=1쿠루쉬의 가치를 가졌으며, 이후 1843년 1월 5일, 100쿠루쉬(=400파라=1200악체)의 가치를 가진 금화인 터키 리라화가 도입될 때까지 법정 최고액통화였다.
  • [45] 세계사에서 무함마드 알리라고 알려져있는 인물이지만, 그는 알바니아출신 지배자였으며, 평생 알바니아어와 터키어만을 모국어로 사용했다. 이후 이집트를 통치한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터키인으로 갖고 있었다.
  • [46] 사실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지방 총독의 권세가 강했다.
  • [47] 이것을 보면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약해졌는가를 알수 있다.
  • [48]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총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권력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무함마드 알리의 후손들은 1914년부터 술탄을 자처하였으며, 1922년 영국의 보호국이 됨과 동시에 영국이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쓴게 된다.
  • [49] 참고로 당시 술탄이던 메메드 5세는 독일과 손을 잡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청년 튀르크 당 출신의 국방장관으로 사실상의 주권자였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으로 결국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 [50] 여담으로 이때 메메드 5세는 이스마일 엔베르의 협박을 받았는지 칼리프로서 지하드(성전)를 선포했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상 칼리프가 선포한 최후의 지하드다. 단, 이슬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아랍인들이 지하드에 맞서는 등, 뭔가 나사가 여럿 풀린 지하드.
  • [51] 참고로 오늘날까지도 터키 국회 역할을 맡고 있다.
  • [52] 오스만 제국 초창기 때가 아니라, 19세기 말에 지방행정조직이 재편되며 이전까지의 에야레트(Eyalet)를 대체하기 위해 마련된 단위다. 지도만 보면 그때그때 대충 만들어놓은 듯한 느낌의 에야레트 대신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빌라예트 체제로 바꿈으로써 지방 각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한 것인데, 19세기 쯤 되면 민족주의의 열풍으로 인해 이곳저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통제를 강화할 필요가 충분했다.
  • [53] 에야레트나 빌라예트가 현대 대한민국의 도 정도라면 이쪽은 시나 군 정도로 보면 될 듯.
  • [54] 그 뒤로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약 200여년 간 지배하였다.
  • [55] 이것이 세계 최초의 군악대다. 이전까지 군대에 나팔 같은 것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음악소리를 신호용으로만 사용했던 다른 국가와는 달리 오스만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에도 음악을 사용했다.
  • [56] 1840~1904. 절대 단명하지 않았다. 다만 폐위당한 탓에, 재위기간이 93일에 불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무라드를 폐위시킨 세력이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 [57] 오스만 터키어와 오늘날의 터키어가 어떻게 다른지는, 항목 참조. 다만 여기에서 간단히 말하자면, 오스만 터키어에 섞여있던 아랍어, 페르시아어에서 온 낱말들을 모조리 들어내고 사어나 사투리를 동원해서라도 순수 터키어로 그 자리를 메운 것이 오늘날의 터키어라고 보면 된다.
  • [58] 국가의 전반부는 대충 맞지만, 후반부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안다면 웃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내용. 철도라든가 조선소라든가 하는 '근대화' 사업을 벌인 것은 그나마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탄압하지 않았다거나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후반부는 얼토당토 않다. 압뒬하미트 2세는 오스만 제국 최후의 전제군주로, 암살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은 별궁에 틀어박혀 외부와의 소통을 극도로 자제했으며 수많은 사진사와 비밀경찰, 언론 검열을 통해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니 탄지마트를 비롯하여 '근대화 개혁' 의 맛을 본 국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밖에 없었고, 그런 나라 꼴을 보다못해 봉기를 일으킨 세력이 세계사 교과서에까지 나오는 청년 튀르크당.전후 맥락 따지면서 들으면 웃지 않을 수 없다는 점까지 장공기념가와 비슷하다. 하지만, 철도나 조선소 부분은 그냥저냥 들어줄만한 하마디예 행진곡과 달리 장공기념가는 초장부터 인류의 구원자 드립이 나온다.
  • [59] '술탄' 이 아니라 '황제' 로 되어있는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로마 황제' 를 자칭. 이것이 오스만 제국 군주의 공식 명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탄이라는 명칭도 관습상 계속해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차르와 비슷한 경우.
  • [60] 문자로 적으면 '압드 알하미드'이나, 실제로는 여러 법칙에 따라 줄여져 압둘하미드라 읽힌다.
  • [61] 그러나 터키어 발음에서 유성음이 끝에 위치하면 무성음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때문에 발음상으로는 의미가 없다.
  • [62] 에르투으룰 가지는 오스만 1세의 아버지로, 오우즈족에 속하는 카이으(kayı) 부족을 이끌던 지도자였다. 본래 몽골의 침입을 피해 그의 아버지대에 부족이 아나톨리아로 임시로 피난을 왔지만, 당시 룸셀주크와 비잔틴과의 전쟁에서 셀주크를 지원하면서 오늘날 앙카라 인근에 위치한 카라자 다으(Karaca dağ) 일대를 봉토로 받고, 쇠위트(Söğüt)에 수도를 정해 공국을 세웠다. 그의 아들인 오스만 1세는 에르투으룰 가지가 죽고나서 이 공국을 상속받았고, 1299년에 독립해 오스만 제국을 세웠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에르투으룰 가지의 공국도 오스만 역사로 포함시킨다.
  • [63]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이후, 그 아들 사형제가 황위를 두고 내전을 벌인 기간. 결국 셋째인 메메드 1세가 승리하여, 단독 술탄이 되었다.
  • [64] 1차 재위
  • [65] 1차 재위
  • [66] 2차 재위
  • [67] 2차 재위
  • [68] 1차 재위
  • [69] 2차 재위
  • [70] 이시형 교수의 에세이로 유명해진 인물.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과 좀 다른 면이 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