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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

last modified: 2015-10-15 04:39:34 Contributors

Apartheid.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정립
4. 실태
4.1. 大 아파르트헤이트
4.2. 小 아파르트헤이트
5. 금욕주의 정책과 백인 간 갈등
6. 붕괴
7. 폐지 후의 잔재
8. 기타
9. 참고 사항

1. 개요

냉전시대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취하던 악명높은 인종차별 정책이자, 인류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가 된 사건.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한다.


백인 전용임을 알리는 표지판. 번역하자면 "백인 전용. 본 공공시설과 토지는 백인만 사용하도록 지정되었습니다."

인종간에 실질적인 신분제도를 설정한 몹쓸 정책으로 카스트 제도에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 "백인과 흑인을 격리하면 차별이 아니다." 라는 얼토당토 않은 사고방식 아래 벌어진 차별 정책.[1] 실제로는 말장난만 좀 쳤을 뿐, 본질은 "차별의, 차별에 의한, 차별을 위한" 전형적인 신분제도 정책이었고, 지구촌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 식의 말장난에 속을 바보가 아니었다. 결국, 이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60년대 이래 국제사회로부터 아예 왕따가 되기까지 한다. 아파르트헤이트가 90년대[2] 들어 철폐되기 직전까지 남아공은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악역 포지션이었다.[3] 남아공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 9명 가운데 노벨평화상 수상자 4명이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했거나, 철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고 문학상을 받은 2명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시절의 남아공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를 했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다는걸 생각해보면, 말 다한 셈이다.

2. 배경

17세기 케이프 식민지가 성립하면서 네덜란드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이주해왔다. 이들의 후손들이 보어인(네덜란드식 발음으로는 '부어르') 또는 아프리카너라고 불리는 사람들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하게 된다. 이들은 아프리카 토착 백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굴러온 돌이었고 특히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수의 흑인 민족들에게 흡수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수적 열세에 따른 공포감이 아파르트헤이트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프리카너들의 움직임은 남아프리카 연방성립(1910년) 이후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결성, 그리고 국민당의 1948년 집권 이후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실시, 공화국 수립(1961년)으로 이어진다.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하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네덜란드계 칼뱅교도들과 프랑스계 위그노들이 종교활동의 자유를 찾아 지금의 남아공 지역으로 옮겨간 사람들로 구성되었었다. 후술할 다니엘 프란수아 말란(D. F. Malan)[4]도 위그노 프랑스인이었다. 처음에는 현지 흑인 원주민들을 선교 대상으로 삼으려 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선교가 아예 불가능한 악의 민족(...)으로 규정하는 선민사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5]

또한 이들은 기욤 판 프린스테레르, 아브라함 카위퍼 등 네덜란드 현지에서는 지나친 수구꼴통에 근본주의적 주장으로 냉안시 되고 무시 당한 신학자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종교적으로도 더더욱 보수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측은 아프리카너들을 내다 버린 꼴통 자식, 반대 방향으로는 믿음의 배신자 정도로 서로 적대시 했기 때문에 남아공 아프리카너들이 네덜란드에 대하여 느끼는 유대감은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호주나 뉴질랜드인들이 프랑스와 영국에게 가진 감정보다 훨씬 더 약하고, 그 연결점도 느슨하다. [6]

3. 정립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은 1917년에 얀 스머츠(후에 총리)의 연설로부터 등장하지만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분리라는 개념은 영국 식민지였던 19세기 말부터 존재했다. 케이프와 나탈에서 실시된 통행법(pass law)은 백인과 유색인종의 거주구역으로 흑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에도 비슷한 법률이 있었다. 이러한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상황은 1년간 체류했던 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의 비폭력 저항은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전개된다.

이러한 정책은 191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당 정부하에서 이를 법제화하는 한 편[7] 원주민 토지법을 제정하여 흑인들에게 토지거래권을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영국계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고 1922년 백인 탄광노동자들의 파업을 강경진압하면서 1924년 총선에서 보어인들이 주축이 된 국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본래 국민당은 1915년 바리 헤르초흐라는 자에 의해 창당되었다. 당시만 해도 임금법(1925년), 연금법(1927년)등으로 백인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진보적'인 정책을 취했지만 백인과 타 인종간의 혼혈(컬러드)이 나오는걸 방지시키러는 목적으로 풍기문란법을 제정했다. 물론 딱히 잘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다가 경제대공황이 닥치고 나서 1933년 들어 얀 스머츠의 남아프리카 당과 기존 집권당인 국민당이 연립정권을 구성했고 1934년에 연합당으로 합당되었다. 그러나 다니엘 말랑을 비롯, 국민당내에서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계파가 탈당, 순수 국민당을 설립했다. 그 이후에도 흑인유권자들을 별도의 의원을 뽑게하는 일종의 차별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후 얀 스머츠가 다시 총리가 되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남아공 경제가 급부상하면서 백인들의 빈곤률이 급감하고 그 동안 여러가지 차별을 당했던 흑인들의 사회진출도 활발해져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이 격화되면서 얀 스머츠 정권하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완화했으나 [8] 완화정도가 낮아서 흑인들에게 불만이었고 더군다나 이 정책은 아프리카너들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헤르초흐계 계파가 탈당하여 아프리카너 당으로 떨어져 나갔고 또한, 보어인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9]

2차세계대전 때 영국의 보호국 이자 동맹국 이었던 남아프리카 [10] 는 많은 수의 백인 남성을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선에 영국군의 일원으로 보냈는데 그들의 부재로 당시 남아공 내의 산업에 흑인 특히 흑인 여성들이 노동했고 그들의 경제적 기여도가 높아져 감 에 따라 권리향상을 위한 요구도 높아져 갔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백인 병사들의 일자리와 백인 위주의 질서가 위협당한다 느낀 당시 남아공 의 백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와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1948년에 총선이 치러졌는데 이 선거에서 국민당은 컬러드와 영국계가 많이 살던 도시지역에선 당시 집권당인 연합당에 뒤져서 득표율에선 11.5%나 밀렸지만(49.2% VS 37.7%)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농촌지방에서 압승을 거두어 연합당을 5석차(70석 vs 65석)로 누르면서 승리했고 아프리카너 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실시가 본궤도에 오른다. 즉, 당시 남아공 주민의 4/5에게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11] 널리 알려진 아파르트헤이트 개념을 주창한 베르너 아이젤렌은 인종분리와 백인우위가 그때까지의 방식으로는 더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1948년에는 정치적 분할정책으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완전한 인종분리에 비해 유리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즉, 흑인과 백인이 하나의 국가의 한 국민으로 묶여있는 한 소수 백인에 의한 지속적인 흑인분리 및 통제는 비용이 많이들고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인국가와 흑인국가로 분할해 버리자는 것이다. 이 두 정책은 정치적 분할(대(大) 아파르트헤이트)과 인종분리(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구분되고 있다.

아무튼 위 과정을 통해 1948년 성립한 말란 내각은 인종간 혼인금지법(1949), 배덕법(흑백간 관계 금지)(1950),[12] 인종별 시설분리법 제정, 통행법 강화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를 강화시켰다. 그 덕분에 많은 부부들이 강제로 이혼당해 가정이 산산조각 나는 일이 수두룩했고, 특히나 흑인과 관계했다는 이유로 백인들도 감방에 가는일이 속출하였기 때문에 백인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이 일었고 특히 컬러드 계층에서의 반발이 극심했으나 1953년 총선에서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선거구가 짜여진 점을 이용해 연합-노동당 연합을 제압했고(94석 vs 62석)[13] 후임 스트레이돔 내각은 컬러드와 아시아계 유권자를 선거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법을 통과시킬려고 했지만 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내리고 상원에서도 국민당과 아프리카너당을 합해도 과반조차 넘기지 못해 법안통과가 불발되자 국민당 성향 판사들을 임명한 다음 상원 정수를 48석에서 89석으로 올리고 각종 편법을 동원, 국민당이 상원 의석의 77석을 차지하도록 조정한 뒤 사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색인의 공민권과 참정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켜 주요야당인 연합당과 노동당을 식물정당화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이로써 국민당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견제장치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14]

이렇게 거듭되는 막장 짓거리에 영국이 비난하자 국민투표를 통해(물론 그 이전에도 그렇듯이 편법을 썼다.) 영연방에서 탈퇴하였고. FIFAIOC로부터 추방당해 1957년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에 참여하려다가 쫓겨났다. [15]

네덜란드 출신인[16] 헨드릭 페르부르트 박사(1901~1966)[17]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시행의 건설자로 불린다. 1950년 원주민담당상을 거쳐 1958년 남아프리카 연방 수상이 되었고 1961년에는 보어인의 숙원이던 영연방 왕국 이탈-공화국 수립을 주도하였다. 그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로서 반투자치촉진법(=홈랜드 건설로 흑인참정권을 완전히 박탈), 대학교육확장법(대학기관을 백인, 흑인, 인도인 기관으로 분리. 당근 유색인종 대학은 교육의 질이 훨씬 낮음) 등 통과를 주도하였다. 웃기는 건 페르부르트 본인은 흑백 공존(물론 분리를 통한)을 지지하는 진보세력임을 자처했다는 거... 한마디로 가면을 썼다는 소리다. 1960년에 영국계 백인 농부에 의한 암살 미수는 피했지만[18] 1966년 케이프타운에 있는 의사당에서 그리스계 백인 경비원에게 칼로 찔려 암살당한다. 어찌된게 암살시도 두번 다 백인에게 당했다 그만큼 인간성이 병신이었나 백인에게 죽어서 행복하겠네 자세한 건 이런 인종차별정책에 항거한 흑인 성직자 데즈먼드 투투 항목 참고.

4.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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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주의는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의 설정이라는 大 아파트르헤이트와 일상생활에서의 흑백분리를 가리키는 小아파르트헤이트로 분리할 수 있다.

4.1. 大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들은 대도시 중심가에 사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고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19][20]라고 불리우는 구역에 따로 살아야 했다. 1970년 "홈랜드시민권법" 제정으로 흑인들을 대놓고 외국인 취급하기 시작했다. 외지인이 원주민을 외국인 취급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홈랜드는 총 10곳이었으며 그 중 4개(트란스케이, 보푸타츠와나, 시스케이, 벤다)는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차례대로 독립했다. 백인 정부는 그곳의 땅을 떼서 흑인들을 독립을 시켜준다고 했지만 실상은 남아공 국민으로의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뜻. 전 국토의 13%에 불과한 이 황무지에 인구의 3/4이 살았다.

당연하지만 반투스탄 지역은 개발도 안되고 척박한 황무지였고 교육, 복지, 의료의 혜택도 형편없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 남아공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남아공법상 이들은 외국인이다. 물론 반투스탄을 승인한 나라는 남아공과 반투스탄 상호간밖에 없다.[21] 결국 이 4개국은 만델라 정권 때 남아공으로 재편입되었다.

홈랜드의 주요 수입원은 남아공에서 오는 백인들의 관광, 정확히 말하면 환락산업으로부터 얻는 수입이었다. 남아프리카 국민당은 도덕적 엄숙주의를 강요하였으며 후술하듯이 흑백 성관계도 금지되어 있었는데 홈랜드는 (명목상 남아공이 아니기에) 카지노와 흑인과의 관계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라나.

4.2. 小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들이 도시에 들어오려면 허가증이 있어야만 했다. 주민등록증 같은 카드가 아니라 수첩처럼 두꺼운 거였다고. 흑인이 들어오는 경우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자로 일하거나 관광산업용. 물론 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백인들과 같은 시설을 이용할 자격이 없었다. 허가증이 없으면 바로 체포되었다.

1949년 인종간 혼인금지법 실시 후로 인종간 혼혈은 금지되었지만 그 전에도 백인, 흑인, 황인, 인도인들이 수백 년간 섞여 살았기에 혼혈이 많이 일어났고 외모로 인종을 구분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신분증에 인종을 명시하시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런 구분도 상당히 자의적인 것이어서 형제간이라도 피부가 많이 그을린 쪽은 흑인, 안 그런 쪽은 백인으로 구분되기도 했다니...[22] 뿐만 아니라 1950년 "배덕법" 의 제정으로 흑백간 성관계도 금지되었다.

유명 축구선수 스티븐 피에나르는 어린 시절 반투스탄이 아닌 도시에 살았는데 그의 친구가 백인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더불어 대부분의 식민지 경영 국가가 그러했듯 남아공 백인 정권은 부족 간의 분열을 종용했다. 그러나 흑인차별 자체가 너무 심해서 이 부족들끼리 이를 갈면서도 손 잡고 저항했다.[23] 넬슨 만델라는 코사족이라 줄루족이 상당수이던 남아공에서 반대도 많았지만 그래도 같은 흑인이라 백인보다 낫다고 지지한 줄루족도 상당수였다. 보통 이런 부족간 이간질 작전은 성공률이 높은 편[24] [25] 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남아공이 얼마나 악랄했었나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인도인, 중동인, 동양인도 흑인만큼은 아니지만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백인과 흑인 혹은 유색 인종과의 혼혈인 컬러드(Coloured)도 차별받았다. 다만 일본인 등 일부 동아시아인은 예 백인(Honoured white)이라고 하여 백인과의 결혼과 투표는 금지였지만 백인과 같은 시설을 이용할 수는 있었다. 심지어 대만인은 아예 공식적으로 백인으로 인정받았다. 외교적 고립이 심했던 대만은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남아공과 수교를 했고, 남아공은 이런 대만을 배려해서 대만인을 공식 백인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본토 중국인은 컬러드로 인정해서 차별대상이었다고...[26][27] [28]

한국인의 경우는 예 백인 대우를 공식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개개인이 받았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당시 한국도 다른 나라들처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표시로 1992년까지 미수교이자 1994년까지는 여행제한국가였다.[29] 이 '명예 백인'들도 같은 유색인종을 차별할때가 있었다고 하지만 반대로 명예백인으로 대접한다고 해놓고선 남아공 당국에서 뒤통수 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이뭐병

더 웃긴 사실은 1970년대에 남아공에서 중국 음식점이 유행하자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집이 급증했는데 유색인종이 운영하는 곳이라 백인 출입이 불가능해 백인들이 항의를 하자 중국집에 한해 '백인 이용 가능' 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기존의 중국인들이 백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결국 중국집에 한해 중국인도 백인이 이용 가능한 식당에 출입 가능으로 만들었다. 흑인들 음식이 인기였으면 대체 어쩔 뻔했어

일부 다른 유색인종들도 명예 백인이라며 우대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흑인 농구선수나 뉴질랜드마오리족 럭비 선수를 명예 백인이라고 부르며 우대하기도 했다. 남아공 정부가 이뭐병에 병신인증을 한 격. 이렇게 강경 일변도로 막나가는 억압 정책을 펴는 주제에 상황 따라 제 입장 휘꺼덕 휘꺼덕 바꾼 박쥐 같은 나라가 나치 독일 되시겠다(...)[30] 당연히 미국 흑인 선수들은 대부분 응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벌어지는 반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 동참하거나 지지하면서 이런 헛소리에 반격했다. 다만 뉴질랜드 마오리족 럭비 선수들은 입국했는데 남아공 백인들의 인기 스포츠인 럭비 경기에 뉴질랜드 대표팀을 초청했는데 거기 포함된 마오리족 선수들을 뺄 수가 없어서였다 카더라.

그나마 이건 나은 거라서 이전에는 세계에서 성공한 흑인들을 남아공에선 소개를 금지하기도 했다. 덕분에 운동선수나 흑인 가수들, 연예인들을 남아공 흑인들은 존재를 몰랐으나 오래 가지 않아 알려졌고 흑인들도 돈 많이 벌고 백인들에게 인기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뒤늦게 백인 정부에선 부랴부랴 그런 유명 흑인 인기인들이 명예 백인이란 헛소리를 했으니 당연히 통할 리가 있나...

5. 금욕주의 정책과 백인 간 갈등

다만 백백갈등[31](...)이나 금욕주의 정책이 같이 병행되었다는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애초에 보어인들 대부분은 농촌위주 가족단위로 생활하기 때문에 미국 남부 바이블 벨트 백인들 뺨때리는 수준으로 보수적이고 청교도적이며, 지금도 페이스북같은 건 영혼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금지하는 가정이 많을 정도이다.

위에 나왔듯이 초기 페르부르트의 농지정책 삽질[32]은 너무나도 유명했기에 되려 백인농민들은 그 페르부르트를 서로 죽이려 했고 결국 백인에게 암살당했다. 더불어 문화 검열 정책만큼은 인종을 가리지 않았다고 해야할 지경. 어떤것은 현재 백인들 기준으로도 이해못할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인게 텔레비전을 악마의 선물, 핵폭탄, 독가스라 비유하며 도입을 결사반대한 일로 이후 웬만한 흑인 국가들보다도 늦은 1976년에야 개시했다.[33]

당시 아프리카너계가 대다수였던 국민당(NP) 정부의 금욕주의 정책으로 인해 동성애[34][35], 음란물, 도박[36], 낙태[37] 등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일요일에는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백화점이나 극장 등에 대한 휴무을 강제했다.[38] 그리고 아무리 백인일지라도 공산주의자는 얄짤없이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백인 공산주의자들이 당시 ANC와 협력을 하며 반정부 활동을 펼쳤고 조 슬로보, 브람 피셔, 루스 퍼스트 등 수 많은 좌파 출신의 양심적인 백인들을 반아프르트헤이트 진영으로 몰아 넣어 이들 백인 인사들은 무장 투쟁, 문화 사회 계몽 운동, 법률 투쟁 등에서 ANC에게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안드레 브링크,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 등 당시 문학계의 아프리칸스어 문학 르네상스를 주도하던 인사들은 죄다 반체제 진영으로 넘어가 전 세계 학계, 문화계에서 남아공을 보이콧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저 중에서 남아공 공산당의 최대 거물 중 하나였던 브람 피셔는 보어전쟁 당시 트란스발 공화국의 거물 정치인이자 영국 식민지 시절 초대 자치 정부 총리였던 아브라함 피셔를 조부로 두었을 만큼 혈족 중심의 폐쇄적인 아프리카너 사회에서도 뼈대 있는 성골 집안 출신이었는데(다만 정당은 남아프리카당-연합당 계열이긴 하다.) 그 모든 걸 버리고 신념에 따라 반정권 인사로서 넬슨 만델라의 변호를 담당했으며, 결국 자기도 만델라 따라 감옥에 들어가 장기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병보석 석방 이후 2주일 만에 죽어 남아공 당국만 빼고[39]전 세계에서 살아 있는 양심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워낙 상류층에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라 남아공 당국에서도 함부로 대하는 건 힘들었던지 추방과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 제의를 했는데 이를 거부하면서 한 말이 폭풍간지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아프리카너이고, 나의 조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내 정부와의 정치적 마찰 때문에 내가 조국을 떠나야 할 이유는 없다. 한마디로 자신은 하나도 부끄러울게 없으며, 떠나야할 쪽은 아파르트헤이트 당국이란 소리. 이를 두고 유대계 여성 운동가이자 반아프르트헤이트 투사였던 루스 퍼스트는 자신을 심문하는 아프리카너 경찰들에게 "브람 피셔라는 내 소중한 친구이자 동지이며, 정말 멋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당신들 아프리카너란 종족 전체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이를 깨끗히 하는 아프리카너의 마지막 양심이다" 라고 평했다.

브람 피셔 뿐만 아니라 남아공 공산당의 간부였던 조 슬로보와 루스 퍼스트도 유명한 편인데 이 둘은 부부로 활동하다가 루스는 1982년 남아공 경찰에서 보낸 편지 폭탄[40]을 받고 사망했고, 조 슬로보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후 장관에 임명되는등 고생 끝에 보상을 받는듯 했으나 퇴임 직후 암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 둘의 생애는 1988년 조와 루스의 자식인 숀 슬로보가 각본을 쓴 '갈라진 세계'를 통해 영화화되었다.

좀 자유주의적인 영국계 백인들도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워낙 극심한 흑백 차별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뿐이지, 영국계 백인과 아프리카너계 백인의 대립 또한 보어전쟁 이후 뿌리가 깊어 영국계 백인들은 컬러드 계층이 투표권을 상실한 이후 정권의 핵심을 차지한 아프리카너계에게 정계에서 소외 당했다. 물론 영국계라도 다 같은건 아니라서, 돈 많은 계층들은 흑인들이나 컬러드를 값싸게 부려먹을수 있었던점도 있기에 70년대 이후에 국민당 지지로 돌아섰긴 했지만, 하여튼 정부에 반항적인 백인들은 명예 유색인이라는 딱지를 줘서 진짜 유색인들보다도 요주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물론 가장 극심하게 탄압을 받은 것이야 흑인들이었지만,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본질은 단순한 인종 차별 정권이 아니라 그 거물 정치인들 대부분이 2차 세계대전 시절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나치스에 동감하고, 이를 모델로 삼았으며,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극우 성향의 네덜란드 신학자들이 재창조한 근본주의적 사이비칼뱅주의를 종교적 기반으로 삼고 [41], 이를 바탕으로 한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 순혈주의를 추구한 집단이었다. 이데올로기적 뿌리 자체가 전간기 파시즘과 직접적으로 연결 되어 있다는 소리다 [42]. 이러니 당연히 주 된 타겟인 흑인이 아니라도 전반적으로 폭압적이고, 폐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정권과 사회적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막혀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디스토피아 소설의 한 부분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전혀 없다.

당연하지만 지금까지도 남아공 백인 칼뱅교도들의 이러한 악행들은 인종차별뿐 아니라 위선적 행태까지 저지른 전형적인 사이비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라는 평가를 얻게 되었다.

6. 붕괴

1976년에는 소웨토 지역에서 흑인 학생들이 아프리칸스어[43] 수업 반대 시위를 하자 무자비하게 진압을 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또한 나미비아 지역을 자국 영토로 불법 점유하고 1960, 70년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포르투갈군의 식민지 독립 운동 탄압을 거리낌 없이 지지하여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을 비롯 전세계적으로 큰 반감을 불러왔다.[44] 국제적으로 비난여론이 빗발침에도 백인 정부는 귀를 틀어막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시에 이 전쟁에 참여 했던 백인들이 앙골라 전역에서 싸운 전쟁을 반공 자유주의 투쟁으로 포장하고 있다.[45]

사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나름대로 자신 있었던 건 백인이 지배했던 로디지아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모잠비크, 앙골라와 협력하면 타개할 수준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아프리카의 백인 국가들끼리 협력하면 괜찮다고 본 것. 게다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 주요국가들이 비록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는 남아공 정부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기는 했지만 당시 냉전 상황에서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남아공 정부와 교역이나 비공식적인 교류는 계속 해왔기에 냉전 시기 동안 그리 치명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 사실 당장 미국조차도 1960년대까지는 남부지역에서 인종차별 정책이 펼쳐져서 남아공을 무턱대고 비난하기에는 개운찮았을테고.

그러나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비사우 등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이 1974년과 75년 사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설상가상으로 로디지아의 백인 정부마저 권력을 잃게 되면서 점점 궁지에 몰리고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46] 악이 받친 남아공 정부는 핵무기를 개발하면서까지 버텼으나 국내외의 소요에 염증을 느낀 젊은 백인들의 탈출이민과 침체된 경제, 국제사회의 압력[47]으로 인해 결국 F.W클레트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유화책으로 돌아섰고, 냉전이 해체되는 무렵이었던 1990년에 넬슨 만델라를 전격 석방, 협상과정을 거친 뒤, 1992년에 유색인종에게도 백인들과 같은 권리를 주는 법안이 통과되어서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결과 1994년에 반투스탄이 해체되고 그 이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ANC가 압승을 거두고 넬슨 만델라도 대통령에 당선되며 아파르트헤이트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 폐지 후의 잔재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평생의 타도 대상이었으며 결국 그의 당선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도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오래 지속된 정책이었기에 지금도 잔재가 남아서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진 후부터 상당수(대략 80만명으로 추산된다.)의 남아공 백인들이 타국으로 이민을 갔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뿐만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비슷한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그리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등으로 이민간 사람들도 있다.[48]

사실상 아파르트헤이트가 단순 차별을 넘어서서 경찰이나 자경단의 잔학행위도 수반했기 때문에 보복이 두려웠던 건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일부 계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델라조차도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라는 구호 아래 "잔학행위 한 것도 솔직히 공개적으로 자수하면 봐주겠음" 으로 나갈 정도였으니.

남아프리카 항공에 아직도 A340 기종이 많고 한때 747 기종이 많았던 것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항의하는 뜻으로 남아프리카 항공에 대해 항로를 열어주지 않았고 이로 인해 남아공에서 인도/홍콩 등지로 가기 위해서는 인도양을 건너야 했다. 또한 남아공에서 서구권으로 가기 위해서도 아프리카 대륙을 거치지 않고 대서양으로 빙 둘러서 갔다는 것. 당시 ETOPS 규정이 매우 빡빡하여 대양을 건너거나 가로지를 경우 쌍발기로는 이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항공이 수요가 나지 않는 구간을 운항할 때에도 대형기를 사용하였고 대형기를 선호했다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무기시장에서도 남아공은 독자적으로 나름 견실한 무기들을 자체개발해 생산하는 것으로 명성이 있는데 이것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의 산물이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해왔으니 성능 좋은 무기를 외국에서 수입해올 수가 없어 거의 모든 무기를 자체개발해서 충당해야 했던 것.

그리고 1960년대부터 30년간 남아공의 국제경기 출장금지로 인해 경험 부족으로 인한 남아공 스포츠계의 질적 저하도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축구가 처참한데 1996년 자국에서 치룬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우승을 달성했고1998년 부르키나파소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했고,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하였으나,2006년 월드컵에서는 예선에서 탈락하였다. 2010년 월드컵에서는 2차 예선에서는 한물간 나이지리아에게 털리고 탈락했지만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개최국 잇점을 살리지 못하고 1라운드 탈락. 개최국이 16강 진출 실패한 최초의 사례를 남겼다. 게다가 2014년 월드컵에서는 한술 더떠서 1차예선부터 올라온 초약체 에티오피아에게 털리고 탈락했다.[49] 에티오피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쳐잡고 피파랭킹이 50계단 이상 상승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국민당은 노선을 전환하고 1997년에 신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1999년 총선에서 당세를 크게잃고 궁여지책격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야당인 민주당[50]과 합당 하여 민주동맹을 창당했다가 얼마가지않아 다시 분리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2004년에 아프리카민족회의에 흡수되어 해산되었다. 이들로부터 갈라져나왔던 재건 국민당(HNP)은 2014년 기준으로도 군소정당으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와 별개로 2008년 8월에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으로 이름이나마 부활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거의 다수를 적으로 돌리고 있고, 백인들의 대부분이 민주동맹에 표를 던지고 있는 만큼 군소정당에 불과하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철폐됬지만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면 백인정권 아래 벌어진 백인우월주의적 정책과 사회구조는 없어졌지만 인종우월주의는 아직 남아공에 남아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남아공 에서 흑인들이 반 아파르트헤이트 항쟁을 벌였을때 그들의 슬로건은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도 있었지만 사실 자신들이 백인에게 당한 수모를 그대로 백인들에게 돌려주자고 (...) 하는 감정이 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51]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4년 이후 남아공에선 새로운 다른 4천만의 국민을 먹여살려야 하는 상황 [52] 에 처 했고 경제상황이 신통치 않자 과거 homeland 에서 살던 흑인들이 대도시 및 과거 백인지역 으로 몰려와 사회의 하류계층을 차지하거나 범죄의 길로 빠져들어 현재 남아공의 극악의 범죄율을 이루게 된다. 흑인정부는 백인과 흑인의 생활수준을 맞추기 위해 BEE [53] 와 GEAR [54] 등 경제정책을 내놨지만 대부분 흑인 위주로 된 거라 역차별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55] 역차별 논란은 대학가 에도 있는데 남아공 최고의 대학이자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학교의 위상인 케이프타운 대학을 비롯해서 여러 다른 대학들은 아예 필요한 입학점수가 인종별로 다르다. [56] 백인중심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고 흑인중심 아파르트헤이트 냐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아직 흑인들의 백인에 향한 증오와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 의 청년당수가 대놓고 Shoot the Boer [57] 라는 노래를 불렀을 정도. 사실 흑인들이 못돼먹은게 아니라 2015년 현재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그동안 삽질한게 큰데 [58] 그게 전부 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 라고 하며 백인들 에게 비난을 돌리니 여러모로 남아공 내 에서 인종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8. 기타

영화 디스트릭트9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비판한 영화이다. 실제로 당시에 백인들이 흑인을 대한 태도는 일반적인 인종차별적인 생각인 '더럽다, 하층민' 의 수준이 아닌 인간의 형태는 갖추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 정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59] 그렇기에 영화적으로 차별 대상을 외계인으로 설정한 것. 괜히 제노(Xeno)포비아가 아니다?? 그리고 케이프타운 인근에 나이지리아에서 건너온 흑인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가 있었는데 도시가 커지면서 그곳이 노른자 땅이 되었고[60] 백인들은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그곳을 '여러 민족이 교류하면 다툼만 일어날 뿐' 이라면서 강제로 백인거주지로 설정하고 기존 주민들을 몰아내었다. 정작 다툼을 만들어내는 건 자기들이면서 그곳이 바로 디스트릭트6. 영화 내에서도 슬럼가의 검은 세력이 나이지리아 갱단으로 묘사된 것이 그런 이유이다.

그리고 이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하여 더러운 거래가 시도된 게 있다고 한다. 2013년 11월 25일 이스라엘 방송 우브다에 나온 거물 유태계 미국인 영화 제작자 아논 밀천(Arnon Milchan)(그의 제작, 기획영화)이 말하길 1970년대 아파르트헤이트를 취하던 남아공에 이스라엘 유태인 이민도 받아들이고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면 그 댓가로 헐리웃 영화를 통하여 남아공을 좋게 받아주겠다고 더러운 거래가 시도되었다고 한다! 뭐 남아공 기득권을 가진 보어 및 백인계들이 즐 쳐드셈 거부한 탓에 빡돈 헐리웃에서 남아공 백인층과 아파르트헤이트를 까는 영화를 마구 제작하며 보복했다는 것. 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밀천이 제작한 당시 최신작 노예 12년 홍보를 위하여 그랬다는 의견도 있었지만...어쨌든 이런 더러운 거래가 있었던 셈. 유태인과 이스라엘에게도 개운찮은 폭로였을 듯 사실 유태인도 남아공에서 유색인종 취급을 받아 차별대우를 받곤 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1970년대 이후부터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까지 유달리 아파르트헤이트를 까는 영화가 영미권을 중심으로 나왔는데 이때 나온 영화로는 자유의 절규, 드라이 화이트 시즌, 파워 오브 원, 보파!, 갈라진 세계, 친구들이 있다. 다만 흑인이 주인공인 보파! [61]나 각본가의 개인사가 절절히 묻어나오는 갈라진 세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너무 백인 중심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 편이다.

그밖에 미국 액션영화 리쎌 웨폰 2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는 장면[62]이 나오며 아예 남아공 미국 영사관[63]이 마약 밀매에 살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온다. 남아공 미국영사라는 놈이 최종보스인데 저런 짓하고 외교관 면책 특권나 나불거리다가 사살당한다.[64]

9. 참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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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담이지만 이 논리를 담은 법리를 Seperate but Equal이라 하여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도 유지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50년대에 와서야 위헌 판결을 받는다.
  • [2] 그렇다. 무려 40년이 넘는 기간이나 이런 미친짓을 해온 것이다!
  • [3] 리셀 웨폰 2가 대표적이다.
  • [4] 본인 스스로도 프랑스계보다는 '보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프랑스식'(프수아 말)으로 불리는걸 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5] 출처
  • [6] 남아프리카 내 백인의 역사는 1652년 얀 반 리벡이 데리고 온 네덜란드 농부들 로 부터 시작해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통한 네덜란드 인의 이주로 아프리카너를 단순히 네덜란드 계 백인이라 생각 할 수 있지만 프랑스의 위그노 신자들도 있고 그 후에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등 여러 유럽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이주해와 아프리카너를 네덜란드 계 백인이라고 치부 할 수는 없다. 현지에서는 영국계를 제외한 남아공 에서 몇 세대 이상 산 백인과 모국어가 프리칸스 인 백인을 아프리카너 라 부른다.
  • [7] 이를테면 국회의원 선거권을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백인과 혼혈인에게만 보편적인 선거권을 부여하고(여성은 1930년부터) 흑인과 아시아인들에게는 돈 많은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준다던가...
  • [8] 페이건 위원회를 설치(Fagan Commission)했는데 이 위원회에서 인종차별을 완화해야한다는 조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 [9] 여담으로 이 시기에 넬슨 만델라는 이 시기 연합당 정부가 인도계 주민들을 차별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연합당 정부 규탄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 [10] 남아공이 영국과 완전한 결별을 한 건 1961년의 일 이다.
  • [11] 참고로 당시 남아공에선 영국처럼 소선거구제를 체택하고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이후에는 네덜란드처럼 전국단위 비례대표제를 체택하고 있지만...
  • [12] 웃긴 게 반투스탄에서는 흑인 여성의 성관계가 허용되었다. 뒤로는 이런 식으로 성관계를 했던 거. 항목 참조.
  • [13] 연합당과 노동당은 이 선거에서 국민당의 4배나 되는 선거비를 썻고 득표율에서도 국민당을 앞섰지만(50.4% VS 49.4%) 결국 게리맨더링의 한계를 넘기지 못했다.
  • [14] 당시 제1야당이었던 연합당은 국민당의 막장짓거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거진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고(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반대했긴 했지만 연합당의 주요지지층 중 하나가 부유한 백인들이었던지라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웠다.) 결국 지지기반이 눈 앞에서 대거 날라가는데도 변변한 대응책 하나 못 내놓는 연합당의 무능함에 빡친 일부 당원들이 1959년에 탈당하면서 진보당으로 분당되었다.
  • [15] 그래서 월드컵에선 지역 예선조차도 나가지 못하고 올림픽에도 역시 나갈 수 없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아프리카 국가 전원이 불참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럭비 경기를 한 뉴질랜드의 참가 허용에 반발을 해서였다.
  • [16] 보어인이 아니고 2살 때 암스테르담에서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다.
  • [17]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만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감을 갖던 사람이며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직후 아내인 멜라니와 함께 진상규명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할아버지와 비슷한 성향이던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견부호손(孫)
  • [18] 왜 백인들에게도 미움받았는지는 후술
  • [19] 아프리칸스어로는 '타위스란트(Thuisland)'라고 부른다. 이름부터가 사실 '대도시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뉘앙스가 있다.
  • [20] 아파르트헤이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80년대에 나온 동아 세계대백과 사전에서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이 홈랜드가 원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별쇄화보 속의 미소를 짓는 원주민을 보여주면서까지 설명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다. 참고로 해당 서적은 우간다이디 아민이 독재를 했다가 쫓겨난 일을 익살스러운 행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21] 단, 브리태니커나 일부 자료집에서는 세계의 국기를 수록할 때 이 4개국을 빼놓지 않았다. 홈랜드 깃발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링크를 참조할것
  • [22] 심지어 부모 양쪽이 백인인데도 머리가 좀 곱슬이고, 피부색이 좀 검다는 이유로(정확히는 조상들 중 한 사람이 흑백혼혈로 오랫동안 대대로 발현되지 않았다가 격세유전 현상으로 인해 발현된 것이다) 흑인 판정을 받는바람에 인생을 망친 사례까지도 있었다고(...) 참고로 이 사연의 주인공은 바로 '샌드라 레잉(Sandra Laing)'이라는 여성이며 2008년에 'Skin'이란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 [23] 다만 1980년대 이후 줄루족계의 잉카타 자유당은 ANC와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남아공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총선 실시과정에서 깽판도 좀 치기도 했다.(...)
  • [24] 그 유명한 르완다 학살만 해도 알 수 있다. 벨기에르완다에서 저지른 부족 이간질 정책의 여파로 벌어진 일이다.
  • [25] 민주화가 이루어져 아프리카 민족회의 (ANC) 가 집권당이 되어도 부족간의 반목, 정확히 줄루와 코사의 사이는 그닥 좋지가 않았다. 만델라야 모든 민주화 투쟁을 이끈 영웅 이니 부족 상관없이 존경 받았지만 후임인 음베키는 코사족 이었고 줄루족 으로부터 고까운 평가를 받았다. 현 대통령이자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 공산계열의 네임드 이었던 줄루족 인 제이콥 주마와 음베키는 사이가 몹시나 안좋았고 2008년 9월 음베키가 대통령 직 에서 하야하고 이듬 해 대선에서 주마가 압승 함으로 줄루가 정권을 잡은 건 사실이지만 코사와 줄루의 라이벌리는 아직 진행형.
  • [26] 일본은 당시 남아공의 대표 교역국이였고 특히 인종차별로 유럽 국가들이 국교단절하자 남아공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그런 판국이니 일본 상사원이 남아공 방문하는데 있어 인종으로 문제가 되면 남아공 지들이 손해이기 때문
  • [27] 칼라드였지만 아파르트헤이트 후반이 되면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 [28]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14년이 지난 2008년, 남아공 정부는 본토 중국인 을 흑인으로 인정했다. 중국과의 교류가 늘어나니 취한 정책 일 수도 있지만 백인정권 시절 본토 중국인들의 설움과 핍박받은 걸 생각 해 보면 아무래도 동지의식 에 의한 것 아닐까..
  • [29] 미수교이기는 했지만 경제, 문화 교류는 있었다. 심지어 남아공은 당시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의 무역상대국의 하나였다. 대한민국 기업이 남아공에 지사도 내고 교민도 건너가서 살기까지 했다. 다만 공산국가는 아니었지만 1956년부터 사전 허가가 없는 경우 여행제한국가로 지정이 되긴 했었고(당시에는 권고사항이긴 했다) 한국인은 방문하면 인종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불편함에 따른 우려로 방문을 꺼리고 방문하려고 해도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제3국에서 비자를 발급받는 절차를 거쳐야 해서 방문이 그리 많지 않았다.
  • [30] 후술하겠지만 정말로 거기서 배워온 거 맞다. 정확히는 높으신 분들중 몇몇이 현지 친나치 단체에 가담한 것이긴 했지만. 뭐, 수상이였던 얀 스뮈츠같은 경우 1, 2차 세계대전에 영국편에 붙어서 매우 잘 싸웠고 국제연맹 창설에 많을 기여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아파르트헤이트의 근본이 되는 인종간의 분리를 지지했다. 참고로 하드코어 백인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1차 세계대전때 괜히 유럽전쟁에 끼어들어서 피를 흘렸다고 얀 스뮈츠를 배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 [31] 위에 나와있듯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당시에도 엄연히 야당의 활동이 이루워졌고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물론 언론검열이 상시적으로 이루워지는고로 비판강도는 약했지만)도 존재하기는 했다.. 1950년대-60년대 초반의 게리맨더링 크리와 70년대 이후 상당수 영국계 백인들도 국민당을 지지하게 된 영향 때문에 정권을 차지하지 못해서 그렇지...
  • [32] 돈 많은 부유층들에게 유리하도록 짰다
  • [33] 참고로 이후 텔레비전도 인종과 민족에 따라서 볼 수 있는 채널을 제한했다. 예를 들면 1번 채널은 백인 전용(영어와 아프리칸스어를 번갈아 송출), 2번은 줄루족과 코사족용, 3번은 소토족, 4번은 도시에 사는 흑인들 전용으로 채널을 배정하는 식이었다.
  • [34] 당시 남아공정부에선 동성애를 교정한답시고 게이-레즈비언들을 강제로 군입대시켰으며 게이-레즈비언들은 여러 잔혹한 치료(?)과정을 거쳤고 치료(?)가 잘 안된다고 판단되면 강제로 성전환수술을 시켰다. 참고로 피해자는 900여명으로 추산된다.
  • [35] 참고로 동성애 처벌법은 1996년에 폐지되었으며 현재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동성결혼을 허용하고있는 국가다. 물론 동성애자들이 은근히 차별을 받는 경우도 많고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한 범죄들(주로 흑인들을 상대로, 백인은 그나마 경비원 쓸정도로 재력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빈도가 낮은 편이다)도 상당한 빈도로 발생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내에서는 그나마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나은 편이다.
  • [36] 90년대 이후 복권, 경마와 카지노를 전면적으로 합법화했고 특히 카지노(참고로 남아공은 한국과 인구수가 비슷한데 카지노 숫자가 37곳이나 된다!)에서 거두어지는 수입이 상당한지라 남아공 정부에선 나름 쏠쏠하게 세금을 거두고 있고 동시에 사회간접시설 확충 및(카지노를 지어서 영업하는 조건으로 사회간접시설을 지어야하기 때문) 고용창출(주로 흑인들)도 이루워지고 있다. 물론 여느 카지노가 그렇듯이 간간히 도박중독으로 돈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거나 하는 문제점은 있지만.
  • [37] 참고로 남아공에서 1996년에 낙태가 합법화 되었다.(임신 13주까지 본인 선택에 의해서, 그 이후에는 건강상 문제가 있으때 허용)
  • [38] 다만 이 법의 경우 영국에서부터 시행된게 남아공에까지 영향을 끼친거라 좀 애매하긴 하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노동자들의 휴무권 침해 문제가 겹쳐져서 늦게 폐지가 된 것에 비해 남아공은 흑인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도록 대놓고 강제한 집단인데다 백인계들도 이 법을 성서적으로 옳다고 생각했으니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39] 뻔뻔스럽게도 현재까지 몇몇 보어계 극우파들은 희대의 배신자라며 말도 안되는 고인드립을 치고 앉아있다. 이뭐병
  • [40] 말 그대로 뜯으면 폭약이 바로 터지는 소포 폭탄이다.
  • [41] 우리나라에서도 이리 저리 말이 많은 장로교의 신학적 기반인 그 칼뱅주의 맞다. 애초에 아프리카너 민족의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의 근본은 네덜란드지만 막상 본국 네덜란드는 근대 세계를 겪으며 자유주의적인 곳으로 발전했던 반면, 이런 자유주의적 모습에 반발한 남아공 칼빈교는 더더욱 수구꼴통스러운 근본주의적 성향을 띄게 되었고 모국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칼빈주의를 배신하고 뿌리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퍼부어댔다.
  • [42] 당장 훗날 남아공의 총리가 되는 다니엘 프랑수아 말랑, 발타자르 요아네스 포르스터(B. J. Vorster) 등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거물 지도자들 중 다수가 2차대전 당시 반영, 친독 현지 나치 끄나풀이었던 우마차 근위대 (Ossewabrandwag)라는 조직에 가담했던 죄로 콩밥을 먹었었다
  • [43] '아프리카' 라는 말 때문에 흑인들이 쓰는 말 같지만 남아공의 백인들인 보어인들이 쓰는 네델란드어가 변형된 말이다.
  • [44] 심지어는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이들 국가들에서 벌어진 내전에까지도 무단 개입하기까지 했다.
  • [45] 사실상 뒤로 가면 미국이 돕는 자유진영 vs 소련, 중국, 쿠바가 돕는 공산진영이라는 대리전 양상으로 흘러갔으니 반공 전쟁이 아니다고 하기도 좀 그렇다. 반공이란 이름만 붙히면 뭐든지 용서가 되는 줄 아는 인간들이 비단 한국에만 있는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 [46] 로디지아 입장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배신을 때렸다고 봐도 좋은 정도인데, 로디지아가 완전히 궁지에 몰리자 본인들도 거부한 흑인다수 자유정부를 세우는 것에 동의하고 오히려 로디지아/짐바브웨를 협박했다.
  • [47] 미국영국은 반공을 표방했던 남아공 정부를 지원하지는 않았어도 크게 압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가기 시작하면서 남아공의 깽판을 내버려둘 이유가 사라졌다.
  • [48] 1990년대 초반에는 백인인구가 500만을 넘는 수준이었는데 대대적인 이민과 출산율 저하(2.1명에서 1.8명)로 한때 430만에 못미치는 수준까지 인구가 감소하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인구가 늘기 시작해 2010년대 초반에는 460만명까지 늘어났다.
  • [49] 2014년 월드컵에서는 비록 지역예선에서는 떨어졌지만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팀이 딱 3팀 있었다. 독일과 박빙의 승부를 연출한 스웨덴, 아르헨티나를 쳐잡아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베네수엘라, 그리고 남아공을 잡고 최종예선까지 가서 나이지리아와 박빙의 승부끝에 탈락한 에티오피아이다.
  • [50] 계보상으로 보면 위에 언급된 연합당(UP)계열이다.
  • [51] 이드리스 엘바 주연의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2013년작) 을 보면 반 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서 죽은 아들의 시체를 끌어앉고 오열하는 흑인 여자가 넬슨 만델라의 부인 위니 만델라에게 꼭 복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물론 아들의 죽음에 충격과 분노가 커서 나온 말 이겠지만 사실 이런 분위기가 당시 흑인들에게 있었고 또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 주교 그리고 F.W 드 클레르크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상황에서 흑인들에 의한 대(對) 백인 테러와 폭력을 어느정도 막은 것 이다.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에 넬슨 만델라의 건강이 악화되자 당시 남아공에선 인종 간 충돌과 테러가 있을 거 아니냐는 걱정이 있었지만 만델라가 서거한 2013년 12월, 그의 장례식은 물론 그 후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 [52] 아파르트헤이트 때는 전체 인구의 10%를 겨우 차지하는 백인들이 남아공 영토 대부분을 썼고 거기에 있는 산업시설들도 전부 다 그들만을 위한 것 이었다. 나머지 90% 이상의 흑인들은 자치령 이라 읽고 수용소라 이해한다 homeland 에서 백인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빈약한 인프라로 살았고 이들이 갑자기 민주화가 되 요하네스버그와 케이프타운 등 대도시에 진출 할 수 있게되자 그 전에 10%를 위한 산업기반을 100%를 위해 써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 [53] Black Economic Empowerment, 흑인경제 육성정책.
  • [54] Growth, Employment And Redistribution, 성장과 고용 그리고 재분배 정책.
  • [55] BEE 에 따르면 백인 남성은 채용 때 가장 나중에 고용되고 해고 시 가장 먼저 잘린다. (.....)
  • [56] 같은 과 라도 흑인 전용 입학점수는 낮고 그 다음이 혼혈인 컬러드, 그리고 인도인을 비롯한 동양인 이고 백인에게 요구되는 입학점수는 가장 높다.
  • [57] Boer 는 영국계를 제외한 나머지 네덜란드계를 위시한 백인들인 아프리카너를 의미한다.
  • [58] 가장 큰 병크는 2012년 8월에 벌어진 마리카나 사태, 노스웨스트 주 에 있는 마리카나 란 탄광촌에서 광부들이 임금인상과 복지개선을 외치며 시위를 했는데 정부는 거기에 발포로 진압했고 112명이 사망했다. 남아공의 국가신용도는 떨어졌고 해외 투자가 빠지면서 현재까지도 경제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 [59] 앞부분에 장황하게 나오는 외계인의 범죄나 두려움에 대한 다큐는 실제 나이지리아 입국자 및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다큐프로에서 따왔다.
  • [60] 강남이 논밭이였다가 서울이 개발되면서 노른자 땅이 된 것처럼.
  • [61] 모건 프리먼이 감독했다.
  • [62] 아예 멜 깁슨이 Stop Apartheit Now라고 써진 피켓을 들고 영사관 앞에 등장한다.
  • [63] 미국은 그 당시 남아공과는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단교 상태였으므로 대사관이 있을 수 없다.
  • [64] 웬만한 적성국이라도 저 수준으로 영화에서 다룬다면 외교적 마찰 등 많은 문제를 감수해야 한다. 미국이 악의 축이라고 말하는 북쪽의 어떤 공화국도 저런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만큼 당시 남아공이 찍혀도 크게 찍혔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