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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last modified: 2015-02-22 11:28:07 Contributors

축구장은 그의 발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발은 더욱 커졌다.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1]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Alfredo Di Stéfano
생년월일 1926년 7월 4일
사망일 2014년 7월 7일(현지 기준)
별칭 금빛 화살(Saeta Rubia)
국적 아르헨티나/스페인/콜롬비아(3중 국적)
출신지 부에노스아이레스
포지션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골키퍼
신장 178cm
프로 입단 1943년, CA 리버 플레이트
소속 클럽 CA 리버 플레이트(1943~1949)
CA 우라칸(임대)(1946~1947)
CD 로스 미요나리오스(1949~1953)
레알 마드리드 CF(1953~1964)
RCD 에스파뇰(1964~1966)
국가대표 6경기 6골(아르헨티나)
31경기 23골(스페인)

1956 Ballond'or
수상
스탠리 매튜스
2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3위
몽 코파
1957 Ballond'or
수상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2위
빌리 라이트
3위
몽 코파
1959 Ballond'or
수상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2위
몽 코파
3위
찰스


현역 시절


말년의 모습. 오오 회장님.

Contents

1. 소개
2. 남미에서
3. 디 스테파노 사태
4. 레알 마드리드 시절
5. 유러피언 컵
6.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
7. 월드컵 불운
8. 그에 대한 찬사


1. 소개


펠레 이전 축구의 상징

1950년대 축구계에 강림하여, 현재 게 '전설'이라 불리우는 사람

지금 우리가 보고 즐기고 있는 현대 축구의 발판을 만드는 데 큰 업적을 세운 인물

축구 선수 및 축구 감독, 레알 마드리드 명예 회장.
3개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3개의 국가에서 빠짐 없이 레전드로 기억되고 있는 불세출의 공격수(혹은 미드필더)이자 세계 축구사를 통틀어 베스트 일레븐을 꼽을 때 결코 빠지지 않는, 60년대 이후 수많은 레전드 플레이어들이 롤 모델로 삼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선수.

그를 근대 축구를 정립한 선수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는 현대 토털 축구의 키워드 중 하나인 포지션 파괴를 1950년대에 앞서 보여줬던 선구자이기도 하다. 디 스테파노가 있는 팀은 포지션 당 2명의 선수가 있는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그라운드 전체를 커버하며 뛰어다니는 선수였다. 이런 범용성 때문에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상징처럼 따라다닌다.

때문에 주 포지션을 하나로 단정짓기가 상당히 곤란한데, 당대 축구의 특성상 그에게도 공격수가 최고의 포지션이긴 했으나 미드필더로서도 매우 많은 경기를 소화했고(공격형 미드필더는 물론 중앙 미드필더까지도 많이 담당했다) 특히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미드필더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로 활약하던 때에 거의 미드필더로 출전했던 탓으로 보인다.

챔피언스 리그를 지금에 위치에 올라가게 만드는 데에는 프런트 진들의 노력도 있지만 대회가 정립되는 초창기 '디 스테파노'라는 슈퍼 스타의 미친 듯한 활약도 주요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현대 클럽 축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여튼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다.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뽑으면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5명으로 꼽히는 일이 잦다. 그리고 이 멤버에 변동이 있을 땐 보통 디 스테파노가 빠지곤 한다.[2]

2002년에 국제 축구 연맹(FIFA)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순위에서 위 4명과 미셸 플라티니에 이어 6위에 랭크되었다. 리스트를 찾아 보면 알겠지만 위 아래로 월드컵에서 한가락 했던 선수들이 100명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월드컵 활약이 '미미'했던 선수는 심심찮게 있어도 '경력 자체가 없는' 선수는 한 손으로 꼽아도 될 정도이다. 그 와중에 디 스테파노는 그 '월드컵 경력 자체가 없는' 선수로서 전체 6위라는 최상위의 평가를 받은 것. 발롱 도르만 4번 연속으로 먹어 치운 리오넬 메시조차도 그 놈의 월드컵 때문에 평가에서 발목을 잡히는 마당에, 고작 A 매치 30경기에 월드컵 0경기짜리 국가 대표 경력을 가지고 이 정도 평가를 받으려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커리어 스탯이나 수상 경력 같은 숫자 놀음에서 확인할 수 없는 '실력'적인 부분으로써 다른 선수들과 급을 달리 하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 월드컵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긴 하나 그 한계에 도달한 유일한 선수이다.


2014년 7월 7일 심장마비로 별세. 베르나베우 인근 거리를 걷던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머나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

2. 남미에서

모국 아르헨티나의 명문 구단 리베르 플레이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약 10여년을 남미 리그에서만 커리어를 쌓았다. 그가 남미에서 쌓은 스탯을 보면

리베르 플레이트 65경기 49골
CA 우라칸 25경기 10골
로스 미요나리오스 102경기 88골

이 정도면 충분히 굇수급이지 않을까 싶지만... 본편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남미 대륙에서의 활약을 눈여겨본 스페인에서 그에게 러브 콜을 날리기에 이른다.

3. 디 스테파노 사태

결과부터 말해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흰 유니폼을 입고 전설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그런데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보면...

우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남미 시절 계약에 대해서 먼저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리베르 플레이트에 소속된 선수였다.[3] 하지만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혼란에 직면했고, 선수들의 주급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도 리베르 플레이트를 탈퇴했다.[4]

그때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것이 한참 경제 성장과 군사 정권의 지지와 함께 선수를 끌어모으고 있던 콜롬비아 리그의 CD 로스 미요나리오스 였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는 이곳에서 맹활약을 해서, 심지어 콜롬비아 축구 협회의 요청으로 콜롬비아의 국적을 취득하고 콜롬비아 국가 대표로까지 발탁되었다. 하지만, 콜롬비아 축구 협회는 FIFA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고, 공식적인 A 매치에서 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콜롬비아 리그는 급하게 형성된 것인 만큼 급격하게 몰락했다. 1950년대 초반 콜롬비아의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로스 미요나리오스도 유럽 순회를 하면서 돈 벌이를 하러 다녀야 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로서도 콜롬비아를 떠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로스 미요나리오스가 앵벌이를 다닌 곳이 스페인이었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활약은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당시 스페인의 상황은 라디슬라오 쿠발라라는 슈퍼 스타를 등에 업은 바르셀로나가 독주하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까지 바르셀로나에 영입되면 독주 체제가 굳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양쪽 모두에게 있었다.

이때 바르셀로나는 남미 상황에 정통했던 변호사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카탈루냐인 라몬 트리아스 파르가스를 리베르 플레이트에 파견하여 이적 협상을 완료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의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라몬 트리아스 파르가스의 주장에 따르면 이 협상이 깨진 것은 바르셀로나의 내부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역시 콜롬비아에 파견되었던 바르셀로나의 이사 주젭 사미티에르[5]는 당시 콜롬비아에 있던 카탈루냐 인이자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라이벌이었던 구단 산타 페의 임원이었던 후안 부스케츠 바로의 도움을 얻었는데, 바로는 협상을 진행하는 것보다 방해하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6] 결국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 사이의 협상은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여하튼 바르셀로나는 리베르 플레이트와 단판을 지었고, 일단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던 디 스테파노는 무작정 스페인으로 날아왔다. 문제는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한 리베르 플레이트 역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으면 허용함이라는 조항을 달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협상을 허락한 FIFA 역시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모르고 허락을 한 것이다. 로스 미요나리오스는 이런 상황 전개에서 당연히 반발하였다.

결국 바르셀로나와 로스 미요나리오스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협상의 방해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바르셀로나 회장인 엔리크 마르티 카레토였다. 카레토는 디 스테파노 이적에 필요한 자금에 제약을 걸기 시작했다. 파르가스에 의하면 이 협상과정에서 카레토 회장이 미요나리오스에 지불할 의사가 있었던 돈은 1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 돈은 바르셀로나의 보드진이 허용한 2만달러의 절반이었으며, 로스 미요나리오스가 요구한 이적료 4만 달러+5천 달러[7]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파르가스는 이 차이를 1만 달러+옵션(친선 경기 개최 수익금 등)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카레토는 1만 달러에서 물러나지 않다면서 카레토를 비판했고, 이 과정에서 외부 압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 사이에 레알 마드리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협상을 해서 이적 동의를 받아내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이중 계약이 된 것이다.

이제 공은 스페인 축구 협회로 넘어갔다. 당시 축구 협회였던 스페인 축구 연합과 정부의 국민 스포츠 당은 일단 더 이상의 외국인 협상은 전면 금지시키고,[8] 디 스테파노와 바르셀로나 사이에 이루어진 개인 계약을 무효로 처리했다. 바르셀로나와 디 스테파노의 계약을 인정한다는 것은 디 스테파노가 리베르 플레이트 소속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건 복잡하게 꼬여 있는 계약을 결론내린다는 것이었는데 국민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연합이 모두 이걸 거부한 것이다. 이러면 디 스테파노 영입을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모두 못하게 되는 것인데, 당연히 두 팀 모두 반발하고 나섰다. 이걸로 스페인 내부에서도 3파전이 시작

이제 다시 상황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스페인 축구 협회와 정부의 국민 스포츠 당, 리베르 플레이트와 로스 미요나리오스, 그리고 FIFA와 콜롬비아 축구 협회가 뒤엉킨 어처구니없이 복잡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더구나 갑자기 잘만 뛰던 디 스테파노가 복잡한 상황에 자기도 당황했는지 좀 애매한 플레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비밀 협정을 맺고 태업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되지만,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 팬들 사이에서는 디 스테파노를 자신들의 슈퍼 스타 쿠발라와 비교를 하면서 굳이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불평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 상황에서 국제적 판단이 2개 나왔는데 리베르 플레이트가 소속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가 바르셀로나가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승인한 사건과, 그제서야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FIFA가 이전의 결정을 파기하고 모든 책임을 스페인 축구 협회로 떠넘긴 것이다.

이렇게 꼬인 상황이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협정을 맺었는데, 그 협정이 뭐냐 하면,
디 스테파노를 유벤투스로 이적시킨다내가 못 가지면 니도 못 가진다. 이적료만 회수하고 깽판라는 것이었다.

이에 다시 화들짝 놀란 것이 국민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협회였다. 앞의 전개를 생각해보자. 당시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에서 맹활약을 해서 국가 대표로 활동하다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활동하면서 콜롬비아 국적을 따고 콜롬비아 국가 대표로 활동한 세계 최고의 선수이다. 당시는 이런 식의 국적 이동과 대표 팀 출장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9] 스페인 입장에서는 굴러 들어온 국가 대표 스트라이커를 이탈리아에 넘겨주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전대미문의 판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4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소유권을 공유하고, 각각 1년씩 번갈아 가면서 뛴다라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반발한 것은 FC 바르셀로나, 그 중에서도 바르셀로나의 팬들이었다. 바르셀로나 팬들은 이 협정을 프랑코 정부의 모략으로 보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모독으로 인식했다. 또한 디 스테파노의 활약 역시 기대에 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협상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고, 바르셀로나는 돈을 받고 디 스테파노에 대한 권한을 레알 마드리드에 넘겨주었으며 카레토 회장을 포함한 임원들은 전원 사임했다.[10]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 바르셀로나에 이어서 리베르 플레이트에도 이적료는 지불하면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이적 소동은 겨우 마무리된다.

본문에 적힌 과정도, 파르가스의 주장, 관련된 매체, 각 언어별 위키피디아, 소개되는 책자마다 조금씩 다 다르고, 도대체 중앙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협회의 압박이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극렬 카탈루냐 민족주의자인 파르가스는 협상 단계에서 바르셀로나 회장과 이사까지 방해만 했고 전 과정에서 압박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하고 있지만 당사자의 주장이라서 좀 애매하고,[11] 바르셀로나와는 거리가 먼 측 혹은 대놓고 레알 마드리드 지지층에서는 이들은 바르셀로나 팬들이 초반에 디 스테파노의 활약이 기대에 못 미쳐서 디 스테파노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후 디 스테파노 사태가 FC 바르셀로나에 대한 프랑코 정부의 훼방의 증거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쟁점화된 것도 있으니 논란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4. 레알 마드리드 시절

한바탕 난리를 친 끝에 메렝게스의 흰 유니폼만을 입는 것이 확정된 디 스테파노는...
적응기? 그게 뭐임? 먹는 거임?이라 외치고는 다짜고짜 29골을 몰아치며 데뷔 시즌 피치치(프리메라 리가 득점왕 타이틀)를 가져감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의 3연패를 저지하고 트로피를 마드리드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해에 '칸타브리아의 광풍' 프란시스코 헨토를 영입한 레알 마드리드는 차곡차곡 스타 플레이어를 더해 주기 시작, 이른바 '저승사자 군단'을 결집시킨다. 1956년에는 '나폴레옹' 이몽 코파를 영입했고, 1957년에는 우루과이 역대 최고의 센터백 호세 산타마리아가 들어왔으며 결정타는 1958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파트너로 데려온 선수가 바로 '폭주하는 소령' 페렌츠 푸스카스. 세상엔 신도 부처도 없단 말인가 다 죽었어.[12][13]

이렇게 되자 스페인 땅에 레알 마드리드를, 아니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라는 악마의 조합을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 그 두 명을 최전방에 내세운 마드리드는 프리메라 리가 우승 8회(1954, 55, 57, 61, 62, 63, 64)를 거두었고, 디 스테파노는 그 와중에 피치치 5회(1954, 56, 57, 58, 59), 발롱도르 2회(1957, 1959)[14]를 달성했다. 라 리가 MVP 4회는 그저 부록일 뿐이다.

그렇게 1964년까지 마드리드의 모든 영광을 함께 하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가 찾아오자 RCD 에스파뇰로 이적한다.[15][16] 그리고 말년 중 말년에도 47경기 11골이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 후, 그 영광스러웠던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5. 유러피언 컵


이 사진 한 방에 설명 가능. 금빛 화살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어라.[17]

1955년, 드디어 유럽 대륙의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의 유러피언 컵, 즉 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가 시작된다. 축구 팬들은 스페인 무대를 먹어치워 버린 레알 마드리드가, 디 스테파노가 유럽 전역에서 얼마나 통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의 시선을 보냈고... 그 유명한 챔피언스 리그 5연패로 귀결되었다(1956, 57, 58, 59, 60).
그 중심에는 당연히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가 있었고, 디 스테파노는 그 와중에 득점왕 2회를 거머쥐었고, 특히 5년간 5번에 걸친(...) 결승전에서만 7골을 넣는 미친 활약을 보여주었으니 그에게 발롱 도르 2회 정도는 오히려 부족한 헌사였다.[18]

또한 1960년 4월 21일에 열린 유러피언 컵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 대회 100호 골을 득점했는데,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FC 바르셀로나'였다.

6.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

그가 마드리드에서만 쌓은 커리어만 봐도,
라 리가 우승 8회,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챔피언스 리그 우승 5회.
피치치 5회, 라 리가 MVP 4회,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2회, 발롱 도르 2회...

... 눈 돌아간다.
특히나 마드리드에서의 스탯을 보자. 라 리가에서만 282경기 227골을 넣었으며, 이런 저런 대회를 다 합치면 총합 307골이다.
저 307골은 2009년 말 라울 곤살레스가 경신하기 전까지 50여 년을 내려온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다 골 기록이었다. 전설이 전설을 계승한 것.

그를 빼놓고는 절대 레알 마드리드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들은 '스탯이 경기당 1골도 안 되는데 역대 최고의 선수라 할 수 있겠나 그런고로 메시랑 호날두가 더 나아요'라는 뻘소리를 하는데, 디 스테파노의 플레이 스타일은 공격에만 올 인하는 스타일이 결코 아니었다.[19] 그는 공격이든, 중앙이든, 수비진이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박스 투 박스 타입이었다. 바비 찰튼 경은 유러피언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했을 때 벤치에서 처음 목격한 디 스테파노에 대해 '골키퍼에게서 볼을 받고, 풀 백에게 지시를 내리고, 경기장의 모든 곳을 지켜보며 영향력을 미쳤다'는 감상을 남긴 바 있고, 오죽하면 카테나치오(이탈리아 특유의 빗장 수비)의 창시자이자 당시 FC 바르셀로나 감독을 역임한 엘레니오 에레라가[20]가 "디 스테파노는 최고의 공격수이자, 최고의 미드필더이자, 최고의 수비수이다."라고 했으며, 미겔 무뇨스 당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 "디 스테파노를 한 팀에 두는 순간, 당신은 22명의 선수를 데리고 경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라는 말까지 했겠는가.[21]

비유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박지성마냥 공수 가리지 않고 경기장 전체를 뛰어다니다가도 골을 폭풍처럼 몰아쳐 저 스탯을 쌓았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는 사람도 직접 보지 않았기에 피부로 와 닿지 않지만, 기록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으니... 사람이야?[22]

현역 시절 엘 클라시코에서만 18경기 18골을 때려 넣으며 그야말로 FC 바르셀로나 킬러로 군림하였다.[23] 이쯤 되면 바르셀로나에 억한 감정이라도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웃음마저 나온다 수많은 걸출한 공격수들이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거쳐갔음에도, 엘 클라시코 18골 기록은 오랜 시간 동안 깨지기는커녕 추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독보적인 기록이었다.

상술했듯 말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 회장직을 맡았으며 그 영향력은 죽은 적이 없었다. 2010/11 시즌 끝자락에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떡실신당한 것으로 구단 내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쟤들이 더 낫네 이 한심한 것들아라는 식의 일갈로 구단 프런트 및 선수단 모두를 데꿀멍시켰다. 심지어 말빨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무리뉴 감독조차... 회장님 노하셨다 모두들 도망가

다만 요한 크루이프나 프란츠 베켄바워 같은 이후의 천재들이 역시 각각 바르셀로나와 FC 바이에른이라는 팀에서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며, 클럽의 위기 때마다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에 마드리드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할 디 스테파노 옹은 되려 마드리드 팬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 너무 팬들의 입장에서만 프론트 및 선수진을 대하다 보니, 무리뉴 감독 및 선수들과의 대립이 눈에 띄었던 편이다.[24]

자기가 몸 담았던 팀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은 좋지만, 과거의 향수에 취해 현재의 모습을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 빗대어 끊임없이 깎아내리기만 하던 모습은 팬으로서나 제3자로서나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지라, 이 점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의가 있었다.

7. 월드컵 불운

쥐스트 퐁텐도 언급했지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에 단 한 번도 출장한 적이 없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냐고 하면 논란이 많지만, 월드컵에서 뛴 적이 없는 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냐고 하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이름의 빠진 적이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갉아먹은 이유가 되었다.[25]

그런데 문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실력이 부족해서 못 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개 위대한 선수가 불운으로 월드컵을 못 나갔다고 하면 그 이유는 소속 국가가 약해서인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소속되었던 국가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이고, 양쪽 모두 상급이거나 혹은 최상급 전력이었다. 본인의 실력 역시 그런 팀에서 주전으로 뛰기에 문제가 없었고, 적응기 따위 없는 건 국가 대표로서도 마찬가지여서 스페인 소속으로 치른 데뷔전에선 3골을 박고 해트트릭을 기록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왜 못 나갔느냐 하면...

일단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프로 입단한 것은 1943년이었다. 그리고,

1944년 월드컵: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열리지도 못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아르헨티나가 불참했다. 1938년 월드컵 개최권 분쟁에 더해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분쟁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콜롬비아의 이중국적이었고, 이 직전까지는 어느 국적을 가지고 있든 출장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26]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부터 규정이 꼬이기 시작했고, FIFA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어느 국적으로든 월드컵에 출장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이때에는 1957년에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상황이어서 스페인 국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 디 스테파노는 전성기를 맞아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을 쓰고 있었고, 이 시기 스페인은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인 쿠발라 등 최상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이 귀신 같이 탈락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1962년 칠레 월드컵: 이때에도 스페인 대표 팀의 전력은 최상이었고, 당시 나이 36세였던 디 스테파노는 마지막 불꽃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페렌츠 푸스카스도 국가 대표 팀에 속해서 '이번에는 정말...'이라는 생각뿐인 상황이었다. 지역 예선도 무난하게 통과해서 이젠 정말 본선 경기에서 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 본선 개막전 직전에 치른 경기에서 부상당한다. 결국 디 스테파노는 본선 경기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월드컵 직전에 40세의 디 스테파노는 허리 부상을 당했고, 결국 은퇴했다.


8. 그에 대한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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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 제작된 극소수 축구 스타 중 한 명이다.

저는 디 스테파노를 이야기할 때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펠레가 만약 유럽에 진출했다면 아마도 실패했을 겁니다. 반면 디 스테파노는 유럽과 남미 무대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활약을 펼쳤죠. 제가 펠레보다 뛰어난 선수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디 스테파노가 펠레보다 뛰어났다는 것은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 디에고 마라도나

사람들은 역대 최고의 선수로 나, 혹은 마라도나를 논하지만, 저에게는 디 스테파노가 최고의 선수입니다. 마라도나는 디 스테파노처럼 오른발이나 머리를 써서 득점하지 못했습니다. 마라도나는 중요한 골을 손으로 넣었죠.

- 펠레

왠지 서로를 디스하기 위해 회장님을 팔아먹은 느낌
일단 두 영감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보자면,

축구 역사상 가장 완전한 선수.

- 에우제비우

그는 골키퍼로부터 공을 가져가고 풀 백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지시하며 필드 위 어디에 있던 간에 공을 받는 위치에 있다. 당신은 모든 면에서 그의 영향력을 보게 된다. 나는 그토록 완전무결한 선수를 본 적이 없다. 그는 마치 경기장 중앙에 그만의 커맨드 센터를 가지고 플레이하는 듯했다. 그는 절묘한 만큼 강했고, 그러한 자질들의 조합은 넋을 빼앗길 정도였다.

- 바비 찰튼

나에게 두 명의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와 펠레다. 알프레도는 펠레보다는 한 걸음 정도 아래다. 월드컵에서 플레이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 쥐스트 퐁텐

그는 공격하고 수비하고 패스하고 전투하듯 플레이했다. 그리고 그것을 20년간 지속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선수였다. 그는 최고 중의 최고다.

- 미셸 플라티니

진정으로 위대했던 축구 선수. 신체 밸런스는 경이로웠고, 몸놀림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나는 디 스테파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게 그는 그야말로 우상(idol)이었다.

- 알렉스 퍼거슨

레알 마드리드의 위대함은 선수들에게 있다. 그리고 그 중 최고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확실히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선수이고 모든 축구 레전드들이 치켜세우는 위대한 선수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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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갈레아노는 "우루과이의 아기들은 '고오오오오오오올'이라 외치며 태어난다"라는 말로도 유명하다.
  • [2] 디 스테파노가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플레이를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평도 있다. 우선 저 비교 대상들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이르다. 그리고 월드컵 활약이 없다. 못한 것이 아니라 없다. 덕분에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는 시기가 지나면 지날 수록 밀리는 형국이다.
  • [3] CA 우라칸에서 뛴 것은 임대 가서 기록한 기록이다.
  • [4]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주급을 못 받아서 탈퇴한 것이지만, 계약이 완전히 깨진 것도 아니고 로스 미요나리오스 이적 과정에서 이적료가 지불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베르 플레이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적어도 상당 부분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로스 미요나리오스 이적 과정을 임대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둘 모두에게 확실한 권리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의 이중 계약이고 좋게 봐서는 양쪽 모두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 [5] 이 사람도 아주 골 때린다. 원래 바르셀로나의 스타 플레이어였다가 레알 마드리드로 직접 이적해서 역시 선수로 뛰었다. 은퇴한 다음에는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사로 지내기도 했고, 결국은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죽었다. 덕분에 별명이 왕복 비행기였다.
  • [6] 후안 부스케츠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의 협상을 거의 하지 않았고, 로스 미요나리오스에게는 통보도 없이 디 스테파노를 스페인으로 데려와 버렸다. 이 사건은 당연히 로스 미요나리오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 [7] 이것은 디 스테파노가 개인적으로 지고 있던 빚이었다. 바르셀로나는 이 빚 5천 달러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했다. 디 스테파노는 자기는 빚이 없다고 주장해서 이 빚 문제도 복잡하게 만들었다.
  • [8] 이 상황에서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레알 마드리드가 리베르 플레이트와 협상을 하게 된다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완벽한 이중 계약이 되고, 그 이후 전개는 누구도 해결 못하게 된다.
  • [9] 그래서 월드컵에 좋은 선수는 안 내보내려고 난리를 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뛰던 시절의 아르헨티나가 이 짓을 했다. 그러고도 소용이 없어서 결국 콜롬비아로 이동했지만.
  • [10] 카레토 회장이 디 스테파노를 마드리드에 보내고 사임했는지, 카레토 회장이 사임을 빙자한 파면이 된 다음에 결성된 임시 이사회가 디 스테파노를 마드리드에 이적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매체마다 다르다. 여튼 거의 동시인 것은 확실하다.
  • [11] 주장을 보면 '난 완벽하게 협상을 다 했는데 주변에서 방해만 해서 실패했다'는 전개이고, '악의 근원은 프랑코 정부'라는 식이다. 극렬 바르셀로나 팬들 중에서는 이 주장을 긍정하는 이들이 꽤 많지만 아무리 봐도 자기 실드 냄새가 강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부족하다.
  • [12] 여기 언급된 선수들은 죄다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이자 당대 최고였던 전설의 선수들이다. 단적으로 레프트 윙 포지션의 프란시스코 헨토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을 정도로 스페인에서 제일가는 드리블러였고, 레이몽 코파는 1958년 발롱 도르를 챙겨 갔다.
  • [13] 여담이고 풍문이지만 당시 푸스카스와는 서로들 콧대가 하늘을 찔러서 서로에게 절대 패스 안 하고 드리블 돌파해서 골을 넣곤 했다고 한다.
  • [14] 발롱도르는 1956년부터 제정되었는데, 첫 수상자는 47점을 획득한 40세 노장 스탠리 매튜스였고, 디 스테파노는 44점으로 2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첫수상이라서 공로상 어드밴티지로 스탠리 매튜스가 획득했다라는 식의 이야기도 나온다. 여담으로 1958년에는 팀 동료 레이몽 코파가 획득했고, 1960년에는 바르셀로나의 루이스 수아레즈가 발롱도르를 챙겨갔다.
  • [15] 하필이면 에스파뇰인가... 싶은 게, 에스파뇰은 바르셀로나의 지역 라이벌이다. 바르셀로나가 싫었던 건지 뭔지...
  • [16] 그런데 이 에스파뇰에서 디 스테파노는 라 리가 초기의 나름 라이벌이자 아주 잠깐 팀 동료이기도 했던 라디슬라오 쿠발라와 재회한다. 디 스테파노 사태 항목에 나오는 FC 바르셀로나의 슈퍼 스타 그 라디슬라오 쿠발라가 맞다. 그래서 이 부분이나 애초에 에스파뇰 창단을 FC 바르셀로나 쪽 인사들이 카탈루냐 축구 협회의 지원 형태로 후원한 것과 관련해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구도가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민족적 대립 문제라는 이야기가 현대에 와서 과장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 [17]빅 이어와 디자인이 많이 다른데 위 사진은 오리지널 빅 이어로 1965/66시즌까지 쓰였다. 우리가 알고있는 유명한 디자인의 빅 이어는 셀틱이 처음으로 획득하였다.
  • [18] 펠레와 마라도나 이야기가 이전에 적혀 있었는데, 펠레와 마라도나는 비유럽권 선수 제한 때문에 발롱도르의 후보도 될 수 없었다. 이후에 비유럽권 선수 제한이 풀리면서, 예전 선수들에게 명예상 개념으로 발롱도르를 수여했는데 이 수상자가 펠레와 마라도나, 그리고 황당하게도 이미 수상 경력이 있는 디 스테파노였다. 펠레와 마라도나의 격에 맞춰서 수여한 것인지, 발롱도르 생성 이전 활약에 대한 의미로 수여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아르헨티나 국적도 있어서 그 부분도 고려된 것인지는 불명.
  • [19] 애초에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 시절에는 그를 '미드필더'로 분류했다.
  • [20] 에레라는 카테나치오의 창시자이기도 하지만, 기행으로도 유명하다. 단적으로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에는 경기 전에 차에 암페타민을 섞어서 선수들에게 먹이기도 했다. 이건 정말 이야기도 없이 퍼 먹인 거라서,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우연히 이 차의 성분 분석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 굉장히 분노했다. 특히 불만이 심했던 인물이 바르셀로나의 슈퍼 스타 라디슬라오 쿠발라여서, 대립 과정에서 쿠발라를 엘 클라시코에 출장 안 시키는 파행까지 일삼다가 그 이유로 잘린 것이 에레라였다. 이런 기인 기질로 인해서, 주제 무리뉴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야바위와 심리전에 능해서 별명이 '마법사와 심리학자'였다. 그래서 에레라에게 좋은 소리 듣는 선수는 정말 거의 없었다. 그런데...
  • [21] 공식 경기는 아니지만, 골키퍼도 가능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정확히는, 디 스테파노의 동료가 그는 골키퍼만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을 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에 디 스테파노가 웃으면서 아르헨티나에 있던 시절 골키퍼를 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22] 직접 플레이 영상을 보면 의외로 지단 스타일로 뛰는 게 보인다. 근데 지단은 수비가 부족해서 마드리드가 더블 볼란치를 해 줬는데 이 사람은...
  • [23] 앞서서 디 스테파노가 레알 마드리드와 협상을 맺고 태업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 이유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확정된 이후, 특히 그 직후의 엘 클라시코에서부터 폭발했기 때문이다.
  • [24] 이런 점은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요한 크루이프 역시 마찬가지인데, 크루이프의 이야기는 편견이건 고집이건 간에 자기 나름의 전술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조금 다르다.
  • [25] 펠레가 유럽에서 뛴 적이 없다는 이유로 마라도나 지지자들에게 까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26] 당시 디 스테파노는 콜롬비아 국적으로 콜롬비아 국가 대표 팀 경기에 4경기를 출장했으나 애초에 콜롬비아 리그가 FIFA에 제대로 가입도 되어 있지 않는 등의 사정이어서 아르헨티나 대표 팀으로 월드컵에 참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