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연산군

last modified: 2015-04-15 22:14:08 Contributors

동명의 북한 행정구역은 연산군(황해북도) 항목으로

燕山君 鹽酸 수학왕 연산군

조선의 역대 국왕
9대 성종 이혈 10대 연산군 이융 11대 중종 이역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존호[1]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융(㦕)
출생 한성 경복궁 자선당
사망장소 교동현(喬桐縣)
배우자 폐비 신씨(廢妃愼氏)
아버지 이혈(李娎)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尹氏)
생몰기간 음력 1476년 11월 6일[2] ~ 1506년 11월 6일[3]
양력 1476년 11월 22일 ~ 1506년 11월 20일
재위기간
(왕)
음력 1494년 ~ 1506년 9월 2일
양력
생년에 갑자를 쓰면 묘하다...

Contents

1. 설명
2. 행적
2.1. 초기 생애부터 즉위 초반까지
2.2. 사화의 연속
2.3. 흥청망청
2.4. 중종반정. 폭군의 몰락
2.5. 가족사와 편력
2.6. 폐비 윤씨와 갑자사화
2.6.1.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
2.6.2. 패드립?
2.6.3. 효자 연산?
2.6.4. 피묻은 적삼
2.6.5. 최근의 가설
2.6.6. 연산군의 광증
2.6.7. 종합해서
3. 그 밖에 이야기거리
4. 가족 관계
5. 연산군일기
6. 사극 및 출판물

1. 설명

조선의 10대 왕. 성종의 맏아들. 어머니폐비 윤씨다.

"나는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라 영화를 찍으면서 눈치를 본다.
달마야 놀자를 찍으면서 스님들 눈치를 봤고,
와일드 카드를 찍을 때는 형사들 눈치를 봤다.
황산벌김해 김씨 눈치를 봤다.
그런데 연산군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더라.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던 거다."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으로 열연한 배우 정진영, 씨네21 인터뷰 중에서

반만년의 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폭군. 잔학행위, 대량 숙청, 가렴주구, 주지육림, 토지수탈 등 그야말로 폭군 이미지의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로마 제국콤모두스가 있다면 조선에는 연산군이 있다.

조선시대 최고이자 유일한 막장스런 최악의 폭군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런 막장은 별로 없다. 충혜왕을 비롯한 조선 이전의 일부 연산군을 초월한 막장 오브 막장왕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실 그런 왕이 많은 편도 아니다. 게다가 충혜왕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냥 다같이 미쳐 돌아가는 막장 분위기 속의 막장 왕이었던 반면, 연산군은 비록 조금 잡다한 문제가 있긴 했으나 어느 정도 균형에 맞춰 멀쩡하게 돌아가던 정치판에 갑툭튀하더니 하라는 왕 일은 안하고 깽판을 쳐버렸으니 더욱 막장일 수 밖에... 실제로 보통 사람들은 건국 직후부터 성종 대까지를 조선왕조의 리즈시절로 꼽는데, 역으로 말하면 연산군을 기점으로 조선이 이전의 건강함을 점점 잃었다는 뜻이 된다.[4]

조선 역사 중에서 묘호(-조 or -종)를 받지 못한 4명의 왕 중 하나이나 본인에게 딱히 별다른 권력이 없던 정종(공정왕), 성인도 되기 전에 작은아버지에게 강제로 내몰린 단종(노산군),[5] 실리외교와 분조 지휘, 그리고 가 워낙 막장이라 상대적으로 더 빛나보이는 등의 재조명으로 인해 현대에 긍정적으로 재평가된 광해군과는 반대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막장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6] 물론 나라에 해를 끼친 왕이야 조선 시대에도 꽤나 많았지만 그 왕들이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최소한의 업적은 있거나, 무능했으나 일제와의 타협을 끝까지 거부하여 독립운동을 이끈 공이 있거나 등의 최소한의 실드칠 거리라도 있는데 연산군은 그조차도 없다. 연산군이 세자 시절부터 자신의 손을 핥은 성종의 사슴을 폭행했다는 등, 각종 사이코 짓을 했다는 등의 야사가 있는데[7], 이는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세자 시절의 연산군은 평범 그 자체였다. 양녕대군같은 불량아도 아니었지만 아버지 성종처럼 대단한 모범생도 아니었다고 한다.

연산군 일기를 읽어보면 모순점이 지적되는 왕이기도 하다. 여기에 가면 연산군에게 엿먹은 대비가 다음날 태연히 연화대에 구경을…… 방구석에 처박혀 떨어야 할 사람이 저러는 둥 정상적 심리상태의 정황과 어긋나는 이상한 점이 있다. 허나 왜곡됐다고 무조건 연산군은 착했다고 봐서도 안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여튼, 연산군이 시도한 무리한 왕권의 강화는 신하들이 후대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빌미(쉽게 말해서 "헐, 임금님? 하려는 대로 다 하다 보면 연산군 됨요.")가 되었고, 특히, 이 직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러한 신권의 압박에 제대로 시달려야 했다. 중종의 경우 처용무라는 춤을 좋아해서 즐겨추었는데 신하들이 처용무가 연산군이 즐겨추던 춤이라고 간언해 중종이 춤도 못 추게 만들었다. 하지만 중종이 사화 일으켜서 선비들 떼죽음 당하게 만든게 함정

2. 행적

2.1. 초기 생애부터 즉위 초반까지

즉위 초에는 빈민을 구제하였다. 국조보감, 여지승람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했다. 왜구를 격퇴했으며 건주야인을 회유, 토벌하기도 했다.

즉위 말에는 신하들이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고 하는 특이한 존호를 올렸지만 연산군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물리친 적이 있었다. 초기에는 정치에 의욕도 있고, 3명의 대비[8]들을 극진히 모셨으며,[9] 자기 자신이 나태해지는 걸 경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 왕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이미 망작(...)의 복선이 스물스물 깔리고 있었는데, 조선조 내내 군왕의 공식업무 중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업무에 속했던 '경연'을 점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경연'은 사전적 의미대로면 능력/덕망 있는 관리나 선비를 모시고 스승으로 삼아 왕과 신료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일종의 과외수업이었는데, 실제로는 일종의 '국무회의'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미 즉위 초부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않기 시작했으니 나름 치밀한 복선(...)이 깔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여기까지는 좋았다. 즉위 후 4년까지는 정말 큰 문제는 없었다. 사가독서를 실시하여 독서를 장려하고 왜구와 야인의 침략에 대비해 병기를 증축한 후, 악한 관리들을 벌주는 등 초기엔 그래도 좋았다. 다만, 어전회의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은 고쳐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 이 때부터 슬슬 싹수가 보이긴 했지만...[10]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이 때를 생략하나 왕과 나에서 나온 연산군은 이 때를 조명해 주긴 한다. 덕분에, 연산군은 즉위 12년 내내 막장짓을 한 왕으로 알고 있다가 초반의 4년에는 제법 정상적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꽤나 놀란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11]

2.2. 사화의 연속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치세 동안 조선의 정치판은 과 기존 조선개국에 협력한 공신들의 후예인 훈구파, 그리고 고려말 조선초의 혼란기중 낙향한 사대부들의 후학인 사림파의 세 세력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견제-협력을 하는 형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훈구파인 이극돈, 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 사초를 보고 문제삼아 김종직의 제자 등의 신진사류를 죽이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화이다. 무오사화는 선비 士자 대신 역사 史자를 쓰기도 하는데,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사초 중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인지 확실치 않은 소문[12]을 당연한 것처럼 김종직의 제자였던 문제의 사관 김일손이 적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당시의 조선의 왕통을 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조의제문이었다. 사실, 이건 연산군이 아니라 어떤 왕이라도 세조의 직계후손으로서는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후엔 사림에게도 온건하게 대하고, 대신들의 의견도 크게 수용하는 등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 깃털, 산호후추와 같은 진귀한 물품을 들일 것을 명하는 등 이 때부터 낭비벽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연산 9년 대신들이 씀씀이를 줄일 것을 권고했고, 이에 대해 연산군은 대응하지 않고 넘어갔다. 중반의 5년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과대소비와 이를 위한 조세 체계의 왜곡이 중반부터 시작된 것이다. 물론, 그게 극도로 심각해진 것은 후반기였지만...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폐비 윤씨 사건을 빌미로 훈구파, 사림파를 막론하고 모두 억누르고 수 많은 대신들을 숙청한 갑자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항목 참조. 어쨌건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므로 왕으로서 어머니를 신원시킬 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처벌이 유례가 없을 만큼 잔인하고 과도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초기처럼 선정을 베풀었다면, 홍무제처럼 강한 왕권으로 신하들을 조져버리기는 했을지언정, 백성들에게는 성군이었다는 소리는 들었을지도 모른다. 훈구 권신들과 간관들이 왕권을 제약했던 성종의 단점을 보완한 왕이라는 평을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문제있는 행동은 더 심각해졌다. 아버지 성종에게서 물려받은 방탕한 기질은 더욱 심해졌다. 원래 처용무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해서 사람들을 울릴 정도였으며 시쓰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예술인의 기질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조의제문으로 사림 선비들을 날려버리고 폐비 윤씨 사건으로 훈구 대신을 날려버린 이후 절대권력을 쥐게 된 연산군. 그는 더욱 막강해진 권력으로 하라는 일은 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했다.

2.3. 흥청망청

전국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해서 황음에 빠졌다.[13] 이 중에서 가장 예쁘거나 노래를 잘 하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것이 "흥청망청"의 어원이 된다. 워낙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던 왕인지라 흥청의 규모는 2천명이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여자를 뽑으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도저히 무리였기 때문에 얼굴이 예쁘장하면 무조건 뽑았다.[14] 이 많은 흥청들에게는 모조리 집이 제공이 될 뿐더러, 가족의 납세와 노역도 면제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흥청으로 사용된 건물은 놀랍게도 집현전이었다.(…)세종대왕이 구천에서 통곡한다 게다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다가 선왕인 세조가 중건한 절을 아예 기생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절이 바로 증조부 세조시절 증건되었고 현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던 원각사였다.[15] 지금으로 치면 국가원수가 국립대학과 서울시 내의 대형 종교시설 같은 것을 강제로 점거를 하고, 클럽이나 술집으로 만들어 버린 꼴이다. 너무 현실성 없어서 어이가 없지만 사실이라 충공꺵(...).

또 궁궐 내관이었던, 김처선이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면서 선대왕 중에서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는 간언을 올리게 되자 결국 김처선을 능지처참시키고 '처(處)' 자(字)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어 '처서(處暑)'를 '조서'로, 처용무는 '풍두무(豊豆舞)'라고 고쳐부르게 했다.

게다가 세종대왕이 즐겨하던 시국을 논하는 정쟁에 대한 토론과 경연을 없애서 학문을 멀리하고, 성균관을 폐쇄하고 학생들을 모두 몰아낸 다음에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다. 사간원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연산군의 패악질은 극에 달했다.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사냥터를 만들기위해 경기도 일대에서 금산, 즉 지금으로 치면 "그린벨트"와 비슷한 것을 쳐서 민가를 쓸어버리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백성들은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통쾌하게 여겼다.

물론, 조선시대 초기부터 금산은 자주 있었다. 개국초기나 연산군 시절처럼 왜구가 출몰하는 시기에는 배를 만드는데 쓰는 소나무를 조달하기위해 금산을 시행하여 무분별한 벌목을 막았다. 연산군이 금산을 지정한게 문제되는 건 이런 금산조치가 적어도 국방 등 국가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위해서 시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연산군 개인의 유흥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 쯤 되면 정말 막장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정작 사냥은 몇 번 나가지도 않았었다. 겁이 많아서 맹수들은 절대 사냥하지도 않고 잡아온 뒤에 우리 밖에서 쏘아 죽였다. 그가 사냥한 짐승은 노루나 토끼, 등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짐승들이다. 하지만, 한 번 사냥을 나가기만 해도 몰이꾼들의 식량부터 해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므로 재정은 충분히 거덜났다. 사실 조선의 왕들이 사냥을 나가고 싶어도 이런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도 사냥을 좋아했지만 신하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어서 눈치를 항상 살펴야만 했다. 여담으로, 태종은 상왕이 되고 나서야 마치 내일 제대하는 말년병장처럼 간부들도 아무도 터치를 못할 때 쯤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냥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죽을 날이 멀지 않았기에 세종과 신하들이 눈감아준 것도 있었다. 애초에 감히 상왕에게 누가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여기에다 서총대를 비롯한 토목공사에 생일날에는 '혀 요리' 같은 진미를 동원했으며, 주변 관료들과 백성들의 옷도 화려하게 입기를 주문했다. 심지어 궁궐에서 일하는 공노비들도 옷을 화려하게 입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놀아제끼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돈도 한푼 안 주면서 뻔뻔하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연산군 초기만 해도 살만했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나 뭐로나 헬게이트가 열리면서 완전히 죽을 맛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서총대를 비롯한 연산의 토목공사는 사실 그리 큰 토목공사도 아니었고 백성들의 세수증가는 이미 세조 이후 성종 치세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재정악화도 딱히 연산군이 막장으로 놀지 않았더라도 훈구파들의 세력확대로, 마찬가지로 성종 때부터 진행되어왔다는 설이다. 또한 연산군은 금표를 지정해 농토를 마구 뺏었는데, 이는 대부분 훈구 대신들의 사유지를 연산군 자신의 사유지화한 것이라, 백성들의 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달리 민생 자체에 딱히 심한 타격을 초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연산군이 마음대로 놀아제끼면서 재정을 악화시킨 점은 있었으나 성종대나 중종대와 비교해봐서 딱히 심각한 지출이나 징세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알고 본다면 말이 나올 수가 없는 주장이다. 후대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왕실의 방만한 재정운용은 무오사화 이후 심화되어 연산군 10년, 내수사 직계제를 통해 이에 필요한 비용을 수탈하는 제도가 확립된다. 재정의 남용에 따른 부족분을 다음해, 그 다음해에 필요로 하는 공물을 앞당겨 조달하는 인납, 무납 등 공납제도가 크게 어지러워진 것은 연산군때부터의 일이며 연산군 7년에 이를 현실화한다는 미명 하에 실시된 공안 상정(신유공안)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부담되는 공납의 부담은 크게 증가했다. 이미 16세기 들어 조세제도에서 공납의 비중이 커져만 가던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가 백성들에게 심각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란 건 당연지사다. 예를 들어 경기도에서 1년에 진상해야할 물고기 7518마리 중 4800마리가 이러한 별진상으로 늘어난 품목들이였다. 선조시대의 율곡 이이가 만언봉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 공물 추가분정은, 바로 연산군의 이러한 깽판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하들 단속에 매우 난리였는데, "입은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내용의 신언패(愼言牌)[16]를 차게 하고, 총애하는 흥청의 나들이나 연산군의 가마를 메는데 신하들을 동원시켰다.[17] 폐위 몇달전부터는 아예 사모 앞뒤로 "충", "성"을 수놓게 하였다.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겁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모양이다. 자기 권위를 살리기에도 애써서 자신이 사냥을 나갈때에는 백성들을 쫓아내버렸으며 북악산 마루에서 궁궐을 내려다본 아이들의 부모를 잡아 족쳤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이걸 보면 연산군은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연산군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나돌았는데, 그것이 한글로 써져 있었다는 이유로 한글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웠다. 하지만, 정작 뒤에 나오는 흥청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한글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연산군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에게도 한글 사용이 제대로 정착된 현실 때문에 흐지부지 되버린 듯 하다. 그러므로 "한글의 암흑기"까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언문이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상대로 한 글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백성들에게까지 퍼졌거나 백성들까지 끌어들여서 반연산군 활동을 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개인의 감정으로 선대왕이자 고조할아버지의 업적을 제대로 능욕한 꼴이 되었으니 까여도 할 말 없다. 세종대왕 : 이런 놈이 과인의 후손이라니, 이런 우라질!!

게다가 색욕을 밝혀서, 결국 기생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신하들의 아내까지 은밀히 불러다가 강제로 범했다고 하고, 실록에는 연산군에게 아내를 바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가 이복누이들과 근친상간까지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런데 정작 자기 정력은 딸렸는지, 약을 엄청나게 복용했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건강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항상 잔병치레를 달고 살아서 본인이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살았다. 사화후 친모(폐비 윤씨)의 상중에도 검열삭제, 심심하면 말등 위(...)에서도 검열삭제를 하는 등, 하드코어의 극치를 달린다. 이게 다 사실이라면, 연산군은 현대 정신의학으로 치면 섹스중독증의 전형적인 증상을 보이는 셈이다. 육체적인 성욕의 해소가 아니라 정신적인 공허를 성적인 자극으로 채우려고 성에 탐닉하는 것인데, 결국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원인이 되는 정신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 시점에선 정신의학이란 개념 자체가 지구상에 없던 시기인 관계로 이를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연산군은, 궁녀들을 시도때도 없이 너무 많이 뽑은 탓에 연산군의 치세기간 동안이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서 궁녀의 수가 가장 많았다. 각 군주당 평균 600~700명 가량 되던 궁녀의 수가 이 시기만 유일하게 10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18] 물론, 궁녀 대부분은 노비였으니[19] 궁녀를 뽑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궁녀 유지비는 그 자체로 백성들 등골을 빼먹는 행위였다는 것이 문제다.

2.4. 중종반정. 폭군의 몰락

숙청할 대상이 전부 숙청되어 더 이상 숙청할 대상이 없어진 연산군은 급기야 어느 정도는 자신의 향락을 말리던 박원종[20]과 서자 출신으로 연산군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던 유자광에게까지 이유없는 짜증과 협박을 가했고 토사구팽의 위험을 느낀 두 사람과 주위인물들이 반정을 모의하기에 이른다.[21]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때 김종직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임사홍의 아들이 옥사한후 임사홍이 의도적으로 유자광을 배척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유가 되었다.

이후, 성희안[22], 박원종 등이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로 올렸다. 일반적으로 조야는 중종반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반발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장 성종대부터 조정의 고관을 역임하고 중종반정의 공신 중의 하나였는데다, 당시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이'라 칭해지면서 사림/훈구 가리지 않고 존경받던 채수가 <설공찬전>을 저술했는데, 이 내용이 중종반정을 가열차게 까고 있다. 때문에 채수는 탄핵당해 말년에 목이 날아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중종반정에 대해 생각보다 반발하는 여론도 적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연산군을 옹호했다는 것은 아니다. 연산군은 이미 그 당시에도 조야를 막론하고 써글놈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은 연산군 본인에 대한 동정보다는 힘으로 군왕을 폐하는 반정 자체에 대한 반발이었다. <설공찬전>을 통해 조선사회에 핵폭탄을 날린 채수만 해도 연산군을 동정했다기 보다는 성종의 유신으로써 연산군이 폐위당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고 보고 있다.]
왕에서 군으로 강등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23]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병사한다. 다만 사망 당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 반정세력은 명나라에 보내는 조서에 연산군이 병으로 동생 중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희대의 사기를 펼쳤다. 그 직후 연산군이 급사했기에 독살설이 나돈 것이다. 가끔씩 명나라 사신들이 연산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요청하여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일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연산군이 사람 기척만 들려도 발작을 해서 도무지 뵐수 없다고 사기를 쳤다. 사도세자? 그럼 밥은 어떻게 주냐고 궁금해했겠지만 알게뭐야 굳이 말하자면 연산군이 잠을 잘때까지 기다렸다가 잠들면 몰래 주고 도망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명을 끝까지 속인 모양인지 연산군이 죽은지 30년이나 지난 중종 30년에도 "사신이 오면 연산군이 지금은 창덕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기록이 나온다. 의심 한번 안한 명이나, 끝까지 속인 조정 모두 흠좀무. 어쩌면 알고도 모르는 척을 했을지도 모른다.

연산군의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폐위된 군주라서 능의 형식이 아니라 그냥 조촐한 묘로 되어있다. 살아서는 최강의 권력을 누렸지만, 죽어서는 가장 초라한 묘에 안장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연산군묘 항목을 참조.

조선왕조 최초로 폭군으로 전락하여 폐위된 임금이었기 때문에 재위를 했던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묘 신위명단에서도 제외되어 모셔지지 않았다. 그 당시까지 기준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도 종묘 신위명단에서 제외되어 종묘에 모셔지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추존복위되어 종묘신위에 뒤늦게 모셔짐에 따라 현재는 광해군과 함께 종묘신위 명단에서 제외되어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한 임금으로 전락했다.

2.5. 가족사와 편력

아내 폐비 신씨는 신수근의 누나로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고 남편의 폭주를 막아보려고 여러번 간언하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조강지처인지 연산군은 그녀를 내치지도 않고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그냥 말을 들어라.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때 각각 다른 곳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의 유언은 "중전이 보고 싶다"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 인간적인 유언이다. 원래 연산군의 묘는 강화도에 있었지만 부인 신씨가 간청하여 몇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고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이다. 장례는 왕의 지위가 취소된 점을 들어 왕자의 예로 치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장녹수 쪽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검열삭제를 안하기로 유명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종이었던 장녹수는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을 녹여버렸다. 연산군을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인지 중종반정 이후 끌려나가 돌을 맞고 죽었다. 자업자득.

폐세자 이황을 포함한 연산군의 아들 4명은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공신들에게 부당한 죽임을 당했다. 반정당시 세자 이황은 10살이였는데 나름대로 능력이 있어서 외척 신수근[24]이 반정을 알고도 세자를 믿어보자면서 반대를 하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죽음을 당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황은 꿩고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야사에 따르면 반정 다음 날 아침에 상궁에게 꿩고기를 찾는 바람에 궁녀들이 "불쌍하신 분... 앞으론 피죽도 못 드실텐데..."라고 말하다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황은 연산군의 아들 중 최연장자 였고, 창녕대군의 경우, 겨우 5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산군 폐위 이후 몇 달 만에 사사되었다. 연산군의 막장 포스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반정공신들의 조치 역시 16세 미만의 경우 사형을 금하고 노비가 최고형이던 조선의 법도상 엄연한 불법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아들을 죽이라는 반정공신들의 요구에 처음에는 "어린 아이들이 뭔 죽일 죄가 있겠으며 장차 위협이 될 가능성도 낮고 인정상으로도 못할 짓이다." 이라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요구가 계속되자[25] 결국 연산군의 아들을 모두 사사시키고 말았다. 그나마 중종은 폐세자 이황의 장례나 제대로 치뤄주라고 명령했지만 이 또한 묵살당했다.[26] 이 때 실록 기록을 보면 즉위 초기 중종이 얼마나 무력한 임금이었는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 중종 뿐만 아니라 같은 처지인 능양군인조도 비슷했다. 반정으로 즉위한 임금들은 어쩔 수 없이 왕권이 약했다.

반정공신들이 반정명분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 중 일부는 날조되었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욱이 반정공신들 대부분은 연산군의 체제에서 이득을 누린 관료들이 대부분이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는 점을 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산군이 막장테크를 탄 것은 사실이다.

비슷하게 정치적 다툼으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성군이 된 정조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자세히 따지고 보면 둘의 상황은 상당히 다르다.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정조는 연산군보다 나이가 많았고, 영조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립서비스를 하며[27]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의 정당성에 대해 여러차례 훈계를 했다. 게다가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해서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도 어디까지나 대신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구실이었다는 설도 있다.

2.6. 폐비 윤씨와 갑자사화

연산군에 대한 가장 큰 떡밥은 바로 폐비 윤씨와 관련된 부분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뒤에 나오는 피묻은 적삼 이야기도 얽혀 아주 요지경이다.

연산군은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는 이러한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미복을 입고 임사홍의 집에 들려 폐비 윤씨에 대한 말을 듣게 된다. 이 부분의 기록은 없으나 임사홍 자체가 성종대에 폐비에 열렬히 반대했던 인물인만큼 임사홍의 설명은 주로 자신과 윤씨의 변호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연산군은 이를 알게 된 날 바로 자기 손으로 성종의 후궁인 정씨, 엄씨를 살해하여 산야에 버렸다. 또한 폐비 윤씨가 폐비되는데 견제한 조모 인수대비의 궁에 칼을 들고 뛰어들어가 결국 충격으로 죽게 한다.

박치기로 들이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야사다. 처용탈을 쓰고 칼을 휘둘렀다는 설도 있지만, 실록의 기록에는 그런것 없이 칼을 들고 와서 인수대비더러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물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고 한다.[28]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에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에게 뛰어들어가려고 했으나 이 때는 중전 신씨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2.6.1.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

사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에 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이 아무리 "백년동안 이 일을 입에도 꺼내지 말라!"라고 신하들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연산군이 세자로서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에 참여할 때 간간히 폐비의 이야기가 낮게나마 거론된 적이 있었으며, 윤씨가 사사당했을시 만 7세였으니 어쩌면 어렸을때 얼핏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실록에 의하면 즉위후, 성종의 행장록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왕이 승하하면 왕의 삶과 가족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항 행장을 명으로 보내야 했다. 당연 명으로 보내는 외교문서이자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므로 연산군은 이를 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모가 정현왕후 윤씨(중종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자신의 친모는 누구냐고 물었고, 신하 중 한 명이 폐비 윤씨라 답하자 어찌되었냐 되물었다. 이 때 사사(賜死)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어머니가 따로 있다는걸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더 자세한걸 들으려고 질문했거나, 혹은 사사당했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설령 폐비 윤씨와의 추억이 없다고 해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인지라, 아버지와 신하에게서 어머니가 사사당했단 말을 들은 연산군의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기록에 보면 왕이 그 날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굶은 것이지 왕이 굶은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왕들이 굶는 것을 바탕으로 시위하곤 했다. 며칠 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초라한 무덤을 손질하고 비석이나 세워주라 말한다. 이것이 회묘다. 그리고 외할머니와 외삼촌 윤구를 유배지에서 풀어준다. 나중에 추숭을 하려하자 대간들이 많이 반대했는데,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관련자에 대한 처벌은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가 오히려 무덤복원의 임무를 맡았다. 이 때까진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죄를 지어 사사당했다는 식으로만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듯 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연산군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정비 소생이 아닌 왕자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생모를 추숭하는건 흔한 일이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어머니의 폐위가 부당하다는 걸 안 후 태도가 변했다고 한다. 사실 실록에서는 그 당시 윤씨의 폐위 정당화를 위한 여러 부정적인 기사들을 적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단 상황을 보자면 인수대비와 성종의 후궁들은 폐비 윤씨에게 적대적이었던게 분명하므로……

2.6.2. 패드립?

기일에 검열삭제를 한다던가 말들이 검열삭제를 하는걸 보고 즐겼다는 류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연산군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몬 것이 바로 적삼사건 이후에 벌인 행각때문이다. 사실 효자 연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패드립에 대해서는 그냥 복수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조선시대의 윤리로서는 아버지와 검열삭제 결혼한 서모. 즉 계모에 대해서도 친모와 동일한 기준으로 대한 것을 보면 연산군의 경우는 존속살해에 해당하는 패드립을 벌였다. 물론 계모가 연산군을 사람 취급 안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말 나쁜 인간이었다면 모르지만 그랬으면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다. 더군다나 조모인 인수대비에 대해서는...

일단 야밤에 윤씨를 모함했던 정귀인과 엄귀인을 잡아서 고문한후 그들의 소생인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끌고와서 그 어미를 때리게 만들었다.[29] 그리고 다시 매질로 처단하고 시체를 갈갈히 찢어서 산야에 버렸다고 한다. 어미를 친 왕자는 말을 선물로 주었고 둘다 귀양을 보내어 사사했다. 하나는 패륜아니까 죽는 게 당연하고, 하나는 왕의 명을 거역했으니 역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그럴듯한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보통 패드립의 극단이자 동생들에 대한 패드립 강요라는 측면에서 아예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고우영의 만화, 영화 왕의 남자나 이대근 주연작 연산군,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빡친 분노한 연산군이 "손수 철퇴를 휘둘러 두 후궁을 박살내었다."고 처리하는데 이 이야기 자체가 실록에 나와있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성인대상 극화라도 수위가 너무 높아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유인촌이 나온 연산일기에서는 곤장 강요로 대신하고 있고 못 알아봤다는 건 뻥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입을 틀어막고 불을 끄고 마구 치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나름대로 충실했지만 그래도 장면이 장면인지라, 나중에 다른 군졸의 고문으로 죽은 걸로 그렸다.

신봉승의 조선왕조 5백년 원작에서는 패드립의 극단으로 두 아들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마구 때리고 그나마 한 아들은 직접 죽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연산이 손수 병사들에게 현장에서 두 후궁을 나체로 만들어서 갈기갈기 형체도 없이 찢어발겨버린다. 드라마판에서는 차마 보여줄수 없어서 그냥 잡혀가는 장면과 죽었다는 대사로만 처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강요로 한 대 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헐, 파키케팔로사우루스? 지단의 분노의 박치기 이것은 명백한 야사이다. 인수대비는 실제 그 일이 있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긴 했으나, 지나친 충격으로 인해서 홧병으로 사망했던 것이 지배적이다. 보통 극화에서는 머리로 받는 장면보다는 두 후궁의 아들들에게 술을 따르게 한다던가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 항의한다던가, 보는 앞에서 후궁들을 손수 때려죽인다던가. 칼을 들고 대전에 난입하는 장면등으로 바꾸어서 나온다.

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사실 연산군은 패드립을 한 적이 없었고 두 후궁은 자결했고 인수대비는 평안하게 늙어죽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견강부회, 심지어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연산의 사치는 권력자로서는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 편이다. 애시당초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이 굶주리면 식사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등, 나름대로의 견제장치가 많았다. 그렇기에 쓰레기가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500년 간이나 왕조가 유지되었건 것이다.

중종반정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월산대군 부인 박씨(큰어머니)를 범했고, 아이를 잉태하여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건은 진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일단, 정사엔 저 기록이 없다. 온갖 패드립을 다 적어놓은 연산군 일기에는 그녀는 병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연산군의 씨를 잉태하여 자살했다고 카더라"고 덧붙여 놨다. 박씨가 연산군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치욕스럽게 여겨 자살했다거나 하는 것들도 야사 문헌들에서만 전해온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박원종의 누나며, 사망할 당시 51세였다. 그나이에 임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그녀는 평생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었다. 지위뿐만 아니라, 나이로도 박씨가 연산군의 어머니뻘이라는걸 생각해보자면 아무리 연산군이 막장이었다고 해도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큰어머니 박씨를 건드렸을 가능성은 낮다. 실제로는 연산군이 박씨와 친하게 지냈을 뿐인데 이것을 황색선전한 것이 박씨 능욕으로 발전했다는 설이 나온 것. 실제로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박씨에게 곡식과 면포 등의 물품을 여러번 하사하였으며, 이에 대해 신하들이 지나치게 후한 행위라고 지적한 적도 있다. 세자의 교육 또한 박씨에게 맡겼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그리고 박원종이 사실은 연산군과 친한 누이의 덕을 봐서 출세한 면도 없지 않은 것을 보면 누나의 명예를 위해 반정까지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연산군에 의해 출세하고 연산군과 가까운 사이였던 박원종의 배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실상은 연산군의 권력이 슬슬 무너져가는 조짐을 보이니 빠져나간 쪽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위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박원종 뿐만 아니라 중종반정을 일으킨 주요 공신들 중에는 본래 연산군과 가까운 관계였던 사람들이 많았다.[30]

다만 애초에 연산군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강요하는 정신나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고작 '사이가 좋은 정도'로 저런 소문이 나돌 리가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그냥 눈에 뛰는 여자는 기분내키는 대로 범하는 행태를 보이다보니 이걸 제대로 묘사하면 아주 사극이 아니라 완전히 AV가 될 지경인데, 이런 상황에서 가까이 지내는 여성이 있다면 그것이 누가 되었건 연산군과 성추문이 나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연산군이 행실이 바른 왕이라면 저런 말이 나올 리가 없다.

신봉승씨가 쓴 소설판 조선왕조 500년에선 이런 야사를 사실로 받아들여서 박씨와 연산군간의 검열삭제 묘사를 상세히 해놨다. 원래 야사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는 연산군 연간에 박씨의 나이가 30대 후반이라고 하는 오류[31]도 있는 등 그냥 소설적 각색으로 보는게 좋다.

2.6.3. 효자 연산?

애당초 연산군이 어머니와 헤어졌을때는 세살이었다.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남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더군다나 왕실법도상 왕자는 왕비가 안고 업고 기르지도 않고 봉보부인이라고 하는 유모에게 의해서 길러진다. 그것도 모자라 지병이 잦았던 연산군은 궁 밖 강희맹의 집에서 피접생활을 했었다.

이후 진실을 알게 된 후에 밥을 굶는다든가, 묘를 복원한다든가의 절차를 보면 효성이 나름대로 있었던 것 같다. 야사에는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하여, 즉위 후 어느날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이 공민왕의 왕비였던 노국공주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고 전국에 남아있던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자기 어머니 기일에도 검열삭제를 하는 패륜아였을뿐이다.[32] 효성으로 연산군을 설명하는 기존 해석에 상당한 의문이 들게 된다. 원래 예술적인 기질이 강했던만큼 갑자사화때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고, 이에 따라 나중엔 미치고 말았다는 해석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점을 분기점으로 연산군이 매우 돌변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 집고 넘어갈 점은 예술적인 기질이 강하다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은 무리가 많이 따른다. 가령 현대에 들어 음악치료나 미술치료같은 예술로 치료하는 치료기법들은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더구나 역사적으로나 현재로나 정서적으로 자살이나 주벽등과 같은 정서적 문제를 죄악시했고, 숱한 시를 남긴 역사상 유명한 종교인들의 예술적 기질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이 분야에 사람들은 정서적인 문제들을 너무 죄악시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2.6.4. 피묻은 적삼

보통 연산군이 등장하는 사극을 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외할머니를 통해 받은 피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해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으로 그려지나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무엇보다도 정사(실록)엔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난 기록이 없다. 임사홍만 만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피묻은 적삼은?

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야사집인 <기묘록>에는 폐비 윤씨가 피묻은 적삼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려달라고 했다고 써있다.사약먹고 다 죽어가는데 저럴 여유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또 <파수편>에서는 연산군이 피묻은 적삼을 받고 제정신을 잃었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금삼의 피는 야사일뿐이다.

이렇게 신뢰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그 극적인 효과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이 설이 히트를 친 데에는 박종화의 역사소설 '금삼의 피'에도 등장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묘사가 상당히 임팩트가 있는지 드라마 장녹수, 왕과 나 등 현재까지 사극에서 써먹고 있다. 그 외에도 왕의 남자 등에서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2.6.5. 최근의 가설

최근에는 이 목적이 모두 대간과 대신 모두를 숙청하여 절대권력을 이루기 위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아버지 성종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신하들의 말에 꼼짝 못하는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를 후계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정사에서 실제로 폐비 윤씨에 대해 거론한 적은 많지 않으므로, 숙청에 대한 하나의 빌미라는 것이다. 늘 자신과 성종을 쪼아댔던 삼사가 유독 그때만큼은 성종에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가 났던걸 수도 있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 성종 말에 너무 커져 왕마저 괴롭히는 삼사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여, 즉위 직후부터 삼사의 권한을 억누르려 했다. 실제 연산군은 미친듯이 아무나 숙청한게 아니라, 우선 사약을 직접 나른 이세좌를 숙청한뒤, 그 후로 이세좌의 가문인 광주 이씨와 그와 연관있는 대신 가문을 숙청하고, 그 다음에 대간들을 찍어누르면서 조정의 세력균형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에 대한 긍정적 기사도 제법 있기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온갖 패륜이 모조리 거짓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다. 설령 연산군이 절대 권력을 위했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보다시피 연산군이 벌인 수많은 행동을 마음대로 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당화할 건덕지가 없는 셈이다. 고로 연산군의 최후까지를 무조건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해석하면서 '연산군은 신권세력에게 왜곡되었다능'이라고 떠드는건 심히 골룸하다. 주로 이덕일이 이런 소리 자주한다. 더 나아가 조선왕조 500년 전체를 사아칸 신권과 왕의 분투 정도로 결론짓는 막장성과 더불어 노론 음모론을 착실히 제기한다. 물론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실제로 이러한 가설을 제시한 임용한 교수도 결과적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연산군이 이를 이용해 제멋대로 놀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2.6.6. 연산군의 광증

연산군은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나머지 폭정을 휘둘렀다는 말이 여러번 제기되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설이기도 하다.

왕자 시절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가 신경을 안쓴건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후일 중종)이 태어난 후엔 친아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 상대적으로 홀대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성종의 첫아들이라고는 하나 미워했던 며느리의 아들이니 인수대비의 홀대도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추측이다. 무엇보다도 성종은 연산군의 재능을 총애하고 신경을 많이 써서, 특별한 나쁜 기사는 딱히 없다. 실록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기사는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가 없었기에, 조카인 연산군을 자기 아이처럼 돌봐줬을 가능성이 높은 월산대군 부인 박씨(백부의 부인이니 연산군에게는 어머니뻘이다.)에 대한 야사 등을 비롯하여 유부녀들을 적지않게 탐했다는 이야기에서 그로 인한 마더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간다. 솔직히 갑자사화 이후로는 강박관념 등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하는 기사도 많다.

여하간 연산군은 적어도 갑자사화 전까지는 이렇다할 광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사도 나름대로 잘하고, 백성들도 성종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연산군의 행동을 어릴적의 울분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다만 갑자사화 이후에는 그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산군 자체가 상당히 감성적이고, 예술적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는지라...

2.6.7. 종합해서

실록의 기사만을 볼 때, 연산군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갑자사화 이후 미쳤다는 설로, 그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존재를 몰랐거나 혹은 죽은 이유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갑자사화 직전 임사홍의 말을 듣고 그동안의 울분이 폭발하여 잔인한 숙청을 단행하고 사치와 향락, 패륜을 저지르는 등 막장의 길로 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철저한 계획이었다는 설로, 숙청을 단행하기위한 하나의 빌미로 썼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행동들은 모두 아직 권력이 약했던 시기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것처럼 행동함 → 어머니를 추숭 → 무오사화 → 수 년간 눈치를 살핌 → 갑자사화 이 단계 모두가 권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는 책략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어떤 설이 유력하든지간에 연산군이 폭정을 휘두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 없는 노릇이다.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이 오늘날까지도 폭군이라고 욕먹으면서 재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사실 광해군과 연산군 비교 자체가 광해군 입장에서 큰 굴욕이다(...)

3. 그 밖에 이야기거리

외모가 어머니를 많이 닮아, 조선 왕실에서 처음으로 우람한 체형이 아닌 왕[33]이 나왔다는 약간 요상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키가 큰 건 성종을 닮은 것이었다. 신하들에게 왕의 풍채가 없고 여자같다는 욕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34]

인조 때 이덕형[35]의 <죽창한화>에 의하면 이덕형이 백살이 된 노인[36]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노인은 어린 시절 한양에 갔다가 연산군을 보았다고 한다. 그 노인의 회상에 의하면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에 키가 컸으며 눈에서는 붉은 빛이 돌았다고 한다. 키가 크고 깡마른 체형이었는지 실록에는 전라도 부안의 김수명이라는 백성이 "우리 왕은 허리가 가늘어서 저 모양 저 꼴이다."란 식의 말을 한게 들통나 잡혀간 이야기도 있다.ㅉㅉ

하지만 성격은 선조들을 닮아서 무인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몸이 허약한 편이라 눈병을 자주 앓았고 얼굴에 종기가 있어 떨어지지 않았으며 잔병치레도 심했다고 한다. 다만 경연 빠지려고 일부러 아픈척한 적도 많았다. 사실 연산군 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 대부분은 경연에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갖은 핑계를 대서 안 나가려고 했다.

한편 심각한 치통을 앓았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치통이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됐다. 보기

위에서도 말했으나, 예술에 재능이 있었기에 직접 지은 시도 많이 남아 있으며[37], 춤도 잘 췄는데 특히 처용무가 주특기였다. 궁중에서 처용의 분장까지 하고 춤을 추었을 정도였으며 말을 타고 마상에서 처용무를 추는 묘기를 부린 기록도 남아있다. 또한 연기력도 뛰어나서 직접 죽은 사람이 통곡하는 모습을 연기하면 주변의 흥청들이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될 정도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문제는 군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취미활동을 잘하기 전에 [[송휘종]정치를 잘해야 했다는 거지].

연산군 대에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은 생산량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상당한 미식가로 심지어 중국에서까지 귀한 식재료를 수입하여 먹었다. 이 탓에 후대 왕들은 뭐 맛있는 것만 먹으려고 하면 신하들에게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하고 탄핵 받았다.왠지 김정일이 생각난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38]

그 외에, 북한에 연산군이라는 행정구역이 있다. 요즘 새끼돼지 하는 꼬라지 보면 적절하다.

4. 가족 관계

4남 2녀가 있었는데 일단 큰아들 폐세자 황[39]과 둘째아들로 창녕대군으로 봉해졌다가 박탈된 인이 있다. 이들은 모두 페비 신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로 둘 다 유배당시에 결혼을 하지 않았고 곧 사사되었다.[40] 알려지지 않은 첩에게서 아들 2명과 딸 2명을 보았다. 이들 중 아들로는 양평군으로 봉해졌다가 박탈된 성과 돈수가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사사되었다.

다만 시집간 딸들은 출가외인으로 간주.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공주는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라 하여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41] 큰딸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42] 둘째딸은 신거흥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

5. 연산군일기

조선왕조 건국이래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되어 왕권을 상실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과 함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행적기록을 담은 실록호칭도 실록이 아닌 일기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기록은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부른다.[43]

6. 사극 및 출판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얼굴에 거의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위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연산군은 얼굴에 자주 종기가 나는 등 잔병치례가 많은 편이었는데 이걸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8권(중종), 15권(경종, 영조), 18권(헌종, 철종), 20권(망국)에서 엑스트라로 나왔을 때도 빼먹지 않고 붙히고 나왔다. 이 책에서는 이 항목에 적혀있는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즉위 4년까지 군주로서 견실하게 나라일을 한 모습을 재조명을 했지만 후에 왕권 강화 한답시고 연이은 사화를 일으켜 엄청나게 비대해진 대간과 훈구 대신들을 찍어 누르고 그 강해진 왕권으로 국가 업무에 대한 비전 없이 그저 자기 맘대로 흥청망청 놀고 먹고 백성들까지 괴롭힌 것을 비판하면서 단지 암군이자 폭군에 지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그 후 조선에서 연산같은 왕은 더 이상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었다는 총평을 내리고 있다. 선조, 인조, 고종과 함께 가장 통렬한 비판을 받은 군주들 중 한 명이다.


(위는 <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폭풍간지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장희빈, 사도세자 등과 더불어 잊을만하면 재탕, 삼탕해주는 사극의 주인공. 진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는데, 연산군의 유난한 막장행보가 군사독재정권의 잔혹한 행위를 좀 더 나아보이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신상옥 감독은 스스로 흑역사로 간주해서 북한에 있을때 인편을 통해서 남한의 필름을 파기해달라고 했다고 하는데...신상옥이 감독한 연산군은 당대에 보기 힘든 해석으로 유명하다. 포인트는 연산군이 모든 잘못을 깨닫고 정치를 원상태로 돌리려고 하는데...다음 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한국 영화로서는 정말 이례적으로 상영시간이 3시간을 넘긴다.

조선왕조 5백년의 신봉승씨가 자주 다루는 시대가 세조~연산군까지이다. 즉 인수대비의 일생의 마침표를 찍는 비극으로서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왕조 5백년 최고의 인기작인 설중매의 후반부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임영규 연산군, 이미숙 장녹수, 고두심 인수대비인데...원작소설은 대단히 잔인하고 검열삭제가 난무하는 작품이지만[44] 드라마판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었다.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과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과 동정을 불러 일으키는 과거사, 그리고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고전 의 주인공같은 인물이다.

많은 사극에서 당대 유명 남자배우들이 연산군을 연기했는데, 그 중 유인촌, 유동근, 이민우의 포스가 절륜하다. 특히 유인촌은 연극인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햄릿 연기[45]와 칼리굴라의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46]
그 외에 대부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연기했는데, 현재까지 연산군 연기의 최고봉은 역시 왕의 남자의 정진영으로 광기와 애정갈구가 혼재된 연산군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해 냈다.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란 말이 있다.

한편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맡았던 안재모의 연기도 이들에 못지 않게 뛰어났다.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 될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세종(충녕) 이미지가 남아있던 터라 미스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덕분에 중반까지 부진하던 왕과 비가 연산군의 등장으로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는 뒷심을 발휘하여 유종의 미를 거뒀다.

그리고 2014년에 정도전에서 이방원을 맡아 또다시 피바다를 부른다. 특히 막판의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아버지에게 광기어린 패드립을 치는 살벌한 모습이 갑자사화 시절의 연산을 떠오르게한다(...).

참고로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출연했던 4명이 연산군 출신이다.
태종(유동근분) = 장녹수의 연산군 역
양녕대군(이민우분) = 한명회의 연산군 역
충녕대군(세종, 안재모분) = 왕과 비의 연산군 역
방번(무안대군, 정태우분) = 왕과 나의 연산군 역

과거에는 단종을 세 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처음으로 연산군 역에 도전하여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왕과 나를 연기력으로 살려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왕과 나 후반부는 '왕과 나'가 아니고 '연산군'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덧붙혀 신상옥판 연산군과 같은 결말을 맞는다. 김처선이 죽은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다음날부터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날밤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분노하였으나 물려받을 사람이 진성대군이란걸 알고는 그라면 양위받을 자격이 있다며 기묘사화 순순히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민우 씨는 한명회 끝부분에 잠깐 나와 비중은 적었지만 주인공 한명회가 죽은 후 갑자사화를 벌여 부관참시를 하는 장면이 아주 강렬했었다. 이런 연기를 약관 열아홉에 하면 딴 배우들은 뭘 먹고 살라는 것인가 대체 무엇 특히 을 두들기며 닥치시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라면 플짤감이다. # 컨셉인지 "닥치시오"는 여기서도 나온다. 아니긴 무엇이 아니야!!!!

역대 연산군 배우들

  • 신영균: 영화 금삼의 피 (정확히는 2부작 영화)
  • 임영규: MBC 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1985)
  • 이대근: 영화 연산군
  • 이민우: KBS 한명회(1994)
  • 유동근: KBS 장녹수(1995)
  • 유인촌: 영화 연산일기(1988년),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47]
  • 안재모: KBS 왕과 비(1998~2000)
  • 정진영: 영화 왕의 남자(2006)
  • 정태우: SBS 왕과 나(2008)
  • 진태현 : JTBC 인수대비(2012)
  • 김강우 : 영화 간신(2015)

변강쇠로 유명한 배우 이대근 씨도 연산군을 연기한 경력이 있다.

한국 사극의 연산군하면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
  • [1] 폐위되었기 때문에 시호는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있을때 받은 존호가 있다.
  • [2] 성종실록에는 11월 6일 밤 3경 5점에 태어났다고 되어있고, 연산군일기 총서에는 11월 7일에 태어났다고 되어있다.
  • [3] 성종실록의 출생일 기록을 따른다면, 연산군은 자신의 생일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이다.
  • [4] 이 다음 왕들을 나열하면 중종, 명종, 선조...연산군 사후에도 사화가 2번 일어나고 선조 때에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재앙급 크리를 맞고 이후 광해군에서 회복하나 싶었으나 인조에서...(생략)
  • [5] 정종과 단종은 그래도 숙종대에 가서 묘호를 받았다.
  • [6]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연산군일기는 광해군일기하곤 차원이 다르게 잔인한 내용이 담겨져있다.
  • [7] 그리고 그 야사의 끝은 즉위하자마자 그 사슴부터 찾아내 죽였다고 한다.
  • [8] 할머니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왕대비, 작은할머니이자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계모인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 [9] 심지어 불교식 의례도 인수대왕대비를 위해서 시행한 적도 있었다;
  • [10]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의 이 발언이 언급되는데 훗날 피바람의 복선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 [11] 몇몇 역덕후들과 전공자들이 이러한 행적 때문에 연산군을 많이 아쉬워 하는 편, 초기 치세만 괜찮게 유지했으면 다소 독선적인 면이 있었지만 정국을 균형있게 잘 운영한 유능한 군주로 사서에 남았을 것이고 이후의 조선이 가는 방향 역시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 [12] 의경세자가 죽은 뒤 세조가 세자의 첩을 범하려고 했다거나, 단종의 시체를 동물들이 먹으라고 산속에 던져버렸다. 문종의 세자빈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권씨의 무덤을 파해치고 관을 꺼내 버렸다는 이야기 등. 단종->세조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흉흉하게 잠시 돌았던 이야기인만큼, 현재의 역사가들도 이런 일들이 실제 일어났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고 한다.
  • [13] 이 때 미녀들 중에서 임신해오는 여자도 섞여들어왔는데 그걸 보고 하는 짓이 정말 막장이다. 그 여자들이 아기를 낳으면 당장 아기를 빼앗아서 아기를 몰래 생매장시킨 것이다.
  • [14] 이 과정에서 자식이 있는 유부녀도 강제로 뽑았다고 한다. 비록 드라마이긴 하지만, 대장금의 의술의 스승 장덕이의 어머니도 강제로 차출되어 끌려갔다고 하는 설정이 있다. 유부녀도 강제로 끌고 갔던 사실이 있었는지는 확인바람.
  • [15] 현재의 파고다공원이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
  • [16] 중국 5대10국시대의 정치인 풍도(馮道)의 설시(舌詩)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설시의 내용은 풍도 항목 참조
  • [17] 이것을 보면 연산군이 신하들을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 [18] 더 심각한 건 원래 궁녀들은 왕의 승은을 입는 경우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처녀로 늙어 죽어야 했다. 그러나 희대의 폭군이신 연산군께서는 그냥 예쁘면 유부녀건 미망인이건 닥치는대로 뽑아버렸다.
  • [19] 서민이나 양반의 자제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나 고위직을 맡았다. 대체로 부모들은 자신들의 딸을 궁녀로 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왕이라고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 [20] 연산군은 갑자사화 당시 무오사화와는 달리 무자비한 연좌제를 적용하여 많은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 그 결과 박원종이 문제가 아니라 박원종과 가까웠던 사람들이거나 박원종에게 명함이라도 전한 사람들에게는 앉아서 죽느냐, 서서 살 길을 찾느냐의 선택 외에는 없었다. 다만, 그럴 것을 염려했던 연산군은 다른 일이 터졌을 때 단순 가담자는 매우 가벼운 처벌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당시 대신들은 그때 이후로 일이 터졌을 때 전 단순 가담자일 뿐이고, 주동자는 (이미 사화로 인해 죽은) 그 사람입니다.라고 발뺌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내용. 연산군도 한 번 지적은 했으나, 사실 자신이 의도한 바여서 그런지 언급만 하고 넘기는 분위기였다. 박원종에 대해서도 몇차례 말로 꾸짖었을 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 [21] 여진토벌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의 반정합류는 반정 성공의 큰 힘이 되었다.
  • [22] 연산군에게 간언을 했다가 파면당해서 연산군한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 [23] 상세한 위치는 기록에 없으며, 현재 신골, 연산골, 읍내리 세 곳이 연산군의 유배지로 추정되고 있다. 연산군 뿐 아니라 희종, 임해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 많은 왕족들이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 [24] 연산군의 측근이자 처남인 신수근 역시 갈수록 막장이 되가는 연산군에게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측근이 이렇게 진절머리가 날 정도면 쫓겨나기 전의 연산군이 얼마나 답이 없는 막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25] 삼정승을 비롯 반정공신이자 당시 조정의 1품 고관들이 모두 중종 앞으로 몰려가 사실상 강제로 연산군 아들들을 죽이라는 전교를 받아내었다.
  • [26] 중종이 "결국 니들 말대로 폐세자 이황이를 사사시켰는데, 장례나 제대로 치뤄주지?" 라고 말하자 신하들의 대답이 "서인으로 죽은 죄인에게 장례는 무슨. 관곽이나 갖춰서 묻어 주는 것만으로도 후한 조치거든요?" 였다. 신하들이 왕의 의견을 대놓고 쌩깐 셈.
  • [27]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죽인 과정이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안 그러고서야 7일이나 가둬놓고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기가 무섭게 시호를 내리겠나.
  • [28] 그러나 사실 따지고보면 이쪽이 박치기보다 더 공포스럽다. 왜? 박치기는 그냥 신체만 아프게 했지만 이쪽은 정신적으로 죽여버리는 짓이다. 생각해보시라, 손자가 할머니에게, 그것도 칼을 가지고 들어가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제대로 폐륜짓을 한 것이다, 더구나 조선시대는 유교사회였다는 점을 기억하라.
  • [29] 실록에 의하면 한 왕자는 그나마 어미라는 걸 알고 주저했지만 다른 왕자는 패륜아답게 그냥 쳤다고 한다.
  • [30] 이런 아이러니로 인한 정치적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박원종 등 공신들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반정공신의 명단을 크게 확대한 것이었다. 그 결과 연산군 시절 연산군과 짝짜꿍했던 관료 중 상당수가 반정공신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또다른 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기묘사화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31] 연산군 즉위 때 박씨는 이미 40대였다.
  • [32] 해당일의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왕이 후원에서 나인들을 거느리고 종일 희롱하고 놀며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이날은 바로 폐비 윤씨의 기일이었다. 왕은 또 발가벗고 교합하기를 즐겨 비록 많은 사람이 있는데서도 피하지 않았다.
  • [33] 이전의 조선왕들은 대체로 체구가 우람했다. 요절한 단종은 제외하고라도 이성계나 이방원은 물론이고, 재위기간이 짧았기에 문약한 이미지로 생각되곤 하는 문종도 실제로는 풍채가 당당하였다.무섭다 이성계
  • [34]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묻자 성종이 "나보다 더 큰 사람도 있소."라며 당시 조정대신 중 장신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불러 비교해보았다고 한다.
  • [35] '오성과 한음'의 이덕형이 아니다. 동명이인.
  • [36] 정확히는 97세의 노인. 죽창한화는 이덕형이 1645년에 졸하기까지 짬짬이 쓴 글이다. 연산군 내용이 실린 부분은 이덕형이 임진왜란 다음 해인 계사년에 피난지에서 만난 노인의 증언을 수록한 것이다. 연산군을 본 노인은 어릴적인 13세에 연산군을 보았다고 한다.
  • [37] 인생여초로 회합불다시(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아 만날때가 많지 않은것. 연산군이 폐위 직전에 쓴 시라고 하는데 상당한 수준의 시조다.
  • [38]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김정일도 외국에서 인민들 굶어죽는 와중에도 오만가지 고급 식재료를 수입해 먹었다. 그돈으로 옥수수나 중국산 쌀을 샀다면 인민들 굶어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 [39] 아버지와 달리 반듯하고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막장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망했어요.
  • [40] 이들의 숙부뻘이었던 중종은 죽이지는 않으려고 했으나, 정권을 잡은 반정파들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죽여야 했다.
  • [41] 사실 조선 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여성 인권이 조선 후기 시궁창으로 변하면서 적당한 돈만 쥐어 주고 합의(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는)이혼당하는 일이 급증하게 된다.
  • [42]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
  • [43] 한때 폭군은 아니지만 계유정난로 축출된 단종 역시 이전에는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불렸다가 숙종이 추존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승격되었다. 사실상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호칭을 가진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뿐이다.
  • [44] 이를테면 검열삭제 묘사가 제대로 나오고, 두 후궁을 처단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이야기도 아들들에게 직접 때려 죽이게 하고 완전히 나체로 만들어 현장에서 찢어버린다.
  • [45] 연극에서 연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
  • [46]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다.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
  • [47] SBS의 임꺽정에도 나오는데. 임꺽정에서는 말 그대로 한 장면에만 나오는 우정출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