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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last modified: 2015-04-08 13:31:22 Contributors

辛旽/申旽. (1322년 ~ 1371)

고려 말기의 승려, 정치가.

이 인물에 대해서는 개혁자라는 평가와 요승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위해 등용한 인물로, 여러가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정책을 펴려 노력했다.

Contents

1. 개요
2. 사후
3. 여담

1. 개요

공민왕에게는 태후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그즈음 꾼 꿈에서 자객을 만났는데, 그 자객을 없애준 승려가 신돈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국대장공주가 죽고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그에게 전권을 맡기게 된다. 이때 그는 법명 편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

처음에 집권했을 때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
하지만 이후 기록을 보면 막장.(...) 사치와 향락, 무엇보다도 여자에 빠졌다.[1] 그리고 야사에 의하면 공민왕과 동성애 관계였다고 한다.[2]고려의 라스푸틴

또한 공민왕도 서서히 커져가던 그를 견제하였고,[3] 환속한 천출승려 출신에 무엇보다도 부패하고 탐욕하다는 이유로 신진사대부들도 그를 불신하여 결국 사면초가. 심지어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하여 쫓겨나게 되었으니, 사실상 자신 빼곤 모두가 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게, 신돈 본인은 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안 그러면 자신이 밀려나니까).

결국 신하들의 간언에 의해 역모죄로 수원에 귀양갔다가 처형되고 말았다. 국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을 진행시키다가 국왕의 총애를 잃고 숙청되었다는 점에서 조광조홍국영과 약간은 비슷한 필. 이 숙청은 공민왕의 뜻이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죄목은 반역죄였지만 자기 세력이 없는 신돈이 세력을 모으기도 전에 반역을 저지를 리가 만무하고, 투서가 한 신하에 의해 공민왕에게 전해진 것이 몰락의 신호탄이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심문 한 번 없이 처형됐다. 아무리 반역자라 해도 항변 한 번 들어보지 않고 처형하는 것은 무리수이다.

그러나 일련의 사태에는 본인의 잘못이 크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의 지도자로서는 너무도 많은 흠결과 약점을 보였다는 것이 정설. 무엇보다 왕의 총애로 권력을 얻은 이상 자신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인지하고 왕의 의중을 파악하고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잘못이 컸다. 스포츠로 따지면 선수감독을 무시하고 날뛴 격. 감독이 아무리 총애해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처음부터 이를 경계했는지 첫 만남 때 대뜸
"대왕께서는 참언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여 절대로 죄주지 않겠다는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리라"라는 맹세문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맹세가 흔히들 그렇듯, 다 쓸모없게 되었다.(...)[4]

신진사대부들에게도 엄청 까였지만 정작 자신은 "공자는 천하만세의 스승"이라고 말했으며, 고려 성균관도 부활시켰다. 신진사대부의 세력강화에도 크게 공헌한 셈. 하지만 불교 쪽으로도 상당한 정책을 내놓았던 것도 사실. 그러나 불교계에서도 어머니가 옥천사의 노비였기 때문에 단아였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니어서 이래저래 외롭게 된 인물.

자기가 아끼는 여종을 공민왕에게 바쳤고, 이 여종에게서 "모니노", 훗날의 우왕이 태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의미로 "신우", "신창"이라고 부르며 고려사 반역 열전에 집어 넣게 되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화를 위하여 계속 매도될 수 밖에 없었고, 일제시대마저도 신돈은 "의 상징" 쯤으로 취급되었다.(대표적인 예가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 여불위와 비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추측만으로 역사 기록을 무시하고 완벽하게 부정부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2. 사후


신돈이 죽고 나선 공민왕도 사치와 향략에 빠지고, 곧 시해된다. 사실상 고려 최후의 개혁시도였던 것. 신돈의 개혁은 좌절되었으나, 그가 지원한 신진사대부중 급진파 일원들은 조선을 건국하는 원동력이 된다.

3. 여담

직책이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5]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6]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7]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8]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9]"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길다.[10][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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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런데 사실 등용 될 때 환속했으므로 부패했다는 점에선 비판할 수 있어도, 승려라고 비판받을 수는 없다.
  • [2] 이러한 기록에서는 그가 애첩으로서 총애를 받은듯한 뉘앙스를 띈다.
  • [3] 이존오는 신돈의 만행을 보다못해 시조를 지었고, 이후 공민왕에게 간언을 했다가 쫓겨난 바 있다. 여기 참고.
  • [4] 참고로 홍국영도 역모죄를 제외한 모든 죄를 용서한다고 했으나(...)
  • [5] 관직 중 최고의 관직으로 본래 공석으로 남겨놓는 명예직
  • [6] 중방은 장군들의 모임인데 그것을 감찰하는 감시직을 총괄하는 판사
  • [7] 부원군은 왕족과 같이 대우하는 귀족에게 내리는 군호, 혹은 명망있는 지방세족이나 왕실과 혈연이 있는 귀족에게 내리는 군호
  • [8] 불교국가인 고려의 종교계 모든 일을 관장하는 자리라고 한다.
  • [9] 점이나 제사 같은 것을 주관하고 날씨등에 따라 농업 등을 관리하는 자리. 그 시절에 기상청+농수산부
  • [10]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셈이니. 부통령+국방부장관+문화부장관+농수산부장관+최고귀족
  • [11] 요즘으로 비교하면 "이런 이런 공적이 있으신, 우리 땅을 흥하게 하시는,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인 대귀족이시자, 문화부 장관 겸 이런이런 위원회의장이십니다~~" 길기는 길지만 요즘도 그에 비할 만도 한 것이 "한국IOC위원이자 대한축x협회 회장 겸 x대중공업 최대주주 겸 대한민국 국회의원" 같이 권위나 능력과시를 위해 늘어 뜨리다보면 만만치가 않다.
  • [12] 물론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은 공신명이니 빼면 좀 줄어들겠지만...그걸 감안해도 엄청나게 긴 벼슬이름. 당시 벼슬아치들이 웬만하면 말 걸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그래서 나중에 그의 편인 사람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위력 참고로 한국사에 등장하는 엄청 긴 이름으로는 견훤이 즉위 전에 사용한 이름과 최충헌의 관직명, 고종 황제 시호 등이 있겠다.