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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로렌

last modified: 2015-02-13 23:27:48 Contributors


프랑스어: Alsace-Lorraine (알자스-로렌)[1]
독일어: Elsaß-Lothringen (엘자스-로트링겐)

Contents

1. 소개
2. 왜 알자스-로렌이 중요한가?
2.1. 자원
2.2. 지리학적 중요성
3. 역사
4. 여담

1. 소개

프랑스독일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의 행정 구역들[2]. 중심 도시는 스트라스부르.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주요한 분쟁지역이었다

2. 왜 알자스-로렌이 중요한가?

2.1. 자원

라인강과 보주산맥 사이에 위치해 있는 알자스는 기후가 온화하여 포도주를 비롯한 농산물과 목재가 풍부하고, 알자스 북서쪽에 위치한 로렌은 평야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로렌 지방은 석탄과 철광석 때문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철광석의 90% 이상이 알자스-로렌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인접한 독일의 루르, 자르 지역은 독일 석탄의 50% 이상이 매장된 대표적인 석탄 생산지여서, 양 지역의 철광석과 석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두 나라의 노력은 끊임없는 충돌로 이어졌다.
출처는 이곳

간단히 말해서 꿀땅.

프랑스 철광석 90% 이상의 매장량에서 말 다했다. 아래의 역주에서도 나오는데, 1913년 독일 철강산업이 필요로 하는 철광석의 35%가 로렌에서 산출되었다. 로렌의 철광석이 저품위에 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만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랑스든 독일이든 이 지역을 상실할 경우 경제계에 미칠 파장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독일은 35%였지만 프랑스에는 90%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보다 프랑스의 천연자원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프랑스에게 더더욱 절실한 땅이다.

덤으로 이곳은 이미 관련 산업시설들이 잘 발달된 곳이다. 즉, 땅만 얻으면 저 풍부한 자원을 바로 개발된 상태로 사용 가능.

2.2. 지리학적 중요성

알자스와 로렌은 유럽의 젖줄인 라인 강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면 라인 강과 아르덴 고원이 프랑스 동쪽을 방어하는 천혜의 장벽이 될 뿐 아니라 라인 강을 관통하는 독일의 교통로를 단절시켜 전략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알자스와 로렌을 점령하면 라인 강을 통해 직접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 링크

3. 역사

알자스-로렌이 비교적 동질한 한 지역처럼 다루어지고 있지만, 역사, 문화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 지역이다. 로렌(독일명 로트링겐)은 세 주교령을 제외하면 대부분 로렌 공국(로트링겐 공국)의 영토로 독일어보다 프랑스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 알자스 지방은 이름만 제국인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주교령과 합스부르크 영지들로 잘게 나누어진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지만 17세기에 프랑스가 점령했기 때문에 근대에 그 귀속을 놓고 많은 문제가 있었고 복잡한 사연이 있다.

프랑크 왕국 분열 당시 알자스-로렌은 중앙의 로타르 왕국의 중심지였다. 라틴어로 로타르의 왕국(Lotharii Regnum), '로타링기아Lotharingia'라고 불리는 이 왕국이 이 지방을 가리키는 어원이 된다. '중부 프랑크 왕국'이라고도 불리는 왕국인데, 엄밀히 말하면 로타르 1세의 왕국이 중부 프랑크 왕국이며, 로타르 1세는 자식들에게 분할 상속을 했는데 각각 루트비히 2세의 탈리아 왕국, 타르 2세의 '로타링기아 왕국', 샬를의 '프로방스 왕국'이다. 이 가운데 샤를이 제일 먼저 죽어서 프로방스 왕국이 이탈리아, 로타링기아로 분할되었고, 다음으로 로타르 2세가 죽자 로타링기아가 동서 프랑크 왕국에 분할되었다.

독립된 왕국은 소멸했지만 '로타링기아 왕'이라는 칭호는 869년 부터 922년 까지 서 프랑크 왕이 차지한다. 922년 부터는 동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 산하에서 상로트링겐(上) 공국과 하로트링겐(下) 공국으로 갈라졌는데, 하로트링겐 공국은 이후 유명무실화되면서 브라반트 공국[3]으로 변하고 상로트링겐 공국이 살아남아 로렌 공국[4]으로 불리운다.

18세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가문의 상속자가 되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오스트리아 대공위와는 상관없이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계승은 불가능했으므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으로, 로렌 공작이었던 프랑수아 에티엔(프란츠 슈테판)[5] 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가 되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세력다툼 끝에 로렌은 1736년 옛 폴란드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Stanisław Leszczyński)[6]에게 사후시 영토를 다시 프랑스에게 환수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주어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프랑스간의 거래로 인해 사위였던 프랑수아는 자신의 땅을 포기해야 했고, 보상으로 이탈리아스카나 대공국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1766년 마지막 로렌 공의 죽음 이후 프랑스에 환원된 이후로 로렌 공국은 최종적으로 프랑스령이 되었다.

메스와 베르됭 등 이미 로렌 지방의 일부는 앙리 2세 시절부터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는데 반해, 알자스 지역은 라인강변 여러 도시들은 30년 전쟁 이전부터 프랑스 왕에게 복속하고[7]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이 지역과 알자스의 부분적인 병합이 인정되었으며, 1697년에는 프랑스군이 무력으로 알자스 전역을 강제 합병하기에 이른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패배하고,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알자스의 대부분과 로렌의 일부를 독일 제국이 뺐었다. 독일어를 쓰는 지역 뿐만 아니라 주요 철산지도 빼앗아[8][9] 프랑스의 국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친프랑스적 기조에서 마지막 수업을 썼다.[10] 알자스 지역 주민들의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했던 정황은 마지막 수업의 내용에도 여실히 드러나긴 한다.

1870∼1880년대에는 이 지역에서 배출한 제국의회 의원의 대부분이 친프랑스적인 가톨릭계의 항의파였고, 제국 내 지위를 요구하는 자치파는 소수였다. 독일 지배하에서 알자스-로렌은 라이히슬란트(제국령)로 지정되었으나 1902년까지 효율적인 자치정부가 들어서지 못했다. 실제로는 독일 제국내 다른 제후령이나 자유도시만큼 자치를 누리지 못했고 명목은 제국령이라지만 프로이센 관료에 의해 통치되었다. 일부 주민들은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군복무 기간이 훨씬 짧았던 프랑스쪽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기간에 이주해나갔다. 그러나 1905년 알자스-로렌의 많은 가톨릭교도들은 프랑스 공화정부의 교권반대 정책에 등을 돌리고 독일 제국 내에서 알자스-로렌의 자치를 얻는 것에 눈을 돌렸다. 그 이후 특히 1911년 헌법이 승인됨으로써 독일화에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1913년에 이르러 주민과 군대 간의 충돌 사건(차베른 사건[11])이 일어나고 정부에서 선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의 내정적 위기로까지 발전하였다.

1919년에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내에서는 대규모 혁명이 일어났다. 알자스 로렌에서도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에서 수천명의 자유주의자와 귀환 군인들이 1918년 11월 10일 혁명을 일으켜서 슈트라스부르크의 혁명 위원회가 일시적으로 정권을 성립했다. 이들은 "독일도 프랑스도 아니다."는 모토로 알자스 로렌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11일 뒤 다시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전쟁 결과 프랑스가 승리자였기 때문에 원래 프랑스 영토였던 알자스-로렌을 도로 가져왔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반대로 친독일파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문제는 로렌의 경우 80% 이상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므로 큰 무리는 없었으나, 알자스 지역의 프랑스 정부의 성급한 동화정책, 특히 지역의 전통적인 교회학교를 국립학교로 대체시키려는 계획과 독일어 신문(주민의 75%가 독일어로 글을 씀)을 폐간하려는 시도는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더군다나 독일어로 미사를 드리는 가톨릭 사제까지 쫓아내자 극심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에 따라 알자스-로렌은 1920년대에 자치운동을 전개했으나 프랑스 공화국 내에서의 자치권 획득은 실패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배하여 점령되자, 나치 독일은 북프랑스와 함께 알자스-로렌을 전격적으로 자국 영토에 군사적으로 점령하였다. 전황이 좋은 초기에는 전후 유럽을 이끌 파트너로 비시 프랑스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영토적인 합병은 하지 않았다가 1943년 공식적으로 합병한다. 전황이 악화되자 충성심이 의심스러워 징집하지 않았던 알자스-로렌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하는 비극도 나왔다.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후에는 다시 프랑스가 가져왔으며, 프랑스 정부는 1차대전 이후 시도했던 많은 프랑스화 정책을 포기하였고 이는 알자스-로렌 주민들의 반발을 누그러트리는데 일조했다. 결국은 주민투표에서 프랑스가 승리해 프랑스영토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주변 세력에 끊임없이 시달렸다는 점에서 이 지역을 프랑스가 차지해 온 역사와 한국의 식민시절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이라는 형태의 국가로 각기 수백년간 서로의 영역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아왔다가 20세기 초에 겪은 식민화 경험을, 수백년간 인적·물적·문화적 교류와 대립을 겪었고 여러번 영토의 주인이 바뀌기도 한 알자스-로렌에 그대로 대입시키기는 무리가 있다.

당장 알자스 지역에서 많이 쓰였던 알자스어는 독일어의 한 사투리이기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된다. 역사적으로도 독일 국가의 기초가 19세기의 독일 제정 성립과 함께 확립된 것을 고려할 때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배가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와 같은 선상에 놓일 수는 없다. 알자스-로렌 일대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것이나, 독일 전체가 '독일 왕국'이라는 이름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일원 중 하나였던 것 또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14세기부터 황제가 선제후들의 선거로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16세기 교권과 함께 무너져내린 황제의 권위와 17세기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의 의미를 생각할때, 신성 로마 제국이 '독일사'에 속할 망정 독일 국가로 볼 수 없음은 분명하며[12] 30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개입이 독일 국가에 대항한 침략적 행위가 아니었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또한 로렌과 알자스의 귀족들은 중세 후반기 이후로는 신성 로마 제국보다도 프랑스 왕국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던 샤를 용담공의 기도를 로렌의 귀족들이 전쟁을 통하여 좌절시킨 것과(샤를이 전사하기까지 했다!), 기즈 공작 가문으로 기즈 가문은 애초에 로렌 가문 소속이다. 로렌에 본거지를 둔 기즈 가문은 위그노 전쟁에서 프랑스 가톨릭 진영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어차피 독일령 알자스-로렌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로렌 지방은 전략적인 목적으로 메스 등과 같이 명백하게 프랑스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까지 병합해버린 결과에 불과하고, 따라서 보불전쟁의 결과로 탄생했을 뿐인 이른바 '알자스-로렌'이라는 행정 구역에서 한일 관계와의 유사점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명한 잔 다르크가 바로 로렌 출신으로, 그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십자 문양은 '로렌의 십자'로 알려져 자유 프랑스가 상징으로 쓰고 다녔다.

근대 이전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선이었던 알자스 로렌지방은 보불전쟁 후의 알자스 로렌의 독일합병은 애초에 비스마르크도 반대했을 정도로 19세기 중반에는 이미 프랑스에 많이 동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외교적인 명분을 들어 비스마르크는 합병을 반대했다. 몰트케와 군부의 반발로 영토적 합병을 했고 빌헬름 1세나 비스마르크는 애초에 명분은 방어 전쟁이었는데 영토합병을 하면 침략전쟁으로 변질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된다고 해서 심각하게 우려했고 빌헬름 1세는 당시 영국대사에게 알자스-로렌의 합병은 그저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해서 거리를 버는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을 정도 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1차대전까지 알자스 로렌에 대해 프랑스에 입장에 공감한 영국이 프랑스쪽에 우호적으로 돌아서고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알자스-로렌이라는 분쟁지역이 없었다면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 요소가 현격히 줄었을 것이므로, 어쩌면 역사 자체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즉 이 작은 지역은 19세기와 20세 초반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쟁점지로 꼽혔다. 현재 알자스-로렌에 대한 인식은 2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프랑스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고 독일서도 전후 제국주의 침략에 트라우마에 벗어나면서 양국 학계에서 연구된바 유럽 내에서 독일도 프랑스도 아닌 고유의 문화 지역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13]

이렇듯이 역사란 보는 관점과 후대의 평가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4. 여담

주민들의 성씨는 다수가 독일계다. 또한 스트라스부르에는 유럽 의회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과 TGV 고속철이 부설된 것을 핑계로 삼아서 그랑제콜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ENA)가 파리에서 이전해왔다. 주민들은 프랑스보단 독일 쪽에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쪽으로 인적, 물적자원 교류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교통로도 독일과 가까운 편. 실제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자전거로 20분 밟으면 독일이다(…). 또한 이 지역의 철도는 일반적인 프랑스식의 좌측통행이 아닌 독일식의 우측통행이다. 심지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루프트한자 리무진 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Strasbourg는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스트라스부르'로 표기하고 있지만, 프랑스 관광청 공식 한국어 페이지에는 '스트라스부르그'라 표기되어 있다.

알자스 사투리프랑스어의 영향인지 몰라도 발음체계가 심히 괴악하게 변해버렸다. 본디 독일 남부 사투리는 무성음-유성음 대립보다는 유기음-무기음 대립에 가까운데 무기음만 존재하는 언어의 영향으로 인해 k, g구별을 제외하고 파열음 음운이 애매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p-b, t-d 구별이 안된다) 근거자료(프랑스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혹은 뒤르켕)이 이 지역 출신이다. 문제는 이 양반의 주로 활동했던 국가는 프랑스인데, 당시 프로이센에 점령된 로렌 출신이었다는 것. 그래서 이 양반의 이름을 프랑스식인 뒤르켕으로 부를 것이냐 독일식인 뒤르케임으로 부를 것이냐 가지고 한국 사회학계가 미친듯이 싸운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뒤르켕이 대세였으나 최근에는 출신 당시의 국적을 인정하여 뒤르케임으로 바뀌어가는 중이다.

2011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 지역에서 농민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불공정한 거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독일 영토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해 파문이 일고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백두산을 중국 땅이라고 발언한 격이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사르코지 대통령도 이민자 출신이라 극우민족주의가 다시 득세하는 프랑스의 정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잊혀진 병사의 저자이던 기 사예르,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도 이곳 출신이었다. 아스날 FC의 감독 아르센 벵거도 여기 출신.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의 주인공이 통치하는 지역이 바로 이곳의 이름을 땄다. 다만 현실의 알자스와 달리 자원이 많거나 하지는 않고 그냥 작은 변두리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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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차대전 후 프랑스에서는 Alsace-Moselle (알자스-모젤)로 불렀고 현재는 알자스 레지옹과 로렌 레지옹의 모젤 데파르트망이 되어있다. 로렌 레지옹은 모젤 데파르트망 이외에도 3개의 데파르트망이 더 있다.
  • [2] 독일 제국 소속일때 한 행정 구역이었고 프랑스 소속일땐 여러 행정 구역들로 나뉘어져 있는 지역일 뿐이다. 프랑스인들은 그 지역을 묶어서 알자스-로렌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안부른다.
  • [3] 현재의 벨기에 지역으로 벨기에 왕세자는 브라반트 공작이라고 불린다.
  • [4] 독일어로는 로트링겐. 독일에 더 가깝다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대라 두 언어 모두 사용했고, 고유 언어도 있었다. 로렌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를 썼지만, 당시 다른 유럽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를 쓰는 일이 잦았다. 영국, 독일의 궁정에서도 프랑스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 [5] 당시는 이미 로렌 공작 작위를 상실하고 토스카나 대공이었다.
  • [6] 루이 15세의 장인.
  • [7] 왕국령은 아니다.
  • [8] 이 의도는 거꾸로 독일이 이 지역의 철광에 의존하게 되는 원인이 되어 1913년 독일 철강산업이 필요로 하는 철광석의 35%가 로렌에서 산출되었다. 로렌의 철광석이 저품위에 인과 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만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독일이 이 지역을 상실할 경우 독일 경제계에 미칠 파장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 [9]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프랑스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나온 로렌의 철광석과 자르와 루르의 석탄을 우호적으로 공유하자는 제안이 수용되면서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창설되고 이것이 지금의 유럽 연합으로 발전한다.
  • [10] 근데 사실 여기는 예로부터 알자스어(Elsässisch, Alsacien)가 쓰여오던 곳인데, 알자스어는 고지 독일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지금도 알자스어는 이곳에서 조금씩 쓰이고 있다.
  • [11] 1913년 11월 알자스의 주민과 특히 이 지방 출신 징집병에 대한 장교의 모욕적인 언동에 항의하는 시위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도시의 연대사령관은 계엄령을 실시하고 많은 주민을 병영에 감금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국내외에서는 정부 및 군당국이 조처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크게 항의하였다. 제국의회에서는 보수당을 제외한 여러 정당이 일치하여 사상 최초로 제국의 재상 불신임을 압도적 찬성으로 결의(293 대 54, 기권 4)하였으나, 황제는 재상의 사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 [12] 단순 영역으로만 치면 현재의 독일 전역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체코, 북부 이탈리아,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북부 프랑스 부르고뉴 아르투아지방까지 속한다. 당시에도 통일된 중앙정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러 독립된 제후 가문들의 분리된 통치를 받았고 민족이나 언어적인 경계가 뒤섞였기 때문에 현대의 국가처럼 단일성을 지닌 통일된 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 [13] 독일-프랑스 공동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