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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last modified: 2020-05-09 14:04:0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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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고 있는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 당시의 건물은 6.25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부분만 남아 있다.

俄館播遷

단순히 거처를 옮긴 것 뿐이지만 고종의 마지막 반전 카드이자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을 맞추어 1904년 러일전쟁까지 8년간의 독자적 개혁기간을 만들어낸 계기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고종과 세자였던 순종경복궁(건청궁)을 떠나, 어가를 아라사(俄羅斯) 공사관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러시아는 한자로 '노서아(露西亞)'라고도 하기 때문에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파천 당시에는 ''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친일 세력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1] 고종은 당시 일본과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심야에 제정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였다.[2] 이는 단발령에 반발해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김홍집 내각의 조선군[3]은 물론 일본군까지 지방으로 내려가 수도가 빈 상태에서 이범진 등의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를 베베르 등이 사전이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4]

고종은 옮긴 당일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윤식, 유길준, 어윤중, 조희연,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새로 하였다. 이어 1895년 8월 22일에 왕후 민씨를 폐한다고 내린 조칙 등을 위조된 것으로 명하여 무르게 하였으며 이때 김홍집과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한동안 한반도는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러시아는 재정, 군사 고문단 파견과 한-러은행 개설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러시아는 경성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5]

그러나 러시아는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에 일본과 가까워지며, 한반도보다는 만주에 집중하자는 정책변경으로 마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는다.[6] 여기에 독립협회 등이 중심이 된 환궁청원 운동도 있어 1897년 2월 18일,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 고종은 이틀 뒤인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1896년 10월에 고종의 궁전에 설치된 전화기김구를 살려줬다. 하지만,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전화선을 몽땅 뜯어서 가져왔을 확률도 희박할 뿐더러 김구가 수감되어 있던 인천감옥에 전화를 걸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는 백범의 과장이 섞이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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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독살 위협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외국 선교사들이 보내준 연유 통조림으로 연명할 지경이었다. 실제로 이후 김홍륙 독다사건(커피에 독을 탔으나 미수에 그쳤다.)이 터지면서 고종의 걱정이 기우만은 아니란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 [2] 그 전에도 생문 사건과 같은 구출시도가 있기는 했다. 이 때는 이범진, 이재순 등의 친미파 고관들과 미국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할 의도였다. 여기에는 영국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아관파천의 베베르도 관련되어 있는 등 그야말로 다국적적인 시도였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위대장인 이진석의 배신으로 실패. 하지만 춘생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은 뒤에 고종의 신임을 얻게된다. 앞서 언급한 독다사건의 김홍륙이나 이완용도 여기에 포함된다.
  • [3] 갑오개혁때 지방군을 죄다 해체해버린 직후라 의병을 진압할 병력이라고는 서울의 친위대 수천명 뿐이었다.
  • [4] 미리 러시아 해군 수병 117명, 대포 한 문을 인천에 입항해 있던 순양함에서 차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배치하여 경비를 강화(당시의 많은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재외 공관의 경비와 방어는 해군이 수행했다.)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 [5] 사실 러시아의 요구는 독립협회에서 과장해서 반대해서 그렇지, 일본을 견제한다는 목적 하나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문제는 다른 국가들과 체결해 놓은 최혜국대우조항 때문에 러시아에 하나 내주면 다른 곳에도 자동으로 하나씩 넘어갔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부담이 몇 배로 들어오고 있었다. 근데 이거 자체가 고종의 작전이었단 말이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열강들에게 일부러 골고루 이권을 나누어 줌으로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려 할때 반발할 방패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했다고 가정하면 엄청난 돈만 날린 대실패한 작전이었다.(...)
  • [6] 사실 일본은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고 38선(!)의 분할점령을 제안했으나, 결국 완충지대로 남겨둔다는 형태로 협정이 이루어졌다. 니시-로젠 협정에서도 양국은 조선 내정에 대한 불간섭을 합의하였기 때문에 이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조선에게는 최상의 상황이었다. 물론 자기 능력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후에 러시아가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고 38선 분할을 주장했으나 이번엔 일본의 거절로 무위로 돌아갔고 러일전쟁이 벌어진다.
  • [7]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고종은 아관파천 시기 러시아 공사관에 발이 묶여 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궁과 러시아 공사관을 오가면서 그 기간을 보냈다. 애초에 조선의 궁궐은 왕의 거주지인 동시에 국가중앙행정실무기관이기 때문에 이걸 완전히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리하는 것도 어렵다.
  • [8] 그리고 서울-인천 간의 전화선 연결은 1898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고, 서울 인천간의 대중전화가 개설된 것은 1902년이지만 고종의 집무실이 있었던 덕수궁에서 인천으로 연결하는 전화는 김구의 사형집행 3일전에 개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