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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난 코르테스

last modified: 2015-03-11 10:46:54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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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nán Cortés(1485? ~ 1547.12.2)

Contents

1. 개요
2. 아즈텍 정복
3. 말년과 최후
4. 학살자인가?
4.1. 학살자가 아니다
4.2. 학살자이다
5. 기타


1. 개요

스페인콩키스타도르. 후술하겠지만 관점에 따라 인류사에 남은 '정복자'와 근대 이전 최악 '학살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전자는 주로 유럽에서[1], 후자는 주로 중남미에서 받는 평가이기도 하다.

2. 아즈텍 정복

당시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는]가 대부분 그랬듯이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한 몫 잡아보고자 남미나 북미로 건너간 사람이다. 스페인의 쿠바 정복 당시 공을 세운 덕에 근무하게 된 쿠바에서 기반을 다져 유카탄 반도 원정에 나섰다. 도중에 그가 뜨는걸 두려워한 쿠바 총독에게 견제를 받기도 했지만 500여 병력을 이끌고 일단 떠난다.

코르테스는 우선 작은 섬코즈멜에 상륙해 물자를 확보한 일변, 정보를 습득하고 통역사를 구한다. 물론 선교도 하고(...) 아즈텍을 정복해 금을 열심히 강탈하려는 야망을 품고 유카탄 반도에 도착해 상륙하자마자 아즈텍의 동맹 원주민 여러 부족과 성대히 전쟁한다. 그리고 굴복케 한 원주민들에게서 금이 어디 있느냐고 열심히 캐물으면서 떠돈 끝에 아즈텍과 동맹인 원주민 여러 부족과 다시 치열히 싸우면서 간 포톤찬에서 금을 약간 발견하고는 마야 계열 여러 부족과 싸운다.[3]

포톤찬에서 말린체를 얻은 코르테스는 또 열심히 금(아즈텍)을 찾아 계속 서진하는 도중에 아즈텍의 동맹 부족장이었으나 아즈텍의 지배에 환멸하던 치코메코아틀을 만나고 환대받아 멕시코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베라크루즈를 세우게 된다. 마을을 굳이 조성한 이유는, 나중에 카를 5세에게 쿠바 총독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왕께 영토를 바치려고 했습니다.'라고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나중엔 베라크루즈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수준으로 영토를 갖다 바치게 되지만(...)

베라크루즈를 건설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코르테스에게 몬테수마가 보낸 사절이 와, 금을 선물하며 전쟁을 피하자는 의사를 전달한다. 이 사절들은 코르테스를 신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더 많은 금을 원한다며 사신을 모욕적으로 대하며, 콩키스타도르들이 가진 화약 무기의 위력을 과시하여 쫒아낸다. 두 번째로 온 사절은 더 많은 금을 선물로 건네며, 코르테스를 테노치티클란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테노치티클란으로 가는 길에, 코르테스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몬테수마의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아즈텍의 통솔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원주민들은 환대하는 반면 어떤 원주민들은 다짜고짜 기습하기 일쑤였고, 그중 가장 위험했던 것은 틀락스칼라와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후 틀락스칼라들은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맹이 된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던 코르테스는 평소보다 많은 아즈텍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아즈텍의 동맹도시 촐룰라에 도착한다. 코르테스는 여기서 물자를 보충할 계획이었지만, 촐룰라가 이상할 정도로 요새화되어있는 것을 경계한 틀락스칼라인들은 반대한다. 또한 몬테수마의 사절이 말했던 바와는 달리, 도시의 지도자는 코르테스를 환영하러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말린체가 코르테스에게 촐룰라는 사실 스페인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코르테스는 더 이상 확인같은 건 하지 않고 촐룰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는 촐룰라 학살로 이어진다.[4]

요컨데, '처음 본 백인에 놀란 원주민들은 그들을 신으로 여겼으며,' 콩키스타도르들은 환대를 받으며 편안하게 테노치티클란으로 가서 아즈텍을 멸망시켰다. 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원주민들은 여느 원주민들이 그러하듯이 이방인에게 적개감을 느꼈으며, 이를 전투로 해결하려 했다. 심지어 코르테스 이전에 이미 원주민들은 백인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또한 콩키스타도르들도 자신들이 금을 약탈하려 여기 왔다는 사실을 딱히 숨기지 않았다.

콩키스타도르들이 신으로 환대받으며 테노치티클란으로 향했다는 잘못된 지식은 사실 복합적인 요소와 정보의 왜곡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전설인데, 우선 몬테수마가 콩키스타도르들에게 환대하는 듯한 서신을 보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서신이 코르테스가 아즈텍 부족들을 개처바르면서 테노치티클란으로 향하는 중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는 탐욕스러운 신을 환대하는 것이 아닌, 정복자에게 보내는 굴복으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또한 코르테스 자신도, 아즈텍 정복의 정당화와 스페인 내에서의 입지 향상을 위해, 자신의 행적을 필요 이상으로 장식했다. 코르테스가 카를 5세에게 보낸 서신에는 분명 '우리들을 신으로 여겼다.'라고 명기해 놓았다. 하지만 이 역시 코르테스가 몇 번의 군사적 승리를 거둔 뒤의 일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아즈텍에게 압재당하던 부족들은 정말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다. 아즈텍의 압제는 많은 부족들에게 불만을 안겨주었으며, 그런 아즈텍을 물리치려 하는 코르테스는 주변 부족들에게는 구원자처럼 비춰졌다. 콩키스타도르와 케찰코아틀을 연관짓기 시작한 건 바로 그런 부족들이었다. 사실 결과론적이지만 이런 점 때문에 코르테스는 징기스칸 같은 무리들과 엮기는 뭐하다. 흡사 한국인 입장에서는 훨씬 더 사악한 제국인 일본을 상대로 미국이 싸우면서 원폭 투하나 무차별 폭격을 좀 한 것에 비교할 수 있는 격이라. 당시 아즈텍은 그냥 지역 깡패였다.

촐룰라를 불태운 코르테스는 드디어 테노치티클란에 도착해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에게 환대받았다.[5] 그러나 코르테스는 몬테수마와 대면하자 그를 인질로 잡고 위협해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를 점거하고 황금을 받아냈으나 점거 상태가 지속되던 중 아즈텍 병사들의 기습에 포위당하게 된다.[6] 끊임없이 몰려드는 아즈텍 전사 수만 명을 상대로 수백 명에 불과한 용맹스러운 콩키스타도르를 지휘해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전멸하리라는 판단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키로 결정하나 야음을 틈타 몰래 이동하던 코르테스의 군대는 물을 긷던 아즈텍 여인에게 발각되고 곧 전투와 도주가 혼재된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콩키스타도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획됐고 코르테스도 끌려갈 뻔한 위기를 삼회나 겪는 대패한('슬픔의 밤', 1520.6.30) 때 천만다행으로, 아즈텍에는 애석하게도 조선 분야에 전문 기술이 있는 로페스는 생존해 후일 테노치티틀란 재공략 핵심인이 된다.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신도주할 때 병사들은 소지할 금은보화 양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려 많은 보물을 품 속에 넣은 자는 동작이 굼뜨게 되어 거의 다 죽었다. 그나마 생존자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나온 보물은 재기하려는 군자금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모두 코르테스에게 압수됐다. 안습. 후퇴는 테노치티틀란에서 끝나지 않고 백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베라크루즈까지 이어졌다. 이자들은 아즈텍의 추격자들뿐만 아니라 아즈텍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주변 부족들의 공격까지 뚫으면서 나가야 했다. 이 난관을 코르테스는 관우의 기세로 돌파한다. 실제로 코르테스가 승마한 채 적진에 단신으로 돌격해 창으로 적장을 꿰뚫은 덕에 전투를 반전케 한 적이 수차 있었다. 흠좀무. 아즈텍의 추격을 단념케 한 오툼바 전투도 그렇게 승리했다. 코르테스와 그자의 직속 기사들은 각종 무기에 능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정확한 투창 실력이 있었고 의심스럽지만, 그자들은 아즈텍의 유혈이 낭자한 의식인 인신공양을 목도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신전을 향해 대포를 발사해 의식을 다 때려엎고서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들과 경호병들을 사살하고 의식의 제물로 희생될 예정이였던 1만 명이 넘는 아즈텍인을 살려내 귀가케 했고 얼마 후 아즈텍 원주민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코르테스는 이후 사재를 털어 자국에서 돼지를 가져와서 피의 의식을 금지케 하는 대신 돼지를 길러서 잡아먹게끔 명했다. 미화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신뢰를 얻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다[7].

베라크루즈에서는 스페인의 쿠바 식민지 총독이 보낸 진압군이 와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아즈텍에서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사기 역시 바닥을 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남은 소규모의 병력을 규합해, 같은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놀랍게도 승리를 거뒀다. 게다가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자신의 정복군에 합류시킴으로써 귀중한 병력까지 보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 정복이 완전한 중앙통제식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현지 정복자들이 각자 국왕으로부터 받은 허가를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복자들은 아메리카에서 현지인과 창칼로 싸워야했을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왕실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다른 정복자들과도 정당성을 다퉈야 했다. 오늘날 코르테스가 남긴 편지들은 그의 노회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료로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래 틀락스칼라는 물론이거니와 동맹 부족은 물론이고, 아즈텍 제국의 황족을 위시한 유력 귀족들도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등 포섭 시도를 했는데 이런 점은 황제와 그 처첩을 능욕한 피사로의 무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전열을 재정비한 코르테스에게 슬픔의 밤으로 당한 학살을 본국에 호소함으로써 얻은 증원군까지 도착하였다. 아즈텍을 상대로 재공세에 나선 그는 먼저 아즈텍을 둘러싼 주위 부족들을 상대로 정치공세를 편다. 아즈텍은 무력으로 주위 부족을 식민화하여 조공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인신공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한 오랜 반감에 억눌려 있었고, 코르테스는 그 균열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이간질, 혹은 매수(아즈텍에 대한 약탈권을 보장)하여 여러 현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원주민병력을 지원받았다. 이 시기에 본국에서 파병되어 온 인원 중 누군가가 천연두 바이러스를 아메리카에 퍼뜨렸다. 이에 아즈텍인들이 천연두로 인해 수없이 죽어갔으나, 콩키스타도르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아즈텍의 인구뿐만 아니라 사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한 정복군은 원주민을 동원해 내륙에서 만든 배를 호수에 띄워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했다. 당시 아즈텍의 배는 카누밖에 없었으므로 정복군의 군함이 상륙해오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나중에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하고 방어가 쉬운 내륙으로 이동해 분투를 이어가지만 결국 멸망당하고 만다. 총인구 500만, 수도 20만[8]의 거대한 제국이 코르테스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만 것이다.

3. 말년과 최후

1521년, 아즈텍을 무너뜨리고 멕시코를 건설한 코르테스는 한동안 떵떵거리며 잘 지냈다. 당시 본국 에스파냐는 한창 정권이 교체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던지라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일까지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야심만만한 젊은 새 국왕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취임하자마자 곧장 내전과 대프랑스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더더욱 신대륙에 신경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1522년 코르테스는 공식적으로 테노치티틀란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런 이유로, 코르테스는 1526년까지 멕시코와 쿠바에서 왕과 다름없이 지냈다. 그리고 1519년에서 152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무용담과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서한을 새 국왕에게 송달했다. 이 기록은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 아즈텍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는지 밝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비록 그것이 정복자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한계를 지적받고는 있지만.

하지만 처음에는 전쟁에 여념이 없어 그저 코르테스가 보내오는 막대한 공물에 만족했던 카를 5세도 전쟁이 일단락되고 나자 슬슬 코르테스의 위치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1526년 코르테스를 월권 혐의로 전격 파면했다.

당연히 코르테스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지만, 자신을 파면한 카를 5세는 시시한 쿠바 원정대나 아즈텍인들 따위와는 현격하게 격이 달랐다. 그는 스페인 본토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은 데다 이탈리아까지 석권 중인, 당대 유럽 최강의 패자였던 것이다. 파면에 대한 항거는 곧 대규모의 스페인 최정예 군대와의 전투, 즉 죽음을 의미했다.

별 수 없이 일단 귀국길에 오른 코르테스는 왕을 접견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왕의 환심을 얻으려 했다. 코르테스의 호방함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카를 국왕은 코르테스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코르테스는 멕시코로 돌아가 1540년까지 다시 10년 이상 총독으로 군림하며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1540년, 코르테스는 예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럽초콜릿을 처음으로 전파했다. 그는 드넓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자신이 당연히 큰 환대를 받으리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카를 5세의 태도는 냉담했다.

더 이상 코르테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카를 5세는 그에게 두번 다시 신대륙으로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그의 수많은 정적에게 시달려야 했다. 코르테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황제에게 지위와 연금을 달라고 탄원했다. 이를 위한 알현의 와중에 카를 5세가 코르테스에게 신상을 밝히라고 말하자 코르테스는 말했다.


전 한낱 사람입니다. 폐하의 어떤 조상들이 물려준 영토보다도 넓은 영토를 폐하께 남긴.


결국 카를 5세는 이후 독일에서의 신구교 전쟁의 장교로 코르테스를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여기서 성공가도를 걷는다. 그러자 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북아프리카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으나 알제리 공략이 폭풍으로 수포로 돌아가자 그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코르테스는 고국의 계속되는 냉대에 멕시코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세비야에서 설사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기묘하게도 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프란시스코 피사로7촌 관계의 친척이다.[9][10]

그는 두 번 결혼했고(첫 번째 부인은 사별했고, 말린체와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말린체까지 합하면 실질적 아내는 3명이다.) 6남 6녀를 두었는데, 이중 말린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르틴 코르테스[11]는 역사상 최초의 메스티조이다. 이 메스티조 마르틴 코르테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적자로 인정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코르테스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일단 코르테스가 교황에게 적자로 인정해달라고 탄원을 했기도 했을 뿐더러, 당시 교황이었던 클라멘스 7세 역시 사생아였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남긴 엄청난 양의 영지를 다른 형제들과 나눠가질 수 있었는데...뉴멕시코의 왕 되겠다고 형제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스페인 군대에게 개털리고 땅을 빼앗긴다. 원래 사형당해야만 했으나 아버지의 후광 덕에 목숨만은 건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필리프 2세 휘하의 군인으로 복무하다 스페인에서 죽는다. 스페인 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걸로 보아, 아버지와는 달리 고국에서 인정받았던 모양.

4. 학살자인가?

4.1. 학살자가 아니다

학살자라고 까이지만 정작 코르테스에게 책임을 물만한 학살은 없다. 일단 코르테스는 빈약한 수의 사병(혹은 회유된 탈영병)이나 친척들만으로 구성된 소수의 병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력조차 없었고 딱히 학살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의 책임이 약간이나마 있는 학살은 초룰라(cholura) 학살이나 톡스카틀 축제의 학살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초룰라 시민들이 환대하는 척 하고 함정을 파고 있었기에 공격한 것이며, 후자는 코르테스가 아닌, 그가 나르바도와 면담하러 간 동안 지휘권을 받았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현장판단으로 인한 학살이었다.

승자측의 기록으로 인한 역사 왜곡이라 하기도 어려운 게, 코르테스는 후대의 이민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유럽인들처럼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닌, 충분히 위협스러우며 신중히 대해야 할 존재로 보았다. 이는 아즈텍 함락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이 코르테스를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아즈텍에 승리를 거두게 해준 요인이었다.

4.2. 학살자이다

그러나 원주민을 인간으로 보았다는 것이 학살자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초롤라의 경우, 아즈텍이 함정을 팠다는 내용은 당대의 전투기록이 아니라, 이 후 코르테스 개인의 주장에 의거한다.(다만 코르테스는 카를 5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원주민들의 직접 쓴, 나후아틀어로 써진 증언을 첨부했다. 물론 말린체나 아구엘라 등, 코르테스의 원주민 친구들이 적당히 사실을 왜곡했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코르테스 나름대로는 객관성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아즈텍의 전투방식이나 아즈텍에 대한 스페인쪽의 지식수준으로 보았을 때, 실제 아즈텍 측이 함정을 팠고, 그 사실을 스페인 측이 미리 알았을지는 의심스럽다.

코르테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같이 간 틀락스칼라인들(통역 담당인 말린체라는 기록도 있다.)이 알려주었다. 틀락스칼라인들이 아즈텍의 동맹인 촐룰라를 어떤 식으로 제거하고 싶어서 음모를 꾸몄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코르테스의 책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작다면 모를까 책임을 물을만 한 학살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이다. 코르테스 자신이 무장집단을 이끌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 간 정복자(또는 침략자)인 이상 그에 관련된 모든 사건에서 생겨난 모든 죽음에 대하여 코르테스에게는 명백한 책임이 있다

특히 톡스카틀 축제 학살의 경우 코르테스가 지휘권을 위임한 현장 지휘관이 저지른 학살이면 그 상위 지휘관였던 코르테스에게 당연히 감독 책임이 돌아가야 할 문제다. 그리고 초룰라 시민들이 환대하는 척 하면서 함정을 판 것이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코르테스에게는 남의 나라를 공격해서 재산을 약탈할 권리가 있고, 초룰라 시민들에게는 침략자에 맞설 권리도 없다는 것인가? 코르테스가 원주민을 위협적이고 신중히 대해야 할 상대로 대했다는 것은 그저 그가 교활하고 신중한 침략자였다는 의미일 뿐이지, 그가 원주민을 존중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5. 기타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등장인물인 코르테스 백작은 바로 이 코르테스가 모티브다.[12]

신대륙의 비밀인 5대 원소를 찾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지만 같은 10인 귀족인 몬토로에게 배신을 당해 석화되고 만다.

닐 영의 곡인 Cortez The Killer는 이 인간의 행적을 까는 노래다.

근육맨에서는 서양인 특유의 거체로 강철갑옷을 입고 잉카제국 군사들을 죄다 레슬링 기슬로 관광보내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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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옛날 스페인에서는 지폐 모델로 쓰인 적도 있다.
  • [Conquistador는] 스페인어로 〈정복자〉를 의미하는데 특히 16세기 前半에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人을 지칭한다. 그자들이 정복해 新영토를 획득하고 황금을 위시해 재산을 탐욕스럽게 구하면서 우상숭배나 인신 공물을 隨伴한 主敎를 절멸케 하고 기독교를 미지의 세계人들에게 전한다는 使命과 현세다운 이익 渴望과 복음 전도 열의를 自負한 배경에는 기독교도인 스페인人이 약 8세기에 걸쳐서 회교도를 상대로 국토를 회복코자 전쟁해 온 履歷을 간과할 수 없다. 콘키스타도르가 한 정복은 국왕의 인가가 필요했는데 그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건 사사로운 사업으로, 국가의 재정상 원조는 거의 없어서 군대 규모는 작고 정복 자체가 투기성이 강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당초 병사 약 600명, 프란체스코 피자로는 병사 약 200명을 이끌고 각각 왕국 아스테카와 제국 잉카의 대부대를 상대로 싸워서 멸망케 하고 막대한 재산을 입수했으나 에르난도 데 소트의 플로리다 원정처럼 비참한 결과로 끝난 예도 적지 않았고 그자들을 다룬 기사문학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정복이 완료되자 왕은 콘키스타도르에 전리품의 5분의 1을 구하고 결국에는 정복지에 왕권을 확립코자 관리를 파견하고 콘키스타도르의 권리 삭감을 시작했다. 콘키스타도르는 당연히 그런 왕의 정책에 반대하고 페루에서의 곤살로 피자로처럼 공공연히 반란하는 자도 적지 않았던 데다가 엔코미엔다를 둘러싸고 양자는 격렬히 대립했으나 16세기 후반 페리페 2세 시대가 되면 콘키스타도르는 식민자로서 식민지 행정 기구에 흡수되고 신의 영광 그리고 영예와 부를 구해 종횡무진으로 난동한 그자들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콘키스타도르를 다룬 史上 평가는 인디오에게 名敎했다는 〈정신상 정복〉의 의의를 중시해 콘키스타도르를 賞讚하고 정복을 긍정하는 평가와 <정신상 정복>은 <軍事上 정복>하려는 구실에 불과할 뿐 콘키스타도르는 모두 약탈과 살육을 일삼는 금수 같은 놈이라고 하여 정복을 부정하고 탄핵하는 평가로 크게 이분돼 예리하게 대립하는데 모두 사실 중 일면만 강조로 객관성 평가라고는 단정키 곤란하며 그자들을 초인도 금수도 아닌 16세기 歐洲史의 특이한 상황에서 생활한 人으로서 고찰해야 가하다.
  • [3] 그런 부족을 굴복케 한 코르테스는 아주 약간 금과, 금보다 중요한 물질을 공물로 받게 된다. 말린체를.
  • [4] 여기까지가 코르테스의 기록. 틀락스칼라는 자신들의 사신이 촐룰라에 갔다가 고문받은 것에 대한 복수를 코르테스가 해 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은 틀락스칼라인들이 코르테스를 부추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 [5] 여기서 몬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요'라는 의미의 환영사를 하하지만 이게 신앙에서 비롯된건지 공포스러운 침략자를 달래고자 한 건지는 논란거리다.
  • [6] 일설로는, 상황을 진정시케 해 보라고 테라스에 내보낸 몬테수마마저 오히려 아즈텍 시민들이 야유하면서 던진 돌에 맞아 기절했다.
  • [7]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인신공양 의식에 도덕상 분개한 것이 딱히 믿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유럽계 침략자의 상당수는 기독교도로서 도덕 관념이 있어서 기독교리가 금지하는 인신공양 악습에서는 충분히 분개할 만한 처지였지만, (이교도인)원주민을 살해하고 그 재물 약탈은 기독교리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즉, 유럽계 침략자들은 현대인과 같은 도덕 관념이 없는게 아니라, 도덕 관념이 현대인과는 다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문제는 유럽인들이 왜 하필 자신들의 종교를 내세워 침략에 나섰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종교(당시 유럽의 기독교)에 기반한 당대의 도덕은 오히려 침략 행태를 정당화 해 주는 도구로 작동했던 것. 이 구조가 고도화 되어 탄생한 개념이 바로 자신들은 이익을 위해 침략을 하는 게 아니라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고 보호하려고 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하는 백인의 짐이다.
  • [8] 당시 유럽에도 이런 대도시는 없었다. 게다가 고기로 먹을 수 있는 짐승도 없어서 식인으로 인구를 부양해야 했던 곳에서 저런 인구라면 놀라운 거다.
  • [9]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이고, 피사로의 증조부인 Fernando or Hernándo Alonso de Hinojosa가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이다.
  • [10] 그런데 딱히 신기하다고까지 할 일은 아닌게,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관계로 얽히고 섥힌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 [11] 첫 부인에게서 얻은 마르틴 코르테스와 동명이인이다.
  • [12] 풀네임이 똑같은 걸 보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