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알렉시우스 1세

last modified: 2014-09-27 22:36:54 Contributors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니키포로스 3세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왕조 없음 콤니노스 왕조 콤니노스 왕조

그리스어: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Ἀλέξιος Α' Κομνηνός)
라틴어: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 (1056 ~ 1118, 재위기간 1081 ~ 1118)

Contents

1. 개요
2.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기
3. 배경, 출신 및 데뷔
4. 제위 등극
5. 외적의 침공에 맞서다
6. 제국의 쇄신
7. 서방에 원조를 요청하다
8. 제1차 십자군 전쟁기
8.1. 보에몽과 알렉시오스
9. 평가

1. 개요

중세 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럽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대의명분을 부여한 황제이다. 제국의 명군 중 한 명으로서, 만지케르트 이후 자칫 위험했던 제국의 수명을 사실상 300여 년 연장한 위대한 황제로 꼽힌다. 그의 아들인 요안니스도 비잔티움 역사에 손꼽히는 명군의 자질을 가졌고, 콤니노스조의 제국은 3대 1백년에 걸쳐 다시 한 번 번영을 누리게 된다.

참고로, 콤니노스조의 안정을 위해 실시했던 족벌주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시오스 1세 이후로 모든 황제는 단 두 명[1]만 빼고 전부 알렉시오스의 후손이다. 다만 중간에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 결국 부계 후손은 단절되었지만[2] 모계 후손으로는 계속 유지되었다. 콤네노스 황조의 뒤를 이은 앙겔로스 황조를 세운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1세의 딸 테오도라 공주의 외손자이고 그 뒤를 이은 팔레올로고스 황조와 바타체스 가문은 그 앙겔로스 가문으로부터 알렉시오스 1세의 피를 물려받았다.[3] 그야말로 후기~말기 비잔티움 황제들의 조상님 되시겠다.

2.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기

비잔티움 황제였던 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의 조카로 비잔티움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더불어 젊어서부터 군사적인 재능을 보인 뛰어난 젊은 장군이기도 했다. 다만, 알렉시오스 1세가 장군으로 활약하던 시기는 비잔티움 제국의 대표적인 몰락기였다.

일단 마케도니아 왕조의 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부터 즉위한 황제들이 하나같이 정치는 물론이고 군사적 재능따위 개나 줘버린 막장[4]들이라 그동안 닦아놓은 제국을 신나게 말아먹고 있었고, 게다가 1071년 지케르트 전투에서 마노스 4세가 대패하여 셀주크 조에 포로로 잡힌 후에 폐위당하고, 이후 이 패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신(5만명의 대군 중 무려 2만명을 빼돌려 퇴각하셨다.)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가문인 명문 수도귀족 두카스 가문이 제위를 다시 차지했다. 그리고 이 두카스 왕조더럽게 무능했다. 한 예로 카일 7세 두카스의 별명은 '파라피나키스'였는데, 이는 '마이너스 1/4'이라는 뜻이다(...) 화폐가치가 1/4 떨어져서(...)

3. 배경, 출신 및 데뷔


콤네누스 가문은 황제 바실리우스 2세 당시에 처음으로 출현한 가문으로, 바실리우스 2세 당시 기존에 지방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스클레루스 가문과 포카스 가문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이후 새로운 군사귀족을 육성하기 위한 바실리우스 2세의 정책의 일환으로 등장하였다. 알렉시우스 1세의 조부 마누엘 콤네누스는 아르메니아에 기원을 둔 아나톨리아 귀족으로, 바실리우스 2세 때 출세하여 파플라고니아에 영지를 받음으로써 가문을 개창하였다. 이후 마누엘 콤네누스의 아들인 이사키우스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를 차지함으로써 콤네누스 가문은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나, 이사키우스 1세가 즉위 이후 총대주교와의 심한 마찰과 사냥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퇴위하고 제위가 두카스 왕조스탄티누스 10세에게 돌아감으로써 핵심적인 세력으로 등극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알렉시우스 1세는 이사키우스 1세의 동생인 요한네스 콤네누스와 안나 달라세나의 아들로, 두 형인 마누엘과 이사키우스처럼 어릴 때부터 군문에 들게 되었다. 알렉시우스가 본격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루셀 드 바이욀(바일레울의 루셀)이 제국 정부의 혼란기를 틈타 야기한 반란으로, 당시 제국군 실력자이던 형 이사키우스가 출전했다가 오히려 포로로 잡히고, 심지어는 황제 미카엘 7세의 숙부로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요한네스 두카스 부제마저 출전했다가 또다시 포로로 잡혀 오히려 황제로 선언당하는(...) 등 전황이 심각하게 불리해지자 20살도 채 되지 않은 알렉시우스가 제국군 사령관에 보임된 것이다. 알렉시우스는 황제의 정책에 따라 투르크 인들에게 뇌물과 영토 종주권을 승인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 루셀을 진압하여 형 이사키우스와 요한네스 부제가 모두 귀환하게 되었으나, 황제 미카엘 7세는 요한네스 부제를 황제를 참칭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반란죄로 체포하여 실각시킨 뒤 수도원에 유폐시키고 스승 프셀루스 미카엘 등을 비롯한 측근 세력을 숙청하여 친위 세력을 육성하였으나, 기존 두카스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그나마의 권위와 정치 수완마저 날려먹는 결과만을 초래하여 오히려 중앙 정부의 급속한 붕괴와 이하의 병크들을 유발하는 역효과를 낳게 되었다.

사실상 점유와 공식적 점령은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고, 결국 미카일 7세는 투르크 인들에게 소아시아에 정착할 명분을 주게된다. 게다가 경제에도 무능해서 돈이 부족하면 더 찍으면 되지. 뭐? 금이 부족해서 금화를 못찍어? 그러면 구리를 섞어!라는 간단한 해결방책으로 당시 지중해의 기축통화로 쓰이던 노미스마(이전 솔리두스) 화의 가치를 1/4로 떨어뜨리는 기염을 토하며 제국을 총체적으로 말아먹다가(그래서 미카엘 7세의 별명은 무려 파라피나키스(1/4).)결국 1078년 동방의 총사령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에게 제위를 빼앗긴다. 하지만 동방의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와 동시에 출현한 서방의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여전히 건재하였고,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는 그를 진압하기 위해 그나마 동방에 남아있던 군사를 모두 철수시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하였다.

4. 제위 등극

결국 위기 의식을 느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무능한 니키포로스 3세보다는 여러 전공을 세우면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알렉시오스와 그의 형 이사키오스를 더 신임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황제를 배출하고 있던 두카스 가문도 일족의 제위를 보장해 줄[5] 사위인 콤니노스 형제가 더 낫다고 판단하고 있던 차에, 어른들의 사정이 더해져 결국 니키포로스 3세는 제위를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추방당했고, 콤니노스 형제들 중 동생 알렉시오스가 황제에 올랐다.(그 사정은 아래 두카스 가문에 대한 각주를 참조)

하지만 형 이사키오스도 그에 못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알렉시우스는 형 이사키오스를 위해 부제(Καισαρας, Caesar)보다도 더 높은 세바스토크라토라스(σεβαστοκράτορας, Sebastokrator)라는 작위를 신설하여 항상 가까이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081년 4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코스마스가 집전하는 대관식에서 황제의 관을 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약간의 분란이 있었는데, 황후로 즉위해야 할 알렉시오스의 부인 이리니 두카나[6]가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것.

이는 미카일 7세의 황후이자 니키포로스 3세의 황후였던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알렉시오스의 염문설로 인하여 더욱 불거졌고(알렉시오스가 부인을 버리고 황후와 결혼해 황제가 되려한다!), 이리니 두카나의 가문이자 콤니노스 형제의 반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두카스 가문의 격렬한 분노를 샀는데, 이는 알렉시우스의 모후 안나 달라시나가 두카스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벌인 술수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워낙 두카스 가문이 드셌고 또 총대주교 코스마스도 퇴진 압력을 받으면서까지도 이리니의 대관식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는 성사되었다. 시작부터 황제 가문와 황후 가문의 갈등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알렉시오스는 비잔티움의 선임 공동황제로서 지급한 위기에 당면한 로마제국의 옥좌에 앉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는 마리아와의 약속대로 공동황제로 봉해졌다. 1083년 알렉시오스 1세의 장녀인 안나 콤네나가 태어나자 곧장 약혼을 시켰는데, 1087년 아들 요안니스가 태어나자 제위에서 밀려나 곧 죽었다. 아마 알렉시오스 즉위 이후 수녀원으로 들어가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한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를 배제하려는 의도와, 아들 요안니스가 태어나자[7] 콤니노스 황조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알렉시우스의 고의로도 해석될 수 있다.

5. 외적의 침공에 맞서다

알렉시오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외적의 침입에 맞서야만 했다. 우선 즉위한 해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동하던 노르만 족이 알바니아 지역을 침공하였다. 당시 바실리우스 2세가 죽고 난 뒤부터 비잔티움령 남 이탈리아가 점차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데다가 1071년 마지막 비잔티움의 이탈리아 거점인 바리가 노르만의 스카르 로베르에게 점령당함으로서 완전히 세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알렉시우스 1세는 디라히온(두라초)에서 기스카르 로베르와 접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이후에도 수 차례 패배를 당하며 제국의 서부를 거의 상실할 위기에 처한다.

당시 제국의 자체적인 능력으로 이들을 맞서는 것이 어려웠기에 알렉시오스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각종 무역특권을 떡밥으로 제공하여 해군을 지원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보내는 사절에게 막대한 뇌물을 들려주어 파견, 이탈리아 지역의 노르만 본진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게다가 1085년 노르만 진영에 역병이 돌아 희대의 침략자 로베르 기스카르가 죽자 그를 따르던 귀족들은 상당수 남이탈리아로 돌아가 장남 보에몽이 물려받은 제국의 영토는 이제 기량면에서나 군사력 면에서나 우위를 점한 알렉시우스 1세에 의해 급속히 탈환되었다. 그 덕분에 첫 번째 침입은 무사히 넘길 수 있다. 이후 페체네그족이 발칸반도를 침공하였는데, 페체네그 족에 적대적인 쿠만 족과 동맹을 맺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6. 제국의 쇄신

대내적으로 알렉시우스는 미카일 7세가 벌여놓고 니키포로스 3세가 악화시켜놓은 모든 것을 쇄신해야만 했다. 우선 미카일 7세가 떨어뜨려놓은 화폐 가치를 회복해야 하였으나, 이는 이미 제국의 국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불가능하였으므로 오히려 더 질이 낮은 금화를 마구 찍어내서 유통하고는 금 함량이 높은 화폐를 세금으로 거둬들였다.(흥선대원군 시절 지방관들이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고 당백전으로 돈을 풀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하여 충당된 돈은 모조리 군비로 쏟아부어지기는 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일단 막장에 이르른 군대는 어느정도 수습이 되었다. 또 10년 간 4번에 걸친 제위찬탈로 인하여 급격히 불안해진 제국의 중앙정부를 수습하기 위해 모후 안나 달라시나와 형 이사키오스를 비롯한 일가붙이는 물론 처가인 두카스[8] 가문을 비롯한 여러 친인척들을 중앙에 배치하여 안정적인 황제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후 어느정도 혼란이 수습되자, 알렉시우스는 저질 금화의 주조를 금지하고 기존 노미스마의 금 함량의 7/8을 함유한 금화, 히페르피론(hyperpyron)을 주조하여 다시금 제국의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7. 서방에 원조를 요청하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은 1090년에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페체네그 족의 침입으로 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쿠만 족이 스스로를 로마노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앞세워 트라키아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셀주크 투르크도 계속 비잔티움 제국을 계속 공격하였는데, 황제는 신임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Kılıç Arslan)과 스미르나 지역의 토후인 카차의 반목을 유도해 클르츠 아르슬란과의 협정을 통해 외교적으로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과 이슬람계 군주들과 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을 피하려 하였다. 하지만 즉위 초기 서방에서 벌어진 군사활동들로 인하여 동방의 영토는 점차적으로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정부사태에 이르거나 튀르크 침략자들에게 점령당하였다.

결국 비잔티움의 힘만으로는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알렉시오스 1세는 서유럽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파문을 선고하면서[9]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로마 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으나, 이즈음 새로이 교황으로 등극한 우르바노 2세가 알렉시오스 1세의 파문을 취소하는 등 비잔티움 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고, 이에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교황의 초청을 받아 1095년 3월 피아젠차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제국의 어려움과 성지회복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워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투르크 인들에게 대적하기 위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우르바노 2세 역시 전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권의 신장을 꾀하면서 이를 공고히 할 필요성이 생겨나고,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과 노르만 세력(로베르 기스카르) 사이에서 교황 자체의 무력적인 기반이 약화되자 비잔티움 제국과의 화합을 꾀하는 동시에 무력 원조를 통한 입지 강화 및 동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이는 쉽게 수락되었고 나아가 알렉시오스 1세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8. 제1차 십자군 전쟁기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프랑스 남부 클레르몽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하여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면서 제1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당초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통해 적당한 규모의 지원병력[10]을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교황의 호소에 따라 조직된 제1차 십자군은 서유럽 국가들의 영주, 기사들이 대거 참여한 대규모 병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성지탈환이라는 떡밥이 던져지면서 너도나도 십자군에 참여하여 병력의 규모는 지나친 수준을 초월한 규모로 커져버렸으며, 쓸때없이 규모가 커진 십자군은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골치거리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들이 와서 싸지른 것들을 뒷처리한다고 상당히 골머리를 썩었지만, 1095년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이라는 예방주사(...)를 맞은 알렉시우스 1세는 식량을 비축하고 십자군에게 호송대를 붙이는 등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보급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큰 마찰없이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까지 데려오는데 성공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프랑크 인들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11] 십자군 군주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고 앞으로 점령할 영토의 종주권을 비잔티움 황제, 즉 자신에게 넘길 것을 맹세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군주들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나, 선물과 회유를 비롯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알렉시오스는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하였다. 다만 남 로렌의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문제였는데, 백작가문의 둘째 아들로(11세기 후반부터 봉건제도가 확립되자 장자가 거의 모든 상속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노퓨처 인생을 살다가 신성로마 황제에게 충성하여 공작 작위까지 받은 그로서는 신성로마 황제 이외의 군주에게 충성서약을 할 수 없노라고 강변하였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가 식량 공급을 차단하자, 보복으로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촌락을 약탈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성벽에 배치된 제국군 궁병대의 반격으로 물러났다가 황제가 정규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할 생각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충성서약을 하였다. 노르만 침략 때 주요한 역할을 했던 보에몽도 있었는데, 그는 동생 루지에로에게 모든 유산을 빼앗기고[12] 허송세월을 보내다 십자군 모집 공고를 보고 아녀자들까지 급하게 끌어모은 군대를 가지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한 것이었다. 보에몽은 모범적으로 서유럽 군주들에게 앞장 서 알렉시오스에게 충성서약을 하였으나, 뒤에서 은밀하게 황제에게 동방의 제국군 총사령관 직위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알렉시우스 1세는 이제 슬슬 중견에 접어든 황제 경력으로 말미암아 적당한 때가 되면 반드시 신중하게 고려해보겠다.는 외교적인 답변을 해주고는 스리슬쩍 넘어갔다.툴루즈 백작 레몽은 곧죽어도 충성을 안하겠다고 버텼는데, 애송이 고드프루아처럼 성급히 군사적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완고하게 버텼으므로 알렉시오스 1세도 GG치고 황제의 명예와 안전을 최대한 존중하고 보호하겠다는 약속만 받기로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중에서 서약을 가장 충실히 지킨 것은 레몽이었고, 가장 빨리 어긴 것은 보에몽이었다.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여차저차 1차 십자군은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진군하였다. 최우선 탈환 대상은 셀주크 투르크의 소아시아 분점(...)인 룸 술탄국[13]이 수도로 쓰고 있던 니케아였다. 당시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이전의 민중 십자군이 니케아를 공격할 때 그들을 계략으로써 제리고르돈 요새에서 완전히 파쇄하여 이에 방심하여 아예 원정을 떠나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니케아를 전투민족 프랑크 인들과 현지에 밝고 기술력이 뛰어난 비잔티움 군대가 두들겨대니 쉽게 함락...하였는데, 니케아같은 유서깊은 대도시가 프랑크 인들에게 점령당하면 관례에 따라 사흘 동안 벌어질 약탈이 엄청날 것임을 우려한 알렉시오스 1세는 도시가 점령당하기 전날 밤 밀사를 파견하여 항복하면 약탈은 면하게 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다음 날 총공격을 준비하던 프랑크 인들의 눈에는 니케아 성에 펄럭이는 황제의 군기가 보였다. 게다가 황제는 클르츠 아르슬란의 아내와 자식들을 정중하게 콘스탄티노플로 모셔갔고, 이후 술탄이 돌아오자 반환하였다. 이는 십자군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우리는 이교도를 때려잡는 WAAAAAAGH를 원했다고!, 이것이 비잔티움과 프랑크 인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벌어진 첫 번째 사고였다.

하지만, 비잔티움은 자신의 땅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었고, 십자군은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고 부를 원했으므로 이해관계의 상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와중에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클르츠 아르슬란이 군사를 이끌고 도릴레온 협곡에서 십자군을 요격하지만, 처참하게 발리고 퇴각한다.

룸 술탄국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잃은 소아시아 인근의 고만고만한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난하게 탈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팔레스타인까지의 진격이 성공하여 예루살렘까지 탈환하였으며, 예루살렘 왕국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십자군의 영주와 기사들은 이러저러한 불미스러운 갈등들로 인하여 사이가 틀어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 충성할 생각이 없었으며,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작국과 같은 국가들이 난립하였다. 결국 알렉시오스 1세가 힘으로 찍어눌러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고, 소아시아의 곡창지대와 시리아 지역 일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 국가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은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십자군 국가와 대립할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원래 비잔티움 제국과 사이가 안좋던 노르만 족, 즉 보에몽이 세운 안티오키아 공국은 그리스 지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8.1. 보에몽과 알렉시오스

가장 먼저 충성 서약을 했던 보에몽의 이야기는 알렉시우스에게 있어 특별한 것이기에 따로 문단을 할애하여 설명코자 한다. 보에몽은 충성서약을 하였지만 안티오키아를 함락하자마자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선포하고 이에 항의하는 레몽을 까버렸으며(롱기누스의 창 항목 참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묘의 수호자(사실상 국왕)로 등극하자 교황청 특사 다임베르트 주교와 야합하여 예루살렘의 왕위를 얻어내려고 하였는데, 그의 동생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발빠른 대처로 이가 무산되자 하릴없이 무슬림 촌락을 약탈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다니슈멘드 왕조(룸 술탄국과는 형제지간이지만, 원수보다 더욱 격렬하게 싸워대었다. 모든 자식에게 땅을 배분하였던 튀르크 족의 특성상 빈번한 일이었다.)의 한 아미르에게 생포되어, 그 이름도 높은 보에몽 경매를 하게 되었다. 주요 입찰자는 총 세명. 즉위하자마자 그에게 털리고 충성서약에 대해 배반까지 당했던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니케아를 눈뜨고 빼앗기고 도릴레온에서 보에몽의 침착한 지휘에 대패하고 물러났던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그리고 사로잡힌 보에몽 본인(...)이었다. 각 군주들의 입찰가는 다음과 같다.

알렉시우스 1세: 현찰박치기로 26만 디나르
킬리지 아르슬란: 13만 디나르와 휴전 협약 (보에몽을 다른 사람에게 팔면 자신이 공격하겠다고 했다..)
보에몽: 13만 디나르와 군사적 협력

다니슈멘드 술탄은 보에몽의 제안을 채택하였고, 보에몽은 석방되자마자 즉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자신이 없는 사이 안티오키아의 공작 노릇을 하며 자신의 석방을 방해하던 조카 탕크레드를 축출하고 10만 디나르를 신민들에게 짜내어 납부하여 다시 레반트의 주요 영주로 복귀하였지만, 어느정도 세력판도가 잡힌 레반트에서 더이상 자신이 얻을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버지의 숙원이자 자신의 유산인 비잔티움 제국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의 공주와 결혼하고는 아버지 기스카르 로베르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1108년 28년 만에 남이탈리아에서 출병하여 디라히온을 공격한다.

하지만 30년 만에 제국은 이미 유럽 최강대국의 타이틀을 수복한 후였다. 보에몽은 아버지같은 기량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원숙했던 알렉시오스의 상대가 더이상 되지 못하였다. 보에몽은 디라히온을 공격하지만 알렉시오스의 즉각적인 반격에 대패하고, 포위당한 상황에서 전염병까지 창궐하자 안티오키아가 제국의 봉신임을 맹세하는 등의 굴욕적인 조항이 담긴 항복조약인 데볼 조약을 체결하고는 실의에 빠져 남이탈리아에서 죽었다.

9. 평가

이후 열성적으로 정치를 펼치고 각종 개혁에 힘을 쏟으면서 제국을 안정화시켰으나, 제위에 오르는 동안 소수 가문의 지원을 등에 업었던 까닭에 족벌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였고 족벌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결국 이러한 족벌주의 성향은 당대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후대에도 계속 영향을 끼쳐 악역향을 끼쳤지만 비잔티움의 특성 상 정치 안정도가 굉장히 낮았으므로 가장 믿을만 한 일가붙이를 친위세력으로 배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알렉시오스 1세는 비잔티움이 계속 혼란한 이유가 안정된 세습왕조가 아닌 유력자 세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장녀 안나 콤네나의 부군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아닌 아들 요안니스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알렉시우스 1세 초기에 보여준 정치적인 성과는 황제 자신의 능력보다는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던 모후 안나 달라시나의 영향력이란 주장도 있다.

또한 알렉시우스 1세 때부터 반복된 실책으로는, 잠재적인 동맹자가 될 수 있었던 십자군들을 그저 다른 "야만인"들과 다름없이 대해서 적으로 돌린 데 있다. 이게 지나치게 서방 중심적인 생각이란 비판이 있으나, 십자군이 당시 비잔티움에 비하면 군사력만 발전한 정말로 야만적인 군대였고 지나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약속이란 약속은 죄다 깨버려서 그렇다는 것 또한 지나치게 비잔티움 측의 견해만 강조한 주장이 될 것이다.

알렉시오스는 일시적인 용병으로만 십자군을 대했는 데 이것은 십자군 측으로써는 당연히 어느 정도는 모욕이자 기대하던 바와는 달랐으며, 주겠다는 영지에 대한 보장에 대해서도 일관적인 때는 없었다. 이러니 십자군 측이 비잔티움은 믿을 수가 없다고 본 것이 당연하다.

분명 뛰어난 외교관이긴 했으나, 그의 외교정책은 '외교적'이라기 보다는 '권모술수적'이었다. 알렉시오스 1세의 대외정책은 이이제이를 통해 주변 세력들을 이간질시키는 것이 기조였다. 이는 단기적으로 제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나 나중에는 주변국들로부터 믿을 수 없다는 평판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로마 제국 때부터 내려오는 반독립적인 무장 세력을 정치적 안정을 이유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알렉시오스 1세의 정책이 영지 확보를 기대하고 있는 십자군 측의 이해와 정면 충돌한 데 있다. 4차 십자군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된 서로의 불신과 오해가 쌓인 결과다.

언제든 적으로 돌아설 지 모르는 위험한 반독립적인 군대를 왜 그전까지의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시절에는 방관했을까? 몇 차례의 쿠데타와 황가가 교체되는 비극에서도 제국은 꽤 오랫동안 반독립적인 둔전병 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14]

이유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요소요소 쳐들어와서 전략 거점을 고립시킨 후, 그곳을 아사시킨 뒤 차례차례 무너뜨리는 유목 민족 특유의 전술에는 그 방법 외에는 대응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렉시오스 1세의 후계자들은 방어가 어려운 지역을 과감히 포기하여 내실을 튼튼히 했었고 이것도 유효한 전략이지만, 이 경우는 통치자에게 변수가 있었다.
즉 체제를 다루는 통치자가 일시적으로 이 고삐를 놓칠 경우, 방어 체제 자체의 결점이 두드러져서 최악의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다.

콤니노스 몰락의 원인은 집안 싸움과 후계자의 무능이라지만, 제국의 과거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는가? 그때에도 집안 싸움과 무능한 후계자 그리고 내분은 다반사였지만 제국 체제 자체가 흔들리는 적은 없었다.

1071년 제국 영토가 1/2토막이 나고 제국군이 해체되고 재정까지 급격히 악화된 상황에서는 이를 해소할 만한 개혁 정책이 필요할 수 밖에 없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있으나, 다른 때에는 그런 위기가 없었는가? 8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저돌적인 힘으로 맹진할 때에는 더 큰 초유의 위기 상황이었고, 그전의 7세기 때의 사산조 때는 더욱 더 최악이었다. 오히려 이 당시 제국 체제가 11세기의 위기에 있었던 제국보다도 더욱 심각한 상태였다.

이미 흔들린 제국 체제 자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와중에서, 반독립적인 무장 세력들을 모조리 해체해서 정국 안정만을 우선시한 정책 밖의 길은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명군이지만, 그가 행한 모든 정책에 장기적인 배려가 충분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서구 십자군이 그에 대해 품었던 분노와 의구심은 그들 잘못만이 아니다. [15]

그의 딸 안나 콤네나가 집필한 역사서 알렉시아스가 있는데 보통 서구권의 시선과는 다른 시각을 제공해 가치가 높기도 하며 딸이 여간 파더콤 아버지 모에가 아니었는지 알렉시아스 내에서의 알렉시오스 1세는 웬만한 액션 히어로 저리가랄정도의 무력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쓰여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같은 느낌이 난다.[16]

사족이지만 알렉시오스 1세는 사후 대제 칭호를 받지 못했으나, 콤니노스 왕조가 결정적으로 쇠하게 된 시절 재위한 마누엘 1세는 대제 칭호를 받았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유일한 로마 제국의 대제.[17]

----
  • [1]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알렉시오스 1세의 후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5세는 알렉시오스 1세의 처가인 두카스 가문으로 알레시우스 1세의 외증손자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였고 특히 테오도로스 1세는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로 모계 계승을 통해 알렉시우스 1세의 대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외증손자 요안니스 4세가 미카일 8세에게 폐위당하면서 대가 단절되었다.
  • [2] 알렉시우스 1세의 사망 후 증손자 알렉시오스 2세까지 순조롭게 부자승계를 이어 나갔지만 어린 알렉시오스 2세가 죽음을 당하면서 직계는 단절되고 방계였던 친척 안드로니코스 1세가 뒤를 이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아버지는 이사키오스로 알렉시오스 1세의 손자였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는 공포정치를 벌이다가 오른팔이 잘리고 눈이 뽑혀 투옥되었다가 뒤를 이은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아들 마누엘과 함께 비참하게 피살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 루수단은 다른 아들들인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데리고 흑해 동안으로 도망쳐서 트라페주스 제국을 세웠다. 15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트라페주스 제국은 알렉시우스 1세의 후손이자 안드로니코스 1세의 자손들이 황제가 되었지다. 참고로 안드로니코스 1세를 죽인 이사쿠오스 2세도 사실 알렉시우스 1세의 외증손자이다. 다만 알렉시우스 1세의 부계 후손은 죄다 끊기고 트라페주스 제국으로 넘어갔다.
  • [3] 팔레올로고스 황조를 세운 미카일 8세는 이사키오스 2세의 형 알렉시오스 3세의 증손자였다.
  • [4] 중간에 끼어있는 이사키오스 1세는 몇 가지 개혁을 추진하는 등 재위기간 행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중병에 걸려 2년만에 퇴위한 까닭에 결국 개혁정책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을 약간 늦춘 황제 정도로 평가받는다.
  • [5] 니키포로스 3세는 미카일 7세를 몰아내고 제위를 차지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카일의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미카일 7세와의 결혼생활에서 이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라는 아들을 낳은 상황지만, 니키포로스 3세는 황후를 존중하던 비잔티움의 관습과는 달리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제위 후보에서 제외했고, 때문에 황후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부계 친척인 두카스 가문은 분노하였다. 그래서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콤니노스 형제를 돕는 대가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공동황제에 앉히기로 합의하였다.
  • [6] 비잔티움의 황후는 서유럽의 왕비들과는 궤가 다른 독자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황후는 황제와 마찬가지로 대관식을 치렀으며 독자적인 세금 징수권과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졌다. 심지어는 황제가 죽거나 폐위당하면 다른 귀족과 결혼하여 황후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자를 황제로 올릴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황제인 아들과 대립할 때면 아들을 까버리고는 여제(女帝)로서 단독 재위하기도 하였다. 비잔티움의 경우 서유럽보다 여성 군주가 많으며 재위기간도 비교적 길었다.
  • [7] 그 전까지는 장녀 안나 콤네나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약혼시켜놓아 안정적인 제위를 확보하려 하였다.
  • [8] 당시 이사키오스가 안티오키아의 공작으로(7세기 후반 무함마드에게 빼앗긴 예루살렘과는 달리 안티오키아는 지속적으로 제국이 재점령하였고, 십자군 전쟁 전 마지막으로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긴 것은 1084년의 일이다.) 재임하며 큰 명성을 쌓았지만, 당시 알렉시오스의 부인인 이리니 두카나가 두카스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알렉시오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이리니 두카나의 조부 요안니스 두카스 부제(Caesar)는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생이자 미카일 7세의 숙부로서 막강한 권력과 높은 지위를 향유하고 있던 차에 콤니노스 형제의 반란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따라서 알렉시오스와 이사키오스 중 누구를 황제에 올려야 할 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요안니스 부제가 나섰고, 당연히 두카스 가문과 더 가까운 알렉시오스가 황제가 되었다.
  • [9] 1078년 전 황제 니키포로스 3세가 미카일 7세를 폐위하고 제위를 찬탈했을 때에도 교황은 니키포로스 3세를 파문한 바 있었다. 한편으로는 제국을 침략할 구실을 만들고자 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협력한 것이기도 하다.
  • [10] 당시 비잔티움에서 보기에는 서유럽의 프랑크 족들은 야만적이고 무례하지만 전투민족으로서의 기량만은 출중하다고 생각하였다.
  • [11] 그도 그럴것이, 주로 용병으로 비잔티움에 흘러들어온 프랑크 인들은 신의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알렉시우스 1세도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의 전투에서 프랑크 인들이 배반하자 투르크 인 용병대가 지원군으로 도착할 때 까지 고전하였다.
  • [12] 당시 새로 점령한 제국 서부가 그의 유산으로 할당되어 있었으나, 전술했다시피 순식간에 털리고 남 이탈리아로 쫓겨나 남 이탈리아를 물려받은 이복동생 루지에로에게 공작위를 받았으나, 핏줄은 못속이는지 숙부와 연합하여 동생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명목상의 공작 작위만 유지한 채 근근히 살아갔다.
  • [13] 문자 그대로 로마 술탄국이란 뜻이다.
  • [14] 테마라는 단어로 통칭되는 둔전병들이 반독립적인 군대가 아니었다는 말이 있으나, 편제에 있고 영토 안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오늘날 근대 국가의 상비군 그리고 원수정 로마의 레기온 체제 같은 일원화된 지휘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테마를 지휘하는 장수들은 물론 황제가 임명하지만 대부분은 해당 지역 토호 가문의 일원들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일명 "군사 귀족"가문으로 불린다. 니케포로스 포카스와 요안니스 치미스키스 같은 황제들도 이런 연줄로 중앙의 힘에 도전해서 제위를 빼앗았던 케이스다. 둔전병 제도 자체가 군대가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을 생산하는 대신 어느 정도 독자적인 작전 권한과 공격권을 부여받으면서 민정 권한까지 일부 이양받는 것인데, 이것이 반독립적인 군대가 아니라는 얘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 [15] 물론 서구 십자군은 그 문화적 안목이나 금도에서 볼 때는 비잔티움측 시각에서는 최악의 야만인이고 약속을 어긴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 반대편이 완전 무결한 피해자였다고만 본다면 그 또한 무리한 해석이 될 것이다.
  • [16] 죽어라 도망치면서 앞에 오던 기사를 창으로 한방에 쓰러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삼국지의 적로인양 절벽인데도 뛰어 오른다든가.
  • [17] 마누일 1세는 ο μέγας '메가스' 칭호를 받았는데, 이것을 영어의 the Great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대제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