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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last modified: 2015-09-24 20:40:1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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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새끼로 유명하신 그분이다.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젊은 시절
2.2. 산디니스타 내전
2.3. 대통령과의 대립
2.4. '푸른 셔츠단'
2.5. 집권 2기 : 제2차 세계대전
2.6. 아르궤요 정부
2.7. 제2차 쿠데타
2.8. 암살 음모와 코스타리카 전쟁
2.9. 죽음

1. 개요

아나스타시오 "타초" 소모사 가르시아(Anastasio "Tacho" Somoza García). 1896년 2월 1일 ~ 1956년 9월 29일. 니카라과의 대통령이자 소모사 왕조의 시조. 타초는 별명이다. 그리고 루즈벨트의 개새끼

2. 생애

2.1. 젊은 시절

산마르코스에서 부유한 커피 농장주였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레예스와 훌리아 가르시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0년대 니카라과의 혁명가 겸 무법자였던 시에테 파누엘로스의 후손이다.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데, 오렌테 국립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가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피어스 경영대학을 다녔다. 이후에 자동차 판매원, 화장실 관리원 등의 여러가지 일을 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니카라과에서 알아주던 집안 출신인 살바도라 데바일레와 1919년에 결혼해 정치 기반을 다진다. 1926년 20세 나이로 니카라과에 돌아왔다. 이 무렵 니카라관의 대통령 아돌프 디아즈는 자유당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미국에 병력을 요청한 적이 있는데, 1926년 그의 아내의 삼촌이었던 자유당군의 후안 바우티스타 사카사를 지지, 반란에 가담했다. 미국과 자유당군 사이에서는 몇 차례 교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자유당군의 지도자였던 후안 바우티스타 사카사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평화 협정을 거쳐서 자유당군은 무장해체를 하고, 새롭게 만들어진 '과르디아 나시오날(니카라과 국민방위군)'이 설립되어 여기에 통합된다. 소모사는 친척이던 대통령 호세 마리아 몬카다의 연줄 지지 아래 국가 방위군 사령관으로 낙하산 고속 승진한다.

2.2. 산디니스타 내전

1933년 니카라과에 주둔했던 미군이 대공황 여파로 인해 물러났다. 이 때 니카라과에는 '아우구스토 산디노 세사르'가 반정부 게릴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산디노는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니카라과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카사 대통령은 산디노와 평화 협정을 맺었으며, 산디노를 따르는 반군이 무장을 해체하는 대신 사면을 해주었다. 산디노는 니카라과 북부 코코 강 일대의 작은 지역의 통치권을 얻었고, 100명의 긴급군(산디니스타)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봉건제냐? 하지만 산디노는 약속과는 달리 완전히 무장 해체를 하지 않고 50명의 병사가 무장할 수 있는 수준의 총과 탄약만을 넘겨주었다. 산디노에 대해서 강경파이던 소모사는 분개하였으나 사카사 대통령은 평화를 우선시 하여 산디노를 처벌하지 않았다.

소모사는 평화 협정이 맺여졌지만 국민방위군을 동원하여 산디노를 압박하고 측근들을 이용하여 산디니스타를 박해하였다. 의도적으로 충돌을 유도하거나 누명을 씌워 투옥하는 방법으로 압박을 하였고, 산디노는 사카사에게 전보를 보내서 소모사는 쿠데타를 꾸밀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카사가 대통령에 오른 지 8개월도 되지 않아서,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사카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수파 장교 수백명을 투옥했는데, 소모사의 입장에서는 보수파는 방위군 내에서 소모사를 반대하는 세력이었으므로 오히려 자신의 장악력을 늘릴 수 있었다. 계엄령 상황에서 소모사는 나라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소모사는 산디노가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산디니스타가 숨겨두었던 무기를 찾아내서 몰수했다. 산디노는 이에 대하여 방위군은 미국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이라고 주장하며 해체를 요구했다.

사카사 대통령은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니카라과 북쪽의 통치권을 산디니스타 출신 호레스 포르토카레로에게 넘겨주려 했다. 소모사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경고를 날렸다. 1934년 2월 21일, 사카사가 주최한 저녁 식사 모임에 일행 4명과 참석했던 산디노가 소모사의 측근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농무부 장관 살바티에라가 산디노 일행을 태우고 마나과의 자기 집에서 출발했는데, 도중에 방위군 정찰대가 길을 막고 총으로 협박하여 살바티에라, 산디노의 아버지 돈 그레고리오 산디노를 영내로 끌고가고, 산디노와 우만조로, 에스트라다를 트럭에 태워서 끌고갔다. 그리고 산디노 등에게 총을 쏴서 살해하고 마나과 공항에 가는 길 아래에 묻어버렸다. 소모사는 산디노를 암살했을 뿐만 아니라, 산디노의 기지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방위군 병사를 동원하여 산디니스타 통치 지역의 사람들을 학살했다.

2.3. 대통령과의 대립

산디노 암살에 위기감을 느낀 사카사 대통령은 군 장교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하는 한편, 산디노를 암살한 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소모사는 사카사에게 겉으로는 협력하는 한편, 미국 정부가 산디노 암살을 승인했고 자신이 니카라과를 위해서 결단을 내린 거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소모사는 자유당 의원 몇몇에게 압박을 가하여 사카사 행정부의 입법안을 저지하도록 했고, 사카사의 정치적 입지는 악화되었다. 소모사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진 다음, 대놓고 자신이 산디노를 암살했고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은 칭찬 받아야 하며 모두 사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회는 소모사의 주장에 따라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카사는 거부권을 발동했으나 의회가 또 다시 통과시켜버렸다.

소모사는 1936년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9월 12일, 마나과에서 다시 한 번 폭발 테러가 일어났다. 사카사와 소모사는 처음에는 둘 다 쿠데타 기도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 사건은 병참 장교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던 후안 로페스 중위가 저지른 것이었다. 소모사는 로페스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사카사는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사카사는 대통령으로서 권위를 드러낸 것이었으나 소모사는 이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기 때문에 소모사와 사카사의 대립은 더 강해졌다. 소모사는 자유당 의원들에게 지지를 얻기 위하여 활동하였고, 방위군 병사들을 무장시켜서 대통령 궁 앞을 행진하도록 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다.

위협을 느낀 사카사는 방위군과는 별도로, 자신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대통령 직속 경찰대를 창설하겠다고 선언했다.대통령과 군 사령관이 서로 친위대를 만들어대는 막장 사태 그러자 소모사는 그런 짓을 하면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대놓고 위협했고, 사카사는 깨갱 하고 물러나며 경찰대 창설을 취소했다. 나약한 사카사는 소모사에게 대항할 수가 없게 되어 사카사의 아내 마리아가 움직이게 되었다.아내가 직접 나서겠다! 마리아는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방위군을 창설하고 소모사를 그 사령관에 앉힌 것은 미국인들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지만, 미국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에는 온두라스엘살바도르에 있는 지인들에게 군대를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미국이 나서서 압력을 가하여 이를 좌절시켰다.

하지만 미국도 소모사를 내버려두지는 않았는데, 방위군 사령관 자리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소모사에게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다. 소모사는 이를 일단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지지자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협약에 불만을 퍼트리게 만들었다.

2.4. '푸른 셔츠단'

이 때,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는 석유 부족 사태로 운전 기사들의 파업과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사카사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총기를 동원해서라도 시위를 진압해라병크 급 명령을 내렸다. 소모사는 대통령의 병크를 역이용 했는데, 이 명령을 국민들에게 흘리면서 이를 실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파업고 시위에 참가한 지도부를 직접 면담하면서 석유 배급을 방위군에서 담당하여 적절하게 공급하기로 했고, 시위대는 이를 고맙게 받아들여 협상이 타결되고 시위와 파업은 중지되었다.

나카라과 민중들은 이 사건으로 사카사 대통령은 학살 시도자, 국민방위군 사령관 소모사는 이를 거부하고 민중들과 대화와 타협하여 문제를 해결한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소모사의 인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소모사는 이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젊은 파시스트들을 모아서 '푸른 셔츠단'청의사(靑衣士)?을 조직하고 방위군을 강화하기도 했다. 히틀러SA무솔리니은 셔츠단의 니카라과 판으로서,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피시스트 단체의 일종이었다. 소모사는 교활하게도, 푸른 셔츠단을 동원해서 의도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방위군으로 이를 진압하는 역대급 '주작'을 저질러서 자신의 인기와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공무원들을 군의 통제 아래 놓으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마침내 소모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소모사는 방위군을 동원하여 사카사의 주요 요새였던 레온의 아코사코를 공격했으며, 마나과에 있는 대통령 궁을 공격했다. 1936년 6월 2일, 사카사 대통령은 레온에 있는 병사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소모사는 사카사에게 임기가 끝날 때까지만 대통령을 맡으라고 제안했지만, 사카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흘 뒤에 엘살바도르로 망명해버렸다.

소모사는 대통령에 출마했는데, 니카라과에는 군사령관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는 헌법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방위군 사령관을 사임했다. 12월 대통령 선거 결과에서 소모사는 7만 9천표를 얻고, 다른 후보는 169표 정도가 나오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1937년 1월 1일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소모사는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방위군 사령관직에 다시 올랐고, 정치 권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한 손에 쥐게 되었다. 이제 니카라과에서 방위군은 유일하게 존재하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엘리트 군대였다.



그리고 소모사는 1937년부터 1947년, 1950년부터 195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으로 재임했는데, 이 두 임기 사이에는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허수아비 정권을 유지했다. 한마디로 20여년을 해쳐먹었다는 소리 집권 동안 많은 개혁들을 이끌었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토지, 기업, 재산들을 자신 소유로 만들었으며 정적들을 해외로 추방했다.

=== 집권 제1기===
대통령이 되자마자 소모사는 국영 철도망, 우편, 관세 등의 업무를 독점하였고, 방위군은 군사 업무 이외에 경찰 업무, 교도소를 관장하고, 기업 허가와 하나 밖에 없는 국영 라디오 방송국을 담당했다. 소모사는 병사들에게 임금을 올려주고, 병사들은 불법적으로 돈을 상납받기도 하여 니카라과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집단이 되어 소모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소모사의 집권을 음지에서 도운 푸른 셔츠단의 우두머리는 교육부 장관에 올랐다.

소모사 자신의 부패도 굉장했다. 니카라과에서 소모사의 통제를 벗어난 집단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지방의 커피 장주 들이었다. 소모사는 권력을 장악하고 몇 달도 되지 않아서 커피 농장주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시장가의 절반에 농장을 구입하거나, 아예 선물로 상납받았다. 소모사는 공무원을 동원하고 공공기금을 쏟아부어 주인 없는 땅에 전선과 전화선을 설치하여 재개발을 한 다음 이를 사유지로 만들어서 단 한푼도 쓰지 않고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소모사는 모든 공무원이 월급의 5%를 국민자유당 기금에 납부하도록 지시한 다음, 이를 개인 은행 계좌처럼 자기 마음대로 이용했다.
1939년, 소모사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확대하는 한편 방위군의 권한도 더욱 강화시켰다. 1940년, 소모사는 니카라과에서 확고하게 자신의 지위를 다졌고,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아서 미국 백악관으로 갔다.

그리고 비록 대공황 때문에 니카라과를 떠났지만 지리적 요점 때문에 니카라과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미국은 속내야 모르지만 겉으론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서, 그를 니카라과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적합한응? 대통령이라며 간접적으로 인정해줬다. 군부독재 시절 한미관계를 보는 것 같다 이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니카라과와의 외교관계를 비서관이 만류하자, "소모사는 개새끼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Somoza may be a son of a bitch, but he's our son of a bitch.)"라는 말을 날렸다고.[1] 드골은 독재자 될 가능성 있다고 싫어하던 양반이

이 말은 당시 국무장관인 코델 헐(헐 노트로 쓸데없이 유명한 그 사람 맞다)이 했다는 설도 있다. 헐이 루즈벨트에게 초청한 각국 정상의 명단을 보여주자 루즈벨트가 소모사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그 악명높은 개새끼 아닌가?"라고 하자, 코델 헐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편 개새끼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지지 덕분에 집권을 굳건히 하는데 성공하였다.

뒷담으로 개새끼라고 까였어도, 소모사는 만족스럽게 니카라과로 돌아왔고 마나과의 한 거리에 '루즈벨트 거리'라는 이름을 붙여서 루즈벨트를 능욕 친미 관계를 기념했다.

2.5. 집권 2기 :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미국은 소모사에게 나치냐 미국이냐 를 놓고 경고를 날렸다. 소모사는 푸른 셔츠단에서 보듯이 파시스트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지만, 아무튼 미국은 가깝고 나치 독일대서양 너머에 있었다. 당연히 미국을 지지하였고, 나치를 지지하는 모든 운동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2차 대전에서 소모사는 매우 발빠르게 행동했는데, 미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미국이 진주만 공습을 당하자 미국보다 먼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전쟁을 선포했다. 독일인 소유 재산 국유화는 덤.(...) 어이쿠 우리 개새끼 잘했어요

물론 선전포고를 하고도 니카라과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동맹으로서 지지를 표했기 때문에 미국은 소모사에게 공군과 해군을 만들어주고, 그리고 2백만 달러에 달하는 군사 장비를 얻어서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소모사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5백만 달러가 넘는 재산을 모았다고 추정된다.

이 때도 물론 소모사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이 없지는 않았으니 바로 카를로스 파소스가 있었다. 소모사는 선제적으로 방위군을 보내서 시위 주동자들을 자택에 감금하고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파소스는 자유독립당을 창설했고, 방위군의 행동에 분노한 일반 시민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니카라과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시민, 기업가, 노동자들이 모두 투쟁에 나섯다. 소모사는 병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창설하는 한편, 미국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에 대대적인 시가 행진을 벌여서 자신이 미국에 지지를 받고 있음을 어필했다. 그러면서 유화적인 정책도 펼쳤는데, 진보적인 노동법을 통과시키면서 동시에 노동자들을 용노조에 대대적으로 가입시켜 반대파의 허를 찌르는 정치적 술수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도 정리되어 가자 미국은 돈만 받아처먹고 도움이 전혀 안되는 소모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친미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던 소모사는 친한 미국 장성들에게 호소하는 한편, 친척들을 방위군 요직에 배치하여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려고 안배하였다. 소모사의 처남 루이스 마누엘 데바일레는 방위군의 대령이었고, 소모사의 서자 가운데 한 명은 장교였으며, 친아들 루이스는 방위군 대위, 또 다른 아들 아나스타시오는 중위로서 미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소모사는 1945년 11월 29일,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4선한 루즈벨트를 디스했다. 집회의 자유를 선언하고, 정치범을 모두 석방하겠다고 선언했다. 소모사는 일단 약속을 지켜서, 정치범들은 풀려나고 반 소모사 집회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헌법을 고쳐서 대통령직의 권한을 축소하고, 방위군에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교들을 국가 요직에 배치하였다. 작은 아들 아나스타시오가 미국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자 제1대대 대장으로 임명했다.

2.6. 아르궤요 정부

당에서는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에녹 아구아도를 지명하려 했지만, 소모사는 의사 출신인 레오나르도 아르궤요를 후보로 내세웠다. 아르궤요는 소모사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으며, 이미 나이가 많아서 허수아비로 삼아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7년 2월 2일에 니카라과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이 당시 니카라과에서는 지지하는 후보에 따라서 유권자의 줄을 다르게 서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야당 지지자들은 온갖 행정적 어려움을 겪어서 제대로 투표를 하지 못헀고, 야당 지지자들이 미처 투표를 끝마치지 못하고 수천명 이상 남아 있을 때 방위군에서 투표소를 폐쇄해버렸다. 결국 이렇게 레오나르도 아르궤요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런데, 허수아비라고 생각했던 아르궤요는 의외로 강하게 나왔다. 아르궤요는 미국 대사와 만나 소모사에게 어떤 지위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방위군 내에서 소모사의 위상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소모사의 사람들을 요직에서 한직으로 쫓아냈다. 또 소모사 반대자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소모사의 권력을 흔들었다. 소모사는 궁 앞에 탱크 3대를 열벙시키며 다시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2.7. 제2차 쿠데타

소모사는 아르궤요가 사망할 경우, 그 뒤를 이을 인물을 의회가 지명하게 되자 자신이 후보자를 고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또 자신이 직접 내린 것이 아니면 어떤 명령도 따르지 말라고 각지의 지휘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르궤요가 소모사에게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한 달도 안 되어서(...) 또다시 소모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르궤요는 겨우 멕시코 대사관으로 피신하였고, 쿠데타가 일어난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소모사는 '전 대통령은 독재 정권을 세울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자기 아내의 삼촌인 벤자민 라카요 사카사를 임시 대통령으로 삼았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자국 병사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군사 원조도 철회했다. 하지만 소모사는 당황하지 않고, 니카라과에 군기지 설치를 제안했다. 냉전을 앞둔 상황이라 미국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으므로, 1948년에 다시 소모사는 친미 관계를 회복했다.

벤자민 사카사 다음에는 소모사의 삼촌인 빅토르 로만 이레예스가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소모사는 자신이 또 한 번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는데, 로만 이레예스가 갑자기 심장병으로 죽었고 의회에서는 소모사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선거가 시작되었는데, 소모사는 선거에서 패하는 대신에 모든 정치적 결정에 대하여 발언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반대 후보를 매수하는 부정 선거로 1950년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2.8. 암살 음모와 코스타리카 전쟁

이 때, 보수당원이었던 에밀리아노 차모로가 지휘하고, 코스타리카의 지도자 '페페' 피구에레스 대령이 지원하는 소모사 암살 음모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과거 산디노 암살 때처럼 미국 대사관에서 밤늦게 귀가하는 소모사를 납치하여 살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리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모사는 선수를 쳐서 관련자를 구속하고 재판없이 처형했다. 차모로와 피구에레스는 코스타리카로 도주했다.

1954년 1월 11일, 분노한 소모사는 코스타리카와 전쟁을 시작했다. 피구에레스는 미국에 원조를 요청했고, 소모사의 군대는 니카라과로 퇴각했다. 패전한 소모사는 경제 위기에 맞딱뜨리게 되는데 소모사는 국제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코르도바 화의 가치를 낮추는 환율 조정을 했으나 이 때문에 중산층과 노동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2.9. 죽음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소모사는 권력을 놓치 않으려 했고, 1955년 개헌을 통해 재집권을 가능하게 하자, 국내외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는 그동안 모르고 계셨지만, 전 우리 조국을 지배하는 이 무서운 체제를 공격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빠지지 않고 함께 해왔습니다.
어떤 오점이나 치욕없이 니카라과를 다시 한번 - 어쩌면 처음으로 - 자유국가로 만들기 위해 애썻던 일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동료들의 반대에도 저는 이 독재정치를 끝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 망명해있던 니카라과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민주청년전선 회원인 리고베르트 로페즈 페레즈는 소모사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페레즈는 몇 주 동안 권총 다루는 연습을 하고, 소모사를 스토킹 따라서 전국을 다니면서 소모사의 습관과 일정을 관찰했다.

1956년 9월 14일, 19세기 중반에 니카라과를 정복(?!) 했던 북아메리카의 모험가 윌리엄 워커를 무릴친 전쟁 백주년 기념을 경축하는 자리에서, 페레즈는 소모사에게 접근할 수 없어 계획을 일단 포기했다.

6일 뒤, 소모사가 5선 대통령 출마를 하겠다는 발표가 벌어지고, 대통령을 위한 공개 환영 대회가 열렸다. 이 때 날씨가 매우 더웠기 때문에 경호원 들은 더위에 지쳐서 긴장이 풀려 있었다. 페레즈는 어렵지 않게 목표물에 다가갈 수 있었고, 그 순간 권총을 꺼내서 소모사를 향하여 4발의 총탄을 쐈다. 그 직후 페레즈 역시 경호원들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소모사는 헬리곱터로 마나과로 이송되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서 소모사는 파나마 운하지대에 있는 고거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부상이 심해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9월 29일 아침, 소모사의 사망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왕가답게 장남인 루이스 소모사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기 때문에 독재 정권은 루이스 소모사의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물러날 때까지 20년 더 지속된다. 여기도 3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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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말했다고는 전해지지만 공식 문서가 없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 [2] 대통령은 3대 연속이지만 어디까지나 아버지-장남-차남이기 때문에 북한의 할아버지-아들-손자 3대를 이기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