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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사태

last modified: 2014-12-30 12:29:42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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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경위
3. 영향
4. 기타

1. 개요

1996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력사태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학교 내 운동권 집단이 사실상 소수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이듬해에 터진 IMF 외환위기로 인해 학내의 탈정치화가 가속, 운동권 세력은 결정적 헤드샷을 맞게 된다. 학생운동이 학생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완전히 외면을 받게 되는 계기가 바로 연세대 사태였다. 물론 2000년대 초반까지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나 주한미군기지 평택 이전 등에 편승해서 강성 운동권이 활동하긴 했지만 연세대 사태 이전처럼 많은 수의 대중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참여하지는 않지만 심정적으로는 동조하는' 대학생의 수가 급감했으며,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서도 운동권 세력으로 참여한 집회 참가자들과 단순 분노감으로 참가한 일반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반목이 벌어지는 등깃발논쟁 사실상 운동권의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과거 운동권 출신들이 제도권에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2. 경위

한총련광복절을 기념하여 북한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2명의 대학생을 참가시키고, 그들의 귀환에 맞춰 를 갖고 귀환하는 학생들을 환영하기 위해 판문점으로 행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대로 2명의 학생이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는 데에 성공하고, 한총련은 연세대학교에 모여 집회를 가지려고 했으나 정부는 이를 원천봉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당시 연세대에는 2만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였고, 정부는 서울·경기의 전경을 동원해 연세대를 포위하였다. 이때 연세대에 진입하지 못한 학생들이 한양대, 홍익대, 동국대 등을 거점으로 삼고, 연세대에 포위당해 있는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수대를 만들어 신촌 등 연세대 주변지역에서 전경과 산발적인 싸움을 벌였다.

여러 방향에서 포위를 뚫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자 본진을 부수면 된다는 생각에 경찰은 서문을 통해[1] 연세대 진입을 시도하는데, 경찰측은 당시 학생 수를 7천명이라고 생각하고 충분한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전경 가운데 한 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를 내고 진입에는 실패한다. 정부는 이에 백골단을 투입하여 산발적으로 돌격하던 사수대를 제압하여 연행하고 연세대에 대한 포위를 강화했다.

전기, 수도, 식량을 차단당한 2만여명의 학생들은 수 차례의 투항 권고에도 불구하고 5일 동안 농성하며 버틴다.[2] 농성 중이던 여대생 중 일부가 이것 때문에 이걸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카더라.보는 순간 예상했다 8월 20일, 정부는 백골단을 앞세워 정문을 통해 교내로 진입하여 농성하던 학생들을 검거하고 이과대학 건물과 종합관으로 밀어붙인다. 학생들은 이과대학 입구와 생활관 각 층마다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농성하였지만,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이 기거하는 층의 창문으로 직접 최루탄을 살포하자 농성하던 학생들은 결국 항복하고 많은 수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전국에서 농성학생들의 부모들이 연세대로 몰려와서 최루탄으로 범벅이 되는 교정을 바라보며 자식 걱정에 통곡하고 혼절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부상당한 전경의 부모들도 통곡하고 난리가 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3. 영향

이 사건이 만약 군사독재 시절에 이뤄졌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겠지만, 군사정권이 끝나고 최초의 민주화정권 시기인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 중반에 정말 뜬금없이 발생한지라, 대학교를 점거하고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폭력적인 시위를 벌이는 한총련의 행동에 그나마 남아있던 국민들의 지지와 호의가 떠났다.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1990년대 중반 들어 개인주의가 퍼지기 시작하고 신세대 혹은 X세대라 불리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과거의 군사조직같은 위계질서를 지닌 운동권 조직은 점점 학생사회 내에서도 외면받았고, 탈권위가 진행되던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운동권 조직에서도 '우리 안의 파시즘과 싸워야 한다'며 오래된 습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불거졌지만 사회는 기다려주지 않았고, 결국 연세대 사태가 터지고 나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또한 원래 통일운동이라는 것이 운동권 여러 정파 중에서도 특히 NL계열에서 주로 행하는 것이고 8.15 민족통일축전 남측행사 등은 본질적으로 당시 한총련의 주류였던 NL계열의 전유물이여서 비 NL계열, 즉 PD계열이나 21세기 등 타 정파의 참여율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물론 연세대 사태 당시도 마찬가지.[3] 그렇기 때문에 연세대 사태 이후 다수인 NL계열과 비 NL계열은 크게 반목하게 되었고,[4] 결국 학생운동의 몰락에 일조하였다.

결국 국민들의 반응은 '저놈들 자기들끼리 1980년대에 살고 있음?'하는 정도로 싸늘하게 변했다. 8월 18일의 MBC의 여론 조사 결과 72.5%의 국민들이 단호한 대처를 지지했고 80%의 국민들이 시위가 정당하지 않다고 의견을 표했다. 특히 나중에 알려진 한총련 지도부의 기만적인 행태[5]는 그나마 남아있던 지지자들 마저도 싸그리 정리하면서 한총련학생운동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6][7] 이 사건 이후 운동권 세력이 약해졌고 정부 정책이 강경 일변도로 변하여 그해 12월에 있었던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영향을 미쳤다.

여름방학 기간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연세대학교는 교내 시설 파손 피해가 상당했다[8]. 종합관은 당시 교양 수업 및 문과대 전공 수업용으로 사용되는 건물인데, 내부가 상당 부분 불타고 파손되어서 복구가 완료되기까지 수년간 교양 수업 강의실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당장 그것 이전에 검찰의 사건현장이었기 때문에 출입 자체가 한동안 금지되어 있었다.
좀더 설명하면 이 사태가 마무리 된 것이 8월 20일이므로 2학기 개강일인 9월1일까지 열흘 정도 앞둔 상황인지라 이대로라면 수업 진행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미 수강신청이 마무리 된 이후라, 강의 시간 변경시 전교생의 시간표가 모조리 뒤집히게 되므로 큰 혼란이 생길것은 뻔한 일이었다. 개강 직전에 수십개의 강의실이 위치한 건물을 졸지에 통째로 못쓰게 되었으므로 2학기 개강 자체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당시 연세대엔 상경대의 신축 건물(대우관)이 막 완공되어 여름방학 중 이사간 직후라 경영관(현 백양관)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학교측에선 이 건물의 활용계획을 전면 보류하고, 교수연구실로 쓰던 곳까지 단 일주일만에 벽을 뜯고 대충 페인트칠만 한 뒤 칠판을 거는 임시 공사를 벌여서 일반 강의실의 강의를 겨우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형강의실에 잡혀 있던 교양강의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학교에 있는 거의 모든 대형 강의실의 공강시간에 마구잡이로 쑤셔넣었고, 그래도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시간에는 대강당에서까지 나무판 받치고 필기하면서까지 교양 강의가 간신히 진행되었다. [9] 수백명이 들어가는 대강당에 달랑 100명 남짓이 옹기종기 모여서 수업을 듣는 웃지못할 상황도 자주 연출되었다고.

이후 '종합관을 복구하지 않고 기념물로 남겨야 한다 VS. 복구해야 한다'는 공방이 학교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문과대의 경우 강의실 피난 생활 때문에 교수나 학생들의 불편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 공방은 단순히 이념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10] 결과적으로 교내 시설이 완전히 복구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11] 또한 학교 분위기가 말이 아닌지라 이 해의 정기교류전은 연세대학교가 고려대학교에게 양해를 구하여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1996년 11월에 있었던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비운동권 후보가 운동권 후보들을 누르고 전 단과대 1위, 과반수 득표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NL계가 전국 대학 총학생회의 48%를 차지해 절대 과반을 확보했던 95년보다 크게 쇠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1997년 한총련 출범식 과정에서 전경사망자가 발생하고 이어서 프락치 오인 살해사건까지 벌어지면서 NL내 자주대오의 세가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한총련 자체가 이적단체로 지정되면서 한총련은 쇠퇴의 길로 걷게 되었다.

4. 기타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해변에서》라는 영화 중 중국-대만 얘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뜬금없이 연세대 사태 관련 영상이 나온다. 너그들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다르다고 몇번을 말해줘야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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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다.
  • [2] 물론 한총련을 위시한 강경파의 농성 의지와 간부급 대원들의 강압적 압력으로 일반 참여 학생들은 나갈 수 가 없었다.
  • [3] 당시 비 NL계열은 서강대에서 자기들만의 집회를 하고 있었다.
  • [4] 연세대 사태 이전부터 행사 참여를 가지고 분열양상이 있었고, 한총련 주도 행사 때문에 학생운동이 탄압받으면서 도매금으로 같이 망하게 되니 더욱 반발이 컸다.
  • [5] 많은 학생들이 마지막까지 싸우다 구속되었지만 정작 한총련 지도부는 사수대의 도움을 받아 종합관 뒤의 창문을 통해 내려와 건물 뒤의 담을 넘어 연대 서문 방향인 연희동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 [6] 다만 이 사건 이후로도 사회의 부조리에 눈 뜬 학생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빨갱이, 혹은 과격 폭력 집단 등으로 공중파에서 매도당하는 것을 겪은 후 더더욱 '의지를 불태운' 경우가 심심찮게 많았다. 하지만 다음해 이석 구타살인 사건으로 한총련 쇄신논쟁이 크게 일었고 그 해 말에 이적단체로 지정되면서 시망...
  • [7] 풍문에 따르면, 체포된 일부 과격파 학생들이 정신 못차리자, 경찰 윗선에서 '이새끼들 전부 북한 보내버려!'...라고 해서 정말 배에 태우고 공해 쪽으로 나갔다. 그러자 겁먹은 학생들이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빌었고, 전향서를 쓰고 풀려났다고 한다.
  • [8] 피해 물목 중에는 천문학과 광물 관련 자료와 샘플도 있었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별동별 조각이 전경 잡는 1회용 투석으로 던져진 후(...) 영영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
  • [9] 참고로 연세대학교 대강당은 채플수업만 열리는 곳인데, 애시당초 강의실 목적으로 쓰는 곳이 아닌지라 의자 옆에 달린 간이책상조차없다.
  • [10] 대표적인 예가 화장실 문제였다. 피난 생활을 하던 경영관의 경우 남초 현상이 심한 예전의 전공 특성에 맞게 지었기 때문에 남자 화장실에 비해 여자 화장실의 수도 적었고, 비좁았다. 그런데 그곳을 정반대로 여초 현상이 심한 과가 많은 문과대가 쓰게 되면서 쉬는 시간마다 여자 화장실 앞은 늘 용변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십명의 여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루는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 [11] 1998년도 2학기부터 종합관 사용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