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알베르트 슈페어

last modified: 2015-04-15 15:03:23 Contributors


Albert Speer
1905.3.19~1981.9.1
나치 독일의 군수부 장관. 건축가. 히틀러친구로 여긴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Contents

1. 소개
2. 건축가로서의 슈페어
3. 대중 매체

1. 소개

"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거기엔 내가 속하였을 것" - 회고록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건축가아돌프 히틀러가 생각해낸 다양한 건축물들을 실현하는 실무를 맡았다. 그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약간의 재능을 가지고 비굴할 정도로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나치를 위해 건축물을 설계했던 자라고 할 수 있다. [1]

만하임의 부유한 중산층 정도 되는 건축가 집안[2]에서 태어나 1920년대에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베를린 기술대학의 유명한 건축가인 하인리히 테세토브의 문하에서 최종적으로 학위를 따고 22살의 나이로 그의 조수로 일했다. 원래는 역시 유명 건축가였던 한스 푈치히의 조수를 지망했었지만, 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푈치히의 경우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건축가였지만, 테세토브는 그와 정 반대되는 고전주의 건축가였다. 자신의 건축 세계를 순식간에 정 반대로 바꿔버린 것. 그래도 테세토브 밑에서 슈페어는 진심으로 열심히 일했고, 테세토브 대신 강의를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30년에는 학생들의 권고를 받아 나치당 집회에 참석한 후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감동을 받아 1931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이 것이 그의 화려한 경력의 시작이었다. 나치당 베를린 지부의 간부인 카를 한케[3]를 알게 되어 그의 집을 무상으로 수리해주었는데, 한케는 이를 고마워하며 슈페어가 고향에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괴벨스에게 베를린 지부당의 리모델링 공사를 슈페어에게 맡길 것을 청원하였다. 여기서 슈페어는 괴벨스에게 호평을 받아서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신설된 선전성 청사의 리모델링을 위임받았으며, 각종 행사의 미술을 멋지게 기획하였다.



그는 건축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딜레탕트였던 히틀러의 호감을 사서[4] 나치당 주임 건축가, 건축부 수장, 제국수도 총건축 감독관 겸 제국 의회 의원의 직위를 차지했다. 나치 전당대회장 건설을 설계하고 감독했으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독일 파빌리온으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36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경기장[5]뉘른베르크에서 체펠린 비행장(Zeppelinfied) 등을 건설하였다.[6][7] 제3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경우 그에 어울리는 수도인 게르마니아의 도시계획을 히틀러와 함께 마련했으며, 국제적으로 높아진 명성으로 인해 심지어는 스탈린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재건설하는 작업을 위탁받기도 하였다.[8]


그의 경력에 쐐기를 박은 작품이라면 1939년에 리모델링된 히틀러의 총통관저(Neue Reichskanzlei) 공사를 들 수 있다. 3월 15일에 히틀러는 이 건물을 통해 총 한방 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 삼켰다. 히틀러의 아이디어에 따라 얉고 폭만 넓은 건물을 옆에서 진입하게 만들어 400미터가 넘는 아주 긴 복도를 만들고, 아주 위압적인 무대와 같은 공간을 만들었던 것. 실제 건물로써는 별 쓸모가 없던 건물이지만,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나치의 정체성에 아주 잘 부합하는 건물이었다. 당시 독일의 군사적인 힘에 대해 부담을 느끼던 체코 대통령은 히틀러와 담판을 짓기 위해 독일로 찾아왔는데, 그렇지 않아도 심장이 약했던 그는 마치 '무기'와도 같은 이 건축물의 위압적인 400m가 넘는 복도를 지나고 나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리고 굴욕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한다. #

전쟁 중반기인 1942년 2월 8일 군수부 장관인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의 강권으로 군수부 장관을 맡았다. 당시 독일의 전시경제는 관련기관과 권력이 분산된 채로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능률성은 나치당료의 과도한 개입과 겹쳐서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슈페어는 군수부 장관이 된 후 히틀러의 지속적인 신임을 가진 인물[10]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독일 군수체계에 남아 있던 여러 가지 비효율적인 관행을 뿌리뽑아서 생산성을 높이 끌어올렸다. 다만 이런 관리의 천재에게도 현실의 어려움은 타개하기 어려웠는지

"누군가가 당신에게 명령하길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을 '하모니카로만 연주해야만 한다'라고 했다 생각해보시오"

라고 슈페어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푸르트 뱅글러에게 자신의 격무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한적도 있다고

그러나 슈페어의 전시생산 관리능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채승병의 블로그에서는 나치독일의 전시경제 생산성 향상은 1930년대부터 투자되었던 대규모 생산시설들이 슈페어의 취임시기와 맞물리면서 완공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독일경제의 군수품 생산능력을 향상시키는 계획안은 이미 전임자인 토트가 완성시키고 있었고, 슈페어는 단지 그걸 실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널리 알려져 있다.[11] 그러나 군수부 장관을 맡기 전에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때도 슈페어는 그 능력으로 호평을 받고 있었고, 변덕스러운 독재자인 히틀러의 지속적인 호감과 신임을 얻고 있던 슈페어는 자신에게 주어진 히틀러의 신임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난맥상인 독일 전시경제체제를 어느 정도 효율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독일의 무기 생산량은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심화된 1944년 후반기에 되어서야 감소세로 돌아선다.

다만 슈페어의 회고록에서는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1943년까진 부정확하고 체계없이 이뤄져서 별다른 타격을 못 입혔는데 1944년에 가서야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폭격이 이뤄지긴 했지만 효율적인 타격은 아니었다고 밝힌다. 예로 독일 전시생산의 병목 공정은 볼베어링 공장이었는데 [12] 몇 번 폭격하고 완전히 파괴시키기 전에 중단하고[13] 새로운 표적으로 가거나 루르 지방의 댐을 공격하다가 거의 파괴하기 직전에 멈추고[14] 라인강 철교를 폭파시켰으면 프랑스 지역에 있는 독일군 병참선이 붕괴했을거라는등 자신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연합국의 전략폭격 사령부의 삽질이 독일의 패망을 몇달 미뤘다고 서술한다. 사실 독일의 군수공업의 아킬레스건은 무기의 재료로 쓰는 합금강 생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희귀금속이었는데 1944년말 여러 희귀 금속중에 특히 터키서 수입하는 크롬이 6개월치 이하로 바닥나면서 발칸이 소련에 넘어가고 나선 무슨 수를 써도 1945년이면 공업생산이 파국을 면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15]

어쨌든 1943년에 이르러 독일경제가 생산하는 군수품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슈페어는 자연스럽게 히틀러의 후계자 후보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나치 권력의 상층부에 있던 괴링, 마르틴 보르만, 힘러와 대립하게 되어 1944년 초에 와병하게 되자 슈페어가 가진 행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하였고, 그들의 음모에 질린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군수장관과 건축책임자의 자리를 사임하겠다고 청원하였다. 공군원수 밀히를 필두로 하는 군수관련 인사들의 청원 덕분에 슈페어는 히틀러의 신임을 다시 얻어서 관련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16] 1944년에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동자들 및 반나치인사들에게조차 슈페어의 "대단한 군수품 생산관리 능력"은 높이 평가되어 그들이 작성한 내각의 명단에 포함될 정도였으나 "아직 포섭이 필요"하다는 말이 붙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 독일의 패배가 거의 확정적인 상황이 되자 자포자기한 아돌프 히틀러는 광기에 들려 독일 내의 공업지대나 사회간접자본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미친 지시를 내렸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관련 행정권을 받은 후 해당 권력을 사용하여 은밀히 경제계 인사나 정부관리들에게 독일의 인프라를 파괴하는 대신 보존하도록 설득하였고 대체로 성공한 편이었다.[17]

히틀러가 자살한 후 슈페어는 카를 되니츠의 행정부에 참가하였고,[18]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유죄혐의가 인정[19]되어 20년형을 받았다. 이 판결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판결이다. 슈페어와 비슷한 죄목의 프리츠 자우켈의 경우 사형을 판결받았으며,[20] 슈페어와 마찬가지로 회개한데다가 자신의 전쟁 기록까지 모두 연합군에게 넘긴 한스 프랑크 역시 사형을 당했다. 게다가 판결 이후 슈페어가 자신이 몰랐다고 침묵으로 일관한 유대인 학대에 가담[21][22]한 사실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난 문건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결국 그의 형량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검사단에게 유리한 진술을 적극적으로 행함으로써 얻어낸 일종의 사법거래였다.[23] 중요한 대목이나 구체적인 증거에 대해서 '기억이 안난다', '다 히틀러의 지시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다른 전범들에게 엄청난 월급을 받는 편지배달부들! 이라고 일갈해서 개념인 코스프레를 했다. 유체이탈 화법

음모론을 비롯해 많은이들이 궁금해 하던 나치의 핵개발에 대해선 회고록에서 밝히길 모든 조건이 충족되고 최대한의 자원이 투입된다 하더라도 어렵다는 실무자의 보고와 자신의 판단으로 나치의 전황과 기술력으로 절대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판단하에 우라늄비축량 700톤을 해군 잠수함 배터리 개발계획에 사용하라고 남김없이 방출했다고 밝혔고 V1, V2에 개발과 생산에 대해서나 연합국의 전략폭격은 수지가 남지 않는 밑지는 장사였다고 평가절하 했다.

복역기간 중 슈페어는 회고록을 집필하였고, 이는 1966년에 출옥[24] 한 후 간행되어 나치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일차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국내에도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어서 출간돼있다. 그는 회고록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다만 이러한 회고록들이 으레 그렇듯이 상당히 자기 변호적인 내용들이 많으며, 마르틴 보어만과 같은 정적에 대한 공격과 슈페어 자신이 개인적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변호하는 내용이 상당하다.[25] 군수장관 등용전엔 가뜩이나 자원이 모자른데 히틀러의 과대망상적인 건축물 지어대는데 일조 함으로서 독일 산업능력을 깎아먹는데도 일조 했고 히틀러의 친구로 히틀러와 다른 경쟁자들 사이에서 권력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다가 막상 등용되고 나선 중첩되고 비효율적인 행정체계를 일신하고 효율화한다는 목적하에 히틀러에게 전권을 요구하는점 권력투쟁의 희생될뻔 한다고 회고록에서 썼지만 정작 마르틴 보어만에 대항해서 괴벨스 괴링과 3인동맹을 도모하는 점으로 보아 권력지향적인 면을 숨기기 어렵고 다른 인사들의 증언도 이와 대체로 일치한다.


여담으로 슈페어의 말로는 그가 독가스를 이용해 히틀러 암살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SS 보초병들이 독가스를 주입할 만한 곳을 지키고 있었고, 원래는 낮던 굴뚝도 상당히 높게 개조되었기에 사실상 슈페어의 허풍으로 평가된다. 만약 이게 사실이었다면, 이런 어설픈 알베르트 슈페어의 히틀러 암살계획은 모든 암살계획 중 마지막 암살계획이었다.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변호사의 권유와 검사단의 진술 요구에 응해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이걸로 인해 옥살이한 20년 내내 전 나치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소문에 불과하며,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 중 루돌프 헤스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원래부터 슈페어와 비교적 친한 편이었고 또한 그중 가장 친했던 발두어 폰 쉬라흐[26]를 제외한 전원이 1954~1957년 사이에 출감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왕따를 당할 일이 없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당시 왕따 당한건 사실인데 군인출신 다른 전범들과 달리 나치정권을 비판하는 개념인 코스프레와 영미 군사당국과 이심전심으로 통해서 전략폭격과 나치시대 군수생산정책을 매우 협조적으로 진술하는 바람에 혼자살고 싶어서 안달난 배신자급으로 매도된 것이지 암살과는 전혀 관련없다. 또한 슈페어 스스로는 이때의 암살계획에 대해 당시쯤 되면 이미 다들 갈데까지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진술함으로서 암살계획을 스스로 평가절하했다. 물론 이는 그저 겸손해 보이려는 연기에 불과했을 수 있다.

이런 일들 덕분에 슈페어에 대한 평가도 둘로 갈린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친 개념인 나치 또는 비열한 기회주의자. 진실은 본인만 알겠지만 당시의 독일 관료 및 군 지휘관 다수를 떠올려보면 완벽히 어느 한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2. 건축가로서의 슈페어

관리자로써의 슈페어는 (부풀려졌다고 할지라도) 꽤 쓸만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본업인 건축가로써의 평가는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다. 구시대적인 고전주의 건축에서 못 벗어난, "시대를 읽지 못한 건축가"였으며(사실 그 점이 히틀러의 취향에 맞았던 것) 그 감각 역시 시대에 남을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더욱 안좋은 점은 건축가로써 줏대가 없었던 점. 사실 슈페어의 학생 시절 일화를 들으면 그도 현대적인 건축물에 대해서 어느정도 의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미스 반 데어 로에조차 히틀러에게 공사를 받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슈페어 정도로 자기의 건축을 버리면서까지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건축물은 철저하게 히틀러의 취향과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켰을 뿐이다. 또한 그와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제3제국의 수도와 그 중심의 거대한 돔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황당무계한 것이었다.[27]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라 히틀러의 건축취향을 설명하자면 건축물은 실용성보다 그 존재만으로 "사람을 압도시키는 기능"을 중요시했다. 기교를 별로 부리지 않는 고전적인 순수함을 추구했고 찬탄해 마지않던건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인데 그리스 식민지 출신이 본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이오니아 양식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건축물에 대한 철학은 일종의 '폐허이론'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역사에서도 퇴장한 후에라도 당시 시대에 남은 건축물로 '존재'를 알려야 된다는것이다. 마치 그리스 신전과 로마시대 콜로세움 처럼. 그 결과로 현대기술로 구현이 가능한 경계치의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선호할 수 밖에...

국민 회관(Volkshalle, 폴크스할레)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생각난다
18만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290m짜리 구조물 '국민 회관'과 120m의 개선문 같은 것. 개선문은 평양 개선문(60m, 세계 최대의 개선문)의 2배이며, 판테온을 모델로 한 국민 회관의 돔은 현재 세계 최대의 돔인 카우보이 스타디움(275m)보다도 더 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17배나 큰 규모였으며 돔 상부에 있는 채광탑의 지름(46m)은 석재 돔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지름보다 약간 더 컸다.[28] 건축공학 전문가들은 수도의 예정지와 거대한 돔 밑의 지반이 너무 약해서 엄청난 기초공사가 필요할 것으로 평가하였다. 설사 돔이 건축된다고 하더라도 기울어지거나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게다가 위같이 거대한 돔이 성공적으로 건축되었다 한들, 계획상으로 그 거리에는 거의 관공서만 배치되어 길게 늘어져 있는 등, 물리적인 문제 이외에도 수도 계획 자체에 한참 문제가 많았다. 슈페어조차도 자서전을 빌어서 자신이 나중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후에 '다시 보아도 전혀 정상적인 계획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했고, 그의 아버지는 슈페어를 보고 네가 미친 것 같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쓸데없이 넓은 중앙 대로와 겉만 중시한 도시계획 역시 비현실적이며, 게르마니아가 실제 도시로 기능하는데는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히틀러와 슈페어는 평소에 자주 제 3제국이 멸망하더라도 고대 로마의 유적처럼 영원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앞서말한 소위 '폐허이론'), 확실히 그런 을씨년스러운 감상에 어울리는 건축물이긴 했다. (참고로 재미있는 것은 동시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건축가들은 스탈린의 건축물이 천년만년 새것 같은 건축물이 될 것이라고 아첨을 떨었다.)
슈페어는 후에 자신의 건축물들과 게르마니아 계획에 대해서 "보는 눈이 없었다"면서 자기 비판을 했지만, 나치의 건축물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신나게 자신의 건축물을 설명했다.(...)

참고로 그 아들의 이름도 알베르트 슈페어인데,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올림픽 단지 디자인을 총괄했다.

3. 대중 매체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전통적으로(?) '관리의 천재'로 나와 공업 능력(IC)을 10% 향상시켰다. DHR에서는 '천재적인 조직자'인데, 사기적인 능력 때문에 지속적인 하향을 당하고 있다(...). 1.04 RC1 기준 'IC +8%, 외국 IC +8%, 외국 인력 사용 +8%, 소비재 수요량 -10%, 전력/금속/희소 물자 생산 +10%, 불만도 증가 비율 +10%, 비축량 +10%'라는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다. 참고로 1.03 정식 버전 이전에는 IC +20%, 외국 IC +30%의 괴물이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지는 미국보다 높은 독일의 IC로 정리된다(…).

SCP 재단에서는 핵분열 포대인 SCP-044를 제작한 걸로 나온다.

월드 오브 탱크에서는 독일 경전차 유저들에게 영원히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인데, 20톤급 정찰경전차 계획을 보고 차체의 특징이 판터 차체와 비슷하니 아예 판터 차체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사실이 제작사인 워게이밍의 눈에 띄어서 정말로 판터 차체를 쓰는 경전차나와버렸다. 물론 중량은 40톤으로 원본 판터와는 5톤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톤급이라매? 사실 워게이밍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경전차보다는 고티어로 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필요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 괴악한 설계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슈페어의 이름이 게임 내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아서 욕을 먹지는 않는다.
----
  • [1] 약간의 재능이라고 하기에는 학력이 박사였고, (그 당시에는 박사라는 학력은 요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것이었다) 군수품생산에서 나름 능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재능이 부족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신념을 버렸다기 보다는 모른척했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천상 엔지니어였고 건축덕후였는데 자기 꿈을 이루려다 보니 후원자가 필요했고 같은 건축덕후인 히틀러랑 잘 맞다보니 이런 저런 일에 엮였고 그러다보니 토트박사가 죽은 이후 생각도 않던 군수품 생산도 하게 되었고 이왕 할거 열심히 하다보니 공대생들이 대게 그렇다 전쟁에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지 다른 나치 고관들 같이 정치적인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 [2] 할아버지부터 장남(본 항목의 본인 기준)까지 계속 건축가로 활동해오고 있다. 더불어 아버지 때부터 이름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3대가 같은 알베르트 슈페어. 장남의 경우 베이징 올림픽의 주경기장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인터뷰
  • [3] 마지막 친위대 제국지도자(Reichsfürher-SS)이다.
  • [4] 심지어는 매일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고 한다.
  • [5] 경기장은 처음엔 그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유리로 제작하려 했지만 히틀러의 요청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 [6] 현재 경기장은 리모델링만 되어 베를린에 남은 나치시대 유적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체펠린 비행장도 나치 조형들이 파괴된 후 일부 부분이 철거된 채 계속 남아 현재 독일 국민들의 휴양처로 이용되고 있다.
  • [7] 재미있는 것은 슈페어는 건물이 낡아도 더욱 웅장하게 보이게 하였으며 설계 자채가 몇 천년(!!)은 버티도록 했다고 한다(!!!) 이 괴물...
  • [8] 이는 모스크바가 베를린을 능가하는 위엄을 가진 도시가 될 것을 우려한 히틀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9] 400m가 넘는 복도로 가기 전에 위치한 첫 대리석 홀의 모습
  • [10] 관료들을 싫어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히틀러에게 자신과 건축관이 유사한데다 프로젝트 관리능력까지 출중한 "예술가"인 슈페어는 히틀러의 몇 안되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 [11] 하지만 히틀러의 개인적 친분없이는 히틀러 성향상 1인에게 권력을 몰아주는것이 불가능하단점을 고려하면 신뢰하기 어렵다
  • [12] 전차 전투기 차량등을 생산하는데 필수적이다.
  • [13] 작전이 여러가지로 꼬여서 폭격기 손실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다. 슈페어는 이 폭격으로 생산량이 38% 떨어진 정도에서 그친 것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고 회고한다. 물론 연합군 사령부와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이 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 [14] 파괴되면 수력발전을 이용한 전력 생산이 끊어지고 공업용수가 바닥난다.
  • [15] 니켈, 몰리브덴, 망간 등의 비축량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크롬과 몰리브덴이 없으면 균질압연장갑, 더 나아가 티거판터 등 전차의 생산은 완전히 끝장난다. 당장 티거 2가 이런 희귀 금속이 부족한 상태에서 만들어져 카탈로그 스펙보다 방어력이 크게 저하되는 추태를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른 각료들과 신형 전차의 개발을 논의하러 갔다. 뭔 다른 세계에 사냐
  • [16] 다만 이 시기 나타난 나치 고위층들의 추악한 욕망은 슈페어가 전후에 나치들을 비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17] 전범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언급했다. 사형을 피해간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
  • [18]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기간 동안 슈페어와 되니츠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되니츠가 유보트 생산에 자원을 우선 분배해달라 요청한 것을 슈페어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며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
  • [19] 대체로 전시중 외국인 강제동원과 관련된 것들이다. 사실 슈페어는 군수부 차관인 자우어가 그랬던 것처럼 독일기업들에게 배치된 외국인 노동자들의 동원실상에 대해서 증언해주고 기소를 면제받거나 형량축소의 타협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있었다. 덕분에 독일의 대기업들은 경제부흥시기에 외국으로 수입이 유출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차단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독일 대기업들이 외국인 강제노동에 혈안이었다고 솔직히 말하고 기소중지된 자우어가 전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은 반면에 슈페어 일가가 평온한 시간을 보낸 것은 슈페어가 독일기업들의 전쟁범죄 혐의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뒤집어 쓴 사연 덕분이었다.
  • [20] 이때문에 자우켈은 집행 직전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형량이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 [21] 학살에 대해서는 친밀한 고위 당직자들의 암시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사실 조금만 주의깊게 나치 체제를 관찰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문제였음을 자서전을 빌어 자인했으며, 학대 자체는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고 적었다. 이런 식의 내용은 적어도 후자에 한해서는 이 문제를 기재한 구 제3제국 관련 인사 모두의 자서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전자는 보통 안 적었다. 재판에서도 유대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참회한다고 언급하고, 학대 문제는 다른 모든 외국인 강제노동 동원에 묻어가는 식으로 돌려서 진술했다. 훗날 이 문제는 A급 전범에 대한 1차 재판이 끝난 후 개최된 종범 재판들에서 추가 공개된 증거들에 의해 슈페어 역시 알면서도 묵인했거나 참여(적극적이었는지 소극적이었는지는 당사자만 알 일이다)하기도 했음이 입증되었다.
  • [22] 슈페어가 출소 후 슈페어의 친형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대해 슈페어가 "유대인? 그들은 애굽에서도 200년간 벽돌을 굽지 않았는가?"(구약성서에서 따르면 이집트에서 200년간 노예생활을 했음)라고 말한 걸 기억한다고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편지로 비판했다. 귀도크놉 著, 《히틀러의 뜻대로 -조력자들-》 참조.
  • [23] 슈페어의 형량에 있어서 미, 영, 프랑스 판사들은 10년형 정도를 검토했으나 소련 판사의 강력한 반대로 20년 형을 받았다.
  • [24] 몇몇 유명 인사들이 슈페어의 재능을 높게 사서 슈페어 사면 청원 운동을 벌였다. 여기엔 샤를 드 골 대통령, 심지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검사팀 중 한 명이었던 하틀리 셔크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량 감경을 위해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으나, 소련이 강력히 반대했기에 20년 형을 다 살아야 했다.
  • [25] 일례로 괴벨스의 부인 막다 괴벨스가 있다. 슈페어의 자서전에는 그녀가 남편의 강요로 인하여 아이들과 자살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 그녀의 행보와(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였다) 유일하게 밖에 있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제3제국이 없는 세계는 의미가 없으니 아이들에게 그런 세계에서 살지않게 하겠다는 내용) 그리고 괴벨스가 막다 괴벨스에게 아이들과 베를린에서 비행기로 탈출하라고 설득했다는 괴벨스 부관의 증언으로 인하여 부정되었다.
  • [26] 그도 슈페어처럼 재판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인물이었으며, 슈페어 스스로도 의사와의 면담에서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회하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 [27] 회고록에서는 그당시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건물 크기나 높이가 건물의 가치나 사람에 끼치는 위엄에 대해선 별 상관이 없었는데 뒤늦게 깨달았다고는 인정함
  • [28] 히틀러가 승리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걸작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이 건물에 18만명이 꽉 차면 사람들의 입김이 돔 지붕 밑에서 구름으로 응결되어 비를 내릴 정도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나치가 승리한 대체역사에서 그 특유의 쓸데없는(...)웅장함과 거대함 때문에 꼭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