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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last modified: 2015-12-06 14:27:59 Contributors

한국의 역사
삼국사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진흥왕 재위기인 6세기 무렵 신라의 영토.
공식명칭영어: Silla(영문)
한자: 新羅
일본어: 新羅(しらぎ[1])
중국어: 新罗(Xīnluó)
위치한반도 동남부 → 한반도 남부
인구적어도 90만 명 이상[2]
수도서라벌
정치체제군주정
국가원수
居西干 → 次次雄 → 尼師今 → 麻立干 → 寐錦 → 王
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 → 매금 → 왕
언어신라어
종족족,족,한족, 말갈[3] 토착민 등
종교불교
존속기간기원전 57년 4월 15일 ~ 935년 11월 (992년)
성립 이전진한
멸망 이후고려 건국

Contents

1. 개요
2. 국호
3. 역사
3.1. 건국
3.2. 발전과 성장
3.2.1. 건국 및 초기의 발전
3.2.2. 내물왕
3.2.3. 나제동맹
3.2.4. 중앙집권화
3.3. 전성기
3.4. 백제 고구려의 협공과 나당동맹
3.5. 삼국통일과 나당전쟁
3.6. 통일신라(대신라)의 발전
3.7. 쇠퇴기
3.7.1. 청해진
3.7.2. 6두품의 대두
3.8. 후삼국 시대 및 멸망
4. 사회
4.1. 신분제도 : 골품제
4.2. 화랑
4.3. 언어
4.4. 경제
4.5. 행정구역
4.5.1. 9주
4.5.2. 5소경
4.6. 중앙관제
5. 문화
5.1. 문학
5.2. 미술, 건축, 종교
5.3. 과학
6. 평가
7. 신라의 인물들(시대순)
8.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
9. 관련 문서
9.1. 통일신라

1. 개요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왕국

2. 국호

국호인 ‘신라(新羅)’는 지증왕 때 정해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新)’은 덕업일신(德業日新), ‘라(羅)’에는 망라사방(網羅四方)이라는 뜻이 있다. 이는 본래 고유어인 명칭에 한자를 부회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림, 사로국, 서라벌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왕 4년 504년 공식 국호를 '신라'로 통일하여 결정하고, 왕에 대한 칭호가 이전에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다양했던 것을 대신하여 ""으로 정했다.

통일 신라 시기에는, 아랍페르시아의 사람들이 통일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신라(Alshilla)',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Bashilla)'라고 나타난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괴), 계림(鷄林), 서야벌(徐耶伐), 서나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3. 역사

3.1. 건국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 중 가장 건국시기가 빠르고 역사도 천 년 가까이 된다.(992년)[4]

건국 이전에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에는 6개의 촌(이씨의 양산촌, 최씨의 고허촌, 정씨의 진지촌, 손씨의 대수촌, 배씨의 가리촌, 설씨의 고야촌)이 있었는데 이 6부촌장들이 모여 나라를 세우는데 뜻을 모았고(기원전 69년), 마침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가 건국되었다(기원전 57년).

3.2. 발전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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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건국 및 초기의 발전

초기의 신라는 6촌[5]의 연맹 형태였다. 이 6촌들은 6부로 변모했는데, 이씨의 양산촌이 급량부, 최씨와 소씨의 고허촌이 사량부, 정씨의 진지촌이 본피부, 손씨의 대수촌이 점량부, 배씨의 가리촌이 한지부, 설씨의 고야촌이 습비부가 되었다가 나중에 훼부, 사훼부, 본피부, 사피부, 잠훼부, 한기부가 되었다. 이 6부의 지도자(간지) 중에서 왕이 추대되다 점차 훼부가 왕위를 독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6부는 각기 독자적인 행정관료와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 부의 지도자는 간지 또는 간[6]라고 불렸는데 간지들은 실제로 모두 (王)이라고 불렸다. 흠좀무...

신라 왕의 명칭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변했는데, 초대왕(거서간)인 박혁거세부터 8대 아달라 이사금까지는 대부분 박씨가 그럼 '박아달라'가 되는건가? ANG?, 9대 벌휴 이사금부터 16대 흘해 이사금까지는 대부분 석씨가 계승하였다. 신라 초기에 -- 세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이후 신라 지배층에 포섭된 성씨들을 대우하기 위해 훗날에 술작된 왕권 전설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초기의 신라는 초반부터 가야지역의 여러 나라와 상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중복된 기록이 첩출하는 등, 모순이 있어 이것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현재까지도 토론 중인 부분이 있다. 해외 기록으로는《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이란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3.2.2. 내물왕

신라가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금석문에 최초로 등장하는 내물왕(내물 마립간)(재위 356년 ~ 402년)때다. 내물왕 이전에는 박, 석, 김 3개 성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내물왕 대에 이르러 김씨의 독점세습제가 굳어졌다. 또 내물왕은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신라에 전래되면서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4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에 있었던 내물왕대에는 크고 작은 여러 전투가 일어났다. 내물왕 전기에는 백제에 근초고왕이, 후기에는 고구려에 광개토대왕이 재위에 있었던 시기로, 이 시기에 삼국은 마한과 진한을 평정하고 비로소 국경에서 직접적으로 군사적 접촉을 시작하던 때였다. 내물왕은 정복사업으로 신라의 영토를 확장했다. 또 내물왕 대에는 왜의 침략이 잦았다. 내물왕은 여러차례 왜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재위 말기인 399년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이 대규모로 침공했을 때는 광개토대왕(재위 392년~413년)의 고구려군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이때문에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기도 했다.

3.2.3. 나제동맹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재위 412년~491년) 시절 전성기에 접어든 고구려는 남하정책를 펼치면서 백제와 신라에 압박을 가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눌지 마립간[7] 때 백제의 비유왕과 나제동맹을 맺었다(433년). 나제동맹은 진흥왕성왕이 대립할 때까지 약 12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455년과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했을 때 신라는 백제로 지원군을 파병했으며, 494년과 495년에 걸쳐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왔을 때도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3.2.4. 중앙집권화

지증왕(재위 500년 ~ 514년)과 법흥왕(재위 514년~540년) 때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변모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지증왕은 나라 이름을 정식으로 "신라"로 바꾸고(503년) 마립간 대신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또 관등 정비(503년), 상복 제정(504년) 등을 통해 체제를 정비했고 지방제도를 개편했다(505년). 아울러 502년에는 우경법을 실시하였는데 우경법을 통해 식량 생산이 크게 증대되어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국방에도 신경을 써 12개의 성을 축조했고, 우산국(울릉도)를 복속시켰다(512년).

법흥왕 때는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크게 강화하여 중앙집권국가로 변모를 시도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체제를 정비했다(520년). 또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했는데(527년) 왕족을 석가족과 동일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고, 동시에 토속신앙의 제사장이었던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상대등 직위를 신설하여 귀족대표를 관료체계에 포함시킴으로써 귀족세력을 왕권에 복속시켰다(531년).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기도 하였다(536년). 또 법흥왕 대에 금관가야가 병합되었다(532년).

3.3. 전성기


잘 보면 고흥이 섬이다. 응?

신라는 6세기 진흥왕(재위 540년~576년)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발전한 국력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삼국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로서, 이전까지는 다른 삼한의 소국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약소국이었으나 이때부터는 삼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진흥왕은 젊은 청년들을 모아 화랑 제도를 만들어서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종교적, 사상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통합체계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렇게 결집된 국력을 토대로 공세를 퍼부어 북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대가야(562년)를 정복했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정복을 통해 새로 복속된 지역에도 적극적인 유화정책을 펼쳤다. 이는 신라가 6촌의 연맹체로 출발한 기원에서 유래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화정책을 통해 새로 편입된 진한과 가야의 백성들은 위화감없이 신라에 융화되었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야 멸망 후 신라왕족인 진골로 편입되었다. 신라의 유화정책은 삼국통일 후에도 적용되어 고구려 귀족들은 6두품, 백제 귀족들도 5두품이 되었다.[8]

3.4. 백제 고구려의 협공과 나당동맹

진흥왕이 죽자 백제와 고구려가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여 진흥왕 대에 복속된 영토의 일부를 다시 상실하였다. 7세기에 접어들자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은 더욱 빈번해졌다. 특히 백제는 호전적인 무왕의자왕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백제와 고구려는 외교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고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진평왕(재위 579년 ~ 632년) 사후에는 성골출신 남자 후계자가 없어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재위 632년~647년)과 진덕여왕(재위 647년~654년)이 연이어 즉위했다. 여왕들이 연이어 집권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겨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9] 특히 641년에 즉위한 백제 의자왕은 호전성을 드러내며 642년부터 신라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하는데 이때를 삼국통일전쟁의 시발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특히 642년 백제에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이 함략당하면서 당시 실권자였던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사망한 것은 신라로서는 뼈아픈 일이었다. 이후에도 연이은 전투로 빼앗은 영토를 다시 빼앗기는 소모전의 양상이 계속되었다.[10][11]

대야성 함락 직후 신라는 백제와의 전투에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친을 맺기로 결정하고 김춘추를 사신으로 고구려에 파견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오히려 김춘추를 투옥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642년).[12] 김춘추가 협상에 실패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아예 협공으로 침공해오는 일이 잦아졌다. 신라는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군사동맹(나당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기로 합의하였다(648년).[13]

3.5. 삼국통일과 나당전쟁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에 즉위한 후 나당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실행에 옮길 것을 당에 촉구하였고 당고조가 이에 응하여 마침내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나라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이 각각 해상과 육로로 백제 공격을 개시했다. 이미 지속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진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했던 백제[14] 결국 660년 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도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다.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나당연합군은 소규모 공세를 반복하여 고구려의 국력이 점차 고갈되기를 노렸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와 대결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하고 고구려와의 전투에는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전력을 비축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권력에서 밀려난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건너가 당나라군의 앞잡이 노릇까지 하였다. 668년 마침내 평양성이 함략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했다.

이렇게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막장일때 운좋게 신라가 쉽게 통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뇌부가 막장이었어도 인구수나 생산력에서 고구려나 백제는 여전히 신라보다 앞서 있었다. 또 고구려나 백제 수뇌부도 몇십년전만해도 연개소문이나 향락에 빠지지기 전의 의자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나라였다. 신라는 수십년간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협공을 방어하면서 수도없이 위기를 맞았지만 외교줄타기의 성공, 지리적 이점, 정치적 안정, 강력한 내부 결속력 등이 모두 맞물리면서 기적처럼 다른 두 나라를 쳐내고 통일을 이룬것이다. "강한자가 살아남는것이 아니라 살아남는자가 강한것이다" 라는걸 온몸으로 보여준 것.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나당전쟁이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두어 백제, 고구려는 물론 신라까지 먹으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결국 고구려 멸망 후 신라는 당나라와 국운을 건 정면 대결에 들어갔다.


신라는 건국이래 전통대로 백제와 고구려 정복지역에 대해서도 유화정책을 취했는데, 이는 점령지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았던 당나라군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세력들이 신라의 편에 붙어 당나라와 싸우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일통삼한'의 기치를 내걸고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을 하나로 규합하려 했다. 실제 나당전쟁 당시 신라군에서 백제인, 고구려인, 말갈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반수 이상이었다.

신라는 투항한 고구려의 왕자 안승을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시켰다. 이로서 고구려 유민들이 주도하는 부흥 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주둔해 있는 당나라군을 차례로 공격하여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당나라 본국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여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자 한때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의 주력 20만 대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여 전세를 뒤엎고 주도권을 장악했다(675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18차례의 전투가 이어졌으나, 마침내 금강 하구에서 벌어진 기벌포 해전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당나라군은 퇴각하면서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까지 요동으로 철수하면서 한반도에서 완전히 퇴각했다(676년).

신라는 애초에 당과 약속했던 대동강 이북으로는 더이상 북진하지 않았다. 이미 당이 먼저 약속을 깼기 때문에 대동강 이남 지역까지만 차지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어졌지만 향후 당나라의 재침략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대동강을 방어선으로 결정한 듯 하다.

하지만 이내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에는 발해가 들어서면서 남북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옛 수도평양은 신라와 발해의 국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북국 시대엔 폐허나 다름없이 방치되었다가 약 200년 뒤 왕건이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그나마 도시다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가 차지한 영토가 고구려의 영토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는 점이 널리 지적되고 있다. 애초에 삼국통일이라는 용어가 적합한 용어는 아닐 수 있다. 사실 삼국 간에 지금과 같은 동족 의식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물론 삼국통일 당시 신라는 '삼한일통'을 내걸고 싸웠고 이러한 기치 아래 나당전쟁에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군과 함께 당나라와 싸우긴 했다. 신라는 민족의 통일을 위해 싸운 것이라기보다 백제와 고구려라는 가까운 두 적, 그리고 이 두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맞닥드리게 된 당나라라는 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싸워 이긴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지도 모른다. 신라의 목적이 어떠했든 간에 이와는 별도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에 나당전쟁을 통해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지역을 수호한 것은 평가받아야 할 일이다.

3.6. 통일신라(대신라)의 발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고, 당과의 전쟁을 통해 민족의식이 싹텄다. 넓어진 영토에는 9주 5소경을 설치하였다. 한반도 일대는 신라에 완전히 통일되었고, 북방의 발해와는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으나 대규모 전쟁은 없었다. 대외적으로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오면서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 강화를 이뤘다. 이때부터 한동안 무열왕계 직계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하지만 무열왕계는 나중에 몰락한다.)

왕권 강화와 함께 왕명을 수행하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직책이었던 상대등은 억제되었다.

삼국통일에 힘입어 그동안 군사력에 치중하였던 역량이 내부로 쏟아지면서 신라는 화려한 시대를 누리게 된다. 특히 서라벌에는 집집마다 기와가 덮여있었고, 화려한 예술품들과 불교 예술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오고[15], 집집마다 숯으로 밥을 하여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으며, 국력의 강대함을 자랑했다. 8~9세기에 들어 아랍페르시아의 신라에 대한 기록이 크게 늘어나는데, 일관적으로 귀금속이 많이 나고 자연환경이 좋아서 무슬림[16]들이 많이 정착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원성왕의 능인 괘릉을 지키는 무인상도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수피주의자의 터번을 쓰고 있는 등 직접 보지 않으면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자세한 점을 고려할 때 이미 상당수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계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통일신라의 인구는 수십만 이상으로 추정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삼국유사진한조)는 기록이 있는데 이 것이 사실이라면 경주 한 곳에만 8~90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뜻.

3.7. 쇠퇴기

8세기 후반에 이르자 신라는 왕위 계승을 놓고 분쟁이 일어났으며, 진골 왕족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진골 귀족들은 자기도 왕 한번 해보려고 왕위쟁탈전을 수시로 일으켰으며, 시도때도 없이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권은 불안정하고 정치는 혼란해졌다. 무열왕 때와는 정반대로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 때문에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지방에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으며, 이들은 선종 불교를 받아들이고 철불(鐵佛)을 제조하여 자신의 경제력을 드러내는 등, 독자성을 강화해 나갔다. 중앙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이탈된 진골 귀족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호족화 되었다.

녹읍제도가 부활한 757년에 신라의 지방행정제도가 전면적으로 개편되어 9주 5소경제가 정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녹읍제의 부활이 전대의 녹읍과 같은 단순한 관리 녹봉의 성격을 떠나, 관료전의 설치 이후 촌락에 대한 국가와 관료의 이중적인 수취를 통한 지배의 불통일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설치 되었을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녹봉제는 쌀의 운반에 드는 인력과 다시 재분배 하는등에 소요되는 자원을 국가에서 부담해야 하지만 녹읍제는 관료가 직접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이라는 이점도 컷다. 문제는 경덕왕 다음 왕인 혜공왕이 왕으로써 그다지 뛰어난 왕이 아니었고 결국 살해되어 무열왕계가 물러난 이후 이 제도의 폐단이 다시금 시작 되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 항목에도 있지만 이 시기는 쇠퇴의 시작은 맞지만 890년 이후의 국가 막장 테크급은 아니다.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을 상당히 빨리 진압하고 일부 지역에는 7년간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이 시기까지 신라의 역량은 충분했고 오히려 이를 기회로 다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었으나 천년에 이르는 세월의 한계인지 아니면 골품제를 끝까지 유지해서인지 그 영광을 되찾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서기 890년경에 이르면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는 궁색한 처지에 놓인다.

3.7.1. 청해진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는 반면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러한 해적의 출몰은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다.

청해진을 세운 장보고가 해적에 대처하였는데 장보고는 이로서 세력을 쌓아 선덕왕의 즉위를 도왔지만, 태자비를 세우는 데까지 손을 쓰려다가 옛 부하였던, 수도에서 온 자객에게 살해당하고, 청해진도 해체되었다.

이 시기에 호족 세력가들은 성을 쌓고 성주(城主)를 자칭하며 지방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된다. 후삼국시대의 전조이지만, 아직은 신라 조정의 종주권이 인정되었다.

3.7.2. 6두품의 대두

당나라 유학파 6두품 출신 학자들, 선종 승려들은 골품제에 따라서 신분제가 엄격한 신라 사회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진골 귀족 중심의 신라 정치는 쉽게 바뀌지 않았으며, 후삼국시대에 이들은 호족 세력과 신흥 군벌과 연계하게 된다.

3.8. 후삼국 시대 및 멸망

한국의 역사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
고려 / 신라 / 후백제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났으며, 견훤궁예가 그 가운데서 두각을 드러내어 후고구려후백제가 건국된다. 신라는 삼국시대 말기와 삼국통일전쟁을 거치면서 획득한 대부분의 한반도 영토들을 상실하고 삼국시대 초반기때 수도 경주와 영남권 일대로 다시 축소되어[17]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오면 본래 종주권을 가진 나라였음에도 너무 나라가 기울어서 연전연패를 거듭할 뿐, 속수무책으로 지방군벌들에게 휘둘리게 된다.[18] 이런 상황에서 다시 수백년만에 박씨가 왕권을 장악하게 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급기야 후백제의 견훤에게 경주를 점령당해, 경애왕은 살해당하며 왕비겁탈당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19]

이후 고려후백제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신라의 경순왕은 결국 대세에 따라 좀 더 잘 대우해줄 것 같았던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고 멸망하게 된다.

4. 사회

신라는 같은 삼국시대,남북국 시대때 고구려, 백제, 발해나 혹은 이후의 고려, 조선등에 비하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정착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나라를 세운 성씨 집안이 나라가 멸망할때까지 왕위를 차지하는 등 왕실 세력이 일정했던 고구려,백제,발해,고려,조선과 달리 신라는 건국 초기 박씨, 석씨, 김씨등 서로 다른 성씨 집안 사람이 왕위를 이어가며 박씨 왕조에서 김씨 왕조, 석씨왕조등으로 바뀌어가며 왕실의 기복이 심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삼국시대 중기 내물왕 이후 김씨왕조로 단일화되어 김씨가 오랫동안 왕위를 독점했지만 내부적으로 불안정성은 있었다.이후 통일신라가 몰락하고 후삼국시대가 도래하여 김씨왕조가 약화되자 박씨 세력들이 김씨를 몰아내고 다시 박씨가 왕권을 장악할 정도였고....

4.1. 신분제도 : 골품제

신라의 신분제는 골과 품에 따라서 구분하였기 때문에 골품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골품은 혈통에 따라서 결정되었고, 신라 사회에서 정치, 사회 활동의 범주를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대표적으로 관등 승진의 상한선은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며,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옷의 색이나 재질, 수레 등 일상생활 용품들 역시 골품제에 따라서 등급이 정해졌다. 사실 골품은 그나마 귀족에서 지방 호족 대우는 해주는 것이고, 골품에도 들지 못하는 평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골품제의 영향은 이후로도 남아서, 신라가 멸망한지 한참 후인 고려시대까지도 옛 신라출신 귀족들은 골품으로 서로를 텃세하며 같은 골품끼리 파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4.2. 화랑

청소년을 규율하는 신라의 독특한 제도로서 화랑 제도가 있었다.

4.3. 언어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남아있는 자료를 보면 현대 한국어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한 가지 자료를 들자면 《일본서기》에 신라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왜의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일테니 뭔가 아쉬움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다른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4.4. 경제



4.5. 행정구역


아래는 통일신라의 행정구역이다. 그 이전은 자세한 기록이 안 남아있다.

4.5.1. 9주

9주(九州)는 신라 통일기의 행정 구역으로, 신라는 고구려·백제를 평정한 후 당의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다음 신문왕 5년(685년) 전국의 행정 구역을 9주·5소경으로 재조직하여 편성하였다. 9주가 설치된 곳은 신라 본국 및 가야 지역에 3개, 구 백제 지역에 3개, 구 고구려 지역에 3개 등으로 배분되어 있는데 이는 삼국 통일이라는 정당성을 강조한 정치적 배려라고 이해된다.1“9주”의 설치 또한 중국의 지형설(地形說)의 “9토(九土)”를 상징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이를 중국식 명칭으로 고쳤으며, 혜공왕대에 다시 원래 명칭으로 되돌리는 등 시기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때 중국식으로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기준으로 9개의 주의 이름은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이다. 9주의 소관 군현 수는 450군현에 이르렀다. 주 밑에는 군(郡)·현(縣)을 두어 계통적인 조직을 하였으며, 주에는 총관(摠官 : 나중에 도독으로 개칭), 군에는 수(守), 현에는 영(令) 등의 장관을 두었다. 군현의 아래에는 촌(村)을 두었는데, 지방 토착 세력인 촌주(村主)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그밖에 특수 행정 단위인 향(鄕)·부곡(部曲)도 있었다. 또한 지방관을 감찰하려고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였으며, 지방 세력을 견제하려고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였다.

4.5.2. 5소경

5소경(五小京)은 신라 통일기의 행정 구역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9주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아울러 5개 고을에 소경을 두었다.

신라의 수도는 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확대된 영역을 통치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수도를 한때 지금의 대구로 옮기려 하였으나 그만두었다. 그 대신 수도 외에 대가야(大加耶)의 본거지와 백제·고구려의 옛 땅에 모두 다섯 개의 소경을 두었다. 금관경(金官京 : 김해)·남원경(南原京 : 남원)·서원경(西原京 : 청주)·중원경(中原京 : 충주)·북원경(北原京 : 원주)이 그것으로, 여기에 중앙 귀족의 자제나 호민(豪民) 그리고 여러 주군(州郡)의 민호(民戶)를 강제로 이주시켜서 지방 세력을 견제하게 하였다. 소경에는 사신(仕臣)이라는 장관이 있어 이를 다스렸다.

4.6. 중앙관제

신라의 정치 조직은 법흥왕 3년(516년) 병부(兵部)가 따로 설치되면서 분화·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동방 18년(531년) 최고위 관직인 대등(上大等)이 설치되고, 진평왕(眞平王)대에 이르러 조부(調部)·예부(禮部)·위화부(位和府) 등 7개 중앙관서와 내성(內省)이 갖추어졌다.

진덕여왕(眞德女王) 때 중앙의 최고기관으로 존속하던 ‘품주(稟主)’가 집사부(執事部)로 개편되면서 국가재정을 담당하는‘창부(倉部)’가 따로 분설되었다. 또 ‘이방부(理方府)’가 설치되어 사법과 율령을 맡았다. 위의 관서에는 일정한 관직·관계(官階) 및 정원이 있었다. 그러나 관서명과 관직명은 변동이 잦았다.

신라 중앙정치는 귀족들의 합의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과, 국왕 직속의 행정기관인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대립으로 대표된다. 귀족들의 세력이 강할 때는 귀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상대등이 강한 권력을 지녔고,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의 권력이 막강했다. 일반적으로 신라 초기에는 상대등, 중기에는 시중,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5. 문화



5.1. 문학



5.2. 미술, 건축, 종교



5.3. 과학



6. 평가

을 끌어들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까이는 경향이 있다.[20] 심지어 우리 역사에 나타난 모든 반민족적이고 반개혁적 세력의 근원을 신라에 두기도 한다. 대표적인게 천추태후.

단재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외세를 이용하여 동족을 쳐서 얻은 통일이고, 고구려의 대부분의 땅을 잃은 통일이라고 비판하며 사대주의적인 요소를 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갈린다. 하지만 당시 삼국이 자주 싸웠는데 동족의식을 느낄 계기가 있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고, 고대사에 지나치게 민족사관을 대입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움으로 남북국시대가 열리기는 했다. 그리고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세자였던 대광현을 비롯해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편입되었으니 진정한 통일은 고려가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영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고려고구려의 후계격 국가인 발해의 영토를 온전히 차지하지 못했으니 온전한 통일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시각도 있다.

배경이야 어찌되었건 신라의 삼국통일로 인해 각기 따로 가고 있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융합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통일신라의 융화정책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복왕조였던 고구려나 백제와 다르게 신라는 정복지역에 융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피정복민들을 천민으로 강등하지 않고 종래의 신분을 유지시켜 주면서 기존 신라 백성들과 차별없이 대했는데 이러한 융화정책을 통해 정복지역도 빠르게 융화시킬 수 있었다. 가야를 멸망시킨 후 왕족들으로 신라왕족인 진골로 편입했으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해당 지역의 귀족들을 천민이나 평민으로 강등하지 않고 5,6두품,진골 귀족으로 편입했다. 이는 작은 영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었던 신라가 강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가야계 진골 출신이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고, 백제, 고구려 멸망 후 해당 지역 유민들이 신라편에서 나당전쟁에 참여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정복지에 대한 유화정책과 연동하여 정복민들을 융통성있게 골품제로 포용했다는 점이다. 가야를 멸망시킨 후 왕족들으로 신라왕족인 진골로 편입했으며[21],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해당 지역의 귀족들을 천민이나 평민으로 강등하지 않고 5,6두품 귀족으로 편입했다. 또

신라의 신분제인 골품제도 지속적으로 까이고 있는 떡밥이지만,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도 신라의 골품제 못지 않은 폐쇠적인 신분제를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골품제는 알려진 것보다 제법 유동적이었는데, 골품제 안에서도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되거나 반대로 6두품에서 진골로 올라가는 등 신분이동이 생각만큼 드문 것은 아니었다.

그 외 676년 이후의 신라를 통일 신라로 불러야 할지, 대(大)신라로 불러야 할지, 후기 신라로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소지가 굉장히 많다.

그러한 배경이야 어쨌거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 세 나라의 문화를 빠르게 융합, 발전시켜 당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빛나는 문화를 꽃피웠다. 현대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정교한 각종 공예술과 불교미술이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낸다. 훗날 고려와 조선에 와서 꽃피는 한국의 미학은 신라 시대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해 등을 곁가지로 취급하는 외국 한국사학계에서는 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을 중심으로 한국사로 설명하는 편이다. 최근에 등장하는 미국 중고등생 교과서도 그런 식이다. 다만 황룡사탑 조성 등에서 나타나듯 백제와의 문화 교류는 통일 이전부터 존재했고,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 다수가 당으로 끌려가 버리고, 백제도 멸망 이후 다수의 유력 씨족들이 기술과 학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이주해버리는 바람에 통일로 인한 문화적 흡수가 통념적인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통일 이후 당과의 교류는 보다 활발해졌다.

신라는 국가 존속기간이 1000여년이나 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앞에서 말한 상대 중대 하대의 시기구분이 있어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근거, 이를 여섯 시기로 세분하기도 한다.

당시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으로 여겨져 신라라는 섬이 있다고 기록된 경우가 많았다. 주로 무역 중심지가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남쪽인데다, 육로는 고구려발해, 백제가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인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존속기간인 474년과 조선의 존속기간인 518년을 더하면 정확하게 992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의 전신인 신라의 존속기간이다.

또, 어떻게 보면 중국 삼국시대의 촉한과 이미지가 가장 비슷하다는 얘기가 있긴 하다. 가장 약소한 국력에 산맥으로 뒤 덮인 산맥 지형이었다는 점이 공통이라는 게 재미있는 점. 또한 국가의 멸망도 그럭저럭 비슷하다. 촉한은 위나라의 침입에 싸워야 한다는 아들 유심의 반대를 무시하고 나라를 위에 들어다 바친 유선,신라는 마의 태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경순왕 등.다만 신라와 촉한에 차이점이 있다면 신라는 열세한 국력을 강화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는 데 성공했고 촉한은 삼국 통일에 실패하여 유선 대에서 망한 게 차이다. 또한 사방팔방 육지로 막혀 바다 없는 내륙국이었던 촉과 달리 신라는 삼국시대 당시 동해,남해 방면으로 해안선이 존재하던 해안국이었다는 것도 차이. 어떤 이는 이웃 국가들을 상대로 영토 강탈,동맹파기,국가 멸망등 배신 행각을 했다는 이유로 신라를 촉한이 아닌 오나라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구태여 보면 백제가 지리적,정치적 성향으로 본다면 오에 더 가깝다. 삼국들중 군주의 권력이 약하고 지방 호족세력들의 힘이 강했다는 점에서 오나라는 백제와 비교해야 맞겠다.그럼 고구려는 위나라인가?

다만 위촉오의 국력이 6:2:1이었던 반면, 확실하진 않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렇게까지 불균등한 배분은 아니었다는 게 많이 다른 점이다. 구태여 보다 비슷한 정황을 들자면 후삼국 시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이땐 그야말로 삼국지와 똑같이 구도가 흘러갔다. 조위를 대체한 서진이 촉을 접수하고 오를 멸해 통일을 완수했듯, 태봉을 대체한 고려는 신라를 접수한 후 백제를 멸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게 시원한 결말이란 점에선 역사 매니아 입장에서 맘에 드는 전갠 아니겠다.

7. 신라의 인물들(시대순)

  • 신라의 역대 왕
  • 1세기
  • 2세기
  • 3세기
    • 석우로 ( ? ~ 249)
      석씨 왕족으로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다. 기록이 모호한 신라 초기의 몇 안되는 명장. 조분 이사금 시대에 대장군으로 주변 소국이나 고구려, 왜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음에도 계속 대장군 및 갈문왕의 신분만 유지하고 왕위는 계승 서열이 더 낮아보이는 첨해 이사금에게 돌아갔다. 이 시기에 왜 사신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바람에 왜와의 전쟁을 촉발시켰다. 전쟁에 책임을 지겠다며 적진으로 갔으나 화형당한다. 이 부분에 대해, 선왕의 핏줄이자 군권을 지고 있던 우로를 조분 이사금이 숙청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에 왜 사신이 찾아오자, 그의 부인이 사신을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가 전장에서는 명장이었을지는 몰라도 실언을 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물론 스스로 책임을 져 전쟁을 막기는 했지만. 아내 역시, 아내로서는 옳은 일을 한 셈이나 나라를 어렵게 만든 꼴이니 뭐라 평하기는 어렵다. 일본 서기에서는 이 시기에 신라왕을 태워죽인 것으로 나오는데, 정황상 갈문왕이었던 우로를 왕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아들은 이후 흘해 이사금이 된다.
  • 4세기
  • 5세기
  • 6세기
    • 이사부 ( ? ~ ? )
      장군. 태종이라고도 불린다. 512년에 울릉도를 정벌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게 가장 큰 공은 아니다. 백제와 일본군을 격파하여 531년에 금관가야(가락국)을 신라에 흡수시키고, 562년에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가야를 끝장낸 장군이다. 또한 국사편찬을 왕에게 건의해 칠부국사를 쓰게 한 인텔리적인 면모도 보인다.
    • 칠부
    • 사다함
    • 김무력 (517 ~ 579)
      장군. 본래 금관가야의 제12대 왕인 구형왕의 왕자였지만 금관가야가 신라에 흡수되는 통에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이후로는 신라의 장군으로 맹활약을 하며 이사부와 같이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는 백제 성왕을 잡은 것이 이 김무력의 부대였다. 《삼국사기진흥왕편에는 김무력의 부대가 먼저 기습한 성왕의 부대와 싸우다가 김무력의 부하인 고우도도가 성왕을 전사 시켰고, 성왕편의 기록에는 성왕이 기습당해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일본서기》에는 김무력의 부하인 사마노 고도가 성왕을 잡아서 목을 벤 다음 신라 왕궁 계단 밑에 묻었다고 되어 있다. 어느쪽이건 김무력이 성왕의 죽음에 공을 세운 것은 맞고, 김무력의 손자가 김유신인 것을 보면 이 가문은 그야말로 백제의 악몽.
    • 두미
    • 우도도
      김무력의 부하. 《일본서기》에는 사마노 고도라고 나온다. 《삼국사기》건 《일본서기》건 이름도 비슷하고 성왕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서술도 일관성이 있어서 동일인물로 확정. 다만 이름의 경우에는 고우(高于)를 관등인 고간(高干)으로 읽어 고간 도도라고도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우于와 간干의 차이가 끝의 획 하나 차이라 매우 애매할 뿐만 아니라 실제 판본의 글자를 보면 아무리 봐도 우에 가깝다.sg_c_004_0014&pEndPg=sg_a_004_0015|sg_c_004_0015&pLevel=5&pDatabaseID=sg_004r&pRecordID=sg_004r_0040_0220&pTitle=%ed%8c%90%eb%b3%b8%ec%a0%84%ec%b2%b4 4페이지 둘쨋줄 가운데 그리고 고간 도도로 해석하는 경우보다 고우도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본서기》와도 잘 맞는다. 다만 사마노라는 것이 문제인데, 사마노(飼馬奴)의 뜻을 통해 고도가 말을 부리는 노예라는 추측도 있지만, 사마노는 출신지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성왕이 먼저 기습한 것을 맞서 싸우다가 난전중에 죽였다는 기록도 있고, 성왕이 왕자를 방문하러 가던 것을 고도가 기습하여 사로잡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성왕이 50명 미만의 적은 병력을 대동한 것으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성왕이 기습을 당했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을 사로잡은 고도(고우도도)는 성왕에게 목을 베어도 되겠냐고 묻자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 수 없다"는 대답을 했는데, 이것과 사마노라는 표현 때문에 고도의 신분이 원래 종이 아니었냐는 의견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일국의 왕 입장에서는 계급이 낮은 장수는 천한 종이나 다름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란 식으로 해석된다. 결국 고도의 설득 끝에(...) 성왕은 목이 잘린다.
    • 김서현 (564 ~ ? )
      가야 계열의 진골 귀족. 가야가 신라에 흡수되자 아버지 김무력과 함께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김유신의 아버지이자 사랑의 도피를 벌인 일로 유명하다. 부인은 만명부인.
    • 만명부인
      성골 귀족. 김유신의 어머니이자 사랑의 도피를 벌인 일로 유명하다. 본인도 철없이 굴었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지 자식한테 좀 엄격했던 모양. 김유신한테 울면서 철 좀 들라고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 7세기
    • 천명공주 ( ? ~ ? )
      진평왕의 둘째 딸이자 선덕여왕 덕만의 동생. 남편은 김용춘. 아들은 김춘추.
    • 화공주 ( ? ~ ? )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비인 동시에 동설화의 히로인. 그러나 미륵사에서 발견된 기록 때문에 실존했다는 것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실존했다는 설에 의하면 무왕의 첫째 부인이다.
    • 김용춘 ( ? ~ ? )
      지휘는 이찬(2등관). 선덕여왕 시기의 인물. 일명 용수. 진지왕의 아들이고, 아내는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김춘추)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역사에서는 황룡사 9층 목탑 중건 등에 참여했다고 나온다.
    • 김유신 (595 ~ 673)
      장군. 신라 최고의 무장이자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삼국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관련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인물. 김춘추의 절친이자 처남이며 사위이기도 하다.(...)
    • 김춘추 (602 ~ 661)
      훗날의 태종 무열왕. 김용춘의 아들. 왕이 되기 전에는 진골 귀족이었다. 선덕여왕의 조카이기도 하다. 김유신의 절친이자 사돈이면서 매제(...) 딸 고타소가 죽은 사건이 김춘추의 인생과 삼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열왕의 일가 전체가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에 많은 공을 세웠다.
    • 문명왕후 ( ? ~ ? )
      김유신의 여동생. 이름은 김문희로 김춘추의 아내다. 시집가는 과정에서 상당히 요란법석을 떨었다. 문희의 딸은 김유신에게 시집간다.(...)
    • 품석 ( ? ~ 642)
      대야성주. 고타소의 남편이자 김춘추의 사위. 여자 버릇이 나뻤는지 부하였던 검일의 아내를 취했는데, 나중에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치자 검일은 신라에서 도망간 백제 인물 모척과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지른다. 이에 아찬 서천이 윤충에게 항복하였지만 윤충이 신라군을 다 죽이는 것을 보고 고타소 등 가족과 함께 자결한다.
    • 타소 ( ? ~ 642)
      김춘추와 보량 사이의 딸. 백제 장군 윤충에게 대야성이 함락당하자 김품석과 함께 자결하였다. 나중에 김유신이 648년 옥문곡전투에서 백제장군 과 싸워 대승하고 백제 장수 8인을 사로잡자 김춘추는 자신의 딸인 고타소와 김품석의 유골을 그 장수들과 교환하였다.
    • ( ? ~ ? )
      대야성주 김품석의 부하. 아내 문제로 김품석을 배신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붙잡혀 처형당했다.
    • ( ? ~ ? )
      원래 신라인이었으나 백제로 도망간 인물로 윤충의 부하가 되어 검일과 내통하였다.
    • 서천 ( ? ~ 642)
      아찬. 김품석의 보좌관이였으나 대야성 함락 때 윤충을 믿고 항복하고 성 밖으로 나갔다가 기습공격을 당해 죽고 말았다.
    • ( ? ~ ?)
      벼슬은 찬간(撰干). 죽죽의 아버지. 네이밍 센스가...
    • ( ? ~ 642)
      벼슬은 사지(舍知). 竹竹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소유자. 김품석의 보좌관이였으나 대야성 함락 당시 서천이 항복하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결국 서천이 부하들과 함께 죽는 것을 보고는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급찬 벼슬에 올랐으며, 그 가족은 경주로 이사와 살게 하였다.
    • 용석 ( ? ~ 642)
      벼슬은 사지(舍知). 죽죽과 함께 김품석의 보좌관이었다. 서천이 죽는 것을 보고 죽죽이 항전을 결심하자 그래도 항복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죽죽이 자신의 이름을 빗대 대나무는 겨울에도 부러질지언정 시들지 않는다며 항복을 거부하자 같이 싸워주었다.대야성 함락 당시 죽죽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사후에 대나마 벼슬에 올랐으며, 용석의 가족도 죽죽의 가족과 같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 자장 ( ? ~ ? )
      승려.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황룡사의 증축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 ( ? ~ ? )
      화가. 황룡사 벽에 사실적인 소나무를 그려 새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 원효 (617 ~ 686)
      승려. 유학가지 않고도 킹왕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입지전적인 인물.(...)
    • 품일 ( ? ~ ? )
      좌장군. 660년 백제의 계백과 싸우던 도중 아들 관창을 희생시킨 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664년에는 김인문·김문영 등과 함께 고구려 돌사성을 공격하고 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귀당총관에 임명되어으로 활약하였다. 670년에는 문충, 중신 등과 함께 63개 성을 쳐서 백제유민을 소탕하였다.
    • 관창 (645 ~ 660)
      유명한 화랑. 관창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 인문 (629 ~ 694)
      왕족. 외교관, 문무왕 시기의 장군. 김춘추의 둘째 아들. 신라의 당나라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백제 때문에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에도 당이랑 이런 저런 인연이 많다.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훗날 나당전쟁 시기에는 당 고종이 신라 왕으로 삼을려고까지 했었다. 결국 당에서 보국대장군상주국이란 지휘도 주었으며, 당에 건너가서 사망했다. 다만 당나라에 친화적인 인물이지 매국노 같은 것은 아니니 주의.
    • 의상(625년 ~ 702년)
      승려. 나라에 유학을 갔다 와서 화엄종을 들여왔다. 부석사 등의 을 창건했다.

  • 7세기 통일신라(676 이후)
  • 8세기
    • (金生 ; 711~791 )
      서예가.
  • 9세기
  • 1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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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히라가나
  • [2] "신라의 전성기엔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 《삼국유사진한조. 수도에만 모든 사람이 산 건 아니므로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추정.
  • [3] 대다수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적으로 유입
  • [4] 세계사 전체에서 찾아보아도 신라보다 오래 존속한 국가들은 그리 많지 않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쿠시 왕국, 1500년 이상씩 존재한 인도의 촐라 왕조과 체라 왕조과 판드야 왕조, 스리랑카의 1500년이상 살아남은 아누라드하부라 왕국과 포로나루와 왕국, 2~3천 년을 살아남은 베트남의 반랑국과 1300년을 지속한 카넴-보르누 제국과 와가두 제국, 오세아니아의 통가 제국 등을 꼽을 수 있다. 중간에 체제가 바뀐 것을 무시한다면 고대 이집트, 일본, 에티오피아, 로마 제국, 앗시리아 등의 국가가 있다.
  • [5] 이씨의 양산촌, 최씨의 고허촌, 정씨의 진지촌, 손씨의 대수촌, 배씨의 가리촌, 설씨의 고야촌
  • [6] 왠지 khan과 유사하다.
  • [7] 참고로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과 "실성 마립간"라고 나오지만 《삼국사기》에는 마립간 칭호는 눌지왕부터 생겼다면서 각각 내물이사금, 실성이사금으로 나온다.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쪽을 따랐다.
  • [8] 이는 백제와 감정의 골이 매우 깊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애초에 백제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은 모두 일본으로 도망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 [9] 삼국시대 고대 국가에서는 국왕이 동시에 장수의 역할을 했다. 대규모의 전투에서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끄는 것이 기본이었고, 때문에 삼국시대에 국왕이 전사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던 것이다.
  • [10] 이 당시 김유신은 집 앞을 지나칠 때도 집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래 사람을 시켜 집 안의 우물물만 마시고 바로 전쟁터로 떠났을 정도였다.
  • [11]삼국사기》열전 가운데 신라계 인물의 상당수가 이 무렵에 활약하는데, 또 그 중에 많은 부분이 자살에 가까운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 [12]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신라가 과거 고구려영토였던 죽령 이북을 반환하면 동맹을 맺겠다고 했으나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투옥했다.
  • [13] 사실 김춘추가 당나라에 간 것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당나라가 딴지를 걸었기 때문에 이 문제로 파견된 것이었다. 당태종과 의외로 죽이 잘맞아서 당태종이 사적으로 김춘추를 불러 얘기하기도 했는데 그참에 나당연합까지 채결됐던 것이다.
  • [14] 이것에 대해서는 왈가왈부가 많지만 주류역사계와 국정교과서의 내용을 존중한다.
  • [15] 불국사 등 신라의 뛰어난 공예, 건축 문화재들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 [16] 마수디의 기록 <황금초원과 보석광산>에 따르면 이라크 사람이 많이 정착했다고 출신국적까지 기록되어있다.
  • [17] 그러나 그마져도 유지했던 경주 이외에 영남권 지역의 상당수 영토들마져 고창 전투 이후 고려에 넘어가면서 사실상 경주 일대만 겨우 통치하는 내륙 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최소 점유하던 국토들을 타국에 의해 상실당한 국가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 [18] 애초에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고 세금도 못 걷어들이는 판국인데 후백제와 고려를 이길 리 만무했다. 최소한 쇠퇴기에도 이 지경은 아니였다.
  • [19] 단, 견훤이 진짜 왕비를 겁탈했냐에 대해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라는 책이 신라 정통주의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고려의 김부식이 지은터라 고려와 대립을 했었던 후백제의 견훤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씌웠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남은자가 승자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항상 염두해 두고 판단을 해야 할것이다. 자세한 것은 경애왕 항목 참조.
  • [20] 환빠들은 취향만 맞다면 신라도 빠는 작자들이므로 '모든 환빠는 신라까'라고 규정하는 건 틀린말이다. 당장 청나라의 황성인 애신각라(愛新覺羅)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라든가, 여진족 신라인설 등을 보면 환빠들이 신라라고 무조건 까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선술한 신라까는 환빠다 하는 주장 자체가 신라빠들이 이러이러 하면 환빠임! 그러니 신라 까면 안됨 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한 것에 가깝다.애꿎은 신채호 붙잡고 님들 지금 신채호가 틀렸다는 거임 하면서 실드 치는 환빠들이랑 다를게 뭐냐 뭐든지 너무 치우치지 말자
  • [21] 금관가야왕의 증손자였던 김유신도 신라 진골이었다.
  • [22] 노래는 관련된 게 있는 지 몰라도 동명의 영화는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