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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

last modified: 2014-09-28 15:54:21 Contributors

아이고스포타모이[1] 해전(Battle of Aegospotami, 405 BC)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 함대는 리산드로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 함대에 의해 괴멸당하였다.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거머쥐고 아테네 제국을 지탱하는 절대적인 힘, 아테네 제국 그 자체라고까지 불리던 아테네 함대의 괴멸로 인해 아테네는 더이상 버틸 힘을 상실했고, 이후 6개월 정도를 더 버텨보았으나 식량수송로를 끊어버린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27년 전쟁은 끝난다.

Contents

1. 전투 이전
1.1. 아테네의 마지막 기회
1.2. 리산드로스, 아테네의 식량선을 위협하다
1.3. 알키비아데스의 제안
2.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
2.1. 양군의 구성
2.2. 교전
2.2.1. 디로도로스의 주장
2.2.2. 크세노폰의 주장
2.3. 뒷정리
3. 전투 이후
3.1. 해체된 제국
3.2. 아테네의 최후 저항과 항복

1. 전투 이전

1.1. 아테네의 마지막 기회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리는 위대했다. 이 해전의 승리로 아테네는 다시한번 바다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아테네 제국의 종속국들에게서 들어오는 공납금으로 바닥을 드러낸 아테네의 국고를 채우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더 중요한 것, 즉 흑해에서의 식량 공급선을 유지하여 언제나 식량부족 사태에 처해 있었던 아티카 주민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데킬레아의 스파르타 요새로 인해 아티카에서의 농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상황에서 이러한 식량공급선의 유지는 아테네의 생존에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아테네 함대 또한 상시 출동 가능한 함대 규모가 200여 척에 육박할 정도로 복구되었다. 이는 시칠리아의 재앙 이후 최대 규모이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직전 가장 문제가 되었던 승무원 확보에 있어서도 해군에 복무하는 노예 및 외국인들에게 아테네 시민권을 완전 개방한다는 혁명적인 조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였다.[2] 이는 살리마스 해전으로 인해 아테네 안에서 해군 비중이 커짐에 따라 빈민층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된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엄격한 신분제 국가였던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나, 그만큼 당시의 아테네 입장에서는 단 한명의 승무원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모든걸 내팽개칠 정도로 노력했던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스파르타는 아르기누사이의 패전으로 낙심하였다. 함대에는 약 90여 척의 함선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재정도 바닥났다. 병사들은 키오스에서 농장 노동자로 투잡을 뛰어야 겨우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였고, 이에 몇몇은 스파르타의 동맹인 키오스 섬의 수도를 공격할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한동안은 스파르타 해군에 두려움을 느낀 키오스측이 지원을 해 주겠지만 언제 끊길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의 지원이 필수적이지만, 칼리크라티다스와 비슷한 생각, 즉 페르시아의 지원보다는 그리스 자체의 힘으로 전쟁을 승리해야 한다는 범그리스주의, 반페르시아 감정을 공유하는 많은 스파르타인들은 페르시아와 협력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고, 친페르시아파의 필두라 할 수 있는 리산드로스의 정적들은 리산드로스가 지휘관으로 복귀하는 것을 꺼려하였다.[3]

이에 더해서 아테네보다 사정이 조금 나았을 뿐 스파르타도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스파르타는 전쟁 전에는 완전시민이 아닌 계층에게 상당히 억압적인 정책을 폈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곧바로 처죽이는 일이 흔했던 헤일로타이들은 물론이고 '열등자'들인 모타케스(스파르타 완전시민과 헤일로타이들 사이에서 난 자식 내지는 여러가지 이유로 몰락하여 공동식사를 위한 재산을 낼 수 없는 완전시민들)들에게도 심각한 차별대우를 행했다. 페리오이코이들에 대해서도 자치권은 주었지만 정치 참여는 엄금되었다. 그러나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워낙에 인적 소모가 극심하자 페리오이코이, 모타케스들에게도 중요한 지휘권이 맡겨지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헤일로타이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주요 전투원으로 인정하는 일까지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력의 가마솥 바닥까지 벅벅 긁던 상황은 매한가지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마지막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한다. 이는 아티카 내부인 데켈레아의 스파르타 요새를 철수시키고, 나머지는 현재의 점령지를 유지한 상태로 평화조약을 맺자는 것이었다. 당시 스파르타가 에게 해에 확보한 구 아테네 제국 소속이었던 도시와 섬들은 헬레스폰토스의 아비도스, 이오니아 해안의 키오스 섬, 그리스 본토의 키메, 포카이아, 에페소스, 밀레토스 정도였고, 이를 인정하는 선에서 평화를 맺는 것은 아테네 입장에선 불만족스러울지 모르나 아테네가 당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테네는 이를 거부한다. 이는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대해 가진 불신감, 그리고 대승리로 인해 호전적인 태도를 보인 아테네 민회의 결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등 아테네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많은 고대 저술가들은 이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인 <아테네인의 헌법>(The Constitution of the Athenians, 또는 Athenaion Politeia(아테네인 국제(國制)라고도 불리는 저서)) 에서 특히 강경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클레오폰에 대해 "선동가"라고 평하면서 "평화를 막았다"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파적인 시각이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도널드 케이건 교수는 당시 아테네 인들은 스파르타의 평화협상 제안이 시간벌이용일 가능성을 두려워했고,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사이의 관계가 긴장상태에 있을때 밀어붙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더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4]

어찌되었든 평화를 거부당한 스파르타는 리산드로스를 다시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할 수밖엔 없었다. 이때 스파르타는 법도상으로 스파르타의 함대 총지휘관은 딱 한번만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라코스라는 인물을 명목상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리산드로스를 그의 비서(에피스톨레오스, epistoleos) 겸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어찌되었든 리산드로스가 스파르타 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하자 예상한 대로 그는 페르시아 소 키루스 왕자의 후원을 적절하게 이끌어내어 함대를 재건했다.[5] 키루스 왕자는 리산드로스를 정말 엄청나게 신임했는데, 심지어 키루스 왕자가 수사의 법정으로 소환되자(자신의 왕족 사촌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리산드로스를 비공식적인 소아시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하기까지 하였다. 소아시아 총독부의 모든 재원, 그리고 예정된 공납금 전액은 자연스럽게 스파르타 해군의 재건에 투입되었고, 리산드로스는 이런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페르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강력한 함대를 재구축한다.[6]

1.2. 리산드로스, 아테네의 식량선을 위협하다

리산드로스는 뛰어난 협상력으로 스파르타 해군을 재건하였고, 이제 이 함대를 움직여 아테네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다.[7] 우선적으로 그가 목표로 한 것은 밀레토스였다. 이곳은 스파르타에 충성을 바치는 주요 도시국가였지만, 칼리크라티다스와 같은 범그리스 반페르시아주의 성향의 민주주의 세력의 정부가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리산드로스는 이때문에 밀레토스를 잠재적인 자신의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였다. 밀레토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리산드로스는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정치공작을 구사하여 과두파들의 쿠데타 공작을 유도하여 민주파를 제거하고 과두정을 세운후 이 과도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8] 사모스의 아테네 함대는 리산드로스의 스파르타 함대가 밀레토스로 움직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밀레토스를 거점으로 삼은 리산드로스는 카리아와 로도스 섬의 아테데 동맹도시들을 휩쓸었다. 리산드로스는 의도적인 잔학 행위를 행해 공포심을 불어넣었으며, 이에 대해 아테네측도 포로의 오른손을 잘라버리는 등의 가혹 행위로 화답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마지막 1년은 기나긴 전쟁기간 중에도 가장 잔혹행위가 빈번했던 시기였다.

리산드로스는 로도스 섬을 점령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아테네의 목숨줄이라 할 수 있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식량공급선을 절단하고자 하는 스파르타의 행보를 저지하는 사모스 섬의 아테네 함대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리산드로스는 에게 해를 가로질러 아테네 동맹국들을 하나하나 파괴하였고, 심지어는 살리마스를 약탈하고 아티카 일대에 상륙해 아테네시를 위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능력이 부족한 아테네 지휘관들은 이에 계속 끌려다녔으며[9] 이를 이용해 아테네 함대를 따돌린 리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서 리산드로스는 스파르타의 동맹도시인 아비도스(Adybos)를 정박지로 삼고, 이 해협의 핵심 도시인 람프사코스(Lampsacus)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아테네 함대는 리산드로스의 뒤를 쫓아 세스토스까지 움직였다. 그리고 이들은 리산드로스가 보스포로스 해협까지 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람프사코스의 맞은편인 아이고스포타모이('염소 강 이라고 불리는, 뷰윅 강과 코즐루 강이 합처져 해협으로 흘러가는 하구둑)에 정박지를 마련하였다.[10]

1.3. 알키비아데스의 제안

아이고스포타모이 지역은 정박지로는 상당히 좋지 않은 곳이었다. 함대가 정박할만한 탁 트인 2.4km 정도 되는 모래 해변이 딱 한군데밖엔 없었고, 근처의 작은 마을 하나로는 충분한 식량과 식수를 제공할 수 없었기에 아테네 함대는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세스토스까지 도보로 왕복 38km의 여행을 해야만 했다. 리산드로스와 같은 뛰어난 해군 제독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조건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세스토스에 정박해 있기도 힘들었다. 리산드로스가 보스포로스 해협으로 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일은 세스토스에서는 더욱 힘든 일이었으며, 결전이 벌어질 경우 격류와 강한 바람을 맞으며 19km를 거슬러 올라가 전투를 치른다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아테네 함대는 아이고스포타모이의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정박하여 스파르타 해군과의 결전을 시도할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아테네 해군은 이러한 문제로 인해 조기 결전을 생각하고 매일같이 출항하여 람프사코스의 스파르타 해군에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리산드로스는 4일동안 아테네 군을 무시하였고, 아테네 해군은 갈수록 지처갔다. 이때 아테네 해군은 6명의 지휘관들이 매일같이 돌아가면서 지휘권을 맡았지만 누구도 전투를 유도하지는 못했다.

이때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한다. 그는 노티움 해전(406 BC)에서 리산드로스에 패하면서 실각, 몰락한 후 갈리폴리 반도의 자기 소유 토지로 망명하여 살고 있었는데, 아무리 몰락했다고는 해도 동지중해의 강국 아테네의 지도자 중 하나였다는 타이틀 덕인지는 몰라도 나름 그 일대의 군사지도자로 실력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11]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눈 앞에서 펼처진 아테네군과 스파르타군의 교착상태는 재기의 기회 정도로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군 진영으로 갔고, 그를 잘 알고 있던 아테네군 장군들이 발언권을 주자 몇가지 제안을 한다. 우선 그는 개방된 하나의 해변만을 지닌 아이고스포타모이는 적의 공격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세스토스로 기지를 옮기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트라케 지역의 두 왕들과 가까운 관계이고, 그들이 자신에게 군사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면서 이들의 군대와 함께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트라케 왕들의 군대가 도착하면 이들을 해협 건너편으로 실어 날라 람프사코스를 육상에서 점령하거나, 최소한 압박을 가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렇게 되면 리산드로스는 항구에서 나올수밖엔 없으니 이때 공격하면 된다는 것이다. 육상과 해상의 동시공격이라면 키치코스 해전때처럼 스파르타 함대를 남김없이 해치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이러한 도움의 대가로 단 하나, 아테네군의 공동지휘권을 요구하였다.[12]

아테네 지휘관들은 그의 제안에 떨떠름해 했다. 물론 육상군의 지원이 있다면 더없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 지휘관들은 알키비아데스가 과연 약속을 지킬 것인지 믿을 수 없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과거에도 몇번 이런 허풍을 떤 적이 있었으며, 그가 약속했던 군대들이 나타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그가 요구한 공동지휘권은 아테네 지휘관들에게 승리의 명예를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돌려 다시한번 정계에 복귀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였다. 아테네 지휘관들은 이 제안이 "자신의 노력과 성취를 통해서 어떤 커다란 일을 거두어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이전의 애정을 회복하려는 욕망"[13]을 의심했고, 결국 "이제 장군은 자신들이지 그가 아니다"라며 제안을 거부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후 그는 다시 아테네로 복귀하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얼마 안가 암살당한다.

2.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

아이고스포타모이에 정박한지 5일째 되는 날, 지휘권은 필로클레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27년 전쟁을 끝내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다.

2.1. 양군의 구성

아테네 해군은 약 170여 척의 배와 승무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명의 지휘관들이 하루씩 돌아가면서 지휘를 맡았는데, 이는 그 누구도 온전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총사령관직을 고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지휘관들 중에는 코논, 필로클레스 등이 있었다. 함선 숫자로 미루어 보건대 아테네군의 인원수는 약 2만~3만 정도로 여겨진다.

스파르타 해군은 아테네 해군과 비슷하거나 약간 규모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삼단노선 170~180척) 리산드로스는 이 함대에 대해 총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인원수는 아테네군과 비슷한 2만~3만 정도.

양 함대의 질적 수준은 아테네측이 우위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스파르타 함대가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참패로 크게 손상을 입었다가 재건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2. 교전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고 한다.

2.2.1. 디로도로스의 주장

하나는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의 <역사 총서(Bibliotheca historica)>의 설이다. 도널드 케이건 교수의 저서인<펠로폰네소스 전쟁사>(허승일, 박재욱 역)에서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필로클래스는 대치국면을 극복하고자 30척의 선견대를 지휘해 세스토스로 가는 척을 했고, 리산드로스가 이를 덮치면 아테네 함대가 이를 공격해 승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리산드로스는 이미 척후병 등을 통해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아테네군의 출항 준비까지 파악한 그는 미리 함대를 대기시켜놓고 있다가 필로클래스의 분견대가 출발하자마자 신속하가 이를 덮처 패주시켰고, 방심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 본대까지 그대로 들이첬다. 필로클래스의 계획대로라면 리산드로스는 필로클래스의 분견대와 아테네 함대 본대 사이에 끼어 포위섬멸을 당했겠지만 실제 일어난 것은 리산드로스의 신속한 각개격파였던 것이다. 아테네 함대는 패주해 오는 필로클래스의 함대와 승기를 타고 맹렬히 추격해오는 리산드로스의 함대를 보고 공황상태에 빠져 배를 버리고 도망첬고, 많은 배들이 승무원 없이 나포되었다.

리산드로스는 기세가 오른 함대 병사들을 일부 상륙시켜 육상의 아테네군 진영을 점령하게 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함대는 계속 버려진 배들을 나포하고 해상에서 아테네군을 공격하였다. 지휘체계가 마비된 아테네군은 이런 협공에 저항할 방법이 없었고, 대부분 세스토스로 도주하였다. 오로지 코논만이 자신의 직속 함대 10~20여 척을 신속하게 출항시켰고, 그대로 도주하여 아테네 함대를 잔존시켰다. 이 함대는 후의 코린토스 전쟁 당시 아테네 함대가 재건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2.2. 크세노폰의 주장

다른 하나는 크세노폰의 <헬레니카>의 설이다.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기술도 이쪽에 유시하며,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존 R. 헤일 역시 자신의 저서인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이순호 역)에서 이쪽의 설을 채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5일째의 아테네군의 출항은 결전을 위한 계획이 아닌, 이전의 4일과 같은 일상적인 출격이였다. 리산드로스는 아테네 함대가 싸움을 거는 동안 첩보활동에 노력했고, 아테네 함대의 일과를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5일째에 리산드로스는 정확하게 읽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아테네 함대는 아침에 출항하여 람프시코스 항구 앞에서 대치하다가 병사들이 지치는 오후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휴식을 취할때의 함대는 무방비 상태였는데, 개방된 해얀선이었던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이는 지나치게 무방비한 일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척후병들에게서 아테네 병사들이 함대를 떠나 정박지가 소수의 경비병을 제외하면 정박지가 텅 비어버렸다는 신호를 받았고, 그동안 재어 온 타이밍을 잡아 람프사코스에서 함대를 발진시켰다. 그리고 아바르니스 갑으로 들어가 큰 돛대와 돛을 떼어네 보관시켰다. 이는 상황이 좋지 않을경우 곧바로 이쪽으로 돌아와 함대를 이끌고 탈출하기 위함인 동시에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여 함대를 더 신속하게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이후 스파르타 함대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유럽쪽 해얀으로 가서 아테네군 기지의 남쪽 무방비 상태인 해얀에 상륙, 이곳에 병력 일부를 내려놓았다.

이후 다시 갑을 빙 돌아 나왔을때 리산드로스는 성질급한 필로클래스가 선두에서 이끌던 분견대를 발견한다. 리산드로스는 곧바로 이 분견대를 공격했고 필로클래스가 패주하자 곧바로 정박지로 진입했다. 아테네 함대는 미처 선원들을 다 태우기도 전에 스파르타군에 의해 제압당하였다. 경비병력 일부가 남아있던 것도 미리 상륙시켜 놓은 스파르타군의 공격에 무력화되었고, 선원들이 채 탑승하기도 전에 수많은 배들이 나포되었다. 이후 육상 진지까지 공격하여 아테네군은 완전히 격파당한다. 정박지 근처에 있었던 코논만이 자신의 승무원들을 신속하게 태워 탈출할 수 있었고, 아바르니스 갑에서 장거리 항해용 큰 돛대와 돛을 발견한 10~20척 정도의 코논 선단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는 곧바로 에게해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2.3. 뒷정리

전투가 끝나고 리산드로스는 필로클래스 등 아테네 지휘관들을 포함한 3,000여 명의 포로를 처형하였다. 리산드로스는 계산적인 인물로 필요하다면 관대함을 배풀 줄도 아는 자였으나, 오랫동안 아테네에게 시달려 복수심에 불타는 동맹국들은 이들의 처형을 주장했고, 특히 강경파로 종종 포로를 처형해대던 필로클래스에 대한 적의가 상당하였기에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리산드로스는 곧 동맹국들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확고히 하였고, 이 이상의 포로 학살 없이 나머지는 모두 살려보냈다. 이는 얼핏 보기에는 자비로운 일이었지만, 실제로는 계산적인 일에 가까웠다. 즉 아테네 함대가 전멸하였기 때문에 아테네로 가는 식량선은 끊겼고, 그런 상황에서 3만 가까이 되는 입을 새로이 아테네로 밀어넣어 식량난을 가중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후 리산드로스는 아테네 제국 해체에 들어간다.

3. 전투 이후

3.1. 해체된 제국

무적을 자랑하던 아테네 함대는 고작해야 한시간 남짓의 교전만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는 제국의 근간을 파괴한 것이다. 이후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의 종속국들을 돌면서 제국을 해체시키기 시작한다. 리산드로스는 각각의 도시들에 합리적인 조건을 제시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심지어 각 도시의 아테네 주둔군과 관리들에게는 아테네로 돌아간다는 조건 아래에서 안전하게 떠날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이는 리산드로스의 계략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아테네 시를 감싸고 있는 성벽이 여전히 난공불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장기 포위전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아테네의 식량난을 가중시키고자 아테네인들에게 일견 자비로운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런 목적을 확실히 하기 위해 리산드로스는 비잔티움과 칼케돈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아테네로 곡물을 가져가는 자는 무조건 사형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리산드로스는 자신이 항복을 받아낸 도시에 비슷한 형태의 과두정 정부를 세웠다. 그는 하르모스테스(harmostes)라는 지휘관들 휘하에 주둔군을 배치시켰다. 지휘관 인선은 신분이 아닌 리산드로스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귀족 출신이나 부자라는 것을 근거로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태에 대한 통제권을 자신의 정치적 당파 사람들과 자신과 개인적으로 끈이 있는 사람들의 손에 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상과 징벌의 권한을 주었다."[14] 그리고 모든 곳의 정부를 자신에 대한 충성파로 구성된 과두정으로 대체하였다. 종종 그는 10두정(decarchies)를 구성하였고, 이는 모두 자신과 가까운 자들이었다. 이를 통해 리산드로스는 단순히 아테네 제국을 해체하고 종속국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가 아테네 제국 전체를 흡수하고, 아테네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 도시에서 공납을 거두어 함대를 비롯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오로지 사모스 섬만이 리산드로스의 진격에 맹렬히 저항하였다. 오랫동안 아테네 지지파였고, 그렇기에 아테네가 함대를 주둔시킬 정도로 신뢰받던 사모스 섬의 민주정부들은 귀족 정적들을 살해하고 재차 아테네 지지를 천명하였다. 아테네는 이에 감격해 사모스 섬 전체에 아테네 시민권을 주는 결의안을 내릴 정도였다. 리산드로스는 사모스 섬 제압을 위해 40척의 함대를 남겨두어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모든 함대를 이끌고 아티카로 갔다.

아테네는 이제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었다.

3.2. 아테네의 최후 저항과 항복

파랄로스가 밤에 아테네에 도착하여 재난을 알렸다. 피라이오스로부터 통곡이 시작되어 장벽을 지나 도시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었고, 그날밤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운 것이 아니었다. 포위공격으로 정복한 스파르타의 식민자들인 멜로스인, 그리고 히스티아이아인, 스키오네인, 토로네아인, 그리고 많은 다른 헬레네스에 부과했던 것과 같은 운명을 스스로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하여 더욱 울었던 것이다. - 크세노폰, <헬레니카> 2.2.3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의 패배는 아테네에게는 종말의 소식이나 다름없었다. 함대가 사라졌으니 제국도, 희망도 모두 사라진 셈이다. 포로 3,000여 명의 처분은 아테네인들에게 항복시 그들이 맞이할 운명은 죽음, 노예, 또는 최소한 추방이라는 확신을 더해주었다.

다음날, 아테네 민회는 비상회의를 열고 저항을 결의했다. 피라이오스의 세개 항구 중 혹시라도 모를 식량수송선의 도착을 위해 칸타로스 항 하나만을 남겨놓고 제아 항구와 무니키아 항구는 바리케이트를 설치, 봉쇄하였다. 아테네군은 피할 수 없는 포위공격에 대비하였다. 이후 아테네로는 각지의 주둔병력 및 주둔관리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방어병력은 충분하고도 남아돌았지만 식량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리산드로스의 계획대로였다.

10월, 리산드로스는 아티카에 도착했다. 그는 아테네 성벽 바로 밖에 있는 아카데미아 근처에 자신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데킬레아에 주둔하던 아기스 왕도, 펠로폰네소스에 남아있던 파우사니아스 왕도 전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스파르타의 두 왕이 동시에 전장에 나선 것은 10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15] 이들의 의도는 아테네인들을 위협하여 즉각 항복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스파르타 및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생각은 제각각 달랐다. 아테네 근처에서 오랫동안 충돌해온 테베와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완전한 파괴를 원했다.[16]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 경우 이들이 비어버린 아티카를 장악하고 스파르타가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성장할 가능성을 우려하였기에 아테네에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스파르타 내에서도 리산드로스는 아테네 제국을 스파르타 제국으로 완전히 대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의 활동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안으로 축소하고, 제국을 해체한 아테네에 대해서는 다른 우호국들과 마찬가지로 온화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파르타 제국은 결국에는 리산드로스의 특권적 지위의 연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페르시아와의 관계도 있었다. 소 키루스 왕자는 귀환했고, 당시 페르시아의 샤한샤인 다리우스 2세는 날이 갈수록 병들어가고 있었다. 다리우스 2세가 사망하면 샤한샤의 자리는 키루스 왕자에게 적대적인 그의 형들에게 주어질 것이고[17] 소 키루스왕자의 적극적인 친스파르타 정책이 없다면 스파르타는 함대를 유지할 돈을 마련하기 힘들 것이다.

이는 아테네에게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렇기에 아테네는 항복하지 않았고, 여전히 아테네의 성벽은 난공불락이었다. 이에 스파르타는 파우사니아스의 군대를 귀환시켰고, 리산드로스도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사모스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들이 떠난 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운명을 논의하기 위해 동망국들과 회의를 열었다. 기원후 2세기의 여행가이자 저술가인 파우사니아스는 이에 대해 아가스와 리산드로스가 스파르타 민회의 승인 없이 아테네 파괴를 주장하는 동맹국들의 제안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테네는 이를 파악하고 크게 놀라 아기스 왕에게 사신을 보낸다. 여기서 아테네는 방벽과 피라이오스 항구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제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고 스파르타의 동맹에 가입하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아기스 왕은 이에 대해 자신은 그럴 권한이 없으니 스파르타에 가서 제안하라고 돌려보냈다. 스파르타로 간 사절단은 라코니아 경계의 셀라지아에서 에포로이들에게 이러한 제안을 했지만, 에포로이들은 "당장 돌아가록 명령하고, 만약 어떤 종류든 평화를 원한다면 더 나은 제안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했다" 고 한다.[18] 이러한 스파르타의 논의 거부는 아테네에게는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던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가 어떤 제안이나 약속을 하더라도 조금만 기회가 주어지면 자신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건 몰라도 장벽만은 유지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클레로폰과 같은 유력한 아테네 강경파들이 이를 이끌었다.

이때 나선 것은 테라메네스였다. 그는 시칠리아의 재앙 이후 일시적으로 과두파가 집권했을때 그들이 스파르타에 도시를 넘기고자 하는 시도를 파악하고, 이를 저지한 인물이었다. 그는 우선 스파르타가 정말로 아테네의 완전한 파괴를 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리산드로스에게로 찾아가 석달 정도를 함께 지냈다.[19] 귀환시 그는 리산드로스도 아가스 왕과 같은 답변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동시에 리산드로스가 어느정도 아테네에 자치권을 주는 정도의 평화협상안을 지지한다는 소식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후 테라메네스를 사절단장으로 하는 아테네 평화사절단이 스파르타로 갔을때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달랐다.

결국 스파르타에서 테라메네스는 아테네의 파괴 없는 평화조건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장벽의 해체, 상징적인 숫자의 함선(12척)을 제외한 아테네 해군의 해체, 제국의 포기와 추방자들의 귀환, 아테네의 스파르타 동맹 가입과 종속, '자신들의 조상의 정체'의 수용을 요구하였다. 이는 아테네에게는 극히 굴욕적인 조건이었지만, 아테네인들이 내심 두려워하던 것, 즉 아테네의 파괴와 시민들의 학살, 노예화, 추방에 비하면 매우 자비로운 것이었다.

테라메네스가 협상을 위해 돌아다니는 동안 아테네의 식량난은 가중되었고, 강경파들은 힘을 잃어갔다. 클레오폰은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불만을 가졌던 평화 반대파들도 고소당하여 감옥에 갖혔다. 여전히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대한 불신을 버리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믿을 수밖엔 없을 정도로 몰려있게 된 것이다. 이는 평화 지지파들의 힘을 강하게 해 주었다.

404 BC, 3월 후반기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요구를 수용하고 항복하였다. 과두파 망명객들은 귀환했고, 우선적인 요구였던 장벽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열정으로 그들은 소녀들의 피리 소리에 맞추어 방벽을 무너뜨렸고, 이날에 그리스인들의 자유가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다."[20] 이로서 27년의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아테네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과두정의 수용은 많은 반발을 샀고, 리산드로스가 임명한 30인 과두정은 1년만에 무너진다. 그리고 얼마 안가 린토스 전쟁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 3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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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Αιγός Ποταμοί
  • [2] 존 R. 헤일 저, 이순호 역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p369
  • [3]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41
  • [4]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42~p543
  • [5] 크세노폰, <헬레니카> 2.1.11-12
  • [6]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44
  • [7] 크세노폰, <헬레니카> 2.1.15-19
  • [8]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44~p545
  • [9] 이는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 '장군들의 재판'을 겪으면서 아테네의 지휘관들이 서로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테네 함대는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리산드로스는 이를 이용해 아테네 함대를 한껏 휘두르고 다녔다.
  • [10]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46
  • [11] 존 R. 헤일 저, 이순호 역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p373
  • [12]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48~p549, 존 R. 헤일 저, 이순호 역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p373~p374
  • [13] 디오도로스, <역사 총서(Bibliotheca historica)> 13.105.3,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49에서 재인용
  • [14]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리산드로스) 13.4,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52에서 재인용
  • [15]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53
  • [16]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테베의 해군 사령관 에리안토스가 이미 이러한 주장을 한 바 있다. 빅터 데이비슨 핸슨 저, 임 웅 역 <고대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p453 참조
  • [17] 실제로 소 키루스 왕자는 후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에는 다수의 그리스 용병들이 참전했고, 크세노폰도 여기에 참전했다가 귀환한 후 남긴 것이 유명한 <Anabasis>이다.
  • [18] 크세노폰, <헬레니카> 2.2.3,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54에서 재인용
  • [19] 귀환한 후 그는 리산드로스가 자신을 억류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귀환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 [20] 크세노폰, <헬레니카> 2.2.3,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60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