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여순사건

last modified: 2015-03-20 10:36:25 Contributors

실제로 일어난 사건! HELP!

이 문서가 다루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며, 열람 및 수정 시 주의해야 합니다.
서술에 문제가 있을 경우 [http]위키워크샵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Contents

1. 소개
1.1. 군인들의 반란
1.2. 반란군의 진격
1.3. 이승만 정권의 진압
2. 사건 이후
3. 정부의 반응
4. 트리비아


1. 소개

정식 명칭은 여수·순천 사건이다.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나 10월 27일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한때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 하여 공식명칭에서 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사건", 혹은 그냥 "14연대 반란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여순병란이라고 한다. 이태가 신동아에 기고한 실록의 제목도 이것이다.

1.1. 군인들의 반란

사건의 발단은 제주도 4.3 사건으로,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러 가라는 명령을 받은 남로당 계열의 여수 14연대 군인1개 대대의 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에서 시작한다.

당시 국방경비대[1]는 모병제였지만, 입대시 신원조회 등이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입대에 있어서도 사상검열 등은 전혀 없었고 충성서약과 신체검사, 구두시험만으로 선발하였다며 입대 절차를 너무나 허술했던 것으로 회고하였다. 링크

국방경비대의 영관급 장교 이상은 구 일본군 출신이 다수였으나, 위관급 장교, 부사관, 사병은 좌익 성향이 다수였다. 때문에 미군정기 동안 국립경찰[2]과 국방경비대는 서로 으르렁거렸던 사이였다.

여기에다 당시 국방경비대와 경찰 사이에는 가끔 무장충돌이 벌어질 정도로 알력이 있었다. 이러한 군과 경찰 사이의 갈등은 제1공화국 내내 지속되었다. 심지어 이승만이 경찰을 싸고 돌고 군부를 찬밥다루듯 하자[3] 군사 지도자였던 이범석이 정변까지 모의할 정도였다.[4]

반란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1948년 9월 24일에는 구례 경찰서 직원 한 명과 14연대 사병 9명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는데,[5] 몰려든 구례 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사병들이 구타당한후 구금당했다. 그래서 14연대 헌병들이 구례까지 가서 이 병사들을 인수받아왔는데, 연대 인사계인 지창수 등은 이 사건에 대해 분개하면서 언제 한번 보복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반란을 선동한 당시 14연대 인사계였던 지창수 상사가 대대를 소집하고 "경찰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온다."고 선동하면서 진압파병 거부, 제주 빨치산에 호응하여 본토에 제2전선을 구축, 남북통일을 위한 인민군으로 행동할 것을 선동하고 그와 모의한 공산분자들이 호응하는 분위기를 만들자 대부분의 대대원들이 봉기에 동참했다. 그 와중에 봉기를 거부했던 부사관 3명은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고, 곧 반란사병들은 부대 내의 전 장교를 "미제의 앞잡이"라 하여 발견하는대로 사살하기 시작했다.[6] 분위기에 휩쓸린 2,3대대도 동참하여 반란군의 수는 2,500명으로 늘어났으며 사병들의 요구에 의해 포병 중위 김지회가 반란군의 사령이 되었다. 사실 김지회는 원래 남로당원이었지만 군내에 잠입한 남로당 조직 자체가 워낙 점조직이었던 탓에 김지회와 지창수는 서로가 남로당원인줄 몰랐다고 한다. 덕분에 김지회는 우익 장교로 몰려 총살당할뻔 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1.2. 반란군의 진격

반란군은 19일 밤 8시에 반란을 일으킨지 4시간만에 2백여 명의 경찰관들을 격파하여 여수시의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우익인사, 경찰, 그들의 가족들을 합해 70여 명을 처형하였다.[7]

이후 반란군은 그 기세를 몰아 다음날인 20일에는 순천시까지 장악, 주변을 차례차례 점거해갔다. 당시 순천에는 홍순석 중위가 이끄는 14연대 소속 2개 중대 병력이 있었으나 공산주의자인 수석중대장 홍순석 중위에 의해 이들도 반란군 측으로 돌아서면서 간단하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광주의 4연대가 진압을 위해 1개중대의 병력을 보냈지만, 4연대는 암 사건으로 경찰들관 전투를 벌이던 부대인데 경찰에게 감정이 좋을리가.. 20일 당일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부대 안에 있던 좌익 부사관들이 8명의 장교 중 7명을 사살한 후 중대를 이끌고 반란군으로 넘어가 버렸다.

1.3. 이승만 정권의 진압

이에 이승만 정권은 10월 21일에 반란군이 점거한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군을 파견한다. 하지만 일부 진압군은 진압 과정에서 전투중에 반란군으로 돌아서기도 하는 등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로당계 중대장이 자신의 대대장에게 기관총을 갈겨대기도 했다.

하지만 고립된 반란군은 차츰 약화되었고, 진압군의 승전으로 열세에 몰리면서 그 잔당이 지리산 일대로 피신해 한국전쟁 때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다. 김지회는 후일 도움을 청하러 간 주막집 주모의 신고로 사살당하고[8][9]빨간 스웨터의 여대장으로 알려진 김지회의 처 조경순도 생포후 처형된다.

반란 당시 평소 이승만 정권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좌익계열 시민과 학생들도 이들에게 협조하였던 탓에 사건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특히 학생들이 협조했던 사실은 이후에 '여학생들이 치마에 무기를 숨기고 접근해 진압군을 공격했다 카더라'식의 크게 과장된 이야기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은 빨갱이 협조자 색출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란군에 의해 처형된 민간인의 수[10]에 버금가는당시 공식정부기록으로 반란군에 의해 학살당한 수의 10배 이상의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500명 남짓인데 비해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6000명 이상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발간되었던 정부공식기록이다. 쌍방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반란중 죽은 군인들의 수보다 결코 작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좌익에 의한 사상청소가 벌어지자, 그 이후 진압군이 들어왔을 때 피눈물을 흘리는 우익들에 의해 보복조로 살육이 자행되었던 것.

우선 여순 사건에서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먼저 발생한 것은 맞다.[11] 또한, 진압군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해, 재판 과정 없이 보복성 학살이 자행된 것도 맞으며, 그 과정에서 관련 없던 사람이 많이 죽은 것 또한 맞다.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볼 수 없다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관련없는 일반인이 개입되고 학살 당하게 된 건, (한국전쟁 처럼) 이 사건을 시작한 이들의 책임으로 봐야 할 것이다. 늘 그렇듯 양편이 다 총을 들고 있으면 양편에서 다 죽게 되어 있다.[12]

한편, 관동군 출신이던 김종원이 무고한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대량학살을 하는데 커다란 활약을 했다.

2. 사건 이후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였고, 반이승만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게 되며 후에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북한의 지령이나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남로당에서도 북한에서도 전혀 원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남로당은 공중파 라디오 뉴스를 듣고 비로소 사건발생을 알았다고 할 정도. 우발적으로, 게다가 사병 위주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후의 어떠한 계획도 없었고 결국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군 내부에 세포조직을 키워 세력화하려고 했던 남로당은 이 사건 이후로 군 내부의 좌익계열들이 모조리 색출되어 군 내부에서 남로당의 기반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타격이 매우 컸다.

한국전쟁 종전후 북한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공방이 일었을때 김일성파를 제외한 연안파, 남로당파, 소련파는 이 사건의 귀결을 매우 아쉬워했다는 후문도 있다. 박헌영의 입버릇이던 "인민군이 남진하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 이라는게 사실이 되었을테니... 하지만 나중에는 되려 남로당계를 숙청할 때 빌미 중 하나가 되었다. 남로당 거두 박헌영의 재판에서 박헌영은 "여순사건은 내가 미군과 짜고 남한군 내의 세포조직을 노출시키기위해 일부러 일으킨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사상적 기반이 나빴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진짜? 그럴 리가 있나. 수령 아바이 마음에 안들면 사상적 기반이 나쁜거지. 박헌영은 이미 1946년에 월북한 상태였고 김일성파의 견제로 정치적으로 손발이 묶인 채로 지내는 판이라 남쪽과 연락조차 힘든 판이었다.

여순사건으로 군내 좌익세력이 색출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순사건 이후 숙군작업을 통해 숙청된 군인은 전체 군인의 5% 정도이다. 이 숙군작업을 통해 반공주의 성향의 군문화가 정착되고 만주군 출신들이 대거 중요 보직에 포진하는 결과[13]를 가져왔다. 한편 숙군작업은 좌익세력을 척결한다는 대의명분도 있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를 통한 이승만 정부의 확고한 군 장악 목적도 있었다. 그 결과 반이승만 세력들도 좌익들과 같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이후 불어오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의 전주곡이였을 뿐이니. 사건이 일어난 여수 지역도 아니고 근처인 순천지역도 아니고 저~ 멀리 있던 지역의 좌익세력들까지 여순사건과 관련있다고 학살당한다. 위로 올라가는 보고의 상당수는 여순 세력들이 출몰했다고..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아직도 해당 지역은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거나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군인들이 훈련 등의 이유로 무장하고 돌아다니면 꼭 한마디씩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위 사건을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군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편이다.

3. 정부의 반응

이범석은 이게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고 발표했다[14].# # 당시 국회 속기록에도 나온다. 이걸 가지고 김구가 여순사건에 있다는둥 루머가 퍼져나갔다. 김구 암살관련 미 정보문건을 보면 김구, 염동진은 우익 반대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한다. 역사편찬위에서는 염동진과 몇몇 장교들의 발언 가지고 하는 거라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김구 안티세력에서는 이를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에 진압하러 갔다가 반란군이 된 제4연대장의 이름을 최남석이라고 주장하는데 저건 당시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룬 오마이뉴스도 있다.#

실제로 여순사건이 일어나기전 오동기 제14연대장에서, 제4연대장이었던 박승훈이 후임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임 제4연대장은 이정일[15]이다. 훗날 이성가[16]개명한다. 남의사에서 활동했으며,해방전에는 한국 광복군북평 잠편지대 소속이었다.

저 극우 부분은 박정희 시대때 삭제되는데, 박정희에게 있어서도 흑역사였다. 당연히 박정희에 대한 부분도 삭제된다. #,#

4. 트리비아

  • 여담으로, 이 사건 이후, 그렇잖아도 불길한 취급받는 숫자인 4한국군의 독립 부대명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당연히 없어졌고, 일부가 반란에 가담한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

  • 허영만 화백의 아버지도 이 당시 죽을 뻔 했었다고 한다. 허영만 화백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순사를 했었기 때문이다.

  • 리영희 씨는 한국해양대학교 재학 시절에 이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항해 실습을 하던 선박이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던 선박이어서 여수항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 시설인 양원을 운영하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도 이 사건때 좌익계열 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17] [18]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학생인 안재선 씨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런 손양원 목사의 모습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손 목사는 피난하지 못한 한센병 환자들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남아있다가 여수 지역으로 온 인민군에게 총살당하고 말았다.[19]

  •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 14연대의 주둔지는 현대의 여수시 신월동 일대로 국화약 여수공장이 위치해 있다.

----
  • [1]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다.
  • [2] 일제시대 경찰 출신 80% 비율 차지
  • [3] 무장면에서도 경찰측이 우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도 당시 주력 소총인 M1 개런드는 군보다 경찰이 더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군이 후퇴하는데 경찰들이 소총을 들고 공산군을 막아서는 웃지못할 사건이 벌어지고 후방 빨치산과 싸우던 경찰을 향해 미군이 공격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 경찰치고는 무기가 군대에 준할 정도로 과해서 위장한 북한군인줄 알고 그랬다고 한다.
  • [4] 4.19혁명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강경진압한 것과 달리 계엄군이 시위대에 유연하게 대처한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 [5] 당시 육군은 돈이 없어서 계급장 대용으로 단추를 꿰메 달아 개수차로 분펼을 했는데 이것을 버스 안에서 본 경찰들이 빈곤하다며 놀렸다.
  • [6] 점조직이었던 탓에 남로당 계열 장교도 엄하게 사살된 적이 있다. 이 가운데 김지회와 홍순석을 제외한 남로당 계열 장교 출신들 상당수가 사살당하기도... 팀킬? 흠좀무
  • [7] 이때 적어도 세명 이상의 여자 경찰이 강간 후 살해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퍼졌는데, 실명까지 공개된 그 여경 중 하나는 후일 토벌대와 인터뷰를 한다. 다시 말해 헛소문이었던 것. 이 외에도 경찰 지서장 및 부하들을 모조리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정작 그 지서장은 여수 시내로 진격하는 반란군을 만나기까지 했는데도 해를 입지 않고 지서로 돌아와서 무기들을 숨긴 뒤 살아서 몸을 피했다. 즉 반란군의 민간인 학살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부적인 면에선 사실과 다른 점도 있다는 것. 물론 잊어선 안 될 것은 단지 "존재했다" 수준의 학살이 아닌, 국군의 무자비한 보복을 받을 정도로 큰 규모의 학살이 있었단 점.
  • [8] 그 주모는 나중에 빨치산에게 보복당한다.
  • [9] 1949년 4월 9일 새벽 2시 30분쯤, 김지회·홍순석 일당 40여 명은 산내면 반선리 선술집에서 술집 주인의 신고로 홍순석을 비롯한 정치부장, 후방부장 등 17명이 사살되었고, 7명은 포로로 잡혔다. 생포된 공비들이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도 같이 있었다고 진술하였지만 부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4월 13일, 김갑순 일등상사는 조경순을 비롯한 일당을 생포하였고 조경순을 심문하여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 600m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훼손된 시체 1구를 찾아냈다. 김지회는 반선리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창자가 밖으로 나오는 등 그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하여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처 조경순에게 직접 확인케 했다.
  • [10]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더욱이, 반란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 [11] 손양원 목사의 아들의 사망과 관련해서, 동인, 동신 형제의 동생(손양원 목사의 딸)이 여수에서 순천으로 가면서, 길거리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있는 것을 목격한다. 또한, 안재선을 비롯, 당시 반란군에 동조하여,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의 증언도 있다.
  • [12] 여수, 순천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나 군사 고문단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 [13] 만군 출신들이 여순사건 진압에 큰 공을 세운 것이 감안되었다
  • [14] 극우 부분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에 삭제되었다. 어찌됐건 간에 본인 입장에선 흑역사니 그럴만도 하다. 이범석 자신은 독립군 출신이지만 희한하게 열열한 이승만의 지지자로 극우 성향에 가까운데 이런 발표를 낸것 자체가 흠좀무
  • [15] 실제로 당시 기록은 이정일 부대로 나와있다.
  • [16] 제20연대라 나와있는데, 원래 제4연대로 여순사건이후 제20연대로 개명됨.
  • [17]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고 손목사의 두 아들은 당시 우익 성향의 학생단체에 소속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해당한 것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 [18] 이 부분은 논란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순천 사범 학교는 신탁 통치에 대하여, 찬(좌익), 반(우익) 으로 나눠져서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은 우익 학생 단체가 아니었고, 기독 학생회 소속이었다. 기독 학생회가 우익 성향이었다 라고 주장할 수을 수는 있으나, 애시당초, 첫째 아들 동인은 그런 논란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동인을 죽인 이유는 미제에 앞장선다는 황당한 이유 였다. 동신은 동인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였다. (우익 성향이었다 하더라도, 반탁이었을 동인에게 미제에 앞장섰다고 했다는 건) 아무래도 동인이 기독교도 였고, 기독 학생회를 이끄는 입장이었던 게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였던 좌익 학생 중 한명인 안재선(손 목사가 양자로 받아들인,,)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었다.
  • [19] 결국 여순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다 죽는다는 아픔을 겪었다. 좌이든 우이든 중립이든 죄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