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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last modified: 2015-01-22 03:28:28 Contributors

역대 일본 총리
82대, 83대 84대 85대, 86대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小渕 恵三
1937 ~ 2000

Contents

1. 헤이세이 아저씨
2. 식은 피자에서 근성의 총리로
3. 과로사
4. 한국과의 관계
5. 기타


1. 헤이세이 아저씨

군마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1963년 26세에 당시 최연소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타케시타 노보루 내각에서 요직을 맡고, 관방 장관 시절에는 쇼와 덴노의 사망 후 총리관저에서 새로운 연호인 헤이세이를 공표했다.
obuchi-heisei.jpg
[JPG image (Unknown)]

이 장면은 지금도 쇼와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로 전환하는 시대의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고, 연호가 써 있는 족자를 들고 있는 오부치 관방장관은 헤이세이 아저씨(平成おじさん)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

이후 1997년 하시모토 내각에서 외무상을 거쳐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2. 식은 피자에서 근성의 총리로

관방장관과 외무상 등 경제와 별 관련없는 부처를 거쳤기에 "3일이면 오래간다" "식은 피자" 등의 별명 으로 여론으로부터 전방위로 불신을 샀다.

식은 피자라는 별명이 등장하자 정작 오부치 본인은 이런 의견에 크게 개의치 않고 그의 집 앞에서 대기하던 기자들에게 피자를 돌리면서 "식은 피자도 전자렌지에 데우면 맛있다" 라고 맞받아치기도 하였다.대인배
obuchi-pizza.jpg
[JPG image (Unknown)]

이 일화로 타임지에 피자를 들고있는 사진이 표지로 선정되는 위엄을 달성.

오부치는 "인기의 하시모토, 실력의 오자와, 인품의 오부치"라는 말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온화한 인품과 특유의 근성으로 이런 위기를 돌파했는데, 대표적으로 각계에 전화를 걸어 의견을 수렴하는등 경청하는 자세로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결국 재임기 별 탈없이 원만하게 이끌어 나간다는 평으로 바닥을 치던 지지율은 후반기에 50%를 돌파하게 된다.

또한 경제통이자 미국통인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를 재무장관을 맡도록 설득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때 했던 정책이 대량의 감세와 "국채 팔기" 정책. 물론 훗날 이 국채 팔기 정책이 빚더미 일본의 기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애초에 일본 국채 자체가 자국민들에게 파는 국채가 많아서 재정적으로 큰 부담은 되지 않으며, 여하간 숨은 돌렸다.

결국 식은 피자라는 비아냥에서 시작했지만 강력한 경제정책으로 잃어버린 10년을 종식시킨 총리라는 평가를 얻는데 성공, 특유의 인품과 함께 근성의 인생의 승리자로, 경청하는 지도자로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오키나와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오키나와를 생각해주는 마지막 리더라는 평이 있을 정도. 강력한 진흥정책과 2000년 제 26차 G8 큐슈-오키나와 정상회의가 대표적이다. 슈레이몬이 그려져있는 2천엔권 지폐도 이 시기에 발행한 것.

3. 과로사

하지만 과로와 함께 2000년 4월 연정을 구성하려던 자유당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던 호평은 단숨에 뒤집혀 사퇴 압력에 시달리고 기자회견 중 뇌졸중을 일으켜 결국 혼수상태에 빠져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중의원은 4월 5일 신임 총리로 모리 요시로를 내정했다. 결국 한달 뒤인 5월 14일 사망하였으며 총리가 재임중 병사하는 것은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 이후 두번째였다. 장례식에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2001년에는 큐슈-오키나와 G8 정상회의가 열렸던 오키나와 정상회의장 앞에 오부치 총리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고, 2002년에는 고향인 군마현에도 동상이 세워졌다.

4. 한국과의 관계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졌을 때의 일본의 관방장관이었으며 하치야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의 정체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1999년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이 방문에서 오부치 총리가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후 일본 총리들은 딱 이 수준에서 사과발언들을 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에게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를 추진할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또 오부치 총리는 일본인 여성 다우지 치즈코 여사가 목포에 설립한 고아원 생원에 매화나무 묘목 20그루를 보내기도 했고 2008년 공생원 설립 80주년 행사에 오부치 총리의 부인인 오부치 치즈코 여사가 초청되기도 했다.

5. 기타


그의 사후, 차녀 오부치 유코(小渕優子)가 불과 26세의 나이로 지역구인 군마 현을 이어받아 당선되어 의회에 입성했다. 유코 여사는 본래 경제학을 전공한 후 방송사 PD로 재직했으나 1999년부터 총리였던 부친의 개인비서로 정계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40대 초반의 나이에 벌써 6선의 중진 의원이 되었으며, 2014년 9월에는 아베 내각의 경제산업상으로 임명되었다.[2]

덕분에 국내외에서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경우 후쿠다 야쓰오(福田康夫)[3]와 더불어 부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는 2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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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한 일화로 골프장에서 만난 여대생에게 "나를 알고있나요?"라고 물으면서 족자를 내거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 [2] 그러나 채 2개월도 안된 10월에 정치자금 회계 처리의 문제로 경제산업상에서 사퇴했다. 2개월 후 아베 수상의 중의원 해산으로 실시된 총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지만, 이 사건은 향후 그녀의 정치 경력에 적지 않은 오점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 [3]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