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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last modified: 2017-04-12 22:41:18 Contributors

조선의 역대 국왕
20대 경종 이윤 21대 영조 이금 22대 정조 이산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에서 복원한 영조대왕어진[1]
묘호 영종(英宗)→영조(英祖)
시호 조선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
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
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
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
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2]
장순(莊順)
금(昑)
광숙(光叔)
출생 한성 창덕궁 보경당
사망장소 한성 경희궁 집경당
배우자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
아버지 이순(李焞)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 崔氏)
생몰기간 음력 1694년 9월 13일 ~ 1776년 3월 5일
양력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재위기간 음력 1724년 8월 30일 ~ 1776년 3월 5일
양력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

연잉군 시절 영조의 풋풋한(?) 모습. 21세 때.
초상의 얼굴부분 확대 비교. 왕이라는 자신감으로 인해 눈꼬리가 더 올라간 게 포인트. 매부리코 등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 의하면 태어나지도 않은 왕[3]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왕자 시절, 세제 시절
2.2. 재위 초반기, 정미환국과 이인좌의 난
2.3. 집권 중반기, 쌍거호대
2.4. 임오화변
2.5. 오락가락한 집권 말기, 그래도 한결같은 세손 사랑
2.6. 사후
3. 치적
4. 한계
5. 트리비아
5.1. 인물됨
5.1.1. '아버지'로서의 영조
5.2. 혈통에 대한 컴플렉스
5.3. 경종 독살설
5.4. 영조의 노망?
6. 창작물에서
6.1. 사극
6.2. 만화

1. 개요

숙종의 4남(성년기까지 살아남은 아들 중엔 2남)으로, 숙빈 최씨의 아들. 경종의 이복동생이다.

한 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과 달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기에 즉위 이후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러 야사나 일화에서도 평생 컴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

52년을 재위하며, 치적도 많이 남겼지만 여러 비판점이 제기된다.

2. 생애

2.1. 왕자 시절, 세제 시절

숙종의 총애를 받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숙종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고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인 미운 경종을 몰아내고 연잉군을 세자로 삼기 위해 노론 대신 이이명과 독대를 하고 노론에게 세자를 물먹일 것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세자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노론 대신 김창집, 이이명 등이 숙종이 아이고 내가 눈도 잘 안보이고 골골해서 왕 노릇 못하겠다. 대리청정 어떠냐?라고 말을 꺼내자 대찬성하며 세자의 대리청정을 지지한 것도 수상한 정황이다. 이에 윤지완을 비롯한 소론 대신들이 도끼상소까지 하면서 격렬한 반대를 하지만 숙종은 말을 가려 하지 않았다고 혀를 찰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후일 경종이 되는 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공은 없어도 실책도 하지 않으며 세자 자리를 유지했고 독특한 처신으로 노론 대신들에게 꾸지람까지 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숙종의 병환이 나빠짐에 따라 세자의 자리를 굳건해졌고 숙종 말년에 세자가 승지들이 자신을 기다리게 해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을 때는 숙종이 세자를 질책하자 소론 대신들이 "왜 세자의 기를 죽이느냐?"고 반발할 정도였다.[4]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왕 숙종은 "내가 세자 아빠인데 어디서 감히 이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너무 병환이 심해져서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결국, 숙종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경종이 승계한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은 초반부터 경종을 우습게 알면서 갖은 모욕적인 처사를 했으며 마침내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을 강제로 세자로 삼게 했다. 경종이 아들이 없었으되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인 것을 감안하면 "너 아들 못낳지? ㅋㅋ 동생이나 후계자 삼아?" 하고 왕을 능멸한 것이다. 선조 시절에는 정철이 아들을 세자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가 "내가 아직 젊은데 이게 장난하냐?"라고 개박살이 났고 후일 홍국영도 정조 시절에 양자를 멋대로 들이고 전횡을 하다가 끝장난다.

각설하고 세자가 된 연잉군은 공부에나 힘을 썼으나, 노론은 경종을 아예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완곡히 권했고 경종이 받아들이면서 난리가 난다. 자세한 것은 신임옥사 참조. 우여곡절 끝에 노론은 지네가 역당이라는 것을 인증한 꼴이 되었으나 세자 본인은 사양도 했었고 유일한 혈육이다 보니까 무사했었다. 오히려 경종에게 청해 자신을 음해하려는 궁인들이 있다고 아뢰어 박상검, 문유도 등을 지목하고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경종은 거부했고 세제는 경종에게 사악한 자들을 전하 곁에 두면 되겠다고 했다가 경종에게 쌍욕을 듣기도 했다.

이에 세자는 사악한 자들이 나를 해치려 하니 세자 노릇 못해먹겠다고 세자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포했고 이에 놀란 소론 신하들이 박상검, 문유도를 처벌한 것을 요청하면서 결국 경종은 자신이 총애하던 나인 박상검, 문유도 등을 처형해야 했고 그들과 체결하여 웃전의 사정을 살핀 궁녀 석렬과 필정도 자결했다. 이렇게 세제는 정치적 위기를 정면승부로 돌파하는 듯 했는데... 삼수의 옥이 터지면서 그는 반란수괴로 몰리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김일경 등은 김성궁인을 캐낼 것을 요구하며 세자를 공격했고 세자는 이런 죄인이 어찌 세제의 자리에 있겠냐고 눈물로 호소하며 세자 자리를 벗게 해달라고 청할 뿐이었다. 하지만 경종이 세자를 보호하면서 결국 세자는 37세의 나이로 경종이 승하하면서 왕이 되니 곧 영조다.

2.2. 재위 초반기, 정미환국과 이인좌의 난

왕이 된 영조가 가장 먼저 회를 치기 시작한 것은 소론, 그 중에서도 자신을 죽이려 든 소론 준론이었다. 갖은 핑계로 김일경과 삼수의 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한 영조는 삼수의 옥을 뒤집어 자신을 위해 죽은 노론들을 신원하고 여러 소론들을 내쫓고 노론 정권을 세운 다음에 과거는 잊자고 하였으나 4대신을 비롯한 거물들이 떼죽음 당해 이를 갈고 있던 노론 강경파 정호, 민진원 등은 협상은 없다고 선포하며 소론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차레 설득을 시도해도 말을 듣지 않자 영조는 정미환국으로 노론을 내쫓고 소론을 다시 불러들인다. 자세한 상황은 정미환국 항목 참조.

그런데 윤휴의 손자사위인 남인 이인좌가 소론 준론과 남인을 규합하여 초거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그나마 영조가 소론 완론 정권을 세워준 덕에 소론의 분노가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김일경, 목호룡의 처형에 어그로가 잔뜩 올라 있던 준론과 남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란은 서울, 삼남, 서북에서 동시다발로 치고 내려오는 초거대규모였다. 다행히 서울과 서북의 반란은 조기진압되었고 충청도의 이인좌는 소론 오명항의 진압군을 얕잡아보다가 화포 공격에 개발살났으며 전라도에선 태인 현감 박필현이 거병했으나 전라감사 정사효가 배신하면서 와해된다. 경상도에선 정희량 등이 거창, 합천을 점령하고 기세등등했으나 안동 등지에선 의병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만만찮았고 결국 중앙군의 반격으로 진압된다. 이쯤되면 열받아서 소론과 남인을 다 죽일만도 하지만 영조는 그러지 않고 완론 정권을 놔두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 등을 기용하여 탕평을 지속했으니 영조의 업적이라 하겠다. 자세한 것은 각각의 항목 참조.

2.3. 집권 중반기, 쌍거호대

이후 영조는 소론의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 등과 노론의 홍치중, 홍치중 사후엔 김재로 등을 중용하여 노론과 소론의 균형을 맞추는 쌍거호대 정책을 유지한다. 하지만 깊어진 적대감으로 인해 유척기를 비롯해서 탕평에 응하지도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완론 중에서도 강경파인 이광좌는 노론의 공공의 적이었다. 결국 영조가 비오는 날 숙종의 진현 앞에서 절하면서 "왕 노릇 못해먹겠다!" 라고 선포하고 나서야 신하들이 몰려와 비를 맞으며 통곡하며 "다시는 당파 싸움 안할게요. 당파 싸움하면 신들을 죽여주세요!" 영조: 당파싸움 할 거야, 안 할 거야?!!! 신하들: 안하겠소, 닷씨는 안하겠소! 라고 맹세를 하는 일이 벌어졌고 다음날 이광좌가 죽으면서 노, 소론 대립은 한풀꺾인다. 하지만 당파 싸움이 끝났냐면 그럴리가 있나?

설상가상으로 남인과 소론 준론이 끊임없이 반역을 도모하면서 영조는 싫어도 남인과 소론 준론을 계속 처형해야 했고 나주괘서사건에 이어 최후의 소론 준론들이 영조의 친림 시험장에 나타나서 영조에게 "야 이 찬탈자노무 새끼야!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갑진년 이후로 네놈이 선왕을 독살한 게장을 다신 먹지 않았다고 말해서 네놈 머리통을 날리겠어!"라고 최후의 발악까지 하면서 살아남은 소론 완론은 반역 전문 집단 쯤으로 몰려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고 열받은 영조조차 조태구, 유봉휘 등을 역률로 추죄하고 이광좌도 직첩을 거두면서 소론을 박살내고 만다. 이쯤되면 조정은 쌍거호대는 사라지고 노론 1당 독재가 되고 마는데 겉으론 그렇지만 실상은 또 그렇지 않았으니 바로 영조가 척신정치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명문가들에게 질려버린 영조는 한미하지만 외척이면서 똑똑한 노론 가문인 풍산 홍씨를 중용한다. 풍산 홍씨의 수장 홍봉한은 말직에서 순식간에 훈련대장을 거쳐 좌상, 영상을 역임하며 조정 최고의 권신이 된다. 덕분에 경주 김씨를 비롯한 전통적인 노론 명문가들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왕에게 아부하는 예스맨의 탕평파들이 조정을 채우면서 조정 자체는 조용해졌으나 그 탕평파는 소론, 남인의 멸족에 가까운 타격으로, 사실상 노론 1당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왕에게 아부하는 무리라서 당색이나 의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2.4. 임오화변

그러던 중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니 자세한 사항은 임오화변 항목 참조.

2.5. 오락가락한 집권 말기, 그래도 한결같은 세손 사랑


세자가 죽은 이후 영조는 세손을 동궁으로 삼았고 그를 후계자로 보호했다. 영조는 몇달마다 영의정을 갈아치우는 등 더 외곬수적이고 포악한 면모를 많이 보였으며 동시에 수천명의 백성을 만나보는 등 여러가지 행보를 이어갔으나 뚜렷한 업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재위 전반부에 몰려있다.

한편 풍산 홍씨는 자신들의 외손자인 세손을 당연히 보호하며 자신들이 후원자임을 자처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소위 청명당이란 노론의 젊은 선비들이 유학에서 엄히 금지하는 척신 정치를 청산하고 건전한 붕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이 척신이되 깨끗한 척신을 자처하는 경주 김씨로 대표적 인물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 등이었다. 풍산 홍씨는 세손이 자라나면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자 매우 불안하며 보험으로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삼왕손에게 연줄을 대고 있었다. 홍봉한은 경주 김씨들이 꽤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공존을 꾀하려고 영조에게 경주 김씨를 중용할 것을 청하지만 영조는 우리 마누라가 어질어서 안된다~라고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이 천거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영조 46년에 십수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쫓겨난다.

이에 빡친 홍봉한과 김귀주 측 간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삼왕손이 유배를 가는등 정국은 혼란해졌으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치는 상소를 올린 것을 읽은 영조가 이 난장판이 다 김씨와 홍씨의 정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열받은 나머지 청명당과 경주 김씨를 모조리 유배보낸다. 이 싸움으로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 타격을 입었는데 권력 공백기를 틈타 조정을 장악한 것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었다. 이들은 영조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승계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순왕후가 정조를 지원사격하고 홍국영, 서명선, 정민시 등의 정조의 측근들이 홍인한을 탄핵하면서 정조는 무사히 대리청정, 석달 후 영조가 승하하자 왕으로 즉위한다.

2.6. 사후

본래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89년(고종 29년)에 영조로 고쳤다. 때문에 영조실록의 표지엔 '영종대왕실록'이라 적혀있다.(선종->선조와 마찬가지)

수명과 재위기간 외에 영조가 세운 기네스가 하나 더 있는데,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정식 시호가 긴 임금이다.

정식 시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윤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영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총 70자다. 그야말로 시호에 쓰는 글자들 중 좋은 글자는 거의 다 가져다 붙였다.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堯)와 (舜)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후덜덜.

Example.jpg
[JPG image (Unknown)]


영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동구릉 경내의 원릉(元陵)이다. 늘그막에 맞이한 계비 정순왕후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덧붙여 영조의 첫 왕비인 정성왕후는 영조와 완전 반대쪽인 서오릉에 묻혀 있으며[5]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역시 서오릉에 묻혀 있다. 안습.


3. 치적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탕평[6]을 실시했으나 영조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많이 깔아야 했고, 이는 당간 세력 불균형으로 직결되어 실질적으로 완벽한 탕평 정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탕평책을 완전한 탕평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초반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노론 4대신을 죽이고 삼수의 옥을 계기로 노론을 압박한 소론을 박살내려 했으나 영조의 반대 등으로 처리하지 못하자 강경드라이브를 걸었고 영조는 이에 정미환국을 단행해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시켜버렸다. 물론 등용된 것은 온건파인 완론 소론이었지, 준론 소론은 아니었다. 이후 벌어진 준론 소론과 남인이 합세한 이인좌의 난에서 이 완론 소론은 난을 집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남은 준론 소론 잔당들의 난리법석에 서서히 소론의 세는 위축되었고 다시 노론이 집권하게 된다.

일부 드라마 등에서는 영조가 실권없이 노론에게 떠밀려다닌 군주로 묘사되긴 하지만 이는 실상과 정반대다. 민진원, 정호를 비롯한 강경파 대신들이 죽은 영조 10년 이후로 노론은 사실상 영조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했어야 할 만큼 영조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유척기를 비롯한 외곬수들은 끝까지 토적을 외치면서 탕평을 무시했지만 그런 이들의 주장에 혹해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바로 조정에서 대숙청의 바람이 불곤 했다. 영조의 즉위 초반에는 노론이 탕평하자는 영조의 말도 듣지 않고 열받은 영조에게 정미환국 한방으로 날아가고 소론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영조 즉위 중후반부에 천의소감이란 책을 지으면서 집권 노론이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이 미친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7]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란 일갈에 한방에 날아갈 뻔 하자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결국 영조는 경주 김씨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들에게 지친 나머지 명문가들을 쩌리로 만들고 풍산 홍씨같은 한미한 가문을 순식간에 조정 영수로 만들어놓았고 영조 말은 당파가 붕괴되고 척신 정치로 귀결된다.

통치기간 동안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그의 재위기에 완전히 수습되어 나라가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지만 관리들이 죄를 지으면 엄하게 죄를 물었다. 또한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왕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게만이 있고 식사는 밥과 김치, 장류 정도 뿐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사치스런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한 것도 영조대 부터이다.[8] [9] 하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순조대쯤 에야 사대부나 민가에 까지 정착하게 된다 하기사 이놈의 시대는 사소한 곳에 까지도 사모관대를 해야했던 시대였으니... 또한 연과 여[10] 에 원래는 금(金)으로 칠을 하던것을 주석으로 대체하게 하기도 했다. "곡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이유로 금주령[11]을 내린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조도 에 대한 욕망을 끊지 못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몰래 먹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나온다. 본인은 "오미자차 였다"고 변명했다. 또한 말년에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말이 좋아서 차였지. 이것도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사실상 술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영조가 술을 즐겨 마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83세까지 장수한 왕이었으며, 역대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통치기간이 길었던 왕이었다. 영조가 오랫동안 장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젊었을 적부터 경종을 암살을 했다는 의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반대 세력으로부터 암살같은 위협이 있을까 염려하여, 어느 정도 먹는 것을 조심하고 경계를 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음식조절을 잘 하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이라서 잔병으로 고생하지 않았고 선대 왕들이 하루에 5번을 먹는 수랏상을 3회로 줄여서 쓸데없이 과식하지 않았고 소식을 하였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는 현미와 콩을 섞은 잡곡밥을 즐겨 먹었으며, 주로 먹는 반찬으로는 평소에 육식을 적게 했고, 채식 위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오히려 왕이 먹는 수랏상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닐까 항상 염려했다고 한다. 게다가 평소에 운동을 좋아하여 말타기, 달리기, 국궁같은 거칠고 격한 운동들을 즐겼기 때문에 더욱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쏘기 실력이 유전이 되었는지, 그의 손자 정조이성계의 현신이라 불릴 정도로 어려서부터 각종 무예와 활쏘기에 능하여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정조 역시 세자 때부터 끊임없이 주변의 반대세력으로부터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방어하고 무예를 연마하면서 스스로 힘을 기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연산군 때부터 시작된 역대 궁가들의 폐단을 균역법으로 시정한 것도, 사형수에 대한 3심제 강화도, 수많은 법전을 정비한 것도 그외 수많은 문물들을 정비한 것도 영조 때 일이지만 이 시기가 당파싸움과 삼수의 옥으로 인하여 영조가 골머리를 앓은 시기란 걸 보면 정말 성격이 어떻든 간에 능력치 하나만큼은 출중한 군주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4. 한계

그렇지만 아래에서도 보듯 아버지로서는 그다지 훌륭한 임금은 아니였다. 즉위 과정 자체도 불안했고 정적들인 소론 강경파들이 전부 소멸된 후에도 이에 관련된 컴플렉스가 매우 심해 아들인 사도세자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엄하게 키우다가 사이가 벌어져 뒤주에 아들을 가둬 죽이는 비극을 일으키며 이 때문에 후에 왕위를 잇는 정조에게도 정치적,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주게 된다. 물론 영조 본인은 세손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나름 노력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물 수는 없는 노릇.

거기에 숙종 시절의 환국,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으로 완전히 금이 간 노,소론의 피터지는 싸움에서 민진원, 정호, 유척기 등의 노론 명문가 출신 거물들이 토적을 외치면서 소론을 모두 죽일 것을 요구하고 탕평을 단호히 거부하자 이들에게 완전히 질린 나머지 말끝마다 떽떽거리는 이들 대신에 말 잘듣는 이들로 조정을 교체하기 위해 유학에서 반드시 금지하는 척신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 시작이 홍봉한이었고 종9품 말직에 불과했던 홍봉한은 7년만에 훈련대장에 임명될 정도로 커졌으며 영조 46년까지 조정을 지배하는 실세가 된다. 나중에는 정순왕후의 외가인 김귀주 등이 실세로 떠올랐고 종국엔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과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이 손을 잡고 영조 말년을 지배했다. 이들의 권세가 매우 커서 당대에도 비판이 많았고 가장 강력하게 이들을 배척한 이들이 김종수를 비롯한 노론 청명당의 선비들이었다. 영조 사후 정조의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정후겸, 홍인한은 처형되었고 김귀주 등은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홍봉한은 이미 완전히 실각한 상태에서 목숨만은 보전했다. 그리고 이들을 대신하여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역시 정조에 의해 숙청됨에 따라 척신정치는 완전히 청산되었지만 선례를 남겼기 때문에 척신정치를 청산했던 본인인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안동 김씨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영조의 단점은 주로 재위 후반기로 가면서 더욱 두드러지는 편인데 사실 영조 치세의 업적도 대부분 재위 전반기의 젊었던 시절에 몰려 있으며[12] 노년에는 안 그래도 독선적인 모습이 더 강해지는 경향까지 보인다. 게다가 노환으로 고생하는데도 권력욕은 오히려 점점 강해져 결국 무리수를 두게 된 것. 결국 너무 오래 해먹은 게 문제.

덕분에 영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꽤 엇갈린다. 명군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에 초점을 맞춘 평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서는 즉위 이전의 군호인 연잉군으로 부르면서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13]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바로 사초를 폐기한 일이었다.[14]

1735년(영조 11년) 2월 10일, 영조는 새벽까지 대신들과 함께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연루설, 그리고 계속되는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지 않았느냐. 연잉군(세제 시절의 영조)이 정궁을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그(영조)를 책립하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1689년의 기사환국 때 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별의별 유언비어 말이다."

신하들도 어쩔 줄 몰라하는데 이 때 호조판서 이정제가 나서 “이것은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망측한 이야기”라면서 “사초의 책자를 불태우자”고 제안했고 영조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조는 새벽 3시가 넘어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자 “사초의 책자를 모두 가져와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시황의 분서와 다를 바 없는 사상초유의 ‘사초폐기’ 사건이었다. 사초가 한줌의 재로 사라지자 극심한 부작용이 생겼다. 임금과 신하가 나눴던 ‘심야대화’가 무수한 억측을 낳은 것이다. 신하들은 “내전(중전)까지 언급된 대화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고 설왕설래하며 두려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기 때문에 여러 설만 떠돌 뿐이었다. 훗날 사관들은 당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참고해서 추후에 사초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재위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만약 이루어졌다면 조선의 첫 황제는 고종이 아니라 이 사람이 됐을 것이지만 건재했던 청나라가 가만히 있었을지는... 외왕내제 놀이 하면 안되나?

5. 트리비아

5.1. 인물됨

손자 정조 못지 않게 대단히 학업에 열중한 군주로 경연에서 태종, 세종, 정조와 같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몇 안 되는 군주 중 한 명. 그리고 왕권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학업에 열중한 군주이기도 하다. 태종이나 세조도 똑똑한 축에 속했지만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냐면서 경연을 때려쳤고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으며 광해군도 여러 옥사 이후로 왕권이 강해지자 경연을 매우 게을리했다.

반면 성격은 급하고 감정적이고 눈물이 많은 타입이었다.[15] 입도 더러워 면전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신료들에게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냉혹할 때는 냉혹함을 보여주기도 잘했다.

정치스타일은 아주 철저한 정통파. 잔수 안 쓰고 정공법을 선호했기에 걸리게 되면 말 그대로 박살나는 타입이었다. 애초에 자료준비를 철저히 하고 명분도 다지고 최후수단도 강구해놓은 다음 정면돌격하는 스타일이라 막기도 힘들고 막아낸다고 해도 피해가 큰 경우. 이건 세제 시절인 경종 치세 때부터 확립된 경우다. 신축환국으로 노론 정권이 개발살나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태롭게 되자 이런 정면 돌파를 통해 입지를 다지며[16] 군주까지 오른 사람이라 왕이라는 위치에서 정공법 펴면 당하는 신료나 당파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하는 짓이 벽서 등으로 음해하거나 반란 같은 수밖에는 없었다.

아버지 숙종처럼 신하들을 거의 노예수준으로 취급하는 타입이기도 했는데,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 신하들은 밥도 안 먹고 쫄쫄 굶는데(...) 자기 혼자서 식사때 되면 바로 밥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이니까 개길수도 없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선왕조 국왕들 중 가장 통치기간이 길며(52년) 가장 장수한 왕(83세)이기도 하다. 채식 위주의 식단이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육류 위주의 식단을 즐기고 장수하지 못한 세종대왕과 대비된다. 특히 영조는 나이 70이 넘어서도 하얗게 샌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나 회춘했다!"라고 좋아했다는 기록도 숱하게 나온다. 환골탈태!?[17]

근데 자기보다 일찍 죽은 조강지처 정성왕후 서씨나 자기 아들을 핍박한 것을 생각하면 혼령들에게 욕을 많이 먹어서 장수한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재위기간 내내 반대파들한테 욕을 먹었으니 더더욱.

아버지를 닮아 성격의 이 심하고 강퍅하며 급해 화가 나면 신하들에게도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노환이 생겨 경연 도중 신하가 자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가지고 볼기를 쳤다거나 자기가 잘못한 것[18]을 신하가 간하자 곧바로 울며불며 뛰쳐나가 한겨울에 연못에 발을 담그고 이대로 빠져 죽겠다고 엉엉 울어댔다고 한다. 영조가 엉엉 운 적은 또 한번 기록에 전하는데, 과거에서 이현필이라는 선비가 "전하께서 궁녀를 너무 많이 뽑으시는 거 아니삼?"이런 답안지를 제출하자 그걸 본 영조가 "내가 임금인데 궁녀도 맘대로 못 뽑냐?" 왕 노릇 못해먹겠네!라고 하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19]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정조 왕위 계승시 보여준 모습은 충공깽 그 자체. 신료들을 모아놓고 세손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 하자 홍인한이 반대하였는데, 이에 영조는 밖을 보라고 하니... 칼을 뽑아든 갑사들이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다 데꿀멍하고 순식간에 세손의 왕위계승이 확정되었다.

영조의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똑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 미인상이었다.[20] 조선 기준으로 엄청난 꽃미남 임금이었던 셈. [21] 또한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정순왕후를 정실로 맞은 탓에 로리콘이라는 농담도 있다.[22]

정실인 정성왕후 서씨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환갑잔치도 파토내고. 그리고 그녀가 죽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자기는 느릿느릿 와서는 사도세자더러 니 옷 꼬라지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야사에는 첫날밤에 정성왕후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23] 그 이후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만 봐서는 이게 대체 왜 소박맞을 일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다. 마누라의 이 발언을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숙빈은 출신도 불분명한 일개 나인 출신으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외모와는 달리 손마디도 굵고 손이 참 거칠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그리고 성질머리 더러웠던 연잉군(당시)으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본의 아니게 며느리에게 폐를 끼친 셈이 되었다. 실록을 보자면 정성왕후의 동생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 그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서덕수가 다름아닌 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 두시라 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영조는 덕분에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후술하겠지만 정성왕후가 죽은 날에 사위가 죽은 것을 추모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보면 야사의 이야기가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 정성왕후는 영조에게 죽기 14년 전인 1743년부터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담증 가지고 엄살부린다고 씹어버렸고 그녀의 용태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내시에게 대신 보고하여 영조가 진찰내용을 간접적으로 보고받을 정도였다. 그녀가 죽은 후 영조가 죽은 마누라를 팽개치고 사위 문상을 가자 대간이 경악하여 결사반대했지만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해버리고 강행했다. 다만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서울)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정순왕후의 눈치를 본 탓이다.[24][25] 영조는 오히려 정성왕후 옆에 묻히려고 빈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래도 죽을 때 되니 생전에 조강지처 독수공방 시켰던 건 미안했나보다. 정조는 지금의 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이 자리는 원래 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파묘 자리였다. 더군다나 경종을 여기에 장사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다. 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의 사랑을 못 받은 게 한이 맺혀 시름시름 앓다가 단명했을 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론 이분도 나름 장수하신 분이다. 1757년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65세.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며 요즘 기준으로는 일찍 돌아가셨단 소리는 듣기 애매한 수준이다. 또한 1724년에 왕비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이런 점에서는 천생연분

5.1.1. '아버지'로서의 영조

냉정하게 말해서 요약하면, 아버지로서의 영조는 0점짜리였다.

좀 더 상세히 기술하자면 대체적으로 아들은 미워했고, 에게는 죽고 못 살았다. 즉 희대의 딸바보. 한중록의 묘사에 따르면, 자녀들 중 몇몇은 지나치게 미워하고(ex. 사도세자, 화협옹주)어떤 자식들은 매우 귀여워했다고(ex. 화평옹주, 화완옹주). 한중록에서는 영조가 화협옹주를 미워했다고 묘사하나, 한중록의 저자가 시누이들을 싫어했던 혜경궁 홍씨다 보니 신뢰성이 의심되는 상황. 오히려 화협옹주가 위독했을 때 영조가 취한 행동이나 그녀 사후 영조가 보여준 반응을 볼 때, 한중록의 묘사는 더욱 앞뒤가 안 맞는다. 다만 영조가 편애했던 화평옹주화완옹주 보다는 화협옹주를 덜 사랑했던 건 확실하다.

영조의 자식 차별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우연히 마주친 일이 있어 잠시 한방에 있었는데, 그걸 영조가 보고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서 사도세자를 죽이려 들었고 사도세자가 기겁하여 창문을 통해 달아나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영조는 자신이 싫어하는 자식과 좋아하는 자식이 한자리에 있는 것 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였던 것. 그렇다 하더라도 영조의 반응은 지나친 데가 있어, 사실 화완옹주사도세자근친상간 관계였고 이를 영조가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가 하는 이 제기되기도.

손자 의소세손과 정조는 처음에는 미워하는 축에 속하다가 나중에는 귀여워하는 축으로 바뀌었다. 정조는 처음에는 띨띨하다고(...) 싫어했으며 상중에 잉태된 아이란 점[26]에서 눈을 부라렸지만, 날이 갈수록 총명한 모습을 보며 거의 눈에 넣어도 안아프게 귀여워했다.

실록과 한중록이 교차검증으로 볼 때 딸들을 지나치게 아낀 것은 사실이다. 정성왕후 서씨가 죽은 날에는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이 죽었는데, 이 날 신하들이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을 정도였다. 화평옹주가 죽었을 때는 그녀의 장례를 위해 파주의 민가 1백여채를 사들여 묘역을 조성하기도 했다. 순옹주가 남편이 죽고 따라 죽기 위해 곡기를 끊었을 때도 친히 행차해 말렸다. 결국 화순옹주는 단식 14일 만에 죽었는데, 배신감을 느꼈는지 정려[27]하자는 신하들의 제안에 '불효요 불충이다'라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28] 화협옹주가 위독했을 때도 한걸음에 달려가 밤을 새워 딸의 곁을 지켰고, 결국 그녀가 죽은 뒤에도 밤늦게까지 환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평소에 대간, 대신들이 "출궁한 옹주의 사저로 납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만류해도 무조건 "닥쳐"로 일관해가며 딸 사랑을 표현했다. 가장 사랑했던 화평옹주는 시집 보내고 나서도 아예 궁에서 살게 했다. 그야말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강의 딸내미바보.

아무래도 아들에게만 가혹하고 모질었던 것은 그의 성장배경 탓이 컸을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했고, 다른 남자 혈족들은 모두 적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이런 환경에서 조금만 삐뚤어지면 자기 자식, 특히 아들은 자신의 뒤를 물려 줄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로 보게 될 수도 있다.

특히 경종 독살설이 야사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런 일이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될 만한 심리상태였다면 자기 아들, 특히 그 아들이 제법 무예에 능하고 영리해 보인다면 그 순간부터 아들은 자식이 아니라 자리보전을 위해 죽여야 하는 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있다. 물론 개연성과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도세자가 단순 무예에 능하고 영리해보인다는 이유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갈궜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선 무예에 능하다는 것에 대해 영조는 세자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여러차례 실망을 드러냈고 사도세자가 공부를 할때 영리한 면모를 보이면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양녕대군 급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꾸짖고 닦달하는 것도 사도세자가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서이다. 머리는 좋아보이지만 학업을 멀리하는 사람이 정적으로 보이긴 어렵고 그냥 사도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영조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결부되면서 차차 발전하여 나중에는 죽일 정도로 미워진 것일 가능성도 크다.

일단 자기 아들을 미친 듯이 몰아붙여 광증을 앓게 만들고 뒤주에서 굶겨죽인 사람이니, 정신적으로 건전한 사람이었다고는 믿기 힘들다. 아마도 강박증이나 편집증 증세가 심각했을 듯 하다. 단 의심병 문제는 과거의 선조, 인조에 비하면 영조는 상당히 문제없는 편이다. 그가 의심병이 심했다면 이인좌의 난 이후로 완론 탕평책이 유지될 리가 없다. 의심병에 시달리는 양반이라면 준론이 난을 일으켰는데 완론이라고 역적이 아니라고 보일 리가 없고 훗날 영조 31년의 나주괘서사건, 신치운의 왕의 친림시험장 테러까지 이어지는 준론의 각종 역모와 발악에도 소론을 꾸준히 등용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직접 이름까지 거론되어 과거의 왕들같으면 진작에 죽여버렸을지도 모르는 박문수까지 보전해주었다.

만일 이 증세가 조금만 더 심했으면 정조도 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데 만약 정조가 처신을 개판으로 했으면 그랬을 수도 있다. 정조의 이복형제들이자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은언군, 은신군, 형제가 '추종을 외람되이 거느리고 방자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폭발한 영조에 의해 모조리 유배를 가서 죽는날까지 풀려나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그 수면에는 풍산 홍씨가와 경주 김씨가의 대립이 있었고 경주 김씨 측이 왕손들과 친한 풍산 홍씨를 공격하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서도 자기 친손자들이 처신을 엉망으로 했단 이유로 이렇게나 엄벌할 정도면 정조라고 예외일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학업에 열중하고 술과 여색을 멀리하는 등 영조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했고 훗날 영조가 죽기까지 십수년간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꾸지람이나 질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야사에선 실제로 죽을뻔한 적이 한번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맹꽁이 서당에서는 정조가 읽고있는 책 내용에 영조가 싫어하는 내용(첩의 아들이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이 있었는데 정조가 얼떨결에 거짓말로 그 부분만 가렸다고 말하자 영조가 확인차 가져와보라고 했다. 이를 가져다 주려던 홍국영이 무언가 이상한걸 느껴서 그 부분만 가리고 가져다 주어서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29]

사도세자에게 시호를 내린 문제는 오히려 아주 냉정한 정치적 계산이 들어있었던 것이 맞을 것이다. 훗날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긴 해도 생부가 역적이자 서인으로 남을 순 없으니 죽기를 기다렸다가 즉각 사도란 시호를 내려서 사도세자가 미쳐서 그런거지 역적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자체도 단순히 폭발하여 날뛴 것 치곤 매우 계획적이고 치밀하고 냉정하게 이루어졌다.

아무튼 자기 아들에 한해서는 극심한 강박증세를 보였다는 건 확실하다. 지금까지도 현대 사람들에게 까이는 대표적인 흑역사인 이 사도세자 관련 사건 덕에 영조는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로서는 자격 미달인 인물로 여겨진다. 여러가지 업적이 많음에도 평가가 엇갈리는 건 이 탓인듯. 사실상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었음에도 그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때 보인 태도는 상당히 완고했으나, 그에 반해 손자인 정조의 경우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어떻게든 왕위를 보장해주려 애를 써서 이후에는 아들을 죽인 일을 후회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실록을 보아도 과연 자기 아들을 죽인 일을 후회하고 있었는지는 알수 없다. 오히려 말년까지 후회일랑 없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금등은 그냥 뻥이다 정조 보고도 사도세자의 이름을 한글자라도 높이면 그건 날 잊고 종사의 대의명분도 잊은 것임을 명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죽었으니 왕위는 당연히 정조가 계승하는게 맞는데 정조를 보호해준 것을 이상하게 해석하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거기에 정조는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점에서도 영조가 거의 눈에 넣어도 안아플 식으로 예뻐했다. 다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일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를 잃은 정조에게 미안해하거나 안쓰러워하는 기색은 여러번 보인 일이 있는데 영조는 내가 대의를 위해 죽였다. 문제있냐?라고 대놓고 말하기가 그랬는지 홍계희, 김상로가 나쁜 놈이라고 은근슬쩍 말을 돌리기도 했는데 문제는 정작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점에서는 영조가 홍계희, 김상로보고 세자를 옹호한다고 벌을 주었고(...) 실제로 그들이 사도세자를 압박한 정황은 없다. 게다가 그런 발언은 정조가 훗날 내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죄없이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나중에 남인이 이게 다 노론 때문이다!를 외치는 도화선이 되었고 훗날의 이덕일 음모론의 최고 떡밥이 되었다. 만악의 근원

5.2. 혈통에 대한 컴플렉스

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30][31],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 상당한 컴플렉스로 작용하였다.

5.3. 경종 독살설

관련 문서 참고.

5.4. 영조의 노망?

아무래도 조선 왕조의 왕 중에 최장기 집권, 최장수 기록을 세운 왕인데다가 가뜩이나 성격이 왈가닥에 편집증적이고 결국 이후에는 노망이 나신듯 하였는데 이에 관한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다.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대신 어머니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는데, 영조가 "그 신하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그 신하가 충신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는데 영조가 "당장 귀양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내고,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하며 연못물에 빠져죽겠다 하여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계속 섰었다.[32] 결국 그 신하를 귀양보내기로 했다. 그러자 영조가 그제서야 연못에서 걸어나오고 궁에 입궐하면서 껄껄 웃으며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하고 그 신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보낸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를 '노망났나?'하면서 뒷담으로수군댔다고 한다. 사실 영조가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난동을 부리면서 닥치는대로 신하를 벌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을 거두는 행위는 젊은 땐 좀 덜하긴 했어도 재위 기간 내내 이랬다. 말년에 영의정만 미친듯이 갈아치우기도 했다. 어머니 사당에 자주 간다고 간하는 신하도 유배, 마누라 죽은 것도 팽개치고 사위 보러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신하도 유배, 사도세자 운운한 신하는 사형.

오죽했으면 임오화변 때도 저 영감 또 시작이구나. 저러다 곧 풀어주겠지 하고 처음엔 궁인들이 뒤주를 열고 세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영조는 결단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고 가는 사람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결단한 일이었다.

6. 창작물에서

6.1.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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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좌측이 이산의 이순재, 우측이 대왕의 길의 박근형.

  • 사극에서는 어째 본인이 주역이 되기보다는 사도세자의 비극이나 정조에 관련해서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장희빈이 주인공인 사극에서 아역으로 등장하곤 한다. 많은 배우들이 영조를 맡았지만 그 중 대왕의 길박근형이산이순재 포스가 절륜. 박근형씨는 영조의 세제시절을 연기하기도 했다. 몇 분 정도만 등장했고, 바로 영조 시절로 넘어갔지만 대역 쓸 생각은 못했던건가.. 동이에서 아역배우 이형석이 어린 영조로 출연했는데 영특한 모습과 어린아이 특유의 귀여움으로 화제가 되었다. 마지막 회에서는 청년 영조 역으로 탐나는도다의 얀으로 알려진 이선호가 잠깐 출연했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전국환씨가 출현했다.

  • 유준상이 박문수로 등장했던 MBC어사 박문수에서는 조민기가 영조를 연기했는데, 다른 매체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운동을 좋아했던 사실을 반영했는지 격구를 하는 장면도 있을 정도.

  • SBS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한석규가 영조 배역을 맡았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보여주었던 연기력과 아들 사도세자를 맡은 이제훈과의 파파로티 조합 때문에 많은 팬들이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모씨역사관이잖아? 아니나다를까 강한 신권에 시달리는 불쌍한 왕으로 등장하여 역덕들은 이미 통곡할 지경...

사실 치세가 너무 길어서, 영조를 주인공으로는 사극을 만들기도 쉽지는 않을 듯하다(...).

6.2. 만화

  • 야뇌 백동수에서 등장하는데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로 하지만 차마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임수웅을 시켜서 미리 탈출시켜놓고 노론에게서 구출하는 계획을 세운다.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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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영조는 51세 때인 1744년에 어진화사를 치렀고, 이때의 원본을 1900년에 모사했다. 당시의 어진은 상반신만 그려져 있었는데 2010년 전주시에서 경기전 내에 어진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전신 모습까지 복원한 것이 위의 어진이다. 영조의 원본 어진은 6.25 전쟁 중 불에 타 버린 조선 역대 국왕의 많은 어진들 중 유일하게 온전하게 남은 어진으로, 사진으론 안보이지만 왼쪽 귀퉁이 부분이 살짝 타서 100% 온전한 어진은 아니다. 손상되지 않고 전해지는 어진은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이 유일하다. 6.25 전쟁이 종료된 후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어진을 가지고 오지 않고 부산 피난 당시 임대한 관재청 창고에 그대로 두고 있다가 1954년 12월 26일 용두동 화재 때 창고에 불이 옮겨붙어 소실된 경우니 전쟁 중에 탄 것은 아니다. 이 화재 때 관계자들은 창고 열쇠를 못찾았다는 이유로 유물들이 불타는 걸 쳐다만보고 있었고 문화재청과 문교부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 바빴다. 또 한가지 커다란 병크는 해방후 9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어진들을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어 복원도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이왕가도 해방후 대한민국 공무원들도 아무도 어진을 사진으로 남겨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 시절에도 남아있던 어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태조와 세조를 제외한 임진왜란 이전의 임금들은 임진왜란때 어진이 모두 불타버렸고, 그 이후의 임금들도 여러가지 혼란을 겪으면서 숙종 이후의 어진만 남았기 때문.
  • [2] 고종 때 묘호를 변경하면서 존호를 추가했다.
  • [3] 드라마 말미에 숙종이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지 않았다라는 말때문에 나온 어처구니 없는 드립. 연잉군이 아니라 연잉옹주?
  • [4] 일부 노론조차도 동의 할 정도이었다.
  • [5] 사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묘를 만들 때 자신이 들어갈 자리도 만들어 뒀으나 정조가 정순왕후를 생각해서 결국 따로 묻히게 됐다.
  • [6] 여기서 유래한 요리가 탕평채다.
  • [7] 둘 모두 소론의 초기 영수들이다.
  • [8] 그러니 사극에서 영조대 이전시대에 쪽진머리를 한것은 모두 고증 오류이다. 하지만 가체로 인한 여배우들의 목의 부담때문에 그런것도 있다하니 이제는 하나의 사극 트렌드가 된듯도 하다...(하긴 그 당시에도 가체가 무거워 목이 부러져 죽은 사례가 있었으니...)
  • [9] 가체를 금지한것은 어디까지나 사치를 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공식행사땐 가체를 착용하는것이 맞다.
  • [10] 왕과 왕비가 타는 가마
  • [11] 재위기간(1724~1776) 동안 금주령을 발포하였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다행히도 후에 권좌에 오른 정조는 이 부분에 대하여 깨인 시각을 가지어 즉시 금주령을 해제하고, 금주령을 발포하라는 못 돼먹은 일부 신하들의 요구도 쿨하게 씹었다.
  • [12] 거기다 이때는 영조의 정통성 문제로 왕권도 불안하고 정치적으로 들끓던 시기.
  • [13] 사육신세조수양대군이라는 군호로 낮추어서 불렀던 것과 폐위되어서 묘호를 받지 못한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현대에도 평가가 나쁜 조선 임금들은 즉위 이전의 군호로 부르면서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리그베다 위키에도 해당 군호가 리다이렉트되어 있다. 시대 순서대로 하자면 수양대군, 하성군, 능양군, 연잉군. 군호도 아니고 아명으로 까이는 고종 지못미 자매품 민자영도 있다. 이성계이방원같은 사례도 있지만 이쪽은 쿠데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태어날 당시에는 왕이나 왕족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였을 뿐이기도 하고...
  • [14] 태조 이성계, 연산군, 영조가 사초를 왜곡 혹은 폐기한 왕이다.
  • [15] 눈물을 무기로 삼기도 했다. 숙종, 경종과 관련된 곳만 갔다 하면 숙종과 경종이 그립다고 울었으니... 수신을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표현하는건 매우 좋은 프로파간다였다.
  • [16] 다만 삼수의 옥이 터져 역적 수괴로 몰리자 그때는 그야말로 데꿀멍했다. 바로 거적을 깔고 나같은 놈이 세제라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페세제를 청했다. 경종의 보호로 왕위를 잇게 되긴 하지만...
  • [17] 실제로 오래 산 노인 중에는 검은 머리가 나거나 이가 다시 나는 사례가 드물지만 종종 보인다고 한다.
  • [18] 종묘보다 모친인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 들르러 했다.
  • [19] 그런데 이현필 사건은 당대에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 왕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영조 13년,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신하가 이현필을 처벌하라고 간언하면서 "과거 급제에 눈이 멀어서 왕을 능멸한 역적을 처벌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몇 달을 끌다가 영조가 그냥 봐주고 합격시키는 선에서 끝났는데, 지방의 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합격이 취소된다. 결국 이현필이 죽은지 한참 뒤에야(영조 40년) 벼슬이 다시 회복되었다.
  • [20] 젊은시절의 초상화를 보면 얼핏 탤런트 공유를 닮은것 같기도하다....
  • [21] 정작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아름답지만 천하다고 여겨서 기피했다. 여담으로 가슴이 큰 여자 역시 무식하다고 해서 기피했다.
  • [22] 당연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게, 이렇게 나이 어린 정실을 맞은 왕이 한둘도 아니고 왕비는 공석이 없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 중전 사후 새 중전이 들지 않은 왕들이 어떤 문제를 겪었는지도. 그래서 사극 같은데서 '대왕대비' 같은 직책이 나오는 것. 왕이 붕어하면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되었지만, 왕비가 사망할 경우에는 지존을 내조할 지존의 부인이자 내명부의 수장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반드시 정실을 새로 뽑았다.(즉 의무적으로 재혼했다.) 그런데 왕이 늙었다고 왕비를 왕만큼 늙은 사람으로 뽑는 건 당연지사 안 될 노릇이고, 명문가의 여식을 뽑다 보니 어찌저찌 이렇게 된 것. 그래서 왕의 어머니 뻘인데 왕보다 어린 경우도 왕왕 있었다. 예컨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나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 등등...) 후궁들 중에 짬 좀 되고 출신 배경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이를 뽑아 승격시키면 안 되는 거냐고 할 지도 모르겠는데, 영조가 숙종대 이전의 왕이었다면 (세자 시절의)문종과 성종의 전례가 있어서 되었을 지도 모르나, 영조 시기는 숙종이 후궁의 왕비 책봉을 금지한 이후였으므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영조는 바로 그 숙종의 아들이었으니...
  • [23] 첫날 밤 영조가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무심코 "힘든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영조의 눈 밖에 났다고 한다.
  • [24] 다만 정순왕후의 눈치를 본 이유는 정조가 정순왕후를 두려워해서 그런 게 아니라 죽기 직전에 정순왕후를 찾을 정도로 정순왕후와 친밀해서 그랬을 것이다. 정순왕후 항목 참조.
  • [25] 나중에 문정왕후도 중종이 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나 남편에 대한 정은 있었는 모양.
  • [26] 의소세손이 사망한 년도에 정조가 태어났다.
  • [27] 효자나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에 문을 세우는 것. 효자문이나 열녀문 등이 있다.
  • [28]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은 것도 비슷한 시기이다. 이 시점에서 화순옹주를 정려하면 화완옹주도 순사(殉死)를 하라는 뜻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화순옹주는 결국 정조 대에 정려된다.
  • [29]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한층 더 과격한 연출을 했다. 해당 부분의 책장을 아예 찢어내 버린것. 정조가 영조의 앞에서 무사히 살아나오자 홍국영은 죄를 청하기 위해 한나절 동안 정조의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이후는 다 아시는대로 정조와 홍국영의 약속이 오간다.
  • [30]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의 차남이었다. 장남은 일찍 사망.
  • [31] 아래에 나오는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 영조에게 친국을 당하던 소론 선비가 "너는 숙종대왕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대놓고 말하자 영조(박근형 분)가 "그럼 내 얼굴을 자세히 봐라!"라고 하고, 영조의 얼굴을 본 선비가 데꿀멍 울부짖으며 "참으로 숙종대왕의 용안과 똑같소이다. 신을 죽여주소서 흑흑." 하는 장면이 나온다.
  • [32] 참고로 이때가 겨울이었다. 까딱하면 동상도 걸리는 날씨이니 신하들이 애가 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