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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4세

last modified: 2015-03-23 00:51:52 Contributors

역대 잉글랜드 국왕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랭커스터 왕조
헨리 6세 에드워드 4세 헨리 6세

역대 잉글랜드 국왕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요크 왕조
헨리 6세 에드워드 4세 에드워드 5세


왕호 에드워드 4세
(Edward Ⅳ of England)
부친 제3대 요크공작 리처드
모후 세실리 네빌
생몰년도 1442년 4월 28일 ~ 1483년 4월 9일
재위기간 1461년 3월 4일 - 1470년 10월 3일
1471년 4월 11일 - 1483년 4월 9일(복위)
서명

Contents

1. 개요
2. 리처드 네빌과의 알력
3. 위기와 반전
4. 말년

1. 개요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1]이다.[2] 그의 아버지 리처드는 에드워드 3세의 5남 요크 공작 에드워드의 손자였고 어머니 세실리 네빌은 에드워드 3세의 삼남 클라렌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이었다. 1450년대에 헨리 6세에 대한 반란을 이끌었고 1460년 지지자들에 의해 헨리 6세의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12월 아버지 리처드가 전사하자 에드워드 4세는 웨일스에서 군대를 모아 헨리 6세의 지지자들을 무찔렀다.

2. 리처드 네빌과의 알력

그대로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즉위한 에드워드 4세는 랭카스터 가문을 소탕하는데 열을 올렸다. 원래 에드워드 4세는 별로 신뢰가 없었고 싸움, 술, 여자, 겉치레에만 관심이 있던 한량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계기는 킹메이커였던 사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덕분이었는데 실제로 에드워드 4세 집권 초기 가장 큰 세력을 누렸다. 그러나 잘생긴 외모와 매력 때문에 많은 친구들을 얻게 되자 리처드 네벨을 떨쳐 내려고 시도했다. 1464년 5월, 젊은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몰래 결혼하여 자신을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려던 리처드 네빌 및 다른 요크 가문 귀족들의 분로를 샀다.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가 첫 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및 그녀의 다섯 남자 형제와 일곱 자매를 총애하여 네빌 일가에 맞설 만한 세력을 형성했다.

리처드 네빌은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1468년 여동생 마거릿이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결혼식을 올리자 에드워드 4세는 매제 샤를과 함께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3. 위기와 반전

하지만 프랑스 왕 루이 11세고무와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선 리처드 네빌은 1469년 7월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는 기염을 토했고 그대로 구금했다. 하지만 이미 에드워드 4세의 지지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오랫동안 가두진 못하고 그해 10월 석방했다. 리처드 네빌은 후환을 두려워 해서 프랑스로 망명하여 랭카스터 가문, 루이 11세와 손을 잡고 1470년 9월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이에 놀란 에드워드 4세는 지지자들과 함께 10월 네덜란드로 망명했는데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아 1471년 3월 동생인 글러스터 공작 리처드[3]와 함께 런던을 탈환하고 4월 바넛 전투에서 리처드 네빌을 죽였다. 같은 날 헨리 6세의 왕비 마르그리트가 외아들 에드워드를 이끌고 상륙했으나, 투크스베리에서 격파당하고 에드워드는 피살되었다. 이로써 남아 있던 랭카스터 가문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처형되었으며 그 후 헨리 6세를 죽인 에드워드 4세는 평생을 안전하게 지냈다.

4. 말년

1475년 프랑스 원정을 했는데 피키니 조약으로 철수하는 대신 금화 7만 5천 크라운을 일시불로 우선 받고 매년 5만 크라운을 연공으로 받기로 협약했다. 그의 재위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법 제도를 개선했는데 웨일스와 웨일스 경계 지방에는 왕실영지를 토대로 위원회를 만들어 아직 갓난아이였던 자신의 후계자 에드워드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잉글랜드 영토였지만 자주 말썽을 부리던 웨일스는 완전히 잉글랜드에 복속되게 되었다. 그는 윈저에 세인트 조지 성당을 다시 짓고 서적을 대량으로 수집했는데 이 서적들은 나중에 대영박물관이 자랑하는 구 왕립 도서관의 기틀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난잡한 혼인 관계는 그가 죽은 후 그의 동생 리처드에게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고 아들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형제가 위기에 처하는 데 큰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1482년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피키니 조약과 연공 상납을 거부하자 다시 프랑스 침공을 계획했으나, 난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병이 들어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서 2남 5녀를 보았으며 6명의 사생아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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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위의 형들이 일찍 죽어 사실상 장남이었다.
  • [2] 당대부터 요크 공작 리처드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떠돌았었는데, 2014년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 3세의 유전자를 조사해 본 결과 요크 가문과 부계 혈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와버렸다. 또 누이 2명도 리처드 3세와 유전자가 99.9% 일치하니 누이들도 요크 가문의 혈통이 아닌 셈 (...)
  • [3] 훗날의 리처드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