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아키모토 야스시

last modified: 2015-04-09 15:35:52 Contributors

AKB48 그룹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 (秋元 康)
생년월일 1958년 5월 2일
소속 아키모토 야스시 사무소 (이사)[1], 교토조형예술대학 (부학장)
소속 그룹 AKB48, SKE48, NMB48
HKT48, NGT48, 노기자카46
* 사실상 노래속 화자는 모두 이 사람
별명 아키모토 선생님, 야스스, 가을돼지[2], 팔짱곰
출신 도쿄
홈페이지 구글플러스

Contents

1. 개요
2. 방송작가, 작사가가 되기까지
3. 아키모토 야스시는?
4. 부인 카이 마미코
5. 작사가로서
6. 아이돌 프로듀서로서
7. 에피소드
8. 평가


1. 개요

03083400_1.jpg
[JPG image (Unknown)]

도쿄 메구로 구 출신의 방송 작가, 작사가, 각본가, 영화 감독, 만화 원작자, 소설가, 공연 연출가, 교수, 아이돌 프로듀서. 오늘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아이돌 AKB48을 프로듀스한 사람이다. 별명은 아키부타(가을돼지), 팔짱곰. 오냥코클럽 멤버들에게 앗키라고 불렸다고 한다. AKB48멤버들은 닥치고 아키모토 센세로 호칭이 고정(...). 인터뷰 등지에서는 항상 팔짱을 끼고 말을 하는데, 이 때문에 아키P는 팔짱을 끼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거냐는 농담도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생긴 별명이 '팔짱곰'.

흔히 오냥코클럽의 프로듀서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단독프로듀서가 아니었다. 오냥코클럽을 실질적으로 프로듀스한 것은 이시다 히로시를 비롯한 당시 후지테레비 '유우야케 냥냥'의 작가진이었고, 아키모토는 그 작가진중 한명이었다.

AKB48를 비롯한 자매그룹, 거기에서 파생된 유닛이나 솔로곡, 극장공연 곡, 노기자카46모든 작사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작사 뿐 아니라 종합 프로듀서로서 그룹이 나아갈 전체적인 방향을 지시/감독하고 있다.

흔히 이수만과 비교되고는 한다. 하지만 가수였고 음악 산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수만과 방송 작가이고 방송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키모토 야스시를 그대로 놓고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이수만은 차라리 층쿠와 비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2. 방송작가, 작사가가 되기까지

akimotogo_1_1.jpg
[JPG image (Unknown)]

믿을 수 없는 아키P의 이케멘 고등학생 시절 아니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지금처럼 되는 거지?

주오 대학 부속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1973년 겨울, 수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니혼 TV의 '센다 미쓰오의 일수로 2일 대진격!'을 듣던 중, '이 정도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해서 수험 공부용으로 준비했던 노트 스무 페이지 정도에 걸쳐 센다를 주인공으로 한 헤이케 모노가타리의 패러디를 작성한다. 같은 반 친구들의 칭찬을 듣고 그 노트를 닛폰 방송에 보냈더니 당시 닛폰 방송 사원이었던 카메부치 아키노부와 오쿠야마 테루노부의 눈에 들어 재능이 발굴되었다. 이리하여 닛폰 방송에 찾아올 수 있게 되어, 출입하는 동안 오쿠야마의 제자가 되어 방송 작가 그룹에 소속되게 된다. 당시 17세의 고등학생이면서 방송 작가로서 활동을 개시한 것이 업계에 들어온 계기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주오 대학 문학부에 진학했지만, 방송 작가로서의 활동은 계속해서 대학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결국 방송 작가로서 살기로 결의하고 대학을 중퇴한다. 당초엔 방송 작가 활동을 단순한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받은 수입은 당시 샐러리 맨의 4배 가까운 액수였다. 본인은 이것을 '악전(あぶく銭)'[3]이라고 생각했다고.

그 후, 방송 작가로서 부족함과 불만을 느끼고 있던 중 카메부치로부터 후지 퍼시픽 음악 출판의 아사쓰마 이치로를 소개받은 것으로부터 작사에 관여하게 된다. 그때문에 작사가로서는 후지 퍼시픽 음악 출판과 계약되어 있다. 1981년, The Alfee의 곡인 '通り雨(소나기)'의 B면에 수록된 곡을 작사할 기회를 얻어 '言葉にしたくない天気(말로 하고싶지 않은 날씨)'로 작사가 데뷔를 이뤘다. 이를 계기로 작사가로서도 활동을 시작한다. 방송 작가, 작사가가 된 계기나 일화에 대해서는 1988년 발간된 자전 소설 '안녕, 메르세데스'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온 일이고 특별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라서 자신이 프로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소라 히바리의 '강의 흐름처럼'[4]을 작사한 후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가수이자 일본 가요계의 신(神)으로 군림한 미소라 히바리가 자신이 작사한 곡을 불러주었으므로 '나도 이제 프로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법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고. 그래서 자신은 지금까지도 직함을 작사가로 하고 있다고 한다.

3. 아키모토 야스시는?

방송 작가로서는 '올나잇 후지', '유우야케 냥냥', '우타방',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등 전설급 프로그램에 관여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또한 작사가로서는 코이즈미 쿄코의'なんてったってアイドル(뭐라해도 아이돌)', 톤네루즈의 '雨の西麻布(비내리는 서쪽 아자부)' 등의 히트곡을 배출하였으며 오냥코클럽, AKB48 등 다수의 아티스트의 곡의 작사에 손을 대는 한편, 작가나 영화 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사 말고도 TV 각본이나 애니메이션 각본, 심지어 영화 각본도 쓰는데 착신아리간호천사 리리카 SOS가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또한 AKB48을 모델로 한 코믹스인 AKB49 ~연애금지조례~와 애니메이션 마크로스AKB0048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코끼리의 등. 이밖에도 자기계발서또한 집필했다. 또한 공연 연출가로서 '이병헌의 20주년 기념공연'등의 기획을 맡기도 했다.

일본의 뇌 과학자 모기 켄이치로는 아키모토 야스시의 측두연합야라는 기억의 중추에 데이터가 굉장히 많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며 우리가 아키모토 야스시의 아이디어라고 접하는 것은 천개 중에 세개 정도 밖에 안된다고 언급했다. 프로그램 '정열대륙' 출연 때는 '자신은 천재가 아니도 아티스트도 예술가도 아니다. 피카소를 흉내내는 광고 회사원. 피카소가 되고싶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피카소는 될 수 없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작가 하야시 마리코는 "아키하바라에서 (AKB48)을 한다고 했을 때 아키모토 야스시도 빗나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AKB의 성공을 보고) 이 사람은 빗나가는 일이 없구나 하고 굉장히 감동했다. 이렇게 오랜 동안 일을 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안되겠네" "조금 빗나갔네" "시대에 안 맞네"하고 반드시 이야기를 듣지만 한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굉장하다. 시대가 그의 편이 되어주고 있다는 느낌, 시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했다.

아키모토도 사람인지라 실패나 추문도 많다. 대표적인 예로는 세가드림캐스트. 세가가 게임기 제작에서 철수한 결정적 원인은 드림캐스트 실패에 있는데, 아키모토 야스시 또한 이 실패에 한몫 단단히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키모토 야스시는 SEGA의 임원으로 드림캐스트 프로젝트의 프로모션 부분을 총괄하고 있었고, 드림캐스트의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세가후지TV의 후원으로 아이돌 그룹을 만들게 된다. 이 아이돌이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으로 불렸던 체킷코. 여기서 체킷코는 애당초 드림캐스트의 프로모션을 위한 프로젝트성 아이돌 그룹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킷코의 여러 활동은 아키모토 개인의 사적인 욕구에 충실한 것들 뿐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결과론적으로 아키모토 야스시는 약 100억엔 정도를 프로모션 비용으로 날려먹고, 드림캐스트는 실패하게 되었으며, 체킷코도 대실패했다. 후에 아키모토 본인은 자신은 체킷코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망한 후에' 딱 잡아떼고 있지만, 체킷코용 프로그램인 "DAIBA테키!!"는 '드림캐스트 제공, 아키모토야스시 사무소 협력' 이라고 명시된 바 있다. 이렇게 실패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아키모토 본인이 작가진 중 한명 겸 작사가로 참여했을 뿐이지만 대성공한 오냥코클럽은 마치 자신이 전부 프로듀싱한 것인양 TV 등에서 그렇게 말하고 경력에 크게 집어넣는 것들을 전부 방조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호리에 타카후미와 손잡고 라이브도어 계열의 컨텐츠회사 중역으로 취임했지만, 저 유명한 라이브도어 쇼크[5]가 일어난 후 재빨리 사임하고 손을 턴다. 물론 지금 아키모토는 이 것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톤네루즈의 이시바시 타카아키는 "저는 30년간 여러가지 모습을 봐왔지만 계속 변하지 않는 점은 '친절함'이네요. 대신에 모두가 모였을 때 그걸 알려주지 않으면 굉장히 화를 냅니다. '왜 나한텐 안 가르쳐준거야!'하고..."라고 언급했다.[6]

4. 부인 카이 마미코

sdasddsa.jpg
[JPG image (Unknown)]

그 와중에 아스트랄 한 안경테.
오냥코클럽의 인기 멤버였던 카이 마미코가 아키모토 야스시의 부인이다. 오냥코 해체와 거의 동시에 당시 20살이던 타카이와 결혼하였고, 타카이는 그 즉시 연예계를 은퇴했다. 팬클럽이 창단한 직후였던데다가 워낙 팬이 많던 멤버라 팬덤이 박살날 만큼 그야말로 충공깽일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었으나 오히려 타카이 마미코 쪽이 매우 적극적으로 대시했었다고 사이토 유키의 자서전에 쓰여져 있다. 같은 위치에 있던 층쿠에게는 "마지막에 모닝구 무스메 멤버랑 결혼해"라 귀뜸했다고(...)

여기서 재미있는 여담이 있는데 아키모토 야스시는 당시 타카이 마미코의 오냥코클럽 오디션의 심사위원중 한 명이었다. 오디션 당시 아키모토 야스시는 타카이 마미코에게 "연예계 데뷔 하면 유혹이 많을텐데요. 작사가라든지 코메디언, 디렉터들한테요 그 유혹에 이길 자신은 있나요?"라고 질문했고 타카이 마미코는 "물론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3년 후에…….이 모든건 아키P의 계획대로 이 모든 것은 유우야케 냥냥 방송을 통해 방영되었고 동영상도 남아 있다.

2001년 3월에 장녀를 출산했다.

5. 작사가로서

작사가로써의 100곡이 넘는 작품이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 현재까지 5000곡에 다다른 곡들을 써왔으며 그 중 AKB48에게 준 곡들은 700곡이 넘는다. 싱글 총 매상은 2013년 2월 기준으로 총 506작품 6859.1만매를 달성하고 여태까지 1위를 유지했던 전설의 작곡가 아쿠 유(핑크레이디의 상징)를 앞질러 역대 1위를 하였다. 그 3할은 AKB48와 자매 그룹 관련 작곡이며 매상은 1998.7만매로, 악수권이라는 상술을 이용한 판매 방식이기때문에 찬반양론이 펼쳐지고 있다. 이 모든 기록은 지금도 현재진행중.

20대에 이미 여러 히트작을 배출하며 인기 작사가로서 인정 받았으나 아이돌이나 기획물 전문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일본 가요계의 신(神)으로 군림한 미소라 히바리의 '강의 흐름처럼'을 작사한 후로는 이미지는 완전히 변해서 이른바 명작사가의 반열에 올랐다. 프로듀스한 오냥코클럽, AKB48의 전곡과 솔로곡, 유닛곡은 전부 아키모토 본인이 쓰고있으며 오냥코클럽의 곡들은 1986년 오리콘 차트 52주 중 36주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 1987년은 납세액만 1억 61만엔.

작사 경력 30년. 싱글의 밀리온셀러 19회(2014년 10월 기준),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 2012년JASRAC상에서 2년 연속 금,은,동 3관왕을 독점하였다. 이는 1995년 코무로 테츠야가 달성했던 기록으로 2년 연속 수상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유일하다.

가사 스펙트럼도 넓은 편이고, 다루는 주제도 다양하며 어떻게 하면 화제를 모을 지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점 역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데, 좋을 때야 화제 모아서 판매량이나 주목도가 높지만, 아무래도 너무 수위가 센 경우가 많아서... 가사가 시궁창의 본좌급 중 하나로 불리는 오냥코클럽의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를 작사했다. 그러나 천조국에서 더 엄청난 놈들이 나타나고 마는데..... 그리고 AKB48의 '교복이 방해 해' (원조교제), 'Dear My Teacher' (사제간의 사랑. 가사에 아예 '이 세상에는 남자, 여자, 게이밖에 없다'는 부분이 있음 무성애자 씹냐) 등은 물론이고, 이동복도주행대 7의 '자매덮밥' (레알 제목 맞다) 등등...

작사는 평균 2시간 정도 걸리며 하루에 4곡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AKB48과 자매그룹, 파생유닛, 멤버솔로, 극장공연곡, 이벤트성 곡, 노기자카46까지 모두 작사를 혼자서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량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아키모토의 작사 방법은 멜로디를 들으면서 우선 엉터리로 가사를 붙인 다음 그걸 다듬으면서 만든다고 한다. 그 엉터리 가사라는 게 멜로디로부터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말이나 감정이기 때문에 그걸 테마로 삼아서 가사를 쓴다는 것이다. 멤버들에게 "소근거리는 것처럼 불러줘"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창법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마케팅 뿐만 아니라 본직이 글쟁이인지라 외모와는 다르게 가사도 상당히 잘 쓰는데, 아이돌 프로듀서 이다보니 10대 취향의 감성적인 가사를 많이 쓰고, 또 잘 쓴다. 한일 양국에서는 아키P는 여고생의 일기장을 훔쳐서 보관하는거 아니냐는 농담이 나돌 정도. 근데 이성의 화자시점에서 가사를 쓰는 걸 좋아해서 모르고 들으면 백합 향기가 폴폴 나는 곡이 태반이다. 물론 노리고 쓰는것일 확률이 100% (...)

의외로 1980년대~1990년대에 애니송의 작사도 한 적이 있어서 기동전사 건담 ZZ의 주제가인 애니메이션이 아냐푸른 유성 SPT 레이즈너의 주제가인 메로스처럼의[7] 가사를 썼고 최근에도 종종 내는 듯. 그 양반이 저 명곡의 작사를 맡았다고? 으헐...

6. 아이돌 프로듀서로서

성공한 1986년 오냥코클럽2005년 AKB48이외에도 1987년 소녀대, 1993년 네즈밋코 클럽[8], 2001년~2006년 추정 소녀라는 정체불명의 아이돌들을 프로듀서 해왔던 아이돌업에 일가견이 깊은 인물.

오냥코클럽에 대해서는 상기 서술한 것처럼 '구성 작가'로 참가한 것이며 총합 프로듀서로 관여하고있는 AKB48과는 다르다. 아키모토 본인은 오냥코클럽은 공동 작업이며 자신이 주도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냥코클럽의 멤버였던 고쿠쇼 사유리는 "구성 작가였던 아키모토씨는 스태프의 일원이었고 좋은 의미로 다른 스태프들과 동급에 있었다"라고 얘기하였다.

AKB48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2005년 직접 도쿄아키하바라에 근거지를 두고 책임 프로듀서로써 역임, 전용극장을 만들어 매일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표방하였다. 당시의 아키하바라는 사회 현상을 불러 일으킨 서적 '전차남'에서 그려진 메이드 카페, 미소녀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로 인지되어 AKB48을 아키바에서 통용될 '모에 아이돌로 키우려고 했었다. 데뷔 이후 AKB48하돌적인 상태는 장년간 지속되었으나 2008년 싱글 '오오고에 다이아몬드'로 인기가 상승, 2010년이후로는 발매되는 CD마다 100만장을 돌파하는 국민적인 아이돌이 되는 길을 이끌었다.(자세한 설명은 AKB48 문서 참조.)
2013년의 인터뷰엔 장래에 AKB48의 프로듀서에서 물러남을 시사하였다.

그의 프로듀서로서의 철학은 '다른 사람이 생각이 들어도 절대로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것을 하자!'라고 한다. 또한 모든 것을 엔터테인먼트적인 관점으로 보려고 하고 있다. 이래서인지 엔터테인먼트적인 관점에서 프로듀싱 능력은 따라올자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닝구무스메의 프로듀서 층쿠는 "(아키모토의 엔터테인먼트적인 기획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면 좋은 게 있다면 흉내내고 싶어진다. 때문에 그다지 잘 알지 않도록 하고있다. 하지만 과거의 다양한 경험 위에서 이번을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하기 떄문에,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런 분야를 만들어간달까. 점을 찍는다기보다는 자리를 만들었달까."라고 언급했다.
다만 본의 아니게 이 사람과 함께 일본 여성 아이돌들의 전반적인 실력 하락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 아이돌 항목 참조. 물론 이건 제조, 공정, 제작 프로듀스 능력이 상당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AKB48만 해도 데뷔 후 1~2년 가랑은 멤버들이 한겨울에 거리에서 전단지를 직접 돌려야 했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는데, 지금은 싱글 발매 첫날 100만장이라는 위엄을 보이며 역대 오리콘 최대 판매량마저 연이어 경신하고 있다. 참고로 AKBINGO!에서 AKB 오리멘(1기생)들이 말하길, 만약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오디션에 응모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이유는 뭔가 수상해서. 그리고 미네기시 미나미는 오디션 관련 정보지를 보다가 부모님이 AKB 오디션 광고의 아키모토 야스시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 굉장한 사람이야'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AKB 오디션에 지원했다고 한다.

1r1.jpg
[JPG image (Unknown)]


그리고 아이돌 마스터 실사판 트루엔딩을 달성하셨다. 사실은 지금도 진행중(...)

구글 플러스에서 AKB48 멤버들과 교류를 하고있는데 자기 자신을 '야스스'라고 부르며 절찬 개드립 중. 관련 정보를 말해 놓고는 '말하면 안되는 거였나'같은 발설을 하지만 위에 나와있듯이 이 사람은 고교생때부터 방송계에서 일해온데다 나이도 60이 다되가는 베테랑이다. 그러므로 저런말을 해도 아무도 안 믿는다. 유키링이 직접 유출 좀 제발 그만하라고 돌려서 구플에 정도면 말 다 했다. 구플에서는 카미7멤버들과 비견될 정도로 인기를 (...) 끌고 있는데, 멤버들과 장난을 치거나 멤버들 소식을 알려주거나 하는 친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팬들은 아키P에 대한 애증이 쌓이고 쌓인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돼지라고 부르며 까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아이돌 마케팅에는 도가 트인 사람은 맞다.

프로듀서로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대단히 엄하다고 한다. 스탭들이 아키모토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검사 받으러 올 때는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무겁다고 할정도이다. 어떤 공을 던져도 쳐버리는 타자를 상대하는 느낌이라고. 한 싱글 자켓을 결정할 때는 스탭들이 20패턴의 아이디어를 들고 왔지만 전부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또한 콘서트나 공연등에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얄짤없이 쓴소리를 하는데 그 예로는 AKB48 및 자매 그룹의 노래 총선거라고 불리는 리퀘스트 아워가 2013년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개최되었다. 그런데 아키모토는 첫 날 영상을 보고 자신의 구글플러스에 이 영상이 최악이라는 평을 내렸다. 특히 강운 최강자를 뽑는 과정에서 선발된 카와에이 리나가 벌칙에 걸려[9] 스티로폼 공 같은 것에 파묻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버라이어티의 정석인 흰 가루가 아니라는 것을 깠다. 왜 밀가루 대신 스티로폼이 나왔냐면 카와에이가 또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화장이 지워질까봐. 하지만 아키모토는 얼굴이 하얀 상태로, 그러니까 정말 아이돌 본연의 모습을 한 채로 노래불러도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체 각 부위에 만보계를 붙이고 몸을 떨어 그 횟수를 세는 경기는 낡았다고 깠다. 중간에 중계를 한 이치카와 미오리[10]도 리퀘스트 아워랑 관계없다고 깠다. 근데 그래놓고 결론은 노래 총선거니까 노래를 더 보여달라고 했다.

보통 PV란 건 일단 그 곡의 내용에 따라 만드는 게 정석이라서 일단 곡이 한 달 전에 나오고 그걸 한 달 동안 생각해서 곡에 맞는 뮤직비디오를 찍는 게 상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AKB48에게는 상식이라는게 없다고(...) 보통 PV 촬영 열흘 전까지 미술, 의상, 촬영장소는 커녕 노래, 가사조차 완성되어 있지 않은게 허다하다고 한다. 심지어는 6일 전까지 이런 경우도 있었다고. PV촬영 각본은 감독이 노래를 들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짠다고 하는 슬픈이야기가 있다. 대개 안무, 가사, 음원은 빠르면 PV촬영 전날 완성되고 상황이 나쁠 때는 촬영이 시작하고 오후 쯤에 가사가 올 때도 있고, 더더욱 나쁠때는 아예 가사가 오지가 않아서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무난하게 넘어가고 싶어하지만 아키모토 야스시는 아니다 싶으면 기한이고 뭐고 전부 뒤집어 엎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촬영 중간에 가사를 수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싱글의 타이틀 곡과 커플링 곡을 정할 때는 500곡에서 1000곡 정도를 듣는다고 한다. 주로 회의가 끝난 새벽 1, 2시 쯤까지 작업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원고를 쓰기 때문에 6, 7시는 되어야 하루가 끝난다고 한다. 거의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본인은 '해야할 때가 인생에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때 필사적으로 할지, 일로서 이런 거 겠지하고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필사적으로 한다는 걸 추구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이사로 임명되었다. 안그래도 바쁜 사람이 애들 프로듀스나 극장 공연 챙기지는 않고 뭐하는 짓이냐고 팬들에게 대차게 까이는 중. 또한 이 사람이 조직위 이사를 담당한 것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 AKB48을 등장시키기 위해서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니가타 지역의 NGT48을 시작으로, 센다이, 삿포로, 오키나와 등 일본 전역에 AKB48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여기서 또 인원을 선발해서 결성된 JAPAN48(…)이 도쿄 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다는 것.근데 지금 AKB48 행보를 보면 사실상 AKB48=JAPAN48이라는 게 함정 아직까지는 일간지 레벨의 루머지만, 아키모토 야스시 본인이 일본의 아이돌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차례 한 적이 있는지라 신빙성을 얻고 있다. 다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 여론의 반응은 썩 좋지 않은 편. 쿨 재팬도 그러다가 말아먹었거든

7. 에피소드

  • 방송작가로 데뷔한 이래 줄곧 프로필 나이를 1956년생으로 하고있으나 1958년생이다. 이건 고2때 각본 일을 하고있을 때 친구에게 라디오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싶다고 요청받아 국에 상담했는데 "대학생이 아니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친구를 대학생으로 속이고 자신도 거기에 맞춘 게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거라고 한다. 지금 와서 고치는 것도 귀찮다고(...)

  • 작사가 데뷔 때 상담을 위해 야시키 타카진[11]에게 찾아갔으나 "완전히 틀렸어. 얘기도 안되고. 가지고 돌아가"라고 비난받았다. '평범한 문장이지 가사는 될 수 없다'는 평가였다고. 그 후 아키모토가 작사가로 성공하자 칭찬을 받았는데 아키모토는 "타카진씨는 고집이 강하니 납득할 수 있는 가사를 쓰는 건 너무나 어렵다"고 하였다. 그 후 30년이 지나 그에게 작사를 제공하였다.

  • 유명인이 가게를 내는 것이 유행이었던 버블버블한 1987년아오야마에 'うんこや'(직역하자면 똥가게(...))라는 일식 펍을 개점했었다. "음식과 배설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니까요..."라 하였으나 얼마 못가 폐점. 가게 이름이 그 모양인데 밥맛 떨어져서 누가 오겠나... 이후에도 다른 요식점을 냈으나 성공하지 못한 걸 보면 경영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 듯.


8. 평가


아키모토 야스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아래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하기 전에 위키 게시판에서 토론하기 바람.

  • 아키모토가 일본 아이돌의 실력 하락을 불러왔는가?
    옹호론: 오냥코클럽은 일종의 틈새 시장으로서 시도된 것이지, 오냥코클럽이 일본 아이돌계를 독점하고 다른 실력있는 가수들의 씨를 말린 것이 아니다. 기존의 실력파 아이돌은 하마사키 아유미, 아무로 나미에 등의 아티스트 노선으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비판론: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스한 그룹들로 인해 실력을 중시하는 아이돌보다 외모나 다른 요소로 인기를 소구하는 아이돌이 시장을 잠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큐트는 실력, 퍼포먼스, 음악적 특이성 덕분에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으나 AKB48이 파이를 전부 차지하는 바람에 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다.

  • 아키모토가 권력을 이용해 일본 연예계를 잠식했는가?
    옹호론: 아키모토는 쟈니스바닝프로덕션처럼 언론을 조종하다시피 하는 대규모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아키모토 야스시도 단순히 언론과의 유착을 통해 성공한 것은 아니고, 여러 실패 사례를 만들었다.
    비판론: 아키모토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내는 언론사에 취재 거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다. 아키모토가 여러 언론사에게 AKB48 떡밥을 뿌리라며 강요하는 바람에 다른 아이돌 그룹들이 기회를 빼았겼다.

  • 아키모토 야스시의 그룹들로 인해 일본 음악계가 침체되었는가?
    옹호론: AKB48의 형식을 강요해서 신진 아티스트들의 주목을 막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본 음악계가 침체된 것은 아티스트들이 부진해서이지 AKB48이 아티스트들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비판론: AKB48이 상술로 판매량을 불리웠기 때문에 제대로 된 아티스트들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전후 대기업들의 문화 육성 지원을 통해 50년 동안 이어져온 시장이 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일본 음악 시장의 디딤돌 하나를 빼서 상업적 아이돌을 음악계에 이식한 것은 아키모토의 잘못이다.

  • 아키모토는 비도덕적인가?
    옹호론: AKB48의 멤버들은 계약을 강요받는 입장이 아니다. AKB48 이외에도 연예인이 될 수 있는 길은 많이 있다.
    비판론: 아키모토는 아이돌을 지망하는 소녀들로 하여금 팬들에게 웃음을 팔 것을 강요했다. 멤버들은 팬들에게 웃음을 팔지 않으면 인기를 못 얻는 환경 속에서 인격을 뿌리까지 부정당하며 착취를 당하고 있다. AKB48이 일본 아이돌계를 잠식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돌 지망생들은 이런 체제를 싫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 [1] 오냥코클럽의 멤버였던 아내 타카이 마미코가 감사를 맡고 있다.
  • [2] 이름의 秋(아키)=가을
  • [3] 일하지 않고 부정하게 번 돈
  • [4] 일본의 My Way를 만들자는 발상으로 탄생한 이 곡은 지금도 많은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영원한 명곡으로 불리고 있다.
  • [5] 인터넷포털 라이브도어의 분식회계와 주가파동과 관련하여 호리에 타카후미 前사장이 체포된 사건. 사건이 일어나자 라이브도어의 주가는 폭락하였고 피해주주는 2만명이 넘었다.
  • [6] 2010.12.19 O.A TV 도쿄『ソロモン流(솔로몬류)』인터뷰
  • [7]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두 곡 다 카게야마가 커버링한 경력이 있다.
  • [8] 초등학생으로 이루어진 그룹
  • [9] 자신들 말로는 이 최강자가 총감독보다 높은 지위라고 한다(...)
  • [10] 레몬을 뒤집어 쓰고 했다.
  • [11] 유명 싱어송라이터, 201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