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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last modified: 2015-04-11 23:25:42 Contributors


山縣有朋 1838.06.14~1922.02.01

역대 일본 총리
2대 로다 기요타카 3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4대 츠카타 마사요시
8대 오쿠마 시게노부 9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10대 이토 히로부미

Contents

1. 내용
2.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 내용

이토 히로부미, 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長州) 3존"으로 불리는 인물.


1880년 리즈시절. 유해진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최초의 총리. 서양의 군사제도를 받아들이는데 힘을 쏟았으며, 1894년 청일전쟁조선에 주둔하는 제1사령관, 1898년 원수가 되었다. 1903∼1909년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번갈아 추밀원 의장직을 맡았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공작 작위를 받았다.


추밀원 의장 시절.

조선 강점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바는 없으나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의 뒤에는 이 사람이 있으며, 후일 일본 군부와 정계 양측에 걸쳐 자신의 파벌을 거대하게 구축하여 메이지다이쇼 연간의 일본 정치판을 막후에서 장악하여 뒤흔들었다. 일본 근대를 지배한 진정한 흑막.

근대 일본의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며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창안했다. 주권선은 일본의 주권이 행사되는 선으로 일본 본토와 오가사와라 제도, 오키나와이고 이익선은 주권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선으로 조선 반도와 대만, 사할린 등이었다. 조선대만을 병합한 이후에는 조선대만이 주권선으로 편입되고 이익선은 만주필리핀으로 확장되었다.


총리대신 취임 후.

일본의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사실상 일본군국주의로 몰고간 중심 인물로 볼 수 있다. 천황의 충량한 신민들아, 나라에 절대적으로 충성하여라라고 요약할 수 있는 군인칙유(1882년)와 교육칙어(1890년)는 형식상 메이지 덴노의 이름으로 선포하였으나 그 배후에는 야마가타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교육칙어는 야마가타 자신이 이끌던 1차 내각에서 칙령으로 반포된 것으로, 당시 자유주의 정치운동을 봉쇄하려는 반동적인 목적에 따라 탄생한 것이었다. 메이지 덴노의 이름으로 발표된 조칙이지만, 천황 절대주의를 신봉하던 야마가타가 정당제를 비롯한 서양식 입헌정치를 일본에 적용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그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차 야마가타 내각 때인 1900년에는 치안경찰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청일전쟁 이후 조성된 호황기에 따른 노동쟁의의 증가세와 반정부적 기조를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후 치안유지법이란 형태로 진화해 일본사회주의 세력을 작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1]

이와 동시에 군부대신 무관제 또한 칙령에 따라 제정되었는데, 이는 내각을 구성하는 2명의 군부대신, 즉 육군해군대신 임명에 있어 민간인 대신 현역 육/해군 대/중장만으로 한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군사행정의 특수성에 따라 민간참여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점과 군부대신의 권한에 일반 업무와 함께 군령사항이 포함되는 것이라는 야마가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인데, 이로 인해 일본 내각은 군부의 이익에 따라 끌려다니는 꼴을 면하지 못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새로 조직된 내각이 맘에 안 들면 군부는 군부대신 후보를 내지 않았다. 당연히 빈 자리가 남아있는 내각은 정상적으로 출범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군부의 요구사항이 충족된 후에야 군부대신이 임명되어 내각이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2] 그리고 이 패턴이 패전 전까지 거의 무한 반복된다(…). 결국 전시에는 아예 군인이 수상을 겸직하는 상태가 패전 직전까지 이어진다.

입헌정우회라는 정당 비슷한 것을 만든 것 외에는 평생 파벌을 만들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이토 히로부미와는 달리, '조슈벌'로 불리는 파벌의 영수로서 활동했다. 당장에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추천한 인물이 그럭저럭 인재는 되었으므로 괜찮았지만, 나중에 이 파벌은 일본 군부 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훗날 일본이 각종 군사행동에서 희대의 병크를 콤보로 터뜨리는데 주요한 원인이 된다. 이래서 친목질은 안 되는 거지

그리고 평소 공금횡령을 하는 데 1인자였다. 한마디로 내 돈은 내 돈이고 국가의 돈도 내 돈. 그래서 엄청난 액수의 공금을 횡령해서 사적으로 상인에게 투자하라고 대출했다가, 이 상인이 싹 날려먹으니 책임지라고 협박해서 이 상인이 공금횡령을 사죄하며 자살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걸 보면 횡령 뒤에 자기 손해 안 나게 뒷감당하는 솜씨도 제법이었는 듯하다.

그가 정치계에서 물러나게 된 건 뜻밖에도 히로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문제 때문이었다. 야마가타가 지지한 규수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3]가 아니라, 반대파인 사츠마 파가 지지하는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된 것이다. 그러자 야마가타는 1920년에 나가코 여왕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을 근거로, 나가코 여왕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4]에게 "황실을 위해 약혼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그런 기사가 나온 것부터가 야마가타의 책략으로 본 일본 국민들은 나가코 여왕을 동정, 야마가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했다고 한다.[5] 결국 야마가타는 이 소동이 일단락되자 공직에서 사퇴하여 은둔했으며, 나가코 여왕은 무사히 히로히토 황태자와 결혼했다.[6]

참고로 그는 이보다 몇년 전에 있었던, 영친왕의 신붓감 후보 선정 건에도 관여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이 야마가타를 혼내주겠다며 분노했다고.

2.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바람의 검심에도 등장. 비중있는 역할로 역사상 이미지와는 달리 꽤나 사람좋게 나온다. 다만 오쿠보 도시미치 사후 1급 유신지사는 다 없어지고 2, 3류 유신지사만 남았다고 간접적으로 까였다.(…) 실제 역사 상으로는 거기서 거기인 것을 이때의 성우는 즈타니 세이지(스튜디오 갤럽 시절) → 네코 하리이(스튜디오 딘 시절)/온영삼.

다만 실사영화판에서는 켄신이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자 비웃음과 함께 "전부 유신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라며 화를 내는등 원작과 다르게 속물에 가깝게 등장한다. 사실 실제 역사대로 보자면 이게 맞는 고증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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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치안유지법은 현재 대한민국 국가보안법의 할아버지 격 정도 된다.
  • [2] 사실상 육군과 해군 고위장성들이 정권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게 된것이다. 이를 무기로 군부는 민간정치인들을 압도하면서 군비확장과 대외적 군사행동(전쟁) 등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무제한적으로 관철시킨다.
  • [3] 화족 이치죠 사네테루(一條實輝) 공작의 3녀. 황태자비에서 탈락한 후, 방계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伏見宮薄儀) 왕에게 시집갔다.
  • [4] 독립운동가 조명하 열사의 의거로 죽었다.
  • [5] 그나마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고 군인 출신이어서 다행이었지, 민간인 출신이었으면 하라 타카시처럼 암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하라 타카시는 이 사건에서 야마가타를 도와주었다가 하찮은 민간인이 천황가의 혼인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결국 암살당했다.
  • [6] 사실, 궁중모중대사건의 진행과정은 본문의 기술보다 훨씬 복잡하다. 나가코 여왕색맹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것은 야마가타가 아니라 사이온지 긴모치였다. 야마가타는 사이온지가 개인 면담에서 나가코 여왕의 색맹 가능성을 제기하자 비로소 반대에 나섰다. 그 이전에 야마가타는 도키코의 어머니가 초슈 모오리 가문 출신이었는데도 황태자비 선정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고. 심지어 시마즈 가문과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자신조차, 의혹 초기 단계에서는 "황실의 번영을 위해서 약혼을 취소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커진 것은, 야마가타라면 무조건 싫어했던 사다코 황후가, 야마가타가 뒤늦게 색맹 가능성을 제기하자 이것을 황실에 대한 무례로 간주하고 정면으로 반발하면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