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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후지모리

last modified: 2015-04-11 18:44:51 Contributors


Alberto Fujimori / 藤森 謙也
스페인어에서는 스페인어 철자-발음 대응 규칙에 따라 알베르토 푸히모리(ㅍ는 /f/ 발음)라고 불린다.

Contents

1. 개요
2. 성장배경
3. 정치계 입문 이후
4. 창작물에서

1. 개요

페루일본막장 정치인이자 제 90대 대통령(1990~2000).

페루의 전 대통령(제90대. 재임기간 : 1990년 4월~2000년 11월). 남미로 대거 이주한 일본인 이주자의 자손으로, 일본명은 후지모리 겐야(藤森謙也).그래서 공식적인 이름은 알베르토 켄야 후지모리 후지모리(Alberto Kenya Fujimori Fujimori)가 된다. 스페인 문화권에서는 보통 부모의 성을 같이 쓰는데, 근대 이후 일본에서는 부부동성을 적용해왔기 때문에 어머니 성도 후지모리이니 후지모리가 이름에 두 번 들어가게 된 것. 다만 후지모리란 로마자 표기를 스페인식 독법으로 읽으면 '푸히모리'가 된다. 동양계의 인물이 비동양계 주류인 국가에서 최고지도자에 오른 흔치 않은 경우임과 동시에 막장 정치인의 몰락이라는 훌륭한 반면교사의 예.

페루 국민에게는 독재자, 천하의 개쌍놈 그런데 정작 페루에선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등 경제를 살렸다는 이유로 후지모리를 좋게 보는 사람도 은근히 많다. 아래 단락에서 보듯이 그의 딸인 케이코 후지모리가 선거 초반에 우세를 보였던것도 이 때문. 사실 이후의 재임했던 톨레도와 알란 가르시아도 경제성장을 제외한 나머지 내치에선 딱히 좋은 평(정확하게 말하자면 고질적인 빈부격차 문제때문에 부가 제대로 잘 돌아가지않는다는 것)을 듣지 못한 이유도 있긴하다.

톨레도는 페루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이지만 임기 내내 지지율은 영 좋지않았고, 임기중에 오얀타 우말라[1]에 의해 쿠데타 위기를 맞을 정도였다. [2] 또 알란 가르시아는 알베르토 후지모리에 의해서 체포직전의 상황에까지 몰렸다가 탈출하여 콜롬비아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후지모리가 물러난 뒤에 치러진 2001년 대선에서 예상을 깨고 결선투표에 진출하고 결선투표에서 46.9%의 득표를 올려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6년 대선때 우얀타 우말라가 치고올라오고 우파후보가 1차 투표에서 전부 떨어지자 온건노선을 내세우면서 집권하게 된 것. 우리나라로 친다면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에서 퇴임 뒤에 차차기 대통령선거에 출마해서 만만치않은 득표력을 보였고 그 다음 대선에도 출마해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고 생각해보면 된다(...). 물론 2기 집권시에는 1기 집권때보다 경제면에서 월등히 나은 성적표를 받았지만 톨레도보다 보수적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사회정책에서 보수적인 정책으로 일관한데다가 경제성장에도 빈부격차 문제도 여전해서 사실 지지율 자체는 그리 좋지 않았다.

2. 성장배경

1938년 페루의 수도인 에서 태어났다. 후지모리의 부모는 후지모리가 태어나기 몇 년 전, 일본 구마모토에서 페루로 이민왔다고 한다. 후지모리의 출생 당시 부모는 일본 국적자였고, 페루는 페루 땅에서 태어나면 무조건 페루 국적을 부여해주기 때문에 후지모리는 일단 출생과 함께 이중국적자가 되었다. 이후 성인이 되면서 1958년에 일본 국적은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페루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출생 당시에는 자국 국적을 보유한 사람만 대통령 출마 자격이 있고, 페루에서 태어나 태어날때부터 페루 국민이었던 후지모리는 대통령 출마 자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런데, 실은 일본에서 태어나 출생 당시에는 페루 국적이 없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페루에서 태어난 것으로 출생기록을 조작했다는 떡밥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페루 헌법상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게 되는 것인데 아무튼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후지모리가 대통령이 되면 일본의 지원으로 경제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감에 그냥 묻혔다.

의 일본 이민가정에서 자란 후지모리는, 페루 국립농업대학교와 미국 스콘신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페루로 돌아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대학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페루에서 농업과 경제 전문가로 유명해졌고, 1985년 페루 국영 텔레비전 토크쇼의 진행자가 되었다.

3. 정치계 입문 이후

이후 후지모리는 1989년에 개혁정치를 내세우는 정치단체 Cambio90이라는 정당에 참여하면서 199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자신의 트랙터와 트럭을 몰고 검소하게 선거운동을 치르고 중도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유력후보로 급부상하였고 1차 선거에서 29.2%의 득표율로 결선에 진출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결선투표에서 세계적인 작가 리오 바르가스 요사(당시에 민주전선 소속[3][4])를 압도적인 격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62.4% VS 37.6%)

선거 초반에는 전임 알란 가르시아의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인한 IMF와의 갈등으로[5] 외국기업들이 대거 철수하고 물가가 과도하게 상승하는 김을 보이자 은행국유화 정책을 실시했다가 오히려 역풍을 타서 때문에 안 그래도 외채문제와 원자재값 하락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신음했던 페루의 경제가 더더욱 침체되었기에[6] 은행국유화 반대운동을 펼쳤던 민주전선 소속의 요사가 여유있게 압승할걸로 예측이 되었다. 하지만 당선되었다면 90년대 후반기의 경제위기 때문에 자신이 열심히 씹었던 알란 가르시아 꼴와 비슷한 꼴 되었겠지(...)

그런데 이미 70년대-80년대에 걸쳐 중남미 상당수 국가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했었던지라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있었고, 알란 가르시아가 경제를 망쳤다고 해도 그 이전의 벨라운데 테리가 경제적으로 잘한것도 아니긴 했다. 그나마 상처가 덜 했긴 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장 먼저 실험된 곳이 바로 칠레나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의 남미 국가들이다. 때문에 페루 원주민들은 요사의 급진적인 신자유주의적인 공약(이른바 충격요법)과 호화판 선거운동에 불안감을 느꼈다. 반면 소박하게 선거운동을하는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겐 호감을 느껴 대거 찍어댔다. 결국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압승으로 요사를 꺾고, 일본계로는 처음으로 페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 중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적극적 외자유치(대부분 일본)로 재정적자 개선에 성공(물론 실제로 긴축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민영화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경제가 성장세였던건 일본의 덕이 크긴하다.), 국민의 지지와 함께 경제발전에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좌익 게릴라들인 투팍 아마루 해방운동이(MRTA. Movimiento Revolucionario Túpac Amaru) 일으킨 일본대사관 인질사건 때 단호한 대처로 강인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재임 중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며 국회를 해산, 병크의 문을 열었다.


후지모리는 쿠데타의 이유로 헌법 개정을 들먹임으로서 부르주아 일색인 의회에 반감을 가진 서민층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새 헌법이 통과되면서 당시 지지율은 73%까지 찍기도 했으나, 이때문에 외교와 외자유치에서 벼랑끝으로 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경제는 다시 성장세를 보였다. 이 때 그의 부인인 히구치 후지모리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사람이 변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부패에 연루되었다고 폭로하며 이혼을 했음에도 1995년 대통령 선거에 64.4%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어 2차까지 가지 않고도 재선에 성공했다.

여하간 그 정도로 인기가 높았기에 90년대 중반 정도에 페루에 가면 동아시아인에게 무조건 니치와가 늘 나왔다. 당시 페루를 여행간 사람이 책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후지모리에 대한 대다수 지지층 인기가 엄청났다. 그러나 2000년 초반에 다시 페루를 갔을 때에는 후지모리에 대한 인기는 온데간데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헌법으로 3선을 금지시키면서도 자신은 구 헌법을 통해 3선 대통령이 가능케하는 추태를 저지르는가 하면 좌파 및 반대자에게는 구 정권보다 더욱 강력한 탄압을 하여 추락을 거듭했다. 후지모리도 정작 1990년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좌파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배은망덕. 근데 그럴만도 한게 임기 초기 의회와 갈등을 엄청빚으면서 탄핵직전에 갔다가 의회해산으로 선빵때린거니 뭐... 거기에다가 1997년에서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외환위기와 외자이탈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콜롬비아 등 중남미 주요국의 경제가 줄줄히 파탄상태에 직면하면서[7] 페루도 영향을 받아 그나마 성과로 내세웠던 경제가 급속히 침체되어버렸고, 그 동안 시행했던 정책에 대한 반발감이 거세져서 후지모리의 입지도 좁아졌다. 결국 지지율이 급속도록 떨어진 후지모리는 야권에 대한 공작과 선거인 명부조작등 부정선거를 시도했고 그럼에도 1차 투표에서 과반이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지못해서 하지만 출구조사에서 모두 톨레도가 앞섰던데 비해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2위로 뒤쳐졌진 상황이었고, 결국 이 상황을 보다못한 야당후보인 톨레도 후보가 항의차원에서 사퇴한 상황에서 치러진 2차 투표에서 과반을 겨우 넘는 51.7%의 득표율(32%가량이 무효표였고, 16%는 톨레도 후보의 표)을 얻었다. 이렇게 3선에 간신히 성공했지만 그 직후 영구집권을 기도하며 야당의원을 매수한 스캔들이 폭로되어 국민의 지탄을 받으며 국회의 탄핵소추에 의해 실각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페루는 일본 측에 후지모리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에서 후지모리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국민인 후지모리를 보호하기 위해 송환할 수 없다고 하여 거부했다. 일본은 1985년 국적법 개정 이후 복수국적을 불허했고 84년까지 이중국적이었던 사람들은 그대로 인정해주고 있는데, 후지모리는 일본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이중국적 상태를 숨기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

결론적으로 이중국적자가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다가, 비리를 저지르고 체포당할 처지가 되자 또 다른 국적국(사실 모국)으로 도망친 파렴치한 짓을 벌인 것이다.

2005년 칠레로 입국했는데 칠레 당국은 후지모리를 체포해 가택연금시켰다. 그 후 칠레에 연금된 상태에서 일본의 보수 정당인 국민신당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참의원 선거에도 출마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이게 왜 기행이냐면 한 나라의 국가원수까지 지냈던 사람이, 국가원수였던 시절의 비리 혐의를 받고 수배 중이면서 다른 나라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전례가 없기 때문... 그러나 아소 다로 당시 외무장관이 후지모리의 입국을 전면적으로 불허했고 게다가 당연히 낙선했다. 이렇게 아소 다로도 개념인이 된다

다시 시간이 지나 마침내 2007년 칠레 정부에 의해 페루로 압송, 구속되었다. 그리고 2010년 재임 중 저지른 각종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으로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인권침해 및 국고유용, 야당 후보 도청, 부정선거 등등. 특히 특수부대를 동원한 반대파 주민(원주민 인디오) 수십 명 살해 관련 혐의가 문제가 됐다. 이후 고령을 이유로 사면 이야기가 나왔지만 워낙 잘못을 많이 한지라 국민들 상당수는 사면을 반대하고 있다.

그나마 후지모리에게 가장 멋지던 때가 1996년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 사태에 직접 방탄복까지 입고 선봉에 나서던 일이다. 그러나 이젠 잊혀진 일이 되어버렸다. 이 시절 한국에서도 이름세를 떨쳤고 페루에서도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며 연구하고 있다고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후지모리의 몰락 이후 새마을 운동과 묶어서 보도하는 일은 일절 없다.

케이코 소피아 후지모리 히구치라는 딸이 있는데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대통령 재임 도중에 부인이었던 수사나 히구치와 이혼하면서 19세부터 실질적으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래저래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의 젊었을 적 시절과 유사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전처인 수사나 히구치가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이혼한 이유는 남편인 후지모리와 시부모, 시누이가 부정부패범이라고 대놓고 말했기 때문. 이 딸이 2011년 페루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당시 만 35세[8]에 안되던 소피아 후지모리는 1차 투표에서 23.6%의 득표율로 2차 선거에 진출한 뒤, 선거초반에 오얀타 우말라를 앞서는 맹활약을 하여 후지모리의 후광은 여전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선거과정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이 1990년대에 빈곤층 여성에 행한 강제불임수술 시행 문제가 드러나면서 소피아 후지모리는 선거에서 낙선했고, 이후 우말라 정권은 이 문제를 공소시효 만료도 무시할 인권문제로 규정해서 들고 파고 있는 중이다. 뭐, 동시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어차피 별 도움은 못되는게 좌파든 우파든 후지모리에게 당한게 많은지라... 그래도 48,4%라는 만만치않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사실 이건 페루 정계에서는 이상한 일은 아니며 1기 집권 당시에 개혁미흡이나 경제파탄 등으로 엄청난게 까였던 벨라운데 테리나 알란 가르시아도 선거를 통해 대통령 직에 복귀한 사례가 있다.

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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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현직 페루 대통령이다. 물론 아래 단락에서도 써져있듯이 쿠데타로 집권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물론 페루역사에서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대통령이 있긴 하다.) 차베스처럼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긴 하다. 2006년 대선에서 알란 가르시아에게 패배한 경험덕분에 2011년 대선에서 좀 온건한 노선으로 집권하긴 했다. 참고로 쿠데타 시도전에 서울에서 근무했다.
  • [2] 하지만 2011년 대선에 나섰을때엔 선거초에 여론조사에서 1위로 통과되었을걸로 예측되었을정도의 지지세를 보였다. 선거 막판에 DTD 모드를 타서 4위로 낙선했지만(그래도 15%대의 만만치 않은 득표를 기록했다.)
  • [3] 아래 각주에 언급되는 벨라운데 테리(1912-2002, 1963-1968, 1980-1985년 대통령 재임)도 이 정당 소속이었다.
  • [4] 요사는 1960년대에는 쿠바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지식인이었고, 군사독재와 부정부패를 격렬하게 까던 작품을 썻지만 1970년대의 여러 일들을 거치면서 점차 보수적이 되었고 이후에 온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다가 1980년대 페루 귀국때부터는 아예 우파로 전향하였다. 이후에 여러 괄목할만한 활약과 흑역사를 쌓다가 80년대 중반에 총리직 제의를 거절하고 은행국유화 반대 운동으로 대대적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후에 알란 가르시아 저격수로 나서게 되면서 1990년 대선에 출마한 것. 물론 네임밸류가 있어서 선거운동 초기에 압도적으로 지지받을것으로 예측되었지만 토론회에서 초긴축 정책을 해야하느니 인원감축을 해야하느니라는 식으로 발언하고 호화판 선거운동을 벌이면서, 빈민층 사이에서 지지율이 폭망하는바람에 결국 2차 선거에서 후지모리에게 처참하게 밀리며 낙선하고 말았다. 대선 패배이후 대선과정을 적은 책을 냈는데 욕을 실컷 얻어먹었고, 이후에 1993년에 후지모리의 친위 쿠데타 시도에 반대하면서 스페인 국적을 취득하며 스페인에 머무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 [5] 사실 초기에는 9%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시원하게 출발하였다. 알란 가르시아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고 연설이나 토론 실력도 발군인데다가, 미모의 아내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페루의 케네디"라 볼리며 재임 초기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를 보이며 재임 초기에는 8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고, 채무문제에서 페루의 현실이 어떤지 보여주며 채무협상에서 큰소리 떵떵치면서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1987년부터 은행국유화 선언으로 우파진영과 갈등을 빚기시작하고, 든든한 뒷배경없이 협상에 나서다보니까 외환보유고는 계속해서 줄어들었으며, 그 이후엔 말 그대로 DTD 테크를 탔고, 초기에 공약으로 내걸었던 빈부격차 문제 해소 공약도 경제성장률의 급감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날라가는 바람에 집권 말에는 페루 각지에서 공산반군들이 페루 각지역을 점령하며 내전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임기 중반에 60%까지 낮아졌던 인플레율이 7000%를 넘어가고 부정부패도 판을 치며 지지율이 10% 아래로 떨어지며 폭망하였다. 그러나 알란 가르시아는 그의 정적인 요사가 결선에 올라가자 후지모리를 지원하며 복수(?)에 성공했지만, 후지모리가 개헌을 시도하자 그에 저항하다가 역으로 털릴위기에 처하자 1993년에 콜롬비아, 프랑스로 망명을 갔고,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이 무너지자 페루로 복귀했다. 곧이어서 톨레도가 후지모리적이라고 공격하면서 2001년 대선에서 46%의 득표를 확보하며 재기에 성공하였다. 이후에 톨레도 저격수로 활동하다가 2006년 대선에 나서서 우파 후보가 전부 떨어져나간 반사시익으로 재 당선되었다.
  • [6] 사실 이러한 경제문제는 알란 가르시아의 전임인 벨라운데나 1970년대 군사정권 시기때에도 있어왔고, 그로 인해 군사정권이나 벨라운데도 쓸쓸하게 정권을 내줘야되었을 정도지만, 알란 가르시아 1기 집권 후반기의 초 인플레이션(연간 7000%대)은 페루 역사에서도 그야말로 기록적인 일이었다.
  • [7] 이때의 경제난이 21세기 초의 중남미 좌파천하의 원인이 되었다.
  • [8] 사실 이전에 알란 가르시아도 만 36세에 대통령 선거에 나서서 당선된바 있으니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었다. 물론 1기 집권시의 알란 가르시아 정권이 폭망했다는건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