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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last modified: 2019-06-15 19:06:47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3.1. 아편무역
3.2. 임칙서의 파견
3.3.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
3.4. 아편전쟁
3.5. 평가
4. 제2차 아편전쟁 (1856~1860)
4.1. 배경
4.2. 전개
5. 전쟁이 낳은 결과
6. 관련 항목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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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천비 해전(穿鼻 海戰)의 상상화

기본 정보
시기 1840년 3월 19일 ~ 1842년 8월 29일
교전 지역 홍콩, 광저우, 상하이, 난징

교전국
대청제국 대영제국
지휘관
도광제 빅토리아 여왕
임칙서 조지 엘리엇
기선 찰스 엘리엇
혁경 헨리 포팅어
참여 병력
병력 20만 명 병력 2만 명
팔기군 동방 원정군
민병대
전투 결과
사망: 2만명 이상 사망: 69명

사실 아편전쟁에서 영국군과 싸운 청나라 지방관은 많으나 그들을 모두 적기에는 이 항목을 작성하는 위키니트들의 시간과 예산이 너무 부족하다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곳에서 6~7만리나 떨어져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적의 배가 무역을 하기위해 이곳에 오는 것은 이곳에 큰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즉, 당신들이 가져간 부는 모두 중국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중국인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해를 입힌게 아닐지언정 탐욕스럽게 이득을 갈구하는 그들은 타인을 해친다고해도 상관하지 않을것입니다.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1]

아편의 해악은 술보다 적습니다.
- 아편 전쟁의 찬성을 주장한 파머스턴의 발언[2]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 보수당원 윌리엄 글래드스톤[3](William Ewart Gladstone)의 의회 연설 中

중국 최악의 암흑시기인 근대사의 시작

이 사건을 시작으로 중국은 백여년의 시간을 휘청거리며 사회 전반에 걸친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방어전이 아닌 이상 모든 전쟁에 정당함이란 존재해서는 안되겠지만, 세계사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을 논하는데 반드시 등장하는 전쟁이 바로 아편전쟁으로 심지어 반대파조차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더 두렵다라고 할 정도였다. 상식적으로 동네 깡패도 아니고 그 당시 지금의 미국과 똑같은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가 정당한 행정력을 시행하면서 자기들이 밀무역으로 파는 마약을 단속한다고 그걸 전쟁명분으로 쓴거다.

1840년에서 1842년까지 2년간 벌어진 전쟁을 제1차 아편전쟁, 1856년에서 1860년까지 벌어진 전쟁을 제2차 아편전쟁이라 칭하며 좁은 의미에서는 1차 아편전쟁만을 뜻하기도 한다.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평가에 의문이 제기되기도한다. 자세한 것은 후술.

2. 배경

"……영국이 바란다면, 물론 동인도회사의 대반 대신, 국가 관리, 즉 이목을 파견하는 것은 그 쪽의 자유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 청국이 공향을 통해서만 이인(夷人)[4]과 접촉하는 옛 제도를 지속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 아닌가."
-1834년, 양광총독 노곤

일찍이 서양에게 중국은 미지의 이상향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초기 청나라를 매우 우호적으로 묘사하며 특히 강건성세의 주인공들인 강희제옹정제를 고평가하면서 대두되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과 달리 안정적인 하나의 정치체제가 수백년동안 이어진다는것도 유럽인들에게 낭만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국의 도자기와 가구, 사상이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가 끈 것은 바로 그때문이었다.

그러나 1775년을 기점으로 하는 중국의 성장둔화와[5]과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의 대두로 중국은 오히려 구시대적 동양문명의 표본이 되면서 반(半)문명적 국가로 취급받았으며 그 대표적 예시로 영국의 급진주의자 존 윌크스(John Wilkes)는 "중국이 현재 소유한 모든 고대 제도와 유물은 결국 사라질것이다. (중략) 결국 중국은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언제나 패자의 편에 속할것이다."이라고 평가했고 헤겔은 이러한 평가의 가장 극단적인 면모를 보였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선입관에 의해서 역사를 서술하였기에, 중국은) 자신의 역동적인 역사발전 발전을 위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요소인 세계사 바깥에 존재한다."
 
중국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인간은 황제의 수레를 끌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다.)
 
앞으로 그들의 역사는 타자의 의해 그들의 존재가 추구되고 그들의 성격이 탐구될 때만 존재할 수있다.
잘도 이런 이런 미치광이같은 헛소리를! 본인은 선입견이 없나보다.

한편 명나라 중기부터 시작된 서양과의 교역은 청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서양과 전통적으로 무역하고있던 광저우가 여러 부패와 독단적 태도로 불만을 품은 동인도회사는 광저우 북부로 무역항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는 청조의 관세이상으로 무산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아예 광저우를 제외한 무역항에서의 무역을 불법으로 규정시켜버렸다.

그러나 광저우에서의 무역은 매우 강한 제한과 관료들의 부패, 문화의 차이, 사법권에 대한 인식 문제[6]로 인해 불만이 있을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국측에서는 지속적으로 무역을 확대하기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사절이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의 사절단이었다. 치외법권을 보장받는 차와 생사 생산지역 할양, 무역을 확립하기위한 정식조약 체결, 광저우의 폐단근절등을 중심으로 한 6대 임무를 받고 출발한 그는 영국 왕실의 위엄이 손상받지 않는 한 청나라측의 궁중예의에 복종하라고 명령받았다. 공식적으로는 건륭제의 80세생일을 축하하기위한 사절이라 청은 이것을 조공사절로 판단하고 최상의 예우를 다했으나 곧바로 유명한 삼배구고두의 실행을 두고 논쟁에 들어갔다. 사실 이것은 만주족 전통의 황제알현의 예우였으나 매카트니는 이것을 국가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행위로 판단했고 결국 영국식으로 한쪽 무릎을 꿇는 수준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청은 이들을 단순한 사절단으로 판단해 외교교섭을 하는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그들을 곧바로 돌려보냈고 결국 매카트니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이후 건륭제는 별도의 국서를 보내 6개항의 요구를 모두 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영국은 재차 사절단을 파견하려고했으나 사절단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곧바로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림으로서 취소되었다. 뭐 어차피 파견되어도 청나라도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해야하니 무리였을지도...
사실 무력으로 청을정복하려했다카더라

이후 19세기 초기에 유럽국가들은 여러가지 분쟁으로 마카오를 점령하거나 상선을 압류하는 일이 생겼고 이에 불안해진 영국은 다시 사절단을 파견하려 노력했다. 이에 1816년에 윌리엄 피트 애머스트(William Pitt Amher)의 사절단이 도착했으나 가경제는 이러한 사절을 원하지 않아 '어조가 공손하면 북경으로 입성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천진에서 연회을 베풀고 황제가 사냥에서 돌아올려면 몇달이 걸린다는 말로 되돌려보낼것을 명령하였다.'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삼배고구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고 심지어 사절단 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최종적으로 북경에는 간신히 입성했으나 황제를 알현하는데는 실패하고 되돌아갈수밖에 없었다.

1834년 윌리엄 존 네이피어(William John Napier)가 다시 사절단으로 갔으나 그는 처음부터 영국 상인들을 총괄하는 직책이었을뿐 별다른 외교적인 권한이 없었다. 심지어 영국은 그에게 가능한 온건하며 우호적인 양해를 유지하며 영국 신민이 중화제국의 법률과 습관을 준수할 의무를 명심하게[7] 하도록 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독단적으로 기존의 관습을 무시하고 이에 양광총독과 마찰을 빚자 양광총독에게 영국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양광총독은 어디에다 대고 신성한 우리 영해에 불질이야를 외치며 군사를 보내 상관을 포위해 무역을 중단시키고 네이피어만 떠난다면 무역은 재개될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네이피어는 마카오로 돌아간지 한 달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렇듯 영국의 사절단은 갈수록 강경해지고 있었는데 정상적인 외교활동으로는 청의 문호를 개방할 수 없다고 판단해가고 있는것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결국 무역을 확대하기위해서는 당시 절정에 다다르던 영국의 군사력을 이용한 무력시위만이 유일한 정답이라는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3.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3.1. 아편무역

"외이(外夷)의 진흙과 중국의 화은(貨銀)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틀림없이 국내의 인민은 이리저리 유랑하며 사방에 걸식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생업을 잃을 것이다."
1799년 가경제

1781년부터 1810년까지 중국에 유입된 은은 무려 4200만냥을 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무역흑자를 확보할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한 수공업이 초기 산업혁명 따위는 씹어먹는 가격경쟁력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양측의 주력 수출품인 공업품은 아무런 쓸모를 자랑하지못했고 공예품들은 구매할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8] 결국 청으로 가는 무역선은 평균 90%가 청의 화폐인 은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청과 무역을 독점하는 동인도회사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인도를 정복하는데 막대한 부채를 진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부채를 영국의 자본과 인도의 면화 청의 은을 이용한 삼각무역[9]을 통해서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되면서 국내 시장의 침체와 면화 생산 가정의 확대로 청은 더이상 인도 면화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영국측에서 청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차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일반 가정의 수입 5%를 소비할정도의 구매력을 이끌어냈고 이로 인하여 차는 대중국무역의 90%를 독점해 영국의 한해 지출비용은 무려 2800만 파운드를 돌파한 상황이었다.[10] 이러한 상황은 영국과 중국과의 무역을 지속하는것을 힘들게 만들었고 그 대안으로 영국상인은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오래된 평화에 사회 분위기가 이완되었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자리잡아가는 추세였고 아편의 독성과 중독성에 대한 자료가 미비하던 당시에 아편의 환각효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왔다

"그 냄새가 향기롭고 그 맛이 맑고 달다. 기분이 울적하고 답답할때 마주보고 교대로 흡연하면 처음에는 정신이 맑아지고 머리와 눈이 깨끗해진다. 계속하면 가슴이 갑자기 확 열리면서 흥이 두배로 증가한다. (중략) 시간이 흘러 배게를 베고 높이 누우면 만가지 생각이 모두 없어지고 꿈속에서 해메는듯 같으며 영혼이 상쾌해지니 진정한 지상낙원이다."

당연히 청나라는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방기할 리가 없었고 1799년 최초의 단속령이 발표되고 1816년부터는 아편흡연까지 금지되었으나 이러한 상황은 당시 관료제의 침체와 부패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이 시작되었을때 군인들 사이에서 아편은 남용되었고 관료들은 아편 샘플을 압류품이라고 내놓는가하면 심지어 밀수집단과 뇌물을 주고받는것이 일상이 될 정도였다. 심지어 도광제조차 왕자시절에는 아편을 흡연한 적이 있었고 아편전쟁 직전에는 황자들 다수가 아편을 흡연해 신강으로 추방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아편의 진정효능은 인간의 도덕심과 이성의 작동을 마비시키는 효능이 있어 빈민들은 아편을 사느라 파산하고 일가족을 팔아넘기는가하면 상류층은 아편에 빠져서 행정처리에 지장을 초래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어느 사이엔가 아편문제는 대청제국이 해결해야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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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의 아편굴

이 당시에 중앙정부관원의 10~20%, 지방관원의 20~30% 하층 현지관리들은 무려 80~90%가 아편흡연을 한다고 추측되는 이상 이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아편 흡연은 청나라에 두가지 해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경제적인 문제로 1834년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특권이 폐지된 이후로 아편무역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로 인해 중국은 한해에 3천만 냥 정도의 은을 외국에 내보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경제의 축소를 가져왔고 동전과 은의 교환비를 두 배 가까이 뛰어오르게 했는데 이는 곧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는 농민들에게 실제적인 세금이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동전의 순도를 낮추는 대신 대량발행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충격을 완전히 대응하는 것은 무리였다.

두번째 문제점은 아편 그 자체의 독성이었다. 아편의 진정효능은 단순 흡용만 하더라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의존성을 띄게한다.[11] 예를 들어서 청나라 말기의 관료 유곤일은 하루에 아편을 100g이상 흡연하면서도 공무 처리에는 어떠한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아편은 내성이 강해 흡연하면 할수록 많은 양을 투약해야 같은 효능을 보게 되는 일이 많아서 (경제적, 신체적) 의존성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아편의 흡연은 뇌의 도덕적 기능을 파괴시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양심의 작용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어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 빈민이 딸이나 아내를 팔아치우는 일마저 잦게 만들었다.

종합적으로 사회기강의 헤이, 은의 유출로 인한 재정난, 농민생활의 곤궁등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진위여부가 우려스럽지만) 1837년 주성열(朱成烈)은 아편으로 인해 유출되는 은이 한 해에만 은자 7천만냥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마침내 사태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도광제는 전국 각지의 관리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내놓을 것을 명령하였다.

1836년의 논쟁에서 이에 대한 최초의 의견은 대담하게도 아편의 합법화였다. 태상시(太常寺) 소경(小卿) 허내재(許乃濟)는 아편을 합법화시켜 정규 관세를 징수하고 대신 아편의 거래수단으로 은을 지불하는것을 금지시켜 은의 국외유출을 막음과 동시에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꽃의 재배를 금지시키고 일반 백성의 아편 흡연은 간섭하지 않는 대신 병사,지식인,관료들의 아편 흡연은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금론(弛禁論이었다. 이금론은 전현임 양광총독 노곤(盧坤)과 그 후임 등정정(鄧廷楨)의 찬성으로 매우 유력해졌지만 당시 동아시아국가의 최대 개념이었던 도덕적 인정(仁政)을 포기해야한다는 개념이기에 이러한 개념을 매우 신경쓰던 도광제로서는 설득력있게 다가왔지만 채택하는것은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편의 선별적인 단속금지와 아편무역의 국가독점도 실효성이 없다는 원옥린(袁玉麟)의 반론도 매우 설득력이 있엇다.

한편 허내제의 상소와 거의 동시에 올라온 것이 바로 아편에 대한 강경단속을 주장하는 엄금론(嚴禁論)이었다. 내각학사겸 누부시랑(樓部侍郞) 주박(朱博)이었다. 주박은 아편금지 완화령이 효과가 있을지언정 그것이 폐지의 구실이 될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법령은 마치 마치 제방과 같아서 훼손이 되었다고 그것을 파괴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곧 도적질,매춘,도박같은 법률이 엄금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한편 병부급사중(兵部給事中) 허구(許球)는 금지령 해제는 아편흡연의 금지를 불가능하게 하므로 아편을 구매,판매에 관련된 사람들을 (영국인까지 포함해서) 모조리 색출하고 엄벌을 올릴것을 건의하였다. 결국 도광제는 1836년 9월 엄금론에 관심을 기울리고 양광총독 등정정에게 아편단속의 강화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편단속에 대해서 결정이 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이금론은 조정에서 다수파였고 엄금론은 아편단속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금론의 문제는 한 관료에 의해서 뒤집히게 된다.

3.2. 임칙서의 파견

"사생(死生)은 운명에 달려 있고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다."
1839년 임칙서, 광동으로 출발하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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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대의 마지막 명신

1837년에 호광총독(湖廣總督)으로 재임하면서서 농업·상업 개혁, 아편 강력 단속, 민간 자율 존중으로 매우 높은 실적을 내던 때 임칙서는 엄금론을 내세워 말하는 사람으로서 아편을 강력히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실행하려는 대책도 실제이고 세부까지 포함하여 제시했다. 일설에 의하면, 임칙서의 전도유망하던 형이 아편 흡연으로 생명을 잃은 사건이 아편을 적대하는 태도 제고에 영향을 끼쳤다고도 한다. 19세기 초 숙지한 어떤 사상을 적극으로 주장한 공자진(龔自珍)[12]과 교류하여 경세론에 깊히 관심하던 임칙서에게 아편의 존재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었다.

임칙서는 "준법이 문제가 아니라 법을 생성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발언했고 이것은 곧 이금론을 향한 도전이었다. 이금론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는 위법한 사람들은 천자의 교화를 포기한 사람들이므로 버리는 것이 더 나았지만, 임칙서는 "모든 백성이 동등한데 어떻게 흡연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 사람들을 버려야하는가?"라는 일갈로 그 사람들의 견해를 제압했고 임칙서의 이런 일관된 강경책과 체계 있는 아편 단속책이 설득력이 있다고 확신한 도광제는 마침내 아편 무역을 종결하려고 결정하고서 1839년 12월 31일, 임칙서에게 흠차대신(欽差大臣))[13]과 광동수사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임칙서가 광동에 내려오기 전에 아편 무역은 이미 고사 직전이었다 전술한 대로 도광제는 이미 등정정에게 아편 단속 강화를 명령하였고 이에 1839년 5월에서 9월까지 아편 무역 금령은 일시로 해제되었는데 이것이 근본이 되는 해제로 예측한 상인들은 아편을 무리하게 비축한 서양 상인들은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 상인들은 아편의 가격을 매우 낮추어 처분하려했지만 등정정의 강력한 조치로 말미암아 그것도 무리였고 결국 1840년이 시작될 무렵에 아편 무역은 이미 종언을 고한 상태였다.

1840년 3월 10일 광주에 도착한 임칙서는 아편의 폐해를 다스리지 못하면 광동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서했으며 그렇게 십년이 흘렀다 강력한 단속으로 금지령을 위반한 1600명을 체포하고 아편 2만8천 근을 몰수하면서 부패한 관리들을 엄벌했나 이런 임칙서에게도 밀수하는 외국 국적 사람들은 감당하기 지난한 문제였다. 이에 임칙서는 바텔이 에머리히테 바텔(Emerich de Vattel)의 저서 국제법(Law of Nation)을 입수해 그것을 한역하고서 영국 여왕 빅토리아에게 이 문제에 간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와 별도로 임칙서는 아편 문제에서 양보하거나 타협할 생각이 전무했으며 3월 18일에 영국 사람들에게 3일 내에 아편을 내놓고 아편 무역을 재개할 시에는 사형당하고 물품 몰수당하는 것에 동의하는 서약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14] 결국 3월 21일이 지나자 임칙서는 공행의 상인 두 명을 즉시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영국 상인들은 아편 1036 상자를 제출했으나 이미 그 상인들이 아편 2만 상자를 확보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임칙서의 분노만을 키울 뿐이었다.

결국 공행의 상인은 체포되었고 임칙서는 3월 24일 병사들을 동원해 공행 내에 있는 영국 상관을 포위하였고 중국 하인들을 그것에서 철수하게 했다. 물론 영국 상인들은 식량 부족을 겪지는 않았지만 결국 6주가 지나 포위에 지쳐 영국 관리였던 찰스 엘리엇은 자신이 영국 모든 상인들에게서 아편의 소유권을 영국 정부로 이양하게 해 임칙서에게 전달하였고[15] 5월 16일 엘리엇은 아편 21,306 상자(약 1425t)를 임칙서에게 양도하였다.

임칙서는 이 아편을 북경으로 운송하여 아편 단속의 성과를 알리고 싶었지만 그것을 옮기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고 결국 청 조정에서는 현지에서 폐기하라고 하명했다. 아편의 재사용을 막고자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소금의 성질과 석회로 말미암은 열을[16] 가해 아편의 유효 성분을 파괴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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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소연(虎門銷煙).

아편을 폐기하는 작업은 6월 3일에서 6월 25일까지 지속되었는데 임칙서는 사전에 토지신에게 제사해 아편을 보내는 것에 사죄드리면서 바닷물의 생물들에게는 사전에 대피할 것을 권고했다. 안가면 이렇게 된다. 거대한 웅덩이 안에 인공 제방으로 바닷물을 끌여들이고 그 속에 아편과 석회를 넣어서 잘 섞은 뒤에 바다로 통째 되돌려보냈는데 이 동안 영국 사람 단 한 명도 이것을 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연금에서 풀려난 영국 사람들은 마카오로 즉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임칙서는 아편 무역을 제외한 모든 교역을 지속해 나아갈 생각이었지만 분노한 엘리엇은 모든 상인들을 철수하겠다고 협박하고 이 의사를 미합중국에도 타진했으나 미합중국 상인들은 임칙서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편 무역을 철폐했고[17] 결국, 영국 상인들만이 엘리엇의 강요에 따라 강동에서 강제로 떠났다. 이에 영국 상인들은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편 무역은 그대들이 일임하는 일이라서 청 제국 조정이 그것을 금지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여 정부가 개입할 근거는 없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1839년 7월 12일, 광동을 떠나 구룡(九龍) 반도에 정박했을 때 술에 취한 영국 수병이 중국 임유회(林維喜)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영국 사람들은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치외법권을 발동하게 하는 선에서 사건을 호도하려고 했으나 임칙서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영국 사람들에게 임유회를 살해한 사람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영국 사람들은 임유회를 살해산 사람을 인도하지 않고 "영국의 법률에는 외국에서의 죄를 저질렀을 때를 대상으로 한 법이 없다"라고 주장하였으나 이에 임칙서의 대답은 죄를 저지른 사람 인도을 대상으로 한 영국의 법률이었다.

전술했했듯이 임칙서는 광동에 부임하자마자 영어 신문, 영국 법률, 국제법 등을 간단하게 중국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한 상황이었고 이런 준비를 이용해 영국의 법률에도 이 행위가 이미 불법이라는사실을 간파한 상황이었는데도 영국 상인들의 태도에는 불변했고 이에 임칙서는 더 강경하게 나아가 포르투갈이 소유하던 마카오에서의 식량 공급을 중단하게 했다. 이에 엘리엇은 항의했지만 "우리는 입항을 거부한 적이 없다. 배 위에서 굶주리는 것은 그대들이 선택한 일이다"라는 말로 답변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사람들의 여러 상선이 식량을 밀매했지만 임칙서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묵인했을 뿐이었다.

결국 임칙서는 8월 26일 마카오에서 영국 사람들을 추방했고 그 사람들은 홍콩으로 이동해 영국에서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초조해진 엘리엇은 아편과 상관없는 영국 상선 로열 색슨 호을 포격해 광주 진입을 막을려고 했다. 이에 청군은 영국 상선을 보호하고자 공격과 수비가 바뀐 건 기분 탓이 아닙니다. 관천배가 지휘하는 수군이 정크선 29척을 내보냈지만 청나라의 군함은 급하게 상선을 개조한 배였기에 엄청난 해를 입어야만 했다. 이 천비 해전(穿鼻 海戰)으로 청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임칙서는 서양식 대포와 함선을 즉시 구매하고 주민을 동원해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인들은 무역을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임칙서는 "아편만 취급하지 않는다면" 종래 약속을 지키겠다고 답변했지만 영국 사람들은 이 약속이 '불확실하다'고 거부하였다. 결국 북경에서는 영국과의 무역을 종결하라고 하명했고 1839년 12월 6일, 양광총독으로 임명된 임칙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3.3.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

"나는 중국에 가고 싶다. 하지만 헤엄을 쳐서 갈지언정 (아편무역을 보호하는) 군함을 타고 가고 싶지는 않다!"
당시 영국의 의원.[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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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원정을 요구하는 영국 만평


앞서 언급하듯 유럽에 대한 중국의 시각은 그야말로 시궁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영국 정부의 재산과 신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중대한 위협으로 판단되었다. 중국인들의 재산과 생명따위는 씹어주는게 영국 신사의 도리. 이것은 곧 야만인이 문명국가에 도전한 일이었고 아편상인들의 강력한 로비는 영국 의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편전쟁에 대한 여론은 당대 영국에서조차 비판적이었다. 엘리엇조차도 아편무역에는 비판적이었고 그는 단지 화물을 보호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을뿐이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로비로 영국에서는 점차 중국에 군대를 파견하는쪽으로 여론이 움직이고 있었다. 1839년 10월, 전쟁에 주동적이었던 파머스턴 수상을 중심으로 영국 내각은 전쟁을 결의하였고 1840년 2월에는 모든 전쟁계획을 마치고 군비 지출을 위한 예산안을 의회에 표결했다.

이에 대표적인 찬전파인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는 의회에서 찬성여론을 내놓았다.


패배, 굴욕 또는 치욕이라고는 모르는 나라의 국민이며, 자국민을 위협하는 자에게는 귀를 의심할 정도의 배상금을 받아온 국가의 국민이여, (중략) 50년 공직 생활에서 영국 국기가 광동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일이 없습니다." 청나라도 200년 역사에서 영국같은 돌아이 국가는 처음봤을 것이다.


영국 국기가 모욕당했다고 말한 것은 임칙서가 공행을 포위하고 영국 상인에게 아편을 내놓을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30살의 재선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19]이 진정으로 국기가 모욕당할 때를 성토하자 적지 않은 의원들이 제국주의을 비판하자 투표 결과는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게는 아편을 금지시킬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편의 무서움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영국의 외무장관은 청나라의 정당한 권리마저 짓밟으며 이 부정한 무역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중략)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영국의 국왕과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중국 영토에 체제하고 있으면서 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국이 식량과 음료 공급을 거절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본인은 잘 모르겠습니다.[20]
정부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작전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파머스턴은 자신들은 아편무역을 보호하는게 아니라 이후의 교역과 영국 시민의 안전을 고수하는법이라는 말장난으로 논법을 바꾸어버렸다. 1840년 4월 10일 영국 하원에서 청과의 전쟁수행을 위한 예산 투표가 이루어졌고 결과는 271대 262. 비록 표차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을 멈출수는 없었다. 표결이 끝난 후 글래드스턴은 "262. 영국의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냐!"라고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반대파들이 아편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중국을 주권국가로 존중해서만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백인의 의무'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문명국으로서 중국인들에게 문명을 전파해야 될 의무가 있는데, 과연 아편을 팔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반대파 일부의 '양심'이었던 것. 글래드스턴의 연설에는(위에서는 편집되었지만) '정의는 중국인들의 편에 있습니다. 저 문명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야만인들에게는 정의가 있는 반면, 리 깨어 있고 문명화된 기독교인들은 종교와 정의에 반하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목 또한 들어 있었다.

3.4. 아편전쟁

"역사를 회고하면 아편은 단지 전쟁에 직결되는 원인이지 근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매뉴얼 C.Y.쉬

해군 소장 조지 엘리엇이 통솔하는 영국의 동방 원정군은 대포 540문을 탑재한 군함 16척함, 증기 군함 4척, 운수함 27척, 병력 운수함 1척과 병사 4천 명으로 구성됐다. 영국군은 사기를 함양하고자 수비력이 약한 광동 근처의 주산 열도(舟山列島)를 공격하였는데 이곳의 주민 2천여 명은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영국군과 맞섰으나 성은 끝내 함락되었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도주하였다. 영국군 주력군이 광주에 즉시 도착했지만 임칙서의 철저한 대비로[21]로 영국군은 광저우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 대신 영국군이 부상해서 톈진까지 접근하자 도광제는 임칙서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영국 측의 반발만을 환기했다고 오판해 임칙서를 크게 질책하였다.

"대외로 통상을 근절하게 했으나 근절되지는 못했고[22] 대내로는 범법자를 체포했으나 소탕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빈말로 어물어물 넘긴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수많은 파란을 야기헀을 뿐이니 생각건대 금치 못할 만큼 참으로 분하고 답답하도다. 그대는 무슨 말로 짐에게 대답하겠는가?

이에 임칙서는 광동의 관문 한 개 세금 중 10%만 사용해도 외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답변했으나 이미 도광제는 임칙서를 향한 신임을 완전히 철회해 허튼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 일변, 영국은 임칙서를 비난하고 아편의 배상과 억울을 벗겨 달라고 요청했기에 그 사람들의 요청을 들어주면 곧바로 돌아가리라고 오판한 것이다.[23]

결국 도광제는 임칙서를 파면한 후 북경으로 소환하고 직예총독(直隷總督) 기선(琦善)에게 영국군과의 협상을 하명하였다. 직례총독이었던 기선은 북경을 방어할 책임이 있었기에 영국군을 다독이면서 영국군의 태도에 맞춰 주자 협상을 체결할 희망을 품은 영국군은 천진에서 퇴각하여 도광제는 고무되어 기선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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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비 가조약(川鼻 假條約)


그러나 1840년 12월이 끝나갈 무렵 영국군이 홍콩의 할양과 배상금을 요구하자 그제야 기선은 자신이 보통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상금이야 송 시기에 이미 지불한 전례가 있지만 영토 할양은 전통 시각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사항으로 이것은 실효성 문제라기보다는 상징을 나타내는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산열도의 전염병으로 사상자가 생기는 영국도 그렇게 강경한 자세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결국 양측 모두 양보하는 선에서 찰스 엘리엇과 기선 간의 천비가조약(川鼻 假條約)을 체결되었다.


1. 청에서 몰수한 아편을 은 600만 냥으로 배상한다.
2. 향항(홍콩) 지역을 영국에 할양한다. 단 세금은 그대로 중국에 귀속한다. (마카오 지역과 같은 형식의 할양)
3. 차후 청, 영국 간의 동등한 지위를 약속한다.
4. 광동 지역에서의 무역를 전쟁 이전으로 복구한다.


그러나 결과상 양국은 이 조약의 인준을 거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분쟁으로 인식한 청이 영토를 할양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평등한 관계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영국도 원정군의 예산에도 미치지 않는 금액으로 전쟁을 종결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다가 기선도 '임칙서의 과오를 시정할 권한'만 있었지 외국과 조약하거나 영토를 할양할 권한도 없었기에 도광제는 곧바로 격노하여 가산 4천만 냥을 몰수당하고 최종으로 흑룡강으로 유배되는 처벌을 받은 일변, 영국도 파머스턴은 '자신의 훈령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면서 엘리엇의 변명을 기다리기도 전에 엘리엇을 해임하고 헨리 포틴저를 후임 전권 대표로 임명하여 협상은 완전히 단절되고 양국 간 무력 대결만이 남게 되었다. 청군 총사령관으로는 재상 혁산(奕山)이 임명되었으나 혁산은 전투를 회피하고 만사를 부사령관인 참찬대신(參贊大臣) 양광(楊芳)에게 일임하였다 백련교도의 봉기와 신강 지역의 이슬람 봉기군을 진압한 장수였으나 대외 관계에서는 무지했고 미신을 신봉한 양광은 영국군의 대포가 정확한 이유가 요술 때문이라는 믿은 채 대포와 상극이라는 여자의 오줌을 성벽에 바르는 행위를 방책이랍시고 내놓았으며, 북경에서는 양인(羊人)을 잡는 데는 호랑이가 제격이라면서 선발한, 호랑이 년·월·일·시에 태어난 지휘관들은 당연히 대패했는데 막상 조정에는 전투 전에 미리 작성한 승리 보고서가 도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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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을 공격하는 영국군

1841년 8월, 영국군 1만 명은 청 동남부를 초토화하고 양자강으로 진입했으나 입구 영파(寧波)를 지키는 장수 여보운(余步云)은 도망하고 말았다. 그 후 영국군은 닥치는 대로 강간하고 각종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면서 양자강에 진입하였으며, 1842년 3월에 혁산이 이끄는 정규군 1만 2천 명과 민병대 3만 3천 명의 대군이 영국군 불과 천여 명에게 격파당하고 혁경은 단기필마로 겨우 도망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6월에는 상해가 함락되고 7월에는 영국군은 청의 제2 도시인 남경(南京)을 지키는 요충지이자 대운하의 핵심 기지인 진강(鎭江)을 공격하였고 수비병 1400여 명은 전원 전사했으며 지휘관 해령(海齡)은 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인 민중을 불신해 협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남경의 함락이 기정사실화하자 청은 전쟁을 지속할 의지를 상실하고 결국 협상 2주만에 중영광녕조약(中英江寧條約) 체결로 전쟁은 종결하게 했다. '남경조약(南京條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조약과 이듬해에 맺은 오구통상부점선후조약(五口通商附粘善後條約), 호문조약(虎門條約)과 내용을 요약하면, 자유무역이라는 영국의 숙원이 해결됐다는 사실을 잘 알수가 있다. 남경조약 전문

남경조약 체결을 보고받은 청 조정은 이것을 바람직하게 받아들었다. 전쟁 이전보다 높은 관세를 거둘 수 있으며 (실제로는 폭락한 상태였다.) 양자강과 주산 열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한 데다가 요구한 영토마저도 전략상·경제상 가치가 전무한 (당시로서는 황무지인) 홍콩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이 조약에서 청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오직 배상금 액수와 경제상 요충지인 복주의 개항 문제였을 뿐이었으나 과거 영국은 부패한 공행에게 (물론 공행도 건륭제 시기부터 청 조정에게 반강제로 뇌물을 바쳐야만 했다. 심지어 남경조약 배상금조차 이 사람들이 일부을 감당해야 했다.) 뇌물 일정량을 바쳤는데 이것이 폐지된 것을 계산해 보면 오히려 영국 측의 이득이 큰 셈인 데다가이 이 사람들이 다른 국가처럼 청을 예속화하게 하는 조약하지 않은 것은 장기에 걸친 이득을 계산한 것이기도 했다. 무려 4억에 이르는 광대한 시장을 상실하면 결국은 살려두는 것보다는 손해였기 때문이었기도 했다.

아편전쟁은 근본으로 '영국의 자유무역'을 목적해서지 아편 무역 유지가 아니었으므로, 기묘하게 이 조약에는 핵심이면서도 근본이 되는 아편을 다룬 언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아편 무역은 외면상 불법이 되었고 청은 이것을 단속했으나 아편 수입량은 폭증하게 되었다.

조약 체결이 전해지자 여타 열강도 즉시 교섭을 요구했고 청 조정도 이런 열강을 이용해 영국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 교섭에 협력했다. 1844년에 미합중국과 망하조약(望厦條約)을 체결하고 프랑스와 황포조약(黃埔條約)을 체결하고 조계를 인정받았고 1858년에 러시아와도 애혼조약(愛琿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이후에도 서양 다수한 열강과 통상 장정을 체결하였으나 '중국 근대사의 시작'이라는 평가와 달리 아편전쟁은 중국에게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 이 전쟁이후에도 여전히 무역에는 큰 변화를 주지 못했으며(2차 아편전쟁 단락에서 서술하겠다.) 개항장에서도 역시 이전과 다른 사회,경제적 변화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애시당초 이 평가 자체가 '정체된 사회에게 가해진 서구의 충격'을 당연시한 과제라는 전제를 깔고 역사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국이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면 여전히 큰 충격이 한 번 더 필요한 상태인 일변, 과거에는 광주에서만 무역이 허가되어 수출품·수입품이 모두 광주로만 오가서 그곳으로 가는 교통 관련 사업이 자연스럽게 발달했고 이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이제는 서양과의 교역 출구가 많아져서 교통로도 자연스럽게 짧아져서 남경조약으로 말미암은 가장 직결되는 변화는 유랑민 증가였다. 자연스럽게 그것에 의지하던 많은 사람이 유랑하기 시작했고 혹은 그 사람들이 항구 근처로 찾아와 기존 농민들과 대립하는 일도 잦아지기 시작한 사태는 특히 양자강 하류에서 심각하게 벌어졌고 이것은 청조가 양자강 이남의 통치력이 한계에 다달았다는 신호였으며 청조가 외국과의 관계에서 이권을 양보한 궁극에 도달한 이유도 바로 국내 불안을 대상으로 한 경각심 때문이었고 이런 유랑민 문제는 결국 태평천국이라는 극도에 도달한 사태로 폭발하게 된다.

3.5. 평가

아편전쟁을 아편 단속으로 벌어진 사건이라고 단순히 보는 것은 전후 갈등과 시각 격차를 무시한 채 바라보는 무지의 소산이다. 아편전쟁을 두고 중국사 대가인 존.킹.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는 이 사건으로 중국사가 근대로 나아갔다는 충격·반응 패러다임을 주창했으나 오늘날에 이르어서는 여러 학자에게 많이 비판받고 소수설이지만, 아편전쟁 그 자체로 벌어진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 기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여럿 제시되고 있다. 항구 5개는 극소수의 외국인만이 거주하였고 그중의 대다수는 선교사들이었던 데다가 영국 측의 자유무역도 이미 아편으로 청 경제가 크게 황폐화 상황에서 영국의 수출품을 구매는 불능한 일변, 영국 측도 수출품이랍시고 가지고 오는 게 피아노포크 같은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었다. 도데체 왜 전쟁한 거냐.~ 오히려 자유무역 탓에 청의 수출 제한이 해제되어 오히려 폭증하는 차 수입을 아편 무역으로 간신히 막아야할 정도였다. 꼴 좋다.

한편, 아편전쟁 후에도 청조의 아편 단속책은 강화했으나 근본을 때려잡지 못하고 소비자만 제압하는 정책이 결국 큰 실효를 거둘리는 만무했고 제2차 아편전쟁 직전에는 아편 수입이 배증했다. 흔히 이러한 면모를 보고 도광제의 정책이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했으나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도광제는 재위 기간 내내 對아편 강경책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24] 위에서 언급했듯 단속책은 지속되었다.

영국 측에서는 오히려 이 전쟁을 너무 쉽게 끝냈다고 비판하였다. 즉 전쟁을 1년만 더 지속해 청조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면 더 많이 수익했으리라 애석해 했고 이런 시각은 남경조약으로 말미암은 소득이 별로 높아지지 않자 이런 불만이 더 강하게 생겨났다. 즉 제1차 아편전쟁의 끝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4. 제2차 아편전쟁 (1856~1860)

4.1. 배경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개항과 무역권리를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 돈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대중국 수출은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 백성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자유무역 덕분에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맞은 것이다... 꼴 좋다

마침 청 선박이 영국인 선주 소유의 중국선박 애로호를 단속하였다(애로 호 사건). 소유주만 영국인일 뿐, 모든 승조원은 중국인이었으며 이들은 해적임이 분명했기에 청의 정당한 공무집행이었으나 영국은 단속 과정에서 명예로운 자국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언했다.[25] 하고 싶었는데 핑계거리 없어서 고민하다가 말도 안 되는 사유로 전쟁을 일으킨 것. 하도 황당한 개전사유에 영국 하원마저도 부결시켰고 글래드스턴은 아예 정부 불신임안까지 내놓았으나 당시 수상이었던 파머스턴[26]하원을 해산하고 투표를 통과시켰다. 잘도 이런 미치광이 짓을![27]

여기에 프랑스도 자국 선교사가 중국에서 처형된 것을 구실로 전쟁을 선포, 청은 졸지에 유럽의 강대국 2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제국주의 앞에서는 원수도 하나가 된다[28] 여기에 미국러시아도 참전은 안했지만 여차하면 개입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등, 제국주의 열강의 청 다굴 수준에 가까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4.2. 전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되었던 청은 침공의 위협에 노출된 광둥성 일대 등 남부지방에서 제1차 아편전쟁과 같은 조직적 저항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손쉽게 청의 지방군대를 격파하고 광저우를 비롯한 광둥성 일대를 점령, 통치에 나서는 한편, 지난 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해군력을 이용해 중국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양쯔강 일대에서 분탕질을 저지르고 다시 북상하여 마침내 청으로선 용인할 수 없는 발해 만까지 진출했다.

계속되는 패전과 전쟁수행능력의 부족, 국가적 역량 한계와 수도 함락 위험 등을 느낀 청은 1858년 6월 배상금 지불, 개항항구의 확대, 베이징에 외국외교관 상주 허용, 기독교 공인, 장강 통행 및 외국인의 중국 내륙여행 자유 등을 골자로 하는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그걸로 전쟁이 끝나나 싶었는데…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청이 천진에 설치한 장애물을 철거하고 북상하자 이에 분노한 청군이 대고(大沽) 포대에서 다시 발포해 예상치 못한 큰 타격을 입은 영프 연합함대는 전면적으로 후퇴했고, 청은 승전무드에 휩싸였다.

그러나 당연히 전쟁 끝내기로 해놓고 공격을 하는 행동에 엄청나게 열이 받은 영국과 프랑스는 1860년에 예비병력에 본국 증원병력까지 긁어모아 돌아왔다! 1860년 최종공세때의 동원병력은 자그마치 지상군 약 20,000명에 173척의 해군함대였다. 게다가 이건 영국 한정이었고, 프랑스는 병력 6,300여명과 군함 33척을 별도로 동원(...)하였다. 1859년 당시 병력이 고작 2,200명에 해군 선박 21척뿐이었으니 영프의 분노는 가히 알만 했다. 당연히 이들의 목표는 수도 베이징.

베이징으로 진격하기 앞서 발해 만의 주요 항구를 모조리 초토화시키고 상륙해서 점령한 연합군은 문제의 대고 포대로 쳐들어 가 1년 전의 복수를 하며 청군을 섬멸하고 포대를 개발살냈다. 이에 협상을 다시 재개했으나 당연히 협상은 부결되었고 마침내 8월 3일 톈진에 상륙하여 수비하던 청군을 격파하고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공포에 질린 함풍제와 주전파는 일제히 열하로 튀었고, 팔기군을 완파한 연합군은 결국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베이징이 외적에 함락된 것은, 1368년 명의 대도 함락 이후 무려 500년만의 일이었다. 당장 청도 베이징을 함락하지 않았고 그냥 투항한 명군의 안내를 받아 입성했을 뿐이었기에 충격은 컸다.

한편 북경 외부에는 별궁인 원명원이 있었는데 전세계에서 청 황제에게 진상된 각종 보물들과 진기한 동물들이 서식했던 동양 최고의 정원이자 보물창고였다. 다시 말하면 황제의 콜렉션 보관소이자 놀이터. 이 사실을 안 연합군은 이곳에 쳐들어가 집중적으로 약탈했고, 그 후 죄다 불태워버렸다.[29] 도망간 황제에게 보내는 연합군의 경고였다.

결국 청은 자, 잘못했습니다! 하며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톈진 조약에다가 추가로 개항장을 더 개항하고 배상금도 늘어났으며 홍콩에 접한 구룡반도까지 추가로 할양해야 했다. 여기에 통상/포교의 자유와 중국의 내륙수운인 양쯔강에서의 군함 항해까지 인정하는 등 온갖 굴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게는 이 조약을 중재했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내줘야 했다. 게다가 말이 좋아 중재지 러시아도 여차하면 연합군에 합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즉, 협박이었다.

5. 전쟁이 낳은 결과

이때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들은 청에 대해 대국, 잠자는 사자 등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나 이후 중국은 세계 최강대국에서 서구 열강[30]의 호구로 전락한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놓이게 된다.

또한, 아시아에서는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청의 조공국이었지만 청의 정보 전달도 늦고 부정확했다. 조선은 청국의 관영에서만 제한적인 정보를 받았고, 그러한 정보는 당연히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었다. 조선은 되려 제1차 아편전쟁을 영국이 토벌된 것으로 받아들였고 후에 전라도 지방에 떠밀려온 프랑스 배가 "너희들 알고 있는 것과는 다름 ㅇㅇ"이라고 전했는데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북경이 함락된 제2차 아편전쟁은 당시 조선에도 전해져 적잖히 충격을 안겨 주었지만 단순히 양이들의 분탕질로 황제가 북쪽으로 잠시 피신한 걸로 해석해 전혀 대외관에서 변화가 없었다.

"양이(洋夷)와 억지로 화친(和親)하였지만 외구(外寇)가 점점 치성하여 황가(皇駕)가 북수(北狩)하기에 이르렀으니, 천하(天下)가 어지럽지 않다고 이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궐(城闕)·궁부(宮府)·시창(市廠)·여리(閭里)는 편안하기가 옛과 같고, 장병이 교루(郊壘)에 주둔해 있는데 기색(氣色)은 정돈되어 태연하며, 적(賊)이 근성(近省)에 숨어 있는데 방어함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니, 이는 민심(民心)이 일에 앞서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조정의 계략도 기한을 주어 군색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 또한 이에 충격을 받고 서구의 것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세계사 교과서에 나온 것만큼 중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한다. 워낙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저 멀리 최남단에서 벌어진 전쟁에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고(...) 예전부터 중국은 중화사상이 팽배했기에 아편전쟁의 패배는 "에이, 재수없이 똥밟았다."라는 수준. 진짜 청 정부가 심각하게 생각한건 아편 전쟁이 아니라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실제로 아편전쟁 이후에도 중국의 국내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아편전쟁으로 개털리고 난 후에도 서양 기술을 받아들일 생각은 별로 없었기에 꽤 오랫동안 무인시험에서 여전히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 기술'을 시험과목으로 유지했을 정도였다. 결국은 청일전쟁 패배...

여기서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방식의 차이가 나는데, 중국은 서구의 조선 기술이나 군사 기술 등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기 시작한 반면, 일본은 이런 기술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 체계, 그 기술,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근대식 교육과정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결과가 나타난 것이 바로 청일전쟁. 따지고 보면 중국이 제대로 충격을 먹은 것은 아편전쟁 때가 아니라 청일전쟁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본의 아니게 조선은 아편에 찌든 청으로부터 덕을 봤는데, 아편 중독으로 건강을 해친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전부터 명약으로 알려져 있던 조선 인삼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 마침 이 때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인삼 재배가 성한 이래 홍삼 가공이 흥하던 시점이라, 18세기 중반 미국 백삼의 중국 유입과 일본의 인삼 재배로 적자로 돌아섰던 무역 수지가 크게 개선되었다. 물론, 세도정치의 폐해와 19세기 후반의 무역 개방으로 얼마 안 가 상황이 더욱 크게 악화되어 버렸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중국을 뜯어먹고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또한, 러시아도 이때 영불과 중국을 중재하면서 슬금슬금 중국을 등쳐먹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편이 퍼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고 중국 전역이 마약 중독에 시달렸다. 다만 중국에 아편이 급속도로 퍼진 것은 맞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득은 줄어들었다. [31] 이유는 이젠 중국인들이 스스로 아편을 제조하기 시작해서이다.(...)

이 전쟁은 중국이 지금까지 마약 범죄에 극도로 민감해진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게 마약은 단순히 사회를 좀 먹는 약물일 뿐만이 아니라, 외세에게 참패당하고 부당한 마약 사용을 억지로 강요된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도시전설이 퍼져 있으나, 사실 광서신정때부터 아편을 단속시킬때의 전통이 강화된것이다.

여하튼 중국의 마약 정책은 주변 국가들과 비교해도 유달리 빡쎈 수준으로, 실수건 의도적이건 투약만 해도 5 - 10년형은 기본이며 제조, 유통까지 가계되면 최소 종신형에 사형이 선택 옵션이다. 심지어 외국인도 얄짤 없어서 한국인 마약사범이 체포되자 바로 사형 때리고 실제로 집행한 일이 2014년 말[32]에도 있었다. 한편 아편 무역에 정면으로 맞섰던 임칙서는 마약과 싸운 것 말고도 원래 청렴결백에 능력까지 겸비한 인물이라 현재 중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사족으로 이 아편전쟁 때문에 영국에서 나온 약을 빨았다고 일컬어 지는 각종 기행이나 해괴한 물품, 작품들을 일컬어 홍차에 아편을 탔다 는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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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유감스럽게도 이 편지는 1840년 1월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 편지를 정식 외교문서로 인정하는것을 거부했다. 도데체 누가 야만인이고 누가 문명인인가.
  • [2] 사실 당시 유럽은 마약에 대한 개념이 희박해서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파머스턴은 당시 중국은 아편재배는 합법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였다는 것이다.
  • [3] 나중에 총리가 되며 이후 1889년 인도 아편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제정한다.
  • [4] 중국에서 오랑캐라는것은 중국식, 그러니까 유교 이데올로기식의 통치를 실시하지않는 국가나 사람들을 통칭하여 이르는 명칭이었다. 중국측에서는 현재의 외국인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는 명칭으로 썼으나 서양측에서는 이 명칭을 매우 혐오하였고 결국 2차 아편전쟁 이후 폐지되었다.
  • [5] 이러한 성장 둔화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요인이 제기되고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정설이 나오지 않고있다. 과거에는 인구압력과 이로 인한 토지의 과밀화로 인한 고차균형의 함정(high-level equilibrium trap)이 제기되었으나 이후에도 인구가 완만하게 상승하고 토지의 과밀화가 농업기술의 발전과 토지의 개간으로 감당이 가능하다는 연구가 나온 이후에는 뚜렷한 대안이 나오지 않고있다.
  • [6] 중국에서는 살인자에 대해서 사형으로 대응한다. 청나라측도 막나가는건 아닌지라 처벌을 상대방 국가에 위임하거나 혹은 대상자를 줄이는 것으로 대체하였지만 꼴에 문명국이라고 자청하던 서양에게는 기겁할 노릇이었다. 한편 이걸 본 중국인들은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고 불만을 품었다. 답이 없다. 여담이지만 당시 영국에서는 1실링 이상의 절도행위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 [7] 강조하는 이유는 하단의 임칙서의 파견 부분을 참고.
  • [8] 명청 시기 중국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세는 생산비용에서 임금의 비중이 극단적으로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낮은 인건비가 중국 입장에서 기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 결국 산업혁명 진행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거기다 겨우 뚫어놓은 광동항을 통해 들어오는 모직물들은 중국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는데, 당연히 아열대 지방인 이 지역에서는 땀흡수나 통풍 기능이 떨어지는 모직물이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이를 대체해야 할 상품은 인도산 면을 사용한 면직물(캘리코)였지만, 앞서 언급되었다시피 모직물이고 면직물이고 남아도는 인력을 갈아넣어 만드는 대륙의 공장제 수공업이 뿜어내는 위엄 앞에서는 설치기도 영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이러한 기계 면직물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2차 아편전쟁 파트에서 후술
  • [9]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삼각무역은 아편전쟁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으며 2차 아편전쟁이 종결되고 난 이후에나 활성화되었다.
  • [10] 사실 이는 영국측에서 손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엄밀히 말해 비용은 민간 상인이 지불하는것이었고 오히려 차가 수입되는 과정에서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당시 영국 왕실은 전체 수입중 17%를 차의 관세로 확보하였다.
  • [11] 다만 이건 개인의 편차가 심해서 오늘날 일반인이 담배피듯 아편을 흡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 [12] 청나라의 사상가. 경세론에 깊이 관심했고 사회 기강 이완과 서구 열강의 침략을 경고했다. 공자진의 시인 기해잡시(己亥雜詩)의 125(혹은 220번째 수)는 청 말기의 혼란과 사회 극복의 노력을 말할 때 필수로 인용된다.
  • [13] 청에서 특정한 일에 전권을 위임하는 임시 벼슬. 3품 이상은 흠차대신. 이하는 흠차관원이라 한다.
  • [14] 대신 임칙서는 아편 한 상자당 차 5근을 줄 것을 약속했으나 턱없이 적은 양이었고 실질로 몰수나 마찬가지였다.
  • [15] 즉 청나라 자체의 행정 집행을 앙국 간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하게 하겠다는 얄팍한 속셈이면서 향후 영국 정부가 아편을 보상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 [16] 석회가 물과 접촉하면 끓어오르는데 아편은 열에 약하다.
  • [17] 당시 미합중국은 오스만 제국에서 만든 아편을 취급하고 있었다.
  • [18] 이 문서를 서술하는 위키니트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해당 발언이 존재하는건 확실한데 그게 누구인지가 두루뭉실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추가바람
  • [19] 이후 글래드스턴은 영국 수상까지 오르게 되는데 외교 정책에 있어서 평화주의의 방침을 취하고, 내정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하층 계급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의회 정치가로 알려진다. 윈스턴 처칠과 함께 가장 위대한 영국의 수상으로 여겨진다.
  • [20] 재차 언급한다. 당시 영국 법률은 타국에 체류할경우 타국의 법률을 준수할것을 명시하고 있다.
  • [21] 병선 60척과 서양식 대포 200문을 확보하고 쇠사슬로 광저우로 올라오는 강을 막아 버렸으며, 민병대를 소집했고 서양인에게 상금을 걸어 내통자를 차단하였다.
  • [22] 이것은 영국인들이 미합중국 상인을 자처하면서 계속 무역했기 때문이었다. 북경에서는 아편 무역을 완전히 단절된 게 아니라고 파악했다.
  • [23] 즉 청 조정은 천진의 군함을 군사 시위가 아니라 하소연하고자 온 집단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 [24] 심지어 아편전쟁 직전에는 황자들을 아편 흡연을 이유로 신장으로 내보낼 정도로 초강경론자였다.
  • [25] 그러나 그 배에 영국 국기가 달려있었다는 증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 [26] 1차 아편전쟁 당시에는 외무장관이었다. 참고로 이 사람,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 등에서는 어느날 나라일로 바쁜 와중에 짬짬이 시간을 내서 산책을 나갔다가 우유를 배달하다가 우유통을 엎지르고 깨뜨린 소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소녀를 위로해주며 우유와 우유통 값을 자기가 대신 주려다가 하필 지갑을 두고 나와서 내일 다시 만나면 값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다음날 내각회의로 바쁜 와중에도 소녀와의 약속을 생각해서 장관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고 소녀와 약속한 곳에 다시 만나서 우유와 우유통 값을 지불하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와서도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훈훈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자국 어린이는 끔찍이 생각하는 이런 좋은 사람이 다른 나라에 대한 예의는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
  • [27] 사실 영국측에서는 1차 아편전쟁이 너무 일찍 끝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1차 아편전쟁을 지휘한 페리 제독은 "1년만 더 전쟁 했어도 중국을 확실히 밟았을 건데..." 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후술 되어있듯이 청나라는 완전히 패배하여 제국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덩치 큰 호구가 되었다.
  • [28] 사실 루이 나폴레옹은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영국과 적대한 것이라고 보고 영국과 협조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고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오랜 경쟁과 갈등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해 관계가 상충되지 않는 아편 전쟁이나 크림 전쟁 등의 사건에서는 그럭저럭 협력할 수 있었다.
  • [29] 여기서 털린 각종 보물 또는 유물들이 오늘날 가끔 경매에 나오기도 한다. 중국 입장에선 속터질 일.
  • [30] 영국의 아편전쟁 이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이삥뜯기에 가담해서 중국을 삥뜯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주도의 독일 통일 이후엔 독일도 이에 합류.고만해 미친놈들아
  • [31] 다만 1851년경의 아편 수입은 1840년의 두배에 달했다고 한다.
  • [32] 참고로 이 당시 한국인 마약사범을 체포하고 바로 한국 정부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고 통보를 날렸으며, 이를 접수한 한국 정부 측에서 형을 집행하지 말고 당장 한국으로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중국은 이를 쿨하게 씹고 형을 집행한 다음에 집행 끝났다고 통보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