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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last modified: 2019-05-12 13:47:48 Contributors

신미양요
날짜 1871년 6월 1일 ~ 6월 11일[1]
장소 강화도 일대
교전국 조선 아메리카 합중국
지휘관 진무중군 어재연
(鎭撫中軍 魚在淵)
대솔군관 이현학
(帶率軍官 李玄鶴)
어영초관 유풍로
(御營哨官 柳豊魯)
진무영천총 김현경
(鎭撫營千摠 金鉉暻)
광성별장 박치성
(廣城別將 朴致誠)
어재순(魚在淳)[2]
첨사 이염(僉使 李濂)
미 해군 아시아 전대[3]
(U.S.N Asiatic Squadron)
존 로저스 소장
(Rear Admiral John Rodgers)
윈필드 스콧 슐리 소령
(lieutenant commander Winfield Scott Schley)[4]
병력 500여 명 1,230 명
피해규모 전사 343 명[5]
포로 20 명
전사 3 명
부상 10 명
결과 광성보(廣城堡) 방어군 궤멸.
기타 조선, 통상 수교 거부. . 미군, 강화도에서 철수.

Contents

1. 개요
2. 전투 발발 : 손돌목 포격사건
3. 처절한 저항 : 광성보 전투
4. 역사적 결과
4.1. 미국 측
4.2. 조선 측
5. 뒷이야기
6. 미디어


1. 개요

辛未洋擾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공격 및 만행을 저지르던 제너럴 셔먼호를 불살라 버린 사건에 대한 항의 + 은근슬쩍 강제 개항 의도로 미국이 1871년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 때 미국은 남북전쟁의 진통을 겪고 있던 때라 5년의 시간차가 생기게 되었다). 미국은 1871년 2월 21일에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공동조사하자는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다.

“미국 사신이 보낸 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순전히 병인년(1866)에 그 나라의 상선(商船) 2척(隻)이 우리나라의 경내에 들어왔다가 1척은 풍랑을 만났다 구원되었으나 1척은 사람도 죽고 화물도 없어졌는데, 이처럼 서로 판이하게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피해를 당한 까닭을 알 수 없으니 그 원인을 알고 싶으며, 뒷날 그 나라의 상선이 혹시 우리나라 영해에서 조난당할 경우 원칙에 입각하여 구해주고 화목하게 서로 대우하자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조선은 청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있는데 조난당하여 와서 정박하는 다른 나라의 여객선의 경우에는 혹 양식을 원조하고 필수품을 대준 뒤에 순풍을 기다려 돌려보내기도 하고, 혹 배가 파손되어 완전치 못하면 육로로 호송하여 각각 그들의 소원대로 해 주고 아울러 지장이 없게 해 주었습니다.
(중략)
이번에 온 편지에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자고 희망하였는데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로서 호의를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자면 접대해서 보내는 도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의논해서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하는데 의논하여 판명할 것이 무슨 일이고 교섭하자는 것은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조난 당한 객선이 있으면 돌보아 주고 호송해 보내는 문제는 의논하여 판명하지 않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혹시 호의를 품지 않고 와서 함부로 멸시하고 학대한다면 방어하고 소멸해버릴 것이니 미국 관리와 통역들은 그저 저희 백성들이나 통제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인데 교섭여부에 대해서야 다시 더 논할 여지가 있습니까?
종전에 다른 나라들이 조선의 풍토와 물산을 알지 못하고 매번 통상 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교섭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외국 장사치들도 이득을 볼 것이 없을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이미 동치 5년의 공문에서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바닷가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백성들은 가난하고 물산은 변변치 못하며 금은(金銀)·주옥(珠玉)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것이고 미속(米粟)과 포백(布帛)은 넉넉했던 적이 없으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국내의 소비도 감당할 수 없는데 만약 다시 다른 나라와 유통하여 나라 안을 고갈시킨다면 이 조그만한 강토는 틀림없이 위기에 빠져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고 기술이 조잡하여 한 가지 물건도 다른 나라와 교역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절대로 교역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외국 장사치들이 이득 볼 것이 없음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매번 통상할 의사를 가지는 것은 대체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똑똑히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번 미국 사신의 편지에서 아직 문제를 끄집어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관리들과 의논하여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요청한 것도 혹시 이러한 일들을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난 당한 객선은 전례에 따라 구호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의논할 필요가 없으며 기타 문제도 따로 토의하여 판명할 것이 없으니 오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러한 내용으로 그 나라 사신을 잘 타일러서 의혹을 풀어줌으로써 각각 편안하고 무사하게 지내게 한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요약하면 "국적선 조난문제면 구호해서 해당국가로 보낼테니 걱정할 것도 없고. 교역문제는 만들어낼 물건도 없고 팔 물건도 그렇게 넉넉지도 않고 그나마 우리 쓸 것도 많지 않으니 장사 못함다."란 얘기.

하지만 미국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고 1871년 4월 9일에 함대를 배치하고 편지를 보냈다.

서양사람의 편지에서, ‘회답을 올립니다. 어제 영업선에서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여기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냐?」고 하였고, 「여기로 온 경위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 문제들을 우리 흠차대인(欽差大人)과 제독대인(提督大人)에게 편지로 알렸고, 회답을 해주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배는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즉 대미국(大美國)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대인이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배에 머물러 있는 두 대인은 다 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미국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어전회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은 영의정 김병학에게 "미리견(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김병학은 "미리견이란 나라에는 작은 부락만 있으며, 화성돈(워싱턴)이란 촌장이 나와서 영길리(영국)와 교섭하면서 만든 촌락 정도의 나라"라면서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는 해적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렇다면 오랑캐와 통교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2. 전투 발발 : 손돌목 포격사건


덕진진을 정복한 미군들

미합중국 해군의 함대가 한강의 수심을 측정하면서 강화도와 본토 사이의 수로인 손돌목에 접근하여 오자, 강화도의 조선군이 경고 포격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참전자인 당시 함장들 중 한 사람이 남북전쟁 때도 이렇게 맹렬한 포화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치열한 화망사격으로, 공식 역사는 이 사건을 손돌목 포격사건이라고 부른다. 400문에 달하는 양측 화포가 불을 뿜었으나, 피해는 미군 부상 1, 조선군 전사 1명에 불과했다. 서로 그냥 맹목적으로 쏴댄 후 미군이 먼저 물러난 것으로 결말지어졌기 때문이다.[6]

한차례 교전을 벌인 미군은 4월 17일에 대원군과 글을 주고 받는다.

“올봄에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귀국 사신의 편지를 전해왔기에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의논하고 회답 자문을 보낸 동시에 귀 대인에게 전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귀 대인은 아마도 사리에 밝아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터인데, 이번에 어찌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누구인들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外船)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으로써 처지를 바꾸어놓고 보아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귀선(貴船)이 바닷가 요새지를 거슬러 올라와서 피차간에 대포를 쏘며 서로 경계하는 조치까지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호의로 대하자고 말하고서도 한바탕 이런 사단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개탄할 노릇입니다. 귀선이 오고부터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사단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타일렀습니다. 그렇지만 귀선이 다른 나라의 규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지 어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을 방비하는 신하들로 말하면 그 임무가 방어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일에 대해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혹시 북경 예부에서 우리의 회답 자문을 미처 전하지 못하여 귀 대인이 우리나라의 제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이제 회답 자문 부본을 보내니 한번 보게 되면 남김없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서로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은 바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확고한 법으로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청나라 황제도 옛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데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귀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면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와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넓은 천지에서 만방의 생명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다 제대로 자기의 생활을 이루어가니 동방이나 서양은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해서 위로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 대인이 어찌 이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풍파만리에 고생하였으리라 생각하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여행의 음식물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은 주인의 예절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찬리(贊理) 흠차(欽差)인 영어, 한어 문건을 맡아보는 총판두(總辦杜)는【이름은 덕수(德綏), 중국인이다.】 회답합니다. 며칠 전에 군주가 파견한 우리나라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과 대청(大淸) 나라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 부본에 대해 다 같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提憲)에게 전하였으며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귀 조정이 우리나라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그가 와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가지고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문제입니다.
까닭 없이 공격한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면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의 직책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헌은 원래 포를 쏜 행위는 군사와 백성들의 망동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귀 조정에서 이것을 알고 꼭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행동하지 않고 기일을 늦추어가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귀 조정에서 3, 4일내에 만나서 협상할 의사가 없이 기한이 되기만 기다린다면 전적으로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처리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하므로 대략 이와 같이 적습니다.
보내준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받고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보내온 예물을 돌려보냅니다. 이와 같이 회답합니다.”

3. 처절한 저항 : 광성보 전투

미국은 대원군의 주장에 포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듭 고위 관리를 보내서 협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해군은 4월 24일에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미국의 전력 및 피해를 비교해 보면...

미군

군함
- USS Colorado(1856년 건조/3425톤/10인치 포 2문, 9인치 포 28문, 8인치포 14문)
- USS Alaska(1868년 건조/2394톤/11인치 활강포 1문, 60파운드 포 1문, 20파운드 포 2문)
- USS Palos(1865년 건조/420톤/포 2문)
- USS Monocacy(1864년 건조/1370톤/13인치 구포 1문, 32파운드 포 2문)
- USS Benicia(1868년 건조/2400톤/11인치 활강포 1문, 9인치 활강포 10문, 60파운드 강선포 1문, 20파운드 후장식 강선포 1문)

병력
- 해군 및 해병대 1,230명,[7] 대포 85문

조선군

지상병력
- 500여명.[8] 주무장은 화승총[9]

양측 피해

미군 : 전사 3명, 부상자 10명

조선군 : 조선군 집계 지휘관 어재연 장군 외 조선측이 확인한 전사자 53명, 부상자 10명/ 미군측 집계 사살전과는 243명. 익사 100여명, 포로 18명. 조선군이 파견한 총병력 규모 기록과 대조할 때, 미군의 집계는 투입 병력과 비교할 때 오차가 거의 없다, 초지진, 덕진진 및 광성보 시설 함락 및 조직적인 파괴와 요새 중장비 전량 노획 및 파괴, 수자기 약탈

강력한 신식 화기로 무장하고 남북전쟁, 인디언 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게 병력,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조선군의 경우 미 해군의 상륙작전 3일 전에야 가까스로 파견된 중앙군 3개 초(오늘날의 중대급)를 광성보에 집중 배치, 미군의 공격을 강화부에서 광성보로 유도하려 했다. 이를 위해 조선군은 미군 상륙 당일 지방군 소병력을 초지진 야습에 투입해서 미군의 반격을 유도했고, 이후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미군 앞에서 소규모 척후 병력을 수시로 투입해 미군의 관심을 광성보 쪽으로 돌리려는 두드러진 시도를 반복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미군은 강화부를 공격할 계획이 없이 광성보를 최종 공격목표로 삼고 있었으므로 만약 조선군이 병력을 강화부에 집중해서 수성에 임했다면 미군과의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예하 3개 초가 모두 타 군영 소속[10]이어서 제대로 된 전투 조직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이들은 지휘관 어재연을 제외하고는 강화도에 와 본 적이 아예 없어[11] 유리한 방어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말 그대로 눈뜬 장님 상태였다. 여기에 화력조차 열세인데다 화력 집중을 위한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 19세기 후반 조선군의 현실이었던 탓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광성보를 공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조선군은 조직적인 화망을 구성하지도 못했고 그저 개별적으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사실상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무려 200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조선군 200여 명에게 집중사격을 당했음에도, 총에 맞은 미군은 단 2명(해군 견습수병(Landsman)과 해병상병(Corporal) 각 1명)[12] 뿐이었다. 나머지 미군 사상자는 모두 성벽 위에 기어오른 뒤에야 발생했는데 미군 전사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휴 맥키 해군대위(추서 계급, 전사 당시 중위)는 다 죽어가던 조선군이 마지막 힘을 다하여 찌른 창에 배가 뚫려 치명상을 입고 USS Monocacy 선상에서 죽었다.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다 죽어가던 조선군이 맥키를 찌르고 자신들을 노려보면서 그도 죽었다고 한다.


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그러나 그런 참패의 와중에서도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결사항전 했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었고[13], 거의 학살 수준에 달한 광성보 전투에서도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여도 끝까지 싸웠고 무기가 없는 자는 돌로, 혹은 흙을 뿌려서 저항을 했다. 함락 직후 패잔병들에게 말을 걸려 시도했으나, 바로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미군들을 노려보며 투신자살하거나 아니면 미군의 총검을 잡고 자기 목을 찌르라는 투로 대던 조선군도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피투성이 조선군을 고통없이 죽여주자던 미군도 있었을 지경.

일단 위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 비교를 보면 저게 정상적인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비율이 아니다. 사람이란 사람은 다 죽일 각오로 하거나 방어측에서 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수치.

남북전쟁의 베테랑들도 독종같이 달라붙는데 질릴 대로 질린 모양. 전투 개시 전, 조선군의 군가를 들은 한 미군 수병"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전후 기록들도 대개 완전히 바르긴 했는데... 뭐야 이 놈들 뭐하는 놈들이야...에 가깝다[14].

또한 전통적인 포병강국이었던 조선의 위엄도 나타났는데, 비록 이시기에는 구식 대포라서 사정거리가 짧아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으나, 강화도 포대에서 미국 군함을 향해 발사되는 수많은 화포가 이루는 화망은 미국인에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역시 남북전쟁 참전자인 한 미국군인은 이런 밀집화망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고 기록해놨다.

그러나 군인들의 기강 문제와는 별개로 전략적인 측면에선 시작부터 실패한 일이기도 했다.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수습해서 후를 도모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당시 조선군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투 중간에 지휘관 자리에 있는 어재연이 전사[15]해 지도력의 부재가 있었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의 상륙을 허용해 왕실과 직접 연결된 기관인 외규장각이 탈탈 털린 경험이 있는 조선 입장에서는 상륙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제1 방책이었을테니 유연한 대처를 기대하기 어렵기도 했다.

조선군은 광성보가 함락된 후에도 초지진 등지에서 기습을 강했고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한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린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4월 25일에 철군해버렸고 조정은 3일 후인 4월 28일에 그것을 확인한다. 참고로 포로 18명은 석방했는데 이들을 찍은 사진이 미국에 남아있다. 포로로 잡혔던 그들은 미군이 주는 밥[16]을 내던지며 일절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석방 인증샷을 보면 선물로 받은 미국 맥주 상자를 들고 있다?

미군이 철수한 이유는 다른 것도 있었는데 광성보를 공격하느라 탄약의 반 정도를 소모했고 식수 부족에 풍토병이 번지기 시작한 터였다. 이후 로저스 제독은 미국으로 귀환 후에 대체 그 비싼 원정비용 쓰고 얻은게 뭐냐고 크게 질책당했다. 조선을 일본과 달랐다.[17]

4. 역사적 결과

4.1. 미국 측

애초에 미국은 조선의 개항을 쿠로후네 사건, 즉 일본의 개항과 비슷하게 접근했던 것 같다. 즉, "군함 몇 척 보내서 해안가에서 왔다갔다 하면 겁에 질려 개항하겠지..." 하고.

그러나 조선은 겁에 질리기는 커녕, 조선군은 전멸할 때까지 싸웠으며, 죽어도 개항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연한 것이, 신미양요 때의 조선은 매슈 페리 제독의 미 함대에 굴복한 일본과는 달랐다. 특히 불과 5년 전에 일어난 병인양요로 인해 외국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고, 이로 인해 외국 군사에 대한 어느정도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었다. 게다가 조선은 500년간 유지된 중앙집권과 흥선 대원군이라는 카리스마와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존재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반면 당시 일본은 애초에 봉건국가인데다가 존왕양이파와 막부가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사분오열된 상황이었다.

미군 전사자는 불과 3명 뿐이었지만, 전사자 수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미국의 목표는 최소한의 피해로, 단기간에, 조선을 개항시키려던 것이었기 때문.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이같은 목표에 충실하게 움직여, 무력 충돌 전후에 조선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군사적인 이득이나 피해와는 상관없이 결과는 조선의 개항 거부였다. 따라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가지 중 하나. 본격적으로 침략하거나, 그냥 포기하고 물러서거나. 미국의 입장에서는 피해를 감안해서 침략하기에 한반도는 쓸모있지않다고 판단하여 그냥 포기하고 물러섰다. 그래 나는 미국.. 포기를 아는 국가지. 단 무작정 포기하고 물러섰다는게 아니라 점령은 했으나 그 이상 할 게 없어서 물러난거다.즉 분명 조선군을 전멸은 시키고 그 부근을 점령도 했으나 개항을 거부하자 할 것이 없던 것이다.

4.2. 조선 측

전투 이후 대원군은 지지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운다. 덤으로 기세를 몰아 서원 철폐도 단행한다.

문제는, 조선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는 것.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쇄국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척사파는 위정척사파대로 흥선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사건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별다른 충돌없이 냅다 개국해버린다(...).

5. 뒷이야기

신미양요는 면제배갑이 활용된 전투이기도 하다. 미군은 이걸 노획해서 전시하기도 했다. 현재 단 1개뿐인데 한동안 미국에 있었다가 임대형식으로 반환 받았다. 자세한 항목은 면제배갑 참고.

참고로, 이 당시 남북전쟁을 겪었던 미 해군 베테랑들에게도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던 조선군의 끈질김은 겨우 4년 후에 벌어진 운요호 사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대는 미군 베테랑보다 몇수 아래 실력에 숫자도 훨씬 적었는데 말이다. 이유는 군수품 문제. 그 당시 고종이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를 갑자기 혁파하는 병크를 저질러서, 몇달씩이나 군수 지원이 끊겼었다[18].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자면,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에도 막부데꿀멍해서 전쟁은 피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한 침공에 어설프게 전쟁을 벌였다가 국가적으로 망했다.[19] 그 밖에도 무수한 나라들이 서구 열강들에게 비슷하게 밀렸다.


기함 콜로라도(Colorado)호에서 장군기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는 미 해병대[20]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장군기는 2007년부터 '10년 대여' 조건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다. 이 유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실물 군기유물이다. '10년'이라는 기간제한과 '대여'라는 표현에 피약탈국으로서 반감이 드는건 어쩔수 없겠지만, 약탈문화재의 세계에서는 10년 대여 조건도 결코 박하다고 할 수 없으니(오히려 후한 조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달갑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군사유물 보존 실태를 고려하면[21] 냉정하게 말해 저 깃발은 미군이 가져가서 잘 보존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거지, 안그랬으면 우린 수자기를 영영 그림으로나 봤을 것이다. 게다가, 전시 교전으로 인해 얻은 정당한 노획품(민간에서 약탈한 물건이 아닌 병기나 군 피복, 서류 등 군사 및 정부 물품들.)은 국제법상 따로 조약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상 상대국에 반납할 의무도 없다.[22]

그리고 내용을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병인양요와 함께 국사한국근현대사 교육 과정을 비판할 때 빠지지 않는 사례이기도 하다. 서술 자체가 상세내용을 생략한 채 거의 승전처럼 되어 있으니. 일단 정치적으로 미국이 원하는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승리이긴 하다. 단순 전과로 따지면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고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기고 온 것이다.

6. 미디어

  • 풍운
한미통상 조약 이후 보빙사 파견까지 밀도있게 다루었지만, 1980년대 특성상 일본도 아니고 미국과의 전투라는 측면에서 크게 다루지 않고 나레이션으로 처리하였다.

'대원군' 편에서 병인양요와 함께 서구 열강의 군세에 처절하게 무너지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극 중 조선군은 프랑스 및 미군의 사격에 추풍낙엽 신세였다.

  • 찬란한 여명
다수의 미군이 전사한다. 어재연 혼자 죽인 병사만 수십 명이며, 미군이 물러날 때도 많은 시체가 쌓여있는 묘사가 있다. 이쯤되면 환타지... 손돌목 포격전에서 조선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돌아온 미군 장교에게 로저스 제독이 뭐하는거냐며 강력히 질책하자, 장교는 남북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 강력한 포격전은 경험한 적이 없다고 보고한다. 제독이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분노하자 로우 공사가 나서서 말리는 등 정신 승리적 장면이 많다. 참고로 동 드라마에서 병인양요에 대한 묘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 태양인 이제마
후반부에 신미양요가 묘사되는데 때가 때인지라[23] 미군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즉, 미군 전사자가 많다.
백병전에서 조선군 지휘관의 칼에 맞아죽는 미군과 조선군 병졸이 돌로 내려 찍어 죽이는 미군, 당시 한국 사극의 단골 고증 오류였던 반자동 조총을 들고 이제마가 사살한 미군들만 쳐도 전체 전사자 수를 가볍게 넘긴다. 작품전개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이때 스승을 잃은[24] 이제마는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관직생활을 시작하다.

18화에서 잠시 등장하는데 광성진 전투에서 미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는 내용으로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드라마들은 전투에 투입된 미군이 해군과 해병대였음에도, 육군 - 그것도 어설프게 재현된 - 병력으로 나온다는 공통된 점이 있다. 해군과 해병대 병력이 제대로 고증된 것은 강화도에 있는 기념관의 디오라마 정도이다.

대체역사소설인 만큼 여기에 해당하는 사건은 나오는데, 실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미,영,프 연합군이 강화도로, 일본이 남부지방으로 침입하여 '양요'라고는 부를 수 없는 수준으로 대규모 전쟁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조선이 승리한 덕분에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거의 대등한 조건으로 문호개방을 한다. 다만 전쟁이 크게 확대된 만큼 피해 역시 확대. 특히 강화도는 아주 궤멸적 피해를 입는다.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영종진 등 포대들이 역사대로, 아니 역사 이상의 피해를 입고, 강화부성마저 떨어지면서, 어재연도 전사하지만, 역사와 달리 정기원까지 사망한다.(어?)

  • 미스터 선샤인
1화에서 짧게 등장하지만, 당시 전투를 구슬프고 장엄하게 묘사했다.
후반부,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체되면서 발발한 남대문 전투에서 광성진 전투가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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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광성진 포격전을 기준으로 교전 종료일까지를 가리킨다.
  • [2] 어재연(魚在淵)의 아우. 출사하지 않고 향리로 지내다 형의 소식을 듣고 백의종군하였다.
  • [3] Squadron을 분함대, 소함대 등으로 번역하지만, 해군은 이를 전대(戰隊)로 호칭한다. 1902년, 미 해군 아시아 전대는 아시아 함대(Asiatic Fleet)로 개편되었다.
  • [4] 로저스 소장의 부관으로 상륙 작전을 지휘하였다.
  • [5] 익사자 100 명 포함.
  • [6] 참전했던 미 해병대 대위의 편지에는 "그들의 포는 매우 조잡하오. 통나무로 된 포가 얹혀 밧줄로 묶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미리 정해진 지점 외로는 사격을 할 수 없다고 하오. 그래서 우리 배들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에야 포격을 했소. 커다란 포환이 날아왔는데 배에는 전혀 맞지도 않았소. 단지 총통이라고 불리우는 소형화기에서 발사된 조잡한 탄환 두어 개가 적중했다고 하오. 그 총통이라는 것은 두 명이 어깨에 걸쳐메고 화승으로 발사하는 것이라고 하오. 단지 세 명의 우리 병사가 맞았는데 가벼운 부상이라고 하오. 최신의 무기로 무장한 우리들에게 그들이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수 있을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 [7] 롤링블럭 소총스프링필드 전장식라이플로 무장
  • [8] 전투개시 며칠전에 급파되어 지휘체계 엉망에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함.
  • [9] 분당 10발 사정거리 400m vs 1 ~ 2발 사정거리 100m으로 양군의 화력차이는 1:50
  • [10] 조선군은 지방에 중앙군을 파견할 때 다른 군영 부대를 뒤섞어 보내는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아마 같은 군영 부대만을 보내면 반란을 일으킬 우려를 해서 그런 듯.) 그런데 하필 조선군은 각 군영마다 군령이 다르고 훈련 방식도 달랐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조선만의 특이한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국군도 현재까지 원정군을 파병하는 경우 각 지역에 위치한 연대에서 대대를 하나씩 뽑아 여단을 구성해서 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비효율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게 당시 중앙 군영이라는게 그냥 이름 다른 부대인게 아니라 국가 체제(세금이나 부역등)과 긴밀히 연결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부대를 전체 보냈다가 전멸해버리거나 대다수가 사망하거나 하면 국가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 [11] 어재연은 병인양요 당시 초지진에서 근무했었다.
  • [12] 상륙군은 해병소령이 지휘했으며, 해군 병력을 선두로 하여 해병대가 뒤따라 진격했다.
  • [13] 미군의 작전 보고서는 달라서, 성벽이 완전히 함락되고 200여 명 이상이 전사해 살아남은 조선군이 100명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점에서 일부 조선군이 미군의 공격이 가해지지 않은 북쪽으로 도주를 시도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필 그 방향에는 막 전개를 마친 카셀 해병소령의 야포 포대가 있어, 이들의 산탄 사격에 순식간에 전멸했다.
  • [14] 미국에겐 이로 부터 70년 후 악랄하기로는 최악이지만 전술에서는 병신을 만나기 전 까진 최초로 만난 충공깽급 적군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달 수 있다. 당시 서양시 전투법에 익숙한 미군에게 죽더라도 저항을 하는 세력은 처음 조우한 것이기 때문. 물론 의화단의 난도 겪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저항은 없었다.
  • [15] 당시 지휘관 어재연을 전사시킨 것으로 알려진 미 해병(James Dougherty, 훗날 예훈장 수여)의 계급은 이등병이었다. 안습.
  • [16] 정말로 "삶은 쌀", 즉, 조선식의 밥이었는지 아니면 미군 측의 식량이었는지 추가바람.
  • [17] 취소선이 그어져 있긴 하지만 당시 일본과 조선은 그 처지가 달랐다. 일본은 당시 정치권이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신미양요같은 사건이 일어날 경우 정권 자체가 붕괴될 가능성이 컸으므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위해 한 부득이 한 개항이었지만 조선은 중앙집권제였고 아직까지 통치권은 견고했던 상태였으므로 항전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 [18] 물론 고종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경강수세를 혁파한 이유는 대원군 시기의 화폐정책 실패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발생한 조정의 재정문제가 컸기 때문에 이걸 병크라고 하기도 어렵고, 운요호사건 시기는 신미양요 시기와는 달리 본격적인 개전도 아니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다. 홍모이 혹은 도깨비 취급을 받았던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과 초기 전투 양상 등 차이가 날 구석은 엄청나게 많은 것도 사실.
  • [19] 하지만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서구의 침공에 가장 끈질기게 저항한 나라 중 하나다. 애초에 프랑스군은 베트남의 도성인 후에로 바로 침공하려 했으나 후에 앞 항구 다낭의 베트남군 방어선에 막혀서 몇 개월 동안 고생하다 사이공을 침공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남부 베트남은 10여년간의 반불항쟁으로 전통적인 지주층이 전멸할 때까지 프랑스에 저항했다. 그리고 이런 저항의 역사는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프랑스와 미국, 중국을 연속으로 상대하는 베트남의 위업으로 다시 등장한다.
  • [20] 왼쪽부터 찰스 브라운(Charles Brown) 상병, 휴 퍼비스(Hugh Purvis) 이병, 맥클레인 틸튼(McLane Tilton) 대위. 사진 속의 두 병사는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 받은 15명에 포함되었는데, 당시에는 명예 훈장이 유일한 무공훈장이었다.
  • [21] 조선시대의 무관심+일본의 총포화약단속법+6.25전쟁+현대의 무관심이 겹쳐져 살아남은 유물이 극히 적다.
  • [22] 비슷한 경우가 러시아의 군함 바리야크의 군기. 문화재 관리법에 따라 인천시청에서 러시아로 2년간 대여하는 형태로 반환했었으며 한차례 기간 연장, 그리고 현재 인천시청으로 반환된 상태.
  • [23] 2002년 7월~10월 방영.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안된 시점이다.
  • [24] 미군이 일부러 죽인건 아니고 조총들고 미군이랑 싸우는 이제마 말리다가 눈먼 총알에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